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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2013. 2. 15. 10:21

 

 

 

 

 

 

 

 

 

콘스탄틴 알렉세예비치 코로빈, Konstatin Alekseyevich Korovin 은 모스크바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자수 성가해서 사업을 일으켰는데 대학을 졸업한 아버지는 사업보다 음악과

미술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사업에 관심이 없었던 아버지 때문에 코로빈의 집안은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부자 3대를 못 간다라는 말이 있지만 2대도 가지 못했습니다.

 

코로빈 몸 속에는 화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형 세르게이도 사실주의 화가였고 코로빈의 친척

중에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이자 모스크바 예술학교의 교수도 있었습니다. 14살에 모스크바 예술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는데 이 때 집안이 몰락합니다.

정말 어려운 때였다. 15살 때 나는 드로잉 수업을 포기하고 빵을 벌어야 했다

라는 그의 회상이 있는데, 한량이었던 아버지를 그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2년간 학교 생활을 하다가 방학 숙제로 풍경화를 제출하고는 회화과로 전과를 합니다. 이때 러시아의 풍경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느끼는 훈련을 받습니다. 마지막 공부를 위해 상페테스부르그 왕립학교로 갔지만 구태의연

한 교육방법에 실망하고 3개월 만에 모스크바로 돌아옵니다.

 

모스크바로 돌아 온 코로빈은 바실리 플레노프의 지도를 받는데 제 생각에는 코로빈의 일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플레노프는 그림뿐만 아니라 당시 서구 예술, 특히 프랑스에 대해 열정적

이었고 지식도 꽤 갖추고 있었습니다. 모스크바 예술 학교 선생님들에 대한 코로빈의 회상을 보면 좋은

스승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 --- 공정하고 친절했던 선생님들은 내 영혼에 깊은 흔적을 남겨 놓으셨다. 지금은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존경심과 함께 비애를 가지고 선생님들을 기억하고 있다. 내 앞에 살아계시는 것 같다. 순수하고 정직했던

선생님들 ----‘

 

코로빈은 스승인 플레노프는가 소개한 단체에 가입합니다.  이 단체는 화가와 가구 디자이너, 무대 디자이너,

건축가와 같은 일군의 젊은이들이 참여했는데 모인 사람들 모두가 러시아의 전통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코로빈은 이들과 함께 러시아의 넓고 깊은 곳으로 여행을 다니곤 했습니다.

 

24살이 되던 1865, 코로빈은 파리와 스페인 여행을 다녀옵니다. 특히 파리에서 알게 된 인상파화가들의

작품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그가 고심하며 제작했던 화풍이 파리의 화가들에게는 이미

평범한 것이었죠. 그 후 파리는 코로빈이 가장 좋아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파리에서 살게 될 때

빛의 도시파리의 저녁과 밤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들을 남기게 됩니다.

 

3년 후 코로빈은 이태리와 스페인 여행을 다녀 옵니다. 그 뒤 새로 건설 된 철도를 이용하여 러시아 북부지방

여행 길에 나섰습니다. 이 때 여행을 통하여 그는 그 자신의 풍경화를 제작하기 시작하는데 꼼꼼하게 직조된

회색 천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런 방법은 1890년 그의 작품의 한 전형이 되죠.

 

1896년 전()러시아 전시회가 개최됩니다. 코로빈은 러시아 북부철도 전시관 장식을 맡았는데 북부 여행을

통해서 얻은 소품들과 장식용 작품들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면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기세로 1900년 파리 세계박람회 러시아 전시관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고 특히 러시아제국의 중앙아시아

부분을 직접 디자인 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드 뇌르 훈장을 받게 됩니다. 그의 명성은 이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재능이 그를 새로운 세계로 끌어 내는 순간이었습니다.

 

1900년 이후 코로빈은 연극 무대 장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전통적인 무대 장식에서 벗어나 연극의

감정 흐름을 전달하는, 분위기 있는 그의 무대 장식 솜씨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다고 합니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 4년 간 자신이 졸업한 모스크바 예술학교의 교수로 재직합니다. 1차 대전 중에는 전쟁에 참여하여

위장에 대한 조언을 하기도 하고 종종 최전선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10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 난 후 러시아의 체제가 바뀌었지만 코로빈은 극장의 무대 장식 일은 계속됩니다.

그러는 과정 중에서 코로빈의 그림은 스타일은 더욱 커졌고 색상은 풍부해졌습니다. 아울러 화법도 자유스러워

졌습니다.

 

62세가 되던 1923, 코로빈은 자신의 심장병 치료와 장애인인 아들의 치료를 위해 파리로 이사를 갑니다.

코로빈은 몰랐겠지만 그는 다시 러시아로 돌아 오지 못했습니다. 코로빈의 아들 알렉세이는 어려서 사고로

두 발을 잃었던 장애인이었습니다. 알렉세이도 화가였는데 나중에 자살로 53년의 생을 마감합니다.

 

파리에서의 생활비를 위해 코로빈은 대규모 전시회를 준비합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모두 도둑맞고 말았습니다.

거의 무일푼이 되어 버린 코로빈은 관광엽서 같은 그림으로 우선 생계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이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그 후 그는 유럽과 미국, 호주의 주요 극장 무대 장식 일을 맡으며 말년을 맞이

합니다. 코로빈은 파리에서 78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출처 : 갤러리 번
글쓴이 : 피카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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