和/시. 고전. 문학

마음의 정원 2015. 4. 7.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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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문학] 권달웅

 

‘야심을 증명하는 순간’을 위하여

 

 

● 1943년 경북 봉화 출생.

● 한양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 1975년 《심상》(박목월 추천)으로 등단.

● 시집 《해바라기 환상》 《사슴뿔》 《바람 부는 날》 《지상의 한사람》 《내 마음의 중심에 네가 있다》 《크낙새를 찾습니다》 《반딧불이 날다》 《달빛 아래 잠들다》 등과 시선집 《초록 세상》 《감처럼》 사화집 《70년대 젊은 시인들》 등이 있다.

● 편운문학상 수상.

● ‘신감각’ 동인.

 

 

조부에게 배운 호수문(皓首文)

 

나는 경상도 북부의 산자수명한 심심산골 봉화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는 나에게 《천자문》을 가르칠 때 ‘천자문’을 꼭 ‘호수문’이라 했다. 중국 양나라 주흥사가 이 책을 짓느라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고 해서, 《천자문》을 달리 그렇게 불렀다. 호수문은 사언고시 250구로, 천지현황(天地玄黃)에서부터 시작하여 언재호야(焉哉乎也)로 끝나 있다.

 

조부는 몹시 엄격했다. 나는 조부가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는 조부 앞에서 호수문을 외울 때에는 긴장이 되어, 알던 것도 잊어버렸다. 조부는 농촌에서 농사짓는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한학에만 매달려 우리 집은 가세가 기울었다. 조부를 모시고 있던 아버지는 결국 석탄 캐는 광부가 되었고, 어머니는 광산 앞에서 밥장사하여, 돈을 벌어 전답을 사게 되었다.

조부가 지은 한시는 지금도 수십 편이 남아 있다. 면장도, 군청 직원 서너 분도, 젊은 시절에 조부에게 호수문을 배운 분들이었다.

 

나는 이 호수문을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7살 때 배웠다. 매일 8자씩 외웠다. 나는 조부가 붓글씨를 쓸 때, 옆에서 무릎 꿇고 먹을 갈았다. 외우기만 하고, 한자를 붓글씨로 써가면서 배우지는 않았지만, 연적에 물을 담을 때면, 공기 방울이 뽀그르르 하얗게 올라오고 물이 들어가는 모양이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조부가 쓰던 벼루는 사랑방에 유품으로 남아 있다. 얼마나 먹을 많이 갈았는지, 그 벼루는 달걀 한 개 정도의 깊이로 움푹 파여 있다.

 

조부는 나에게 호수문을 직접 붓글씨로 써서 책으로 만들어 주셨다. 책표지는 한지를 아끼느라고 연습하던 한지를 겹겹이 겹쳐서 만들었는데, 표지에 ‘호수문(皓首文)’이라는 글씨와 함께 ‘책주 권달웅(冊主 權達雄)’이라고 한자로 쓰여 있었다. 한자 밑에는 내가 음과 뜻을 달아놓은 연필 글씨가 남아 있다.

 

그런데 호수문을 한 장 한 장 넘겨 한자 밑에 써놓은 음과 뜻을 보니, 天(하늘 천) 地(따 지) 玄(검을 현) 黃(누르 황) 자부터 시작하여, 梧(오동 오) 桐(오동 동) 早(이를 조) 凋(마를 조) 자에 머물러 있다. 계산을 해보니, 나는 조부에게 호수문을 다 배우지 못하고, 한자 768자를 배우고는 그만두었던 셈이다.

 

내가 호수문을 다 떼지 못한 데에는 그럴 만한 연유가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어머니를 따라 산 너머 외갓집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왔다. 다음 날 집에 돌아와 할아버지 앞에 앉은 나는, 매일 외워야 하는 한자 8자를 외우지 못했다. 그러자 조부는 들고 있던 긴 담뱃대로 내 머리를 쳤다. 담뱃대 대꼬바리(담배통)가 쇠로 되어 있어, 내 정수리는 이내 콩알만 하게 부어올랐다. 철이 들지 않았던 나는 아픔을 참지 못하고 울며, 사랑방에서 그만 뛰쳐나와 버렸다. 조부가 나를 보고 소리쳤다.

 

“어허, 저늠 버르장머리 좀 보게. 방구 뀐 놈이 화낸 다더이?”

 

부모님은 《천자문》 공부를 계속하라고 꾸짖었지만, 나는 다시는 사랑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나의 한자 공부는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 시오리나 되는 하굣길에서도 조부에게 배운 한자를 외우면서 다녔다. 다른 아이들보다 한자를 많이 알아서 느낀 것인지, 청년으로 성장해가면서 깨달은 것인지는 몰라도, 나는 호수문을 다 배우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움베르토 에코는 ‘사람이 영원히 사는 방법 중의 하나는 자식들에게 유전자를 남기는 것’이라고 했다. 시를 쓰고 있는 나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한시를 쓰던 조부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았는지도 모른다. 외고집 생원 같은 조부의 가르침으로, 지금까지 서정시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6·25와 쫑의 죽음

 

나의 아버지는 4남 1녀 중 차남이다. 조부는 안동 권씨 복야공파 34대손임과 안동 권씨 족보 《성화보》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음을 늘 자랑했다.

 

6·25 전쟁 시에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총소리가 콩 볶듯이 가까이 들려오는 밤, 우리 가족은 산골에서 더 깊은 산골로 피난을 갔다. 어머니는 인민군이 쳐들어온다는 밤에 나를 업고 피난을 갔다. 밤중에 나를 업고 개울을 급히 건너던 어머니는 신발 한쪽을 빠뜨렸다. 그것을 찾느라고 뒤돌아서서 개천가를 헤맬 때, 나는 불안해서 가슴이 콩알만 해졌다.

 

다음날 인민군이 마을로 들어왔다. 그날 밤 마을의 몇 집이 불탔다. 누가 알려 주었는지 인민군은 어느 집이 군인 가족이고 경찰 가족인지, 벌써 족집게 귀신처럼 알고 있었다. 당시 내 형은 경찰관이어서 전쟁터에 나가 있었다. 인민군은 매일 우리 집에 찾아와 숨겨놓은 총과 수류탄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아무것도 숨겨놓은 것이 없다 해도, 울타리 밑과 산 밑을 대검으로 찔러보면서 샅샅이 뒤졌다. 그들 뒤에는 인민군 앞잡이가 된 마을 사람 둘이 미리 정보를 제공해주면서 항상 따라다녔다.

 

‘쫑’은 형이 기르던 경찰견이었다. 훈련이 잘되어 있고 영리해서, 목에 바구니를 걸어주면 앞집에 물건을 가져다주는 잔심부름까지 했다. 쫑은 나를 특히 좋아해서 내 말을 잘 들었다. 묶인 사슬을 풀어주면, 두 발을 덥석 내 어깨 위에 올려놓고 좋아서 식식거리면서 꼬리를 흔들었다.

 

어느 날 따발총을 멘 낯선 인민군이 우리 집 마당에 들어서자 사납게 짖어댔다. 아버지는 사슬에 매인 쫑에게 다가가 짖지 말라고 등을 쓰다듬었다.

 

“저놈 개새끼 내일 정오까지 죽이라우.”

 

다음 날 정오가 가까워져 오자, 나는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인민군이 둘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인민군은 사납게 짖어대는 쫑을 보자 따발총을 갈겼다. 쇠사슬에 매여 있던 쫑은 총소리에 놀라 공중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그 바람에 끊어진 쇠사슬을 끌고, 쫑은 번개같이 도망쳤다. 다행히도 다리를 빗맞은 모양이었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밤이 되어 뒷마루로 나가 오줌을 누던 나는 캄캄한 뒷산 소나무 숲에서 새파랗게 빛나는 불빛을 보았다. 쫑이었다. 다리에 총을 맞고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소나무 밑에 숨어서 날이 어두워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올라가 한쪽 다리가 축 늘어진 쫑을 안고 내려왔다. 나는 그날 밤 쫑을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다음날 아버지는 내가 일어나지 않은 새벽에 쫑을 산으로 데려가 죽였다. 그렇게 죽이지 않으면 인민군의 총에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쫑은 인민군의 따발총을 맞고도 살아 있다가, 결국 아버지의 몽둥이를 맞고 죽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피난 갔던 마을 사람들은 생사의 엇갈림 속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인민군을 무서워하면서도, 그들이 불러 모아놓은 아이들과 함께, 아무것도 모른 채 가르쳐주는 노래를 배우기도 했다. 어른들은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몰라 불안해하면서도, 공산주의에 대한 이념의 갈등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머리를 잘못 써서 인민군 앞잡이가 되었던 마을의 몇 사람은, 종전 후 인민군을 따라가다가 죽은 사람도 있었다. 또한 마을 청년들에게 붙들려 느티나무에 묶인 채 고초를 당한 사람도 있었다. 밤에 발걸음 소리가 나 사랑방 문구멍으로 들여다보니 아버지에게 찾아와 무릎 꿇고 눈물 흘리며 사죄하는 사람도 있었다.

폭격을 맞아 가족을 잃고 모두가 먹을 것이 없어 헤매는 전쟁의 와중에서도, 자기만 한 세상을 만난 듯 인민군 앞잡이가 되어 선동했던 사람도 보았다. 반면, 어쩔 수 없이 인민군에게 밥을 해주었다가 후일 고초를 겪은 집도 있었다.

 

6·25 전쟁 시에 인민군의 총을 맞고 아버지의 몽둥이에 맞아 죽은 쫑은 남북의 갈등을 죽음으로 증언한 것일까. 북한의 침략으로 인한 6·25 전쟁은 남북한의 이념 대립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수많은 생명과 재산이 희생되고, 같은 마을 주민이면서도 서로 등을 돌리고 몰래 이간질하는 등, 상처와 원한만 남겨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어머니의 농사일

 

나는 8살 때까지도 어머니 품 안을 떠나지 못했다. 어머니가 밭을 맬 때도 밭고랑을 졸졸 따라다녔다. 응석받이 막내로 자랐기 때문이다.

 

가끔 신문에 자식을 구하기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 어머니의 기사가 실린 것을 보게 된다. 나의 어머니도 모든 어머니의 사랑처럼 헌신적이었다. 나를 공부시키기 위하여, 밥장사를 하고 허리가 기역 자로 굳어질 만큼 평생 일만 했다. 어머니는 내가 잠시 고향 집에 머물다가 떠나오는 날이면, 밤새도록 나를 위해 호롱불을 켜놓고 끄지 않았다. 내가 걸어가는 길을 밝혀주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잘해도 어머니 사랑에는 미치지 못한다. 여행 한번 보내 드리지 못하고 속만 썩인 나는, 어머니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저리다. 배우지 못한 어머니는 억척으로 농사를 지어 나를 대학에 보냈다. 신학기가 되면 소를 팔아 마련한 등록금과 함께, 글을 모르는 어머니는 이웃집 누나에게 부탁해 불러 쓴 편지를 나에게 보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나에게 이렇게 당부하셨다.

 

“다루나 차 조심 하그라. 돈 애꺼 쓰고, 암커이 배골치 마그라.”

 

이제야 그걸 아는 내가 지금 뒤늦게 철들어 보내는 답장을 어머니는 천상에서 어느 누구에게 부탁해 읽고 계실까.

나는 그런 어머니의 슬픔과 한을 안개꽃에 비유해 시를 쓴 적이 있다.

 

 

논두렁 밭두렁 지나/

닳고 닳은 호미를 들고 걸어오시는/

우리 어머니 한숨 같은 꽃이여.//

 

어려운 사람살이 무슨 꿈으로/

하하하 하하하하 하얗게/

웃으며 눈물 참는가./

눈물 참으며 웃는가.//

 

해 저문 아득한 하늘에/

하나 둘 돋는 별을 새기며/

공부하는 자식 생각하고 돌아오는/

우리 어머니 눈물 같은 꽃이여.

 

— 〈안개꽃〉

 

 

박목월 선생님의 편지

 

1965년 대학생활 1년을 마치고 겨울 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가 있을 때, 박목월 선생님께 편지를 드렸다. 마침 뒤뜰의 대추나무에서 따놓았던 대추가 있어서, 작은 광주리에 담아 보내 드렸다. 겨울 산골에서 선생님의 답장 편지를 받은 나는 너무 감격하여 읽고 또 읽었다.

 

나는 지금도 46년 전 선생님이 나에게 보내신 편지를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권 군,

편지와 보내준 대추 잘 받았다. 대추는 집에서 딴 것이라 하니 고맙게 받기도 했지만, 어머님께 드릴 일이지, 왜 이 멀리 보냈는가.

문학은 그것에 대한 성의와 꾸준한 노력으로 열어가는 길, 한 번 뜻을 정했으면 군의 모든 시간이 자기의 야심을 증명하는 순간이 되도록 힘써라. 더구나 방학 동안에는 시에 열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믿는다.

책은 시집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소설도 이론서적도 읽어야 한다. 감정이 우러나오는 근원이 깊지 못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없음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 겨울 방학 동안에

① 세계문학전집 중 무게 있는 소설 열 권쯤

② 세계전후 문제시집(신구문화사)

③ 문학이란 무엇인가(싸르뜨르, 김붕구 역)

④ 문예사조(어문각)

⑤ 예술론(톨스토이, 계용묵 역)

이상 몇 권의 책은 다 읽도록 하라.

③, ⑤는 구하기 어려울 것이나, 안동이나 대구 가는 인편에 부탁하면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책들은 신간이므로 구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새 학기에 건강한 얼굴로 다시 만나자.

 

1965년 1월 5일 박목월

 

 

이 편지에는 문학청년이 지녀야 할 자세를 일러주고 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근원이 깊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과 출판사까지 소상하게 안내해 주고 있다. 책의 구입처까지 알려주는 편지에서 나는 제자 사랑하는 선생님의 자상한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감정이 우러나오는 근원이 깊지 못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없다’ ‘시에 열중하라’ ‘모든 시간이 자기의 야심을 증명하는 순간이 되도록 힘쓰라’는 말이 지금도 귀에 또렷하게 들려온다.

 

그때 나는 고향에서 지게를 지고 매일 산으로 가 땔감을 마련하느라 나무를 하고 있었다. 추운 겨울 산골짜기로 들어서면, 보이는 것은 눈 덮인 황량한 산뿐이고 들리는 것은 나뭇가지를 흔드는 쌀쌀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소개한 책을 구입하여, 그해 겨울부터 봄까지 다 읽었다. 나는 이 시기가 내 생애에 가장 많은 책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톨스토이의 《예술론》은 지루했지만 끝까지 인내하며 읽었다. 종일 나무를 해 피곤했지만, 꿈을 안고 밤을 새워가면서 책을 읽었다. 나는 서울에서 자취하면서 보낸 쓸쓸한 대학생활을, 어머니가 해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책을 읽으면서 위안받고 있었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난 뒤의 적막한 밤이면 시를 썼다. 별밤이면 같은 마을에 사는 박시교를 만나곤 했다.

 

운전학원 강사

 

나는 선생님의 ‘새 학기에 건강한 얼굴로 다시 만나자.’는 당부도 저버리고, 다음 해 봄에 군에 입대했다. 입대하여 운 좋게 카투사에서 운전병으로 군 복무를 했다. 대대장의 세단 운전병이었는데, 개 한 마리를 친 이후 트럭 운전병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싸진(병장)’이었던 나는 주말이면 ‘쌕버스(미군용 버스)’를 타고 외출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나는 장교식당에서 날라다 주는 미트를 칼로 썰며, 침대에서 생활했다.

매일 샤워를 하고, 버터 바른 빵을 먹고, 파인애플과 우유를 마셨다. 통제된 군 생활이어도, 사회에서 누릴 수 없었던 분에 넘치는 생활을 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시간이 있는 틈틈이 침대에 엎드려 시를 썼다.

 

1968년 여름, 군에서 제대했지만, 등록금 마련할 길이 없어 복교를 고민하고 있었다. 학생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해도 좀처럼 구해지지 않았다. 나는 그 무렵 소를 팔아 등록금을 마련해주신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서울에 올라온 어느 날 제1 한강교에 서서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암울한 상태에서, 나도 모르게 발길이 그곳까지 간 것이었다. 버스비가 없어 먼 곳도 걸어서 다녔다. 온종일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지쳐 집으로 돌아오던 저물녘, 왕십리의 어둑한 골목길에서 한 운전학원을 발견하였다.

나는 군복무하던 시절에 받은 운전면허 덕분에, 사회에 나와서도 운전면허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나는 불현듯, 운전학원의 강사가 되고 싶었다. 당시에는 운전면허증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다음 날 나는 운전학원 사무실로 찾아갔다. 원장에게 카투사에서 받은 5천 마일 무사고 운전증명서를 들고 가 보여줬다. 그것을 본 원장은 나에게 운전 실습을 시켜본 뒤에 강사로 채용해 주었다. 왕십리의 그 운전학원 강사를 4개월간 하여 등록금을 마련하였다.

 

신학기 봄에 복교를 하는 관계로 한 학기가 늦어졌다. 나는 등록금 마련하는 데에만 힘쓰느라고, 한동안 시 쓰는 일은 등한시하고 있었다. 이 무렵 선배인 이건청, 이승훈은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하여 이미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였다.

 

복교하는 날 박목월 선생님 연구실로 가 인사를 드렸다. 그동안 아무 소식이 없다가 불쑥 나타난 나를 보자, 선생님은 손을 덥석 잡으며 반가워하셨다.

 

시 3편의 약속

 

“그래 군에 갔었나. 고생했데이. 니 이제 열심히 시 쓰거라. 매달마다 시 3편씩 써 정리해 가지고 오거라. 알았제?”

 

“예.”

 

매달 시 3편을 써 정리해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주눅이 들어,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달에 시 3편 쓰기가 쉬운 것 같으면서도, 그게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이내 5월이 찾아왔다. 나는 선생님과 약속한 시 3편의 약속을 어기고, 계속 피해 다니고만 있었다.

 

5월이면 한양대 인문관 계단으로 올라오는 언덕에는 아카시아가 만발하여, 그 향기가 교정을 덮었다. 바위에 혼자 앉아 있으면 꿀을 따느라 닝닝거리며 날아다니는 벌들의 소리가, 아카시아 향기와 함께 바람에 날려 왔다. 나는 가끔 아카시아 향기에 취해, 아무 생각도 없이 우두커니 그 그늘에 앉아 있기도 했다.

 

복교하고 1년이 지나가도록 나는 선생님에게 보여드릴 만한 시를 쓰지 못했다. 그래도 《20세기 영미시의 이해》는 겉장이 부풀도록 끼고 다녔다. 선생님의 강의가 끝나면 부를까 봐 마음 졸였다. 강의 도중에도 선생님을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열정적이고 명료한 선생님의 강의는 정평이 나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강의에 얼마나 매료되었던지, 지금도 대학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선생님이 강의한 노트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종강을 눈앞에 둔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강의를 끝내고 나가신 선생님이 나를 찾는다고 했다. 복도로 얼른 나가 보니, 선생님이 서 계셨다. 큰일 났구나 싶었다. 그동안 매달 시 3편을 써오라는 선생님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선생님의 손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나는 그때 선생님의 손이 그렇게 크고 부드러운 줄 처음으로 알았다.

 

“니 나하고 약속해놓고 시 와 안 써 오노? 시는 아주 버려뿌렸나?

얼굴이 이게 뭐꼬? 자취한다 그랬제. 빠다 있잖나? 그걸 밥에 비벼 묵거라. 꼭 시 써 온네이.

손이 와 이리 차노? 이거 내 연구실 키다. 손 좀 녹이고 가거라.”

 

선생님 연구실 키를 받아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공부도 하지 않고, 매일 술만 퍼마시며 돌아다녔다. 시골에서 등록금을 마련해 허리에 차고 오신 어머니의 당부를 들을 때처럼 눈물이 핑 돌았다. 시를 쓰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있던 나는 그날 이후부터, ‘자기의 야심을 증명하는 순간이 되도록’ 시 창작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 무렵처럼 밤을 새워가면서 치열하게 시를 쓰던 시기는 지금까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마침내 1975년, 박목월 선생님의 추천으로 《심상》 신인상에 당선하여 시단에 등단하였다.

 

그해 나는 김성춘, 김용범, 윤석산, 이명수, 이준관, 이진호, 조우성, 조정권, 한광구, 한기팔 등과 ‘신감각’ 동인을 결성하고, 동인지를 발간하였다. ‘신감각’은 신춘문예나 문예지로 등단한 목월 문하생들로 구성되었다.

《신감각》 1집은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1960년대 이후, 한국시를 주도했던 《현대시》 동인을 제외하고는 두드러진 동인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감각》은 정호승, 김명인, 김창완, 이동순 등이 결성한 《반시》와, 임홍재, 이인해 등이 결성한 《육성》과 함께 1970년대의 중심적 동인지였다.

 

그 뒤 1981년엔 감태준, 김광규, 김용범, 김창완, 나태주, 노향림, 송수권, 이성복, 이성선, 이준관, 이태수, 이하석, 임홍재, 장석주, 정호승, 조정권 등과 함께 시인이 자선한 대표작 8편씩의 시를 게재한 《70년대 젊은 시인들》(문학세계 현대시선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첫 시집 《해바라기 환상》 출간

 

첫 시집 작품을 준비하던 1978년 봄이었다. 1교시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서던 나는, 아침 산책길에서 박목월 선생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 그때는 선생님이 고혈압에 시달리고 계시던 중이라, 나는 시집 발문 부탁을 미루고 있었다.

 

목월 선생님의 발문 없이, 1979년 첫 시집 《해바라기 환상》을 출간했다. 그해 7월 우이동 골짜기에서 합동 시집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스크랩해 놓은 초청장을 꺼내보니 회비가 3,000원으로 되어 있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한기팔, 한광구, 김성춘, 이명수, 이태수, 권달웅, 신협, 7인의 합동 시집 출판기념회여서, 많은 지인들이 우이동 골짜기로 찾아왔다.

 

그날 출판기념회가 있다는 방송을 듣고 찾아온 여학교 제자들이 꽃다발을 들고 와, 나는 꽃 속에 파묻혔다. 또 서울대에 다니던 한 제자는 박동규 교수를 그 출판기념회에서 만나 인사를 하고 노래까지 불렀다. 그 제자가 지금은 검사가 되어 있다. 박희진, 허영자, 유승우, 권두환, 윤석산, 신현정 등 많은 시인이 참석했다.

김광림 선생님은 나의 여학교 제자들을 어찌나 예뻐했던지,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어서 일어나라고 눈짓을 보내, 겨우 난처함을 피하기도 했다.

 

그 첫 시집에 이별의 성숙을 노래한 〈감처럼〉과 함께, 죽음의 본질을 추구한 〈망우리 길〉이 실려 있다.

 

 

걷지 않아도 길은 이어진다.

떠나간 사람에게 마음을 주면서 흔들리는 풀꽃은 내일이면 하얗게 쓰러질 것이고, 내일이면 흰 풀꽃 같은 사람들이 산으로 가 살 것이지만, 사람들은 모든 길이 망우리로 이어져 있음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오늘 걸어온 만큼 짧아진 길을 버려도, 하루해는 영원한 길을 버리지 않는다. 길을 서두르지 마라. 사는 것은 죽음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오늘 하루 망우리 산슭엔 누구를 위한 돌을 쪼는지, 아름다운 이름을 새기는 정소리가 가득하구나.//

 

고향으로 가는/

장님으로 가는/

망우리 길.

 

— 〈망우리 길〉

 

 

권두환은 시집 해설에서〈망우리 길〉이 삶과 죽음의 순환 현상에 대한 깊은 통찰과 관조가 투영되어 있다고 평했다.

 

나는 첫 시집 이후 지금까지 8권의 시집과 2권의 시선집을 간행하였다. 다작도 과작도 아닌 자세로 공들여 시를 써서, 4, 5년을 주기로 꾸준히 시집을 출간하였다.

 

첫 시집을 낼 무렵 나의 시 세계는 문명의 인위성과 자연의 순수성, 이 상반된 두 개의 연민 속에 있었다. 문명에 의해 사라져 가는 자연성과 문명에 길들어 가는 인간의 삶을 조응하기 위해 시를 썼다. 나는 자연 자체만이 아니라 순수성을 잃어가는 오늘의 삶을 성찰하기 위해, 시의 근원을 자연세계에 두고 있었다.

첫 시집 간행 이후부터 나의 시는 전에 추구했던 자연세계에서 인간세계 쪽으로 점차 기울어졌다. 인간은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하나의 우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탐석하던 시절

 

이 무렵 주말이면 나는 전봉건 선생, 서정춘, 유재영, 김원각, 김현, 김경재 시인과 탐석을 다녔다, 일요일 새벽이면 어김없이 마장동 시외 버스터미널에서 만났다. 남한강은 어디를 가나, 오석 산지로 유명하다. 버스터미널에서 돌밭까지는 택시를 타고 들어가고, 돌아올 때는 예약해 놓은 택시를 타고 다시 나왔다.

 

개군, 천서리, 이포, 보통리, 가산, 강천리, 양섬, 은모래, 목계, 서창, 한수, 지곡, 조치골, 도하리, 청풍, 하진 등은 오석 산지로 이름난 곳이다. 남한강 댐이 건설되기 전이라, 전봉건 선생은 늘 카메라를 들고 사라져 가는 강의 풍경을 찍었다. 형상석을 좋아하는 박두진 선생과는 탐석을 자주 나가지 못했지만, 문양석을 좋아하는 전봉건 선생과는 오래도록 탐석을 다녔다. 점심 무렵이면 탐석한 돌이 수석감이 될 수 있는지 선별했다.

 

“버리라우.”

 

전 선생의 이 말이 떨어지면 우리는 무엇이 될 것 같아도, 들고 온 돌을 미련 없이 버렸다. 어느 토요일은 전 선생이 일요일 탐석을 나가자는 전화를 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부담스러웠던지, 모두들 일요일에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었다. 그리고는 새벽 첫차 시간에 맞춰 우리끼리 약속을 하고 탐석을 나갔다.

개군은 나룻배를 타고 남한강을 건너야 했다. 우리가 개군 섬에 들어가 탐석을 하고 있을 때, 바로 이어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오는 키 큰 사람이 있었다. 전 선생이었다. 우리는 모두 안절부절못했다. 전 선생이 우리를 보고는 그저 알겠다는 듯 빙긋 웃었다. 김현 시인이 변명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이, 우리는 위기를 모면한 듯 얼른 그 자리를 피했다.

 

그날 개군에서 탐석을 하던 서정춘 시인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권형, 시 잘 쓴다고 돌 잘하는 것 아니고, 앞서 간 사람 있어도, 뒤에 오는 사람이 더 좋은 돌 할 수 있소. 으이.”

그날 우리는 좋은 돌을 만나게 되는 행운을 석복이라고까지 했다.

시나 돌은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진 작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탐석 나가기 전날 밤에는 휘황찬란한 문양의 돌을 쓰다듬다가 일어나면 꿈이었다. 돌 한 점을 만나기 위하여 온종일 뜨거운 돌밭을 헤매다니는 일은, 시 한 편을 쓰기 위하여 밤을 지새우는 시인의 창작 행위와 같은 고통이었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부단하게 시를 쓰고 언어를 탁마해야 하는 것처럼, 좋은 돌을 만나기 위해서는 수석 전시회에도 가보고, 수석 잡지도 보고, 꾸준히 탐석을 나가야 한다.

 

남한강 돌밭이 사라져 갈 즈음, 나는 김현 시인과 한탄강과 임진강 탐석을 다녔다. 삼화리, 어유지리, 비룡교, 마포교, 전곡, 백학, 군남 등을 찾아다녔다. 한 점 돌에는 산경이 있고, 호수가 있고, 진달래가 피고, 달이 뜨고, 폭포가 쏟아지기도 한다. 그래서 돌을 소우주라고까지 부른다.

 

지금은 해석(海石) 탐석을 하기 위해 풍도, 소청도, 거제도 등의 섬으로 가기도 한다. 해석은 주먹만 한 돌도 문양과 빛깔만 좋으면 수석이 된다. 바닷가 돌밭에서 질감이 매끄러운 해석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태고의 음향을 듣는 듯, 까마득히 지나간 시간들이 수평선 위로 아련히 떠오르기도 한다. 때로는 그것이 한 편의 시를 탄생하는 시상이 되기도 한다. 시에 구성 요소가 있듯, 수석은 형태, 빛깔, 석질이 좋아야 빼어난 수석이 될 수 있다. 좋은 수석은 오랜 세월 동안의 변화미가 선의 흐름과 함께 생동감을 주고, 구도상에 안정감을 주면 좋은 수석이 될 수 있다. 해학적이며, 상징적인 돌은 언제 보아도 지루하지 않다.

 

돌에는 억겁의 세월 속에서 신이 창조해낸 비경이 숨어 있다. 시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내면과 대상의 등가적 유추를 생각해야 하는 것처럼, 수석의 감상은 함축된 자연의 비경과 나와의 상상력 확대를 통해서 소통된다.

 

누구나 돌밭에 나가 산과 강을 마주하고 앉아 있으면, 내 몸이 저절로 시인이 되어 시를 쓰고 있는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안개 낀 대학의 추억

 

한양대 인문관 건물에서 바라보면 우수처럼 늘 안개가 낀 듯 흐릿한 왕십리가 내려다보인다. 왕십리역으로는 가끔 화물열차가 지나가고, 그 사이로 굴레방 다리로 가는 골목이 나 있었다. 그 골목 양옆에는 허름한 술집들이 많았다.

 

이들 술집 중에 ‘충남집’이 있었다. 술값이 싸기도 했고, 국문과 학생들이 많이 오는 날이면 술을 아예 양동이에 부어 주었다. 주인이 인심이 후해서 돈이 없어도 외상을 주는 집이었다. 술을 마시다가 통금시간이 되어 집에 갈 수 없을 때에는, 그 집에서 밤을 새워가면서 문학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셨다.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데모 때문에 휴강이 있는 날이면, 주당들은 낮부터 그 집에 가 술을 마셨다. 어느 날은 휴강이 아닌데도, 누가 강의실 흑판에 커다랗게 ‘휴강’이라 써놓고 술집으로 가도록 유도했다.

뒷날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김용직은 술독에 빠져 이 충남집에서 아주 먹고 자며 지냈다. 충청도에서 올라온 어느 학생은 등록금을 술값으로 다 탕진해 낭패를 겪은 일도 있었다.

 

나도 충남집에서 그들 틈에 휩싸여 술을 마시다가, 교직과목 시험 날을 깜빡 잊어버려 시험을 치르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 죗값으로 나는 교직과목 학점을 취득하기 위해, 그 무더운 여름 서머스쿨까지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만 나온다.

 

이 집은 다른 대학에까지 알려져, 많은 문학청년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조정권, 신현정도 이 술집에 자주 왔다. 국문과 학생들이 얼마나 술을 퍼마시고 외상을 그어놓았으면, 졸업식 날 외상값을 받으려고 인문관 현관 입구에 이 집 아줌마가 서 있었겠는가. 졸업식이 끝나 가운을 반납하려고 인문관 현관에 들어서려던 국문과 학생들이, 이 아줌마를 보고 혼비백산해 줄행랑을 쳤다.

 

통금이 있던 당시에는 10시가 되면 라디오에서 “청소년 여러분,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라고 방송을 했다. 문학이 무엇이고 시가 무엇인지, 우리는 왜 그토록 소중한 젊음의 날을 그렇게 허망하게 보냈던가. 시가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왜 박목월, 서정주, 정지용, 백석, 라이너 마리아 릴케, 스티븐 스펜서, 에즈라 파운드, 폴 발레리의 시에 심취했던가. 해야 할 공부는 하지 않고, 술에 취해 문학을 논하던 우울한 대학생활의 우수가 안개 낀 왕십리의 추억처럼 떠오른다.

 

1970년대, 이 무렵에 어울리던 시인 중에서 지금도 열흘이 멀다고 만나 밥을 먹고, 시를 이야기하는 시인이 있다. 인문학 서적과 함께 자연식품 분야의 베스트셀러 서적만을 계속 출간하는 동학사의 대표 유재영 시인이다. 나는 그가 지니고 있는 인품, 그리고 간결하고 청명한 이미지로 직조하는 감각적인 시와, 열정적인 삶의 자세를 좋아한다. 그는 나의 삶과 문학에 때때로 온기와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었다.

풀꽃 같은 나태주 시인, 늘 소년 같은 이준관 시인과도 수십 년 동안이나 따뜻한 서정의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시 쓰는 일이 힘들지만, 마음 통하는 시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지내는 일이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여러 문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으로, 어떤 모임에 나가면 반가움보다는 낯섦이 앞선다. 문인 단체도 한국시인협회 한 곳만 가입했고, 다른 데는 나도 모르게 이름이 들어가 있을 뿐이다. 문학은 패거리 정치가 아니라 저마다의 개성과 진정성으로 자존하는 외로운 작업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좋은 문예지에서 원고청탁이 오면, 친구가 적적한 내 속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한 듯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나의 시, 나의 시론

 

나의 시 속에는 두 개의 고향이 있다. 하나는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적 고향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생각하고 꿈꾸는 정신적인 고향이다. 현실적인 고향은 물질과 욕망에 얽매여 사는 인위적인 삶의 현장이고, 정신적인 고향은 현실에서 잃어버린 자연성과 순수성에 대한 그리움이나 연민이라 할 수 있다.

문명의 인위성과 자연의 순수성, 이 상반된 두 개의 갈등 속에서 나는 시를 추상한다. 현실이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나는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환상의 영역을 확대한다. 내 꿈이 도달하지 못한 콤플렉스, 물질과 비인간화의 현실이 주는 삶은 유년에 경험한 물상들과 접목하고, 근원적인 삶의 물음들은 모두 나의 시 정신과 관계를 맺는 사이, 내 시의 형상이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나는 일상의 어휘로 적절한 비유와 청신한 이미지로 투시된 시를 좋아한다. 단순한 어휘라도, 그것을 어떻게 우리의 정서를 적절하게 살려 표현할 것인가. 그것이 나의 시에서 중요한 난제이다. 쉬우면서도 청신하고 함축미 있는 시 세계를 추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시는 나의 삶과 현실을 비추어보는 거울이다. 잃어버린 내 삶의 순수성을 찾기 위해, 보다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삶에 대한 물음을 계속할 것이다. 모호하고 난해한 시를 탈피하여, 맑고 투명한 시의 세계를 구축해 나갈 것이다.

나는 시를 쓸 때, 이미지와 어휘의 간결성에 신경을 쓴다. 항상 대상에 명료한 이미지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시는 대상과 내면의 등가적 유추에 의해 창조되기 때문이다.

 

 

휘어진 산등성이에/

희미한 낮달이 걸렸다.//

 

아버지의 지게에/

다 닳은 낫이 꽂혔다.//

 

낮달도 닳은 낫도/

등이 휘어졌다.//

 

먼먼 황톳길도 아버지도/

등이 휘어졌다.//

 

낮달은 창백하고/

아버지는 외롭다.//

 

산등성이는 쓸쓸하고/

지게는 애처롭다.//

 

모두 등이 휘어지도록/

무거운 짐을 졌다.

 

— 〈아버지의 지게〉

 

 

이 작품은 ‘아버지’를 ‘산등성이’ ‘낮달’ ‘낫’ 등의 등가적 이미지로 유추한 시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온 ‘아버지’처럼 모든 대상은 등이 휘어져 있다. 시의 생명인 이미지는 헤모글로빈처럼 시 속에 활력소를 공급해주고, 그 시를 생기 있고 투명하게 해준다.

 

인간은 물질을 추구하면서도 또 다른 정신세계를 그리워한다. 삶의 현실이 부정적이고 그 현실에 순응하지 못할 때일수록, 인간은 갈등을 느끼며 이상세계를 그리워한다. 이러한 인간의 갈등과 외로움을 위안해주는 것이 바로 서정시이다.

 

시는 자아와 대상이 관계 맺고 부딪쳐 나가는 정신의 빛이며, 장인정신으로 세공한 보석이다. 시인은 적절한 비유의 대상을 찾아 떠도는 나그네이며, 수도승처럼 고행하면서도 세상의 삶을 정화하는 수행자이다. 시인은 대상을 통해 현실을 재인식하고, 삶의 갈등과 부조리를 표출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

나는 시를 쓸 때 기교나 현란한 수사보다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생각한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의 체험성과, 사물들과의 관계를 확장하기 위하여, 서정성을 늘 바탕에 둔다. 서정은 산소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움직이면서, 그 시를 맑고 산뜻하게 해준다. 달빛처럼 비치면서 그 시를 은근하고 아름답게 해준다. 나의 시 속에는 토속적인 세계와 순수세계를 지향하는 맑은 정신과, 잊혀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들이 숨 쉬고 있다.

 

내가 쓰는 서정시는 삶의 근원적인 물음에서 출발하여, 그에 대한 답을 아주 작고 약한 것에서 찾는다. 작고 약한 것이 우주의 소중한 구성체이기 때문이다. 나의 시안은 언제나 보잘것없는 삶의 편린들과 원형질적인 생명들로 꼬물거린다.

 

낙동강이 흐르는 오지 산골 봉화는 아직도 반딧불이가 서식하는 곳이다. 나는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정신을 탐색하며, 서정시의 꽃을 피워 나갈 것이다. 나는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산골에서 성장해서 그런지, 나의 삶과 나의 문학은 언제나 고향과 혈맥을 같이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의 10년간을 객지에서 자취생활을 해왔다. 그래서 그런지 늘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지내왔다.

가난과 한, 비애와 갈등, 절망과 희망을 겪으면서 외롭게 문학의 길을 걸어왔다. 나는 고향 봉화에서, 안동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 머나먼 길을 강물처럼 흘러왔다. 시 하나만을 붙들고 눈과 얼음으로 덮인 세상을 걸어왔다.

 

〈은어〉는 내 유년의 삶을 돌아보듯, 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회귀의식을 나타낸 작품이다.

 

 

나 여기 떠나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면/

청량산 육육봉 끌어안고/

굽이굽이 돌아 나가는 낙동강 상류 물 되리./

어머니 쪽진 비녀만 한 은어가 되리./

하얀 외씨버선만 한 은어가 되리.//

 

나 여기 떠나 자라난 곳으로 돌아간다면/

달밤에 올 고운 안동포 짜는 어머니 바디소리 만나리./

저 아득한 바다로 항해하는 수만 척의 배처럼/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거슬러 올라가/

가슴에 품었던 반짝이는 물 만나리./

꿈처럼 이슬 머금고 핀 들꽃 만나리.//

 

나 여기 떠나 저 투명한 낙동강으로 돌아간다면/

원앙이 새끼쳐 나가는 저 먼 비나리 지나/

명경처럼 맑은 명호천 지나/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곳까지 거슬러 올라가/

내 혈관이 가을 물처럼 맑아지도록/

강바닥 속 은모래 환히 비치는 청정한 마음으로 살리./

은어처럼 수박향기 나는 사람으로 살리.

 

— 〈은어〉

 

 

〈은어〉는 서정을 바탕으로 나의 삶과 문학이 표현되어 있다. 나는 어두운 현실을 떠나, 나의 삶에 대한 희원과, 순수한 유년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은어〉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그리움은 “나 여기 떠나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면” 이라는 가정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은어〉는 현실적 처소인 “여기”를 떠나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곳”인 낙동강 상류로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본능을 등가적 사물의 유추를 통해 들어내 보았다.

 

나는 앞으로도 매달마다 ‘시 3편의 약속’을 지키며, ‘자기의 야심을 증명하는 순간’이 되도록 하고자, 내 삶을 성찰하고, 시류와 문명에 침식되지 않은 내 본연의 시 세계를 추구해 나갈 것이다.

 

 

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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