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야생화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합천 대양면 도리 진주강씨 도강재 道岡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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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2021. 9. 21.

2021.8.20. 합천 대양면 도리 진주강씨 도강재道岡齋 전경

합천군 대양면 도리 806(도리길 178)은 진주강씨 은열공殷烈公 진천군파晋川君派의 재실 도강재道岡齋가 있는데, 은열공 28세손이고 진천군파晋川君派 위상공渭祥公의 18세손이며, 자字는 창길昌吉, 호는 죽헌竹軒이고, 이름 학호공鶴鎬公(1853~1922.1.10)을 모시는 집이다.  벼슬은 정릉참봉貞陵參奉을 지냈다. 이곳을 고도계는 높이 82m, 위도 35°30'03"N 경도 128°08'36"E를 가리킨다.

 

경덕문景德門

도강재道岡齋에 모신 죽헌공竹軒公(1853~1922.1.10)의 아버지는 여흥공汝興公 화섭和燮이고, 할아버지는 순근공舜根公이시며, 증조할아버지는 맹영공孟永公이시고, 고조할아버지는 석성공錫成公이시며, 현조할아버지는 은열공 23세인 학서공學瑞公이시다. 죽헌공竹軒公의 아들은 연민鍊珉과 연기鍊琪가 있으며, 둘째 연기鍊琪의 아들이 은열공 30세손 갑수甲洙로 죽헌공竹軒公의 손자이고, 갑수甲洙의 아들이 병식秉植과 병원秉元으로 죽헌공竹軒公의 증손자이다.

 

2021.8.20. 합천 대양면 도리 진주강씨 도강재道岡齋

도강재道岡齋는 지붕은 전통 와사瓦家의 형태를 이루었고 전체적으로 현대식 건물을 이루고 있으나 우측 담장 밖에는 우물을 두었고 마당에는 조경을 하여 관리를 잘하고 있는 곳이다. 대문 앞에는 비석을 세워 서사시를 적었으며 대문 좌우에는 사자상을 두었다. 현대식 대문 위에 경덕문景德門이라 편액했고, 본당은 도강재道岡齋라 이름했으며, 기둥에는 주련을 걸었다. 내부에는 모의당慕義堂과 효우헌孝友軒이란 편액이 걸렸으며 도강재기道岡齋記는 걸려 있지 않아 합천누정록陜川樓亭錄를 옮겨 적었다.

 

도강재道岡齋

道岡齋記
江陽之道里 故有寢郞竹軒姜公 才質聰敏志氣豪爽 若不可以馴制 及就柳定齋許性齋兩先生 得聞義理之學 自是着跟實地 敬以持身 孝于父母 友于兄弟 庚子被道薦 爲貞陵參奉極誠 以供其職 乙巳保護條約已成 公呼天大哭 棄官還鄕 從艾山鄭公欲起義旅 事與心違杜門 自靖庚戌聞國恥之報 遂日登後山 望北而哭如不欲生 己未三一運動義擧 公倡率群衆 唱獨立萬世 於陜川市街 爲日吏逮捕 囚大邱監獄 以病得釋還方 其出獄叩地歎曰 與其屈辱 於夷狄不如死 而無知其志 則乃殺身 成仁之義也 寧不偉哉 公已歿其所居第宅尙今維支 其曾孫秉植秉元 兄弟二君 嘗出寓大邱 以身勞心 計樹鉅貲 至是判出六千萬金 易其村而廣 其制南北五架 東西六楹虛 其中爲廳事 通其左右爲室 左以便起居讌賓客 右以畜書史居子弟室之 西有淸泉如玉鑿 其前半畝引水 以爲沼室之 前爲廊舍三間 以爲齊湢之所 通其東西爲庭園 多植異花 嘉木上下通暢洞府 增彩旣成請余名之 余取其地名 以道岡扁其齋 堂曰慕義 軒曰孝友 門曰景德 盖取公行義 而以示不忘於久遠也 旣而請余記之窃 惟吾邦自西歐文化輪入 禮義之俗 日益衰頹 母論上下內外鮮不失其故常 而名都巨邑爲甚 視其先業 舊器如邃廬敝簁暋 然無顧籍心 而惟君尊祖而築室 以闡其孝友節義之行 慕故而修庄 以盡其追遠報本之誠 斯不亦異而可書哉 宜君之欲紀其蹟 而余之不能閉其言也 仰又聞之作之 之難未若守之 之尤難文焉 之美未若實焉 之爲美 今日之作 而不能必其守 余言之文 而不能美其實 然則能終守 而至于實者將惡乎 在此爲其後承者 所當省察 而警誠也夫
宗下 姜錫鎤 記

도강재기 
합천의 도리道里에 옛날 침랑寢郞 죽헌강공竹軒姜公이 있었으니 재주와 바탕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뜻과 기상이 호방하고 시원하여 길들여 복종시킬 수 없을 듯하였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성재性齋 허전許傳 두 선생에게 나아가서 의리의 학문을 듣고부터는 실제적인 곳에 마음을 붙이고 몸가짐을 경敬으로써 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였다.
경자(1900)년에 도道의 천거를 받아 정릉참봉貞陵參奉이 됨에 정성을 다하여 직분을 수행하였고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공은 하늘을 부르며 크게 곡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애산艾山 정공鄭公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일이 마음과 어긋나서 문을 닫고 조용히 지냈다. 경술(1910)년에 국치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날마다 뒷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곡하였으니 살기를 원하지 않는 듯하였다. 기미(1919)년 삼일운동 의거에 공이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합천 시가市街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병 때문에 석방되었는데 감옥을 나오면서 땅을 치고 탄식하기를 “오랑캐에게 굴욕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어서 알지 못하는 편이 났겠다.” 하였으니 그 뜻은 바로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루려는 의리였다.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거처하던 집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그 증손자 병식秉植 병원秉元 형제 두 군이 일찍이 대구로 나가 살면서 노력한 결과 많은 재산을 모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6천만 원을 마련하여 재목을 바꾸고 규모를 넓혔다. 남북으로 5칸, 동서로 6칸이고, 가운데를 비워서 청사廳事로 삼았고 좌우를 통하게 하여 방으로 만들었는데 왼쪽은 편리하게 기거하거나 빈객을 맞이하는 곳으로 하였으며, 오른쪽은 책을 쌓아두거나 자제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하였다. 방의 서쪽에는 옥과 같은 맑은 샘을 뚫었으니 그 앞에 반 이랑 정도의 땅을 파서 물을 끌어 못을 만들었고 당의 앞에는 낭사廊舍 3칸을 만들어서 목욕재계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 동서東西를 통하게 하여 정원을 만들고 많은 기이한 꽃과 아름다운 나무를 심어서 아래위를 시원스레 통하게 하니 동네가 빛을 더하게 되었다. 이미 완성되자 나에게 이름을 붙여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그 지명을 취하여 도강道岡이라 재실에 편액하고 당은 모의慕義, 헌軒은 효우孝友, 문은 경덕景德으로 하였으니 이는 공의 행의行儀에서 취하여 오래도록 잊지 않도록 드러내어 보인 것이다. 이윽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가만히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서구문화가 유입되고부터 예의의 풍속이 더욱 쇠퇴하여 상하와 내외를 막론하고 옛날의 상도를 잃지 않음이 드물고 이름난 도시와 큰 고을이 더욱 심하여 선대의 사업과 옛날의 기물을 오두막과 헌신처럼 보아서 마음속에 까마득히 돌아보지 않거늘 오직 군이 선조를 높이느라 집을 지어 그 효우孝友와 절의節義의 행실을 밝히고 옛것을 사모하느라 집을 수리하여 그 추모와 보본報本의 정성을 다하였으니 이 또한 남다른 일로서 기록할 만하지 않겠는가. 군이 그 사적을 기록하고자 함에 내가 그 말을 막을 수 없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듣건대 완성하기가 어려운 것은 지키는 것이 더욱 어려운 것만 같지 못하고 수식한 아름다운 실상을 갖춘 아름다움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오늘 완성한 것으로는 그 장래의 지킴을 기필할 수 없고 내 말의 수식으로는 그 실상을 아름답게 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끝까지 지킬 수 있고 그 실상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장차 어디에 달린 것이겠는가. 이는 후손들이 마땅히 살펴서 경계해야 할 바이다.
종하宗下 강석황姜錫鎤 짓다.

 

도강재道岡齋 주련

堂有高明沒有荒 
忠孝遺風動萬方 
經營間架雖卑狹 
後孫誠蒙復迴光

 

모의당慕義堂 편액
효우헌孝友軒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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