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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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군 유곡면 덕천리 진주강씨 자암정 紫巖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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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경남의 진주강씨 누정재

2021. 10. 20.

2021.10.9. 의령 유곡면 덕천리 진주강씨 자암정紫巖亭 전경

유곡면 덕천리 469(청정로16길 57-35)에는 진주강씨 박사공博士公의 13세손 자암공紫巖公 경승慶昇(1577~1633)이 아버지 신재공頣齋公 희熺(1542~1593)를 추모하는 마음에서 유곡천 단애斷崖 위에 정자를 짓고 망추재望楸齋라 이름했다가 이후 자암정紫巖亭이라는 현판을 다시 달았다. 이곳을 고도계는 높이 63m, 위도 35°25'50"N 경도 128°19'06"E를 가리킨다.

 

2021.10.9. 의령 유곡면 덕천리 진주강씨 자암정紫巖亭 전경2

진주강씨晋州姜氏 박사공파博士公派는 1세 계용啓庸, 2세 급사공給事公 인문引文, 3세 어사공御史公 사첨師瞻, 4세 대장군大將軍 창부昌富, 5세 재신宰臣 황보璜寶, 6세 여은공旅隱公 손기孫奇, 7세 대사간大司諫 열烈, 8세 절도사節度使 말동末同, 9세 상호군上護軍 빈贇, 10세 육암공六庵公 응규應奎, 11세 어모장군禦侮將軍 몽인夢麟(1524~1583), 12세 신재공頣齋公 희熺(1542~1593), 13세 자암공紫巖公 경승慶昇(1577~1633)으로 이어지는데 자암공紫巖公은 아들이 둘이니 14세손 증판결사贈判決事 신지愼之(1596~辛未)와 통훈공通訓公 연지淵之(1604~庚辰)이다.

 

2021.10.9. 의령 유곡면 덕천리 출렁다리

자암정紫巖亭은 유곡천의 절벽 위에 자암공紫巖公 경승慶昇(1577~1633)이 지은 정자이다. 의령 옥녀봉으로 가는 유곡천을 가로지르는 출렁다리를 지나면 유곡천의 단애 위에 자암정이 나타난다. 처마 밑에는 자암정紫巖亭이라 편액 했고 방문위에는 망추재望楸齋라 편액 했으며, 정자의 대청 위에는 자암정중수기紫巖亭重修記, 자암정중건기紫巖亭重建記 2편과 자암공의 시판과 6세손 세순世淳, 세재世濟가 읊은 시와 7세손 봉길鳳吉, 봉국鳳國, 봉관鳳觀, 방후손 봉해鳳海가 읊은 시들이 걸려 있고, , 족손 건흠建欽, 서기순徐麒淳, 정기필鄭夔弼, 조한규趙漢珪, 정기상鄭璣相 등이 읊은 시판이 걸려 있다.

 

2021.10.9. 의령 유곡면 덕천리 진주강씨 자암정紫巖亭 모습

贈通訓大夫軍資監正紫巖先生姜公行狀
公諱慶昇字善追系出晉陽麗朝元帥以式之後國 ▩博士啓庸十二代孫也其先世冠冕之蕃衍門戶 之憚爀固不讓於他族矣至於中葉僑居于宜春之 東世千爲▩梓之鄕而因居焉大司諫諱烈卽公之 六世也考諱熺以學行名於世追贈吏曺參議妣 靑松沈氏父渾以孝行退溪南冥兩先生交薦官至 丹城縣監萬曆丁丑十月十五日公生于世干里第 ▩孝於親友於弟爲日用事業及至壬辰喪亂之日 參議公從忘憂倡義立殣於栗津公年十六廬墓三 年不脫經帶寢苫歠粥喪葬凡節一遵朱文公家禮 終制後築亭于先墓案對夜眉山下矗石之中巖紫 而潭淸矣因自號曰紫巖翁亭之上有水廻齋公與 數三先輩講劘遊憩其洞壑之深邃亭榭之淸淨與 數里許郭忘憂之龍淵臺李處士之四美臺竝稱形 勝於當世者也辛丑春公從鄭桐溪成浮査李芝峰 諸賢聯名叫閽伸崔守愚寃歸路與同疏諸賢講 會于水廻齋玉女峰下有鷄黍約錄公每與其三弟 爰處玆亭强勉學問遂成大儒第二曰守初堂諱吉昇第三曰櫟翁諱顯昇第四曰秀士諱敏昇其友愛 敦睦人莫及焉猗歟休哉公克承庭訓又隆師友肥 遯林泉不見知而無悶深衣博帶恬淡危坐奉先有 儀自成柯則裕後有法貽厥燕謨玩賾經傳一心孜 孜詩之思無邪書之灝疆易之時義春秋之謹嚴魯 語之微辭奧旨鄒書之遏慾存理學之修齊庸之首 尾天字之義無不曲解而旁通敎授生徒鄕黨宗師 道伯薦拔故其事實行略俱載於輿地勝覽且於昏 朝廢母后之日抗章赴京中道得病輿歸鄕里歿 於崇禎癸酉三月初九日葬于丹原先塋下酉坐享年五十七惜乎天若假壽踐履益明造詣尤精玉帛 蒲輪相屬於紫巖之谷矣當與趙澗松詩曰龍山之 趙馬山姜同是藜羹糲飯腸斗屋簞瓢姜計活孤舟 蓑芝趙行裝趙能飮酒詩偏拙姜善爲詩酒不長窮 道年來皆白髮莫論優劣莫相忘澗松有詩曰平生 景慕紫巖翁路八荒墟益想風絃誦變爲山鳥語碧 溪嗚咽夕陽中於此兩詩蓋見結交托契之敦也公 之配昌寧曺氏受天之女歿于甲寅五月初一日而 與公合墳有子愼之詞藻夙發以文章大擅其十二 昆季皆以文章學術鄕解及東堂發無不中而爲江右文學大方家此乃公餘力敎勉之驗也其從子徽 之以櫟翁公之子事親至孝甘軟之供靡不用極江 鯉登舟山猪八廚其誠孝有自來於公矣景廟癸 卯贈微之戶曺佐卽正廟庚子贈公軍資監 正贈愼之判決事徽之弟獻之早年登科通籍史 局玉堂官至縣監於乎公之誠孝之䔍學問之精生 宜有薦歿合有旌而事與時違尙欠盛典豈但後學 之抑菀必有百世之公論矣公之五代孫大悅見余 而請其行略余以外裔不敢終辭而遂撰焉極知僭 越殊切悚赦

後學興州安錫魯撰

 

2021.10.9. 의령 유곡면 덕천리 진주강씨 자암정紫巖亭 내부 모습
자암정 현판 모습
자암정紫巖亭 편액

紫巖亭韻次張致重
笙鶴千年去不歸紫巖亭畔碧苔衣古礎排雲留石 氣新簷得日罷林霏吾輩今行探絶勝君家先蹟閳 幽微臨岐更話尋眞約猿鳥秋山夢想依李庭德而述 揖讓亭前客子歸葉舟登處振荷衣靑巖削立粧朱 刻綠水狂奔嘖白霏日煖風輕時興晩星稀月小澗 途微先賢遺躅藏修地談道論文有所依李鉉字大甫 千載沂雩憶詠歸紫巖西畔拂塵衣危欄出岫當朝 旭少艇橫潭斂夕霏地待高人殊顯晦境隨吾道入 精微莊修幸得先賢躅南士從今有所依李基一 聖執

 

망추재望楸齋 편액
자암정중수기紫巖亭重修記
자암정중건기紫巖亭重建記

紫巖亭重建記
東邦以孝義上下相尙者久矣 孝義行則風化洽 而國治家齋 孝義廢則風化替 而國夷家敗 故義以殉國 朝庭褒嘉之孝 以承家鄕黨 矜式之此其常也 吾先祖頣齋府君 與伯氏觀齋公孝事先公司禦府君 旣篤且至 遭二艱廬墓 以從制從學俱 以聯璧見稱於當世 及龍蛇搶攘之日 頣齋府君率家 撞若干挺身赴鬪竟 殉義于栗津 卽時薦聞朝廷贈史議 胤子紫巖守初櫟翁晩悟四府君 叫號幾絶旣殯 而冒死圖復讐志未得伸 而抱終天之痛 服閱而構數椽于 武夷山下九曲溪上 扁曰望楸 以寓終身慕之義 已而改其楣曰紫巖 盖以峭壁上兩石巖 與紫陽詩 武夷四曲相符 而巖壁苔蘚皆成紫紋故也 日處其中對案講學 若將終老 當時如鄭東溪趙澗松成浮査李芝峯 諸先生約鷄黍會于此歲 以爲當何其韙哉 後爲諸先生之薦 贈軍資監正而止 又何命之嗇也 其後裔孫易桶改瓦 制稍踰舊歷 數百祀屢葺不替 鄕省之士 踵相聚集 論文講道 彬彬多可記也 挽近吾門凋弊 亭亦從而爲風雨幾 懷過之輒怵目 咨嗟者久矣 逮癸酉冬 吾宗晋桓氏 大聚諸宗相謂曰 先祖與諸賢 芬躅之地 而其忍廢諸 諸宗各自樂出義 炳台炳三炳榮請專任 而記之遂 募工賊事取邱木 以充其材斲巖石 以寬其址 崇棟偉宇視 昔增美堦死庭垣竝加墁治 仍揭舊刻詩與記 不幾月而竣功 於是上下翔鱗 左右花石俱 是以娛觀瞻 嗚呼 覆載之間 旣有國有家 則義不可 以磨滅孝不可 以廢弛令日 吾宗之孱劣 而保有斯亭者 寔賴先祖考以孝義 而貽後裔也 凡爲後裔者 爰居爰處 念玆在玆 則何憂乎 先謨之不守 亦何憂乎 斯亭之易廢也 遂書此以勖諸宗焉
閼逢閹茂陽復月 櫟翁 八世孫 寅洙 謹識

자암정중건기
우리 동방東邦은 효孝와 의義로써 위아래가 서로 숭상한지 오래다. 효의孝義를 행한 즉 풍속됨이 흡족하여서 나라가 다스려지고 집도 다스려지며 효의孝義를 폐廢한즉 풍속이 시들어져서 나라는 오랑캐 되고 집은 패敗하는 고로 의義로써 나라 위해 죽으면 조정朝庭이 상 주어 칭찬하고 효로써 집을 이어면, 향당鄕黨이 자랑하여 본받으니 이것이 그 떳떳함이로다. 나의 선조 신재부군頣齋府君¹⁾이 맏형인 관재공觀齋公²⁾과 더불어 선친 사어부군司禦府君을 효도해 섬기기를 이미 돈독히 하였고 또 두 번 조상을 만남에 이르러서는 무덤 곁에 집을 지어서 복제에 쫓았고 배움을 쫓음에는 함께 잇닿은 구슬이라 하면서 당세에서 일컬음을 보았다.임진왜란으로 어수선한 날에 미치게 되자 신재부군頣齋府君이 집안의 젊은이 약간을 거느려서 몸을 빼내어 싸움터로 갔다가 마침내 율진栗津에서 순의殉義하니 즉시로 조정에 들리어서 증직이 이조참의吏曹參議다. 맏아들 자암紫巖³⁾과 수초守初 역옹櫟翁 만오晩悟 4형제가 부르짖어 울어서 거의 기절할 뻔하였다. 빈소를 마련하고는 죽음을 무릅쓰고 복수를 도모하였는데 뜻을 펴지 못해서 하늘의 고통이 끝남을 품었다. 상복 입기를 지나서 두어칸의 집을 무이산구곡계武夷山九曲溪에다 세우고서 현판해 가로되 망추望楸라 하고 종신토록 사모하는 뜻에 붙였다. 그러고서 그 현판을 고쳐 가로되 자암紫巖이라 함은 대개 높은 암벽에 올라보면 사곡동서양석암四曲東西兩石巖이란 무이산구곡시武夷山九曲詩와 더불어 상부하여서 암벽의 이끼가 모두 붉은 문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리라 날마다 그 가운데에 처하여서 책상을 대하여 학문을 닦고 연구하며 장차 늙음을 마칠 것 같았다. 당시에 정동계鄭東溪 조간송趙澗松 성부사成浮査 이지봉李芝峯 같은 여러 선생과 닭잡고 기장밥으로 우의를 다지는 약속을 여기에 모여서 하였다. 해마다 하기로 하였으니 어찌 그 아름다움에 닿았던가 뒤에 여러 선생의 천거로 증직이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되고서 그치니 무슨 운명이 그렇게도 인색한고, 그의 후손이 서까래를 바꾸고 기와를 고치니 제도가 점점 옛것을 넘어서서 수백년을 지나온지라 시들지 않게 여러번 보수하니 향내 인사가 이어져 서로 모여서 글을 논하고 도를 강함이 빛나서 가히 기록할만 한 것도 많았다 가까운 옛날에 우리 문중이 시들어 해지니 정자亭子 또한 쫓아서 풍우로 거의 무너지게 되었는지라 지나다가 문득 두려운 눈으로 한숨만 쉰지가 오래이다. 계유년癸酉年 겨울에 미치어서 나의 친족 진환씨晋桓氏가 여러친족을 크게 모아서 서로 이르며 가로되 선조가 여러 어진이와 더불어 꽃다운 발자취의 땅인데 차마 폐하겠나 하니 여러친족이 스스로 즐겁게 의연금을 냈는데 병태炳台 병삼炳三 병영炳榮이 전임하여서 다스리기를 자청하기에 드디어 공인工人을 뽑아서 일을 시키고 무덤가 솔을 취하여서 재목에 충당하고 암석을 깎아서 터를 넓히니 높은 기둥과 웅장한 집은 옛것보다 더욱 아름다워서 층계섬돌과 담장에도 아울러 손질하고 인해 옛날 새겨둔 시詩와 기문記文을 걸어 몇 달이 안되어서 준공하니 이제야 위아래는 나래와 비늘이요. 좌우에는 꽃과 돌이 함께 즐겨보기에 족하였다. 슬퍼도다. 나라가 엎어짐이 시작되던 사이에 처하여서 이미 나라와 집을 두게된즉 의義는 가히 마멸하지 못하고 효孝는 가히 폐하지 못하니 오늘 우리 친족은 약하고 모자라지만 이 정자亭子를 보유한 것을 진실로 선조가 효의孝義로써 후손에게 끼침을 힘입는 것이로다. 무릇 후손되는 자는 이에 거처하고 이에 생각한즉 무엇이 조상의 꾀를 지키지 못할까 근심되며 또한 무엇이 이 정자亭子가 쉽게 폐하리라 근심되나 드디어 이렇게 쓰서 여러 친족에게 힘쓰게 하다.
1933년 10월 역옹櫟翁 팔세손八世孫 인수寅洙 삼가 짓다.

【주석】
신재부군頣齋府君¹⁾ : 진주강씨晋州姜氏 박사공파博士公派는 1세조 계용啓庸의 12세손으로 이름은 희熺(1542~1593)이고 자는 덕장德章, 호는 신재頣齋로 남명南冥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왜구倭寇와 싸우다가 1593년 율진栗津에서 순절殉節하였는데 52세였다. 곽재우장군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했고 의령 정곡에 장례 지냈고 조정에서는 병조정랑兵曹正郎 증직贈職 후 다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贈職했다. 아들 경승慶昇(1577~1633)이 가전家傳을 지었고 진사 이석기李石紀가 행장行狀을 지었다.

관재공觀齋公²⁾ : 진주강씨晋州姜氏 박사공파博士公派는 1세조 계용啓庸의 12세손으로 이름은 돈燉(1540~1589)이고 자는 덕휘德輝이고 호는 관재觀齋로 남명南冥의 문인이다. 아버지는 어모장군禦侮將軍 몽린夢麟(1524~1583)이고 동생이 신재공頣齋公 희熺(1542~1593)이다. 
자암紫巖³⁾ : 진주강씨晋州姜氏 박사공파博士公派는 1세조 계용啓庸의 13세손으로 이름은 경승慶昇(1577~1633)이고 자는 선추善追이며 호는 자암紫巖으로 효로써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증직되었다. 동계정온桐溪鄭蘊과는 의義로 사귀었다. 아버지는 신재공頣齋公 희熺(1542~1593)이고 아들은 신지愼之와 연지淵之가 있다.

 

출처 및 참조
의령누정록-의령문화원/태화출판사(1997.12.27.)

 

자암정중건기紫巖亭重建記
7세손 봉길鳳吉
봉국鳳國
봉관鳳觀
6세손 세순世淳
세재世濟
방후손 봉해鳳海
후학 이진李震
자암공의 시판
족손 건흠建欽
서기순徐麒淳
정기필鄭夔弼
조한규趙漢珪
정기상鄭璣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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