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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울프 2014. 4. 18. 09:40

항골계곡, 그곳에선 심장도 얼어붙었다

[오마이뉴스 강기희 기자]
▲ 항골계곡 입새에 있는 돌탑들. 소원 하나쯤 들어줄 듯 기운차다.
ⓒ2007 강기희
여름의 시작인 6월. 그러나 3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는 이미 5월부터 시작됐다. 서러운 꽃 찔레꽃이 한창인 가리왕산 골짜기를 벗어나 상원산(1421m)과 백석봉(1170m)이 빚어낸 항골계곡으로 갔다. 아침에 비가 살짝 내린 날이었으며, 지난 달(5월) 중순이었다.

탄광이 있던 항골계곡, 그 흔적은 사라지고 풍경만 남아

항골계곡은 강원도 정선에서도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숨어있는 계곡이다. 행정구역상 정선군 북평면에 속해 있다. 계곡으로 난 임도를 따라가면 그 끝엔 단임마을이 나온다. 단임마을까지 이르는 길이만도 40km에 달한다.

항골계곡을 흐르는 물은 차고 맑으며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낀다 하여 '한골계곡'이라고도 한다. 계곡물의 길이만도 20여km나 된다니 그 끝을 찾아 내기란 여간한 인내를 가지고는 어려운 곳이 항골계곡이다.

항골계곡은 정선에서 42번 국도를 따라가다 나전 3거리를 지나 북평초등학교 앞에서 좌회전하면 된다. 이정표가 잘 되어 있으니 길 잃을 염려는 없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항골계곡엔 
대한석탄공사 나전광업소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북평면 거리는 광부들로 왁자했다.

정육점이 최대의 호황을 누리던 그 시절 북평면엔 지나가는 개도 만원권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우스갯소리가 날 정도였다.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광부들의 삶이 풀어지던 사택은 일반인에게 매각됐다. 그 이후 석탄가루 날리던 북평면 거리는 비 온 뒤의 어느 날처럼 깨끗해졌다.

질척거리던 탄가루가 사라지면서 항골계곡은 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탄광이 있을 때만 해도 어지간해서는 발길을 하지 않던 곳이라 그 신비감은 더 했다. 항골계곡 입구에 민박집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0여년 전부터. 고즈넉한 전원마을로 변신한 항골계곡 입구는 옛날의 검은 영화는 잊은 듯했다.

한국폴리텍대학 정선캠퍼스로 변신한 나전광업소를 지나면 숨어 있던 계곡이 조금씩 드러난다. 계곡을 들어서면 돌탑이 먼저 객을 반긴다. 너덜지대의 돌들로 만들어 놓은 돌탑은 소망의 탑이다. 방문객들의 소원 하나쯤은 속 시원히 들어줄 것 같은 돌탑은 모양도 제각각이라 천불천탑이 있었다는 
운주사못지않다.

▲ 쿵더쿵, 쿵더쿵.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을 것 같은 방앗간과 물레방아.
ⓒ2007 강기희
▲ 임도에서 내려다 본 계곡. 금강산에만 나무꾼과 선녀가 있는 것은 아닌 듯.
ⓒ2007 강기희
돌탑을 지나면 물살을 안고 돌아가는 물레방아가 있다. 정선지방의 물레방아는 정선아라리 가사에도 자주 등장한다. 사람의 힘으로 방아를 찧던 디딜방아와 달리 물의 힘으로 돌리는 물레방아는 정미소가 없던 시절 곡식을 찧던 자동 방아였다.

우리 집의 서방님은 날 안고 돌 줄 모르고

물레방앗간은 이효석의 소설 <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방앗간처럼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지금도 은밀한 일들이 벌어질 것 같다.

정선읍내 물레방아는 사시장철 물살을 빙글뱅글 안고 도는데

우리 집의 서방님은 날 안고 돌 줄 모르나

정선읍내 물레방아는 남창 북창 동창 서창물을 안고 돌고 도는데

우리 집의 나갔던 손님은 돌아올 줄 왜 몰라

정선읍내 물레방아는 일삼 삼 삼육 십팔 마흔여덟살 스물 네 개의 허풍산이는 물살을 안고 비빙글 배뱅글 도는데,

우리 집 서방님은 날 안고 돌 줄은 왜 모르나

- 정선 아라리 가사 중에서


여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물레방아 관련 정선 아라리 가사들은 다들 해학적이다. 물레방아로 남녀상열지사를 풀어낸 산골 아낙들의 입담은 무릎을 칠 정도다. 위의 가사 중에서 '허풍산이'는 물레방아의 물받이를 말한다.

항골계곡은 물레방아가 있는 곳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객들은 여기서 돌아간다. 돌아가는 객들과 등을 마주하고는 계곡을 오른다. 아기자기한 포장길이 끝나면서 비포장 길인 임도가 나온다.

지난 2000년만 해도 계곡을 끼고 난 길을 걸었는데 지금은 처음부터 산허리로 올라간다. 처음부터 계곡을 따라 오를 걸, 하는 후회를 하면서 임도를 따라 오른다. 임도에선 우기를 대비해 낙석 방지를 위한 철망 공사가한창이다.

계곡은 발아래로 까마득하게 보인다. 울창한 숲으로 인해 계곡은 물소리만으로 존재의 의미를 알린다. 이따금 드러나는 계곡은 일광욕이라도 하듯 뽀얀 속살을 드러낸다. 아름답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 순간 계곡을 찾은 이는 자장법사가 되고 신선이 된다.

▲ '여제원'의 낮은 지붕과 키를 같이 하는 금낭화.
ⓒ2007 강기희
▲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금낭화. 자장 자장...
ⓒ2007 강기희
천년도 더 거슬러 올라간 어느 봄날, 신라의 대국통이었던 자장법사도 초록으로 물든 산길을 따라 걸었을 것이다. 계곡을 올라가면 그 시절 자장법사가 백일간 머물렀다는 동굴이 있다. 가는 곳마다 흔적을 남겼다는 자장이려니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전설이다.

자장은 오대산상원사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후 진부면 수항리에수다사를 세웠다고 한다. 자장은 지금은 흔적만 남은 수다사와 태백산월정사를 오가는 길의 지름길로 항골계곡을 택했다. 항골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상원산 자락을 넘으면 수다사가 나왔다.

자장의 흔적을 찾다 자장을 만나다

수다사에 오기 전 자장은 황룡사 9층 목탑을 만들면서 신라인들의 희망으로 자리 잡았다. 신라 사람들은 자장이 나라를 지켜 줄 것이라 믿었고, 그의 이름을 '자장 자장…' 부르며 아이를 재웠다고 한다. 자장가의 유래까지 만들어 낼 정도였던 자장은 당시 신라인들에겐 신적 존재와 다르지 않았다.

임도를 따라 오르다 물이 그리워 계곡으로 내려간다.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지붕 낮은 집 한 채를 만난다. 슬레이트가 얹어진 지붕은 집 뒤 텃밭의 높이와 같다. 집은 오래되어 보였으며 얼기설기 다듬은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집 입구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호스를 타고 힘차게 뿜어진다.

물 한 모금을 마시고 헛기침을 하면서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풍경을 흔든다. 안에서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잠시 후 문이 삐걱 열린다. 반소매와 반바지 차림의 집주인이 나온다. 한기가 느껴지는 계곡임에도 집주인은 간편한 옷차림이다.

"스님이신가요?"

"반은 중이요, 반은 속인입니다."

처음엔 자장이 환생을 했나 싶었다. 그러나 집주인은 스스로 낮추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집주인은 건강이 좋지 않은지 얼굴색이 파리해 보였다. 계곡에 온 지 얼마냐 되냐고 물으니 15년이 되었단다. 항골계곡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세월이다.

"계곡 물소리가 좋은 걸요. 계곡에 살아있는 것들이 있나요?"

"얼마 전만 해도 열목어가 많았어요. 가끔 수달도 만났고요."

"자연의 모습이 그대로 남은 곳이로군요."

"몇 해 전엔 플라이 낚시를 하는 이들이 자주 찾았어요. 그들이 송어 한 마리를 잡았는데 얼마나 큰지 두 사람이 끙끙거리며 들고 가는 걸 봤어요."

직접 본 사람이 하는 말이라 믿지 않을 수 없었지만 낚시꾼에게 잡힌 송어의 크기는 짐작도 되지 않았다. 낮은 지붕 아래엔 '여제원'이라는 택호가 나무판에 양각되어 있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여여이 나를 제도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인적 드문계곡에서 지낸 세월이 그쯤 되면 '여제'는 이루고도 남았을 터. 그래서인지 반은 스님이고 반은 속인인 집주인의 눈매는 깊고 맑았다. 이어지는 대화는 두어 평도 되지 않은 야생화 밭으로 옮겨졌다. 금낭화가 고운 자태를 드러내는 밭엔 처음 만나는 식물도 많았다.

"130여 종 됩니다. 먼 곳까지 가서 구한 것도 꽤 있어요."

작은 공간을 빼곡하게 채운 식물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저들 스스로 꽃을 피우고 지고 한단다. 살아가는 일이라는 게 이런 면에서는 집주인이나 객이나 비슷하다.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느껴졌다. 반소매 옷을 입고 있는 집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건강하시라는 인사를 건네고 길을 나섰다.

항골계곡에선 심장도 뜨거워지지 않아

▲ 햇살이 잔잔하게 부서져 내리는 항골계곡.
ⓒ2007 강기희
▲ 몸 담그고 단 5분도 버티지 못한다는 항골계곡의 시린물.
ⓒ2007 강기희
지붕 낮은 집을벗어나 계곡으로 내려가는데 집 한 채가 또 보였다. '한골제'라는 택호가 있는 목조 집은 별장처럼 고요했다. 마당에 들어서며 헛기침을 했으나 반응이 없다. 집 안으로 널린 빨래가 있지만 집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마당에서 바라본 주변의 풍경은 객의 입에서 탄성을 뱉게 한다. 어느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이라 모든 게 내 세상인 집이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라며 궁금함만 키우다 계곡으로 내려간다.

계곡에 들어서자 찬 기운이 얼굴을 친다. 땀 자국이라도 씻어보려 했던 생각이 금방 바뀐다. 손끝조차 담그기 싫을 정도로 계곡은 차다. 물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계곡을 올랐다. 연초록의 단풍나무 숲은 쏟아지는 햇살을 부서져 내리게 했다. 햇살은 계곡물과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운 빛을 만들어 냈다.

크고 작은 돌들이 어우러진 계곡은 자연이 빚어낸 작품이다. 작은 폭포를 이루며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크고 시원하다. 몰려오는 한기를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힘차게 걸어야 했다.

흐르는 물길을 들여다 보지만 열목어나 송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인간의 간섭이 그들을 숨게 했으리라. 열목어나 수달은 몸을 숨기고 어서 인간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열목어야, 수달아. 곧 떠날 테니 걱정마시라.

계곡을 따라 걸어보지만 심장은 뜨거워지지 않았다. 겉옷을 가지고 오지 않은 걸 후회하면서 결국 도망치듯 계곡을 빠져나왔다. 물소리가 뒷전으로 물러나자 비로소 가슴팍으로 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항골계곡의 초입에 불과한 곳에서 찬 기운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망치는 객의 뒷모습이란 허약하기만 인간의 표본과 다르지 않다. 하긴 인간이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게 우스운 일 아니던가. 여여이 나를 제도하는 방법 중엔 자연의 속삭임을 방해하지 않은 일도 포함되는 것임을 계곡을 벗어나면서 알아차렸다.

▲ 항골계곡 절묘한 땅에 자리잡은 어느 별장. 자연을 거스르지 않아 좋았다. 예전엔 작은 흙집이있었다고.
ⓒ2007 강기희


/강기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