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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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2021. 12. 31.

<월드뷰> 259 (2022년 1월호):104-108에 실린 글을 여기도 올려서 더 많은 분들이 보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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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것은 무엇인가?

 

여러 번 이야기하였지만 성탄절은 그 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날은 아니다. 그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사는 이 시간과 공간 안으로 실제로 들어오셔서 모든 활동을 하신 것을 기념하면서 성자께서 이 땅에 오신 그 역사적 사건을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 로마 시대의 교회 때부터 한 날을 정해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생각하고 기념해 온 것이다. 종교 개혁 시대에 이 날이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에서 특별히 이 날을 지키지 않고 매 주일을 성탄과 부활의 의미를 다 생각하면서 지키도록 한 일이 있었다. 이것도 매우 좋은 태도의 하나이다. 우리들은 매주일을 성탄과 부활의 의미로 가득 채워서 감사하며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경배한 자들답게 한 주일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다가 다시 주일에 함께 모여서 성탄과 부활의 의미로 가득찬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과 연관된 날로 생각하는 1225일을 구태여 없애는 운동을 할 필요는 없다. 이 날을 공휴일로 지정하지 않아 다른 날과 같이 계속해서 일하는 일본이나 북한 같은 나라와 같이 된다면 그것이 과연 무엇이 좋겠는가? 우리는 온 나라가 공휴일이고 믿지 않는 분들도 다들 그 날을 예수님과 관련해서 생각하는 1225일을 사용해서 영원하신 성자께서 인간성을 취하셔서 이 세상에 오신 의미를 잘 설명하고 복음을 전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10여 년 전에 베트남에서 성탄절을 보내면서 이런 생각을 더 하게 된 적이 있었다.

 

또한 그와 관련해서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사역 전체를 생각하면서 과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도 매우 좋은 일이다. 기독교 신앙고백서의 하나인 벨직신앙고백서(1561)에서는 성경 전체로부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가장 자비로우시면 또한 가장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배운 것을 전제로 하면서, 예수님께서 인간성을 취하셔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의 의미를 물은 적이 있다(20문답). 1561년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생각을 토대로 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이 무엇이인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성육신 사건 자체

 

영원하신 성자는 영원하신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다. 영원 전에도, 지금도, 또한 영원토록 말이다. 성자께서는 한 번도 안 계신 적이 없다. 그런데 그가 한 순간에 인간성”(humanity, human nature)을 취하셨는데, 그것도 그 인간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항해서 아담과 그의 부인이 불순종한 바로 그 인간성”(the nature in which the disobedience had been committed), 더구나 타락 전의 아담과 그의 부인과는 달리 그 불순종의 결과로 연약해진 인간성을 취하셨다. 이는 로마서에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8:3)라고 말한 바를 바른 교회가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는 예수님에게 죄가 있다는 말이 결코 아니고, 인간의 타락과 죄 때문에 연약해진 인간성을 성자께서 취하셨다(assumes)는 말이다.

 

또한 이런 인간성을 취하셨기에 그가 받으신 심한 수난과 죽음”(his most bitter passion and death)에서 그 인간성으로 죄에 대한 형벌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신 것(in order to bear in it the punishment of sin)이라고 이해하고 표현하였다. 성자는 신성(神性)으로는 수난을 받으실 수도 없고, 죽으실 수도 없다. 만일 그리하신다면 그것은 신성이 아니다. 영원한 신성을 가지신 성자께서 인간성을 취하신 이 놀라운 신비의 한 이유가 여기에 잘 나타난다.

 

또한 여기서 인간성을 취하신 성육신과 그의 생애 전체, 특히 십자가의 죽으심과의 관계성이 잘 표현된다. 성육신이 없으면 그의 삶도 없고, 성육신이 없으면 예수님의 죽음도 없고, 따라서 구속도 없는 것이다. 성육신 사건, 즉 성자께서 인간성을 취하신 사건과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와 십자가 사건을 연결시켜 이해해야 한다.

 

          복음 사건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어떠하심

 

이 성육신 사건과 그 결과로 있게 된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으로 있게 된 복음 사건에서 하나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하셨는가? 첫째로, 성부께서는 성육신하신 성자에 대해서 정의를 시행하시고 그것을 잘 드러내어 주셨다. 성육신하신 성자를 죄 있다고 정죄하셨는데, 사실 그 정죄는 우리가 받아야만 하는 정죄(condemnation)였다. 우리의 심각한 죄에 대해서 성육신하신 성자께서 정죄받으셨다(was charged with our sin).

그리고 죄책 있고 정죄 받아 마땅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쏟아 부어 주셨다(poured out his goodness and mercy on us). 이것이 복음 사건의 두 측면이고, 복음의 본질이다.

이 두 측면을 하나로 합하여 표현하자면, 성부께서 성자를 우리에게 주셨다. 특히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의 자리에서 정죄 받아 죽도록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의 가장 온전한 사랑으로(by a most perfect love) 그리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죽으신 예수님을 우리의 칭의를 위해 다시 살아나게 하셔서 우리들이 불멸성과 영생(immortality and eternal life)을 얻도록 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와 같이 복음 사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의와 자비를 드러내어 주셨다.

 

           그 함의

 

공의를 일반화하여 생각하면 언제나 오해가 발생한다. 우리가 공의가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하면 안 된다. 타락한 인간을 공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단지 그에 대한 희미한 관념만을 가지고 있다. 어두움 가운데서 나음대로 공의를 추구하고 있는 것[공의에 대한 암중모색(暗中摸索)]이 타락한 인간의 참된 모습[眞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달려 죽으신 십자가에서 공의가 무엇인지가 잘 드러난다. 십자가를 통해 구속함을 받은 인간들의 죄에 대한 모든 형벌과 그 죄에 대한 저주가 쏟아 부어진 십자가에서(3:13, cf. 21:23) 우리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우리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알게 된다.

 

십자가를 바로 이해하기 전까지는 인간들은 대개 죄를 사소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에 쏟아 부어진 저주를 영적인 안목으로 바로 볼 때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제대로 알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순종하지 않고 어기는 것이 그 법을 내신 하나님의 의지(the will of God)를 침해하는 것이며, 그 의지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어떠하심(the nature of God)을 침해하는 것이며, 그 어떠하심 배후의 하나님의 존재(the being of God, God Himself)를 침해해 가는 것이니, 우리의 죄가 정말 심각하고 저주가 쏟아 부어져야 할 무서운 것임을 제대로 알게 된다.

 

또한, 십자가에서 이런 죄에 대해서 무한한 형벌을 내리시는 공의를 바로 알게 된다. 이렇게 죄에 대한 형벌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전에는 우리가 공의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공의는 손상 받으신 하나님의 영예에 합당한 형벌이 내려져서 손상된 하나님의 영예에 대한 최소한의 회복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은 공의란 엄밀하게는 공의는 공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영예를 위해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모든 것이 제대로 지켜지고, 깨어진 법칙에 대해서 그에 상응하는 형벌이 내려지도록 하는 것이 공의이다. 하나님의 의도가 잘 지켜지는 것이 공의의 시행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제대로 된 관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모든 것이 그대로 지켜져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의도가 잘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공의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 모든 관계와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와 규정을 깨는 것이 공의를 손상시키는 것이며, 이 모든 손상은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요구한다. 죄에 대한 형벌은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다.

 

이와 동시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어 보여 준다. 우리가 받아야할 벌을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받으셨다는 것, 그가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다 받으셨다는 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가장 큰 사랑을 발견한다. 이것에 대해서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6-8).

 

과연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나타났다. 우리가 연약할 때라는 말은 후에 밝히 드러나듯이 그저 연약할 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죄인들이 되고 죄로 가득 차(sin-ful) 있고 경건하지 않은 때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게 불경건한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아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구속을 이루셨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났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자비가 모두 나타난 곳이다.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그렇게 이해하였다. 십자가에서 공의, 즉 하나님의 무서운 형벌의 시행만 보는 사람이나 오직 사랑만 보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도 바라보지만 주로 공의만을 보고서 십자가를 무섭고 끔직한 사건으로서 생각하는 분들은 종종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쇠얀 키에르케고어(S. Kierkegaard, 18131855)의 아버지였던 미카엘 키에르케고어(Michael Pedersen Kierkegaard, 1756-1838)를 들 수 있다. 그의 죽음 이후에 있는 하늘”(heaven)에서는 이런 오해를 벗어났지만, 이 땅에 있을 때 그에게 십자가와 하나님은 무서운 공의의 표현일 뿐이었다.

 

후자의 오해, 즉 십자가에서 사랑과 자비만 보려고 한 사람들은 비교적 많았고 그들 중의 상당수는 매우 이단적 생각에로 발전해 갔다. 중세에 십자가에서 죄 문제에 대한 객관적 구속의 의미를 배제하고 그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만 보면서 도덕 감화설을 제시한 Abelard (10791142)나 후대 자유주의적 이해를 전개한 호레이스 브쉬넬(Horace Bushnell, 18021876) 같은 미국의 회중교회 목사나 해스팅스 래쉬달(Hastings Rashdall, 18581924, The Idea of Atonement in Christian Theology [London: Macmillan, 1919]) 같은 영국 성공회 사제요 옥스퍼드의 교수 같은 분들은 참으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만을 보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보고 배우는 것이 참된 기독교다. 그 하나만을 찾는 것은 참된 기독교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서 공의를 보고, 사랑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공의가 무엇인지 배우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공의와 사랑 모두를 드러내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