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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울프 2018. 11. 9. 14:56
특가/캄보디아-앙코르왓,킬링필드(11.3~7)5일

캄보디아의 제3의 도시인 씨엠립(Siem Reap)
9세기부터 14세기까지 630년 동안
동남아에서 대제국을 형성했던 앙코르 왕조의 도읍지로서
곳곳에 앙코르 왕조의 유적이 많다.
캄보디아는 중국 역사서를 통해서 1세기경 부남국(扶南國)으로 처음 알려졌는데,
‘부남’이란 크메르어로 산(山)이란 의미의 '푸난'(Pnom)을
중국어로 음역한 것이다.

부남국은 오늘날 베트남, 타이, 캄보디아를 포괄하는
거대한 동남아시아 최초의 힌두교왕국으로서
해상교역을 하며 인도에서 힌두교를 받아들였다.
3~ 6세기에는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보내기도 했다.

부남국은 6세기경 북방에서 일어난 진랍(眞臘)에게 병합되었는데,
부남국과 진랍에 대한 기록은 중국 원의 성종(1265~ 1307)때이던
1296년 4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조공을 받으러
진랍에 사신으로 왔던 주달관(周達觀: 1266~1346)이 쓴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진랍(眞臘)이 곧 앙코르왕조인데 앙코르왕조는
802년 자야바르만 2세(Jayavarman Ⅱ: 802~850)가
프놈 쿨렌(Phnom Kulen)에 도읍을 정한 후 1432년까지
630여 년 동안 28명의 임금이 다스렸는데,
앙코르(Ankor)란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로
‘나라 혹은 도읍’을 뜻하는 나가라(Nagara: 뱀이나 용이 사는 곳)가 변한 것이다.
도읍지 푸놈 클렌이 오늘날 인구 25만 명이 살고 있는 씨엠립이다.

앙코르 와트
앙코르 와트는 다른 사원과 달리 서향이다.
사원의 출입구가 서쪽이고, 인도에서는 서쪽이 죽음을 의미하므로,
왕의 무덤이라고 생각하는 견해가 있다.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6.5km쯤 떨어진 곳에
앙코르왕조의 전성기이던 수리아바르만 2세(Suryavarman II: 1113~1145)가 세운
사원 앙코르와트(Angkor Watt)가 있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1.5km 떨어진 곳에
앙코르왕조의 도읍지 앙코르 톰(Ankor Thom)이 있다.

앙코르 와트는 동서 1.5㎞, 남북 1.3㎞의 거대한 직사각형 사원으로서
사원의 서쪽에 폭 190m의 거대한 해자를 건너 경내로 들어가고,
앙코르톰은 가로 3km, 세로 4km의 사각형 도시에 인구 100만 명이 살았는데,
두 곳 모두 넓은 해자를 건너도록 조성되어서 적의 침략에 철저히 대비했으며
밀림지대에 풍부한 목재가 아니라 단단한 석재로 조성한 것이
앙코르왕조의 국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크메르어로 도읍(앙코르)과 사원(와트)의 합성어인 앙코르왓은
12세기 초 3만여 명의 장인들이 30년 동안 건립한 사원이다.


수리아바르만 2세는 1113년 힌두교의 주신 중 하나인 비슈누와
자신을 일체화하는 신격화 수단으로 앙코르와트를 건설하면서
이곳에서 약 40km 떨어진 프놈 끌렌 산의 바위를 깨뜨려서
코끼리로 석재를 운반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사원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자
후계자인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 1125~1218)가
착공한지 37년 만에 완성했다.

자야바르만 7세는 30년 동안 통치하면서
앙코르왕조의 세력을 최대로 확장시켜
현재의 캄보디아 · 라오스 · 타이 · 베트남 남부에 걸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으나,
이후 급격하게 국력이 쇠약해져 1431년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에게 멸망했다.
태국에서는 앙코르 와트를 ‘노코르 바트(Nokhor Vat)'라고 부르고,
방콕의 왕궁사원 안에 앙코르 와트 사원을 축소한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앙코르왕조의 멸망과 함께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졌던 앙코르와트는
1861년 캄보디아를 식민 지배하던 프랑스의 식물학자
헨리 모하트(Alexandre Henri Mouhot: 1826~1861)가
정글을 탐험하다가 처음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앙코르와트의 존재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힌두교사원이 동쪽을 향해 세워진 것과 달리
해가 지는 서쪽을 향하고 있어서 '죽음의 사원'이라 하여
두려워하며 내부로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헨리 모하트는 앙코르와트가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남긴
그 어떤 유적보다 더 위대하다고 찬양했는데,
그는 이듬해 라오스를 여행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35살의 나이로 죽었다.
이후 많은 프랑스인들은 거대하고 신비로운 앙코르와트를
평생에 두 번은 방문해야만 지성인이라고 할 정도로 높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나,
앙코르와트는 사원의 정식 명칭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앙코르의 사원’이라며 편의적으로 붙인 것이다.

오늘날 앙코르와트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서
1992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캄보디아에서는 앙코르와트가 국기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화폐 ‘리엘 ’에도 들어있다.
또, 캄보디아의 맥주 ‘앙코르 비어’도 캄보디아인들의 자부심이다.

씨엠립에서는 유적지마다 개별적인 입장권을 팔다가
최근 시내의 모든 유적지 관람에 통합입장권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즉 어느 관광지이건 입구에서 관광객의 얼굴을 촬영한 뒤
사진이 첨부된 ID카드를 목에 걸고 다니도록 했는데,
사진의 해상도는 가히 코웃음이 나올 정도다.

이것은 관리위탁을 받은 일본인회사에서 수입을 늘이기 위하여 시행한 제도로서
결국 캄보디아에 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은
일정 비율의 이익금만 지불하고 수익금 대부분은 일본이 가져가는 구조이다.
앙코르와트나 앙코르톰의 복원공사도 대부분 일본인회사들이 맡아 공사하고 있다.
2017년 2월 1일부터 1일권 20달러를 37달러, 3일권 40달러를 62달러,
7일권 60달러를 72달러로 대폭 인상했다.

앙코르와트는 서쪽에 폭 190m의 해자를 건너서 경내로 들어가는데
해자 위에는 너비 9.5m, 길이 475m의 돌다리가 있다.
사원을 둘러싼 해자는 바다를 의미하며,
돌다리의 오른편 절반가량은 복구되었지만 절반가량은 무너져 보수를 기다리고 있다.

외부에서는 3개의 첨탑 밖에 보이지 않지만,
넓은 잔디밭 광장을 지나 사원의 제1회랑 안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회랑건물이 사원을 한 바퀴 에워싼 내부에 마당이 있고,
그 마당 안쪽에 다시 제1기단의 회랑건물보다 작은 두 번째 회랑건물이 한 바퀴 에워싸고
그 안에 다시 작은 회랑건물이 세 번째 에워싼 중앙에 높은 석탑건물이 있다.
제1회랑(215×187m)의 높이는 4m, 제2회랑(115×100m)은 12m, 제3회랑(60×60m) 25m인데,
1층은 미물계, 2층은 인간계, 3층은 천상계를 상징한다.

앙코르와트의 석재의 질은 그다지 좋지 않은데,
첫 번째 기단에는 아름다운 벽화를 새기고, 목욕탕 등을 만들었다.
양각한 벽화는 문자를 알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인도의 전통신앙인 힌두교 전설인 라마야나, 마하바라타, 신과 악마의 전쟁,
그리고 앙코르와트를 지은 수리야바르만 2세의 전쟁 출정 이야기를
회랑을 따라 길게 새겼다.

특히 동쪽 1층 회랑에 등장하는 부조물들은
힌두교의 창세신화인 인도의 전설 ‘샤타파타프라나’의 세계 창조신화를 새긴 벽화인데,
선신과 악신들이 큰 뱀인 비수키의 머리와 꼬리 부분을 각각 잡고,
젖의 바다를 휘저어서 불노불사의 영생인 명약 암리타와 미의 여신 락슈미
그리고 천녀 압사라(Apsara) 등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것은 은하수를 설명하며,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는 무지개를 의미한다.
앙코르 유적에서 자주 등장하는 ‘하늘의 무용수’
압사라들이 춤추는 압사라 댄스(Apsara Dance)는
UNESCO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앙코르와트 부조에 새겨진 압사라는 모두 1700개나 되지만
손짓 발짓 모양이 모두 다르다고 한다.

제3회랑은 가장 높은 불교의 정상인 수미산으로서
모서리에 높이 65m의 탑이 각각 1개씩, 가운데에 가장 높은 탑 1개가 있다.
수미산은 경사도 70도가 넘는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이것은 힌두교의 계급제도와 인도 부다가야 5탑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캄보디아 내전 중이던 1972년
낮에는 베트남군이 밤에는 크메르 루지가 번갈아 장악하면서
수많은 유물들이 모두 약탈되었으며
사원은 파괴되어 완전복구는 어렵다고 한다.


왓트마이 위령탑은 1970년대 캄보디아 인구 7000만명 중 200만명이
크메르루즈 정권에 의해 학살된 사건의 아픔을 간직한 작은 킬링필드다.

또한 앙코르 유적 입구 서쪽에는 왓트마이가 자리하고 있다.
작은 킬링필드라고도 불리는 왓트마이
킬링필드 대학살 당시 씨엠림과 앙코르 유적 인근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놓은 사원이다.

매년 10만 명 이상의 여행객이 이곳을 다녀가며

학살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위해 추모의 시간을 가진다.



캄보디아 비행장 위치도 입니다.



825년 자야바르만 2세(Jayavarman: 802~850)가

앙코르 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프놈 클렌(Phnom Kulen) 언덕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캄부자(Kambuja)’라고 했는데,

캄부자는 오늘날 캄보디아(Cambodia)라는 국호의 시초가 되었다.



동양 최대의 호수인 톤레샵 호수.

배를 타고 이동하면서 호수 위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캄보디아의 순수한 생활을 엿볼 수 있다.



몇 년 후 자야바르만 2세는 툰레삽 호수 부근으로 도읍을 옮겼지만,

인드라바르만 1세(Indravarman: 877~889)가

새 도읍지 앙코르톰(Angkor Thom) 건설을 시작했다.

‘앙코르’란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Sanskrit)어로 ‘나라’ 혹은 ‘도읍’을 뜻하고,

‘톰’은 크메르어로 '크다'를 의미하므로 ‘앙코르 톰’은 ‘거대한 도시’를 의미한다.


인드라바르만 1세가 착수한 앙코르톰 조성공사는

야쇼바르만 1세(YasovarmanⅠ: 889~910)때 완성되었는데,

‘바르만(varman)’이란 크메르어로 나라와 백성들의 "보호자"를 의미한다.

9세기부터 14세기까지 6세기 동안 전성기였던

앙코르왕조의 도읍지였던 씨엠립(Siem Reap)에는

곳곳에 앙코르 왕조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데,

씨엠립이란 크메르어로 "시암(태국)을 격파한 곳"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1. 씨엠립 지도


앙코르톰(Angkor Thom)


1-1. 앙코르톰 지도

앙코르톰 지도


씨엠립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6.5㎞쯤 떨어진

앙코르왕조 최대의 사원 앙코르 와트(Angkor Wat)가 있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앙코르 왕조의 왕성 앙코르톰이 있다.

앙코르톰은 가로 3km, 세로 4km의 사각형 도시에 인구 100만 명이 사는 대도시였고,

동서 약 1,5km, 남북 약 1,3km 직사각형 사원인 앙코르와트는

앙코르톰보다 약 1세기 가량 늦게 조성되었다.


앙코르와트가 앙코르 왕조의 종교적 역량을 과시한 사원이라면

앙코르톰은 국가적 역량을 과시한 것이 왕성이었는데,

앙코르톰은 불교의 이상세계인 만다라(慢茶羅)를 형상화한 거대한 계획도시로서

이 시대에 세계 어느 국가의 왕성보다 거대한 도시였다.


1-2. 진랍풍토기

진랍풍토기


 앙코르톰은 폭 100m의 해자로 둘러싼 8m나 되는 높은 성벽 안에 있어서

앙코르톰 출입은 성문과 연결된 해자(垓子) 위에 놓인 다리를 통해서만 건너다닐 수 있었는데,

해자에는 악어를 길러서 적의 공격을 막았다고 한다.

앙코르톰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에 각각 대문과 승리의 문 등 5개의 문을 만들었는데,

동문은 생명 창조를 의미하고, 서문은 죽음을 의미하며,

남문은 자연을, 북문은 길조를 의미한다고 한다.


성문은 코끼리 등에 가마를 얹고도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높이 만들었다.

앙코르톰과 앙코르와트 두곳 모두 넓은 해자를 건너도록 만들고

높은 성벽을 쌓음으로서 적의 침략에 철저히 대비했을 뿐만 아니라

밀림지대에 풍부한 목재가 아니라 단단한 석재로 축성하여

당시 앙코르왕조의 국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중국 원(元: 1271~1368)의 사신단 일원으로

앙코르왕조에 왔던 주달관(周達觀: 1266~1346)의 기행문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2. 앙코르톰 남문과 악신(우측)

앙코르톰 남문과 악신(우측)


앙코르 톰의 정문은 동문이지만,

씨엠립을 찾은 관광객들은 앙코르 와트와 프놈바켄 등

인접한 사원들과 왕래가 편리한 남문을 가장 많이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남문으로 들어가는 해자 위의 다리 양쪽 난간에

머리가 일곱인 뱀의 신이 바수키가 조각되어 있다.

바스키는 몸은 뱀이고 무릎 위는 사람의 얼굴인데,

왼쪽 난간에는 선신(善神 =Deve), 오른쪽 난간에는 악신(惡神 =Asura)을

각각 27개씩을 조각해 놓았다.


이렇게 선신과 악신을 좌우로 배치한 것과

27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크메르인들에게 악신은 앙코르 왕조를 자주 침략한

참파 왕국(Champa: 占波)으로 상징되고 있다.


지금의 베트남 중부지역에 있던 나라로서

중국에는 임읍(林邑)으로 알려진 참파는

해안에 위치하여 무역과 해적생활을 하며 중국 해안까지 침략하다가

중국의 보복으로 446년 중국에 점령되기도 했다.

그러나 6세기에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번영과 예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가

1714년 베트남에게 멸망되었다.


2-1. 남문 해자 위 선신들(왼편)

남문 해자 위 선신들(왼편)


2-2. 앙코르 톰 해자

앙코르 톰 해자


지방 호족출신으로서 1170년 툰레삽에 침공한 참파를 물리친 후

왕위에 오른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 1125~1218)

반대파의 저항을 물리치기 위해서

오랫동안 믿어왔던 힌두교 대신 마하야나(대승불교)를 믿기 시작했다.

그는 탁월한 지도자로서 백성들부터 추앙 받았으며,

스스로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의 화신임을 내세워

수많은 병원을 짓고 빈민구제 시설을 건설하는 등 애민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사후 앙코르 왕조는

다시 힌두교로 환원되고 국력도 급격히 쇠퇴했다.

앙코르왕조는 앙코르 톰을 건설하기 시작한 야소바르만 1세부터

앙코르 톰과 앙코르 와트를 완성한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 집권기까지 약 200년 동안 전성기였는데,

그의 업적은 앙코르 와트의 벽면에 조각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3.앙코르 톰 남문

앙코르 톰 남문


역대 중국왕조는 주변국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는데,

진랍은 송(960~1279)의 정사인 송사(宋史)

'진랍전'(眞臘傳)에도 소개되는 등 일찍부터 중국에 조공했다.

원이 대륙을 통일 후

조정에서는 만호와 패호를 진랍에 파견하였으나 이들의 소식이 두절되자,

원의 성종(1294~1307)은 1294년 6월 사신을 보내서

진랍을 굴복시키고 이듬해 2월 주달관 일행을 파견했다.

모두 20개 항목을 약8500자로 설명하고 있는 진랍풍토기는

앙코르왕조에 대하여 주달관의 이전이나 이후에도

더 이상의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아주 귀중한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절강성 온주(溫州)의 영가현(永嘉縣) 출신인 주달관은

1296년 4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앙코르 톰에 머물렀는데,

그가 찾아온 것은 인드라바르만 3세(Indravarman Ⅲ: 1295~1307)의

지배시기에 해당한다.


주달관은 고향 온주에서 배를 타고 동지나해를 항해하여

메콩 강을 거슬러 7월 '앙코르톰'에 도착했는데,

뱃길로 2개월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태풍을 만나 6개월이나 걸렸다고 한다.

앙코르 톰에서 약 1년을 보낸 주달관 일행은

1297년 6월 귀국길에 올라서 두달 만인 그 해 8월에 영파(寧波)항으로 돌아왔다.


3-1. 브라만 얼굴상들

브라만 얼굴상들


주달관은 앙코르 톰의 왕궁의 성벽, 사원뿐 만 아니라

백성들의 거주지, 물, 축제, 왕의 비빈 등을 보고 느낀 것들을 꼼꼼하게 기록했는데,

도성 안에는 100만 명 이상이 살고 있었으며,

왕궁은 황토색을 띤 벽돌로 지었다고 했다.


앙코르 톰에서 다른 사원과 달리

붉은 빛이 나는 피맨아카스(Phimeanakas) 사원을 궁궐터로 추정하고 있는데,

궁궐의 중앙에는 황금 탑이 우뚝 솟아 있고,

주변에는 12개가 넘는 작은 탑과 돌로 만든 수백 개의 방이 있어서

외국에서 온 사신들 모두가 놀라워했다고 한다.


국왕은 머리에 금관을 쓰고 하루에 두 번 황금과 보석으로

몸을 장식한 옷차림으로 궁중에 나가 국사를 처리했다.

백성들은 남녀 모두 상투를 틀고 웃옷을 벗은 채 다니고

풀로 엮은 초가집에서 살았지만,

조상을 모시는 사당은 기와지붕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살림살이는 토기와 국을 끓이는 냄비 같은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불교사원은 중국과 달리 범종, 법고, 징, 동발, 당번, 보개 등이 없고,

톤레삽 호수에서 시작되는 운하는 거미줄처럼 앙코르 톰 수도를 누볐으며,

특히 밀림지대에서 살고 있는 코끼리를

군사용으로 기르고 있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열대지방인 씨엠립에서 앙코르 톰이나 앙코르와트 등 앙코르 유적 관람은

대부분 돌로 건축한 석조문화이어서 뜨거운 태양열과 함께

뜨겁게 달아오른 석조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무더위가 극심한 12시 부터 오후 2시까지는

휴식을 취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바이온 사원 전경
바이온 사원 전경

2-1. 브라만 얼굴상들
브라만 얼굴상들

앙코르왕조의 왕성인 앙코르 톰의 남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해자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탑을 높이 쌓은 아치형 성문이 있는데,
성문은 당시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코끼리를 타고 통행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높다.
그리고 성문 위의 탑에는 사방을 바라보고 있는 4개의 거인 얼굴상이 있고,
그 아래로 머리가 3개인 3m 높이의 코끼리 위에 앉아 있는
인드라 신의 좌상이 있다.

성안의 한 가운데에는 바이온 사원(Bayon Temple)이 있는데,
성안의 모든 도로는 바이온 사원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으로 나눠져 있다.
바이온 사원 왼편에 바프온 사원(Baphuon Temple) 있고,
그 오른 편에 다른 사원과 달리 붉은 빛이 나는 피맨아카스 사원(Phimeanakas Temple),
피맨아카스 사원을 지나 오른 쪽으로 약5분 정도 떨어진 곳에
군사들을 훈련시키던 연병장인 코끼리 테라스가 있어서
바이온 사원이 얼마나 중요한 사원이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앙코르왕조가 푸니 쿨렌에서 앙코르톰으로 도읍을 이전한 후
약100년 후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 1125~1218)가 세운 바이온 사원은
앙코르 유적 중 불교유적으로는 가장 규모가 큰데,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지었다고 한다.

바이온 사원의 북쪽에 앙코르 톰을 조성하기 훨씬 전인 1060년
우다야바르만 2세가 시바여신을 모신 힌두교 사원인 바푸온 사원이 있는데,
바푸온 사원은 앙코르 왕조의 호국 사원이었으나
수라바야르만 7세가 불교사원인 바이온 사원을 지은 뒤부터
앙코르왕조의 호국사원이 되었다.

3. 바프온 사원 전경
바프온 사원 전경

3-1. 바프온 사원 석탑
바프온 사원 석탑

바이온 사원은 1톤이 넘는 돌 60만개를
태국, 베트남 등지에서 코끼리와 배로 운반하였으며,
지름 25m, 높이 45m나 되는 거대한 중앙 탑을 중심으로
높이 솟은 탑 54개마다 4면에 얼굴을 새겨서
모두 216개가 얼굴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사원의 양쪽에는 기이한 동물을 받들고 있는 신과 거인을 새긴 담장이 있고,
방마다 힌두교 전설에서 나오는 신들의 조각이 가득하다.

특히 석탑의 모서리마다 거대한 얼굴 조각상들을
초기에는 힌두교에서 창조의 신 브라만이라고 생각했으나,
연구결과 힌두교에서 불교로 개종하여 불교를 국교로 삼은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이라고 한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세계에서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사면 부처 얼굴상은
자비로서 사방을 비출 뿐만 아니라
바이온사원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사원의 목재는 모두 썩어서 사라지고 석재만 남아있고,
석재들도 많이 무너져서 UNESCO 지원을 받아 복원 공사 중이다.


4. 피맨아카스사원
피맨아카스사원

4-1. 피카맨아카스 사원 부조물
피카맨아카스 사원 부조물

바이온 사원 북쪽에 있는
길이 200m에 이르는 43m 높이의 커다란 바푸온 사원 앞에는
무너져 내린 커다란 돌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사원 왼쪽에 대형 크레인들이 복원작업을 하고 있지만,
전후 6년에 걸쳐 세 차례 방문하는 동안에도 공사는 거의 진전이 없어보였다.

이 사원에는 황금의 '링가'가 모셔져 있고,
노예들의 반란을 진압한 장군이
이곳에서 왕에게 충성을 서약했다는 주달관의 기록도 있다.
또, 바푸온 사원 북쪽에는 앙코르톰을 건설하기 전인
10세기 후반~11세기 초에 지은 피라미드 형태의
힌두사원인 피맨아카스 사원이 있다.

라젠드라 바르만 2세 때 축성된 피맨아카스 사원
'하늘의 궁전'이라고도 하는데,
앙코르 톰 안의 성벽이나 조각, 석축 등의 석재가 대부분 검정빛갈의 사암인데 반하여
약간 붉은 빛깔의 석재로 지어서 쉽게 눈에 띈다.

원의 사신 주달관이 조공을 받으러 왔을 때
이곳에서 앙코르왕조의 25대 군주 인드라바르만 3세(Indravarman Ⅲ: 재위 1295~1307)를
만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사원은 많이 붕괴되었지만 계단을 통해서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

그런데, 캄보디아는 저지대 습지이어서 뱀에 대한 전설이 많지만,
특히 피맨아카스 사원에는 6개의 머리를 가진 뱀의 정령이 살면서
왕이 왕후나 후궁의 방에 들어가서 동침하려고 하면
뱀이 먼저 그 왕후나 후궁으로 변장해서 왕과 동침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크메르 왕가의 혈통에는 신성한 뱀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믿어오며,
유적지마다 머리가 6개인 뱀을 조각해 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시내의 현대식 호텔이나 음식점 입구에도 그런 조각이 많다.


5. 코끼리 테라스 계단
코끼리 테라스 계단

앙코르톰의 정문인 동문에서 일직선으로 약350m 떨어진 곳에
코끼리 테라스(Elephant Terrace)가 있다.

5-1. 코끼리테라스에서본 전경
코끼리테라스에서본 전경

5-2. 코끼리 테라스
코끼리 테라스

5-3. 광장 전경
광장 전경

앙코르 왕조의 전성기이던 12세기
수리아바르만 7세(Suryavarman II: 1113~1145)가 만든
높이 3m, 길이 약300m의 코끼리 테라스의 벽면에는
3개의 머리를 가진 코끼리 상이 부조되어 있고,
테라스의 뒷면에는 5개의 머리를 가진 말이 부조되어 있다.

수리아바르만 7세는 1113년 힌두교의 주신 중 하나인 비슈누와
자신을 일체화하는 신격화 수단으로 앙코르와트 건설했는데,
코끼리 테라스에서는 앙코르 왕조의 공식행사와
전쟁터로 나가는 병사들의 출정식을 벌였다고 한다.
연병장에서 5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평평한 무대처럼 높은 단이 있고,
특히 왕이 앉는 곳은 코끼리 조각상이 아닌
힌두교의 신 가루다와 사자 상들이 받치고 있다.

승리의 문, 왕의 출입문과 일직선상으로 조성된 코끼리 테라스의 조각들을 보면,
당시 코끼리가 전쟁이나 운송수단으로 아주 중요시되었던 것 같다.
코끼리 테라스의 바로 오른편에는 피맨아카스 사원과
앙코르톰을 건설하여 도읍을 크게 발전시키다가 전설의 뱀을 죽인 업보로 문둥병에 걸린
야소바르만 1세(YasovarmanⅠ: 889~910)의 ‘문둥이왕 사원’ 테라스가 있다.

이곳의 테라스가 다른 곳과 달리 약간 비스듬하게 만든 것은
앙코르 톰을 처음 개척할 때 만든 테라스를 쌓는 기술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6. 야소바르만 1세 테라스
야소바르만 1세 테라스

6-1. 야쇼바르만 1세(문둥이왕)
야쇼바르만 1세(문둥이왕)


테라스의 옹벽에는 힌두교 신화에서 나오는
천상의 무녀 압사라(Apsara)가 춤추는 모습이 다섯 층에 걸쳐 조각되어 있고,
테라스 위에는 문둥이 왕이 앉아있는 조각상이 있다.
그러나 문둥이왕 조각은 복제품이며,
진품은 프놈펜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진품을 직접 보지 않아서 확신할 수 없지만,
문둥이 왕 석상의 조각기술은 매우 유치하다.
또, 크메르인들이 왕이나 승려에게 걸치는 노란 가사를 걸쳐둔 것도 조금은 조잡하다.
이곳을 지나서 오른편으로 들어가면 2개의 연못이 나오는데,
왼쪽에는 승려들이 기거하는 사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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