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규정적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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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2011. 2. 28.

과거의 개혁파 목회자들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예배의 일정한 방도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특히 칼빈은 “율법 가운데서 규정된 적합한 예배”(legitimate worship as is prescribed in the law)가 있다고 하면서(Institutes, 1. 2. 2),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일정한 규범을 따라 자신을 예배하시기를 원하신다고 말하고 있다(Institutes, 1. 12. 3). 예배를 비롯한 모든 문제에 대해서 칼빈은 “나는 성경에서 도출된, 따라서 전적으로 신적인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한 제도들만을 시인할 뿐이다”고 말하고 있다(Institutes, 4. 10. 30). 이와 같이 참성도에게는 “성경만이 바른 예배를 위한 유일한 시금석”이다. “교회 개혁의 필요성”에서도 칼빈은 이점을 아주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된 예배와 부패되고 오염된 예배를 구별하는 시금석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재가 받지 않은 것은 그 어떤 예배의 방식이라도 거부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관습은 신앙을 촉진하지 않고 퇴색시킨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런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니라 “부패하고 오염된”(vitiated) 것이고, “허구적인”(fictitious) 것이며, “미신적인”(superstitious) 것이라고 한다. 오직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진리를 각인할 때만 예배의 관습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가르치신 것만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노력해 왔다. 다른 일에서와 같이 하나님을 경배할 때도 사람이 주도권을 가지고 하나님께 어떤 순서를 마련해 드려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가르치신 것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근본적 생각이다. 따라서 개혁교회는 “예배 방식과 요소들에 있어서 하나님 말씀의 공인이 있어야만 한다”는 원칙에 늘 충실해 왔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루터와 함께, 하나님을 표상하는 상들(images)을 사용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한다. “하나님의 가시적 형상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Institutes, 1. 11. 2).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모양들, 그림들, 그리고 미신적인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표징들(signs)을 모두 다 옳지 않다고 반박하신다(Institutes, 1. 11. 1).

 

그런데 루터와는 달리 우리는 이와 같은 상(象, image)의 문제만이 아니라 예배의 다른 요소들도 다 성경의 지지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말씀에 충실하다고 할 때 우리는 기본적으로 신약의 말씀을 생각한다. 칼빈은 신약의 성숙한 시기에 비교하여 구약 시기를 어린이 같은 시기라고 생각하면서 구약의 예배의 요소들을 통해 신약 예배를 규정하려는 것을 강하게 반대한다. 구약 교회의 예배와 신약 교회의 예배는 형태는 다르고 본질에서만 동일한 것이다. 본질적으로 동일한 예배가 신약에서는 간소하고 단순화되어, 신약에 가르친 요소들만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 칼빈의 의견이다. 전적으로 옛언약에 지배되던 백성에게 고유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잘못된 계승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다윗은 하나님을 하프로 찬미하라고 했지만 칼빈은 이것이 구약에만 해당한다고 한다. 또한 신약 시대에는 성전과 언약궤가 사라졌으나 그 자리에 설교와 성례전이 있다고 한다. 칼빈은 예배의 모든 요소들이 신약적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구원과 다른 모든 선한 것을 하나님 이외의 것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말씀이다. “당연히 말씀이 언제나 본질적인 요소이다.” 말씀과 바른 교리(doctrina)에 대한 선포가 없으면 예배는 외식으로 변질 된다고 칼빈은 강하게 말한다. 모임에서 믿음과 경건에 박차를 가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면 함께 모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의 칼빈의 입장이다.

 

둘째는 예배 중의 회중 찬송을 둘째 요소로 언급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고 엄숙한 태도와 조화를 이룬 노래를 하는 것은 거룩한 행동에 확실한 위엄과 운치를 더하며 기도를 하겠다는 진한 열성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면서 칼빈은 예배 중에 찬송하는 일을 강조한다. 칼빈은, 고린도전서 14:15 말씀을 따르면서, 찬송을 일종의 기도로 이해했다. 제네바 시편(1543)에 붙인 서문에서 칼빈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공적 기도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어떤 기도는 말로만 하는 것이고, 어떤 기도는 노래와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송으로 기도할 때에는 (1) 곡조에 더 치우쳐서 가사의 영적인 의미에는 마음을 덜 기울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고, (2) 감미로운 느낌과 귀의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작곡한 노래는 교회의 존엄에 합당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지극히 불쾌하게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가 말한바 “음성에 억양을 적게 붙여서 노래한다기 보다는 말하는 것 같이 하라”고 했던 바를 존중하면서 찬송할 것을 권한다(Institutes, 3. 20. 32). 칼빈은 또한 생각 없이 일종의 의례적인 미신으로 퇴락하는 노래하기를 경고한다. 그래서 칼빈은 찬송할 때는 “깊이 생각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참된 찬양 대신에 괴성으로 더렵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찬송의 내용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우리의 찬송이 실제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인지는 마음의 상태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을 칼빈은 강조한다. 하나님과 화해해 있음을 잘 알고, 영원한 축복에 대한 희망으로 우리의 마음이 평온하고 기쁠 때만 하나님이 온전히 찬양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진정한 찬양은 진정한 성화의 삶과 같이 가야 한다는 것도 칼빈은 강조한다. 왜냐하면 “경건한 행위로 드러나지 않으면 혀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로 이와 함께 “예배의 중요한 부분”으로 언급되는 공동체의 기도에(Institutes, 3. 20. 29) 대한 칼빈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공중 기도에서는 “회중이 통용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와 달리하는 것은 “교회에 유익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따라서 교회의 예배나 모임에서 방언으로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칼빈은 강조한다(Institutes, 3. 20. 33). 또한 사적인 기도에서와 같이 많은 말로나 유창한 말로 하나님의 귀를 자극하려 하거나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7에서 말씀하신 중언부언하는 것(the vain speaking, βαττολογίαν)으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Institutes, 3. 20. 29). 그러므로 기도에서는 외식을 보여서는 안 되고, 명성을 얻으려고 해서도 안 되며, 짧은 말을 되풀이해서도 안 된다고 하며, 태산 같은 말로 자기선전을 하지도 말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속마음을 보시는 하나님만을 의식하며 기도할 것을 강조한다(Institutes, 3. 20.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