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야생화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의령읍 무전리 진주강씨 화산재 華山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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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2021. 7. 27.

2021.7.26. 의령읍 무전리 무중마을의 진주강씨 재실 화산재華山齋 대문

화산재華山齋는 진주강씨 박사공파博士公派 1세조 계용啓庸의 후손 9세 청풍군수를 지낸 혜徯를 비롯해 10세 효정孝貞, 11세 세응世應, 12세 우瑀, 13세 복휴復休, 14세 언룡彦龍과 그 후손들을 제사祭祀하는 재실齋室이다. 의령군 의령읍 무전리 533-5(무전로4길 2-1)에 위치하며, 고도계 표시는 해발 86m이고 위도 35°19'49"N 경도 128°16'24"E 이다.

 

2021.7.26. 의령읍  화산재華山齋 입구
기부인명단寄附人名單

화산재華山齋는 넓은 마당에 밭 작물을 심었으며 입구의 대문에 화산재華山齋 편액은 있으나 본 건물에는 편액이나 옥호가 없다. 내부는 하나의 공간으로 했고 제기祭器를 두는 곳만 분리를 했으며 기부인명단寄附人名單만 편액의 형태로 붙여 두었다. 

 

아래에는 의령문화원에서 발행한 의령누정지 속에 화산재기華山齋記가 있어 소개를 한다.

華山齋記
余嘗過宜春之鼎巖江上肅然心敬于 郭忠翼公之龍蛇大勳業繼 而酒然神往于 七旌閭十八將之高行卓蹟 今年春宜春士友 姜泰熙姜斗錫來請記 其族先祖 齋宿之所 日公故左承旨 參十八將草亭先生 彦龍之子世 蒙七旌之二忠三孝二㤠者 爲直旁近親也 少有倜黨大志及當壬辰亂 陪父公赴火旺山城 奮義壞賊累奏偉功亂靖拝 訓鍊院奉事來 而葬其祖考僉正公墓下 至今子姓之戶 以數百計嘗恨無 寓慕之所 自往歲始合謀營建一舍于 封邱之下 以今初夏 將落之因地名 扁其楣曰 華山齋 欲得子文 以掲之余辭不獲 而書其所感于 心者曰 事有今日作之 而明日毁之者 是作之者之過也 惟明於理者 必作之謹 而使守之久遠 余見今人之爲父祖者 率皆無所 事於紹述之講 處齋之誠 而惟崇棟 疊架突兀 相望於嵁 阿叢趨之間 爲耳目之耀 門閭之侈 嗚呼 是盖吾邦近古 以來尙虛 文遠實務之所由弊也 新進後生之 有趨向之異者 相與譁然攻之日 是家國淪喪之所自招也 其終至有父作之 於今日 而子毁之 於明日者 必然之勢也 於此宜思所 以痛懲而力返之告 聞姜氏諸公皆質 而不文從事于 大樸眞實之地 是齊之創 亶出於愛敬 其所自生之純忱 而超所謂耳目 門閭之侈耀因 此而勉勉孜孜 於紹述處齊之事 導子弟而忠孝友睦之實 而使先祖 而謨永有光千來後則 吾知姜氏之昌權與於 此是齊之可 期而無窮守也 齋之經費 總若千萬金 而其大數 出於甲錫太錫浩烈信石可特書 以勤來後哉
己酉晩春 盆城許洞記

화산재기
내가 일찍이 의춘宜春의 정암강鼎巖江 위를 지날제 숙연한 마음으로 곽충익공郭忠翼公의 임진왜란의 대훈업大勳業을 공경하였고, 이어서 놀랍게도 내 정신이 칠정려七旌閭 십팔장十八將의 높은 행적과 뛰어난 발자취에 가 있었다.
금년 봄에 의령의 사우士友 강태희姜泰熙, 강두석姜斗錫 두명이 와서 그의 족선조族先祖 봉사공奉事公의 재숙齋宿하는 곳을 기록해 주기를 청하며 가로되, 공公은 옛날 좌승지左承旨로 십팔장十八將에 참여한 초정선생草亭先生 이름은 언롱彦龍의 아들이다. 칠정七旌에 두 충신과 세 효자와 두 열녀를 임금으로부터 기리는 려를 받은 자는 직계로 방계傍系로 가까운 친족이다.
공公은 젊을 때부터 뛰어난 큰 뜻이 있었는데 임진난壬辰亂을 당함에 있어서는 아버지를 모시고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달려가서 의義를 일으켜 적을 물리쳐 여러번 위대한 공을 아뢰었다. 난리가 평정함에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의 벼슬을 받고 죽으니 그의 조부 첨정공僉正公 묘 밑에다 장사하였다. 
자금 자손의 호수가 수백으로 헤아리는데 일찍이 우모寓慕할 곳이 없음을 한탄하여 지난해로부터 비로소 묘 밑에다 집 한 채를 세우기로 합의하여 금년초 여름에 낙성을 가질 때 지명으로 인해서 그 인중방에 현판하여 가로되 화산재華山齋라 하고 자네 글을 얻어서 걸고자 한다 하였다. 내가 사양하여도 얻지 못하고서 마음에 느꼈던 바를 써서 가로되 일이란 오늘에 지음이 있어도 내일에 헐어지는 것은 지은이의 과실이라 오직 이치에 밝은 이는 반드시 지음을 삼가며, 해서 지킴도 오래가도록 하니 내가 요즘 사람의 조상 위하는 자를 보니 거의 모두가 이어 기술하는 강론과 재실에서 처하는 정성이 없으면서 오직 기둥을 높이고 칸수를 겹치고 우뚝 높여서 천지와 산야의 사이에서 서로 바라보게 함을 일삼아서 이목耳目의 빛남과 문호門戶의 사치만 위하니 슬프도다. 이는 대개 우리나라가 근고近古 이래以來로 헛된 문채만 숭상하고 실무를 멀리 한 까닭의 폐단이다. 신진新進하는 후생 중에 추향을 달리하는 자는 서로 더불어 떠들며 공격하는 날이 있으리라. 이는 집이나 나라가 빠져 없어짐을 자초하는 바이니 마침내는 애비가 오늘에 지음이 있으면 자식은 내일에 헐어버리는 것을 필연의 형세라 여기에서 마땅히 아프게 징계하는 까닭임을 생각해서 힘써 돌이킬지어다.
물어 들으니 강씨 제공諸公은 모두 질박하였지 문채하지는 아니하여 대박大樸하고 진실眞實되는 땅에만 종사從事하니 이 재실의 시작도 다만 사랑과 공경에서 나왔지만 그 나온 바가 순수하여서 이른바 이목문호耳目門戶의 사치와 빛남을 초월한지라 이로 인해서 힘쓰고 부지런히 하여 이어 기술하고 공손히 다스리는 일이나 자제子弟를 인도하면서 충효우목忠孝友睦을 참되게 하신 선조의 끼친 슬기로 하여금 길이 내후來後에게 빛이 있게 한즉 나는 강씨의 번창이 여기에서 시작되어서 이 재실도 가히 무궁토록 지켜짐이 기약될 것을 알겠도다. 재실의 경비는 총액이 약 천만원인데 대다수가 갑석甲錫, 태석太碩, 호열浩烈, 신석信石에게서 나왔으니 특히 써서 내후來後에게 권하는 것인지라.
기유(1969)년 늦은 가을에 분성 허동許洞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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