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야생화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진주 미천면 벌당리 진주강씨 영사재 永思齋

댓글 0

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2021. 8. 5.

2021.7.10. 진주 미천면 벌당리 진주강씨 영사재永思齋 대문

진주시 하촌동 115-1에 위치한 열부통덕랑강운처공인인천이씨지려烈婦通德郎姜沄妻恭人仁川李氏之閭가 있는 여각閭閣을 뒤로하고 미천면 벌당리伐塘里로 갔다. 처음 도착한 곳이 진주강씨 재실인 영사재永思齋와 월산재月山齋가 함께 있는 진주시 미천면 벌당리 47-7(오방로 298-1)이다. 이곳을 위치기반고도계는 해발 34m, 위도 35°16'21"N 경도 128°07'51"E를 가리킨다.

영사재永思齋는 은열공殷烈公 판서공파判書公派로 대곡면 설매리와 그 맥을 같이하며 진천군파晉川君派와는 9세조世祖에서 파조派祖가 시작된다. 8세 순珣은 아들이 4명으로 조祚, 호례好禮, 적𥛚, 우佑이다. 판서공파判書公派는 맏이 조祚로 이어져 16세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낸 보충輔忠으로부터 판서공파를 이룬다, 진천군파晉川君派는 3째 적𥛚에서 이어진 자손들로 11세 고려태상경좌윤高麗太常卿左尹을 지내고 晉川君判開城府事인 위상渭祥이 파조이다. 

 

2021.7.10. 벌당리 진주강씨 영사재永思齋 대문 편액 유칙문維則門

영사재永思齋 대문에는 유칙문維則門이라 편액했고 본당의 5개 기둥에는 주련을 달았으며 처마밑에는 영사재永思齋라 이름했다. 아마도 시경에 나오는 ‘효사유칙孝思維則’ 즉 ‘효도할 생각을 법칙으로 보존한다’는 글귀를 인용한 듯하다. 내부는 샤시문이 잠겨있어 볼 수 없었다. 아래 영사재기永思齋記는 진주문화원에서 편찬한 진주누정지晉州樓亭誌에서 옮긴 것이다.

 

영사재永思齋 본당

永思齋記
晋陽北 正星里 懸月山 故姜司果 宇榮之慕在焉 齋於其下 而扁以永思 取詩永言孝思之義也 司果生長遐陬 蚤懷材器 纔一擧而自知不售於世 旋返田廬 躳耕稼以洪事育有餘 歸以施之賙窮 卽遺族戚多賴之者 旣歿而遺謨傳子 家其子五人 幷能樹門戶長 子孫儼然成里落 人謂積善之餘五子後昆 相與思慕之下哀 而謀所以表章者 齋之窴爲是也 齋凡五楹四架 左右室而堂其中 直而爲門 則而爲廚庫 出入起處 齋宿聚集 莫不具 宜始役於戊子之冬 翌年己丑十月功訖 卜日爲期 招邀鄕隣士友 燕飮以落之 於是乎見聞所及 咸知有司果之名而中歎 其後人之誠 爲可尙也 使其因是以永其思 推下世世 而不忘維則 則詩人之志 殆將庶幾 而是齋也 不亦永有辭於來後乎哉 盍更加勉諸 齋之營 始自司果長子敬鉉與其諸弟 熟算而未及就 今其發 皆而董成者 二房孫聖柳最賢 謁文以記事者 敬鉉之孫相玉屢訪余 益懇辭不能云
是歲漢臘 義城 金佑林 記

영사재기
진양의 북쪽 정성리正星里의 현월산懸月山에 옛날 사과司果 벼슬을 한 강우영姜宇榮의 무덤이 있는데 그 아래에 있는 재실 이름을 영사永思라 한 것은 시전詩傳에 “길이 효도로운 생각을 하라”는 뜻이다. 사과司果가 먼 시골에서 나서 자랐기 때문에 일찍 한가지 재주를 지녔어도 세상에 팔고 다니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밭이 있는 움막으로 돌아와서 몸소 농사도 짓고 가축도 길러서 여유 있게 살면서 두루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니 친척의 유족들이나 먼 사람들까지도 힘입은 사람이 많았다. 이미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그의 행실을 자식들에게 전하여 그집 아들 다섯 사람이 모두 한집의 장長이 되어 엄연하게 마을을 이루어 사람들이 이르기를 적선積善의 여덕이라고 했다. 다섯 아들의 후손들이 서로 무덤 아래에 표장表章을 하려 하니 이에 재실齋室을 두게 된 것이었다.
재실은 무릇 기둥이 다섯 개에 4칸인데 좌우로는 방을 두고 그 가운데에 마루를 놓으니 바른쪽 문이요 문 곁에는 부엌과 창고로 하고 솟인 곳을 출입하게 하니 재계하여 자거나 모이거나 하는 데에 갖추지 못함이 없었다. 
무자년戊子年 겨울에 처음 시작하여 다음 해 시월에 공사를 마치고 날을 받아서 고을의 선비들과 벗들을 모아 낙성洛城을 하니 이에 보고 듣고 하여 미치는 곳에 강사과姜司果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 뒷사람들의 성의誠意와 힘이 가히 숭상할만 하다. 그로 인하여 길이 아래 세대世代에 생각하게 되어 잊어버리지 않게 되었고 시인詩人의 뜻이 거의 이루어졌다고 보며 이 재실을 두고 멀리 뒷날에도 말할 것이 아닌가. 어찌 더욱 힘쓰지 않으리오. 재실의 시작이 사과司果의 장자長子와 그 모든 아우들까지 이방손二房孫 성유聖柳가 가장 훌륭했었고 글을 받는데 이 사실을 기록하도록 한 사람은 경현敬鉉의 손자 상옥相玉으로 여러번 나에게 간절히 말하기에 능히 사양치 못하였노라.
이해 한랍漢臘¹⁾ 의성 김우림金佑林²⁾ 기록하다.

【주석】
한랍漢臘¹⁾ : 한漢나라 때 음력 12월에 지내던 제사 이름이다. 하夏나라 때는 ‘가평嘉平’이라 했고, 은殷나라 때는 ‘청사淸祀’라 했으며, 주나라 때는 ‘대랍大蠟’이라 했고, 한나라 때는 ‘랍臘’이라 했다. 여기서는 음력 12월을 지칭한다.
김우림金佑林²⁾ : 김우림(金佑林)은 김황(金榥)의 다른 이름이다.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자는 이회(而晦), 호는 중재(重齋). 명신 김우옹(金宇顒)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도산서원(陶山書院) 원장을 지낸 김극영(金克永)이며,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로 심구택(沈龜澤)의 딸이다. 
1909년(순종 3)의령 남씨(宜寧南氏)와 결혼하였고,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아버지를 따라 경상남도 산청의 황매산(黃梅山) 서쪽 만암(晩巖)이라는 깊은 산골로 이사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당시 한주학파(寒洲學派)의 주리학(主理學)을 대표하던 곽종석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더욱 문명을 떨치게 되었고, 그 학통을 계승하였다.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이다.
1978년 12월 세상을 떠나자 많은 조객이 운집하여 유월장(踰月葬)으로 장사지냈다. 1995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영사재永思齋 본당의 다른 각도 사진


출처 
진주누정지-진주문화원/동아인쇄출판사(1995.12.30.)

 

영사재永思齋 편액
영사재永思齋 주련

사업자 정보 표시
| | | 사업자 등록번호 : -- | TEL : --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