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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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 수곡면 자매리 진주강씨 매선재 梅仙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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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경남의 진주강씨 누정재

2021. 11. 30.

2021.10.6. 진주시 수곡면 자매리 진주강씨 매선재梅仙齋

진주시 수곡면 자매리 452-2(사곡로719번길 40-2)에는 진주강씨晋州姜氏 은열공殷烈公 12세 유수공파조留守公派祖 봉익대부奉翊大夫 개성유수공開城留守公 수명壽明(~1408)과 13세 자헌대부 예조판서 강원량姜元亮의 후손 은열공 22세 통정대부通政大夫 연옥당研玉堂 치후致垕와 후손 취송공翠松公 병려柄驪를 제향하는 매선재梅仙齋가 있다. 이곳을 고도계는 높이 81m, 위도 35°14'48"N 경도 127°56'04"E를 가리킨다.

 

2021.10.6. 진주시 수곡면 자매리 진주강씨 매선재梅仙齋

매선재梅仙齋의 가계를 살펴보니 은열공殷烈公 1세 민첨民瞻으로부터 2세 태자태사太子太師 단旦, 3세 대언예빈경代言禮賓卿 보輔, 4세 좌승일본문과부左丞一本文科府 삼중대광三重大匡 검교좌정승檢敎左政丞 정협貞叶, 5세 판삼사사判三司事 전법사판서典法司判書 추성익대공신推誠翊戴功臣 려익呂翼, 6세 태자첨사太子詹事 첨사공파조詹事公派祖 원감元鑑, 7세 삼중대광三中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 시호諡號 충경공忠敬公 정靖, 8세 비서좌사秘書佐事 崇文舘學士 崇文舘學士 졸우卒于 상주목사尙州牧使 순珣, , 9세 조정대부朝靖大夫 행예빈경行禮賓卿 적𥛚, 10세 조선태조대왕이종朝鮮太祖大王姨從 승사랑承仕郞 내원서승부제학內園署丞副提學 검劒, 11세 봉익대부奉翊大夫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위량渭良, 12세 유수공파조留守公派祖 봉익대부奉翊大夫 개성유수공開城留守公 수명壽明(~1408)으로 이어져 은열공 12세 강수명姜壽明(~1408)이 유수공파조留守公派의 중시조中始祖가 된다. 
13세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공禮曹判書公 원량元亮, 14세 생원공生員公 철손哲孫, 15세 건원릉참봉공健元陵參奉公 신효愼孝, 16세 통훈대부사옹원봉사通訓大夫司甕院奉事 행하양현감공行河陽縣監公 인보仁輔로 이어지고 강인보姜仁輔는 아들 3명을 두었으니 은열공의 17세 만송공晩松公 렴濂으로 이어지고 22세 통정대부通政大夫 연옥당研玉堂 치후致垕가 잇는다.

 

매선재梅仙齋는 대문이 철책이고 재실의 기둥에는 주련을 달았으며 대청에 매선재梅仙齋 편액과 방후손 병포가 지은 매선재기梅仙齋記가 걸려 있다. 

 

매선재梅仙齋 주련
매선재梅仙齋 편액

梅仙齋記
姜氏晋之望族 而其先有諱民瞻殷烈公麗朝之蓋臣也 響組聯輝 至諱元亮 學行薦授晋州教官 創四教堂 歷毅清要 為禮曹判書 三傳 諱仁輔參奉行河陽縣監 生諱濂號晚松 師事冥翁壬燹義舉樹勳 是為祖之著 又五傳 諱致垕研玉堂 壽階通政 世居晋西安溪 勢饒而好客 有孔北海杜季良之風 令聲振一時 其遺風餘韻 尚今不斬於鄉省 則當時家勢之盛可概也 自後零替 子姓未守 故址轉徙各地 如水谷紫梅之居渭甲 其七世孫也 盖其家世貧 常欲為通政公致一屋未遑 飲泣慨然者久矣 渭甲勤於幹蠱 僅免朝夕之憂 而繼其父祖之意 乃於乙丑春 協謀門內諸從昆季 決為血肩垣之構 三架四楹 屋于所居紫梅之陽 而中為廳 左右為室 雇舍三間隨成 足為致齋寓慕之所也 日偕其宗老祖憲洪伊 而造余書室 間所以為命其齋與門名曰 蓋從地名為扁例也 住其里名紫梅 又有神仙臺之靈峰 則其堂曰梅仙 其門曰早春其可乎 三人皆樂為之應 而又問記曰 梅者四君子之首 而花為百花之先也 其花妍而紅白 其香時而清其心貞 而固雪裡開花 其性酸而辛 能和羹解渴 故詩人畫士隱人君子 多愛玩植庭 吸香畫屏為玩 其清高之趣香 不可與他花同日而語也 仙者人之靈者也 出遊塵表傲視 碌碌人世 不火食而長壽數百歲 則其清楚之操高且遠矣 今姜氏諸君 用是標榜揭相其義有在也 爰居爰處顧諟 而能調和百物 無有相反戾 以致敦行孝悌 則庶不負於標榜之義 而可無子弟之過矣 盍相與勉旃
歲戊辰元月中澣 成均館典儀 晋山 河東根 記

강씨姜氏들이 진주晋州의 망족望族¹⁾으로 그 선세에 이름이 민첨民瞻이고 시호諡號가 은열공殷烈公이신 분이 있으니 고려조의 충신이다. 높은 벼슬이 연이어 빛나서 이름이 원량元亮이신 분에 이르러 학행學行으로 진주교관晋州敎官에 천거되어 사교당四敎堂을 세우고 깨끗한 요직을 두루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랐으며, 삼세三世를 내려와서 이름이 인보仁輔이신 분은 참봉으로 하양河陽현감을 지냈고 아들 렴濂는 호號가 만송晩松인데 남명 조선생曺先生을 스승으로 섬겼고, 임진란에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웠으니 이분들이 중조中祖중에 알려진 분들이다.
다시 오세五世를 내려와서 이름이 치후致垕이고 호號가 연옥당研玉堂은 수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대대로 진주 서쪽 안계安溪에 부유하게 살며 손님 오는 것을 좋아하여 공북해孔北海²⁾와 두계량杜季良³⁾의 풍도가 있었고 어진 명성이 일시에 떨쳤으니 그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이 지금까지 향내에 끊어지지 않는즉 당시 가세의 성대함을 가히 짐작할 것이다. 이후로 점차 쇠진하여 자손들 이 옛터를 지키지 못하고 각지各地로 흩어졌으니 수곡면 자매리에 사는 위갑渭甲(수갑壽甲)이 그의 칠세손七世孫이다. 대개 그 가세가 세세로 빈한하여 항상 통정공通政公을 위하여 재실 하나를 이루고자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여 눈물을 머금고 개연槪然해 함이 오래였다. 위갑渭甲이 부지런히 살림하여 겨우 조석 걱정을 면하게 됨에 그 부친, 조부님의 뜻을 이어서 지난 을축乙丑 봄에 문내 여러 종형제들과 협모하여 결연히 피나는 정성으로 일을 맡아 삼간 재실을 살고 있는 자매리 남쪽에 지었으니 중앙은 대청이요 좌우는 방을 넣었으며 고사도 함께 이루어 족히 재계하고 우모寓慕할 곳을 삼았다.
어느날 그 종중노인 조헌祖憲 홍이洪伊와 함께 나의 서실을 찾아와서 그 재실과 대문 이름을 지을 바를 물었다. 말하건대 대개 지명을 따라 편액함이 상례이니 주거지의 지명이 자매리이고 또한 영봉에 신선대神仙臺가 있은즉 그 집은 매선재梅仙齋라 하고 그문은 조춘문早春門이라함이 옳겠다 하니 세 사람이 모두 좋다 응답하고 다시 기문記文을 물었다. 말하건대 매화는 매국죽梅菊竹 사군자 중의 으뜸으로 일백 꽃 중에 제일 먼저 꽃이 피니 그 꽃은 고와 희고 붉으며 그 향기는 은은하게 맑으며 그 심성은 곧고 굳세어 눈 속에 개화하며 그 맛은 시고 매워서 국에 타서 먹으면 갈증을 푸는 고故로 시인詩人과 화가와 숨은 군자君子들이 사랑하여 뜰에 심어 향기를 즐기고 병풍에 그려 감상하니 그 청고清高한 향취를 가히 다른 꽃들과 더불어 함께 논할 수 없다. 또한 신선은 사람 중에 신령스러운 자니 진세塵世⁴⁾ 밖에 나가 놀면서 하찮은 인간 세상을 얕보며 화식火食을 하지 않고 백세百歲를 장수한즉 그 청초함이 높고 멀다 할 것이다.
지금 강씨姜氏 제군들이 이로서 현판을 걸은 것은 그 뜻이 이에 있음이니 여기에 기거하고 여기에 처處함에 이 재호를 돌아보고 능히 모든 사물과 조화하여 서로 어긋남이 없이 돈독히 효제孝悌의 행실을 다한즉 거이 현판이 뜻을 저버리지 않을 뿐드러 가히 자제子弟들의 허물도 없을 것이니 어찌 서로 힘쓰지 않으랴.
1988년 음력 1월 21일 성균관전의 진산晋山 하동근河東根 짓다.

【주석】
망족望族¹⁾ : 명성과 덕망이 있는 집안
공북해孔北海²⁾ : 한漢나라의 공융孔融이 북해상北海相을 지냈으므로 공북해孔北海라 하였다. 그는 선비들을 좋아하여 “좌상에는 언제나 손님이 가득하고, 술통에는 술이 마르지 않으니 나는 것정이 없다.”라 했다.
두계량杜季良³⁾ : 호협하여 남의 걱정을 내 걱정으로 하고 남의 즐거움을 내 즐거움으로 하고 있어…… 그의 부친 초상에는 몇 고을 사람들이 다 모였었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너희들이 두계량杜季良을 배우다가 그처럼 되지 못하면 천하의 각박한 인간이 되고 만다. 이른바 범을 그리다가 이루지 못하면 도리어 개처럼 되고 만다.” 이 말은 너무 큰 것을 욕심내다가 실패하면 망신만 당하고 만다는 말이다.
호걸豪傑을 본받다가 도리어 경박輕薄에 떨어짐을 비유하는 말이다. 
[출처] 407. 한자 (ㅎ순 8급~ 특급) 251. 화생섬섬禍生纖纖~300. 활인적덕活人積德/작성자 조아조아
진세塵世⁴⁾ : 정신에 고통을 주는 복잡하고 어수선한 세상  

 

매선재기梅仙齋記

梅仙齋記
晋西水谷紫梅里 西北쪽 八岩山靈峯下神仙台 옆에 三間 새 齋舍가 세워져 있으니 이름하여 扁額을 梅仙齋라 하였다. 이 齋閣은 紫梅里에 居住하는 姜氏宗門內 渭文·渭甲(一名壽甲)·渭水 族三兄弟가 長侄淳植과 더불어 高祖 되시는 諱柄驎號翠松公을 奉祀할 墓閣으로 瞻慕의 精誠에서 세운 齋閣이다. 公의 中始祖는 諱民瞻 高麗兵部尙書 諡殷烈公이요.
奉翊大夫開城留守를 지내신 諱壽明公은 派祖이시다. 아들 諱元亮公은 全羅都事開城留守資憲大夫禮曹判書를 지냈으며 晋州敎官으로 薦擧되어 四敎堂을 創建하시었다. 累傳하여 諱致垕號硏玉堂公은 壽通政大夫로 晋州西쪽 安溪에서 富裕하게 儒風을 지키면서 名聲을 날리었다. 然而世波의 흐름에 諱致垕公의 孫子 때에 이르러 四兄弟 모두 避乱散居하게 되었으니 그때 諱命濬公 父子亦是 이곳 水谷紫梅里에 遷徙하신 後 世居之地로 定한 것이다. 그러한 然故로 翠松公의 體魄을 山淸丹城黙谷에서 乙丑年閏十月에 이곳 紫梅里山乾坐로 移葬하고 해마다 墓祭를 받들어 왔으나 神位를 모실 墓閣이 없어 恒常慨然嘆息해 오던 中 乙丑年初春에 門內從兄弟들과 熟議 끝에 決然히 工事에 着手 齋舍를 이루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곳 神仙台에 洞窟이 있어 淸水가 湧出하며 神仙이 居處할 곳이라 하는데 마을 사람이 偶然히 이곳에 와서 바둑을 두며 하루를 즐기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三年이란 歲月이 흘러 갔다는 傳說이 傳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옛날부터 내려오는 紫梅란 마을 이름 亦是 꽃 中에 꽃으로 雪中에 피어 그윽한 香氣를 發하는 梅花꽃을 사람들은 梅蘭菊竹 또는 四君子로 부르며 讚美하고 있다. 이러한 곳에 公의 齋室이 세워졌으니 翠松公은 生前에 이미 神仙의 境地에 到達하신 분이 아닌가 生覺된다. 그래서 公을 千世를 두고 奉祀할 齋閣의 扁額을 紫梅와 神仙台의 깊은 뜻을 따서 梅仙齋라하고 門은 早春門이라 하였다. 이제 齋閣建立에 精誠을 다한 渭文三兄弟와 長侄淳植族이 梅仙齋記文을 請함에 過分한 마음과 壽甲族丈外는 平素宗事에 남다른 精分으로 辭讓치 못하고 事實을 記述하니 傳世하리라.
戊辰(1988)年 正月中浣 傍後孫 炳炰 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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