社說.論說,歷史

낭만울프 2018. 7. 20. 23:02

왜 덕수궁 돌담길일까?


경복궁이나 다른 서울의 궁궐 근처에서는 이런 도시전설이 아예 없다.

커플들이 많이 오고가는 이유는 거리가 예쁘고 상당히 개방돼 있기 때문이고

실제 덕수궁 돌담길에는 다른 왕궁 돌담길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거리가 펼쳐져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뿐만 아니라 정동교회, 정동극장, 과거 이화학당이던 이화여자고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러시아 대사관과 배재학당 자리였던 배재중ㆍ고등학교가 남아있고,

반대편으로 올라가다보면 영국대사관과 구 러시아공사관도 만날 수 있다.

근대 교육시설들과 외교공관들이 왕궁 지척거리에 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 왕궁에 가보신 분들을 아시겠지만,

왕궁 근처에 이렇게 왕궁 부속시설이 아닌 외교공관들이 위치해 있는 곳은

좀체 찾아볼 수가 없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진행되는 수문장 교체식 모습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진행되는 수문장 교체식 모습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선

덕수궁의 주인이었던, 조선 제 26대 임금이자 사실상 마지막 임금인

'고종(高宗)' 이란 인물의 인생역정을 들여다 봐야 한다.


덕수궁은 원래 고종이 오기 전엔 왕궁으로 쓰인 역사가 없다.

이곳은 조선 제 9대왕인 성종(成宗)의 친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궁궐이 모두 불타자 전후 한양에 돌아온 선조(宣祖) 임금이

겨우 외형이 남은 이 집을 임시행궁으로 사용했다.

그때 붙여진 이름이 '정릉행궁'이다.

어디까지나 임시거처여서 선조의 아들 광해군 때 창덕궁이 복구된 이후로는

'경운궁(慶運宮)'이란 이름만 하사받은채 그대로 방치됐었다.


이후 수백년이 지난 1897년,

고종이 이곳을 정궁으로 삼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자 황궁이 된다.

고종은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자

이듬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1년간 머문 후

러시아 공사관과 담이 맞닿아있는 이 경운궁으로 돌아온다.

일본이 또 왕궁을 범하면 바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서 러시아군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였다.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한 이후 실제로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기 전까지

일제와 친일파의 세력은 상당히 위축되게 됩니다.


옛 러시아 공사관 터에 남은 감시탑 모습. 6.25 전쟁으로 감시탑 외에 다른 공사관 건물들은 파괴됐다. 군사기지와 같은 모습의 공사관은 러시아군이 주둔했던 병영, 연병장과도 연결돼있었다고 한다.

옛 러시아 공사관 터에 남은 감시탑 모습.

6.25 전쟁으로 감시탑 외에 다른 공사관 건물들은 파괴됐다.

군사기지와 같은 모습의 공사관은 러시아군이 주둔했던

병영, 연병장과도 연결돼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감시탑 하나만 남아있는 구 러시아 공사관 터를 찾아가보면

공사관이라기보다는 군사기지처럼 세워진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은 한국전쟁 때 대부분 건물이 소실됐지만,

높은 구릉지대에 위치해 주변을 한눈에 살필 수 있고, 높은 감시탑까지 설치한데다

과거에는 병영과 연병장도 갖추고 있었다.

공사관과 연병장은 지하통로로 연결돼있었다고 하니 아주 단단한 요새였던 것이다.


각국의 공사관들이 두루 포진해있던 경운궁 일대는

구한말 풍전등화의 국운을 걸고 고종의 외교전이 치열하게 전개된 골목이기도 하다.

고종은 이 외교전의 복판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근대화 사업이라 할 수 있는

'광무개혁(光武改革)'을 추진한다.

그러나 급한 마음과 달리, 국운이 이미 크게 기운 상태에서

그의 개혁은 많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덕수궁에 남아있는 근대 서양식 궁궐인 석조전(石造殿)을 바라보면

당시 광무개혁의 답답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저런 외관에 신경쓸 비용을 군비로 썼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에 대한 아쉬움들이 생겨난다.

석조전 바로 옆에 너무나 어울리지 않게 서있는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의 모습 또한 답답하다.

근대와 전근대가 혼란스럽게 섞인 광무개혁의 슬로건,

'구본신참(舊本新參)'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덕수궁 석조전 모습

덕수궁 석조전 모습


덕수궁 중화전 모습

덕수궁 중화전 모습



그나마 저 어색한 중화전은 1904년 화재에 휩싸여 전소됐다가 복구된 건물로

예산 부족으로 원래 모습을 찾지 못하고 단층 건물로 남아있다.

그래서 경복궁 근정전과 같은 위엄이 전혀 느껴지질 않는다.

중화전 앞뜰에 위치한 품계석들도 왠지 힘이 없어보인다.

중화전 뒤에 위치한 즉조당(卽祚堂)과 석어당(昔御堂)도 그때 복구된 건물로

특히 석어당은 단청조차 돼있지 않은 민가같은 모습으로 서있다.


이 힘없는 경운궁에서 조선의 망국 또한 결정된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사실상 조선왕조의 멸망을 고한 을사늑약도 경운궁에서 체결됐고,

이후 1907년 고종이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임되고

군사해산이 결정된 곳도 이 궁궐이다.

고종이 강제 퇴위돼 상황이 되면서 이곳의 이름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뀌게 된다.

원래 덕수궁은 어떤 궁궐의 이름이 아니라 국왕이 바뀐 이후

생존한 상왕의 거처를 이르는 일반명사였기 때문이다.


덕수궁 중화전 앞에 위치한 품계석 모습

덕수궁 중화전 앞에 위치한 품계석 모습


을사조약과 을사오적

1905년 일본은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찬성한 대한제국 대신은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5명이다.




이들을 을사오적이라고도 일컫는다.

특히 이완용은 을사조약 체결을 지지하고 서명을 주도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후 내각총리대신이 된 을사오적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그는 헤이그특사 사건 후 고종에게 그 책임을 추궁하며 순종에게 양위할 것을 강요했다.

1905년, 즉 을사년에 체결된 이 조약의 정식 명칭은 을사보호조약으로

명목상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화를 미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에서 

흔히 을사조약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데, 조약 체결 과정의 강압성을 비판하는 의미에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후 고종이 1919년 승하하자

덕수궁은 일제에 의해 더욱 빠른 속도로 역사에서 지워지기 시작한다.

덕수궁 돌담길이 민간에 개방된 것도 이때였다.

1921년 이곳에 길을 낸 일제는 덕수궁 돌담길 일대를 연인들의 거리처럼 홍보하기 시작했다.

동물원으로 격하된 창경궁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치욕을 고스란히 안게 됐다.

이후 1926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광화문 앞에 지어지고

지금은 서울도서관이 된 경성부청 신청사 건물도 같은 해에 완성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경성재판소 건물도 지어지면서 1920년대 일제 주요 관청들의 거리가 완성된다.


우리에게는 치욕스런 역사의 건물들이지만

한편으로 1, 2차 세계대전 사이 전간기(戰間期)인 1920년대 건물은

전 세계적으로 원형을 유지한 건물이 드문 편이라 건물 자체가 유적으로 불리고 있다.

이때 건물들은 얼마나 튼튼하게 지었는지 한국전쟁 때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을 정도이다.

모두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지어진 건물들로

당시 일본 조야에서 제기됐던 '경성천도'를 감안해 지었기 때문으로 알려져있다.

정말 당시 일제가 수도를 서울로 옮겼다면 역사가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참으로 섬뜩한 상상이 일어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영국대사관이 지난해 8월 개방한 덕수궁 돌담길 100미터(m) 구간 모습

영국대사관이 지난해 8월 개방한 덕수궁 돌담길 100미터(m) 구간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