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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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쌍책면 성산리 진주강씨 회산정 晦山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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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경남의 진주강씨 누정재

2021. 9. 7.

2021.8.20. 합천 쌍책면 성산리 진주강씨 회산정晦山亭과 옥봉정사玉奉精舍

회산정晦山亭은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559(성산큰길 66-3)내촌마을에 있는데 함께 있는 옥봉정사玉奉精舍를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 마을 앞에는 황강이 절벽 아래 흐르고 마을 뒤쪽에는 평야처럼 너른 들판이 형성되어 꽤 살기 좋은 마을이다. 이곳을 고도계는 높이 29m, 위도 35°34'36"N 경도 128°16'54"E를 가리킨다.

 

2021.8.20. 회산정晦山亭 대문


회산정晦山亭이 있는 이 마을은 은열공殷烈公 민첨民瞻의 28세손 강돈姜潡이 영산靈山 명리에서 쌍책면 성산으로 이거移居 한 분이다. 은열공殷烈公의 11세손인 위상공渭祥公이 진천군파晉川君派를 이루는 중시조로 아들은 인선仁先이고, 손자는 은열공 13세 거호居好인데 은열공 14세에서 필자의 선조와 나뉘어졌다. 강돈姜潡의 아버지는 달흠達欽이고, 할아버지는 노손老遜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운묵雲黙이며, 고조할아버지는 은열공 24세손인 망호望浩이다. 창녕 계성면 명리에는 강돈姜潡의 9대조이며 은열공의 16세손인 강성姜性을 모시는 이유재履有齋가 있다.

 

명내문明內門 편액

 

강돈姜潡의 자는 경백景伯, 호는 회산晦山이며 철종哲宗 병진丙辰(1856) 생으로 기축己丑(1889)년 5월 9일에 돌아가셨다. 6남 4녀를 두었는데 석훈錫勳, 석춘錫春, 석옥錫玉, 석태錫泰, 석필錫弼, 석간錫諫이다. 석필錫弼은 노당魯堂 상필相弼(1905~1986)로 알려져 있으며, 쌍책면 성산에 옥봉정사玉奉精舍을 지었다.

 

2021.8.20. 회산정晦山亭 모습


회산정晦山亭 입구는 옥봉정사玉奉精舍 대문을 지나는데 대문에는 편액이 없고 마당 우측의 높다란 계단 위에 회산정晦山亭의 출입문인 명내문明內門 본당은 회산정晦山亭이라 편액 했으며 기둥에는 주련을 걸었고 정亭의 중앙에는 방을 두었지만 마루의 연장이고 좌우에는 마루로 이루어졌다. 우측의 마루에는 상검요尙儉寮 편액과 노근용이 지은 회산정상량문晦山亭上樑文이 걸렸고, 좌측 마루의 정면에는 장서각藏書閣이 있고  김황과 권용현이 지은 회산정기晦山亭記 2기가 걸려 있으며 방 앞에는 저존실著存室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회산정晦山亭 편액
회산정晦山亭 주련

주련
立天之道曰陰與陽 하늘이 도를 세우면 음과 양이고
立地之道曰柔與剛 땅이 도를 세우면 부드러움과 굳셈이며
立人之道曰仁與義 사람이 도를 세우면 어질고 의로움이다.
愼終追遠民德歸厚 먼 조상들을 정성껏 제사 지내면 백성들의 덕성이 후하게 돌아올 것이다.

 

상검요尙儉寮 편액


晦山亭上樑文
易稱善家有慶 前人垂蔭德之休 書云厥子肯堂 後裔成輪奐之美 泉石居然一日 江山不換三公 於惟處士姜公諱潡 殷烈遠孫 晉陽古閥 早歲失恃 築石臺而寓哀慕之懷 稍長事嚴 託耕樵而優甘旨之養 事足徵於宗族知舊之許 有賦有詩 人不間於父母昆弟之言 是孝是友 自鷲城而搬從 卜八溪而定居 六子趨庭 可比郞陵之星聚 羣孫列侍 奚羨汾陽之飴含 樂善好仁 已有天資之美 輕財重義 剩得地望之宗 薄己厚人 昭昭於立碑頌德 愼終追遠 汲汲乎建齋置田 棄子姓於衛武之年 藏衣舃於周峯之麓 寓羹墻於楸壠 縱闕甄君之亭 記菟裘於城山 宜有顔巷之榭 鳩財畜穀 已積烏兔之多 拓地開基 不待蓍龜之決 迨靑龍而始役 得螽羽之合誠 屋子之不日成 已辨伐木巨費 役于之如雲集 盡是待火餘人 制止三間 便合不儉不侈 軒通四面 允宜爰處爰居 表當日之遯肥 用晦山而揭額 字晦而祝屛山之辭精深 用晦而明羲經之言切至 揚休山立 程公之氣像何如 水長山高 嚴子之風韻可襲 旣竣土木之事 盖思繼述之謀 怵露悽雪 奉香火而致慤 養鷄種黍迎賓友而盡歡 貯一經於室中 敎子弟而敦問學 置千畝於郊外 與功緦而同飽飢 庸助雙欐之升 玆陳三斯之頌
梁之東 蘇山朝旭照窓紅 吾聞此老平生事 早起惺惺喚主翁
梁之南 黃芚江水碧如藍 釣磯猶有灘頭石 應戒羣魚餌忽貧
梁之西 丹鳳山高近入睇 不識椘狂何似者 歌過尼聖歎兮兮
梁之北 玉田日夜呈佳色 送兒磋琢碩儒門 人說蔡家之仲黙
梁之上 浮雲過鳥閒來往 翁之事業有如斯 長使後人多景仰
梁之下 老松脩竹繞村社 歲時伏臘宴斯堂 誰是其中導率者
伏願上粱之後 灾孼日退福祥時臻 榱桷長存 神扶而鬼護 雲仍多出 鵠峙而鸞停  里講白鹿之規 曰明誠其兩進 士有靑年之駕 談道德而畱連
光州 盧根容 撰

회산정상량문
『주역』에 “선을 쌓은 집에 경사가 있다.”고 하니 전인이 음덕蔭德의 아름다움을 드리우고, 『서경』에 “아들이 부친을 이어 집을 짓는다.”고 하니 후예가 크고도 빛나는 정자를 이루었네.
천석泉石이 문득 하루에 이루어지니, 강산江山을 삼공三公과 바꾸지 않네.

아! 처사 강돈姜潡 공은 은열殷烈의 먼 후손이고, 진양晉陽의 오랜 문벌일세.
어린 나이에 모친상을 당하여 석대石臺를 쌓아서 슬퍼하고 사모하는 심회를 깃들이고, 제법 자라서는 부친을 섬겨 농사짓고 나무하는 일을 하며 음식으로 봉양함이 넉넉했네.
사적은 종족과 벗들이 인정한 말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부賦와 시詩가 있고, 남들이 부모 형제가 칭찬하는 말에 의심하지 않았으니 효성과 우애였네.
취성鷲城으로부터 집을 옮겨, 팔계八溪를 택하여 거주했네.
여섯 아들이 뜰 안에 달리니 낭릉郞陵의 집에 별이 모여든 상서로움¹⁾에 비길 수 있고, 여러 손자들이 늘어서서 모시니 어찌 분양汾陽이 자손 많음을 즐거워한 것이 부러우랴?
선을 즐거워하고 인을 좋아하니 이미 아름다운 바탕이 있었고,
재물을 경시하고 의리를 중시하니 넉넉히 높은 명망을 얻었네.
자신에게 박하고 남에게는 후하니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한 일에서 분명하고,
장례에 신중하고 제사에 정성스러우니 재실을 짓고 제전을 갖추기에 힘썼네.
위무衛武의 연세에 자손을 버리고,
주봉周峯의 산기슭에 유해를 눕혔네.
선영에 갱장羹墻²⁾을 깃들임이 비록 진군甄君³⁾의 정자 없지만,
선산에 토구菟裘를 정하니 마땅히 안항顔巷⁴⁾의 정자 있네.
재물 모으고 곡식 쌓으니 이미 오토烏兔⁵⁾의 많음을 축적하고, 땅 열고 터 파니 시초와 거북 점으로 결정하기를 기다리지 않네. 청룡靑龍⁶⁾에 이르러 일을 시작하니 종우螽羽⁷⁾가 정성을 합함을 얻었네.
집이 빠른 시일에 이루어지니 이미 목재를 베는 큰 비용을 마련하였고, 일꾼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니 모두 양식을 얻었던 나머지 사람들이었네. 규모는 세 칸에 그치니 문득 초라하지도 사치하지도 않은 데 합치하고, 마루는 사방으로 통하니 참으로 여기에 처하고 여기에 살기에 마땅하네.
당일의 비돈肥遯⁸⁾을 표시하여 회산晦山으로써 편액을 걸었네.
회晦로써 축원하니 병산屛山⁹⁾의 말이 정밀하고 깊으며,
회晦로써 밝히니 희경羲經¹⁰⁾의 말이 절실하고 지극하네.
양휴산립揚休山立¹¹⁾은 정공程公¹²⁾의 기상과 어떠한가?
수장산고水長山高는 엄자嚴子¹²⁾의 풍운을 이을 만하네.
이미 토목 공사를 마치고 났으니, 어찌 이을 방도를 생각지 않으랴?
이슬 적실 때 두려워하고 서리 내릴 때 슬퍼하여 제사를 모셔 정성을 다하고,닭을 기르고 기장을 심어서 빈객과 벗을 맞이하여 서로 즐거운 정을 다하네.
방 가운데 한 가지 경서經書를 쌓아 자제를 가르쳐 묻고 배우는 일을 돈독하게 하고, 들 밖에 천묘千畝의 농토를 갖추어 공시功緦¹³⁾와 더불어 배부르고 주림을 함께 하네.
들보를 올리기를 도우려 하여 삼사三斯¹⁴⁾의 노래를 베푸네.

들보를 동쪽으로 하니, 소산蘇山의 아침 해 창에 비쳐 붉구나.
이 어른 평소의 일을 내 들어보니, 일찍 일어나 정신을 일깨웠다네.

들보를 남쪽으로 하니, 황둔강黃芚江 물 푸르기가 쪽빛같네.
낚시터에 오히려 여울 머리의 돌 있으니, 응당 여러 고기들 미끼 탐하는 것을 경계하네.

들보를 서쪽으로 하니, 단봉산丹鳳山 높은 모습 가까이 눈에 들어오네. 알지 못하겠네 
초광楚狂¹⁵⁾은 어떤 사람인지, 공자 앞에 노래하고 지나며 혜혜兮兮¹⁶⁾라고 탄식했네.

들보를 북쪽으로 하니, 옥전이 밤낮으로 아름다운 색을 드러내네.
아들을 석유碩儒의 문하에 보내어 절차탁마하게 하니, 사람들 말하기를 채가蔡家의 중묵仲黙¹⁷⁾이라 하네.

들보를 위로 하니, 뜬 구름과 지나는 새가 한가로이 오고 가네.
이 어른 사업이 이와 같으니, 길이 후인에게 공경하여 우러르게 하네.

들보를 아래로 하니, 늙은 솔과 긴 대가 촌사村社를 둘렀네.
세시 절서를 따라 이 정자에서 연회를 여니, 누가 그 가운데 인도하고 거느릴 사람이랴?

삼가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후에 재앙과 불길함은 날로 물러나고
복록과 상서로움은 때로 이르며, 서까래는 길이 보존되어 신귀神鬼가 부호扶護하고, 후손들 많이 배출되어 난곡鸞鵠이 정치停峙하며, 마을에는 백록동규白鹿洞規¹⁸⁾를 논하여 명성明誠¹⁹⁾이 둘 다 진보하고. 선비는 청우靑牛²⁰⁾를 타고 찾아옴이 있어 도덕을 담론하며 머물게 하소서.

광주光州 노근용盧根容²¹⁾(1884~1965)은 상량문을 찬술하다.

【주석】
낭릉郞陵의 ~ 상서로움¹⁾ : 낭릉은 후한 때의 순숙荀淑을 말하는데 여듧 아들이 모두 재명才名이 있어 당시의 사람들이 ‘순씨팔용荀氏八龍’이라고 불렀다. 당시에 진식陳寔이 여러 자질들을 데리고 순숙의 집을 찾아 갔는데 이 때에 하늘에 덕성德星이 모이니 태사가 아뢰기를 ‘오백리의 현인들이 모였다’고 하였다.
갱장羹墻²⁾ : 국과 담. 우러르고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옛날 요堯 임금이 죽은 후에 순舜 임금이 3년 동안 우러르고 사모하여 앉았을 때는 담장에서, 밥을 먹을 때는 국그릇에서 요 임금을 보았다고 한다. 『後漢書, 李固傳』
진군甄君³⁾ : 송나라 서주徐州 사람으로 부모의 장례를 지낸 뒤 그 곁에 사정思亭이라는 집을 짓고 부모를 사모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진사도陳師道의 「사정기思亭記」에 보인다.
안항顔巷⁴⁾ : 안연顏淵의 누항陋巷. 안연은 공자의 제자인데 이름은 회回, 자는 자연子淵이다. 한 그릇의 밥과 한 그릇의 마실 것으로 누항에 지내면서 도를 즐겼는데 공자가 어질다고 칭찬하였다. 『論語, 雍也』
오토烏兔⁵⁾ : 세월을 말한다. 까마귀는 해의 정기이고 토끼는 달의 정기임을 일컫는 말이다.
청룡靑龍⁶⁾ : 갑진년(1964)을 말한다.
종우螽羽⁷⁾ : 많은 자손을 뜻한다. 『詩經』에 후비의 자손이 많은 것을 노래했는데 그 시詩에
螽斯羽詵詵兮 종사의 깃이 화하게 모였으니
宜爾子孫振振兮 너의 자손이 번성함이 마땅하도다.
라고 한 말에서 유래한다. 『詩經』 「周南」 螽斯篇
비돈肥遯⁸⁾ : 『周易』 「遯卦」 상구효上九爻의 말로서 멀리 떠나서 숨어 지내며 구애 되는 것이 없이 여유가 있음을 말한다.
병산屛山⁹⁾ : 송나라 학자 유자휘劉子翬의 호이다. 자는 언충彦沖이다. 주자朱子의 스승인데 주자의 자를 원회元晦라고 지어주고 회자의 뜻으로 <자주원회축사字朱元晦祝辭>라는 자사를 지어 주었다.
희경羲經¹⁰⁾ : 복희伏羲의 경經이라는 뜻으로 『周易』을 말한다.
양휴산립揚休山立¹¹⁾ : 주자朱子가 <육선생화상찬六先生畵象贊> 가운데 명도明道 선생을 두고 표현한 말인데 양기가 훈훈하게 사물을 따뜻하게 하고 산이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는 듯한 기상을 말한다. 
정공程公¹²⁾ : 송나라 때 학자인 정호程顥를 말한다. 자는 백순伯純 호는 명도明道이다. 『宋元學案』 一四
엄자嚴子¹²⁾ :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의 고사高士인 엄광嚴光을 말한다. 자는 자릉子陵이고 광무제와 어린 시절의 벗이었다. 광무제가 즉위한 후 엄광은 성명을 바꾸고 숨어살았었는데 광무제가 불러서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제수 했으나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했다. 후에 송나라 범중엄范仲淹이 목주자사睦州刺史로 부임하여엄광의 사당을 짓고 기문을 지어 엄광의 풍모를 ‘수장산고水長山高’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공시功緦¹³⁾ : 상복의 다섯가지 복제에 있어서 아홉 달의 대공大功, 다섯 달의 소공小功 세달의 시마緦麻를 말한다. 대공은 종형제가 여기에 속하고, 소공은 제종형제가 여기에 속하고 시마는 삼종형제가 여기에 속한다.
삼사三斯¹⁴⁾ : 집이 이루어짐을 송축頌祝하는 말이다. 춘추시대 진나라 사람 헌문자獻文子가 집을 이루었을 때 장로長老가 송축하기를 “여기에서 노래하고 여기에서 곡하고 여기에서 국족을 모을 것이로다.[歌於斯 哭於斯 聚國族於斯]”라고 한 말에서 세 개의 사자斯字가있는 데서 유래했다. 
『禮記』 「檀弓 下」
초광楚狂¹⁵⁾ :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은자隱者인 육통陸通, 자는 접여接與, 미친것처럼 하며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초광이라 불렀다.
혜혜兮兮¹⁶⁾ : 초광 접여가 노래하고 공자가 있는 곳을 지나면서 말하기를 
鳳兮鳳兮 봉황이여 봉황이여
何德之衰 어찌 덕이 쇠했는가.
往者不可諫 지난 일은 간할 수 있으나 
來者猶可追 앞으로 올 일은 따를 수 있네
已而已而 부디 그만 둘지어다.
今之從政者殆而 지금 정사에 종사함은 위태하다네.
라고 했는데 이 말 가운데 두 개의 혜兮자가 있다.
중묵仲黙¹⁷⁾ : 송나라 학자 구봉九峰 채침蔡沉의 자이다. 서산西山 채원정蔡元定의 아들로 가학家學을 이었다.
백록동규白鹿洞規¹⁸⁾ : 송나라 때 주자가 남강군南康軍을 맡아 다스리면서 일찍이 학문을 강론하며 정한 학규이다. 그 학규의 대략은 오교지목五敎之目, 위학지서爲學之序, 수신지요修身之要, 처사지요處事之要, 접물지요接物之要의 다섯 가지이고 이에 따른 세목細目이 각각 있다.
명성明誠¹⁹⁾ : 실덕實德으로 말미암아 자연히 밝고 선을 밝힌 것으로 말미암아 그 선을 확충하는 공부이다. 자사子思가 천도와 인도의 뜻을 설명하기 위하여 “정성으로부터 밝힘을 성이라 하고 덕을 밝힘으로부터 정성에 이르는 것을 교라고 하니, 정성이면 밝게 되고 밝게 되면 정성에 이른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고 하였다. 『中庸章句』 「第二十一章」
청우靑牛²⁰⁾ : 노자老子가 함곡관函谷關을 지나갈 때 탔던 푸른 소를 말한다.
노근용盧根容²¹⁾ : 1884~1965, 자는 회부晦夫, 호는 성암誠庵,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저서로 『성암집』이 있다.

 

장서각藏書閣 편액

 


晦山亭記
余舊嘗聞草溪之鄕 城山之里 有處士姜公諱潡 勤儉起家 喜施能散 又有至行醇德 樂善好古 躳率以敎諸子 壹迪義方 絶不梁時潮異色 以之稳享大耋 而家道益昌 及其旣歿 而諸子孫爲起一亭里居 扁曰晦山 盖處士 先是自江左之靈山 來卜城山 而深有取於辟世晦養之意故也 其季子曰相弼 時以文墨從余遊 余以是益信典刑之有自來 而心愛豔之 曰相弼君 來示處士行狀 且告其爲亭之槩 而要余爲一言 余因竊惟士之晦於山 非一日也 而苟求其故 則非得己也 盖自時化之日遷也 陸海交通 百物雜陳 凡其熙熙而來 穰穰而往者 莫不睢盱乎 自以爲得計 而自識者觀之 不過爲猶然一笑之資 夫何以故 爲其所求之未必得 而所得者未必可恃爲吾有也 譬如遂鹿而不見泰山 鹿之未必入吾有 而泰山者已阻截吾往矣 於是乎 始乃瞿然却顧 還辱故步 則喘喘脅息 進退且維谷矣 是不爲大可㦖迫者耶 故曰君子幾不如舍 知幾其神乎 幾先於事 而知之爲難 又從而訾謷至之此 而有識之士 冷情聘目 寧欲自晦 而不以身當之 可一見决矣 詩曰出其東門 有女如雲 雖則如雲 匪我思存 縞衣綦巾 聊樂我員 其殆善喩乎此者乎 然則晦於山 豈得已哉 方處士之將營移卜也 親戚之舊 多挽止者 處士獨以舊居之介於周道 特有取於城山之面江背峽 不便與時流往來 其微意有可言者 昔劉荊州 訪龐德公於隴上 問其何以遺子孫 龐公應 曰世人皆遺之以危 今獨遺之以安 晦山之志 盖亦如是 則其於保守遺謨 期之永久者 將不出此晦山而得之 吁可不敬歟 可不勉哉 因以語相弼君 而書之爲晦山亭記 
甲辰良月上浣 聞韶 金榥 記

회산정기
내가 예전에 들으니 초계草溪 고을 성산리城山里에 처사 강돈姜潡 공이 있었다고 한다. 공은 근검勤儉으로 집안을 일으키고 베풀기를 기뻐하여 재물을 능히 흩었고 또 지극한 행실과 순후한 덕이 있어 선을 좋아하고 옛 것을 좋아하며 솔선하여 여러 자제를 가르침에 한결같이 의로운 방도로 인도하여 절대 당시 조류潮流의 속된 것에 물들지 않게 하였다. 이로써 안온히 상수를 누려 가도家道가 더욱 창성하였다. 공이 이미 돌아가시기에 이르러 자손들이 거처하는 곳에 한 정자를 건립하여 편액을 회산晦山이라 하였으니 대개 처사가 앞서 강좌江左의 영산靈山으로부터 성산城山으로 이사했는데 세상을 피하여 자신을 숨기고 덕을 기를 뜻을 취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막내 아들은 상필相弼인데 때로 문묵文墨으로써 나에게 따라 노닐었다. 내가 이로써 전형典刑이 유래가 있음을 더욱 믿을 수 있었기에 마음속으로 더욱 사랑하고 좋아하였다. 하루는 상필군이 처사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고 또 정자를 짓게 된 개략을 말하여 나에게 기문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이어서 가만히 생각건대 선비가 산에서 자신을 숨기고 덕을 기른 것이 하루가 아니었다. 진실로 그 연고를 구해 본다면 부득이한 것이었다. 대개 시대가 날로 변함으로부터 바다와 육지가 교통하고 온갖 물건들이 뒤섞임에 무릇 분주하게 오고가는 자가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음이 없어 스스로 계책을 얻었다고 생각하나 식자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하나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구한 바를 반드시 얻지 못하고 얻은 바가 반드시 나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사슴 쫓다가 태산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사슴이 반드시 나의 소유에 들어오지 못하고 태산이 이미 내가 가는 것을 가로 막으면 이에 비로소 눈이 휘둥그레져서 돌이켜 보고 옛 길을 다시 찾는다. 그러한즉 숨을 헐떡거리며 위축되어 진퇴유곡進退維谷이 되고 마니, 이것이 크게 민망하고 절박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주역』에 말하기를 “군자가 기미를 보아서 사슴을 쫓지 않고 두는 것만 못하다.”[君子幾 不如舍]¹⁾하고, 또 “기미를 아는 것이 신묘하도다.”[知幾其神乎]²⁾라고 하였다. 기미는 일에 앞서 있는 것이니 아는 것이 어렵고 또 이어서 헐뜯음이 이르나 식견이 있는 선비가 냉정하게 눈을 돌려 차라리 스스로 몸을 숨길지언정 자신이 이에 해당하지 않을 것인즉 한번 보고 결단할 수 있을 것이다. 『시경』에 말하기를
出其東門 동문에 나가니
有女如雲 여자가 구름처럼 많도다.
雖則如雲 비록 구름처럼 많으나
匪我思存 나의 생각이 있는 곳이 아닐세
縞衣綦巾 호의와 기건이여
聊樂我員 내게 즐겁도다.³⁾
하였으니, 아마도 이를 잘 비유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산에서 자신을 숨기는 것을 어찌 그만 둘 수 있겠는가?
바야흐로 처사가 장차 옮겨 살 것을 도모할 적에 친척과 친구들이 만류하여 그치게 한 사람이 많았는데 처자가 홀로 옛 거처가 큰 길을 끼고 있는 반면에 성산은 강을 임하고 산을 등진 곳에 있어 시류와 더불어 왕래하기에 불편함을 특히 취함이 있었으니 그 은미한 뜻을 말할 만한 것이 있다. 옛적 형주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가 방덕공龐德公을 방문하여 무엇을 자손에게 물려 줄 것인가를 물었는데, 바아공이 응하여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위태로움으로써 물려주나 지금 홀로 편안함으로써 물려준다.”⁴⁾고 하였으니 회산晦山의 뜻이 대개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지금 처사의 자손된 이가 진실로 처사의 마음씀이 이와 같음을 안다면 아마 남기신 가르침을 보호하고 지켜 영구하기를 기약함이 장차 이 ‘회산’을 벗어나지 않고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 공경하지 않을 것이며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상필군에게 말하고 이를 써서 회산정기晦山亭記를 삼는다.
갑진년(1964) 10월 상완
문소 김황金榥 적다.

【주석】
[君子幾 不如舍]¹⁾ : 『주역』 「둔괘屯卦」 육삼효六三爻의 날이다.
[知幾其神乎]²⁾ : 『주역』 「계사繫辭 하전下傳」 제5장의 말인데 이는 「예괘豫卦」 육이효六二爻의 ‘介于石 不終日 貞吉’을 풀이한 것이다.
내게 즐겁도다.³⁾ : 『주역』 「정풍鄭風」 출기동문편出其東門篇에 보인다.
“세상 사람들이~물려준다.”⁴⁾ : 후한의 양양襄陽 사람 방덕공龐德公이 벼슬하지 않고 현산峴山 남쪽에 처자와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는데 유표劉表가 그에게 무엇으로 자손에게 끼칠것인가를 묻자 이 말로써 대답했다. 『소학』 「선행善行」

 

晦山亭記
積累而致富有 擇里而奠其業 以光其門閭 以貽其子孫 此固爲一家之創業垂統 而世有智力乘時運者 或多能之 然敬無德以將之 爲可繼之道 則役物焉而己 僥倖焉而己 赫赫終一時者 終至於燎毛 而曷足恃哉 夫世之可恃者 莫貴於德 而德莫善於晦積之冥冥 而發之悠久 晦之道也 而亦天地翕散之理也 木晦根而春燁敷 昔人之云 豈不然哉 友人姜君相弼 請記其先翁之晦山亭者 而奉其狀以資發揮 余讀其狀 而知公之德盖有得於晦之實者 而亭名之爲允符也 公少嘗自振於貧窮 勤其力 勵其志 卒能豊其廩 大其家矣 晩而自鷲城 移卜于八溪之城山 據有山水之勝 而定其基業之固矣 則其於所謂創業垂統者 公盖己優有之矣 人之稱之者 未始非以此 然此特其外矣 本其所以致此者 乃由於闇然自求之德 而非世之役物僥倖者此 則其可稱之實 顧非在此而不在彼耶 公嘗幼喪母 攜二弟 望墓陟臺號泣 兩雪不避 見者酸鼻後喪父亦然 其題詩於臺者 惻惻感人 其篤於孝 有如是矣 其在貧之 人或助之資 則見益刼人 垂槖與之 能使益者感服 疾病殿屎 辨藥餌之需 則却藥而還宗山之爲人有者及其稍裕 則分田以贍族戚之貧者 見人飢寒 矜恤之若癏在躳 必爲之割食削衣 嘗濱江洪水之患 傾廩而賑之 救活甚多 聞有碑以頌惠 則痛拒而埋之 其仁心惻怛 有如是矣 當時潮大變 戒節兒孫 惟舊德之食 而無或梁新 又命相弼 從師問學 以成儒業 其貽謨之正 有如是矣 故鄕里談者 莫不嘖嘖如古人事 而凡若此類 一出眞心至性 毫無虛誇 矯僞以間之 則所謂無所爲而爲者 斯其爲晦之道乎 公夫婦偕老 至期頣 佳子佳孫 充溢堂字 福履之完 鄕黨罕比 則晦根燁敷 於是又可驗矣 然而公則不以是自居 未嘗標榜以自異於人 公歿今數十年 諸子諸孫 咸謂不可無追思而象之 此亭之所以築而名也 夫晦而自以爲晦 則其晦也 未必爲眞晦 惟不自居而名於後者 益見其不可揜之實也 則於是名也 孰得以間 然詩曰惟其有之 是以似之 晦山之義 公則固有之矣 而公之子姓 居且遊於斯亭者 又顧省乎斯扁 而益篤晦養之義 則是爲公之遺敎 而其光之發 將愈久愈著者 豈不在斯矣乎 余故樂爲之發其義道之 
蒼龍之歲孟冬 花山權龍鉉記

회산정기
재물을 쌓아 부유함을 이루고 마을을 가려 터전을 정하여 그 가문을 빛나게 하고 그 자손에게 끼쳐주는 이 일은 참으로 일가一家의 바탕을 세워 자손에게 드리워주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지력智力이 있고 시운時運을 탄 이가 혹 이에 능함이 많으나, 참으로 덕德으로써 이를 가져 이어나갈 수 있는 도리를 함이 없으면 사물에 부림을 당할 뿐이고 요행일 뿐인지라, 일세에 빛나던 것이 끝내 쉽게 사라지는 데 이를 것이니, 어찌 족히 믿을 수 있겠는가? 무릇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것은 덕보다 귀한 것이 없고 덕은 드러내지 않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쌓임이 그윽하고 깊으나 발함이 유구한 것이 드러내지 않는 도리이고, 또한 천지가 모으고 흩는 이치이니, “나무는 뿌리를 드러내지 않고 봄에 빛나게 꽃을 피운다.”고 옛 사람이 이른 말이 어찌 그러하지 않겠는가?
나의 벗 강상필姜相弼 군이 선옹先翁의 회산정晦山亭 기문을 청하면서 그 행장을 가지고 와서 발휘할 자료를 삼게 하였다. 내가 그 행장을 읽고서 공의 덕이 대개 드러내지 않는 실상에서 얻어 정자의 이름이 참으로 부합됨이 있음을 알았다.
공은 어려서 일찍이 빈궁한 가운데서 스스로 떨쳐 일어나 그 힘을 부지런히 하고 그 뜻을 가다듬어 마침내 그 창고를 풍요하게 하고 그 가세를 크게 할 수 있었다. 만년에 축성鷲城으로부터 팔계八溪의 성산城山으로 이사하여 산수의 아름다운 경치에 의거하여 그 터전의 견고함을 정하였다. 그러한즉, 앞에서 이른바 ‘바탕을 세워 자손에게 드리우는 것’에 공이 대개 이미 넉넉한 것이다. 이를 칭찬하는 사람들이 처음에 모두 이로써 하였으나, 그러나 이는 단지 그 바깥만을 보았을 따름이다. 이를 이룬 바를 깊이 살펴본다면, 곧 그윽히 스스로 구하는 덕에서 말미암았고 세상에서 사물에 부려지고 요행으로 얻은 이가 비길 것이 아니다. 그러한즉, 칭송할 만한 실제가 도리어 여기에 있지 않고 저기에 있지 않겠는가?
공은 일찍 어려서 모친상을 당했는데, 두 아우를 데리고 묘소가 바라보이는 대臺에 올라가 울부짖기를 눈과 비가 내리더라도 피하지 않으니, 보는 이들이 코가 시큰하였다. 뒤에 부친상을 당해서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공이 대에 적은 시는 측은히 사람을 감동시키니, 효에 돈독함이 이와 같음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혹 재물로써 도왔는데, 도적이 사람을 위협하는 것을 보고 전대를 풀어주어 능히 도적으로 하여금 감복하게 하였다. 질병으로 근심하고 신음하는 가운데 약을 구할 돈을 마련했는데, 약을 물리치고 남의 소유가 된 종중 산을 다시 찾았다. 살림이 제법 여유가 있기에 이르러서는 전답을 나누어 친척 가운데 가난한 이에게 주었다. 주리고 추위에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기기를 마치 병이 자산의 몸에 있는 것처럼 하여 반드시 양식과 의복을 나누어주었다. 일찍이 강가의 마을이 홍수의 재앙을 당했을 때 곳간을 기울여 구휼하여 사람들을 살림이 매우 많았는데,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은혜를 칭송한다는 말을 듣고 심하게 막아서 비석을 땅에 묻게 했으니, 그 어진 마음이 정성스럽기가 이와 같음이 있었다.
시속의 풍조가 크게 변할 때를 당하여 자손들을 경계하기를, 오직 구덕舊德을 따르고 혹시라도 신학新學에 오염됨이 없게 하고, 또 상필相弼에게 명하여 스승을 따라 학문을 하여 유업儒業을 이루게 하였으니, 자손에게 법도를 끼침이 이와 같음이 있었다. 그러므로 향리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기를 고인의 일과 같이 하였다. 무릇 이와 같은 일들은 한결같이 진실한 마음과 지극한 성품에서 나왔고 털끝만큼도 헛되게 과장하거나 거짓으로 속여서 하는 일이 없었은즉, 이른바 ‘의도하는 바가 없이 순순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드러내지 않는 도리일 것이다.
부부가 해로하여 백수白壽에 이르고 아름다운 자손들이 집에 가득 넘쳐서 복록의 완전함이 고을에서 비교할 이가 드문즉, ‘뿌리를 드러내지 않고 빛나게 꽃을 피우는 것’을 여기에서 또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공은 이로써 자처하지 않아, 일찍이 드러내어 스스로 남과 다르게 여긴 적이 없었다.
공이 돌아가신 지 지금 또 십수 년이 지났는데, 여러 아들과 손자들이 모두 추모하여 받들 곳이 없어서는 불가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정자가 건립되고 이름 붙여진 까닭이다.
무릇 드러내지 않으면서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여긴다면, 그 드러내지 않음이 반드시 참으로 드러내지 않음이 아니고, 오직 자처하지 않으면서 나중에 이름 붙여진 것에서 더욱 가릴 수 없는 실상을 볼 수 있은즉, 이 이름에 대하여 누가 의심할 것인가? 『시경』 「소아小雅」에 말하기를,

惟其有之 그 마음속에 있는지라
是以似之 때문에 밖에 드러남에 비슷하네.

라고 하였다. 회산晦山의 뜻은 공인즉 본디 가졌으니, 이 정자에 거처하고 노니는 공의 자손들이 또한 이 편액을 돌아보고서 ‘드러내지 않고 기르는 뜻’을 더욱 돈독하게 한다면, 이는 공이 남기신 가르침인 것이다. 그리고 그 광채가 발함이 더욱 오랠수록 더욱 드러남이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내가 그러므로 즐거이 그 뜻을 드러내 말한다.

갑진년(1964) 10월에
 화산花山 권용현權龍鉉은 기문을 적다.

 

저존실著存室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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