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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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군 쌍백면 죽전리 진주강씨 죽남재 竹南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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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경남의 진주강씨 누정재

2022. 1. 4.

2021.11.3. 합천군 쌍백면 죽전리 진주강씨 죽남재竹南齋 전경

합천군 쌍백면 죽전리 216(하안삼리길 156-2)에는 진주강씨 박사공博士公의 14세 임진왜란의 공신 죽간竹澗 강수姜邃를 추모하는 재실 죽남재竹南齋가 있다. 이곳은 해발 높이가 111m, 위도 35°26'38"N 경도 128°07'44"E를 가리킨다.

 

2021.11.3. 합천군 쌍백면 죽전리 진주강씨 죽남재竹南齋

죽남재竹南齋의 가계를 보니 진주강씨晋州姜氏 박사공파博士公派는 1세 계용啓庸, 2세 급사공給事公 인문引文, 3세 어사공御史公 사첨師瞻, 4세 대장군大將軍 창부昌富, 5세 재신宰臣 황보璜寶, 6세 여은공旅隱公 손기孫奇, 7세 대사간大司諫 열烈, 8세 절도사節度使 말동末同, 9세 상호군上護軍 빈贇, 10세 해수공海叟公 응숙應宿(1509~1552), 11세 단암공丹菴公 희신熙臣, 12세 죽산공竹山公 팽澎, 13세 성재공省齋公 이삼履三(1558~1622), 14세 죽간공竹澗公 수邃(1574~1624)는 15세 청문淸文(1594~1646)과 청룡淸龍을 두었다.

박사공 15세 청문淸文(1594~1646)은 16세 귀손貴孫, 17세 경업慶業, 18세 명순命舜, 19세 성태聖泰, 20세 위경渭敬, 21세 주훈周訓, 22세 시려時呂, 23세 병환炳煥, 24세 상수相壽, 25세 석기碩基(1887~1955)로 잇고, 또한 19세 성태聖泰, 20세 위경渭敬, 21세 주전周詮, 22세 시복時福, 23세 병윤炳允, 24세 기수杞壽, 25세 석황錫璜(1891~1964)으로 이어 간다는 것을 기문에 적었다.

 

임난공신진주강수장군사적비壬亂功臣晉州姜邃將軍事蹟碑

임난공신진주강수장군사적비壬亂功臣晉州姜邃將軍事蹟碑
부군府君의 휘諱는 수邃요 자字는 승기勝己이며 호號는 죽간竹澗이다. 관향貫鄕은 진주晋州로 1574년 선조宣祖 갑술甲戌에 탄생하셨다. 시조始祖는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시식姜以式장군이요 원대손遠代孫 고려 국자박사 휘諱 계용啓庸이 보계譜系 일세조一世祖이시다. 삼세조三世祖 사첨師瞻은 감찰어사요. 사세조四世祖 창부昌富는 정용위대장군이시다. 육세조六世祖 손기孫奇 호여은공號旅隱公께서는 부군府君의 팔대조八代祖이시니 조선조에 벼슬을 마다하고 합천 미숭산 지금의 문림에서 십여년을 두문불출하다가 난평亂平에 의령세간宜寧世干으로 이거하였다. 그후 부군府君의의 증조 희신熙臣 호단암공號丹菴公께서 죽전으로 이사하여 후손 등이 의령당동과 쌍백죽전에 분산 거주하였다. 
부군府君은 일오구이년一五九二年 선조宣祖 임진壬辰에 왜란이 일어나자 국토가 짓밟히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자 십구十九세의 혈기의분이 충천이라 증조의 명령도 있어 분연히 창의에 동참하였다. 부군府君은 삼가 의병 정예군精銳軍으로 윤탁尹鐸 의병장 휘하에서 정진鼎津 전투를 비롯하여 여러 싸움에 참가 크게 공을 세웠다. 그후 성주목사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인척관계로 그의 휘하에서 활동하였으며 배위곽씨配位郭氏가 왜적에 비명횡사하게 되자 적개심을 참지 못해 왜적을 물리치는데 진심 갈력하였다. 일육이사一六二四년 인조갑자仁祖甲子에 돌아가니 향년享年이 오십일五十一이다. 배配 완산 최씨崔氏 사이 이남二男을 두었으니 장長은 청문淸文 차次는 청룡淸龍이요 묘墓는 죽남재竹南齋 뒷산 매밭 양좌원良坐原에 있다.
대한 2009년 己丑화춘에 十三代孫 성균관총무처장 동숙東琡 근식謹識

 

2021.11.3. 합천군 쌍백면 죽전리 진주강씨 죽남재竹南齋 대문
봉서문鳳棲門
2021.11.3. 합천군 쌍백면 죽전리 진주강씨 죽남재竹南齋
은현당隱見堂
죽남재竹南齋

죽남재주련[문산]
維梓維桑恭敬  가래나무 뽕나무도 반드시 공경함이 있듯이
履霜履露慕瞻  서리 밟고 이슬 밟으며 그리워 바라보고
肯堂肯構明誠  선대의 유업을 계승하여 밝음과 정성스러움 이어
愛處愛居和睦  거처하는 곳을 사랑하고 화목할 지어다.

 

경앙재당景仰祭堂
죽남재기竹南齋記

竹南齋記
嘉樹之東 竹田之坊 寔姜氏世居 而人皆宅心淳眞 持身儉約 絶無受變於時 而多有向善之志焉 一日慨然相謂曰 吾先祖卜居玆地 已爲數百年餘 而墓下尙無齊所 豈可乎 遂卽各解囊金 招工董役 未一年而告成 扁曰竹南齋 從先祖扁識不忘也 日其後孫鎭成介 李君汝若 而同其門少碩基 錫璜 請文於余曰 昔吾先祖丹菴公 世家宜春 簪纓烜爀 與松菴李公魯 講學友善 事實詳在四姓綱目 而其堂姪頤齋熺 同李公倡義殉節于栗津 厥後干戈纔息 而党議乖激 群賢屛逐 輿言訩訩 公知其不復有爲於世 逐挈家竄 伏於玆郡之慕禮山中歟 隱其名字 非取其形勝也 蓋有如是之卓識懿行 而尙未有表揚之文 雖傍觀 豈不慨惜乎 余聞而斂衽起坐 遂綴數語而歸之 曰天下之卉木 莫美於竹 故公居於斯扁 其實非人中之竹乎 李公忠義如日月也 公與之爲友非君子 而能然乎 吾鄕素稱士林之藪 而公來此絶無往來 遊從其確乎 不拔之操 非潛龍而能然乎 公之生 有邵夫安樂之室 故竹南之名 尙傳於世 公歿後齋遂廢 而子孫寢以衰替 無重新 故其址爲耕田 而歲久未詳 竹南之名亦隨而湮沒 公之事實安得以知之哉 何幸今齋興而竹南之名更顯 嗚呼 齋之興廢 非公之顯晦歟 然齋之興廢無常 固有數關焉 則正夫子所謂吾末如之何者 不可爲也 若夫祖先之道德風烈 傳在後人者 爲子孫者 尤宜抵死篤守 而勿墜可也 公之子孫 苟能因是 而惕然咸悟 人人相勉 世世相詔 使其勿墜 而益張 卽公之靈 必肯曰余有後 而爲子孫者 其尊祖報本之道 亦莫大於此 然則豈但 以一舍之肯構 自以爲足也哉 遂書此 以勖之窃附於殷阿衡之陳戒
        丙戌八月二十日
        草溪 鄭衡圭 記

 

죽남재기竹南齋記[박태성]
가수현嘉樹縣(가회면) 동쪽 죽전竹田 마을은 강씨姜氏의 세거지世居地다. 사람들은 모두 마음가짐이 순진하고 몸가짐도 검약하여 절대 시류를 따라 변절함이 없었고 착한 것을 지향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는 마을사람들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우리 선조가 이 땅에 자리잡고 사신 지가 이미 수백년이 되었는데 무덤 아래 재숙할 장소가 없으니 마땅한 일이겠는가.” 드디어 각자 주머니 돈을 모아서 목수를 부르고 일을 감독하여 일년이 되지 않아 재실을 완성하고 편액을 죽남재竹南齋라 하였는데 선조께서 편액을 지은 뜻을 잊지 않고 따른 것이다. 하루는 그 후손 진성鎭成이 이여약李汝若군의 소개로 그 집안의 젊은이 석기碩基¹⁾ 석황錫璜²⁾이 같이 와서 나에게 글을 청하며 말하였다. “옛날 우리 선조 단암공丹菴公은 대대로 의춘宜春(의령)에 살며 벼슬이 빛났으며 송암松菴 이노李魯 공과 강학하며 좋은 벗이었던 사실이 사성강목四姓綱目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 당질堂姪(종질) 이재頤齋 이희李熺는 이공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율진栗津에서 순절하였습니다. 그 후로 전란이 겨우 가라않고 당쟁이 격렬해지며 여러 현인들이 아울러 그것을 따르니 여론이 흉흉하게 되었습니다. 공께서는 다시 이 세상의 인심이 회복되지 않을 것을 알고 드디어 가솔들을 이끌고 달아나 합천군 모례慕禮 산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 이름과 함자를 숨기고 그 뛰어난 경치조차도 감상하지 않으실 정도였습니다. 대개 이와 같이 뛰어난 식견과 곧은 행실이 있었으나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어 선양하는 글이 없으니 곁에서 보더라도 어찌 개탄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듣고 옷깃을 여미고 반듯하게 앉아 몇마디 말을 엮어주어 돌려 보내었다. 말하였다. “천하의 풀나무 중에서 대나무보다 아름다움이 없다. 그러므로 공께서 이러한 편액을 한 곳에 사신 것은 실로 사람 중에 대나무가 아니겠는가. 이공李公의 충의忠義는 해와 달 같으며 공이 그와 더불어 벗이 된 것은 군자가 아니면 그렇겠는가. 우리 고을은 원래 선비들이 숲을 이루었다고 하는 곳인데 공이 이곳에 와서 절대 왕래함이 없이 교유한 것이 확실한 것이겠는가. 그 지조를 뽐내지 않고 숨긴 잠룡潛龍이 아니면 능히 그렇겠는가. 공의 삶은 소부邵夫(소강절)가 안빈낙도한 집이 있었으므로 죽남竹南이라는 이름이 대대로 전해지다가 공이 세상을 떠난 후 사라지고 자손이 쇠퇴하여 침체된 뒤 다시 새롭게 중건하지 못하고 그 터가 밭이 되어버린 뒤 세월이 오래되어 상세히 알지 못하니 죽남이라는 이름도 따라서 사라지게 되었으니 공에 대한 사실을 어찌 알 수 있었으리오, 다행이 지금 재실이 다시 서고 죽남이라는 이름이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아아! 재실의 흥망성쇠는 공께서 드러나고 숨겨진 까닭이 아니다. 그러나 재실의 흥함과 폐함이 무상함은 진실로 운수의 영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녕 공자께서 이른바 ‘내가 어찌할 바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만약 선조의 도덕과 풍모와 열행이 후대에 전해짐이 있다면 자손된 자가 죽음을 맹서하고 돈독하게 지키며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공의 자손들은 진실로 이로 인하여 근심하며 서로 함께 깨닫고 서로 권면하여 대대로 서로 깨우쳐 알리며 잊지말도록 하고 더욱 장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공의 영령이 반드시 기뻐하며 ”내가 후손이 있어 나의 자손이 있도다.“라고 할 것이다. 조상을 존중하고 근본에 보답하는 도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다만 집 하나를 짓고 스스로 그것만으로 만족하겠는가. 드디어 이 글을 지어 그에 힘쓰게 내가 은아殷阿에 맞게 진계陳戒를 하노라.        
       丙戌八月二十日        
       草溪 鄭衡圭 記

 

【주석】
석기碩基¹⁾ : 강석기姜碩基(1887~1955)는 박사공의 25세손으로 자는 기섭基攝이고 아버지는 상수相壽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이다. 아들은 석원碩源, 문원文源을 두었다.

석황錫璜²⁾ : 강석황姜錫璜(1891~1964)는 박사공의 25세손으로 자는 경황敬璜이고 아버지는 기수杞壽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도성朴道成의 따님이다. 아들은 민원閔源, 현원賢源을 두었다.

 

죽남재사실기
죽남재상량문
죽남재원운

竹南齋原韻 죽남재 원운

先齋重建栢山陽 선대의 재실을 栢山 남쪽에 중건하니
十世經營此日成 십대를 경영하여 오늘 날 완성한 것이네
某水某邱依舊樣 개울과 언덕은 옛 모습 그대로요
我泉我石復新光 샘물과 바위는 모습이 다시 새로워졌네
英靈積廕將垂遠 영령께서 쌓은 음덕 멀리 전하려
孱裔微誠庶引長 잔약한 후손 미미한 정성 다 끌어모았네
顧諟常常因竹揭 대나무의 의미를 게시한 뜻을 늘 돌아보매
當年名義詎能忘 당시의 명예와 도의를 어찌 잊으리요
玄黓敦牂 暮春之下浣 後孫相培謹書
임오년 삼월 하순에 후손 상배가 삼가 씀.

*玄黓敦牂 : 고갑자인데 玄黓은 壬에 해당하고 敦牂은 午에 해당함.

 

단암丹菴
근차죽남재원운
죽남재차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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