社說.論說,歷史

낭만울프 2015. 2. 6. 17:39

그동안 서방언론계와 재계, 금융계를 유대인이 장악해서

자기들 입맛에 맛게끔 언론기사를 만들고 여론을 조작했다죠.

가령 유대인은 홀로코스트라는 큰 피해를 입어 아주 불쌍하고 도와줘야하고

반대로 아랍인들은 다 테러리스트에 죽일놈이라고

그러고보니 우리도 그대로 영향을 받았던듯 합니다.

이천년간 유럽인들과 히틀러가 왜 유대인들을 그렇게 증오했는지 생각해 본적이 없네요~

 

 

 

히틀러가 유태인을 증오한 진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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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세계 여론의 지탄을 받고 있다.
팔레스타인 테러단체 하마스를 소탕한다는 이유로 인접 가자지구를 무차별 폭격해서
몇 주만에 어린이를 포함하여 민간인 1천6백명 이상을 죽게하자
이스라엘과 유태인 증오 분위기가 다시 고개를 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세계인들은 수없이 많은 Holocaust(홀러코스트/유태인 대학살) 영화를 보아왔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우리는 히틀러와 나치스는 나쁘고 유태인은 불쌍하다는 생각만 했지,
“유태인이 독일인의 미움을 살만한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닌가?”라고 생각해본 적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나치 독일의 유태인 학살 이유를 다룬 영화를 본 일이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본 영화는
전부 히틀러와 나치스는 나쁘고 유태인은 억울한 피해자라고 생각하도록 영화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런 영화를 제작한 영화사들은 대개 유태인 돈줄과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Why did Hitler hate Jews so much? (히틀러는 왜 그렇게 유태인을 증오했는가?)라는 검색어로 Google에 들어가 보니

엄청나게 많은 답변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것은 독일의 역사학자 랄프 게오르게 로이트(Ralf-George Reuth)가 5년 전에 쓴 책이었다.

이 책의 독일어 타이틀을 영어로 번역한 것은 Jewish Hatred; Cliché and Reality인데

우리말로는 “유태인 증오: 통설과 실체”쯤 될 것이다.

이 책에 의하면 히틀러가 유태인을 증오한 진짜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영국 Daily Mail 신문이 소개했다.

 

 
지금까지는 1914년 1차 세계대전 이전 청소년 시절의 히틀러가 빈(Wien 지금의 오스트리아 수도)에서 살 때
여러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유태인을 증오하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히틀러 모친이 유태인 의사 실수로 죽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심지어 그 의사가 유방암 환자인 히틀러 모친을 성폭행까지 했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히틀러가 빈에서 미술학교에 다닐 때
짝사랑한 독일 여자가 나중에 돈 많은 유태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보고 격분, 유태인을 증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감정적인 요소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경제적, 정치적 이유였다.

히틀러는 유태인 때문에 1차 세계대전 후 독일 경제가 붕괴했고

또 유태인들이 러시아 공산혁명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1차 세계대전에 하사관으로 참전한 히틀러는
패전 독일 경제를 재건하는데 유태인들이 도움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해를 끼쳤다고 보았다.
 
종전 직후인 1919년 당시 독일의 민간은행의 약 절반이 유태인 소유였으며 증권시장도 유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 신문의 약 절반이 유태인 소유였으며 연쇄백화점의 80%도 유태인 소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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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치 선전상 괴벨스가 뽑은 완벽한 독일어린이 사진의 주인공은 유태인이었다고 본인이 최근 밝혔다.
 
한마디로 독일 경제와 언론은 유태인이 좌지우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독일의 패전을 유태인 탓으로 돌리는 풍조가 팽배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주식시장이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자본주의를 싫어했다.
 
히틀러는 또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도 유태인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다고 보았다.
공산주의 이론 창시자 카알 마르크스(Karl Marx), 러시아혁명 지도자 레닌과 트로츠키가
유태계 러시아인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의 정치적 초기 기반지였던 독일 뮌헨 시에서 1919년 공산주의 정권이 잠깐 등장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부터 히틀러는 공산주의자들을 증오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로이트는 나치시대 인물 연구에 권위자로 알려진 역사가인데,
선전과 선동의 귀재라는 요셉 괴벨스 선전상의 전기도 썼다.
유태계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노벨상수상자)도 러시아 혁명 주도 세력은 유태인이었다고 쓴 기록이 있다고
로이트는 말했다.
히틀러는 유태인들이 부자가 되면 독일 여성과 결혼하여 아리안(독일 민족)의 피를 흐려놓기 때문에
유태인 멸종을 기획했다는 설도 있다.
미국 영화 <25시>(앤소니 퀸 주연)를 보면 나치 정권은 유태인의 특징으로 약간 가무잡잡한 얼굴색과 매부리 코를 꼽았다.
              
그런데 지난 7월 미국 대학에서 화학을 가르고 있는 85세 유태인 할머니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소재 홀러코스트 박물관에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기증했다.
Hessy Taft라는 이 노교수는 그 사진의 내력을 이렇게 설명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사진은 자기가 여섯 살 때 독일 베를린의 한 사진관에서 찍은 것인데,
그 사진사가 당시 나치정권이 실시한 완벽한 독일민족 어린이 사진 공모에 출품했다.
이 공모전에서 괴벨스 선전상이 직접 그 사진을 당선작으로 뽑았다는 것이다.
사진사는 그 사진의 주인공이 유태인인줄 알면서도 끝내 비밀로 했다고 한다.
이 사진은 당시 유명한 한 독일 가정잡지의 표지를 장식했고 우편엽서에도 올려졌다고 한다.
 
워싱턴에서 조화유(재미작가. 영어교재 저술가)

 

 

 

히틀러는 왜 유태인(猶太人)들만 살해(殺害)했는지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보다가

참 어처구니없는 사연(事緣)들이 많네요. 사연(事緣)도 아니고 뭐 그냥 억지(抑止)네요.
많은 사람들이 나치의 유태인(猶太人) 박해정책(迫害政策)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왜 유태인(猶太人)들만 죽였을까요?

그래서 세계 여러 학계(學界)에서 많은 원인(原因)들을 밝혔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어이가 없는 사실

나치의 최고 수장(首將)인 히틀러의 비합리적이고 개인적 감정(感情)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히틀러의 감정(感情)이 가장 잔인(殘忍)하고 비극적(悲劇的)인 유태인(猶太人) 학살(虐殺)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理由)를 다음과 같이 말하겠습니다.

첫 번째 이유(理由)

아돌프 히틀러는 반(反)유태주의(猶太主義)가 되는 심리적(心理的) 동인(動因)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찾고 있는 시각(視角)이였습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것은 남성(男性)이 부친(父親)을 증오(憎惡)하고 모친(母親)에 대해 품는 무의식적(無意識的)인 성적(性的) 애착(愛着)이 있는데 그리스 신화(神話) 오이디푸스에서 딴말로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精神分析學)에서 쓴 용어(用語)입니다.

히틀러는 유방암(乳房癌)으로 사망(死亡)한 어머니에게 근친상관적(近親相關的) 욕망(慾望)을 느껴

아버지에게 적의(敵意)를 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어머니의 병(病)을 돌봐준 '블로흐'라는 사람인 유태인 의사(醫師)에게로 전가가 되는데

히틀러는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블로흐를 그가 증오(憎惡)했던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한 새로운 연적(戀敵)이라고

간주(看做)하고 그를 증오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블로흐의 의학적(醫學的) 진료행위(診療行爲)는 히틀러에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했던

음위(陰痿)한 행동(行動)을 연상(聯想)시켜주었기 때문이거든요.

 

예(例)를 들어본다면 블로흐는 히틀러의 어머니인 클라라를 치료(治療)하는 과정(過程)에서

그녀의 침실(寢室)을 자주 출입(出入)했는가하면, 그녀의 나신(裸身)을 보았고 그녀의 가슴을 진찰(診察)했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나중엔 어머니의 유방(乳房)을 절제(切除)함으로써 아버지의 난폭(亂暴)한 행위(行爲)가 환기(喚起)되었고

블로흐가 어머니의 혈관(血管)속에 모르핀 주사(注射)를 주는 장면(場面)을 보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피를 오염(汚染)시켰다는 공포(恐怖)로 히틀러를 힘들게 하고 두렵게 했기 때문이죠.

따라서 이것은 그가 유태인(猶太人)을 증오(憎惡)하는 무의식적 동기(動機)가 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理由)로는
히틀러의 자서전에도 나와 있는데요.

히틀러가 의식적(意識的)이고 과격(過激)한 반유태주의(反猶太主義)자가 된 것은

그가 사춘기(思春期)를 보낸 오스트리아 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히틀러는 자신(自身)에게 예술적 능력(藝術的 能力)이 있다고 확고(確固)해

소년(少年)때부터 위대(偉大)한 화가(畵家)가 될 것을 소망(所望)해 왔고,

그는 1907년 미술학교(美術學校)에 입학하기 위해서 빈으로 갔는데

입학시험(入學試驗) 결과는 불합격(不合格) 이었답니다.

일년 후 다시 시험(試驗)을 치렀지만 그때에도 실패(失敗)해 결국 화가(畵家)의 꿈은 좌절(挫折)되고 맙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낙방(落榜)의 원인(原因)을 심사위원(審査委員)들에게 전가(轉嫁)했고

그는 그에게 불리(不利)한 결정(決定)을 내린 심사위원(審査委員)들을 조사(調査)한 결과(結果)로

일곱 사람들 중에 네 사람이 유태인(猶太人)이라는 사실(事實)을 알았고,

그러자 즉시 미술학교 교장(校長)에게 '나를 낙방(落榜)시킨 유태인(猶太人)들은 보복(報服)을 받게 될 것'이라는

협박편지(脅迫便紙)를 보냈다고 하네요.

이렇게 해서 히틀러가 화가(畵家)가 되려던 꿈을 밟은 사람이 바로 유태인(猶太人)이라고 간주(看做)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의식(意識)중에 무의식(無意識)이라는 게 정말 무섭다는데 진짜 무섭군요. 헉!

 

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년 4월 20일 ~ 1945년 4월 30일)는 독일나치 지도자이자 정치가이다.

뛰어난 웅변술과 감각의 소유자인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 베르사유 체제 이후 피폐해진 독일을 경제 발전으로 이끌었다.

이후 독일 민족 생존권 수립 정책을 주장하며 자를란트의 영유권 회복과 오스트리아 병합,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폴란드 침공 등을 일으키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전쟁 중 그의 유대인 말살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우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나치 강제수용소의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또한 히틀러는 상당수의 폴란드 사람들에게까지도 유태인이라 모함하여

유태인과 마찬가지로 강제수용소의 가스실에서 같이 학살했다.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집시와 장애인도 있었다.

승승장구하며 전세를 확장하던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하였고

히틀러는 1945년 4월 29일 소련군에 포위된 베를린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뒤

이튿날 베를린의 총통관저 지하 벙커에서 시안화칼륨 캡슐을 삼키고 권총으로 자신을 쏘아 자살했다.

그러나 독약 캡슐을 쓰지 않고 권총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히틀러의 어머니인 클라라와 결혼하기 전 이미 부친 알로이스 히틀러에게는

장남 알로이스 2세와 딸 앙겔라를 두고 있었고,

결혼 후 아돌프를 갖기 전 낳은 클라라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은 모두 일찍 죽었다.

양봉일에 열중한 아버지와 아돌프의 관계는 소원했던 반면 이미 자신의 친자식을 셋이나 잃은 클라라는

아돌프마저 일찍 죽게될까 두려웠고 그를 애지중지하며 키워 아돌프는 클라라의 응석받이가 되었다.

이어 1893년 남동생 에드문트가 태어났고, 1896년 여동생 파울라가 태어났으나

에드문트는 일찍 죽게 되고 결국 아돌프와 파울라만이 클라라의 친자식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또한 아돌프가 7세 되던 해 당시 14세였던 형 알로이스 2세는 아버지 알로이스와의 마찰로 가출하게 된다.

독일 출신이라는 설이 한때 돌기도 했지만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

한편 히틀러는 1939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불금날 즐거운 오후 되시기 바랍니다.
소중한 자료 감사히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아~하 그랬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