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에 대한 새 관점’ 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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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2013. 10. 1.

 

 

  <기독교 개혁신보>의 요청으로 써서 기고하는 글을 여기 미리 소개합니다. 여러 분들이 다 같이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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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에 대한 새 관점’ 무엇이 문제인가?

 

이미 50여년-40 여 년 전부터 바울에 대한 새 관점으로 바울을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신약학계에서 나타났으니 이것이 이제는 새로운 관점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타났고, 이에 대한 좋은 비판서들도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또한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라는 것도 단일한 것이 아니어서 바울에 대한 새로운 여러 관점들이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제2성전 시기 유대교(Second Temple Judaism)와 바울에 대해서 성경에 묘사된 예수님의 견해나 종교개혁자들의 바울 이해와는 다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첫째로, ‘바울에 대한 새 관점근본적으로 성경에 대한 비판적 이해에 근거한 주장과 논의라는 문제를 지닌다. 이런 관점에 동의하는 분들은 바리새인들과 유대교에 대한 기존의 이해나 종교개혁자들의 바울에 대한 이해가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역사적으로 그 시대의 문헌을 정확히 살펴보면 제 2 성전시대의 유대교의 모습이 신약 성경의 예수님이 말하는 모습과는 다르다고 하며, 따라서 우리들은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주장을 따라서 생각하지 말고 역사적 검토를 거친 역사적으로 바른 판단을 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바울이 말하는 것을 종교개혁자들의 렌즈로 읽지 말고 바울이 처한 역사적 상황에 정확히 근거한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독특한 정향성을 지닌 독특한 해석을 내어 놓는다. 그런데 그런 해석이 객관적으로 옳지도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작업도 자신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그 시대의 사료에 근거한 철저히 역사적인 것도 아니며, 더 나아가서 이는 기본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해석이라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둘째로, 내용과 관련해서 이런 해석을 하는 분들은 예수님 당시 유대교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예수님 당시 유대교도 구원에는 은혜로 들어가며, 단지 구원에 머무르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한다. 이 말은 (1) 마치 바리새인들과 유대교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 같은 시사를 주는 해석들은 그것이 성경의 묘사된 예수님의 해석이든지 개혁자들이 해석한 바울이든지, 다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2) 자신들이 해석한 유대교는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지 않았고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그리고 은혜로 구원 얻은 자들이 그 은혜의 상태에 머물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으므로, 바울이 예수님을 믿었을 때 구원론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전과 같이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예수님 안에서 임하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지 은혜에 근거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이제 유대교가 말하는 율법을 지켜 은혜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잘 행하여 은혜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셋째로, 위의 논의에 충실하면서, 새 관점주의자들은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순종하는 삶을 잘 살아 그들의 순종의 삶 전체에 근거하여 최후에 칭의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믿음과 믿는 사람으로서의 삶에 근거하여 최종적 칭의를 받는다고 바울이 가르쳤다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 때에 칭의 선언이 우리의 삶 전체를 염두에 두고 내려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미리 믿음에 근거해서 앞당겨 선언하는 것이 현재적 칭의라고 한다. 이처럼 무게의 중심이 최후 심판에서 칭의 선언이 주어질 것에 주어지고, 그 때에는 우리의 해위 전체를 고려하여 칭의하신다고 함으로 결국 이전에 천주교에서 주자하던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만일에 이런 바울 해석이 옳다면 개혁자들의 이신칭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종교개혁기의 논의에서 개혁자들이 틀렸고, 천주교적 반펠라기우스적 입장이 옳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결국 종교개혁이 잘못한 것이라는 주장이 되므로 개신교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주장이다.

넷째로, 그렇게 해석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이런 해석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n)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라고 새 관점주의자들은 주장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하나님의 믿음으로 해석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구원 얻는 것이라고 한다. 동시에 우리들은 우리가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삶으로 궁극적 칭의를 받는다고 하여 결국 신인협력적 구원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새 관점주의적 해석이 결국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임이 천명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들은 바울에 대한 새 관점주의적 해석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그저 학자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논의의 다양성의 한 부분이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근본을 뒤흔드는 주장인 것이다. 성경을 중요시한다고 하면서 결국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지 않게 하는 이런 주장들에 대해서 우리들은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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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학문적 논의한 것을 보려면 필자가 최근에 써서 출간한

<<톰 라이트에 대한 개혁신학적 반응>> (수원: 합신대학원출판부, 2013)을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