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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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군 용덕면 소상리 진주강씨 사월정 沙月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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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경남의 진주강씨 누정재

2021. 10. 7.

2021.10.1. 용덕면 소상리 진주강씨 사월정沙月亭과 충열사忠烈祠 대문

의령군 용덕면 소상리 58(소상로4길 100-7)에는 진주강씨 박사공博士公 강계용姜啓庸의 9세손 청풍군수淸風郡守 강혜姜徯(1424-1485)의 후손 강수남姜壽男(1552~1592)이 강론하던 사월정沙月亭과 제향하는 충열사忠烈祠가 있다. 이곳을 구글지도는 위도 35°19'28.8"N 경도 128°18'47.2"E를 가리킨다.

 

충열사忠烈祠 대문 편액

사월정沙月亭과 충열사忠烈祠에 모신 강수남姜壽男(1552~1592)은 진주강씨 박사공博士公 1세 강계용姜啓庸의 13세손이다. 
박사공博士公으로부터 6세손 공목공恭穆公 시蓍, 7세손 통계공通溪公 강회중姜淮仲, 8세손 강안수姜安壽, 9세손 청풍군수淸風郡守 강혜姜徯(1424-1485), 10세손 강효정姜孝貞(1459-1513), 11세손 강세응姜世應(1475~1540)은 아들 넷을 두었으니, 12세손 강우姜瑀(1495~1517), 강무姜珷, 강서姜瑞(1510~1540), 강숙姜璹이다. 강숙姜璹의 아들 강수남姜壽男은 작은아버지 강서姜瑞에게 입양되었으며 강서姜瑞의 자字는 숙규叔圭 호號 매곡梅谷이다. 양아들 강수남姜壽男의 자字는 인수仁叟, 호는 사월정沙月亭, 시호 충렬忠烈이며, 강우姜瑀, 강서姜瑞와 함께 의령宜寧 칠정려七旌閭에 려각이 있다.

 

2021.10.1. 용덕면 소상리 진주강씨 사월정沙月亭

사월정沙月亭과 충열사忠烈祠가 위치한 곳은 남강이 용덕천을 만나는 바로 아래 돈대산이라는 작은 독뫼가 있는 곳으로 풍수적으로 삼봉산의 기운이 강을 만나는 지점이다. 사월정沙月亭과 충열사忠烈祠의 외삼문인 솟을대문에는 남향으로 충열사忠烈祠라 편액 했고, 마당을 넘어 직선상 내삼문에는 편액이 없으며 사당祠堂의 건물에는 충열사忠烈祠라 편액 했다. 마당의 우측에 사월정沙月亭이 위치하며 처마밑에는 사월정沙月亭이란 편액을 걸었으며, 내부 대청엔 충렬사복원기忠烈祠復原記와 사월정중건기沙月亭重建記, 원운原韻, 경차사월정원운敬次沙月亭原韻이 걸려 있다.

 

사월정沙月亭 편액
충렬사복원기忠烈祠復原記

忠烈祠復原 記
宜春治之東二十里許 有村曰井谷 昔有漁江書院焉 其祠曰忠烈 乃忠烈公沙月亭先生 姜公諱壽男之尸 祝之所也 士林以先生 爲矜式講學習禮焉 至高宗戊辰以邦禁被毁 士林一朝迷遑難抑鬱悒於 是建沙月亭 以俎豆之歷 一百五十年之光陰有不免 苟簡之嫌 爰到令丁亥之歲 宜寧鄕校典校 而兼沙月亭亭任 李斯文鍾慶 及忠烈公派 宗會長 仁錫甫 唱率儒林 及子姓協誠 籌劃招工貿材拓 基構架經時不久 而靈祠翼然起矣 將要揀吉還妥神牌盖 一百五十年 未遑之儒苑宿望於 是纔償可 以舊振儒林之氣也 先生寔博士公之十三代孫 而進士諱瑞之肖胤也 自幼有秀傑之禀 早遊南冥曹先生之門 得聞眞儒之言行 當何如宣祖 庚辰擢文科歷敡淸要 以廉直著世 及龍蛇之燹 染齒之賊襲冠 吾壃都城輒陷 御駕西遷 民生魚肉 國幾危亡那時 忠壯公沈垈 以圻伯欲復京城邀 公爲從事官先生 盡力贊劃 不幸遭倭奇 剿竟殉于 朔寧境宣祖 親製誄文 以致祭後肅宗 朝朝家贈天官長 賜諡忠烈命 綽稧士林立祠 妥靈於朔寧宜寧兩地 噫先生本一書生也 見危授命舍生取義 可謂志士之楷模 而克遵聖賢之訓者也宜哉 其揭虔以垂範於千秋也 役之將訖也 李斯文齎其文籍 而訪不侫謬屬 以譔記之責 眇末後生敢承當耶 然不侫稔聞 先生之志 行事功故考覈 其文籍以記之如右將 以之弘楊先生 忠烈於一世矣
歲丁亥冬至節文學博士慶尙大學校敎授
許捲洙 謹譔

 

충렬사복원기(忠烈祠復原記)[해문-허권수]
의령군(宜寧郡) 소재지에서 동쪽 20리쯤 가면 정곡(井谷)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옛날에 거기에 어양서원(漁陽書院)이 있었다. 서원의 사당(祠堂)을 충렬사(忠烈祠)라고 이름 했는데, 바로 충렬공(忠烈公) 사월정 선생(沙月亭先生) 강공(姜公) 휘(諱) 수남(壽男)을 향사(享祀)한 곳이다. 선비들이 선생을 존경할 만한 전형(典型)으로 삼아 학문을 익히고 몸을 수양해 왔다.
고종(高宗) 무진(戊辰 : 1868)년에 이르려 나라의 금지령(禁止令)으로 인하여 훼철(毁撤)을 당하니, 사림(士林)들이 하루아침에 갈 길을 잃고 허둥지둥하게 되었다. 억울하고 답답함을 억누를 수가 없었는데, 그런대로 사월정(沙月亭)을 건립하여 제례(祭禮)를 거행해온 것이 거의 150년 정도의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래도 구차하게 대충해 치운다는 문제점을 면할 수가 없었다.
금년 정해(丁亥 : 2007)년에 이르러 의령 향교(宜寧 鄕校) 전교(典校)이면서 사월정(沙月亭) 소임(所任)을 맡고 있는 선비 이 종경(李鍾慶)장이 충렬공파(忠烈公派) 종회장(宗會長) 인석(仁錫)과 함께 유림과 자손들을 규합하여 정성을 모아 사당을 복원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대목을 불러오고 목재를 구해들이고 터를 닦아 서로 얽고 짜 맞추어 오래지 않아 사당(祠堂)이 산뜻하게 섰다. 장차 좋은 날을 받아서 원래의 자리에 위패(位牌)를 다시 모시려고 한다. 대개 150년 동안 힘이 닿지 못했던 유림의 오랜 소원이 이에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이 일로 유림의 사기가 충분히 진작될 것이다.
선생은 박사공(博士公 : 諱師瞻)의 13대손이고, 진사(進士) 휘(諱) 서(瑞)의 훌륭한 아드님이다. 어려서부터 빼어난 자질이 있었는데, 일찍부터 남명(南冥) 조 선생(曹先生)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참된 선비의 언행(言行)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들었다.
선조(宣祖) 경진(庚辰 : 1570)년에 문과(文科)에 올라 깨끗하면서도 중요한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청렴하고 강직하다는 명성이 그 당시 세상에 잘 알려졌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오랑캐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오자, 서울은 바로 무너지고 임금의 행차는 서쪽으로 피난가고 백성들은 왜놈의 칼날에 죽어가니, 나라가 위태로워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 때 충장공(忠莊公) 심대(沈岱)는 경기도(京畿道) 관찰사(觀察使)를 맡아 서울을 탈환하고자 작전을 세우며 선생을 맞이하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선생은 힘을 다하여 도우고 작전을 하였지만, 왜적의 기습을 받아 마침내 삭령(朔寧) 땅에서 순국(殉國)하고 말았다.
선조(宣祖) 임금이 직접 뇌문(誄文 : 행적을 기술하여 애도하는 글)을 지어 신하를 보내어 제사를 드렸다.
그 뒤 숙종조(肅宗朝)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하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정려(旌閭)를 세울 것을 명령하였다. 사림(士林)에서는 삭령(朔寧)과 의령(宜寧)에 사당(祠堂)을 세워 공의 혼령(魂靈)을 모시었다.
아아! 선생은 본래 한 명의 선비였다. 위태로운 일을 보고서 목숨을 내놓고, 목숨을 버리고 의리(義理)를 취했으니, 뜻 있는 선비의 모범이면서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잘 따른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마땅하도다! 선생을 사당에 모셔서 제사지내어 그 모범됨을 후세에 전하는 일은.
공사가 거의 다 되어갈 무렵 이 이장(李丈)이 관계문헌을 지참하여 가지고 나를 방문하여 기문(記文)을 짓는 책임을 맡겼다. 나중에 태어난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어찌 이 일을 감당하겠는가? 그러나 불초는 공의 뜻과 행실과 공훈에 대해서 익히 들어왔기에, 그 문헌을 살펴서 이상과 같이 짓는다. 장차 이 기문을 통해서 선생의 충렬(忠烈)이 온 세상에 크게 알려져야 해야겠다.
정해(丁亥 : 二00七)년 동지에 문학박사 경상대학교(慶尙大學校) 교수 김해(金海) 허권수(許捲洙) 근찬(謹撰).

충렬공(忠烈公) 위패를 윈래 자리로 돌릴 때의 고유문(告由文)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일,
제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루는 것.
성인(聖人)께서 가르침 남겼건만,
실행하는 사람 몇이나 되었습니까?
위대하도다! 선생이시여,
참된 선비의 모범이십니다.
세상 평화로울 때는 자기 직분 다했고,
나라 위태로울 땐 왜적 무찔렀습니다.
유림(儒林)의 논의 세차게 일어나,
사당 세워 향사(享祀)해 왔습니다.
사당의 향불 오래도록 전해왔으니,
누가 그 덕(德) 흠앙(欽仰)치 않으리오?
나라의 금지령이 갑자기 엄격해져,
서원과 사당은 헐려 뜯겨졌습니다.
사월정(沙月亭)에서 구차하게 향사했지만,
의례(儀禮)가 빈약한 것 깊이 부끄러웠습니다.
사당 복원(復原)하여 위패(位牌) 원래대로 모시니,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위로가 됩니다.
좋은 날을 가려서 경건하게 고하나니,
신께서는 오셔서 흠향(歆饗)하시옵소서.
정해년(丁亥年) 동짓달 보름, 허권수(許捲洙) 근제(謹製)

 

사월정중건기沙月亭重建記

沙月亭重建記
郡東鼎岩之下 有一孤山 其山穿野 起脉如枤龍弄珠 大江橫帶 若半壁浮水垈山有亭 卽叔祖忠烈公 沙月亭先生 棲息講道之所也 幸而興於肄業之初 不幸而發於 兵燹之後 叔祖而孝門 美質萬曆 庚辰登第 歷兵曹正郎于 壬辰訌兩京失守 大駕蒙塵 要得贊畫選 爲佐幕奮發忠膽 卽赴血海 與忠壯公沈岱 尹慶元 忠愍公 梁誌 同時殉節於朔寧 宣廟親製誄 文略曰 先訣家人 誓死殉國 駐軍朔寧 胸鋒蝟集兵 孤氣寡鴻 毛命輕一 腔忱血天日獨明 主死於國 奴死於主 凜凜忠節 屹然千古 列聖朝因 賜旌贈諡額 而朔寧郡 有表節祠 宜寧井谷 有漁江院矣 健夫戊辰 以朝令一體掇院 士林無依歸之所 子姓無存著之地 胄孫鳳浩 以不匱之孝 尤爲槪然鳩 財募工拓舊礎 而創新之揭舊號 而瞻慕之 江山邱壑 無非當日 杖屨之攸 及氷霜雪月 盡是後人 羹墻之所 寓功告訖 屬諸不佞 以記何敢當何敢當 叔祖之貞 忠懿蹟於 洪藥泉 李星湖 權濟南 所撰 諡狀神道碑表旌記己述矣 無庸架疊 若夫亭之興廢 惟物無常 惟道爲甚 物之興廢 固在於天 而道之興廢 惟在於人也 僉族賢能 推此重建之誠 以慮夫先祖之道 或墜常在敬畏之心 函加修省之力 則先祖移孝 爲忠之道 其將復命矣 後裔尙賢 述先之美 奚但斯亭之重新而己哉 乃敢爲吾家世傳 忠孝之道伸勉焉
隆熙己酉冬十月 甲辰傍後孫 佑永謹記

사월정기
군의 동쪽 정암鼎岩 아래에 외로운 산이 있으니 그 산이 들을 뚫어 맥락을 일으킨 것이 마치 엎드린 용이 구슬을 희롱하는 것과 같고 큰 강이 비긴 띠처럼 석벽을 가로질러 떠 있는데 그 산머리에 세운 이 정자는 우리 숙조叔祖 충열공忠烈公 사월정沙月亭 선생이 여기에 계시면서 도덕을 강론한 곳이다. 다행히 이 집을 공부할 처음에 세웠더니 불행히도 난리 뒤에 폐하였다. 숙조께서 효도스런 문정에서 아름다운 바탕을 타고나서 만력 경진년에 문과에 오르시고 병조정랑兵曹正郎을 역임하시다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서울이 함락되고 임금이 파천하니 지혜로운 사람이 필요했는데 공이 막사로 뽑히어 충의를 분발하고 피바다에 내달아 싸우다가 충장공 심대沈岱와 윤경원尹慶元과 충민공 양지梁誌와 함께 삭령朔寧에서 순절하였으니 선조께서 친히 제문을 지어 가로되 집사람을 영렬하여 순국을 맹세하고 삭녕朔寧에 진을 치니 적의 무리 모여든다. 아군은 고단하고 기운조차 적었으며 나라 위해 받친 목숨 터럭같이 여겨지니 장차 속에 붉은 피는 햇빛처럼 맑았도다. 주인은 나라를 위해 죽었고 노복은 주인 따라 죽었으니 늠늠한 충절이 천고에 우뚝하다 하였고 여러 조정을 거쳐 오면서 정려旌閭와 증직贈職이며 시호諡號를 거듭 물려 주었고 삭녕朔寧 고을에 표절사表節祠와 의령 우무실에 어강서원漁江書院이 있었더니 무진년에 조정 명령으로 모두 철폐되어 선비들이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없었고 자손이 정성 드릴 땅이 없었더니 십세손 봉호鳳浩가 지극한 효성으로 더욱 안타깝게 생각하고 재물을 모으고 목공을 불러 옛터를 개척하고 새 집을 세우고 옛 현판을 걸어 추모하게 되니 강산을 바라봄에 그 당시의 막대기와 신이 비치지 않은 바가 없고 눈과 서리 같은 충절은 모두 뒷사람의 정성을 붙일 바이로다.
집 일이 다 되자 나에게 기문을 청하거늘 어찌 감히 감당하리오마는 우리 숙조의 곧은 충성과 아름다운 자취는 홍약천洪藥泉 이성호李星湖 권제남權濟南  이 지은 시장諡狀 신도비 정려기문에 이미 나타나 있으므로 거듭 말하지 않거니와 무릇 이 정자의 흥하고 폐함에 있어서는 물건은 본디 무상한 것이요 도는 더욱 그보다 심한 것이니 물건의 흥하고 폐함은 진실로 하늘에 있다 하겠거니와 도의 흥하고 폐함은 오직 사람에게 있는 것이니 여러 종족은 이 중건하는 정성을 다둑여 선조의 도덕이 혹 떨어질까 염려하여 항상 공경하고 두려운 마음을 갖고 더욱 닦고 살피는 힘을 더하게 되면 우리 선조의 효도를 옮겨 충성이 된 그 길이 다시 밝을 것이요 후손들의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이 어찌 이 정자의 중건뿐일 것인가 이에 우리 집 대대로 전해오는 충효를 위하여 힘쓰게 한다.
융희 기유(1909년) 겨울 10월 갑진일에 방손 우영佑永 삼가 짓다.

 

출처 및 참조
의령누정록-의령문화원/태화출판사(1997.12.27.)

 

원운原韻

鼎水澄澄抱遯墟 千秋高躅一精廬 
移孝爲忠諧素志 捨生取義質蒼虛
江山依舊遺芬在 棟宇重新閱歲餘 
悠悠曠感登斯夕 正直沙明月上初
隆熙己酉冬十月 甲辰傍孫佑永謹識

정암 강물 깨끗한 옛 터를 안았는데 천추에 높은 자취 이 한 채 집이로다. 
효도로서 충성됨은 본디부터 타고났고 삶을 놓고 취한 의는 창조주가 시킨 바라.
강산은 의구한데 옛 떨기 남아 있고 새집을 중건함은 한해 넘게 걸리었다.
느낀 마음 일으켜서 오르는 이 한밤에 모래는 밝았는데 달이 뜸은 처음이다.
융희 기유(1909년) 겨울 10월 갑진일에 방손 우영佑永 삼가 짓다.

 

경차사월정원운敬次沙月亭原韻

堂堂高躅窈明墟 堪說吾州此一廬
殉國貞忠星日揭 尋閒素抱水雲虛
平沙皓月依如古 百世淸風尙有餘
緬想偏深高景思 愀然起敬上軒初
鄕後生 宜春 南廷瑀謹稿

당당할 사 높은 자취 곱고도 밝은 땅에 우리 고을이 이 한 집을 자랑삼아 말하리라.
순국하신 곧은 충성 별과 해가 걸려 있고 한가함을 참는 회포 물구름이 비었구나.
흰 모래 밝은 달은 옛날과 다름없고 배세의 밝은 바람 오히려 남아있다.
흠모하는 이 생각이 유난히도 깊어져서 헌軒에 오르면서 더 슬피 공경 했소.
고을 후생 의춘 남정우南廷瑀가 삼가 짓다.

 

충열사忠烈祠

沙月亭重建上樑文
述夫敵愾殉身宸極之隆褒無憾藏修遺址 雲仍之肯構 有時棟宇重新 羹墻永慕恭 惟月軒姜先生 圭璋令質松柏貞姿襲 家庭詩禮嘉謨佩山海敬義眞訣至誠 孝友無間言於輿人餘事文章擅獨步於流輩擢魁科登龍榜夙抱經濟之才莅下邑割牛刀小 試盤錯之利及其沈淪郞署猶夫懾伏吏姦風裁獨特於群僚澤流可究於當世不幸邦運中否文恬 而武嬉忽値海氛傍騰天冥 而日晦列鎭瓦解生靈爛 爲鋒糜大駕塵蒙宗社澟如旒綴玆臣死主辱之日 亦儒生戎行之辰髻紅線訣家人已辦熊掌之必 取冒白刃衝賊陣寧畏虎口之深探 嗚乎寡不敵衆弱 不敵强畢竟主死於國奴死於主千古輝映長存忠烈之英名 一心從容豈無義理之素 講繄玆區絶俗 淸境寔我 公居業遺墟星霜屢移碧 草荒榛徒翳翳 山河不改寒沙朗月尙依依行客指點猶咨嗟裔孫 俛仰倍悽愴數椽僅構庳隘一門 始有依歸不可 爲悅於無財佇俟 來仍增美肯曰 有後於先祖粗伸追慕 餘誠爰擧脩樑載陳偉頌 
抛樑東 扶桑萬里日輪紅英靈宛與義同載烈烈丹衷照碧穹
抛樑南 鼎巖峙前水如藍淨掃狂塵登彼岸紅衣大將亦雄男
抛樑西 闍山千仞與天齊袖飜天窟南移鳳冥老高風在耳提
抛樑北 太一常居元不忒要使人心得如斯死生終始無佗惑
抛樑上 玉帝昭臨也默諒報國孤衷誓指天聽卑胡不有陰相
抛樑下 長江浩浩繞平野新亭縹渺聳觀瞻無限千秋曠感者
伏願上樑之後 制度漸備風聲 益張遊於斯 息於斯絃誦 於斯於斯 有進忠以繼 孝以繼 文學以繼 以繼無窮
月淵集卷之八/李道樞

 

충열사忠烈祠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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