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야생화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의령군 정곡면 죽전리 진주강씨 모청재 慕淸齋

댓글 0

역사의 기록/경남의 진주강씨 누정재

2021. 10. 15.

2021.10.13. 의령군 정곡면 죽전리 모청재慕淸齋

의령군 정곡면 죽전리 773-4(정곡2길 91-5)에는 진주강씨 박사공博士公의 7세손 통계공通溪公 회중淮仲(1360~1421)의 후손 모청공慕淸公을 제례祭禮하는 모청재慕淸齋가 있다. 이곳을 고도계는 높이 45m, 위도 35°22'21"N 경도 128°18'19"E를 가리킨다. 

 

2021.10.13. 의령군 정곡면 죽전리 모청재慕淸齋

모청재慕淸齋는 박사공博士公의 7세손 통계공通溪公 회중淮仲(1360~1421)까지의 가계도를 알 수 있고 모청공慕淸公이 누구인지 찾지 못했다. 대동보 20권을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모청재慕淸齋는 죽전의 끝 마을에서 좌측편에 홀로 있는 집으로 대문 앞에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어 표식이 된다. 재실은 이미 지붕이 내려앉아 폐가가 된 상태인데 모청재慕淸齋 편액과 모청재기慕淸齋記 편액만 비를 맞지 않는 모습이다. 

 

모청재慕淸齋 편액
모청재기慕淸齋記

慕淸齋記
我先祖通溪先生 子孫之遍居域中者 其麗不幾萬 而居于宜寧者 以忠孝烈蒙綽楔之典者前後相望不於吳中所罕倫無愧幷列 於紫陽之編 何其盛哉繼 而後孫趾美述蹟尤可推醴泉 有源靈芝有根也 今則信祚虎錫叔侄兩人 以其祖若考慕淸公齋號未 有扁額之揭 諏稟于諸 父點址於正谷 兩世墳塋之下營建 慕淸齋 以寓羹墻之慕兼春秋澆奠時 齋宿之所 介其族兄俊錫請記 於信赫盖以至親之誼不以不文而等棄也 余不覺擊節曰 夫孝者百行之原也 人家之興替盛衰於是焉 幾爲而兩君乃有是擧推知家庭擩染之有自而天姿之美 固不誣也 矧乎叔季之世 年少者之顚覆 祖先典型不翅 十常八九 乃虎錫獨保 舊日精神稱訟之者 孰不異口一舌哉 惟願從令等亭之時 思祖先謨訓之美 講忠孝之道 父嚴其詔兄篤其訓 以是爲日用恒茶飯 則王氏之庭槐蔭長滿矣 詩曰 孝子不匱 永錫爾類 若夫風煙雲物之變態 山川水石之形勝 不淂不闕 略云
檀紀四千三百十三年 庚申 鹿人從 宗末 信赫謹記

모청재기
우리 선조 통계通溪선생의 후손이 전국에 흩어져서 사는 자, 그 수효가 몇만이던가. 의령에 사는 후손은 충효열忠孝烈로 정려의 은전恩典을 받아 앞 어른 뒤 자손이 서로 줄을 지었으니, 다른 집안에 짝하기 드문 일일 뿐만 아니라 주자의 자양편紫陽編에 비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니 얼마나 드높은 일인가. 후손들이 대를 이어서 아름다운 발자취와 펴놓은 행적이 단샘의 근원과 성스런 지초에 뿌리 내림과 같음을 미루어 알 수가 있도다. 이제 신조信祚와 호석虎錫 숙질 두 분이 그 조부와 선조 모청공慕淸公의 재호를 현판하여 걸지 못하였기에 여러 어른에게 아뢰고 물어서 정곡땅 부자의 묘소 아래 재실을 세웠다. 모청재慕淸齋는 조선祖先을 숭모하여 봄가을 잔 드릴 때 머무르는 집이라 호석虎錫이 그 족형 준석俊錫으로 하여금 신혁信赫에게 기문을 청하거늘 모두가 지극히 친한 족의로 글을 잘하지 못하여도 사양할 수 없어서 무릅을 쳐 탄복함을 깨닫지 못하나 말하기를 효도는 일백가지 행실의 근본이라 하였다. 가문이 일어나고 쇠잔함도 이에 연유하거늘 신조와 호석의 가문의 가르침을 익혀 들었으니 스스로 타고난 자질을 속일 수 없었노라. 하물며 혼탁한 이 세상에 젊은이가 조선祖先의 법도를 어김이 예사인데 호석은 독특히 옛날의 정신을 보전하였으니 칭송하는 사람이 누구나 한치의 말도 틀림이 없는지라 원하건대 이 정자에 오를 때는 조선祖先의 아름다운 가르침을 사모하고 충과 효의 도리를 펴서 부모는 그 엄격함을 밝히고 형제간은 그 돈독함을 가르쳐 이를 항시 생활화한다면 왕씨王氏의 집뜰 홰나무 그늘처럼 그득하리라. 시문詩文에 말하기를 효자의 효도 다함이 없는지라 너와 같은 자손을 영원히 주리라 하였다. 바람 연기 구름 같은 세태의 변천 산천수석에 대한 경치는 운운하지 아니하고 간략히 몇마디 쓰노라.
1980년 9월 종말단 신혁信赫

 

출처 및 참조
의령누정록-의령문화원/태화출판사(1997.12.27.)

사업자 정보 표시
| | | 사업자 등록번호 : -- | TEL : --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