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야생화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의령 정곡면 백곡리 진주강씨 모계재 慕溪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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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경남의 진주강씨 누정재

2021. 10. 11.

2021.10.3. 의령군 정곡면 백곡리 진주강씨 모계재慕溪齋 대문

의령군 정곡면 백곡리 1067-3(법정로1길 72-32)에는 박사공博士公의 7세손 대사간大司諫 열烈을 제례祭禮하는 모계재慕溪齋가 있다. 모계재慕溪齋는 백곡리 시목柿木마을 골짝에 있었으나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모계재慕溪齋가 위치한 이곳을 고도계는 높이 23m, 위도 35°20'54"N 경도 128°21'22"E를 가리킨다.

 

2021.10.3. 의령군 정곡면 백곡리 진주강씨 모계재慕溪齋

모계재慕溪齋의 가계도를 살펴보니, 진주강씨晋州姜氏 박사공파博士公派는 1세 계용啓庸, 2세 급사공給事公 인문引文, 3세 어사공御史公 사첨師瞻, 4세 대장군大將軍 창부昌富, 5세 재신宰臣 황보璜寶, 6세 여은공旅隱公 손기孫奇, 7세 대사간大司諫 열烈(1400~1465), 8세 절도사節度使 말동末同, 9세 상호군上護軍 윤贇으로 이어진다. 

 

2021.10.3. 의령군 정곡면 백곡리 진주강씨 모계재慕溪齋

모계재慕溪齋는 상량보의 기록을 볼 때 1974년 백곡리 시목柿木마을에 지어진 건물이나 1991년 지금의 장소로 옮겼을 것으로 추정한다. 1996년 재실 보수 협찬자 명단을 보니, 이후 제례가 있었겠지만 2021년 10월에 찾았을 때는 이미 폐가로 진행되어 있었고 벽이 무너져 집의 형체가 사라지는 것으로 볼 때 더 이상의 제향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다행히 재호齋號와 기문記文은 남아 있어 이 집이 모계재慕溪齋임을 알게 했다.

 

 모계재慕溪齋 편액

벽진碧珍 이명겸李鳴謙이 남긴 서계정사기西溪精舍記가 남아 있어 이곳에 옮겨 둔다.

서계정사기西溪精舍記
姜公諱烈號西溪官至大司諫 (1400~1465)

景泰四年春, 判院事姜公, 奉使南京. 粵明年復命朝, 因乞骸南歸, 都下送者數百兩. 至鄕之日, 有數間精舍, 可以伸四大. 於是翼其旁, 而稍廣之以便藏修, 其制不侈于雕, 不儉于隘, 其外則巋然一屋子也. 四戶八緫從衡九架, 實之以圖書․几案․硏墨․爐檠之屬, 其萊歌詠琴嘯, 其事坐臥起居, 其應門者村秀才子若干人也. 適余之來候也, 屬之以記, 且求新名, 舍觀, 夫精舍在村西溪上, 背南向北之麓, 脩竹擎其簷, 奇松覆其脊, 層巒疊峯, 環擁于四面, 而德川之流, 汨瀧於欄楯之下, 丹山之霞, 蓊鬱於林樾之祭, 直與桃峴歸鳥, 東峰宿雲, 相迎送於崖壑縹渺之間. 斯亦溪山之絶勝, 而夫夫之驪灰馬糞者, 固其難得矣. 公得專有, 而預求之以竢, 夫年老致仕之日, 故其原曰 : “額西溪精舍.” 竊以爲西者秋也成也, 若有取於成功而去者也. 溪者谷也下也, 老氏所爲天下谿者, 是名也. 雖卽其地宇實合於休退隱遁之義 盍回而勿革? 諸公曰 : “諾”  余乃援筆寫顔諸兩柱之間, 又各逐楣而題之, 稍殺其刻曰 : “知止”者, 左之軒也. 曰 : “晩退”者, 右之堂也. 就其室之兆而特書曰 : “望斗”者以表其江湖, 亦憂退不忘君之義耳. 是以爲之記. 
通禮院左通禮碧珍李鳴謙, 書. 

서계정사기 
강공姜公의 이름은 렬烈, 호는號 서계西溪, 관직官職은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다.

경태景泰1) 4년 봄에 판원사判院事2)강공姜公이 사명使命3)을 받들어 남경南京4)에 들어가, 이듬해 조정에 복명復命하고는 걸해乞骸5)를 청하여 남으로 돌아올 새, 서울에서 내려보낸 것이 수백 량인데 고향에 이르렀을 때 수간數間의 정사精舍가 있어 사지를 크게 벌리고 누울만 하였다. 이에 그 옆을 벌리고 조금 널려서 수양修養하며 지내기 편하도록 하니, 그 체제體制가 사치奢侈하게 다듬지 아니하고 좁아도 모자란 듯하지 않으며 그 밖은 규연巋然한 한 집체이다. 사호팔총四戶八緫이 종형從衡으로 구가九架인데 도서圖書․궤안几案․연묵硏墨․노경爐檠 등 속을 채우고 가영歌詠과 금소琴嘯는 뒤로하고 공부하며 기거起居하는데 사용하니 그 문門에 드나드는 사람이 시골 수재 약간인若干人이다. 
마침 내가 문안차 내방하니 기문記文을 청하고 또 새 이름을 구求하기에, 경관景觀을 보니 무릇 정사精舍는 마을 서쪽 계곡溪谷위의 북향北向의 산언저리에 위치하여 빼어난 대나무가 처마 위로 솟고 기이奇異한 소나무가 뒤를 감싸며, 높은 산과 첩첩의 봉우리가 사방을 둘렀고 덕천강德川江이 난간欄干 아래에 용솟음치며 붉게 물든 산 노을이 수풀 그늘 사이로 옹울蓊鬱하는데, 다만 도현桃峴으로 돌아가는 새와 동봉東峰에 머무는 구름이 가파른 골짜기의 표묘縹渺한 사이로 서로 맞이하고 보내니 이 또한 계산溪山의 절경絶景이다. 세속世俗 사람들로서는 진실로 얻기 어려우나 공公이 오로지하여 집을 구하고 때를 기다렸으니, 무릇 연로하여 벼슬에서 물러나는 날이다. 그러므로 그 집의 본체를 “서계정사西溪精舍”라 하였으되, “서자西者는 추秋라는 뜻이며, 이룬다는 뜻이니, 예컨대 공功을 이루고 떠난다는 것에서 뜻을 취하였고, 계자溪者는 곡谷이라는 뜻이며 내려간다는 뜻이니, 노자老子6)의 이른바 천하의 계곡溪谷이란 것이 바로 이를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 땅과 집이 휴퇴休退하여 은둔隱遁하는 뜻에 실로 합치合致된들 어찌 도리어 고쳐 마지않겠는가?”하니 제공들이 “그렇습니다.”하였다. 
나는 이내 양 기둥 사이에다 글을 쓰고 또 각기 문을 밀치고 쓰되, 모가 나는 데를 조금 깎고 “지지헌知止軒”라고 한 것은 왼쪽 집이요, “만퇴당晩退堂”이라 한 것은 오른쪽 집이며, 그 집 앞쪽으로 나아가 별도로 “망두실望斗室”이라 쓰서 강호江湖를 표表하니 이 또한 물러나서도 임금을 잊지 못한다는 뜻인 것이다. 이로써 기문記文을 삼고저 하노라! 
통예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 벽진碧珍 이명겸李鳴謙이 쓰다.
丁亥 4月 後孫 李成斗 譯註

*서계정사에 관하여 의령의 진주강씨문의 기록을 참고로 붙인다. "의령 입향조(유곡면 세간리)는 박사공의 7세 종손인 서계공(西溪公:휘,烈)이다. 서계공은 세종 문종 단종 때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을 거처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낸 분으로서西溪公 1438년 휴양하기를 간청하여 1441년(세종23년) 외가外家가 있는 의령군 유곡면 세간에 별장을 지어두고 가산家産 증식에 힘을 쏟아 자손출세에 바탕을 마련하였다는 기록과 1551년 다시 출사하여 1552년 삼도 지휘사로 삼도 민정을 살핀 후 시급한 민정 13조를 올리고 1453(계유년) 중국 사신으로 다녀와서 정국이 잘못되어 가는 것을 감지하고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마을 서편에 서계정사西溪精舍를 지어 침실 북쪽에 거실을 만들어 만구재晩構齋라고 부르며 매월 초 하루 강회講會의 날로 정하였다는 기록이 서계공西溪公을 찾아와 서계정사기西溪精舍記를 찬한 감사監司 이명겸李鳴謙의 기문記文이 있고.....(재경 향우, 의령강씨 ‘寓慕齋’ 방문, 재경의령군강씨화수회 주관으로[2012-06-23 오후 2:59:00 의령신문] "

1) 경태景泰 : 명나라 경제景帝의 연호, 단종 원년인 계유년(1453).
2) 판원사判院事 : 조선시대 초기 중추원의 정2품벼슬, 
3) 사명使命 : 사신의 임무를 띠고 파견됨. 
4) 남경南京 : 중국의 난징을 일컬음. 
5) 을해乞骸 : 유해遺骸를 구걸求乞한다는 뜻으로, 연로年老함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함을 일컬음. 
6) 노자老子 : 姓은 李, 이름은 耳, 자는 백양伯陽, 또는 담聃. 노군老君 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신성화되었다. 도교경전인 『道德經』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출처] 
다음 블로그-벽진이씨(碧珍李氏)/늘푸른나무

 

모계재기慕溪齋記

慕溪齋記
晉陽姜氏於宜寧最爲大族 其先有判院事公諱烈 生於陜川 寘別莊於 宜之世干里曰 西溪精舍 及其歷仕華顯 龍眷方隆 而適値莊陵 靖灘之秋 葉官歸老于 是卒仍葬于 隣里貞骨之白谷 後世子孫 因世居其鄕 而薦祀于 墓然西溪之舍 中己毁墟者 不知其年代矣 後孫亦復散播 各里不能知 其初之以世干 爲其者多 而薦年諸姜氏 相與議以爲世千之基 旣屬他人 則西溪之舍 未可卒復 而白谷之墓 齋宿無所 是於經營 爲急乃合力 爲齋其下 而扁曰 慕溪盖亦兼 以昭慕溪之舊 而俾知所墓也 炳吉以諸族意 來請余記 公之履歷 及西溪事蹟 有崔舍人山斗 李通禮嗚謙 姜木溪渾 諸賢所著 不患於無其徵也 最可擧者 公之拔擢 登庸在英 顯二陵朝 榮淚之盛 不下於集賢優養 而其再使中國 在景泰癸酉 卽端廟嗣服 改元之年也 其歸而見 朝著易置 禪廢有兆 則不日決去 視身外如浮雲 漢然所顧變 其秉義之貞 與世所稱生六臣者 少無差異而 而又從之泯 其名迹其事不尤難者乎 當是時耕隱 李靖簡公自託昏 憒不聞時事 公以故人與之同 調而絶不相還往 惟以懷詠 自攄其志所 在豈不可見乎 行狀之特提此事 而記序之只 稱圖書琴嘯 軒冕桎梏者 盖亦時難言 而爲公含蓄 其意者也 夫天下之理 不蓄則不洩 公之歸隱 而又泯其迹 可謂蹴之至深矣 則其後屬之遍 布一鄕世 爲大族豈非其洩之驗 歟爲姜氏者 當體此意 而益知祖謀之可 爲慕也哉
歲白牛鷄月上旬日 義城 金榥 記

모계재기
진양강씨가 의령宜寧에서 가장 큰 대성이다. 그 선대에 판원사공判院事公이신 이름이 열烈¹⁾이 있었으니 합천陜川에서 태어났고 의령 세간리世干里에 서계정사西溪精舍라는 재실이 있었으니 미처 그가 높은 벼슬을 지내고 두터운 은총을 받았다가 마침 단종端宗이 세조世祖에게 양위하는 때를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돌아와서 늙어 세상을 떠나니 인하여 인근 마을 백곡리白谷里에 장사했다. 후세 자손들이 이로 인해 대대로 그 고을에 살며 묘제墓祭를 드리고 있으나 서계정사는 이미 폐허가 되어 그 연대도 알지 못하고 후손들 역시 각처에 흩어져 그들이 처음으로 세간리에 터를 잡아 살았다는 것을 능히 알지 못하는 이가 많다. 
근년에 여러 강씨들이 서로 모여 의논하되 세간리 옛터는 이미 타인에게 넘겨졌으니 서계정사는 갑자기 복원하지 못할 것이요 백곡 선산에 재계하며 유숙할 집이 없으니 이것을 마련하는 것이 급한 일이라 하고 이에 협력하여 제실을 묘 아래에 세우고 모계재慕溪齋라 이름하니 대개 서계정사의 옛것을 함께 밝혀 추모할 바를 알게 함이다.
병길炳吉이가 이에 제족諸族의 뜻으로 나한테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공의 이력과 서계정사 사적은 최사인崔舍人 산두山斗와 이통례李通禮 오겸嗚謙과 강목계姜木溪 혼渾과 같은 제현들의 저술이 있으니 상고하지 못할 염려가 없으나 가장 높이 거론할 것은 공이 세종 문종 두 임금에게 높이 등용되어 영화와 총애를 크게 받음이 집현전 학사들의 대우에 못지않았으니 그가 두 번째 사신을 가게 된 경태景泰 계유년癸酉年²⁾은 즉 단종 즉위 원년이었다. 공이 돌아와서 조정의 움직임을 보니 단종 폐위 조짐이 있은 즉, 즉시 결연히 물러 나와 몸 밖의 부귀를 뜬구름 보듯 하였다. 그러나 단종을 연모하는 곧은 의리는 세인들이 칭송하는 생육신과 조금도 차별됨이 없으며 또한 따라서 종적을 없게한 것은 그때의 사정이 더욱 난처한 것이 아니었는가. 당시에 경은 이정간공李靖簡公이 스스로 정신없는 듯하여 세상일을 모르는 것 같이 하였으니 공이 친구간이요 같은 길을 것는 사람이되 절대로 서로 가고 오지 않고 회포를 시로 읊어 펴 보였으니 그 뜻 둔 바를 어찌 가히 보지 못하리요. 행장에는 이 사실을 특별히 들추었으나 기서記序에는 다만 책과 거문고로 소일하며 벼슬을 버렸다고만 지칭하였으니 역시 그때에 말하기가 어려움으로 공을 위하여 그 뜻을 함축한 것이다. 대개 천하 이치가 쌓이지 않으면 퍼지지 않는 것이니 공이 돌아와서 세상에 숨어 살고 또한 그 자취마저 없게 한 것은 가히 쌓임이 지극히 깊다고 말할 수 있은 즉 그 후손들이 일향에 널리 퍼져 대성이 된 것은 어찌 이 퍼지는 징험이 아니겠는가. 강씨들은 마땅히 이 뜻을 법도삼아 더욱 조선의 모훈謀訓을 알고서 추모지심을 가져야 될 것이다.
1961년 8월 상순 의성 김황金榥 짓다.

【주석】
열烈¹⁾ : 강열姜烈(1400~1465)의 자는 비승丕承, 호는 서계西溪. 1432년(세종 14) 사마시와 1435년(세종 17) 명경과明經科에 뽑혀 승문원정자, 박사, 검열, 전적,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고, 1436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사간원司諫院 정언, 교서, 교리, 헌납, 지제교知製敎,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고 1452년(문종 2) 삼로지휘사三路指揮使가 되어 민정을 살핀 뒤 급한 일 13가지를 임금에게 알리니 받아들이고 가선대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특진 되었다. 1453년 봉사奉使가 되어 명나라에 갈 때 여러 사대부가 시를 지어 송별해 주었다. 고향 문림에서 고망대高望臺가 있는 의령 세간世干으로 옮겼는데 그곳에는 음주도 하고 활을 쏘며서 심신을 닦던 서계정사西溪精舍 터가 있고 지금의 사터이다. 공은 이맹전李孟專과 관란 원호元昊와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회포를 풀었다.
묘는 의령군 정곡면 백곡 해좌亥坐에 있다. 농석礱石의 봉고封高가 4자이다. 비명은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1483~1536)가 짓고, 묘지명은 참의 양희梁僖(1515~1581)가 지었다. 1991년 봄 묘역을 정화하고 백곡 감나무골에 모계재慕溪齋가 있었으나 지금은 정곡면 백곡리 1067-3(법정로1길 72-32)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광주 노씨盧氏, 총랑摠郞 사겸士謙의 따님으로 1403년에 태어나 1465년에 돌아가셨다. 묘는 합부이다. [출처:http://kangssi.kr/bagpa/e-hwangbo.htm]
경태景泰 계유년癸酉年²⁾ : 명나라 경제景帝의 연호, 단종 원년인 계유년癸酉年(1453)

 

출처 및 참조
의령누정록-의령문화원/태화출판사(1997.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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