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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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시 곤양면 무고리 진주강씨 무산재 武山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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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경남의 진주강씨 누정재

2022. 4. 20.

2022.4.19.사천시 곤양면 무고리 진주강씨 무산재武山齋

사천시 곤양면 무고리 산 57에는 진주강씨晋州姜氏 파조派祖 박사공博士公 계용啓庸의 7세 통정공파通亭公派 회백淮伯이 중시조中始祖를 이루며 9세 집의공執義公 숙경叔卿의 손자 11세 통덕랑通德郎 운沄의 후손들과 곤양 입향조 22세 필용必庸 등을 무산재武山齋에 모시고 제례를 올리고 있다. 이곳의 해발 높이는 123m, 좌표는 35°04'11"N 127°55'03"E를 가리킨다.

 

2022.4.19.사천시 곤양면 무고리 진주강씨 무산재武山齋 전경

진주강씨晋州姜氏 박사공博士公 1세 파조派祖 계용啓庸, 2세 급사공給事公 인문引文, 3세 어사공御使公 사첨師瞻, 4세 진원부원군晋原府院君 창귀昌貴, 5세 문경공文敬公 군보君寶, 6세 공목공恭穆公 시蓍, 7세 통정공通亭公 회백淮伯, 8세 강우덕姜友德, 9세 수헌공守軒公 숙경叔卿, 10세 생원공生員公 신범信範, 11세 통덕랑通德郎 운沄, 12세 수담壽聃, 13세 원기源起, 14세 무손武孫, 15세 의위義渭, 16세 만둔공晩遯公 언룡彦龍, 17세 래호來鎬, 18세 여양呂良, 19세 명우明佑, 20세 희주熙周, 21세 진제晉齊, 22세 덕보德甫, 선종善宗, 24세 경운璟雲으로 잇고,
19세 원업元業, 20세 우순遇舜, 21세 성임聖任, 22세 전학典學, 23세 영주永周, 24세 천수千秀, 25세 대원大元이고, 26세 문중文中(1901~1981)이 기문을 받으러 갔고 27세 일호一鎬, 28세 우순佑淳으로 이으며,
19세 원석元碩, 20세 후상後尙, 21세 우창遇昶이고 곤양 입향조는 22세 필용必庸이며, 23세 영인永仁, 24세 경수儆秀, 25세 대규大奎로 가계를 잇는다. 
또한 22세 필호必虎, 23세 영민永敏, 24세 혁수赫秀, 25세 대희大禧, 26세 권중權中, 27세 호삼鎬三으로 가계를 잇고,
그리고 22세 필주必周, 23세 영천永泉, 24세 하수河秀, 25세 대백大伯, 26세 상중相中이 기문을 받으로 갔으며, 27세 호엽鎬燁으로 가계를 잇고 있다.

 

2022.4.19.사천시 곤양면 무고리 진주강씨 무산재武山齋


진양(晋陽) 강씨(姜氏) 박사공파(博士公派) 무고(舞鼓) 시조(始祖)는 고구려(高句麗)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이신 강이식(姜以式) 장군이다. 후손 계용(啓庸)은 고려 원종조에 국자박사(國子博士)로서 박사공파의 파조(派祖)이다. 3세(世)의 휘는 사첨(師瞻)인데 고려 감찰어사(監察御使)를 하여 이를 어사공파라 한다. 4세(世) 창귀(昌貴)는 충목왕(忠穆王) 2년에 판도정랑을 거쳐 계림판관(鷄林判官)을 지냈으며 사후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追贈)되고, 진원부원군(晋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7세(世) 휘 회백(淮伯)의 호는 통정(通亭)이다. 고려 우왕(禑王) 2년에 급제하여 성균(成均) 제주(祭酒) 밀직사 제학 부사 첨서사서를 역임하였다. 공양왕(恭讓王) 때에 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이어 판밀직사와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왕에게 상소(上疏)하여 한양천도(漢陽遷都)를 중지하도록 하였으며, 포은선생(圃隱先生)이 살해된 후 그의 일파로 몰려 진양(晋陽)에 유배되었다가 개국(開國) 후에 동북면 도순무사가 되었다. 수 대(代)를 흐른 후 16세(世) 언룡(彦龍)은 현종 때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다. 20세(世) 휘 필용(必庸)때에 곤양으로 들어왔다. 사천(泗川), 완사(浣紗),북천(北川) 등지에 10여 호가 살고 있고, 무고에도 10호가 살고 있다. 휘 태수(泰守)는 동학혁명(東學革命)의 교주였고, 문중(文中)은 문중 사람들과 협의하여 조상들의 제실(祭室)인 무산재(武山齋)를 원동(院洞)에 창건하였다.  문중대표는 호철(鎬喆)이고, 종손은 호길(鎬吉)이다. 학중(學中)은 경찰공무원을 역임하였고, 호현(鎬玄)은 양산초등학교장이다. [출처: 곤양향토사-곤양향토사편찬위원회/뜰날기획인쇄 출판사(2004.9)]

 

2022.4.19.사천시 곤양면 무고리 진주강씨 무산재武山齋 편액 죽성竹醒 김상연金相淵
무산재武山齋 주련

무산재武山齋 주련 - 전문

一物由來有一身 하나의 사물에서 유래하여 하나의 몸이 있고
一身還有一乾坤 하나의 몸에 다시 하나의 천지가 있네
能知萬物備於我 만물의 이치가 나에게 구비되었음을 알았으니
肯把三才別立根 어찌 三才*의 근원을 별도로 세우리

*三才 : 天, 地, 人 을 가리킴.

이 주련은 송나라 邵雍의 〈觀易吟〉이라는 시 중의 앞부분을 주련으로 활용한 독특한 예이다.

 

무산재기武山齋記

武山齋記
晋東月牙山下東山村卽姜氏世居之地而文景文良文簡三文字公幷生之村輿地所謂晋州人才半在月牙山下者是地.文景公弟執義公以道學享昇岡院.是爲分派祖也.至孫通德郎諱沄後孫之在河昆泗間者其麗不少而一派之在昆陽武庫洞已近十數代累世先山近遠在在歲恨者久矣去年秋宗議僉同謀建一舍使宗人姜文中奉中相中裏所傳文績來余而請揭板之文余雖不文同宗之地誼不可辭乃書其祖先之由來及其後仍守本之規謨而於旧韓戶籍知來昆之儒業於數章敎旨知中葉之宦族矣然世入蕩自末免寒散今日何世禮敎癈矣倫綱墜矣彼高樓巨閣追遠慕爲揭號而處處在在者子孫之能繼而守護不爲雀蠹所漹正幾處乎惟吾宗今日建築非遠有意思不能也.以睦族爲所奉先爲所期不墜晋來祖先之芳香則豈非斯世之表影乎勉乎哉山水之幽奧風光之朝暮登斯齋可感不必槪說焉是爲之記. 
檀紀 4309년 丙辰 三月 淸明節 
傍裔大韓民國制憲議員 姜達秀 撰 
                   金海人 金相淵 書

무산재기
진주의 동쪽 월아산 아래 동산촌은 강씨의 세거지이다. 문경공(文景公) 문량공(文良公) 문간공(文簡公) 문(文)자를 가진 세 분의 공(公)이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여지승람󰡕에 이르기를 진주 인재의 반 이상이 월아산 아래에서 태어난다 하니 바로 이곳을 말함이다. 문경공의 아우 집의공(執義公)은 도덕(道德)과 학문(學問)으로 승강원(昇岡院)에 행사하였다. 이분이 여러 지파로 분파된 조상의 한사람이다. 손자 통덕랑(通德郎) 휘(諱) 운(沄)의 후손이 하동, 곤양, 사천 등지에 살고 있는데 그 수가 적지 않다. 그 중 한 지파가 곤양 무고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오랜 세월 동안 십 수 대째 살고 있다. 작년 가을에 종친들이 모여 의논한 결과 모든 사람들이 모두 재실을 짓자고 뜻을 모았다. 종친 강문중(姜文中) 봉중(奉中) 상중(相中) 등을 시켜서 나에게 현판의 글을 지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내가 비록 글을 못하나 같은 동종同宗간이라 사양치 못하고 이에 선조의 유래와 후손들의 본(本)의 규모에 대하여 글을 적어보려고 한다. 구한말(韓末)의 호적에 보면 강씨 집안은 곤양으로 들어온 유학자의 집안임을 알 수 있고, 또 여러 장(章)의 교지 중에서 고관대작의 한 분파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세태는 어떠한가. 예절과 교양이 없어진지가 오래 이고, 인간윤리와 강상(綱常)이 땅에 떨어져 있다. 조상을 추모한다고 저토록 거창하고 높은 누각을 지어 현판을 단 재실들이 곳곳에 많이 있다. 하지만 누각의 여기저기에 새들이 둥지를 틀고 좀이 쓸어 볼품없이 되지 않도록 후손들이 잘 가꾸고 간수한 재실들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오로지 우리 종중(宗中)은 지금 건축을 하였지만 조상님들을 추모하지 않으려 한다면 이런 일들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재실에서 친족들끼리 화목하고, 조상님들을 추모하며, 진주로부터 발현된 조상님들의 명예를 추락하지 않으려 한 것인 즉 어찌 이 세상의 모범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후손들은 부지런히 힘써야 할 것이다. 이 재실에 오르면 산수의 아름다움과 아침저녁의 풍광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이에 이렇게 적는다.   
서기 1976년 병진 삼월 청명절   
방계후손 대한민국제헌의원 강달수 지음   
                          김해인 김상연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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