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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울프 2015. 3. 6. 17:10

남한산성(南漢山城)

(주장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있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이다.

병자호란때 조선의 왕 인조가 청나라에 대항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공원화된 후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많은 시민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했던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세운 성으로 알려졌으나,

신라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에 인조와 숙종 때에 각종 시설물을 세우고 성을 증축하여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7년에 일본군에 의해 다수의 건물이 훼손되기도 하였다.

1963년 1월 21일 남한산성의 성벽이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고, 1971년 3월 17일 남한산성은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제158호), 5년후인 1976년 7월 1일 관리사무소가 개소되었다.

1999년에는 남한산성 역사관이 개장하고, 2014년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남한산성은 주변 시민들에게 훌륭한 휴식처이자, 건강을 위한 등산산책 코스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출처 : 위키백과]

 

 

 

남한산성의 전반적인 지형은 청량산(497m)과 남한산(480m)을 중심으로

급경사로 된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서, 주봉인 청량산(482.6m)을 중심으로 북쪽의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남한산의 주봉인 벌봉(522m)과 망월봉(502m), 남쪽으로 한봉(414m)을 비롯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성이다. 남한산성은 한강변의 가시권에 속해서

강북의 아차산 일대와 더 북쪽의 불암산과 인왕산까지도 조망이 가능하다.

남한산의 서북쪽은 백제의 중심지였던 풍납동, 방이동과 그아래 몽촌토성 일대이며,

동북쪽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한 6세기 이후로 한산주와 광주의 읍치가 있었던 이성산성이 있는

하남시 춘궁동 일대이다. 이들 역사 유적들은 남한산성으로부터 직선거리로

5~6 km 거리로 징검다리식 위치에 놓인다.

 

 

남한산성의 대표적인 건물인 수어장대 전경.

남한산성의 대표적인 건물인 수어장대 전경.

 

 

남한산성의 최초 축성에 관해서는 두가지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하나는 남한산성이 백제의 시조인 온조가 세운 왕도인 하남위례성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한산성이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일장성)이라는 의견이다.

하남위례성을 남한산성과 연관짓는 주장이 처음 제기된 것은 고려시대이다.

이러한 견해는《조선왕조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야승》,《연려실기술》,《여지도서》,《대동지지》등

대부분의 조선시대 지리관련 문헌에 남한산성이 백제의 고성이라는 주장이 실릴 정도로 힘을 얻었다.

한성으로 도읍을 옮긴 조선의 입장에서 한성이 국가의 수도로 적합한 곳임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중정남한지》의 저자인 홍경모만이 유형원의《반계수록》을 인용하며 이런 주장을 반박하였으나

인정받지 못했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최초의 백제 수도인 위례성으로 송파구에 있는 풍남토성을 강력하게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2001년과 2002년에 걸쳐 토지박물관에서 남한산성의 행궁터를 발굴조사 하였는데,

이곳에서 백제의 유적으로 보이는 수혈과 화덕자리 그리고 토기조각들이 출토되어 백제시대에도 남한산성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아직 대대적인 시설이 발견되지 않아

도읍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으며 계속 연구중이다.


 

 

 

남한산성의 최초 축성에 대한 두번째 설은 신라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한 것인데,《삼국사기》신라 문무왕 12년에

“한강 이남의 한산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 360보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과 투쟁에 들어간 시기이며, 특히 문무왕 12년 당나라의 병력 4만여명이

평양에 주둔하면서 신라를 침범하려는 의도를 보이던 시기였고 고구려의 패잔병과도 대치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이를 대비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축조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통일 신라시대의 주장성이 남한산성이라는 것은

이후 여러 고문헌에도 기록되고 있으며, 이후 연구에서 주장성과 남한산성의 크기를 비교하여 볼 때

당시 한산지역 산성중에서 이 기록에 근접한 산성은 남한산성이 유일하다는 것이 논거로 제시되고 있다.

또 조선시대 기록에도 주장성의 길이가 3,993보나 17,400척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 거리를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여

계산하면 주장성에 관한 기록과 비슷하다. 인조 당시 개축할 때 기록에는 “옛 터를 따라 남한산성을

다시 쌓게 하였다.”라는《남한지》의 기록이 주장성이 남한산성이라는 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한 남한산성에서 통일신라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토지박물관의 남한산성 행궁터 조사에 따르면, 조선시대 층위 아래에서 길이 50m가량의 통일신라시대 초대형

건물지가 출토되었고, 유물로는 국대 최대 크기의 통일 신라시대 평기와가 다수 출토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특별한 기록은 없다. 다만, 광주부사 이세화의 묘지 비석에 의하면 몽골의 고려 침입당시

1231년과 1232년 두번 광주성에서 몽골군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주지역에 소재하는 산성은

이성산성과 남한산성이지만, 6세기 중엽 축성된 이성산성은 규모가 작아 농성 전용이라기보다 해미읍성처럼

행정 중심지의 성격이 강해 위의 기록에 나오는 광주성을 남한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앞서 언급된 이세화의 묘지명에는 몽고군이 침공했을때 성을 수리했다고 되어 있으며,고려사》에

공민왕10년에 홍건적이 침공했을때 공민왕이 개경을 포기하고 피난길에 오르자 광주 주변 백성들이 모두 산성으로

올라갔다는 기록이 고려시대 기록의 전부다. 다만, 남한산성이 고려시대 기록에 나오는 광주성이라는 전제 하에

기록 자료나 발굴된 고려시대 유물이 적은 점을 들어 일각에서는 고려시대의 남한산성을 전쟁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군사적 용도의 농성 전용 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략 거점으로서 남한산성의 중요성은 조선 태종때 본격화되었다.

1401년 요동을 다녀온 이자영의 보고에 의거, 명나라가 조선을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자

태종은 국경과 내륙을 막론하고 고을 별로 산성을 쌓고 기존의 산성을 개축하여 산성 중심의 방어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남한산성도 이러한 국방정책에 따라 세종 때에 군사시설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아직 태종 때부터 세종 때까지 남한산성이 개축되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남한산성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현황을 파악한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은 남한산성을 이용하기 위해 현황을 파악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이를 통해

당시 개축이나 수리는 안했어도 군사기지로 이용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중인 중인 1596년에 서애 류성룡이 남한산성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고, 1603년(선조 36년)에

다시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실제 남한산성이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1621년(광해군 13년)에 석성으로

개축공사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때 일부 수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광해군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폐위되었으며, 남한산성이 본격적으로 지금과 같은 형태로 증축된 것은

인조 대에 이르러서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집권세력이 교체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에 큰 변화가

초래되었다.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친명배금 정책을 취한 것이다. 후금이 침입할 수 있다는 위험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더욱이 인조 2년(1624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을 계기로 도성을 방어하고 유사시 왕이 피신할 수 있는 거처로서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크게 증대되었다. 이에 인조는 1624년부터 1626년까지 2년간 공사를 추진하여,

공사 완료 후 광주목이 남한산성으로 이전했고, 수어청도 같은 해에 남한산성에 설치되었다.

성의 둘레도 6,927보가 되었다. 왕이 거처할 행궁도 인조 4년 성곽이 완성될 때 건축되어

《남한지》,《광주부읍지》에 의하면 상궐이 72칸 반, 하궐 154칸으로 모두 227칸이 건축되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의 치욕을 피할 수 없었다.

1627년(인조 5년)에 발발한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조선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한데 대해서 조선이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후금은 조선의 왕자를 보내고 사죄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고 이에 따라

청태종 황태극이 12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침공 직전 청으로 국호를 개칭한 황태극은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후 한양을 향해 진군하였다.

 

 

 

 

이에 조선은 먼저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의 왕자를 먼저 강화도로 피신하게 하고, 조정 또한 강화도로

피난하려 했으나, 청군의 선발대가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으면서 강화도를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성 안에는 1만 3천여명의 군사가 방어를 하고 있었고, 양곡 1만 4300여석과 소금 90여석이

있어 겨우 50일 분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청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남한산성에 당도에 산성 밑의

탄천 부근에 포진하였다. 이에 전국의 구원병들이 출병하였지만, 모두 남한산성에 당도하기 전에 궤멸되었다.

구원병이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자 성안의 조정에서는 강화론이 제기 되었다.

 

 

 

 

주화파와 주전파 사이에 여러차례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이듬해 1월 22일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당하고

강화도에 피신해 있던 왕자와 군신들의 처자 200여 명이 청군의 포로로 잡히면서 대세는 강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 이후 청군은 화포를 쏘아대어 성벽의 일부를 무너뜨리는 등 압박을 가하였다.

1월 26일 조선의 사신이 협상을 위해 청 진영에 도착했을때 청군은 강화에서 포로가 된 왕자를 대면시켰다.

이에 조선은 더 이상 버틸 힘을 상실하고, 1월 30일 인조가 45일 만에 식량 부족으로 성문을 열고 나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갖게 되었다. 이 곳에서 인조는 소복을 입고 청나라 황제 황태극은

높은 단상에 앉아서 삼궤구고두의 예를 받았다.

 

 

 

 

호란 이후로 남한산성에 큰 변화가 있었다.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은 홍이포와 같은 공성무기의 위력을 실감하였고,

이후 조선은 조총과 화포를 주로 하고 궁사와 창검을 보조무기로 하는 형태로 체제를 바꾸게 되었다.

이에 따라 봉암외성, 포루, 돈대, 옹성 등을 증축하였고, 문루와 장대(將臺)를 축조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전쟁으로 인하여 무너진 성벽의 보수 및 원성에 대한 증개축과 함께 아마도 남옹성 3개가 신축되고

연주봉옹성을 비롯한 4개의 옹성에 포루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86년 숙종 12년에는 광주유수 윤지선이 봉암성 축조를 건의하였다.

또한 숙종 19년에는 수어사 오시복이 한봉외성을 새로 건축하였다. 숙종 31년에는 수어사 민진후의 주장에 따라

봉암성에 2개의 포루를 건설하였다. 포루의 방향은 정확히 한봉의 정상부를 향하도록 설치되었으며

장경사의 원성부분에도 포루를 신축해서 방어력을 강화시켰다. 또한 숙종 45년에는 남격대를 신축했다.

이후 많은 수축작업이 이루어져서, 영조대에는 3번의 큰 수축 공사가 이루어졌고, 정조 3년에는 남한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수축작업이 벌어져 기와로 쌓았던 여장을 벽돌로 교체하였다.

 

 

 

 

조선 말, 남한산성은 의병 활동사에 다시 등장했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후 봉기한 의병들 중 경기 의병이 이천 의병들과 연합하여

남한산성을 점거하였다(2월 28일). 이후 한성 진공을 준비했으나, 관군에 체포된 김귀성이란 자가

관군에 남한산성 성벽 서쪽에 파손된 부분이 있음을 밀고했다.

관군은 이 파손된 부분으로 밀고 들어와 의병을 해산시키고 성을 장악했다.

1907년 군대해산 후, 일본은 당시 조선군의 무기와 탄약을 인수했는데,

남한산성 내 사찰에 보관 중이던 무기와 탄약도 회수하여 폭발시켰다.

 

 

 

 

1919년 3월 27일, 남한산성에서 인근의 중부면 단대리, 탄리, 수진리 주민 300여 명이 만세운동을 하기도 했으며,

1930년대에는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930년 석혜환, 정영배 등이 조직한 남한산노동공조회

남한산성을 중심지로 활동을 시작했으나 1936년 일제에 의해 괴멸되었다.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이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 조직도 마찬가지였으며, 해방 후에도

인근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남한산성도 한국전쟁은 피할 수 없어 성벽과 성내의 건물들이 파괴되거나 훼손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남한산성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했으나, 4.19혁명 후에 수립된 제2공화국은 이를 무효화시켰다.

1971년 도립공원으로 재지정 되었고, 5년 후인 1976년 7월 1일 관리사무소가 개소했다.

1963년 1월 21일에는 남한산성의 성벽이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성벽 복원사업이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97년까지 성벽 5.1Km를 복원했다.

현재 성남시와 광주시 양 방향으로 남한산성을 관통하는 도로는 1974년에 완공되었다.

1999년에는 남한산성 역사관이 개장하고, 2014년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현재는 옛 풍파를 간직한 채 연 280만명이 방문하는 서울과 경기도 등지의

시민들의 자연휴양처가 되고 있다.

 

 

 

남한산(南漢山)

북한산은 남한산과 대칭되는 이름으로 북쪽의 큰 산, 높은 산을 의미한다.

남한산성으로 더 알려진 남한산, 남한산에 있는 남한산성은 잘 알려져 있으나 남한산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남한산은 산의 사방이 평지여서 밤보다 낮이 길다고 하여 일장산()·주장산()이라고도 한다.

 

 

 

 

 

수어장대

지휘와 관측을 위한 누각으로 성 안에 남아 있는 건축물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왼쪽에 청량당, 뒤에 우물이 있다. 인조2년 단층누각으로 서장대로 불리던 것을 영조27년 2층 누각으로 짓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특히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45일간 친히 군사들을 지휘 격려하였다고 한다.

아래층은 정5칸 측3칸, 위층은 정3칸 측2칸으로 팔작지붕 양식의 2층 누각이다.

 

청량당

인조2년 남한산성 축조 때 공사경비 횡령죄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이희와 이 소식을 듣고 자살한 송씨와

소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라 한다. 한편 이희는 죽기전 내게 죄가 없으면 사형을 당할때 매가 나타난다 했는데

진짜 나타나 사형당하는 장면을 쳐다보았다고 한다. 그 후 횡령사건을 재 조사한바 죄가 없음이 밝혀져

사당을 짓고 넋을 위로하였다. 청량당은 6.25전쟁 때 분실되고 그후 새로 만들었고

정3칸 측2칸으로 홀처마에 팔각지붕으로 되어있다.

 

무망루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불모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라 한다.

 

 

 

 

남문(지화문)

 : 정조3년 개보수시에 지화문이라 명명되고 4대문중 가장 크고 웅장하며 유일하게 현판이 보존되어 있다.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며 350년 추정되는 느티나무와 함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역사터로 많은 시민이 이용하고 있다.

 

 

연주봉 옹성(連珠峰 壅城)

옹성은 원성(元城)과 연주봉을 연결하는 외성으로 둘레는 약 270m이다.

이 옹성은 남쪽 약 170m 거리인 암문을 통해 성안으로 출입할 수 있었으며(지금은 통행금지),

봉수(烽燧)나 망루(望樓) 역할을 했던 곳이다.
끊어진 성곽을 통해 원형 망루로 올라서면 남한산성 일원에서 가장 잘 터지는 조망을 즐길 수 있다.

 

 

 

 

* 군포 :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로서 당시 125개의 군포가 있었다고 하나, 한 군데도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는 건물유구를 보존하기 위해 흙으로 덮고 그 위에 모조초석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 수구 : 성 내의 물을 성 밖으로 내보내는 시설물로서 26개소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물을 유도하기 위한 석축과 임시 저장소인 집수시설 등이 있다고 한다.

 

* 동장대지 : 남한산성 준공 후에 수어청을 두었는데 이 곳 동장대지에는 전영장과 좌영장이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장졸을 지휘하던 곳이다.

 

* 여장(女墻) : 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 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

 

* 봉암성 : 숙종12년 부윤 윤지선이 처음 쌓았으며 병자호란 때 청병들이 벌봉에서 성의 동태를 살폈기 때문에

본성의 보강차원에서 쌓은 것이다.

 

* 벌봉(515m) :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이 바위에 정기가 서려 있어 침략하면서 즉시 깨뜨리면 산성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전설이 있었으며, 실제로 청군들이 벌봉에서 성내를 관찰하며 아군을 공략하였다고 한다.

 

* 외동장대지 : 조선 숙종12년에 수어사 윤지선이 외성을 축성할 때 같이 구축한 것으로 군사들이 진을 치고 조련하던 곳으로

누각 없이 대만 구축되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 한봉성 : 숙종19년 수어사 오시복이 쌓아 완축한 것으로 동편 대로를 차단할 수 있도록 본성의 보강차원에서 축조된 것이다.

한봉(418m). 이 부근에서는 하산로에 대한 이정표는 없다.

 

* 남장대지 : 남한산성이 준공된 수어청에 전 후 중 좌 우 5영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 곳에는 후영장이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장졸들을 지휘하던 곳이다. 대 위에는 라운루가 있었다고 한다.

 

 

 

남한산성은 청량산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부담없이 걸을 수 있다.

걷는 코스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뉘지만 구간구간 샛길이 많아서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다.

특히 남문에서 수어장대를 거쳐 북문에 이르는 2.8 km 구간은 남한산성을 대표하는 걷기 코스이다.

 

 

 

 

남한산성 등산코스 및 남한산성 찾아 가는길 

 

A. 남한산성 산행코스


1코스(3.8km) 소요시간 : 80분

산성종로(로타리) - 북문(0.4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산성종로(로타리 0.7km)

 

2코스(2.9km) 소요시간 : 60분

산성종로(로타리) - 영월정(0.4km) - 숭열전(0.2km) - 수어장대(0.6km) - 서문(0.7km) - 국청사(0.1km) - 산성종로(로타리(0.9km)

 

3코스(5.7km) 소요시간 : 120분

관리사무소 - 현절사(0.1km) - 벌봉(1.8km) - 장경사(1.5km) - 망원사(1.1km) - 지수당(1.0km) - 관리사무소(0.2km)

 

4코스(3.8km) 소요시간 : 80분

산성종로(로타리) - 남문(0.7km) - 남장대터(0.6km) - 동문(1.1km) - 지수당(0.5km) - 개원사(0.3km) - 산성종로(로타리(0.6km)

 

5코스(7.7km). 소요시간 : 200분

관리사무소 - 동문(0.6km) - 동장대터(1.1km) - 북문(1.6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동문(1.7km)

 

* 5코스 등산로 안내

남한산성 역사관 주차장에 차를 주차. 주차비는 1000원입니다. ^^ 동문쪽으로 600미터 정도 내려가 왼쪽 산을 타고

등산을 시작합니다. 성남이나 강남에서 차를 타고 오면 이쪽 남문쪽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B. 기타코스

ㅇ성남시- 남문- 수어장대- 서문- 거여동(3.5km, 2시간 30분)

ㅇ광지원- 동문- 장경사- 벌봉(4km, 3시간)

 

 

 

 

남한산(南韓山 벌봉 512m).청량산(淸凉山 482.6m)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게 한 곳이며, 그 치욕의 상징이 삼전도한비(三田渡汗碑)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송파에 서있다. 그러나 이 남한산성의 북쪽 하남시 춘궁동이 백제를 건국할 때의

서울인 위례성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 송파구에는 삼전도비(三田渡碑·높이 3.95m)가 있다.

이 비석은 조선이 청나라에 패한 뒤 청나라가 자신들의 승전비인 대청황제공덕비를 지금의 송파구 옛 지명인

삼전도에다 세울 것을 요구해서 세운 것이다.

 

물론 춘궁동 일대가 옛 하남 위례성이라는 확증은 없으나 가장 유력한 학설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남시 사창동, 항동, 교산동, 춘궁동 일대의 동쪽 울타리가 되는 산줄기가 벌봉과 객산(292m)을 잇는 능선이다.

고골은 남한산성에서 북동쪽 객산으로 뻗은 산줄기와 남한산성에서 북쪽 금암산과 이성산으로 뻗은

산줄기 사이로 한강을 향하여 부채살처럼 퍼진 골짜기다.
이 골짜기 끝의 하남시 춘궁동이 옛 위례성이라는 것이다. 한강을 향해 펼쳐져 있는 이 고골은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을 뒤로하고 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요즈음 이 지역에서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한다.

* 고골은 고궐(古闕)에서 변한 이름이다. 즉 옛날 이 골짜기 안에 왕족들이 사는 큰 대궐(大闕)이 있었다는 데서 생긴 지명이다.

고골초교가 있는 궁안(宮內) 마을도 고골과 연관된다.


이 골짜기를 서쪽으로 내려다보며 한강을 향해 동북쪽으로 뻗친 산줄기가 벌봉과 객산 줄기이며,

사실은 벌봉(512m) 이 남한산성의 최고봉으로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482.6m)보다 더 높다.

벌봉과 객산에 얽힌 이야기들 벌봉은 그 고스락의 바위가 벌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벌바위봉이라고도 부른다.

벌봉은 남한산성에서 흔하지 않은 암봉으로, 바위틈에 굴도 있어서 기도터로도 이용되고 있다.

남한산성으로 더 알려진 남한산, 남한산에 있는 남한산성은 잘 알려져 있으나 남한산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남한산은 산의 사방이 평지여서 밤보다 낮이 길다고 하여 일장산(日長山), 주장산(晝長山)이라고도 한다.

북한산에 비하여 웅장하고 호탕한 맛은 적지만 여성적인 아름다움이 깃든 아담한 산이다.

이곳은 울창한 수림에 둘러싸인 구릉지로 평균 표고가 서울보다 300~500m 높은 고지대로 천연적인 요새지가 되어왔다.

남한산은 사적 제 57호로 지정된 남한산성이 축조되어 있어서 널리 알려진 산으로

그 지형의 사면이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1코스-로타리-북문-서문-수어장대-영춘정-남문-로타리(5km, 1시간45분)

2코스-로타리-영월정-숭열정-수어장대-국청사-로타리(4km, 1시간20분)

3코스-관리사무소-현절사-벌봉-장경사-망원사-지수당-관리사무소(5km, 1시간35분)

4코스-로타리-남문-남장대터-동문-개원사-로타리(4.5km, 1시간30분)

5코스관리사무소-동문동장대터-북문-서문-수어장대-영춘정-남문-동문-관리사무소(8km, 3시간5분)

 

 

 

 

 

 

남한산성 …그곳에 가면 힘이 난다

 

 

등산과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남한산성은 사시사철 나들이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전란 때 왕이 피신했던 ‘행궁’(별궁) 아래 산성로터리(종이 있었다고 해서 ‘종로거리’라고도 한다) 주변 토속 음식촌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수도권 대표 보양 명소. 대부분의 음식점들은 보양 닭 요리나 산성주먹두부, 산채정식 등을

판매한다. 메뉴와 재료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조리방법을 달리하기 때문에 맛이 천차만별이다.

 

▲ 호젓한 지수당. 식사후 산책하기 좋다

화려하고 웅장한 누각 수어장대(경기도 유형문화제 제 1호)를 비롯해 삼학사의 영혼이

잠들어있는 현절사(경기도 유형문화재 4호), 고관들의 낚시터였던 지수당 등 성 안에 속속

숨어있는 문화재 구경과 호젓한 산책로는 덤으로 즐길 수 있다. 특히 산책로 중 수어장대

오르는 길은 남한산성 산책로 중 백미로 꼽히는 곳이다. 남문에서부터 수어장대 방향으로

20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영춘정은 뛰어난 전망을 자랑한다. 날씨가 좋은 날엔 멀리

남산타워와 도봉산까지 보인다. 일몰 시간에 맞춰가면 멋진 석양도 감상할 수 있다.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시원한 계곡물에 발 담그고 싶다면 산성로터리에서 동문방향

으로 5분 직진 후 동문(좌익문) 앞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로 내려가 보자.

남한산성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계곡이 숨어있다.

주차: 남문주차장, 로터리주차장, 중앙주차장 등 남한산성도립공원에서 운영하는 유료 주차장 이용(1일 1000원, 주차권 하나로 각 주차장간 왕복 이용 가능). 일부 음식점에는 전용 주차장이 마련돼 있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 8호선 산성역 이용, 9번 버스 타고 남한산성 종점(산성로터리) 하차.
승용차 | 진입로가 사방에 있다. 서울(성남) 나들이객들은 주로 남문 방향으로 진입해 동문으로 나오는 코스를 이용한다.

남문 방향 이용시 송파대로 따라 직진, 복정사거리에서 좌회전 후 남한산성 길(지방도 342호선) 따라 직진.
문의: 남한산성관리사무소 (031)743-6610 www.namhansansung.or.kr

 


산채정식-반월정

115년 된 옛날 가옥 사랑방에 앉아 나물 반찬 가득한 웰빙밥상으로 한끼 든든하게 해결할 수 있다.

나무 아래 소담스럽게 가꿔놓은 꽃밭이며 부뚜막 있는 부엌, 가마솥이 놓인 마당 풍경은 외가에 온 듯 그저 정겹기만 하다.

방문 활짝 열고 녹음 짙어가는 먼 산 바라보며 먹는 산채정식(2인 3만6000원)은 그래서 맛보다 분위기에 먼저 취한다.

이 집은 밥맛 좋기로 소문난 집. ‘가마솥 밥 짓기의 달인’으로 통하는 ‘경순 엄마’가 매일 아침 마당에 있는 가마솥에 100인분의

밥을 짓는다. 윤기 좔좔 흐르는 밥에 미나리, 치커리, 쑥갓, 고춧잎, 두릅, 참나물, 머위잎, 고들빼기 등 계절 나물 반찬만

12가지가 상에 오른다. 여기에 숯향 은은하게 밴 불고기, 간 짭짤한 조기, 땅 속에서 꺼낸 묵은 김장김치는 집에서 먹는 밥처럼

그저 편안한 맛이다. 별다를 것 없는 재료와 달리 숨이 살아있는 듯한 나물 맛의 비결은 다름아닌 정성에 있다.

10년 넘게 주방에서 한 가족처럼 지내온 ‘손맛 좋은 엄마’들이 도라지 하나도 일일이 손으로 껍질을 벗겨 무쳐낸다.

된장, 고추장, 간장도 모두 직접 담가 쓴다.

13개 사랑방과 60여명 수용 가능한 큰 방이 있어 가족 모임 하기에도 좋다.

영업시간 오전 10시~오후 9시(명절휴무). 주차가능. 문의 (031)743-6562

 

 

오골계한방백숙-산성별장

산성별장은 문 연 지 27년 된 곳으로 전통만큼이나 단골층 탄탄하다.

차양 드리워진 넓은 야외테이블에 앉아 물 소리 들으며 보양식다운 보양식을 맛볼 수 있다.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는 것은 물론 모든 음식 조리시 남한산성 약수를 사용한다.

오골계한방백숙에서부터 엄나무백숙, 가시오가피백숙, 옻나무백숙(모두 4만5000원)까지 백숙의 종류도 다양하다.

가장 인기있는 메뉴는 오골계한방백숙(4만5000원). 엄나무, 가시오가피, 인삼, 대추, 마늘, 율무, 밤, 녹각, 황기, 천궁, 당귀,

오미자 등을 넣고 2시간 끓인 육수에 오골계 넣고 다시 압력솥에 45분간 끓여낸 오골계한방백숙은 들인 정성만큼이나 진국이다.

 ‘백숙’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죽이 나오는 게 아니라 고기와 국물을 다 먹고 난 뒤 1인용 그릇에 죽이 나온다.

구수한 청국장찌개에 산성두부, 파전, 도토리묵, 생선구이 등이 푸짐하게 나오는 산채한정식(1인 1만3천원, 2인 이상 주문가능)도

인기 메뉴다. 단, 활동무대(?)에 비해 일하는 직원이 적어 두어번 이상 ‘애타게’ 주문을 넣어야 한번 ‘반응’이 온다.

인내심 부족한 사람이라면 조리 시간이 긴 백숙류는 예약 필수.

영업시간 오전 9시30분~오후 9시30분(연중무휴). 주차가능. 문의 (031)743-5399

 

 

황토오리진흙구이-함지박

‘남한산성 맛집’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집.

500여 평 규모의 공간엔 아이들을 위한 놀이시설도 꾸며놓아 가족을 동반한 단골들이 많이 찾는다.

야심작은 황토오리진흙구이. 남한산성 명소 중 하나인 지수당이 한 눈에 내다 보이는 자리에 앉아

황토오리진흙구이(2~3인분 4만5000원)를 맛볼 수 있다.

황토토기에 담아 450℃ 전용 구이기계에 약 40분 초벌구이 후 다시 3시간 동안 구워낸 황토오리진흙구이는

기름기 쫙 빠져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다. 여기에 고구마, 찹쌀, 흑미, 달걀, 검은콩, 잣, 해바라기씨, 호박씨, 대추, 은행 등

몸에 좋은 12가지 재료를 온몸에 품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엄나무백숙(4만원), 오리도가니탕(4만원), 토종닭백숙(3만5000원)를 주문해도 후회 없다.

주인은 “이곳은 1급수 청정무공해지역으로 밤이면 주변에서 반딧불이도 관찰할 수 있다”고 슬쩍 귀띔한다.

매장 안에는 아담한 약수터도 있다. 식후 디저트 대신 약수 한잔 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가뿐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영업시간 오전 11시~오후 10시(명절휴무). 주차가능. 문의 (031)744-7462

 

 

주먹두부&두부전골-오복손두부

창업주 고(故) 오창순씨가 지금으로부터 71년 전인 16살 소녀시절, 남한산성 행인들에게

손두부를 조금씩 만들어 판 것을 시작으로 반세기 넘도록 3대에 걸쳐 손맛을 이어가고 있는 집.

이미 1980년 말 교통방송에 소개된 후 남한산성 유적지만큼이나 명소가 된 곳이다.

전통방식 그대로 100% 핸드 메이드로 만든다는 원칙을 깐깐하게 지켜가고 있다.

이른 아침 가면 가마솥에 두부를 끓이는 것에서부터 응고된 두부를 면 보자기에 일일이 싸는 것까지 구경해 볼 수 있다.

“면 보자기에 쌓기 작업만 4~5번 한다”는 게 3대 곽충환씨의 설명.

“덕분에 35년 간 두부를 만들어온 어머니(박명자씨)는 손가락 관절이 다 상했다”고...

정성뿐 아니라 재료 선택도 변함없는 맛의 비결. 국산 콩에 안면도 꽃지 염전 간수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인기 메뉴인 두부전골(2~3인분 1만5000원, 3~4인분 2만원)에 들어가는 사골육수 간은 소래포구에서 직접 사온 새우젓만을

고집한다. 이 집에서 꼭 맛봐야 할 것은 주먹두부(6000원)다. 양념간장에 살짝 찍어먹는 주먹두부는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주먹두부에 순두부, 직접 만든 만두와 수제비, 묵은 김장김치 등을 넣어

시원하게 끓여내는 두부전골은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아 더욱 깔끔하다.

영업시간 오전 8시~오후 10시(연중무휴). 따로 주차장은 없다.

바로 앞 남한산성 유료주차장 이용시 지불한 1000원을 음식값에서 빼준다. 문의 (031)746-3567

 

오리훈제와 들깨수제비-순흥회관

오리훈제와 들깨수제비를 묶어 놓은 알찬 메뉴 구성으로 발길 모으는 곳.

오리훈제와 들깨수제비 세트(2인 3만원)을 주문하면 오리훈제 반 마리와 뚝배기에 따끈따끈한 들깨수제비를 담아 내온다.

오리훈제는 반 마리라고 해도 양이 어쩐지 섭섭지 않다. 오리훈제 반 마리는 찐 것과 그릴에 구운 것이 반반씩 섞여 나오는데

찐 것은 훈제 향이 살아있어 담백하고 그릴에 구운 것은 고소해 아이들도 잘 먹는다.

세트의 하이라이트는 오리훈제가 아닌 들깨수제비. 걸쭉하지 않고 묽게 끓여낸 들깨수제비는 들깨 특유의 느끼함과 텁텁함은

죽이고 고소한 맛만 살려내 맛이 깔끔하다. 통녹두를 넣은 녹두도가니탕(도가니 용기에 넣어 끓인 닭백숙, 3~4인분 4만원)이나

“원하는 만큼 옻의 강도를 조절해준다”는 옻닭(3~4인분 4만5000원)을 찾는 단골도 많다.

나란히 있는 ‘사람과 산’ 카페는 전남 장성 차 농장에서 가져온 차를 끓여낸다.

산머루차(6000원), 석류차(6000원), 솔잎차(6000원), 십전대보차(8000원), 수삼생즙(9000원) 등이 먹을 만하다.

영업시간 오전 9시~자정(카페는 다음날 오전 3시까지, 연중무휴). 주차가능. 문의 (031)746-1488

 

 

용봉탕 전문점[청와정]

몸보신 제대로 하고 싶다면 청와정을 찾아라. 용봉탕을 전문으로 한다.

전용 수족관에 자라를 늘 구비하고 있어 1시간 전에만 예약하면 언제든 맛볼 수 있다.

용봉탕은 불로장생의 생물로 일컬어지는 자라와 봉황으로 격상된 오골계가 주된 재료다.

여기에 인삼·당귀·버섯·대추 등이 들어간다.

문의 (031)743-6557

 

 

 수도권 26산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