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야생화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합천 용주면 우곡리 진주강씨 논덕재 論德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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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2021. 9. 16.

2021.9.9.용주면 우곡리 진주강씨 논덕재論德齋

합천군 용주면 우곡리 410(연촌우곡길 493)은 논덕산論德山이 이룬 골짝으로 산골 마을이다. 이곳에 자리한 진주강씨 진천군파의 재실인 논덕재論德齋는 은열공殷烈公 21세손 우재공尤齋公 업재業齋(1681~1759.9.28.)를 제향하는 집이다. 이곳을 고도계는 높이 169m, 위도 35°34'32"N 경도 128°04'41"E를 가리킨다. 

 

2021.9.9.용주면 우곡리 진주강씨 논덕재論德齋 대문


논덕재論德齋는 진주강씨 은열공파 11세손 중시조 진천군파 중상공仲祥公 강위상姜渭祥의 11세손인 우재공尤齋公 업재業齋가 율곡면 임북에서 용주면 우곡芋谷으로 이거移居해 살았던 곳에 그의 후손들이 지은 재실인데 기문을 청했다는 7세손 용호龍鎬는 찾지 못했다.

 

논덕재論德齋 편액
논덕재論德齋 전경

논덕재論德齋는 규모가 작은 재실이지만 대문을 들어서면 살림집으로 들어가고 마당의 우측에 논덕재論德齋의 대문이 있다. 대문에는 편액이 없고 본당은 논덕재論德齋라 편액했으며 주련은 없고, 대청 위에는 논덕재기論德齋記와 논덕재명論德齋銘이 걸려 있으며 논덕재사실기論德齋事實記와 후손 문호文鎬가 지은 원운原韻이 걸려 있다.

 

논덕재기論德齋記

論德齋記
陜川治西二十里 有庄曰愚谷 姜氏居之 其爲地甚邃 而其名頗著於鄕里者 豈無所由然哉 姜氏之先 有尤齋公諱業齋 元陵世擧義討賊 以功蒙通政啣退 而卜居于 此以儒學行誼 稱於鄕國故愚谷 雖村落小聚 而名聞則舊矣 公旣歿二百年 公之諸後孫 追慕公德業 而欲表章之相 與構一舍於村 側猶盖以茨也 復若干年 而始乃瓦之堂室門墻畢備 凡春秋霜露之侯 以而爲聚族虔齊之宿 朝夕出入之假 以而爲子弟敎育之所 無不推其所墓者 而寓之於是取其山名 而扁其楣曰 論德齋公之七世孫 龍鎬請余以記 嗚呼昔際戊申變 李麟佐叛於湖西 鄭希亮起於嶠南 當時列郡守宰莫不畏怯竄伏 則吏民之煽附脅從者可知也 於是而有能慷慨奮發 首挫凶峰 使賊不敢踰兒峴者 是誰之力也 方逆徒之據陜川也 尤齋公倡義 赴難送族姪趾殷于三嘉 世殷于草溪 請壯士尹世雄盧世燁 等爲後援 公則與主守鄭暘賓 及義將金泊等 爲乃應 卒能殲殄凶醜桿衡 鄕國其功寧不大哉 公之先有戇庵寒沙兩先生 樹節昏朝 旣已日星於東方 而公之樹立之卓又如是者 非忠孝之風 有得於先 而義理之心 有講於中者 惡能辨此哉 今爲其後承者 思其祖以修 其居記其事以標 其楣其用志誠勤 而爲事誠難矣 更願不以此 而自多進 而求之忠義之實 人人相詔世世相課 使公遺風餘烈 不墜愈章 然後齋於是乎有光矣 是爲記
歲己卯暮春 姜錫鎤 謹撰

논덕재기
합천군의 서쪽 20리에 있는 우곡리는 강씨가 살고 있으니 그 땅이 매우 깊으나 그 이름이 향리에 자못 드러난 것은 어찌 이유가 없이 그렇겠는가. 강씨의 선조에 우재공尤齋公 업재業齋¹⁾가 원릉元陵²⁾ 때를 당하여 의병을 일으켜 난적을 토벌하여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직함을 받고 물러나 이곳에 거처를 정하여 유학과 행실로 향국鄕國³⁾에 일컬어진 까닭으로 우곡이 비록 촌락은 작으나 이름이 드러남인 즉 오래되었다.
공이 돌아가신 지 200년에 공의 여러 후손이 공의 덕업을 추모하여 드러내고자 하여 마을 곁에 서로 한 채의 집을 지었으나 오히려 지붕을 띠로 덮었다. 몇 해 뒤 비로소 기와를 이고 마루와 방과 문과 담장이 다 갖추어지니, 무릇 봄 가을로 선조의 제사를 드릴 때 일족간에 모여서 경건히 재계하고 아침저녁으로 출입하는 여가에 자세를 교육하는 장소로 삼으니 그 사모하는 것을 미루어 깃들이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그 산의 이름을 취하여 편액을 논덕재論德齋라 하고 공의 7세손 용호龍鎬가 나에게 기문을 청했다. 
아! 옛날 영조 때 무신난戊申亂에 이인좌李麟佐는 호서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정희량鄭希亮은 영남에서 일어나니 당시 여러 고을 수령이 두려워 달아나 숨지 않음이 없었는 즉 아전과 백성들이 적도들에 선동되어 함께 따르고 협박으로 추종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능히 강개 분발하여 먼저 흉봉을 꺾어서 적이 감히 아현兒峴을 넘지 못하게 한 것은 곧 누구의 힘이던가. 당시 역도가 합천을 점거했을 때 우재공尤齋公이 의병을 일으켜 난에 나아가 족질 지은趾殷을 삼가로 보내고 세은世殷을 초계로 보내어 장사 윤세웅尹世雄, 노세엽盧世燁 등을 청하여 후원하게 하고 공은 주수主守 정양빈鄭暘賓과 의병장 김계金洎 등과 함께 안에서 응하여 마침내 능히 흉적의 무리를 섬멸하고 향국鄕國을 막아 내니 그 공이 어찌 크지 않겠는가.
공의 선조에 당암戇庵 한사寒沙 두 선생이 광해조에 절의를 수립하여 이미 동방에 해와 달처럼 밝고 공이 수립한 것이 우뚝하기가 또 이와 같은 것은 충효의 가풍을 앞에서 얻음이 있고 의리의 마음을 안에서 익힘이 있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이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그 후손된 이들이 그 선조를 생각하여 그 집을 수리하고 그 사실을 기록하여 문미門楣에 거니, 뜻을 씀이 정성스럽고 부지런하며 일이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다시 원하건대 이로써 스스로 만족하여 자랑하지 말고 나아가 구하여 충의의 실상을 사람마다 서로 가르치고 대대로 서로 익혀서 공의 유풍여렬遺風餘烈⁴⁾로 하여금 실추하지 않고 더욱 빛나게 한 뒤에 재사가 빛남이 있으리라 이에 기문을 적는다.
때는 기묘己卯(1999) 늦은 봄에 강석황姜錫鎤 삼가 찬하다.

【주석】
업재業齋¹⁾ : 은열공殷烈公 민첨民瞻의 11세손 중상공仲祥公 강위상姜渭祥이 진천군파晋川君派를 이루는 중시조이다. 우재공尤齋公 업재業齋(1681~1759.9.28)는 은열공의 21세손으로 자는 술경述卿이고 호는 우재尤齋이다. 통정중추밀원사通政中樞密院事을 지냈고 율곡면 임북에서 용주면 우곡芋谷으로 이거移居했다. 아버지는 재윤당在潤堂 휘망徽望이고 할아버지는 은열공 19세손인 구주鷗州 대적大適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당암戇庵 익문翼文으로 은열공 18세손이다. 우재공尤齋公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열은烈殷, 여은麗殷이다.
원릉元陵²⁾ : 조선 영조와 그의 계비 정순 왕후의 능
향국鄕國³⁾ : 고국 또는 고향
유풍여렬遺風餘烈⁴⁾ : 전인이 남긴 풍도風度와 공적功績. 『宋書 謝靈運傳論』

 

논덕재명論德齋銘
논덕재사실기論德齋事實記
원운原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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