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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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2010. 4. 27.

오래 전에 에스라 성경대학원대학교의 신약학 교수님이신 양용의 교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논의한 것이 <목회와 신학> 2001년 10월호에 실린 일이 있습니다. 그 대담과 출판 이후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내용을 다시 읽어 보시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하나님 나라 사상의 진전을 위해서 여기 다시 소개합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의 생각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생각하며 읽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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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혼동

                                         (양용의, 이승구교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신학적이며 본질적인 접근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좀더 깊은 이해를 주기 위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혼동” 이라는 주제로 대담을 마련하였다.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용어에서 나타나는 신학적 혼동은 무엇인가?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어떤 관련 속에서 움직여야 하는 것인가? 등의 문제들을 살펴봄으로서 한국교회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지를 점검하고자 한다. 특히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생각해 봄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이번 대담은 양용의 교수와 이승구 교수가 함께 진행하여 주셨다.]

 

양용의 교수- 80년대 후반이후 한국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좋은 글들과 논의들이 계속적으로 진행되어 왔고 많은 분들이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을 갖고 강의를 하면서 신학의 중요한 주제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를 다루고 싶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실천적인 부분입니다. 이론과 실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논의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승구 교수-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먼저 이야기해야 할 부분은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과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는 용어의 차이점에 대한 혼동이 가장 심각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용어들이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양용의 교수-일반적으로 한국교회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한편으로는 죽어서 천국을 간다는 기본적인 개념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현재적인 기복성에 연결되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원적으로는 히브리어의 말구트와 헬라어의 바실레이아에서 나온 것으로 어떤 장소적인 개념보다는 보다 역동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왕으로서 왕권을 행사한다는 통치적인 의미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이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오심이라든지 주의 날, 여호와께서 왕이 되신다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자체는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하나님 나라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배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좀더 보충해 주시겠습니까?

 

이승구 교수-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사실 신약이 가르치는 것에는 조금 못 미칠 수 있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시행되고 나서 한 번도 하나님의 주권이 없어져 본 적이 없는데,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 나라라고 신약에서는 표현하지 않았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 나라의 구속적인 실현 또는 역사적인 실현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지금 한국교회 내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일반적으로 단순히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하면서 오해를 하는 경우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용어의 사용상 하나님의 통치의 역사적인 시행과 연관해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해야만 하고 역사적인 과정상 하나님의 구체적인 통치를 하나님의 백성들이 상실해 가는 역사적인 경험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가 다시 올 것을 기대하는 역사적인 배경을 알 수 있고, 그런 역사적인 배경에서만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라는 말이 이해되어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양용의 교수-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인격의 사역, 그리고 구약 약속의 성취라는 의미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단순히 평면적인 하나님의 왕 되심이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께서 인간구속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가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서 성취된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이해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관련해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보면, 하나님 나라, 하늘 나라, 천국, 천당, 낙원 등의 표현들을 들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개념은 장소적인 개념보다는 보다 역동적인 하나님의 왕 되심의 통치하심을 전제하고 있으며, 하늘 나라라는 것은 사실은 신약성경의 마태복음서에만 나타나는 표현으로 유대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안에서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때는 대개 장소적이며 공간적인 의미로 하늘을 생각하는 경우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신약성경 저자들의 조심성 있는 용어선택을 좀 본받아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에만 하늘나라가 나타나고 다른 성경에서는 다 하나님 나라라고 일관성 있게 사용했다는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자 하는 의도가 있지 않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 나라라는 용어가 자칫 공간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보다 더 역동적인 의미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쓰고자 하는 저자들의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도 그런 점에서 자칫 하늘나라에서 생길 수 있는 개념적인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의도적으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승구 교수-한국교회 초기에는 비교적 하나님 나라의 용어에 대해 고민했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이라는 말과 천당이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구분해서 사용한 흔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들이 어느 정도나 의식해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관성 있게 의식하려고 했던 흔적이 나타나는데 일반적으로 kingdom of heaven과 kingdom of God을 이야기할 때에는 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사람이 죽어서 가는 heaven을 사용할 때는 천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의식적으로 구분한 흔적이 한국교회 초기에 나타납니다.

 

근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한국 사람의 의식과 용어사용에 있어서 천당과 천국을 혼용하는 일이 일반화되어져버렸죠, 그리고 의식적으로 구분하는 사람들 외에는 거의 동일시되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신약성경적 의미의 하나님 나라 또는 마태가 사용하고 있는 천국, 하늘 나라 개념은 조금 뒷전으로 밀려나버리고 한국사람 의식 가운데 있던 죽으면 천국 간다는 개념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대체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양용의 교수-사실 천국이라는 말은 하늘 나라의 한자어인데 천국이라는 개념이 더 많이 사용되어지고 또한 천당이란 용어와 혼용이 되면서 천국을 마치 죽어서 가는 장소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하늘이라는 개념을 천당으로 번역하여 사용한 것 같은데, 그런데 문제는 천당 할 때의 당(堂) 자는 집 ‘당’자가 아닙니까? 그래서 종종 사람들이 가서 사는 집을 천당과 연관시키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승구 교수-그것은 한국교회 초기 신학자들이 하늘을 번역을 할 때 아마 상당히 불교적인 용어를 가져다가 사용했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야단을 칠 수는 없겠지만 일단 우리는 천당이라는 용어를 볼 때 heaven의 번역어라고 받아들이면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것처럼 천당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에, 즉 ‘하늘 집’ 과 같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heaven에 상당한 다른 역어를 사용하는 것이 또는 신약성경에 다른 용어가 있다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양용의 교수-그렇다면 가장 일반적인 표현은 하늘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그러나 하늘이라는 개념도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공중이라는 하늘과는 구별된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초월적인 의미로서의 하늘, 즉 하나님의 거처라는 초월적인 의미가 여기서 매우 강조되어야만 되는데, 예를 들어서 10년 전쯤 유행되었던 내가 본 천국을 보면 천국을 완전히 하늘의 개념으로 봄으로써, 몇 억 광년을 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광년이 아무리 많아져도 그것은 인간의 경험세계 속에서의 공간이고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다 계시지만 그러나 본질적인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의미는 차원적인 초월성이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하늘이라는 개념을 매우 조심스럽게 사고의 개념 속에서 정리를 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승구 교수-물론 하늘의 공간성도 이야기를 하긴 해야죠. 그것을 놓쳐버리면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계신 그곳에 또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계시고 또 구약시대의 부활한 성도들도 그곳에 있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에 분명한 장소성을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하늘을 한없이 올라가면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는 생각을 배제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양용의 교수-하늘에 관해서 이야기하다보면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 있는데 사후의 세계 혹은 중간상태와 관련해서 죽은 사람들이 어디에 가느냐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흔히 장례식에 가면 죽어서 천국 간다는 표현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물론 여기서 천국의 개념은 철저하게 조금 오해된 적용이지만 거기서 의미할 때 하늘에 갔다는 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이 드는데, 하지만 그러면서도 실질적으로 신약성경 안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하늘에 간다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그와 유사한 개념을 유추할 수 있는 몇 가지의 구절들만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 더 조심스럽게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승구 교수-사람이 죽으면 주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조직신학적 사고를 통해 본다면 몸은 죽어서 땅속에 들어가니까 영혼이 주님과 함께 있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하기를 주님이 계신 곳이 하늘이라고 했으니까 우리가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태까지의 조직신학도 계속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비슷한 용어로 사용되어진 것이 십자가상의 강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것을 통해 생각해 본다면 죽은 다음에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낙원과 하늘이 동의어라는 것은 모든 조직신학체계로 되어있고 그래서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으로 paradise is heaven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과 표현들이 오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용의 교수-사후 세계와 중간상태와 관련해서는 신약성경에서 살펴볼 수 있는 곳은 먼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입니다.

 

나사로가 간 곳이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 곳에 아브라함은 의식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의식상태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브라함은 의식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부자가 간 곳은 하데스 또는 스올이라는 곳으로 표현되는데, 결국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스올 또는 하데스에 가있는 것이고, 반면에 구원을 받을 자들은 아브라함의 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이 어디 있든지 간에, 만약에 아브라함이 하늘에 있다면 그 하늘이 나사로가 가서 있는 곳입니다. 또 한가지 이 문제와 관련해서 볼 문제는 낙원의 문제입니다.

 

오늘이라는 개념과 나와 낙원에 함께 있겠다 라고 했을 때 두 표현이 상호 어떻게 연관되며 그리고 오늘의 시점을 언제로 볼 것인가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개념을 현재적인 의미로 네가 지금 그말을 하는 순간 이미 하나님의 통치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고, 또 종말론적인 의미로 강도에게 하신 말씀이 최종적으로 완성된 하나님 나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에 대한 일반화된 견해는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강도와 더불어서 함께 있게될 그러한 상태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사실 낙원이라고 하는 개념은 바울이 의미 있게 사용한 경우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낙원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하늘의 개념과 상당히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빌립보서 1장 23절에 내가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낫겠다했을 때 방금 전에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와 연결해서 생각해 본다면 하늘의 개념이 죽은 자들이 거하게되는 곳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에 대해서 바울은 잠을 잔다라는 표현을 의외로 많이 애호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거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잠잔다라는 표현은 많은 논란의 여기가 있지만, 그것이 굳이 무의식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활동을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죠. 일단 육체가 없기 때문에 영혼이 의식 상태에 있기는 할지라도 우리와 같은 계속적인 구원 할동을 할 수 있는 그런 활동은 정지된 쉼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낙원의 개념은 하늘의 개념과 연관해서 인간의 죽음 이후의 상태를 이야기할 때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어질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이러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죠. 즉, 죽어서 낙원이 되었건 아브라함의 품이 되었건 하늘이 되었건 간에 그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 또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 혹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완성입니다.

 

이승구 교수-중간상태를 기다리면서 쉬는 상태 또는 잠정적인 상태로 잘 정리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철저한 것이고 또한 성도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한 부활 그리고 부활한 몸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 명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점을 좀 강조해서 중간상태는 하늘 또는 낙원으로 하는 것이 훨씬 나은 것 같고 그런 측면이 한국교회 안에서 좀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라는 용어를 죽은 다음에 가는 상태로 잡고 한정을 하니까 하나님 나라 혹은 천국에 대해서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을 중점적으로 생각한다든지 아니면 예수님의 재림 때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든지 이렇게 두 가지 커다란 오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용의 교수-한국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도 잘못 이해하고 있고, 미래성도 다소 부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낙원을 죽은 이후에 가는 상태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거기에다가 맞추는 것 같아요.

 

그러나 우리가 새롭게 초점을 맞추어야될 초점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때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시점이라고 이야기해야 되고 우리가 그때를 내다봐야지 죽은 이후를 내다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상태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활동적이지 못한 것이고 의식은 있을지는 모르지만 매우 적극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은 아닌 상태입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예수님과 더불어 왕노릇하는 상태는 바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이고,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삶의 목표와 기대와 소망을 거기에다가 맞추어야 됩니다.

 

이승구 교수-조직신학에서도 그런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조직신학을 배우는 순서가 서론, 신론, 그리고 맨 마지막에 종말론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룬다 할지라도, 즉 서론을 다룰 때도, 신론을 다룰 때에도 종말론적인 개념을 염두에 두고서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지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종말론적인 개념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후의 활동이 전부다 종말론적인 활동이라는 인식 속에서 우리의 신학은 종말론적 신학이라는 인식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기독론을 다루면서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이 이미 임하여왔고,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여왔다는 관점에서 기독론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태는 어떻든지 간에 신학전체의 형태를 종말론적인 형태로 제시하든지, 아니면 전통적인 틀을 유지한다 할지라도 신학적인 종말개념에 충실하게 조직신학을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만큼 종말론적인 시각 아래 신학을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우는 신학적 체계 자체가 종말론이 맨 마지막에 포진되어 있어 일반적인 성도들이나 신학생들에게는 구조에서 오는 영향이 클 수 있다는 것을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부분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차원을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우리의 역할은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봤을 때 그 나라는 강력한 하나님의 크신 힘으로 이루시는 나라이기 때문에 여기서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도무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요구는 믿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서 무엇을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크신 힘으로 이루실 것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양용의 교수-한편으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초점은 하나님에게 맞추어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적절하면 적절할수록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더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통치권,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한다는 문제가 어떻게 보면 하나님 나라의 제일 큰 시발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권하면 너무나 쉽게 생각해서 하나님이 그냥 나의 왕이시다 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데 실질적으로 신약성경 안에서는 훨씬 더 철저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죽는다는 표현,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는 표현 등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것은 내가 살아있고 서는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주인이고 내가 다스리기 때문에 라고 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나의 주권이 양립할 수 없다는 전제 속에서 나의 죽음을 먼저 선포해야만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우리가 설명하길 자기부정, 자기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승구 교수-또한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다는 것은 자신의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소유가 더 커지는 것을 바라는데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진행과 역행하는 것입니다.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은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죽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안전을 어디서 찾느냐가 중요합니다. 물질에서도 찾을 수 있고 하나님에게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당연히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맛보면서 모든 불안과 염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특권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실질적인 통치를 생각한다면 실질적인 삶에 있어서의 삶의 자유 그러니까 이세상의 모든 염려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하는, 그리고 근본적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셨다는 것에 근거해서 자유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스스로가 만든 율법적인 조항들로부터 하나님의 통치가 우릴 자유하게 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나 물질적인 문제로부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아주 좋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용의 교수-이야기의 주제를 다른 부분과 연결시켜 보겠습니다. 구체적으로 매일매일의 삶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것인가를 다룰 때 최근 한국교회 안에 일반화되어있는 것 중의 하나가 성경묵상 혹은 Q. T. 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성경묵상과 하나님 나라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승구 교수-현재하고 있는 Q. T.가 나쁘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진정으로 의미가 있으려면 성경을 잘 묵상함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건전한 사상, 즉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사상인데, 그것이 형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에 부딪히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야 되고 기도하는 가운데 자기 삶에 결단을 하고 나아가야 되는 것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Q. T.는 이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성경묵상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전체의 의도를 알아가려고 하는 것으로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점에서 매일 매일의 목표 혹은 오늘 읽은 것에서 구체적인 적용점을 발견하지 못한다할지라도 그것을 너무 염려하지 말고, 내게서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형성되는가 하는 점을 주목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실질적으로 성경을 묵상하고자 하는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지 성경묵상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해결을 위해서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용의 교수-성경을 묵상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은 철저하게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말씀을 읽음으로써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때문에 읽은 말씀과 바로 직결되어 어떤 원리를 제시해주지 않을지라도 그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큰 원리가 때로는 보다 구체적인 적용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중요한 것은 오늘 하루를 사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나의 삶을 주관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간절히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으면 어디에 있는 말씀이든지 나의 삶에 관련된 좋은 하나님의 뜻들을 보여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될 것은 말씀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내가 노력하고 내가 결심했을 때 이루어지는 나라라면 그건 나의 나라이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죠.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 시작부터 결과까지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점에 초점을 두어 말씀 묵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로 인한 혼동들을 살펴보았는데 마무리를 하면서 정리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승구 교수-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찌 보면 인간의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사실상 인간의 노력이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본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나라를 기다리고 기도하고 할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가 그 나라를 건설한다든지 우리가 세운다, 확장한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는 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점은 지속적으로 강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라면 하나님에 강조점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일에 우리가 그 통치를 제대로 받는 것을 강조해야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무엇을 많이 해야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돌려드릴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조금이라도 생각해보면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교회와 연결시키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무엇 때문에 존재한다고 하면 하나님 나라를 가장 강력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자체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한다면 사실은 교회의 참된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항상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의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 말씀을 잘 받는 행위도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복음을 온 세상의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도 말로만이 아니라 교회의 실질적인 존재로서 알려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섬기는 공동체로서존재했을 때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찾아보지 못하던 새로운 공동체가 여기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의미 있는 활동들을 우리가 찾아 교회 안에서 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 사상이 충분해지면 충분해질수록 이런 문제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대담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한국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 사상이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양용의 교수-한국교회가 어떤 일들을 할 때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서 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가복음 4장이나 마태복음 14장의 비유들 중에 알지 못하게 자라는 씨앗이라든지 겨자씨 비유, 누룩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처음 시작은 작지만 끝은 크다라는 대조점의 요소와 하나님 나라는 은밀하게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게 자라는 씨앗이 가장 극명하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고, 누룩의 비유도 실질적으로 여자가 밀가루 반죽에 누룩을 집어넣는 것을 몰래 감추어 넣는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나팔을 불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몰래 들어와서 몰래 퍼져 나가는 그리고 몰래 성장해 나가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몰래라는 것이 꼭 비밀스럽게라는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은밀하게 조용하게라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인식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광고를 많이 하고 과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책망을 하셨습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표현도 은밀한 가운데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져 가야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나팔을 불고 과시를 하면 복음이 더 잘 퍼져나갈 것 같지만 문제는 복음의 본질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떤 사역을 할 때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간에, 또한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든지 간에 혹시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을지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우리가 좀더 기다려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한국교회가 좀더 은밀하게 기다리며 하나님의 활동을 소망하는 모습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목회와 신학(2001/10) / 정리·이봉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