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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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쌍책면 성산리 진주강씨 옥봉정사 玉奉精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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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경남의 진주강씨 누정재

2021. 9. 9.

2021.8.20. 합천 쌍책면 성산리 진주강씨 옥봉정사玉奉精舍와 회산정晦山亭

옥봉정사玉奉精舍는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559(성산큰길 66-3)내촌마을에 있는데 함께 있는 회산정晦山亭은 옥봉정사玉奉精舍 마당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 마을 앞에는 황강이 절벽 아래 흐르고 마을 뒤쪽에는 평야처럼 너른 들판이 형성되어 꽤 살기 좋은 마을이다. 이곳을 고도계는 높이 29m, 위도 35°34'36"N 경도 128°16'54"E를 가리킨다.

회산정晦山亭에 모신 쌍책면 성산리 입향조 강돈姜潡은 은열공殷烈公 민첨民瞻의 28세손이고, 옥봉정사玉奉精舍는 강돈姜潡의 5번째 아들인 족보 이름으로 석필錫弼이 건설한 것으로 세상에는 노당魯堂 상필相弼(1905~1986)로 알려져 있다. 은열공殷烈公의 11세손 위상공渭祥公이 진천군파晉川君派의 파조이고, 강상필姜相弼은 은열공의 29세손이고 파조 위상공의 19세손이다.

 

2021.8.20. 합천 쌍책면 성산리 진주강씨 옥봉정사玉奉精舍 대문
2021.8.20. 합천 쌍책면 성산리 진주강씨 옥봉정사玉奉精舍
옥봉정사玉奉精舍 편액
이리실以麗室 편액
약사재若思齋

 

玉奉精舍記
玉物之至寶也 其性溫如也 其氣栗如也 置之烈炎之中 不能焚其剛 投之淤泥之濁 而淤泥不能埋 其光有似乎 君子之德 故君子多愛之非 有故玉不去身 而左宮羽 而右徵角趨采齊 而行肆夏 人各有其寶也 而彼兮毗依附繪 其文沽其名者 是衒玉者也 頹懶佛不力蓬心藜目 而不知恥者 是毁玉者也 其或金鐵不辨 假僞售眞向 沙壙邊收取估家計者 是又認石爲玉者也 皆君子之所不取也 吾友姜君賢若 聰明有尙儘 可與適道者也 時則其大人公謹身修德 以立門戶 諸兄幹蠱用譽 而子性甚蕃衍 琳琅觸目 賢若樂其一樂 而泊然無求於世傳 意此事矻矻讀聖賢書未 已旣有以裕於己推 其餘以及於 人導迪群子弟 及鄕秀之來學者 戶履常滿彬彬 有作成之風 其徒曰學須靜也 可改築一書樓放靜僻 以共生師處也 遂各損貲鳩材就所居之北爽嶝之邱 而齋之隣리 老成亦多協 其力而樂成之於是茅 其覆土其戺不敢 有華美想房堂門璧圖書花木 皆井井有規度庤書數百卷 而稗史雜說 一無與焉 盖賢若之所好然也 賢若諗于 余曰小子非敢 有菟裘之志也 將以閒居 而讀書而求其志也 願先生錫其扁 而一言以記之俾 有所出入觀省 而自勉焉 余曰齋之名豈容他 求玉田峙 其後玉女控 其南謂之玉奉精舍矣 然玉不琢 則無以成器人不學 則無以成德 賢若及此少壯之日 大肆力於學問親仁取友以受他山之攻 覃思力踐 以就百鍊之功 世亂而毋自毁焉身窮 而毋自衒焉 動忍增益以盡 其玉成之方 則其性愈溫 其氣愈烈 而光輝發越 於外可大可久用無不宜允 爲瑞世之寶矣 況英材養成 玉立筍列 有足以羽翼斯文 則其功大矣 皓天往而必返古之常也 異日者安知不有箋箋 玉帛問津於芚江 江上耶吾雖不及見深 爲吾賢若望也
乙亥 春分節 恭山 宋浚弼 記
            族弟 姜錫殷 書

옥봉정사기
옥은 사물 가운데 지극한 보배다. 그 성性이 온화하고 그 기氣가 엄숙하니, 불꽃 속에 두더라도 불꽃이 그 강함을 불사를 수 없고, 혼탁한 진흙 속에 던지더라도 진흙이 그 광채를 매몰할 수 없는 것이 군자의 덕과 유사함이 있다. 그러므로 군자가 많이들 사랑하여 특별한 연고가 있지 않으면 옥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다. 그래서 옥의 소리를 오음五音¹⁾ 가운데 궁익宮羽을 왼쪽에 차고, 치각徵角은 오른쪽에 차고서 걸음을 빨리해서 갈 때는 채제采齊의 시를 노래하고 천천히 걸어갈 때는 사하肆夏의 시를 노래하였다.²⁾ 사람이 각자 그 보배를 가지고 있는데 아첨하고 의지하여 그 문체를 꾸미고 그 이름을 파는 이는 옥을 파는 것이고, 퇴폐하고 개을러서 힘쓰지 않고 마음과 눈이 가려져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이는 옥을 훼손하는 것이고, 혹 금철金鐵을 분별하지 않고 가짜를 빌려 진짜로 팔고, 사광沙壙을 향하여 수습하여 가계家計를 하는 이는 곧 돌을 옥으로 아는 것이니, 이는 모두 군자가 취하지 않는 바이다.
나의 벗 강군姜君 현약賢若³⁾은 총명하고도 높은 뜻이 있으니, 참으로 함께 도道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그 부친이 몸을 삼가고 덕을 닦아서 문호門戶를 세움에 여러 형들이 모두 간고幹蠱하는데 자손들이 매우 번성하여 아름다운 자제들이 눈에 띄었는데 현약賢若은 삼요三樂 가운데 부모가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한 가지 낙을 즐겨 담담하게 세상에 알려 지기를 구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두어 부지런히 성현의 서책을 일기를 그만두지 않아 이미 자기에게 넉넉함이 있어 그 나머지를 미루어 남에게 미쳐 뭇 자제들과 와서 배우는 고을의 젊은이들을 인도하니, 문에는 신이 항상 가득하여 성대하게 인재를 흥기하여 이루는 기풍이 있었다. 그 문도가 말하기를 “학문하는 곳은 모름지기 고요해야 하니 한 서루書樓를 고요한 곳에 개축하여 제자와 스승이 거처하도록 하자”고 하였다. 드디어 각자 재물을 내고 재목을 모아 거처하던 곳 북쪽의 높은 언덕에 나아가 집을 지으니 마을의 노성老成⁴⁾한 이들이 또한 많이들 협력하여 낙성하였다. 이에 띠풀로 지붕을 덮고 흙으로 벽을 발라 감히 화려한 뜻을 두지 않았다. 방과 마루, 문과 벽, 도서 화초와 나무가 모두 반듯하게 규모와 법도가 있으며, 서책 수 백권을 쌓아두었으나 패사稗史 잡설雜說은 하나도 그 사이에 없었으니 대개 현약賢若이좋아하는 바가 그러한 것이다. 
현약賢若이 나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소자가 감히 토구菟裘⁵⁾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장차 한가로이 거처하면서 독서하여 그 뜻을 구하려는 것이니, 원컨대 선생께서는 그 편액의 이름을 정해 주시고 한 마디 말씀으로 기문을 써서 출입할 때 보고 반성하여 스스로 힘쓰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서재書齋의 이름을 어찌 다른데서 구하겠는가? 옥전산玉田山이 그 뒤에 우뚝 솟아 있고 옥녀봉玉女峯이 그 남쪽에 버티고 있으니 옥봉정사玉奉精舍라 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옥은 다듬지 않으면 그릇을 이룰 수 없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덕을 이룰 수 없다.” 현약賢若은 지금 소장의 시정에 미쳐서 학문을 크게 힘써서 어진이를 친하고 좋은 벗을 취하여 타산지서他山之石의 가르침을 수용하고, 생각을 널리하고 자신이 곤궁하여도 스스로 팔지 말아 마음을 수고롭게 하여 자신이 능하지 못한 바를 더욱 능하게 하여 그 옥을 이루는 방도를 다한다면 그 성性이 더욱 온화하고 그 기氣가 더욱 열열하여 광휘가 밖으로 넘쳐 크게 되고 오래 가서 사용함에 마땅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진실로 상스러운 세상의 보배가 될 것이다. 더구나 영재를 양성하여 옥이 서고 죽순이 벌려 선듯하여 사문斯文의 우익羽翼⁶⁾이 되기에 족함이 있다면 그 공이 클 것이다. 하늘의 이치는 갔다가 반드시 돌아오는 것이 고금의 상도이니 후일 아마도 옥백玉帛의 예물을 받들고 황둔강黃芚江 가에서 도를 묻는 이가 있으리라. 내가 비록 보기에 미치지 못하겠으나 깊이 우리 현약賢若을 위해서 바란다.
을해(1935) 춘분절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⁷⁾이 적고
                  족제族弟 강석은姜錫殷은 쓰다.

【주석】
오음五音¹⁾ :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로 동양東洋 음악音樂의 오음五音을 아울러 이르는 말.
옥의 소리를~노래하였다.²⁾ : 『禮記』 「玉藻 曰」
古之君子 必佩玉 右徵角 左宮羽 趨以采齊 行以肆夏 周還中規 折還中 進則揖之 退則揚之
옛날의 군자들은 허리에 옥을 찼는데, 오른쪽에는 치소리와 각소리가 나는것을 차고, 왼쪽에는 궁소리와 우羽소리가 나는 것을 찼다.
정당正堂의 문 밖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 갈 적에는 채자采齊의 시편을 노래하여 박자를 맞추고, 마루에 올라갈 적에는 사하肆夏의 시편을 노래하여 박자를 맞추었으며, 둥글게 돌아가는 맵시는 규規에 맞는 것처럼 원을 그리고, 좌우로 꺾어서 걸을 때에는 구秬에 맞춘것처럼 직각을 그리며, 앞으로 나갈 적에는 조금 몸을 굽혀서 패옥이 앞으로 보이게 하고, 뒤로 물러날 적에는 약간 몸을 틀어서 패옥이 뒤에 보이게 했던 것이다.
강군姜君 현약賢若³⁾ : 강상필姜相弼(1905~1986)의 족보의 이름은 석필錫弼이고 호는 노당魯堂이며 자가 현약賢若이다. 은열공殷烈公의 29세손이고 파조派祖 진천군晉川君 강위상姜渭祥의 19세손이다. 저서로 『노당집』이 있다.
노성老成⁴⁾ : 어른스럽다. 세련되다.
토구菟裘⁵⁾ : 벼슬을 내놓고 은거하는 곳이나 노후에 여생을 보내는 곳으로 노나라의 은공隠公이 은거의 땅이라고 정한 지명에서 비롯한다. 
우익羽翼⁶⁾ : 새의 날개란 뜻으로 좌우에서 보좌하는 사람
송준필宋浚弼⁷⁾ : 1869~1943, 성주 출신으로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순좌舜佐, 호는 공산恭山으로 아버지는 송기선宋祺善이다. 
1886년(고종 23)부터 장복추張福樞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이후 김흥락金興洛 문하에도 있었으며 영남의 많은 석학의 문인으로 있었다. 
1919년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인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에서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 등과 더불어 활동함으로써 의리정신과 민족의식을 발휘하였다. 만년에는 김천에서 살았다. 『공산집恭山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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