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야생화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진주강씨 두방재 斗芳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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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경남의 진주강씨 누정재

2021. 11. 13.

2021.10.5.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진주강씨 두방재斗芳齋 전경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1001(두양길 158-129)에는 진주강씨晋州姜氏 은열공殷烈公 1세 민첨民瞻의 영정을 모시는 재실 두방재斗芳齋와 두방영당斗芳影堂이 있다. 이곳을 고도계는 높이 297m, 위도 35°14'32"N 경도 127°51'49"E를 가리킨다. 

 

2021.10.5.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진주강씨 두방재斗芳齋 비림


두방재斗芳齋에 모신 은열공殷烈公은 진주강씨晋州姜氏 소원도遡源圖에는 이처럼 기록하고 있다.
선대先代로 소전小典 「嬰有嬌女安登生二長曰石年 次曰世嗣小典」
시조始祖 염제신농炎帝神農(BC 3164~BC 3024) 강수에서 살았으므로 인해 강씨라는 성씨를 얻게 됐다. 재위는 140년이다.「育於姜水因爲姓氏 在位 一四〇」
제승帝承(재위 60년), 제림帝臨(재위 80년), 제래帝來(재위 48년), 제백帝栢(재위 45년), 제측帝則(재위 49년), 제양帝襄(재위 43년), 절경節莖, 희戲, 기器, 적제赤帝 축융祝融, 술매術罵, 구려句麗, 수垂, 백이伯夷(BC 1996), 여상呂尙 태공太公, 애공哀公, 문공文公, 환공桓公, 효공孝公, 혜공惠公, 장공莊公, 경공景公, 도공悼公, 평공平公, 강공康公, 
우리나라 시조 고구려병마도원수高句麗兵馬都元帥 강이식姜以式(598), 검교공檢校公 운기雲紀(668), 부위공副尉公 수손秀孫(704), 정동공征東公 구王+卜, 정원공定遠公 극용克庸(839), 진안공晋安公 택인擇仁(875), 정순공正順公 진縉(885), 원충공元忠公 사진思進(916), 판문하공判門下公 기장起章(934), 정절공正節公 구만九萬(964), 원정공元貞公 사미士美(1035), 상서공尙書公 홍洪(1110), 부령공副令公 호덕好德(1127), 문학공文學公 진보晋寶(1174), 참리공參裡公 홍명鴻冥(1212), 도통사공都統使公 철영哲永(1243), 교감공校堪公 도度(1259)
은열공세계도殷烈公世系圖는 시조始祖 원수공元帥公 이식以式으로부터 후예後裔 종일宗一, 극술極述, 원윤공元尹公 보능甫能, 은열공殷烈公 민첨民瞻(963)으로 이어진다.

 

2021.10.5.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진주강씨 두방재斗芳齋 헌성비
2021.10.5.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진주강씨 두방재斗芳齋 대문

두방재斗芳齋는 은열공殷烈公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홍살문을 지나 넓은 주차장에 다다르면 우측에 1세 은열공을 비롯한 중시조들의 비림이 있으며 입구에 성금을 낸 분들의 이름을 새겼다. 솟을 삼문은 택유문澤流門이란 편액을 걸었고, 대문을 들어서면 우측 마당 앞에 두방재斗芳齋가 위치하며, 기둥에는 주련을 달았다. 대청 위에는 두방재중수기斗芳齋重修記와 두방재중수상량문斗芳齋重修上樑文, 두방영당중수상량문斗芳影堂重修上樑文, 제영당운題影堂韻, 두방사알은렬공강선생미상斗芳祠謁殷烈公姜先生迷像, 알謁 선조영정유감先祖影幀有感 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택유문澤流門 편액

 

2021.10.5.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진주강씨 두방재斗芳齋
2021.10.5.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진주강씨 두방재斗芳齋 정면
두방재斗芳齋 편액
두방재 주련

方丈山高德水明 방장산은 높고 德水는 밝은데
煥然先閣賀重成 환한 선조의 재각 다시 세움을 축하하네
三韓偉績干戈定 삼한의 위대한 업적 전쟁을 끝내니
千載遺芳草樹榮 천년토록 남긴 芳名 초목처럼 번영하네
羹墻儒碩事趨享 사모하는 선비들이 달려가 향사하고
瓜瓞仍孫各輸誠 수많은 후손들은 각기 정성 다하네
七分眞像洋洋在 거의 眞像처럼 양양하게 계시니
應掃腥氣一肅淸 비린내 쓸어서 한꺼번에 맑히리라

 

두방재중수기斗芳齋重修記

斗芳齋重修記
二十八代孫 洙鎬
方丈居海東三神山之一 而盤據湖嶺 扶輿磅傳 奇峰峻嶺 羅列嫖緲 而東走一詠 孕季航精 至五十里強 聳出斗墺兩峰 吃然若巨人長德 端笏對立 整肅率下 群醜衆邪 縮首退伏 不敢干潰 而環城一區 嚴屏榮繞 水泉攬號 萬松森羅 仙鶴翶翔 幽遂淨淵 殆難錫名 我先祖殷烈公 早歲講道之所公晉陽 人 生於高麗光宗癸亥 鍾間氣抱大志 祠奉先世眞影于此 而切磋淬勵 蘊蓄經綸 筮得在田之龍 而寓霜於伊尹箤野 武侯之南陽 至顯宗年間 應揚於女眞 契丹之兩陳而凱施王庭 宗社奠安 東土戴髮 免為左衽 自上特拜鷹揚上將軍推誠致理翊戴功臣 兵部尚書太子傳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 以十二年辛西卒 上輟朝三日 贈太子太師門下侍郎 賜諡最烈 致祭 其祭文曰 氣禀山河 才兼文武遺像有二本 一安于本府之鳳山院 一安于墺芳舊祠 歲行課薦 天啟辛西 賜額殷烈 高宗己巳 有旨輟忠賢各院 兩地院祠亦在輟中 尋有從便安奉之特教 乃建祠于牛山舊址 鳳山院未遑重設 而曾奉眞影 龕藏于是祠 其後屢經易礎于斗牛兩峰之間 而己丑伏移建于斗山 條經數十星霜 棟宇傾頹 瓦角渗漏 於是詢謀攸同 載營重繕鳩材殫力 無侈於前 無弊於後 費八九眺肉 而祠宇若講堂 並時告功焕然一新 飲落之日 洙鎬作而言曰 鳴呼 登斯堂而俯仰 頭流萬疊 截彼崢嶸 非公之豐功偉德歟 德江千載 如斯活潑 非公之深仁厚澤歟凡爲吾祖雲仍者 苟能恒念 吾祖之偉績厚澤 處而有所守 出而有所為 不為洪流之所沈鰯 獰風之所摧折 則豈直為無忝吾祖而己战 亦將有補於扶植綿陽之萬一云 

두방재중수기
방장方丈은 해동海東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니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의 중간에 반거盤據¹⁾하여 부여扶興²⁾가 방박磅礴³⁾하고기봉寄峰과 준령峻嶺이 표묘嫖緲⁴⁾하게 나열羅列되었는데 동쪽으로 뻗어진 일맥一脈이뛰어난 기운을 품고 정기를 길러 오십리五十里에 이르러서는 두우斗牛⁵⁾ 의 두 봉우리가 굳세게 솟아나니 흘연屹然⁶⁾한 것이 마치 거인巨人 장덕長德⁶⁾이 단정하게 홀笏을 잡고 마주 서서 정숙整肅하게 아래 사람을 거느리고 있는 것 같다. 이에 군추郡醜⁷⁾와 중사衆邪⁸⁾가 머리를 움츠리고 물러나 엎드려서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는데 뚜렷하게 일구一區를 이루어 암병巖屏⁹⁾이 둘러 있고 수천水泉이 폭포처럼 흘러내리며 만 그루의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 찾고 선학仙鶴이 날개를 훨훨 날이어 유수幽遂·정연淨淵¹⁰⁾한것이 자못 이름하기가 어려우니 우리 선조 은렬공殷烈公께서 조세早歲¹¹⁾에 강도講道¹²⁾하시던 처소다.
공公은 진양인晋陽人이니 고려高麗 광종光宗 때 계해癸亥년에 나시었다. 간기間氣¹³⁾를 타고나서 대지大志를 안고 사당을 세우고 선세先世의 진영眞影을 여기에 모셨다. 그리고 여기에서 절차切磋¹⁴⁾·쉬려淬勵¹⁵⁾하고 경륜經論을 온축蘊蓄하며 서筮을 밭에 있는 용龍¹⁶⁾에서 얻고 생각을 이윤伊尹의 신야莘野¹⁷⁾와 무후無後의 남양南陽¹⁸⁾에 부치더니 현종顯宗의 년간年間에 이르러 거란契丹과 여진女眞의 두 진영에서 응양鷹揚하고 왕정王庭에 개선凱旋하니 종사宗社가 길이 편안하게 되고 동로東土가 머리를 기르며 좌임左衽¹⁹⁾이 되는 것을 면하게 되었도다. 임금으로부터 응양상장군鷹揚上將軍 추성치이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병부상서兵部尙書 대자태부太子太傅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을 배拜하고 식읍食邑으로 삼백호三百戶를 내렸다. 십이년十二年(현종) 신유辛酉에 졸卒하니 임금이 조회를 삼일三日동안 철폐하고 태자태사太子太師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증직贈職하고 시호諡號를 은렬殷烈이라 내렸다. 그리고 제사를 내리니 그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기상은 산하山河를 품禀하였고 재주는 문무文武를 겸했으며 나가서는 장수였고 들어와서는 정승이며 짐朕이 몸소 의뢰(校觀)하였도다」라 하였으니 공의 평생平生을 족히 여기에서 믿을 것이다.
유상遺像이 이본二本이 있었는데, 하나는 본부本府의 봉산원鳳山院에 봉안하고 하나는 우방牛芳의 구사舊祠에 봉안하여 해마다 과천課薦²⁰⁾을 행사더니 천계天啓 신유년辛酉年에 은렬殷烈의 사액賜額를 내렸다. 이러다가 고종高宗 기사己巳년에 훼철의 국령이 있어 충현忠賢의 각원各院과 두곡이 원사院祠도 또한 훼철되었더니 얼마 후에 편의에 따라 봉안하라는 특교特技가 있었다. 여기에서 사당을 우산牛山의 옛터에 세우고 봉산원은 아직 중설重說할 예를 갖지 못했으므로 일찍이 진영眞影을 받들어 이 사당에 감장龕藏 했더니 그 뒤에 두우斗牛의 두 봉우리 사이에 여러번 주추를 옮겨 바꾸었다가 기축己丑년에 다시 두산斗山에 옮겨 세웠다.
어느새 수십성상數十星霜을 지내니 동우棟宇가 기울어지고 무너지며 기와에 비가 새게 되었다. 여기에서 여럿이 함께 묻고 꾀하여 중선重繕²¹⁾를 경영키로 하고 재목을 모우고 힘을 다하니 전보다 화려하지 않고 뒤에도 허물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팔수八九의 조육眺肉²²⁾을 힘들여서 사우祠宇를 강당講堂과 같이 하여 동시에 공을 마치니 환연煥然 일신一新되었다.
음락飲落²³⁾하는 날에 수호洙鎬가 일어나 말하기를 「오호(嗚呼)! 이 당堂에 올라 부앙俯仰하니 두류頭流의 만첩萬疊이 저렇게 쟁영崢嶸²⁴⁾한 것은 공公의 크나큰 공과 훌륭한 덕德이 아니겠으며 덕장德江이 천재千載토록 이와 같이 활발活潑한 것은 공의 심인深仁 후택厚澤이 아니겠는가? 무릇 우리 선조의 운잉雲仍이 된 이는 진실로 우리 선조의 위적偉積과 후택厚澤을 항상 생각하여 처處할 때에 지킬바가 있어야 하고 나가서는 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며 홍류洪流²⁵⁾에 침익沈溺 않고 영풍獰風²⁶⁾에 추절摧折되지 아니한다면 어찌 다만 우리 선조께 욕되지 않는 것 뿐이 겠는가? 장차 면양綿陽²⁷⁾의 만萬가지 일에 도움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석】
반거盤據¹⁾ : 걸터 않아 웅지해 있는 것
부여扶興²⁾ : 아름다운 기운
방박磅礴³⁾ : 섞고 합쳐서 하나로 만듬
표묘嫖緲⁴⁾ : 아득하게 넓은 모습
두우斗牛⁵⁾ : 두방과 우방
흘연屹然⁶⁾ : 높이 솟은 모습
장덕長德⁶⁾ : 덕이 있는 어른
군추郡醜⁷⁾ : 많은 추한 무리
중사衆邪⁸⁾ : 뭇 간사스러운 무리
암병巖屏⁹⁾ : 바위로 된 병풍
정연淨淵¹⁰⁾ : 깨끗하고 고 요한 것
조세早歲¹¹⁾ : 초년
강도講道¹²⁾ : 공부
간기間氣¹³⁾ : 세상에 드문 기운
절차切磋¹⁴⁾ :공부하는 모습
쉬려淬勵¹⁵⁾ : 힘 쓰고 부지런함
서筮을 밭에 있는 용龍¹⁶⁾ : 주역周易 건괘乾卦 92의 효사爻辭인데 큰 임금의 지우를 얻으려는 군자에 비유함
이윤伊尹의 신야莘野¹⁷⁾ : 이윤은 탕왕湯王의 정승으로 되어 은왕조殷王朝를 일으킨 분이고, 신야는 중국에 있는 지명으로 이윤이 밭을 갈았다는 곳.
무후無後의 남양南陽¹⁸⁾ : 무후는 제갈량諸葛亮의 시호로 제갈량은 유비를 도와 촉한을 일으킨 정승이며, 남양은 중국 형주에 있는 지명으로 무후가 모소 밭을 갈았다는 고장.
좌임左衽¹⁹⁾ : 오랑캐의 뜻
과천課薦²⁰⁾ : 향사
중선重繕²¹⁾ : 중수
조육眺肉²²⁾ : 세월 달
음락飲落²³⁾ : 낙성
쟁영崢嶸²⁴⁾ : 높은 모습
홍류洪流²⁵⁾ : 세상 조류
영풍獰風²⁶⁾ : 사나운 바람
면양綿陽²⁷⁾ : 한줄기 양기

 

두방재중수상량문斗芳齋重修上樑文

斗芳齋重修上樑文
伏以偉功存社稷 婦孺之口碑至今相傳 遺像在廟堂 孫裔之心香愈久彌篤 棟宇改觀 林阿增輝 恭惟 我殷烈公 氣鍾山河才兼文武 應王朝再造之休運 挺間世非常之英豪 導廸後生晉陽才府指稱 自兹伊始 閑衛葬教 麗代佛氏之說 不敢肆行 射御雖非書生之所長 干城乃 是君上之為倚 忠義攸奮己 遏眞胡之凶鋒 指揮如神 無留丹兵之片甲 出則將 入則相 何止東方 一代之元勳 聞於華 震於夷 頓除上國邊圉之深患 寔惟周家之吉甫 無愧漢氏之孔明 錫茅土之胙封 登麟閣之圖畫 花岳四里捐作 數條救民之資 斗牛一區遺 為百世妥影之所 杖屢芬躅 行路人莫不瞻欽 風物烟嵐 升堂者可以寓慕經歷歲月難敢上雨旁風之憂 允協諮謀 聿舉招工鳩材之役 大杗細桷 咸中繩直而矩方 臨本面山 宛如竹苞松茂 藐藐有容恢恢于 焉講敦睦之叙天 足以專戒齋之有地澗毛林實 我將焉庶其享之灌鬯焄蒿 凡在者如或見也 隆棟之占旣吉 脩樑之頌斯興兒郞偉
兒郞偉抛樑東 卓彼牛山擎日紅 萬魅千邪驚遁盡 明宮翼翼山之中
      抛樑南 瓦龍遙望海如藍 精英凝結非今昔 天不虚生開國男
      抛樑西 方丈仙翁雲裏棲 人世榮華縻不得 誰煩綸綍壁間題
     抛樑北 迢遞帝城長翳棘 誰是中原快丈夫 掃平一日氛塵息
     抛樑上 星日昭昭咸覩仰 陟降洋洋也若斯 令人畏敬而悽愴
     抛樑下 清泉一道巖崖瀉 人間何處望雲霓 去作甘霖均撒灑
伏願上樑之後 地道益寧民德歸厚 濟濟而揖遜有節 耀座多士之琳琅 振振而韻 徽無疆芳園 後昆之花樹 家家傳忠孝而靡懈 世世繼簪纓而不衰 殷烈公嶽降九百六十五年丁卯 后孫璲桓謹撰

 

두방재중수상량문[해문 강기정]
엎드려 생각건데 나라를 보존케 한 거룩한 공훈 부녀와 아이들의 입과 비碑로 지금까지 전傳하여 왔네. 
묘당에는 대대로 받들어온 영정이 있어 후손들의 돈독한 마음 오래도록 이어지고 기둥과 지붕을 고치고 보니 주변의 경관이 더욱 아름답구나. 
삼가 생각하면 우리 은열공殷烈公의 기품은 산하山河에 탔고 재주는 문무를 겸하여서 쇠락한 운명에 처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으니 세상에 보기 드문 영웅호걸이어라. 
후진을 잘 이끌어 진주가 인재의 고을이라 부르게 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윤리의 바른 가르침을 실천하니 고려시대 불교의 말이 감히 마구 행하지 않게 되었네 
비록 활 쏘고 말 타는 것이 선생(書生)의 덕목 중에서 가장 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에 나라의 간성干城이 되니 임금이 의지하는 바가 되었도다. 
충의를 떨치어 여진과 오랑캐의 흉한 칼날을 막았고 지휘함이 신神과 같아 거란군의 갑옷 한 조각도 남김없이 쓸어버렸네. 
전장에 나서면 장수요 입궐하면 재상이라 한 시대의 뛰어난 공훈이 어찌 동방 (고려)에만 머물렀으랴! 
소문이 중국에 퍼지고 오랑캐를 떨게 하여 국경 주변의 깊은 우환을 없애 버렸으니 참으로 생각하면 주周나라의 길보요. 한漢나라의 제갈공명과 견주어도 결코 부끄럽지 않으리. 
조정에서 사패지 (봉토)를 내렸고 기린각麒麟閣에 영정이 올랐다. 화개 악양 적양 진답 네 마을이 바친 조공으로 백성을 구할 조목들을 만들어 두방 우방 한 고을에 덕을 베푸니 영정影幀을 대대代代로 편안하게 모실 처소가 되었네. 
향기로운 꽃처럼 거니시는 자취에 지나 가는 행인도 모두가 우러러보고 서기瑞氣 어린 풍경 속의 사당에 오른 자 흠모의 마음 깊어지네.
오랜 세월동안 풍우風雨를 감당하지 못함을 우려하고 이에 대책을 세우니 진실로 의논이 맞아 마침내 목수를 부르고 재목을 모아 공사를 시작하였네. 
큰 대들보와 작은 서까래까지 먹줄에 맞아 모두 방정이 되어 물에 임하고 산을 대하여 마치 대나무가 뿌리박듯 솔숲이 우거진 듯 이미 튼튼하고 넓은 큰 재실이 완성되니 제의祭儀와 돈목을 위함에 널리 펴리라. 
오로지 재계를 위하는데 부족함이 없이 땅에는 어육과일이 있고 장차 후손들이 모두모여 울창주를 따르고 향을 피워 제사를 모실 적에 모든 참석자들이 볼 수 있도록 이미 기둥을 높인 것이 잘한 것이구나. 이에 상량을 기념하는 노래를 짓노니
어기영차 들보 올려 동東을 보니 우뚝한 저 우방산 붉은 해가 솟아오르자 온갖 마귀 모든 요물 모두 놀라서 도망가고 이 산중에 밝은 사당집만 우뚝하네. 
           들보 올려 남南을 보니 와룡산 저 멀리 쪽빛 같은 바다에 영특한 정기서린 것이 어제 오늘 아니거늘 하느님이 개국남을 헛되이 낳았으랴! 
          들보 올려 서西를 보니 방장산 신선님은 구름 속에 깃들었고 인간 세상 영화 누리지 않았음을 누가 조서 가져와 석벽에다 두었나. 
         들보 올려 북北을 보니 멀고 먼 천상 옥경 길이길이 가려지고 더러운 티끌기운 한꺼번에 쓸어내는 중원의 쾌남아 그 누구이더냐! 
        들보 올려 위를 보니 밝은 해와 별이 넓은 바다에 오르내림을 모두가 우러러 보는구나 이는 영인令人과도 같아 신비로움에 두려워하고 공경하네. 
       들보 올려 아래를 보니 맑은 샘물 한줄기가 바위틈에서 솟아나 이 세상 어디든지 단비가 되어서 골고루 뿌린 후에 무지개로 나타나리. 
엎드려 원하건데 상량한 후後에 땅의 도가 더욱 안정되어 백성이 후덕하게 되고 제제이 겸손과 예절을 갖춘 수 많은 선비들이 영롱한 구슬처럼 자리를 빛내주네. 
화수의 꽃동산에 후손들의 운치가 한없이 일어나서 집집마다 忠孝 傳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고 대대로 衣冠을 이어 쇠하지 않도록 하소서
은열공 탄신 西紀구백육십오년 정묘 후손 수환 삼가 짓다

 

두방영당중수상량문斗芳影堂重修上樑文


斗芳影堂重修上樑文
勳烈存勝朝 民生之興頌 如昨才德冠東甌 後輩之尊戴長世 教諸生主忠信 晋陽人材之府庫 實由此稱 因休退遺杖履 斗芳英靈之廟字 獨逾遠存 棟樑改觀 林何增彩 
伏惟 我殷烈公 山河正氣 文武全才 時間世之英豪 乃一代之柱石 射御雖非書生之所閑 干城可為王室之攸恃 食邑三百 追周家之薦揚 偉功第一 耀漢朝之鱗閣 松柏森森 行路人之所瞻仰 烟霞澹澹 升堂者之寓羹墻 建築歲久 堂廡日頹 咨謀允同 擧事經始 堂室秩秩 可玄可史 軒念恢恢 如飛如革  澗毛旣潔 多士之趨享彬彬 焄蒿正備 后孫之齋戒申申 陸棟之占旣吉 修樑之頌方興 
抛樑東 回首扶桑瑞日紅 多少妖氣消却盡 庭前松柏起清風
抛樑南 卓彼士山流翠嵐 應於麗氏中與運 天不虚生開國南 
抛樑西 牛斗青山方丈齊 明宮肅肅來千載 無事浮雲過太虛
抛樑北 麝山屹立天之極 上帝降臨如在左 小心無怠長翼翼
抛樑上 日月昭昭人所仰 涉阵英靈長在此 自然凜凜而悽愴 
抛樑下 一度請泉流不捨 混混不息盈科進 願使工部無休暇 
伏願 上樑之後 鬼護神衛 天荒地老 后孫之講誼敦睦 花樹長春 多士之揖遜整齊 環佩遠馨 孝悌家家熟 簪纓世世攀
丁卯 后孫 在弼 謹撰

두방영당중수상량문
훈열勳烈로 승조勝朝¹⁾를 보존하고 민생民生의 흥송興頌²⁾이 어제와 같으면 재덕才德이 동구東甌³⁾에 으뜸이어서 후배의 높이 떠받듬이 장세長世를 이었도다. 여러 사람을 가르쳐서 충신忠信을 주로 하니 진양晋陽을 인재人材의 부고府庫라고 일컫는 것은 실로 이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인因하여 후퇴休退하여 장리杖履를 남겼으니 두방斗芳에 영령英靈의 묘우廟宇가 홀로 오래도록 멀리 존속 되었으며 동량棟樑이 개관改觀 되니 숲과 언덕이 광채光彩를 더했도다.
엎드려 생각컨대 우리 은열공殷烈公은 산하山河의 정기正氣에 문무文武의 재주를 겸전兼全하였으니 실로 산세間世의 영호英豪이요 곧 일대一代의 주석柱石이였다. 활쏘고 말달리기가 비록 서생書生의 익힐 바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간성干城은 왕실王室의 믿는 바가 되었으며 식읍食邑 삼백三百은 주가周家의 응양鷹揚⁴⁾을 따랐도다. 위공偉功은 제일이여서 한조漢朝의 인각麟閣⁵⁾에 빛났도다. 송백松柏은 삼삼森森하여 행로行路에 사람들도 첨앙瞻仰하는 바이였고﹐ 연하烟霞⁶⁾는 담담澹澹하여 당堂에 오르는 이가 갱장羹墻⁷⁾을 부치도다. 
건축한 세월이 오래되고 당무堂廡가 날로 기우려 지매, 묻고 꾀한 것이 진실로 맞았기로서 거사擧事를 경시經始하니 당실堂室이 질질秩秩⁸⁾하여 현송玄誦⁹⁾도 할 수 있고 사적史籍도 읽겠으며 헌창軒窓이 회회恢恢¹⁰⁾하여 나르는 듯 뛰는 듯 빛나도다. 간모澗毛¹¹⁾도 깨끗하니 많은 선비들이 빈빈彬彬¹²⁾하게 향사享祀에 달려오고 훈호焄蒿¹³⁾가 바로 갖추셨으니 후 손의 재계齋戒가 신신申申¹⁴⁾하리로다. 기둥을 높게 할 점占도 이미 좋았으니 들보를 다듬는 노래가 바야흐로 일어나는 도다.
들보를 동쪽으로 바치니﹐ 머리를 돌이키매 부상扶桑¹⁵⁾에 서일瑞日이 붉었도다. 간사스런 분위기가 얼마든지 사라지고﹐ 뜰 앞의 송백松柏에는 맑은 바람 일어나네. 
들보를 남쪽으로 바치니 우뚝선 저 사산士山¹⁶⁾에 푸른 안게 흐르도다. 여씨麗氏¹⁷⁾ 중흥中興할 운기運氣에 응應하였고 하늘도 개국남開國男¹⁸⁾을 헛되이 내지 않았네.
들보를 서쪽으로 바치니 우두牛斗¹⁹⁾의 푸른 산이 방장산方丈山과 같도다. 명궁明宮은 숙숙肅肅²⁰⁾하여 천년을 이어 왔고 일 없는 뜬구름은 허공을 지나가네.
들보를 북쪽으로 바치니 사산麝山이 하늘 끝에 우뚝하게 서 있구나. 상제上帝가 강림降臨하여 좌우에 계시는데 소심小心하고 개으르지 않아 공경하고 삼가리로다.
들보를 위쪽으로 바치니 일월日月이 환하여 사람들도 우러러 보는 도다. 오르내리시는 영령英靈께서 같이 여기 계시어 자연히 늠름하고 처창悽愴²¹⁾하게 되는 도다.
들보를 아래로 바치니 한 줄기 맑은 샘이 흘러서 그치지 않네. 혼혼混混²²⁾하여 쉬지 않고 구덩이를 채워 가니 원하건대 공부工夫하는 이 휴가休暇가 없게 하옵소서.
엎드려 원하옵건대 상량上樑을 한 뒤에 귀신이 수호하고 신神이 호위하며 긴긴 세월이 지나도록 후손들이 정의情誼²³⁾를 강하게 하여 정이 두텁고 화목해 꽃피운 나무가 오랜 봄이 되게 하소서. 맑은 선비들이 읍하고 사양하며 정제整齊된 환패環佩²⁴⁾가 멀리까지 향기를 풍기게 하고 효제孝悌가 집집마다 익숙하며 잠영簪纓²⁵⁾이 대대로 이어지게 하소서.
정묘丁卯(1627)년 후손 재필在弼 삼가이 찬양하다.

【주석】
승조勝朝¹⁾ : 고려高麗
흥송興頌²⁾ : 기리는 소리
동구東甌³⁾ : 동방의 나라
주가周家의 응양鷹揚⁴⁾ : ‘주나라의 매처럼이란’ 시경에 강태공이 매처럼 날아 무왕을 도와 상나라를 쳤다.「維師尙父 時維鷹揚 涼彼武王 肆伐大商 會朝淸明」라는 데 비유함이다.
한조漢朝의 인각麟閣⁵⁾ : ‘한나라의 기린각이란’ 한나라 선제宣帝가 공신들의 화상은 기린각에 그려 붙였다함.
연하烟霞⁶⁾ : ① 고요한 산수山水의 경치 ② 안개와 노을 
갱장羹墻⁷⁾ : 갱장은 죽은 사람에 대한 간절한 추모의 정을 말한다.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이 3년 동안 사모하는 정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밥을 먹을 때에는 요 임금의 얼굴이 국그릇 속羹中에 비치는 듯하고, 앉아 있을 때에는 담장墻에 요堯 임금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했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63 李杜列傳>
질질秩秩⁸⁾ : ① 생각이 깊은 모양模樣. ② 청명淸明한 모양模樣.
현송玄誦⁹⁾ : 현玄은 오묘한 것을 말하며, 송誦은 기억하여 간직하는 것을 말한다.
회회恢恢¹⁰⁾ : ① 매우 넓고 크다 ② 매우 광대하다.
간모澗毛¹¹⁾ : 재물
빈빈彬彬¹²⁾ : ① 내용과 외관이 함께 갖추어져 있어 성盛한 모양 ② 너무 소박하지도 않고 너무 화려하지도 않아 정도가 아주 적절한 모양 
훈호焄蒿¹³⁾ : 향기로운 향
신신申申¹⁴⁾ : 넉넉한 모습
부상扶桑¹⁵⁾ : 전설에서, 동쪽 바다의 해가 뜨는 곳에 있다는 신성한 나무
사산士山¹⁶⁾ : 국사봉
여씨麗氏¹⁷⁾ : 고려
개국남開國男¹⁸⁾ : 고려시대 봉작封爵의 등급으로 크게 왕王으로 봉해주는 왕작王爵과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의 5등작이 있었다. 고려의 경우 종친이나 일반 신하에게 실제 봉작해 준 것은 5등작이었다.
우두牛斗¹⁹⁾ : 우방산과 두방산
숙숙肅肅²⁰⁾ : ① 공경하는 모양 ② 빠른 모양 ③ 퍼드덕 ④ 종이나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
처창悽愴²¹⁾ : 마음이 몹시 구슬프고 애달프다.
혼혼混混²²⁾ : 물이 흘러가는 모습
정의情誼²³⁾ : 서로 사귀어 친해진 정
환패環佩²⁴⁾ : 조선 시대, 벼슬아치들이 금관 조복을 입을 때 좌우로 늘여 차던 장식
잠영簪纓²⁵⁾ : 예전에, 관원들이 관에 꽂던 비녀와 갓의 끈을 이르던 말

 

제영당운題影堂韻
두방사알은렬공강선생미상斗芳祠謁殷烈公姜先生迷像
알謁 선조영정유감先祖影幀有感
두방영당斗芳影堂

斗芳影堂記
妥眞于牛芳祠 行忌生辰祀(高麗顯宗朝刱影堂 置位田) 即公之所刱世同 而嘗讀書之所 高麗恭愍王元年王辰 九世孫忠貞 公司空好禮 重修牛芳祠 仍享歲祀逮朝鮮太宗朝 牌賜斗芳 牛芳二山之地 (今牛芳入口石面。有刻『殷烈姜先生安真之所 逮我 太宗朝赐牌之地」十八字) (原)仁祖二十年壬午 十九世孫大遂宰本州 重摹遺像 重修古祠 俾士林相俎豆之禮 行冬至茶禮 正祖元年丁酉四月 移建于斗芳山(後孫錫復撰上樑文) 今按其額號 則影堂曰斗芳 齋曰斗芳 門曰澤流 純祖二十五年 乙酉四月 重輯齋室(後孫徹濬作上樑文) 高宗六年己巳 有旨毁鄉賢祠 影堂見綴影幀龕藏于殷烈祠 八年辛未 有旨毁額院殷烈祠亦被綴 影幀二本奉藏于斗陽村舍 九年壬申 有從使移奉之敎 建祠于牛山杏亭上 二十六年己丑十月 移建影堂于斗芳舊基 (後孫參奉俸鎬撰上樑文) 後三十八年丁卯八月 重修(後孫隧桓撰影堂上樑文 在弼撰齋舍上樑文 戊辰洙鎬撰記)

두방영당기
공公의 진영眞影을 우방사牛芳祠에 모시고 기신忌辰과 생신生辰의 제사를 행하였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에 영당影堂을 창건하고 위전位田을 두었다.) 곧 공께서 세운 바 세사世祠였고 일찍이 독서讀書하던 곳이다.고려 공민왕恭愍王 원년元年(단기 3685년, 서기 1352년) 임진壬辰에 9세손 충정공忠貞公 사공司空이 예禮를 좋아하여 우방사牛芳祠를 중수重修하고 이에 세사歲祀를 모셨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에 이르러 두방斗芳과 우방牛芳의 두 산의 땅을 사패지賜牌地로 하였다.(지금 우방산 입구入口의 석면石面에 「은열殷烈 강선생姜先生의 타진妥眞¹⁾한 곳으로 우리 태종조에 이르러 사패賜牌한 땅이다」라고 한 18자가 새겨져 있다.) 인조仁祖 20년 임오壬午(단기 3975년, 사후 633년, 서기 1642년)에 19세손 대수大遂²⁾가 본주本州의 재宰(목사)가 되어 유상遺像를 중모重摹하고 고사古祠를 중수重修하여 사림士林으로 하여금 향례를 치르게 하고 동지다례冬至茶禮를 행하였다.
정조正祖 원년元年(단기 4110년, 서기 1777년) 정유丁酉(사후 757년) 4월에 두방산斗芳山으로 이건移建하였다. (후손 석복錫復이 상량문을 찬하였다) 지금 그 액호額號를 살펴보건대 영당은 두방영당斗芳影堂이라 하고 재사齋祠를 두방재斗芳齋라 하였으며 문門을 택유문澤流門이라 하였다. 순조純祖 25년 을유乙酉(단기 4658년, 서기 1825년)(사후 805년) 4월에 재실齋室을 중수하였다(후손 철준徹濬 상량문을 지었다) 고종高宗 6년 기사己已(단기 20년, 사후 849년﹐ 서기 1869년)에 향현사鄕賢祠를 훼철하라는 조정의 명령이 있어 영당이 헐리게 되고 영정影幀은 은렬사殷烈祠에 감장龕藏하였더니 8년 신미辛未(서기 1811년)에 액원額院(사액서원)도 훼철하라는 명령이 있어 은열사도 또한 헐리고 영정두 본을 두양촌사斗陽村舍에 봉장奉藏하였다. 그러다가 9년 임신壬申(서기 1872년)에 편의에 따라 옮겨 모시라는 교지가 있어 사당을 우산牛山의 행정杏亭위에 세웠다가 26년 기축己丑(공의 사후 869년 서기 1889년) 10월에 영당을 두방의 옛터에 이건移建하였다. (후손 봉호俸鎬가 상량문을 찬하였다.) 그뒤 38년 정묘丁卯(단기 4260년, 사후 907년) 8월에 중수하였다. (후손 수환燧桓이 영당 상량문을 찬하고 재필在弼이 재사齋舍 상량문을 짓고, 무진년戊辰年에 수호洙鎬가 기문을 찬하였다.)


【주석】
타진妥眞¹⁾ : 진영眞影을 모심
대수大遂²⁾ : 한사寒士 강대수姜大遂(辛卯1591~1658)는 진주강씨 은열공 민첨의 19세손으로 아버지는 강익문姜翼文(戊辰1568~1648)이다. 벼슬은 호조좌랑, 예조정랑, 병조참의를 역임했고, 초명은 강대진姜大進. 자는 면재勉哉·학안學顔, 호는 춘간春磵·한사寒沙·정와靜窩이며,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에서 탄생했다.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로 이덕남李德男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이며, 1614년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자 정온鄭蘊이 간언하다가 유배된 일이 발생하자 그해 정온鄭蘊을 구하는 소를 올렸다가 삭직당하고 회양에 10년간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영변부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그 뒤 호조좌랑·예조정랑에 올랐다. 다음 해 사헌부 정언·지평·장령을 역임했다. 1637년 부응교를 지내고 1639년 통정대부가 되었으나, 1641년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 진주에서 살다가 1644년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이 되고, 이어 우승지·병조참지·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51년 전주부윤이 되어 1년 동안 지낸 다음,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석천서재(石泉書齋)를 지었으며, 또 유학자들을 위해 이연서원(伊淵書院)과 덕곡서원(德谷書院)을 지었다. 합천의 도연서원(道淵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한사집(寒沙集)』 7권 3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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