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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정원 2011. 6. 7.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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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맨발이다 (28) 통영 구타사건(상)

 

박노식의 발길이 날아왔다, 불이 번쩍했다

 

 

영화 ‘김약국의 딸들’(1963)에서 김혜정(맨 오른쪽)과 배우 박노식(가운데).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깨지면서 배운다고 하지만 이런 수모까지야….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악몽 같은 사건이 경남 통영 앞바다에서 벌어졌다. 1963년 봄 박경리 원작의 영화 ‘김약국의 딸들’에 출연할 때였다. 조연이었지만 ‘아낌없이 주련다’로 나를 키워준 극동흥업이 제작하고, 유현목 감독과 변인집 촬영기사가 참여한 영화였기에 기꺼이 합류했다. 주연은 엄앵란·최지희 등. 미국 유학파 출신의 김석강이 나와 나이도 비슷해 친구처럼 붙어 다녔다.

촬영 둘째 날이었다. 통영에는 여관이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은 다음 여관 골방에 배를 깔고 이야기에 열중했다. 당시 미국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영어가 유창한 김석강이 주로 이야기를 하고, 나는 듣는 쪽이었다. 아무리 들어도 미국 이야기는 신기하기만 했다. 다른 스태프와 배우들은 저녁이 되면 술을 마시고, 외출도 나갔다. 나는 집안 내력상 술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 김석강도 술을 못했다. 더구나 우린 신인이어서 돌아다니는 것도 부담스럽던 터였다.

당시 여관의 심부름꾼을 ‘조바’라고 불렀다. 그 여관은 일본식이어서 현관문을 열면 미닫이문이 나오고 복도 양쪽으로 방들이 늘어서 있는 구조였다. 감독이 가장 큰 방을, 배우들이 나머지 방을, 신인배우인 나와 김석강은 끄트머리 골방을 썼다. 조바 아이가 유 감독과 변 기사가 우리를 부른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촬영기사라고 했지, 촬영감독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대선배가 부르는데 안 갈 수 없었다. 유 감독과 변 기사는 개다리 주안상을 사이에 두고 대작을 하고 있었다. 변 기사가 미닫이문 쪽으로 등 돌려 앉았고, 유 감독은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얼굴 오른쪽으로 문을 보고 앉았고, 김석강은 나와 마주보았다. 우린 무릎 꿇고 공손히 앉았다.

유 감독은 아무리 마셔도 취기는 보이지 않고 코만 빨개지는 두주불사(斗酒不辭) 스타일이었다.

“너흰 왜 통영 구경 안 가냐.”

말하기 좋아하는 김석강이 대답했다.

“시나리오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얼마나 기특해 보였을까. 나 역시 열심히 하는 후배들 보면 기분이 참 좋다. 유 감독은 흐뭇한 표정으로 한 잔씩 하라며 술을 따랐다. 조심조심 한 잔을 받아 마시는데 밖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곧 이어 미닫이문이 ‘쾅’ 소리와 함께 방 안쪽으로 넘어졌다.

문 앞에 있던 변 기사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선배 배우 박노식이 비틀거리며 문틀을 잡은 채 서 있었다. 그가 발로 차는 바람에 문이 넘어졌던 것이다. 잔뜩 취한 박노식이 나를 향해 고함을 쳤다.

“이 새끼, 노승이(박노식의 동생)보다 못 생긴 게, 감독하고 촬영기사에게 술 사면 잘 찍어줄 줄 알아.” ·

그는 ‘아낌없이 주련다’로 인기를 얻은 내게 앙심을 품은 것 같았다. 졸지에 우리가 술을 산 셈이 됐다. 나는 그 상황에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때 불이 번쩍 했다. 박노식이 내 오른쪽 얼굴에 힘껏 발길질을 한 것이었다.

 

 

 

청춘은 맨발이다 (29) 통영 구타사건(하)

 

“생각 안 난다” 다음 날 박노식은 딱 잡아뗐다

 

1963년 개봉한 영화 ‘김약국의 딸들’의 출연 여배우들. 왼쪽부터 엄앵란·황정순·최지희·강미애·이민자.

촬영 당시 선배 박노식에게 맞은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참을 인(忍) 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다. 내 경우가 그랬다.

1963년 봄 ‘김약국의 딸들’ 통영 촬영장에서 선배 박노식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했다. 오른쪽 얼굴을 맞았다. 술에 취한 행동이라지만 정말 그렇게 나올 줄 몰랐다. 박노식은 내 오른쪽 가슴과 어깨도 짓밟았다.

변인집 촬영기사가 소리 지르며 박노식을 제지했다. 그는 박노식보다 한참 선배였다.

“노식아, 너는 후배만 보이고 선배는 안 보여?”

박노식은 변 기사를 뿌리쳤다. 유현목 감독도 “이 놈아, 선배는 안 보여”라며 한마디 거들었다. 유 감독은 당황하거나 화가 나면, 손가락으로 콧잔등의 안경만 치켜 올리던 ‘양반’이었다. 동료 김석강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참다 못한 변 기사는 박노식의 얼굴을 들이받았다. 자기 코에서 피가 나는 걸 확인한 박노식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아이고~, 촬영기사가 배우 팬다.”

활극도 이런 활극이 없었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박노식을 끌고 갔다. 나는 무릎을 꿇고 가만히 있었지만 속에선 별별 생각을 다했다.

‘아무 잘못 없이 얻어맞으면서까지 배우를 해야 하나? 영화 때려 치고 한 판 붙어?’

유 감독과 변 기사는 술상을 다시 차리라고 시켰다. 오른쪽 볼과 눈이 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런데도 내가 무릎을 꿇고 있으니,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두 분은 신성일이란 청년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거다.

“영화계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있다”라며 위로를 했지만 성난 마음에 그 다음 말은 들리지 않았다. 눈치 빠른 변 기사가 “미스터 신, 들어가 쉬라”며 다독였다. 방에 가보니 김석강은 이불 속에 들어가 있었다.

실제로 그는 이 영화 이후 충무로를 떠난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촬영장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배우들 사이에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엄앵란도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사단을 일으킨 박노식은 뒤늦게 나타났다. 술이 덜 깬 것처럼 보였다.

그가 민망한 지 “촬영합시다”라고 외쳤다. 아침이 되니 내 오른쪽 얼굴은 더욱 부어 올랐다. 화난 유 감독은 “노식아, 네가 쟤(신성일) 때려서 촬영 못할 정도야”라며 내 모습을 보여주었다. 박노식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생각이 하나도 나지 않는데요.”

그 한마디가 내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다. 만약 그가 “성일아, 미안하다. 내가 술김에 잘못을 저질렀다”고 했다면, 사나이로서 그냥 털고 넘어갈 수 있었다. 내 얼굴을 보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니….

신필름에 있을 때는 이런 선배를 만난 적이 없었다. ‘두고 보자. 언젠가 복수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날 촬영은 왼쪽 뺨으로 때우고 지나갔다. 박노식은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박노식은 고등학교 때 권투선수였다고 한다. 내가 권투선수 역을 두 번이나 맡은 것도 한편으론, 박노식을 겨냥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일단 화를 꾹 눌렀다. 그 사건은 그렇게 지나갔지만 내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됐다.

 

 

 

청춘은 맨발이다 (30) 충무로와 명동

 

명동을 걸으면 다들 내게 눈인사를 했다

 

 

 

 

1999년 사라진 을지로 국도국장 전경. 대한극장 스카라 명보극장 등 서울 충무로 인근 극장가는 신인 배우 신성일을 스타로 올려놓은 기반이 됐다. [중앙포토]


길 하면 영화 ‘라 스트라다’(La Strada·이탈리아어로 길)가 떠오른다. 잠파노(앤서니 퀸)와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의 유랑 길을 잊을 수 없다. 1960년 무렵 서울의 길, 땅을 보고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배고픈 탓에 길바닥에 뭔가 없나 해서다. 60년이라고 해봐야 종전 7년 후다. 제대로 된 건물이 없었다.

50년대 후반 상경한 나는 충무로를 걷고, 명동을 구경하는 걸 낙으로 삼았다. 신세계백화점 맞은편, 충무로 1가에 빵집 ‘태극당’과 전축기기상 ‘기쁜 소리사’가 있었다. 두 곳 사이에 ‘영양센터’라는 치킨집도 처음 생겼다. 쇠꼬챙이에 닭을 꿰어 빙빙 돌려 구워대는 영양센터 쇼윈도는 보통 볼거리가 아니었다. 당시 배고픈 사람들에게 얼마나 침이 넘어가는 풍경이었겠는가.

게다가 연통을 길 쪽으로 뽑아놓아 그 앞은 온통 닭 굽는 냄새로 가득했다. 얼마나 콧구멍을 자극했던지…. 하지만 내 주머니 사정으론 어림도 없었다. 나중에는 약이 바짝 올라 그 앞으로 지나지 않고, 아예 태평로 큰 길로 돌아서 갔다.

‘한국의 할리우드’로 불린 충무로는 내게 의미가 각별하다. 서울대 공대·법대·의대 진학을 꿈꿨던 나는 그 길로 가지 못하고 충무로를 헤매다 신필름에 들어갔다.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은 영화계의 모든 시스템과 활동을 집약한 축소판이었다. 대한극장·을지극장·국도극장·명보극장·스카라극장·중앙극장 등이 모두 충무로 일대에 있었다.

미도파백화점 맞은편, 명동은 충무로와 사뭇 달랐다. 신필름에 들어가기 전까지 난 명동에 갈 용기도 없었다. 충무로에서 만났던 손시향을 생각해보라. 마카오 신사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색으로 쫙 빼 입은 듯한 장안의 멋쟁이가 명동을 누볐다.

청춘스타가 된 후 1주일에 한 번은 명동에서 촬영할 일이 생기곤 했다. 나를 포함해 신영균·남궁원·윤일봉 네 명이 명동 거리를 걸으며 새로 생긴 음식점을 찾아 다녔다. 우리가 명동 거리를 지나가면 행인은 물론 상점 주인들도 죄다 눈인사를 했다. 명동은 내게 성공을 상징하는 길이었다.

충무로의 길은 음식점으로 통했다. 충무로의 진고개, 종로와 명동의 한일관, 을지로 곰탕집 하동관, 청진동 선지해장국집 청진옥, 시청 뒤 콩나물 선지해장국집 부민옥 등이 단골집이었다. 지금도 예전 맛을 지켜가고 있는 음식점이다.

신필름에 들어가기 전에 다녔던 배우전문학원도 우연히 충무로 길을 걷다 만났다. 나는 학원에서 러시아 최고 연출가인 스타니슬랍스키 배우수업을 받았다. 바닥에 선을 하나 그어 놓고, 그것을 문이라 연상한 채 연기를 공부했다.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문을 넘나드는 연기를 연습했다. 얼마나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과제였는지. 서민가족의 가장 역할로 최고였던 대선배 김승호는 “길 가는 사람은 모두 내 스승이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활기차게 또는 무겁게 걷는지, 직업은 무엇인지 관찰하라. 그게 연기 교본이다”라고 조언했다.

지금도 시간이 나면 충무로·을지로·무교동·청계천 등을 걸어 다닌다. 얼마 전 시청 앞 광장에서 예쁘게 피어난 야생화 향기에 흠뻑 취했다. 얼마나 싱그럽던지. 74살 청춘의 ‘마이 웨이(My way)’다.

 

 

 

청춘은 맨발이다 (31) 스포츠머리의 원조

 

‘가정교사’는 신성일표 짧은 머리 유행 낳았다

 

 

1963년 상영된 ‘가정교사’. 신성일(왼쪽)이 처음으로 스포츠머리를 선보였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젊음은 거칠 게 없다. 무엇이든 가능하다. 그 힘을 바탕으로 찍은 영화가 ‘가정교사’(1963)다.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하면서 극동흥업에 자주 드나드는 관계가 됐다. ‘아낌없이 주련다’ 이후 또 한 번 성공을 노린 극동흥업은 일본 작가 고미가와 준페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가정교사’의 판권을 정식으로 샀다. 지금도 일본 최고 배우로 추앙 받는 이시하라 유지로와 요시나가 사유리가 남녀 주연하며 대성공한 작품이었다. 주인집 이복형제가 가정교사인 여주인공을 서로 좋아한다는 이야기였다. 시나리오 작가 서윤성이 한국식으로 각색을 했는데 대본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나는 원작소설을 구해 읽기까지 했다.

어느 날 극동흥업에 갔더니, 차태진 사장이 ‘가정교사’ 스틸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차 사장과 김기덕 감독은 남자 주인공을 놓고 고민 중이었다. 나는 명동 뒷골목에서 구한 일본 영화잡지 ‘스크린’을 읽고 유지로의 스포츠머리를 알고 있었다. 반항적 이미지의 청춘스타로 떠오른 유지로는 소설가로 명성을 떨친 이시하라 신타로 현 도쿄 도지사의 친동생이었다.

서윤성 작가(左), 김기덕 감독(右)

 

 

이시하라 형제는 전후(戰後) 일본 문화계를 휩쓸었다. 형 신타로는 55년 발표한 소설 『태양의 계절』에서 태평양전쟁 패배 후 몰락하는 황족의 후예와 기성 질서에 반항하는 젊은이를 그렸다. ‘태양족(太陽族)’이라는 용어도 유행시켰다. 동생 유지로는 일본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체격이 훤칠했다. 액션에 능하고, 노래도 매력적인 청춘영화의 대명사였다. 그가 62년 부른 ‘빨간 손수건(赤いハンカチ)’은 NHK가 발표한 ‘20세기 일본의 노래 100곡’ 안에 들어 있다.

차 사장이 들고 있는 사진을 보았을 때 ‘앗싸리(일본어로 산뜻하다는 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유지로의 스포츠머리가 눈에 확 들어왔다. ‘가정교사’는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내게 꼭 맞는 영화였다. 나는 차 사장에게 당돌하게 말했다.

“나 머리 깎습니다.”

차 사장은 아무 말도 안 했다. 그 길로 충무로 라이온스 호텔 1층 이발소로 가 스포츠머리로 깎았다.

‘아낌없이 주련다’ 때는 긴 머리였으니 180도 이미지 변신이었다. 차 사장은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배역은 그 다음 날 차 사장과 김 감독이 내 머리를 보고 싱긋 웃은 걸로 결정됐다.

예상대로 영화는 대성공이었다. 나는 반항적인 청춘스타의 이미지를 굳혔다.

그 전까지 어떤 영화배우도 스포츠머리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 영화로 스포츠머리가 유행하게 됐다. 시골 이발소에선 “신성일 머리로 깎아달라”는 주문이 크게 늘어났다.

내 스포츠머리는 요즘의 퍼머 이상으로 돈이 많이 들었다. 군인머리처럼 휙 밀어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깔끔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나흘에 한 번씩 다듬어야 했다. 64년 최고 히트작인 ‘맨발의 청춘’을 비롯해 상당수 청춘물을 이 머리로 소화해냈다. 난 대한민국 스포츠머리의 원조인 셈이다.

‘한국의 이시하라 유지로’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 때다. 한국의 신성일, 일본의 이시하라 유지로, 미국의 폴 뉴먼이 같은 계열의 배우라 할 수 있다. 난 서서히 ‘맨발의 청춘’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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