역사와야생화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함양 휴천면 목현리 진주강씨 사성재 思成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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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2021. 5. 29.

2021.5.9. 함양 휴천면 목현리 진주강씨 사성재思成齋

진주강씨晉州姜氏의 재실齋室 사성재思成齋는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271(목현옥매로 47-49)에 위치하며, 이곳은 해발 216m이고, 위도 35°29'01"N 경도 127°44'59"E이다. 

사성재思成齋는 진주강씨 박사공파博士公派 금재공琴齋公 이름이 한漢이신 분을 숭모崇慕하는 후손들이 2004년 4월에 개축해 준공한 재실로 금재공의 현손賢孫 개암공介庵公 이름 익翼도 함께 모시고 있다. 개암공介庵公은 남계서원灆溪書院을 사액을 받았다.

휴천면사무소가 있는 작은 산 너머에 있는 사성재思成齋는 마을과 동떨어진 위치에 있다. 사각의 돌담을 둘렀고 대문에는 숭의문崇義門이라 편액했다. 본당의 처마밑에는 사성재思成齋 편액을 걸었으며 4개의 기둥에는 주련을 달았다. 대청에는 옛 사성재기思成齋記는 없고 2004년에 건 사성재중건기思成齋重建記만 걸려 있다. 함양누정지에 옛 기문이 남아 있어 옮겨 둔다.

2021.5.9. 휴천면 목현리 진주강씨 박사공파 사성재思成齋 대문

 

숭의문崇義門 편액
2021.5.9. 휴천면 목현리 진주강씨 박사공파 사성재思成齋 본당
사성재思成齋 편액

思成齋記
思成齋者 琴齊介庵兩先生 墓前齋室也 墓在渭城治南十里 華丈山下木洞 負亥之麓距 先生舊居一舍 而近齋成於 三百年之後 後孫追遠之孝也 曰先生年十六名聞于 朝以白衣 爲接伴使 從事後監知禮高山兩縣 儒化大行 燕山時葉世 入頭流山 惟探頣聖賢經傳 及吏福起超 獨免鄭雖溪玉堅 權睡軒五福 鄭湖陰士龍 皆出其門 金慕齋起拜曰 公非安國之友 乃安國之師 梁九拙喜 狀公之德曰 過人欲而 存天理乃六經 而外百家本孝弟 而體敬義 此士林 所以腏享于 龜川者也 介庵以琴齊之孫 善繼善述 遠宗于一蠹 近法乎南冥 以盧玉溪吳德溪金東岡 諸大儒爲道義之交 而値戊申士禍之後 奮然以道學 爲己任使 旣絶之緖 煥然復明於世 有功於斯文大矣 而官止昭格署參奉位 雖不稱於先生 何損焉 鄭桐溪狀行曰 學之正守之因 執德之廣 任道之方 替之不足 而歎之曰 不德行道於當世 天奮之遂痛矣哉 以是觀之配于 藍溪廟食百世 不亦宣乎 然則思成齋之作 何子孫之心也 昔無而今有 何墓之歲一祭 今昔無異 而齋之設 追先生人未卒之志也 且龜院之中撤 由於邦禁 尤感慨而寓慕 於是齋取商頌 邦篇中思成二字 以名之云
上之十二年 乙亥八月白露日
資憲大夫前行刑曹判書兼
經日讀官知春秋館事
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
同知成均館事
陽川 許傳 記 
十二代孫 胤斗 謹書

사성재기
사성재思成齋는 금제琴齊 개암介庵 두 분 선생의 묘 앞에 있는 재실齋室이다. 묘는 위성渭城의 남쪽 10리 화장산華丈山 아래 나무골 해亥를 등으로 한 산기슭에 있으니 선생의 옛집과는 일사一舍의 가까운 거리로써 300년 뒤에 재실을 이루었으니 후손들의 추원追遠하는 효이다. 선생의 나이 16세에 조정에서 그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에 백의白衣로서 반사伴使를 접한 뒤에 지례知禮와 고산高山 두 고을의 현감을 역임하니 유화儒化하고 문학과 덕행이 빼어나니라. 연산조에 세상을 팽개치고 두류산頭流山에 들어와 오직 성현聖賢의 경전經傳과 사화의 기초를 찾아 수계雖溪 정옥견鄭玉堅,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 사용士龍 정호음鄭湖陰 등이다. 그의 문하에서 배워났으므로 김모재金慕齋가 일어나 절하고 말하되 공은 안국安國의 벗이 아니라 안국의 스승이라 하고 구졸九拙 양희梁喜께서 공의 덕을 장계하여 가로되 사람의 욕심을 과진過盡하여 천리를 보존하고 육경을 내독하여 백가서를 외용하며 효제를 근본하여 경의를 몸소 받으니 이는 사림으로써 구천龜川에 철향腏享함이니 개암介庵은 금제琴齊의 손자로써 선계하고 선술하사 멀리는 일두一蠹를 종宗을 하고 가까이는 남명南冥을 법도法道삼으사 노옥계盧玉溪 오덕계吳德溪 김동강金東岡 여러 대유大儒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하여 왔다. 무신사화戊申士禍가 난 뒤에 도학으로써 몸소 맡아 문득 이미 끊겨진 실마리라 환연하게 세상을 다시 밝혔으니 사문斯文에 그 공이 크도다. 관직은 소격서참봉昭格署參奉에 이르고 위계는 비록 선생이라 불칭하오나 어찌 손언損焉하리오. 동계桐溪 정선생은 학행의 정수正守하는 원인과 집덕執德의 넓은 임도任道의 방을 장계하기를 체替함에 족하지 않고 환하여 가로되 당세에 행도함을 얻지 못하고 하늘이 분奮하시니 통재통재라. 이로써 본다면 남계서원에 배향하여 묘식백세廟食百世함이 또한 마땅치 않으리오. 그러한 즉 사성재思成齋의 창건이 어찌 자손들만의 마음이리오. 옛날에는 없다가 이제는 있음이 어찌 어느 묘의 한 해의 제사이든 예나 이제가 다름 없으니 설재함은 이루어 선인의 졸치 아니한 뜻이니라. 또한 옛 서원의 중철中撤함은 나라의 금함을 연유함으로 더욱 감개하고 우모하나니 이에 재를 상송商頌하는 방편중의 사성思成 두자를 취하여 이름 하나니라.
상지 12년 을해 8월 백로일
자헌대부전행형조판서겸
경일독관지춘추관사
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양천 허전 짓고
12대손 윤두 삼가 쓰다.

 

사성재思成齋 주련
사성재중수기思成齋重建記

思成齋重建記
咸陽休川面木洞에 思成齋者는 琴齊公諱漢과 其孫介庵公諱翼兩先生을 위하여 百三十餘年前 朝鮮朝高宗九年 壬申(一八七二)에 創立한 聚族虔齋의 典堂이다. 晉州姜氏로 始祖는 高句麗兵馬都元帥諱以式將軍이요 譜系一世祖는 高麗國子博士諱啓庸이요 奉翊大夫寶文閣大提學通溪公諱淮仲이 七世祖요 九利派 넷째 軍威公諱利敬이 九世祖로 琴齊公의 先考가 되신다. 二子四孫이 斯世名儒碩德이나 次孫介庵公을 惟獨公과 同齋追慕케함은 琴齊公의 遺志를 善述善繼하고 大儒盧玉溪吳德溪金東岡等을 道義相交하여 士林의 總議를 따른 것이다. 琴齊公이 先考의 敵愾功臣南怡와 同契同寃으로 陵遲處斬되자 母夫人淑人居昌愼氏는 襁褓에 抱子咸陽으로 流遷하였다. 琴齊公이 穎悟하여 五六歲에 篤學力行으로 隣兒讀書에 傍聞其受하고 能成字樣하거늘 母夫人이 기특하게 여기나 先考의 處斬餘禍가 미칠가 두려워 戰戰兢兢하니 公이 答曰 아침에 道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餘恨이 없겠다 하거늘 스 뜻을 기이하게 받들여 專心學問토록 뒷바라지했다.
年纔十六에 鄕人上疏文에 秉筆하게 되었더니 上王의 感化 입게 되어 先考의 痛寃을 늦게나마 풀었다. 出天大孝라 士林界에서 龜川書院을 創立하여 後生의 訓育場으로 삼았으며 灆溪書院에 配享된 介庵公은 琴齊公의 賢孫으로 家統을 이었다. 壬午年春享宗會時에 先代墓齋亭重改修를 發議하여 推進委員회를 構成任員을 選出하고 軍威公墓域浮化와 追遠齋重建과 琴齊公兩位墓所莎草石儀와 聽琴亭改修며 本齋重建을 篤志賢族獻誠金과 派門中醵出金으로 甲申年(2004) 中에 竣工할 것을 決議하였다. 派宗會長兼推進委員長을 맡은 錫星賢宗을 爲始宗熙顯松錫善元錫諸賢이 不撤晝夜誠力을 기울여 이와같이 奐然히 重建하였으니 오늘의 添界에 자랑이 아닐 수 없다. 甲申年和春 追遠齋重建告由日에 同時落成式을 擧行하고 宗會長錫星族弟가 余에게 請文하거늘 굳이 辭讓하지 못하고 위와같이 記錄하노니 後孫等은 祖先의 遺志繼述을 잊어서는 아니될것이요. 衣履之藏에 薦享을 잊어서도 아니될 것이며 散在遠近을 莫論하고 親睦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니 銘刻할 것을 祈願한다. 名齋之義는 詩經(風賦比興雅頌六義) 三百篇中商頌耶篇에서 前略하고 湯孫秦假하시니 綏我思成이로다. 後略한다. 뜻인 즉 湯王의 後孫이 드리는 風樂소리로 우리가 마음으로 생각하는 祖上神을 편케하여 이를 이루게 한다는 것인바 殷나라 後孫들이 그들의 祖上神에 祭祀지내는 노래로 보면 된다. 
大韓甲申(2004)和春成均館典儀 
社團法人儒敎學街院副院長傍後孫東琡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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