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례(2): 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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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2022. 4. 22.

<월간 고신 생명나무> (2022년 5월호): 14-19에 실린 글을 더 많은 분들이 보도록 여기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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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후에 또 하나의 성례인 주의 만찬,” 즉 성찬을 언급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독교회는 성찬을 처음부터 계속해 왔다. 그런데 성찬을 하면서 잘못하고 오용한 일들이 많이 있다. 현대에 와서는 성찬을 하지 않거나 그 의미를 경시하는 것이 문제라면 중세에는 성찬을 잘못 시행하거나 이에 따른 미신이 많은 것이 문제였다. 그러므로 성찬과 관련한 잘못은 (1) 성찬을 하지 않는 것 이것은 성찬을 제정하신 교회의 주님이요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큰 범죄이다. (2) 성찬을 경시하는 것 이것도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으로 현대 교회에서 많이 발생하는 문제이다. (3) 성찬을 잘못 시행하는 것 이것은 2-3세기부터 준비되어 중세 내내 교회가 저지른 가장 큰 문제였다.

 

중세 교회의 성찬 오용을 비롯한 심각한 문제들을 극복하게 하시려고 주께서 종교개혁을 일으켜 주셨다. 성경에 근거하여 역사를 바로 잡아 가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그에 따라서 바른 역사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개신교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경에 근거해서 예배 시간에 행하는 성찬이 희생 제사(sacrifice)아니라는 것을 아주 분명히 선언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그 일에 같이 동참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다. 지금도 동방정교회와 천주교회는 왜곡된 성찬 이해를 그대로 유지하며 더 그런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분들은 계속해서 이제도 피 없는 제사를 예배 때마다 하나님께 드려야만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유효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는 그와는 달리 바른 방향을 간다고 개신교회 안에 들어와서도 그저 형식적으로 개신교회 안에 있지 그 성경적, 역사적 의미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현대의 수없이 많은 개신교인들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16세기의 성도들과 도르트 회의를 하였던 17세기 성도들이 성경에 근거해서 성찬을 제대로 하려던 그 정신이 지금 여기서도 나타나야만 한다. 이것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큰 책임이다. 성찬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성찬이 과연 무엇인지를 알고, 과연 어떻게 성찬을 집례하고 참여해야 하는지를 잘 규정하는 것이 필요했다.

 

        성경적 성찬 이해

 

<도르트 교회 질서>에서는 성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성경적 성찬 이해는 화란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서인 벨직신앙고백서와 그들의 요리문답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상세하게 논의한 바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여기서는 간단히 그 기본적인 정신만을 언급하고 지나갈 것이다.

 

성찬은 (1)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에서 이루신 구속을 외적으로 나타내 보이고, (2)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우리가 동참하여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 사람들임을 분명히 선언하며, (3) 이렇게 함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이 교회, 한 몸으로 신약적 은혜언약에 속한 사람들임을 드러내고, (4) 그들 모두가 영적인 양식과 영적인 음료인 그리스도 자신을 날마다 필요로 한다는 것을 외적으로 분명히 드러내며, 내적으로 더 확실히 인치는 것이다. 그러니 성찬도 세례와 함께 은혜언약의 표호(慓號, sign)와 인호(印號, seal).

 

         누가 성찬상에 올 수 있는가?

 

<도르트 교회 질서>는 누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고, 누가 참여할 수 없는지를 규정하는 일부터 시작한다(61). “그들이 자신을 연합시킨 교회의 방식에 따라서(according to the usage of the Church to which they unite themselves) 참된 신앙 고백을 한(have made Confession of Religion) 사람들만이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성찬의 본질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렇게 참된 신앙 고백을 하는 사람으로 유아 세례를 받고 입교하거나 성인으로 세례 받아 그 교회의 회원 명단에 이름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참된 신앙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 물론 후에 다른 교회의 사람들도(those who come from other Churches) 이곳 예배에 참여했을 때 같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허용하는 데, 그 때도 먼저 이 바른 신앙의 고백이 언급된다. 그리고는 경건한 삶의 방식을 가졌다는 평판이 있어야 한다”(being reputed to be of a godly conversation)고 하면서 이것이 없이는 그 누구도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때 경건한 삶의 방식에 대한 평판이란 우리가 번역한 바와 같이, 단순히 대화만이 아니라 행동거지 전체가 자신이 고백하는 신앙에 부합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1) 바른 신앙고백과 (2) 경건한 삶의 방식 이 둘이 어떤 분들이 성찬에 참여 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시금석으로 주어져 있다. 그리고 그 분별은 우리들이 항상 교회와 같이 한다는 함의가 들어 있다. 그래도 폐쇄적인 성찬 방식(closed communion)은 아닌 식으로 제시한다. 다른 교회의 교인들이라도 바른 신앙 고백을 하고 경건한 삶의 양식을 가졌다는 것이 인정되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개방된 성찬식(open communion)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의 한계를 너무 넓혀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결국 바른 신앙고백을 하고, 경건한 삶의 빙식을 가진 사람들만이 성찬에 참여 할 수 있다는 말이니 말이다.

 

        성찬 시행 방식: 교회를 세워 가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그 후에는 성찬을 집례하는 방식을 규정한다. 이때도 가장 큰 원리로 교회를 세워 가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most conducive to edification) 성찬을 시행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62). 교회가 성격적인 방향으로 가는데 도움이 되는 방식을 성찬을 시행하는 방식을 여러 면에서 찾아 시행하면 된다. <도르트 교회질서>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1) “하나님 말씀에 규정된 외적 의식들이 변하지 않도록 해야.”

첫째는, “하나님 말씀에 규정된 외적 의식들이 변하지 않도록 해야”(the outward ceremonies as prescribed in God’s Word be not changed) 한다. 성찬을 성경이 규정한 방식대로만 해야 한다고 명시한 것이다. 이 때 우리의 내면이 성령님에 의존해서 성령님 안에서 참여 하여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동시에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규정한 의식들을 변경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제정하시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2) “모든 미신들이 배제되도록.”

둘째로는 모든 미신이 배제되도록(all superstition be avoided) 해야 한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축성(consecration)의 과정 후에는 그 본질(substance)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질(substance)로 변한다고 생각하거나, 이에 근거해서 이 성찬의 요소들을 높이 드는 소위 성체 거양”(聖體擧揚, the elevation of the eucharistic elements)을 하거나, 그런 것을 향해 절하거나, 남은 떡과 포도주를 마치 그리스도의 시신의 일부와 같이 여기거나 하는 등의 모든 것, 그리고 이 성찬의 요소들이 물리적으로 우리에게 치료의 힘을 가진 듯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이런 미신(迷信)이다. 그러므로 성찬을 할 때 온갖 미신이 제거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3) “성찬 제정사와 성찬을 위한 기도는 성찬상에서.”

성찬은 예배 중에 설교와 설교의 적용을 위한 기도를 한 후에 시행하도록 하고 있다. 말씀이 없이 의식만으로는 성찬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는 천주교회와 동방 정교회적 성찬 이해를 거부하는 선언이다. 복음의 내용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의식을 할 것이나 그것을 하기 전에 말로 분명히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재천명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히 선포한 후에 그 말씀에 근거해서 성찬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설교와 설교의 적용을 위한 기도를 계속해서 강대상(the pulpit)에서 한 후에 성찬 제정사와 성찬을 위한 기도는 성찬상(the Table)에서하는 것으로 성찬 예식이 시작된다고 규정한다. 따라서 예배당에 강대상과 성찬상이 매우 중요한 비품으로 인식되며, 예배 때에 강대상에서 모든 성도들이 명확히 알아들을 수 있게 복음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말씀 전부가 차례차례 선포되고, 선포된 복음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성찬상에서 성찬이 집례 되어야 한다.

 

            성찬의 횟수와 시기

 

17세기 화란 개혁파 교회에서는 주의 만찬은 가능하면 두 달마다(once every two months) 시행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 때 교회의 상황이 허용될 수 있으며 부활절(Easter)과 성령강림절(Pentecost)과 성탄절(Christmas)에는 성찬이 베풀어지도록 하는 것이 교회를 세워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고 있다(63). 그러므로 이 세 번을 비록해서 다른 3번의 성찬이 두 달 간격으로 시행되도록 규정한 것이다. 좋은 조정(accommodation)의 예이다. 그래서 개혁파 교회는 성찬을 매주 할 수도 있고, 제네바 교회의 상황에 맞게 적용해서 그리했던 대로한 달에 한번 씩 할 수도 있고, 17세기 도르트 교회질서가 규정한대로 두 달의 한번 할 수도 있고, 츄리히 교회가 한 대로 일 년에 4번 할 수도 있다. 그러나 17세기 화란 개혁파교회는 일 년에 6년 정도가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이유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너무 자주 하다보면 성찬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늘 하는 것으로 생각할 위험이 있음을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고, 너무 자주하지 않으면 성찬이 없이도 교회가 있을 수 있고 우리가 능히 살아 갈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판 브로헌도 우리들이 성찬을 자주 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영적 수준이 낮아진 증거라고 한 바 있다. 필자도 이런 저런 방식을 찾다가 결국 두 달의 한번 하는 것이 최선이겠다고 하고 그렇게 하고 있었는데 17세기 우리 선배들도 같이 생각했음을 발견한다.

 

              마치면서

 

코로나 펜데믹으로 오랫동안 교회가 성찬을 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 있다. 이것이 비상한 시기의 비상한 상황임을 인정하면서 주께서 우리에게 빨리 성찬을 시행할 수 있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 바란다. 그런 은혜가 주어지는 날 모든 성도들이 성찬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성령님 안에서 성경의 방식대로 시행하는 성찬에 참여하여 우리 교회들이 가장 건전하게 세워져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