社說.論說,歷史

낭만울프 2018. 7. 21. 00:16


그날 저녁 착검한 총으로 무장한 일본 보병이 황궁에 들어가 요소에 배치한 다음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는 조선군 사령관인 하세가와 대장과 하야시(임권조) 공사를 대동하고

황궁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어전 내각회의 개최를 강요, 현안 곧 을사오조약 가결을 재촉한것이다.

외국 사신의 강요에 따라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어전내각회의란

세계역사에 전무후무할 것이다.


학부대신 이완용이 나지막이 입을 열어 자기인들 이 조약을 좋아하겠느냐며

"내각 전원이 이 조약 조인에 부표를 던지면 이토는 직접 폐하에게 조인을 요구할 것이요.

폐하는 거부할 것이 자명한데 그렇게 되면 일본은 어떤 수단을 써서든지 압박하고 나올 것이며

그때는 조약조문의 일언반구도 고치지 못하고 말 것이고,

그래서 일본 요구에 응할 수 밖에 없으며 다만 외교에 국한해서

한국이 실력이 생길 때까지 위임한다는 조건부로 하는 것이

실리를 취하는 길일 것입니다"했다.


이어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거기에 한국 황실의 안녕을 보장하는 한구절을 첨가하는 조건으로

학부대신 이완용의 의견에 동조한다"했고,

군부대신 이근택과 내부대신 이지용이 찬성했고,

처음에는반대했던 박제순마저 찬동했다.


나머지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이 찬성에 주저했으며,

대세가 기울자 참정대신 한규설은 아이고를 연발하며 그 조인 자리를 떠났다.

이렇게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을

을사오적으로 일컫기에 이른 것이다.




이규태의 역사에세이 을사오적 이야기 중에서 -




충정공 민영환




동시대를 살았던 이완용과 민영환.

고종 황제를 최측근에서 보필하였던 두사람.

나라의 위기가 닥쳐 왔을 때 이완용은 현실의 길을 택하여 친일의 길을 걸어 갔고

민영환 선생은 역사의 길을 택하여 죽음으로써 황제와 백성에게 사죄하였다.


이완용은 일제로부터 백작의 작위를 받고 팔도에 전답의 옥토는 물론

심지어 대마도의 농장까지 친일의 대가로 하사받아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러나 그는 나라를 팔아 먹은 것에 대한 열화와 같은 국민의 지탄과 살해 위협에

평생을 시달려야 하였고 결국은 단군이래 최고의 매국노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던 것이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한번도 이완용을 보지 못하였던 후손들은

이완용하면 매국노를 떠올린다.

반면 민영환은 애국자 중의 애국자로 영원히 겨레의 이름으로 살아 있다.

서울 한복판, 충정로는 역사의 길을 택한 민영환을 기려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들 을사오적을 죽이기 위해 오기호. 나인영 등은

박제순. 이지용 집에 폭발물을 선물로 가장하여 보내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다시 하수인을 매수하여 오적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가택의 경계가 삼엄하여 또한 불가하였다.

오적을 암살하기 위한 자신회(自新會), 기산도(寄山度) 등의 결사대가 조직되었고

이근택과 권중현은 결국 저격당하였다.

오적의 집이 민중에 의해 소각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몇몇 매국노에 의해 하루 아침에 나라를 잃은 민중은

다시 나라를 찾기 위해 무력과 문력(文力)을 불사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재명 의사(1886.10.16~1910.9.30)

교회당 앞길에 변장을 하고 잠입한 뒤 이 자리에 참석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10년 사형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의 전신인 경성감옥에서 순국하셨다.

이 사건으로 이동수, 조창호, 김정익 등 11명의 관련자들도 중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재명 의사



이완용(1856년 음력 6월 7일~1926년 양력 2월 12일)



이완용 3대 가족



국민은 노예인데, 나라 판 돈으로 이완용의 처는 그 당시에도 호화 생활을!!

 

출세한 식민사학자 이병도 (이완용의 조카)

 

 

2008년 6월 20일 현재 서울대학교 총장

(이장무는 이병도의 손자, 이완용의 증손자, 이건무의 친형)



이건무. 2008년 3월 제4대 문화재청장 임명

(이장무의 친동생, 이병도의 손자, 이완용의 증손자)

일본 와세다대학교 졸업, 3대에 걸쳐 교수가 11명. 문교부 장관, 학술원 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