社說.論說,歷史

낭만울프 2016. 10. 16. 13:22

♣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기록 



 조선 마지막 왕인 순종 임금은 2세때 세자로 책봉되어 32년간을 세자신분으로 지냈다.

 가장 많은 아들을 둔 왕
세종대왕이 18명, 성종 16명, 2대 정종이 15명 순이다.
딸은 태종[이방원]이 17명이며, 성종이 12명, 중종과 선조가 11명이었다.

◇ 조선시대 왕들은 몇명의 자식들은 낳았을까?
태종은 29명, 성종은 28명, 선조는 25명 이다.

◇ 왕비를 가장많이 배출한 가문
청주한씨가 1위 신의왕후, 소혜왕후, 장순왕후, 공혜왕후, 안순왕후, 인열왕후로 가장 많고
파평윤씨와 여흥민씨가 4명, 청송심씨와 안동김씨가 3명이다.

◇ 왕비중 가장 자식을 많이 낳은 왕비
세종대왕비 소헌왕후 심씨는 8남2녀를 낳았다. 성종의 제9비 숙의홍씨도 7남3녀로 공동 1위이다.

◇ 가장 짧은기간 재위한 임금
12대 인종이며  재임기간 9개월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임금
21대 영조로서  51년 7개월이다.

 가장 단명한 임금
6대 단종으로서 17세에 사약을 받았다.

◇ 가장 장수한 임금
21대 영조로서  83세까지 장수했다.

 가장 많은 부인을 둔 임금
3대 태종과 9대 성종으로서 12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세종대왕은 6명이었다.

◇ 가장 오랫동안 벼슬에 있었던 인물
조선말엽의 정원용으로 20세에 급제하여 마지막 영의정을 지낼때까지 72년간을 관직에 있었으며
그는 지극히 검소하여 청백리에 올라있기도 하다.

◇ 가장 여러대의 임금을 보좌한 사람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까지 7대의 임금을 보좌한 김세민[경주김씨]으로
70년동안 봉직하면서 7대의 임금을 보좌하는 대기록을 남겼다.

 조선시대 역사 인물중 가장 장수한 인물
여중추부사 권황[안동]과 죽림칠현의 한사람인  홍유손으로 모두 99세까지 살았다.

◇ 가장 귀양살이를 오래한 사람
다산 정약용으로 28세때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종교문제로 19년간 강진에 유배됨.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에 가장 오래 재임한 인물
유명한 재상 황희 정승으로 18년간을 재임하는 대기록을 남겼다.
그는 조선 제일의 청백리 관료이자 가장 대표적인 신하이다.

◇ 영의정을 가장 여러번 지낸 인물
최석정[전주최씨]으로서 56세에 영의정이 된후 8번을 지냈다. 그는 소론의 영수이었다.

 이조판서를 가장 많이 역임한 사람
42세에 이조판서가 된 박종덕[반남박씨]으로서 무려  18번이나 이조판서에 올랐다.

 당시 수도의 총책임자인 한성판윤 [서울시장]을 최다 역임한 인물
이가우 [연안이씨]로서 34세에 급제한후 열번을 한성판윤에 올랐다.

 판서[장관]직을 통털어 가장 많이 지낸 인물
박종래로서 이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5조판서를 돌아가며 총 15회 지냈다.

◇ 책을 가장 많이 저술한 인물
지봉유설(芝峯類說) 저자 이수광의 차남 이민구[전주이씨] 24세에 장원급제한 사람으로서
문장이 뛰어나고 저술을 좋아해서 무려 4000여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이수광(李睟光, 1563~1628)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이며 본관은 전주로 그의 집안은 왕족의 후예였다.
태종과 후궁(효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 1395? ~1458)가 바로 그의 선조이다.

그가 살아간 시대는 내우외환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이 때문에 30세가 되던 1592년 이후로 그의 삶은 평화롭지 못했다.
임진왜란의 참상을 경험하며 정치인으로서 뼈아픈 반성을 해야 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광해군대의 정치적 혼란이 그를 정치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출세가도를 달렸던 선조대와 달리 광해군과는 사이가 좋지 못해 정치적 부침이 있었다.

당색을 멀리하며 중도의 입장을 취했던 이수광은
광해군이 생모인 공빈김씨를 공성왕후로 승격시키자 홀로 예의에 어긋난다며 반대의견을 냈다.
이 일을 계기로 광해군과 사이가 점점 멀어져 갔다.
결국 이수광은 1614년 영창대군이 죽임을 당하는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미련없이 관직을 버리고 비우당에 은거하며 두문불출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51세였다.
광해군은 대사성의 벼슬을 내리며 회유했으나, 끝내 거절했다.
그의 명저 [지봉유설]은 비우당으로 은퇴한지 1년만인 1614년(광해군 6년)에 완성된 것이다.

52세에 완성한 [지봉유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사전으로 평가받는 책이다.
이 책은 비우당으로 은퇴한지 1년 만에 편찬된 것이 아니라 오랜 준비 기간을 걸쳐 이루어졌다.
세 차례에 걸친 명나라 사행 경험과 평생 동안 수집해 온 국내외 다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편찬한 것이 곧 [지봉유설]이다.
이는 이수광의 독서량과 부지런함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권으로 이루어져있는 이 책에는 천문·지리·역사·정치·경제·인물·시문·언어·복식·동식물 등
방대한 주제를 바탕으로 3,435 항목에 달하는 사전적 지식이 망라되어 있다.
최초의 백과사전적 저술이라는 체제적 특성 외에도 등장하는 이름만
2,265명에 달하는 실로 방대한 책이다.

1616년 4년간의 칩거 끝에 이수광은
중앙 관직 자리로 복귀하지 않고 지방관이 되어 전라도로 내려갔다.
순천부사가 되어 지방에 내려간 이수광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3년간의 순천부사 임기를 마친 뒤 57세의 나이로 서울에 올라온 뒤로는
중앙 정계와 멀리하며 수원에서 학문에만 매진했다.
이수광이 다시 재기한 것은 광해군과 대북(大北) 세력이 실각한 1623년이다.
인조반정 후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도승지·대사헌·이조참판·이조판서 등을 지내다
1628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 장흥면에 있다.

이수광은 안동 김씨 부인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성구는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까지 올랐고, 차남인 민구는 대사성까지 올랐다.
두 아들이 고관을 지냈던 탓에 이수광의 문집인 [지봉집]은
1633년에 순탄하게 간행될 수 있었다.


◇ 선비의 표상이자 관리들의 자존심인 호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인물
유명한 추사체의 창시자 김정희. 그는 약 200개의 호를 지어썼다. 완당, 추사, 노과, 등등...

 임금에게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하는 사직상소를 가장 많이 올린 사람
영의정이었던 정태화는 37번이나 [사직서]를 올려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통털어 최연소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
15세의 이건창으로 1866년[고종3] 강화도 별시문과에 합격했다.[김종서는 16세에 합격]

 최연소 장원급제자
17세의 박호[밀양박씨]는 1584년[선조17] 친시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임진왜란때 전사] 

◇ 무과출신 급제자중 최연소 인물
17세의 남이[의령남씨] 1457년[세조3] 무과에 장원급제. [유자광의 모함으로 주살됨]

 최연소로 세자에 책봉된 인물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2세에 세자책봉 되었으나 그만 뒤주속에 갇혀 죽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도세자는 10세에 결혼, 최연소 결혼기록이다.

 최연소로 영의정이 된 인물
세종대왕의 손자인 이준[임영대군의 아들]으로서 28세때 영의정에 특서됨.

 병조판서를 최연소로 역임한 인물
권람의 사위인 남이가 27세에 병조판서가 됨.

 아들만 83명을 낳은 천하제일의 정력가(잡인열전, 저자 이수광)
조선시대에 오로지 정력 하나로 부자가 된 기이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김생이며, 나이 30이 되기 전에 아들을 10여 명이나 낳았다.
너무 많이 낳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고자 전국을 떠도는 소금장수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생은 정력이 왕성하여 매일 밤 부인과 교합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는 인물이었다.

조선팔도를 돌아다니면서 소금장수를 하면서 때론 과부집에 머물며 동침을 하게 되었다.

이후 과부는 소금을 후하게 사주었고, 김생은 그날 이후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수 많은 과부들과 정을 주고 받았다.

이 당시는 피임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동침한 여인들은 어김없이 아이를 가졌다.

김생은 “여자들과 동침만 해도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렇게 20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장사하고 나니 아들만 83명이 되었다.

동침한 여자들은 과부, 주모, 여종, 비구니까지 있었다.

몇십년 동안 보부상(소금장수 등)으로 모은 돈을 가지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자식들을 모두 데려다

만경평야에 1백 칸이 넘는 집을 지었고, 자식들과 황무지 개간을 통해 1년에 벼 2천석이나 수확했다.

점차 쌀 수확이 늘어서 만경평야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도 했으며,

죽기 전까지도 계속해서 아이들을 낳았다고 한다.

김생이 죽고 10여 년이 지난 후에는 그가 집을 지었던 만경평야 일대에 그의 아들과 손자들이 사는 집이

수백 호가 되어 집성촌을 이루었다.

김생은 남들보다 매우 뛰어난 정력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지만,

남자의 자유로운 성을 권장하는 조선사회였기 때문에 더욱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 100번도 넘게 과거시험에 합격하다.

유광억은 조선 후기의 유명한 대리 시험꾼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날렸다.

과거에 응시하려는 선비들에게 별도 과외를 해주고 나면 대부분 장원을 하였으며,

어느 과거 시험에서는 장원부터 3등까지 모두 그가 써준 것이었다.

과거 시험의 부정은 예나 지금이나 있지만, 특히 유광억이 활약하던 시기는 세도 정치로 인해

그 부정함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유광억의 활약이 빛나면 빛날수록, 당시의 부조리와 부패가 얼마나 극명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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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근,과거 보러 가는 선비,19세기 말 <잡인열전-책에서 발췌>


‘잡인열전’

조선시대에 살았던 잡다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책이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조선의 뒷골목을 담은 내용으로

양민이 아닌 평민, 평민 중에서도 남들보다 조금은 유별나게 특별하게 살았던 잡인들의 삶을 담았다.

일명 잡인열전으로 저잣거리에서 벌어졌던 유쾌하고 통쾌한 이야기로 책 제목은 <잡인열전> 이다.

잡인열전은 많은 잡인들을 이야기 한다.

술만 먹고 사는 책장수, 조선시대 최고의 노름판 타자, 아들만 83명을 낳은 천하제일의 정력가 김생,

남자만 보면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는 조선 최고의 난봉녀 김 씨,

조선 최고의 왈자 김이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다.


‘잡인’은 잡스런 사람이 아니다.

어느 시대에나 등장하는 사회적 반항아, 기인(奇人), 개성 넘치는 괴짜나 별종들이다.

이들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이분법적 범주에서 벗어난 제 3영역의 사람들이다.

이 책의 저자 이수광은 이들을 ‘잡인’이라고 지칭했다.



안녕하세요,
자주 찼아뵙지
못하여도 불친으로
받아 주시는 불방 님들께
새해를 맞이하여 첫 인사를
드리려고 잠시 불로그 방문 왔네요,

2017년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행복가득한 날 되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