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야생화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합천 삼가 외토리 남명의 수행처 뇌룡정 雷龍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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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2021. 7. 16.

2021.7.13.합천 삼가면 외토리 뇌룡정雷龍亭

합천 삼가면 외토리 46번지 위치했던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29호인 뇌룡정雷龍亭을 2013년에 양천강 정비 사업으로 지금의 외토리 618-1번지로 옮겨 지었다. 이때 문인송은 조경업자에게 팔았고 느티나무는 잘라버렸으며 서어나무는 그냥 두었으나 지금은 고사해서 버섯이 돋아있다. 
문화재의 관리가 이런 정도라면 경상남도의 문화재 담당은 역사 앞에 죄를 지은 것이다. 문화재란 그 장소에 위치해 있을 때 역사가 되는 것이지 옮겨버리면 그 가치가 없는 것이다. 또한 백여년이나 뇌룡정과 함께해 하나의 풍경이었던 나무들을 훼손해 없애는 것은 문화에대해 문외한門外漢이 하는 짓이다. 그런 짓을 합천군과 경상남도, 인천이씨들이 합작해 훼손한 것은 이씨들은 조상을 모독한 것이고 공무원은 무뇌無腦란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2021.7.13. 뇌룡정 정면 모습

남명南冥이 김해 산해정 생활을 마치고 48세 무렵 자신이 탄생한 외가집이 있는 외토리外吐里로 돌아와 61세까지 학문하고 제자를 가르쳤던 뇌룡사雷龍舍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됐고 뇌룡정雷龍亭은 용암서원龍巖書院을 지을 때 부속건물로 있었으나 용암서원이 훼철되자 허유, 정재규가 1885년 원래의 자리에 중건한 건물이다. 61세 이후로는 산청군 덕천서원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뇌룡雷龍’이란 뇌룡정雷龍亭에 대련對聯으로 걸려 있는데 장자莊子가 말한 『시거이용현尸居而龍見 연묵이뢰성淵黙而雷聲』에서 따온 글로 “죽음처럼 가만히 있다가도 때가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레처럼 소리친다”란 뜻이다. 

대문은 맞배지붕 와가로 좌우에 창고와 관리인의 휴식공간이 있고 편액은 없다. 본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치마 팔작지붕 목조와가의 형태이고 원기둥에는 대련이 있고 처마 밑에 뇌룡정雷龍亭이란 편액이 걸렸으며 대청 위에는 뇌룡정중건상량문雷龍亭重建上樑文과 뇌룡정우설雷龍亭遇雪, 뇌룡정중건기雷龍亭重建記가 걸려 있다.

 

뇌룡정 편액
뇌룡정 대련

죽음처럼 가만히 있다가도 때가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레처럼 소리친다

 

뇌룡정상량문 雷龍亭重建上樑文
뇌룡정우설雷龍亭遇雪

雷龍亭重建記
撑宇亘宙而不可墜者斯文也 故凡有功於此者 雖一鄕之善士 人皆慕其遺躅 而況一國之善士乎 若夫南冥曺先生 則其道德氣節璧立千仞風淸百世 而至有中朝星官之語 又非特爲一國之善士而已也 前人之述已備可驗 而尤翁所撰碑文 尤影著無容更贅 三嘉縣兎洞 乃先生嶽降之鄕 而有亭號雷龍者 卽其藏修之所也 不幸厄于燹 而爲墟士林痛惜 謀重建未遑 縣北舊有額院 而亦見撤於是乎 亭謀愈切 迺至乙酉 齊舊而鳩財建之構成 縱五架橫五間 覆以瓦又立廊 舍以護之每年以三九之望設位參謁立規會講 又設契置田以爲永遠之計 雖亭制之比舊增損有未可知 然惟其居然突兀於眼前 而儀形如昨溪山重新鳴呼盛哉 縣之碩儒 有許南黎愈 鄭艾山載圭蔚然嶠南之望也是役也 實尸之旣落也 又師之每會遠近來集彬彬可觀 時余適忝縣符與二人友善遂得與聞其役 役訖請余記之 余以不文辭 且曰記者文也 學者旣得依歸之地 則當視同常 侍仰鑽於斯 羹墻於斯 懋學一遵 敬義之規 蓄德常顧 雷龍之名 則斯其實矣 奚用文爲 旣歸請猶勤愈辭 而愈迫斷斷二十年于玆矣 辭終不獲 略綴顚末以塞之歲在乙巳日 在蜡  
後學 東陽 申斗善 謹識

뇌룡정중건기
우주宇宙를 지탱하여 무너질 수 없는 것이 사문斯文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릇이에 공功이 있는 이는 비록 한 고을의 선사善士라도 사람들이 모두 그 남긴 자취를 사모하거늘 하물며 한 나라의 선사善士에 있어서랴! 대저 남명 조선생은 그 도덕道德과 기절氣節¹⁾이 천길의 벽립璧立 같고 백세百世의 청풍風淸과 같아 중국 성관星官의 말이 있었으니 또한 단지 한 나라의 선사善士일 뿐만 아니다. 앞 사람의 찬술撰述이 이미 갖추어져 징험할 수 있고 우암尤庵²⁾이 지은 비문에 더욱 드러나 있으니 다시 덧붙일 것이 없다.
삼가현 토동은 곧 선생이 태어난 고향으로 뇌룡정雷龍亭이라는 정자가 있으니 곧 선생이 학문을 닦던 곳이다. 불행이도 난리에 재앙을 입어 빈터만 남게 되었으니 사림이 통석痛惜하여 중건을 도모하였으나 겨를이 없었다. 현縣의 북쪽에 예부터 사액서원賜額書院이 있었으나 또한 철폐되었으니 이에 정자를 중수하려는 계획이 더욱 간절하였다. 을유년乙酉年(1885)에 이르러 일제히 분발하여 재물을 모아 세로 오가五架, 가로 오간五間을 건립하여 기와를 얹고 또 사랑채를 지어 이를 수호케 하였다. 매년 3월과 9월 보름에 위패位牌를 모시어 배알하고 규약規約을 세워 강론講論하며 또 계契를 만들고 전답을 마련하여 길이 보전할 계획을 세웠다. 비록 정자의 규모는 옛것에 비하여 증감을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우뚝히 눈앞에 높이 솟아 그 모습이 어제와 같고 산천은 거듭 새롭게 되었으니 아! 훌륭하도다.
현縣의 큰선비인 남려南黎 허유許愈³⁾와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⁴⁾는 영남에서 명망이 높았는데 이 역사는 실로 이들이 주관하였다. 이미 낙성하고 또 스승으로 모시니 매양 원근의 선비들이 모여들어 매우 볼만 하였다. 당시 내 마침 외람되이 현감이 되어 두 사람과 더불어 잘 지냈으므로 드디어 그 역사에 참여하였다. 공사가 끝나자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하기에 내 불문不文으로 사양하고 또 말하기를 “기記라는 것은 문이다. 학자가 이미 귀의歸依할 곳을 얻었으면 마땅히 한결같이 모시면서 여기서 우러러고 여기서 추모하며 학문에 힘쓸 때는 오로지 경의敬義의 법도를 따르고 덕을 쌓을 때는 항상 뇌룡雷龍의 이름을 생각한다면 이것이 그 실질이니 어찌 문文으로써 하리오!”하였다. 
이미 임기를 마치고 돌아옴에 청이 오히려 간절하여 더욱 사양했으나 더 더욱 재촉함이 이에 한결 같이 20년이 되었다. 사양함을 끝내 얻지 못하고 대략 전말顚末을 엮어서 이에 응한다.
을사년(1905) 섣달(12월) 후학 동양 신두선申斗善 근지

【주석】
기절氣節¹⁾ : 강직한 기개와 절조
우암尤庵²⁾ :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조선 후기의 정통 성리학자로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 호는 우암. 주자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으며,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명을 존중하고 청을 경계하는 것이 국가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강상윤리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서 국가·사회 기강을 철저히 확립하고자 했다.
허유許愈³⁾ : 허유許愈(1833~1904))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퇴이退而, 호는 남려南黎 후산后山, 삼가현(三嘉縣) 오도리(吾道里)에서 출생했다. 조부는 허국리許國履, 아버지는 허정許정, 어머니는 해주 정산의鄭山毅의 딸이다.
그는 1866년(고종 3) 34세에 의령宜寧 미연서원嵋淵書院에서 성재性齋 허전許傳을 만났는데, 성재는 후산을 당대의 큰선비로 인정했다. 38세에 한주(寒州) 이진상(李震相)에게 집지하고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그와 교유한 인물들은 박치복(朴致馥), 김인섭(金麟燮), 정재규(鄭載圭), 곽종석(郭鍾錫), 한주의 아들인 이승희(李承熙), 하겸락(河兼洛), 이기상(李驥相), 조성가(趙性家) 등이며 하겸진(河兼鎭), 김성탁(金聖鐸), 김기주(金基周), 이정모(李正模), 이도추(李道樞), 김창숙(金昌淑) 등이 그의 후배이다. 
후산이 죽은 지 6년 뒤인 1910년에 목판 19권 10책의 『후산선생문집(后山先生文集)』으로 간행했고, 1964년에 문집에 들지 못했던 시문 원고를 정리하여 8권 2책의 『후산선생문집속집(后山先生文集續集)』을 활자본으로 간행했으며, 대표적인 저서인 「성학십도부록(聖學十圖附錄)」도 2권 1책으로 간행됐다.
정재규鄭載圭⁴⁾ : 정재규鄭載圭(1843~1911)의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영오英五·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애산艾山. 정방훈鄭邦勳의 아들이다. 1864년(고종 1) 경상도 합천에서 전라남도 장성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입하였는데, 이러한 생활은 1879년에 스승이 죽기까지 15년간 계속되었다.
학문적으로는 1903년「납량사의기의변納凉私議記疑辨」·「외필변변猥筆辨辨」 등을 지어 전우田愚의 기정진에 대한 반박을 변론하여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제자로는 정면규鄭冕)·권운환權雲煥 등이 있으며, 합천경덕사景德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 『노백헌집老柏軒集』 49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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