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솔길

사람이 많이 다니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적이 이따금씩 이어지는 길이 되길 바라며

해양대국으로 뻗어가는 중국의 현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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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야기

2019. 7. 8.

 

해양대국으로 뻗어가는 중국의 현대이야기


최근 중국에 대한 경희대 강희백교수의 예리한 현실을 분석한 글입니다.

 

요즘 중국은 과거 3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마치 300년 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시절의 대청제국 같다. 점(點)을 돌려달라는 게 아니라 선(線)과 면(面)을 통째로 삼키고 싶다고 공공연히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중국은 지금 중일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센카쿠(첨각(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만 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최근 중국 일각에서는 센카쿠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沖繩, Okinawa)를 포함한 140여개 류큐(瑠球, Ryukyu) 전체가 중국 영토라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 가고 있다. 2009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한 국제심포지엄에서는 쉬융(徐勇) 베이징대 교수를 비롯한 중국 역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돋웠다.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강압에 의한 1879년의 류큐 병탄, 2차 세계대전 후인 1972년 미국의 오키나와 반환 등은 국제법상 근거가 없으니 센카쿠는 물론, 류큐 군도내 140여개 섬과 해역 전체를 송두리째 중국에 반환해달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류큐를 중국 영토라는 주장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가 2006년 이후 다시 수십 편의 논문을 비롯한, 언론 학계의 주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중국당국은 묵인을 넘어 조장 내지 권장하고까지 있다는 동향마저 감촉되고 있다. 도대체 중국의 이런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필자 주>

 

목차


1. 넓은 일본의 키, 류큐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id=230866
2. 제1차 일본제국주의의 은신처, 류큐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id=231807
3. 제2차 일본제국주의의 출항지, 류큐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id=233766
4. 제3차 불침 항공모함의 출항지, 류큐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id=235655
5. 이중 종속 왕국, 류큐의 흥망사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id=237207
6. 30년 터울, 일제의 류큐와 조선의 병탄사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id=239854
7. 좁은 중국의 족쇄, 류큐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id=241928
8. 그랜트 전 미국대통령의 류큐 3분안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id=243331
9. 루즈벨트와 장제스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id=244801
10. 실크로 포장한 중화제국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id=246222
11. 순망치한의 입술은 북한이 아니라 만주였다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id=248380&page=&code=&gubun=sh&search=순망치한의 입술
12. 제1세대, 서남방 티베트와 인도를 침공하다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id=251270
13. 제2세대, 동남방의 여의주를 입에 물다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id=253506
14. 남서군도, 이어도와 영서초, 오키노도리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page=5&code=2&gubun=rank_code&id=254872

15. 제3세대, 서북방에서 달콤한 과실을 따먹다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id=256283
16-1. 제4세대, 실키 중화제국, 동북공정으로 드러나다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page=&code=2&gubun=rank_code&id=258415
16-2. 제4세대, 실키 중화제국, 동북공정으로 드러나다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page=&code=2&gubun=rank_code&id=260089
16-3. 제4세대, 실키 중화제국, 동북공정으로 드러나다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page=2&code=2&gubun=rank_code&id=262402

17-1. 독도와 센카쿠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page=&code=2&gubun=rank_code&id=265220

17-2. 독도와 센카쿠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266942

18-1. 제5세대, 북한과 류큐로 나아갈 것이다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page=2&code=2&gubun=rank_code&id=269258

18-2 중국 "제주-이어도 점령이 제일 쉬웠어요" 한다면 http://dailian.co.kr/news/news_view.htm?page=2&code=2&gubun=rank_code&id=269258

 

 

 

 

잊어버린 것 외에 새로운 것은 없다.
잊혀진 왕국 류큐의 역사를 대체로 구분하면 5단계로 나누어진다.

1.해상무역 왕국의 황금시대(14세기~1609년)
2.중국-일본에 의한 제1차 이중 종속시대 (1609년~1879년)
3.제1차 일본의 단독지배시대(1879년~1945년)
4.미국-일본에 의한 제2차 이중 종속시대(1945년~1972년)
5.제2차 일본의 단독지배시대(1972년~?)

 

 

 


 

 

 

 

일본 좁고 중국 넓다? 일본 넓고 중국이 좁다!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의 키, 류큐①-넓은 일본의 키, 류큐>
류큐를 둘러사고 있는 해역 넓이 일본 전체 관할 수역의 30% 초과

 

 

일본은 넓고 중국은 좁다. 태평양은 일본을 향해 두 팔 벌려 미소 짓고 있으나 중국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다. 우리들의 뿌리 깊은 고정관념 속에는, 아직도 나라의 영역을 영해나 영공을 포함시키지 않은 순수한 물의 넓이, 즉 영토의 면적만으로 생각하는 착시현상이 관습처럼 남아 있다.

사람들은 보통 좁은 섬나라 일본, 광활한 대륙의 나라 중국이라 부른다. 또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세계지도를 펴놓고 자세히 살펴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오히려 일본은 넓고 중국은 좁다는 숨겨진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는 해양의 시대이다. 일찍이 미국의 국무장관을 지낸 존 헤이(John Milton Hay, 1838~1905)는 19세기 말에 이렇게 말했다.

“지중해는 과거의 바다이다. 대서양은 현재의 바다이다. 태평양은 미래의 바다이다.”

혜안과 선견지명이 있는 해양사관의 핵심을 간파한 말이다. 영토의 개념에는 육지, 바다, 하늘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모두 포함된다. 바다는 우선 물리적 공간으로 볼 때 다섯 가지 층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 "중화통일을 수호하고 류큐군도를 환수하자!" (维护中华统一,还我琉球群岛) 출처 http://image.baidu.com/i?ct=503316480&z=0&tn=baiduimagedetail&word

첫째, 바다 위에는 하늘이 있다.

둘째, 바다의 표면(surface of sea)이 있는데, 주로 선박의 항해에 사용된다. 이는 상품과 사람의 운송, 군사적 이용 등 통상, 교통, 군사 면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셋째, 수역(water-column)은 엄청난 생물자원을 지니고 있다. 각종 어폐류 해조류 등 수산물과 소금이 인간생활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수자원과 군사적인 잠수함의 이용 등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넷째, 해저표면(seabed)을 들 수 있다. 특히 현대 산업사회에서 중요한 망간, 니켈, 구리, 코발트 등이 깊은 해저에 엄청난 규모로 깔려 있어서 제3차 해양법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다섯째, 지하층인 해저(subsoil)에는 석유와 천연가스는 물론 일명 불타는 얼음이라 불리는 가스하이드레이트(gashydrate)가 대량으로 묻혀 있다. 아래 그림에서 볼 수 있듯 20세기부터 지하 1층 지상 4층 빌딩인 바다의 활용가치가 육지보다 훨씬 귀중해지고 있다.

◇ 출처: 강효백 ‘좁은 중국 넓을 일본’ [동양스승, 서양제자] 예전사, 1992, p.291 참조 재작성


◇ 드넓은 일본해역, 비좁은 중국바다. 출처 : hhtp://image.baidu.com/i?ct=503316480&z=0&tn=baiduimagedetail&word


일본의 땅은 중국의 땅에 비해 좁지만, 일본의 바다는 중국의 그것에 비해 훨씬 넓다. 세계지도를 살펴보면 일본은 지금 태평양의 동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랍다. 일본의 육지 영토면적은 약 37.7만㎢이나 200해리 관할수역 면적은 육지영토면적의 10배나 넘는 약 386만㎢나 된다.

반면 중국의 육지 영토면적은 약 960만㎢이나 해양면적은 육지면적의 6분의 1에 못 미치는 약 135만 ㎢의 관할수역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북쪽 홋카이도에서 남쪽의 오키나와와 센카쿠를 포함하고 있는 류큐 해역까지의 길고 긴 해안선의 연장선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미국본토 서해안의 그것보다 더 길다. 일본은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광활한 바다를 차지하게 되었을까?

바다를 제압하는 자는 언제인가 제국마저 제압하기에 이른다는 키케로의 명언처럼 해양제국을 이루고 있는 일본에 부러움 반 두려움 반을 느끼며 일본열도에 관하여 몇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되었다.

가장 큰 의문점은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나아가 전태평양 연안지역의 세력판도를 결정하는 역사(시간의 씨줄)와 지리(공간의 날줄)의 십자가를 이루는 교차점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주는 흔히 온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낱말로 사용된다. 그러나 우주는 천체를 비롯한 만물을 포용하는 물리학적 공간을 뜻하는 우(宇)와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 없는 무한한 시간을 나타내는 주(宙)가 질서 있게 통일된 세계를 뜻하는 것이다.

시간(역사)과 공간(지리)을 별개의 독립변수로 삼아 접근하는 방식을 탈피하여, 이를 동화적으로 질서있게 통합하여 목표를 불침항공모함 일본호를 우주(시간과 공간)의 십자가 한가운데 놓고 조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자료: Sam Bateman, "Economic growth, marine resources and naval arms in East Asia", Maine Policy, vol.22.1998, pp.4-5.


다시 말해 필자는 씨줄(宇)과 날줄(宙)의 교차점의 한 지점을 동중국해와 태평양을 남북으로 길게 가르며 이어지는 일본열도의 긴 꼬리,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류큐군도와 그 군도를 에두르고 있는 광대한 해역이라고 설정해보겠다.

류큐는 가고시마현과 타이완 사이에서 이른바 류큐호(弧)를 그리고 있는 오키나와, 다이도, 미야코, 야에야마, 센카쿠 등 크고 작은 140여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류큐의 총면적이 2388㎢로, 땅 면적만 치면 우리나라의 제주도보다 좁다.

그러나 류큐를 둘러싸고 있는 해역의 넓이는 일본전체 관할수역의 30%를 초과하는 광대무변한 것이다. 또한 류큐 해역은 최근 시라카바(중국명, 춘샤오. 春曉) 등 무궁무진한 원유와 천연가스의 매장량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류큐의 중심인 오키나와는 필리핀의 마닐라, 타이완의 타이뻬이, 한국의 서울을 꼭지점으로 연결하는 삼각형의 밑변 한 가운데에 위치한다. 미국의 군사전략은 바로 그 밑변의 한가운데에다 미사일과 전술핵무기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류큐가 갖는 독특한 지정학적 중요성은 140여개 도서를 체인으로 연결 중국이 태평양으로 향하는 출구를 철저히 봉쇄하고 있다는 점이다.

류큐 연구 과정에서 필자는 거의 전무 하다시피 한 류큐에 대한 학술적 자료와 부족으로 여간 곤란을 겪은 게 아니다. 그러나 필자의 소박한 바람은 학계나 전문연구인들께서 그간 류큐의 정치, 경제, 군사, 외교, 역사, 지리적 중요성을 간과하고 소홀히 하여 온데 대한 초보적인 문제 제기나마 하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일본 ´심장보다 복부와 옆구리를 공격하라´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의 키, 류큐②-제1차 일제의 은신처, 류큐>
400년동안 일본은 류큐 해역서 5번의 대전환…그 첫번째가 도요토미

 

과거 400여년 동안 시간의 바다에서 '불침항공모함' 일본호(日本號)는 크게 잡아 다섯 번 쯤 키를 돌렸다. 그 다섯 번의 대전환이 이루어진 공간의 바다는 모두 류큐 해역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일본호는 류큐 해역에서 내부적 통일에서 외부적 도발로 방향을 돌리다가(1591년), 다시 팽창주의에서 쇄국주의로 전환하는 계기를 이룩했다(1609).

그러다가 류큐해역 근처의 사스마번(薩摩 蕃·현재의 가고시마 鹿兒島)이 주도하는 메이지 유신(1868)으로 내부적 단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또 다시 류큐에서 키의 방향을 제국주의적 도발로 대전환하기 시작했다. 그 후 약 70년간 팽창할 대로 팽창한 일본제국호는 태평양전쟁에서 패배로 역사의 내리막길로 떨어지게 된다. 류큐해역에서 좌초하게 되기 때문이다.

패전 후 27년간 일본은 확산욕구의 본능적 충동을 경제 분야로 집약시켜오다가 다시 류큐에서 또 다시 정치외교군사대국의 지향으로 방향을 바꾸어(1972년 오키나와 반환, 중국과의 수교 등)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일본의 축소와 팽창의 전환점, 류큐


일본의 축소와 팽창의 전환점, 류큐


1587년 규슈(九州)를 평정하여 전 일본을 통일하게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확대지향적 인물이었다. 지방 영주들의 불만과 잔존하는 강력한 그들의 군사력을 중국대륙과 한반도 정벌을 내걸어 욕구불만을 해소시키고, 자신의 과대망상적 야심을 통일 일본의 막강한 역량에다 전환시켜 폭발시키고 싶었다.

도요토미는 조선을 거쳐 중국과 인도대륙까지를 정복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드디어 1592년, 그는 ‘명나라를 칠테니 길을 비켜라’는 기치를 내걸고 조선에 대한 두차례의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도중에 병사하였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8개월 전인 1591년 8월 사스마번의 시마즈(島津)에게 조선침략을 위한 1만 5천명의 군역부담을 명하자, 10월 시마즈는 류큐왕국에게 병정 징집을 대신하여 7,500명의 10개월분 군량미 11,250석과 황금 8천냥을 상녕(尙寧)왕에게 요구했다. 류큐왕은 이를 거부하고 삼사관(총리격)인 정형(鄭逈)으로 하여금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계획을 명나라 조정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사쓰마는 류큐사신을 억류하고 왜의 사신을 류큐로 보내 군사 7,000명의 10개월 양식을 조선에 상륙한 왜군에게 보낼 것을 강요했으나 거절당했으며, 이에 류큐군도 북부 5개 섬을 사쓰마에 양도하라고 강박했으나 이 역시 류큐는 거부했다.

같은해 , 도요토미는 에조의 땅 홋카이도(北海島)의 마쓰시마를 복속시켰다. 현재 남한의 전체면적에서 충청북도를 뺀 면적만한 홋가이도가 그때부터 일본 중앙정부의 지배아래에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일본 열도의 머리부분에 해당되는 홋카이도의 복속은 도요토미의 팽창주의 영토욕에 따른 유일한 성공이자 빛나는 제국주의적 업적이었던 것이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어 막부(바쿠)를 열었다. 그는 도요토미와는 달리 축소지향적인 인물이었다. 도요토미가 확대지향적이거나 아직 세력되지 못한 형태의 일본 제국주의자였다면, 도쿠가와는 내향적이며 축소지향적인 쇄국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류큐의 이중속국화가 도쿠가와 시대에 이루어진 것을 보면 그는 어쩌면 쇄국주의자가 아니라 도요토미보다 훨씬 세련되고 노련한, 현실주의적인 일본 제1차 제국주의의 완성자였다.

1609년 3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인을 받은 사쓰마 번주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이끌고 류큐왕국을 침략했다. 침략의 주된 이유는 임진왜란시 류큐의 협조거부였다. 4월 5일 수도 슈리성을 점령하고 류큐의 문물을 약탈했다.

류큐 국왕 이하 100여 명의 고관들이 사쓰마번으로 납치당했다가 2년 6개월 후에야 도쿠가와에 대한 복종의 맹세와 서약을 하고 풀러났다. 그러나 이를 거부한 충신 정형은 명나라 황제에게 원병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발각되어 펄펄 끓는 기름 솥에 던져져 죽음을 당했다.

도쿠가와는 중국을 부국(父國)이라 부르며 중국에 신복해 오던 류큐를 중·일 양국의 이중종속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편 1609년은 조선과 국교회복을 축하하는 대규모 일본측의 사절단이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사절단의 상경을 거절하고 부산포의 왜관에 며칠 머물게 한 후 곧 돌려보낸 사건이 있던 해이다.

1592년 임진왜란에서부터 1609년 류큐의 침략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다시 살펴보면, 일본은 마치 무턱대고 큰 것을 노리는 것보다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차지해나가는 것이 유리하고 현명한 정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초보적 형태의 일본 제국주의의 원조격인 도요토미의 팽창 확대지향적 대외정책에서, 1603년 새로 막부를 세우고 전국을 장악한 도쿠가와는 수렴과 내실을 기하는 정책으로 전환하는 쇄국정책을 폈다. 따라서 도쿠가와 막부는 1648년에 쇄국을 완성하여 나가사키를 제외한 모든 나라의 문을 닫았다.

그렇지만 전체 동아시아의 해외무역을 주름잡고 있다시피한 류큐를 정치 외교적 명분만은 중국에 양보하고 경제와 무역방면의 실리를 가로채는 교묘한 책략으로써 나라의 살림을 살찌워가고 있었다. 약소국 류큐는 일본 제국주의 야욕이 축소되고 압축된 형태로, 숨쉬고 있는 까만 씨앗과 같은 것이었다.

◇ 중국(적색)과 일본(황색)의 해역 표시도. 출처 http://image.baidu.com/i?ct=503316480&z=0&tn=baiduimagedetail&word=%D6%D0%B9%FA%BA%A3%D3%F2%B5%D8%CD%BC&in=


19세기 후반부터 폭발하기 시작한 일본의 본격적 제국주의 침략형태로 미루어보아, 필자는 일본제국주의가 류큐에서 얻은 역사적 교훈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첫째, 작은 것이 아름답다. 큰 것보다 우선 작은 것부터 차지하라.
둘째, 정치 군사적 지배보다 우선 경제 무역 면에서 장악하라.
셋째, 대륙의 얼굴이나 심장부보다 우선 그의 복부와 옆구리를 공격하여 조금씩 힘을 빼라.

결과적으로 도쿠가와는 히데요시의 실패를 교훈삼아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15대를 세습, 260년의 막부를 일관하였다. 그러나 축소지향적인 도쿠가와 막부를 단순히 작게 한다는 것이라든지, 쇄국한다는 것이 아니라 꼭 가지고 싶으나 그대로는 내 손안에 꽉 쥘 수 없는 것을 ‘축소’시킴으로써, 그 가치, 본질을 획득, 소유하는 것이었다.

즉 한국이나 중국대륙을 쥘 수 없어 그 가치, 본질을 류큐로 ‘압축’시킴으로써 확대지향 욕구를 보상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한반도와 중국대륙에 대한 일본인의 뜨거운 확대지향 팽창주의적 열망을 류큐군도 140여개 섬으로 축소 수렴하여 잠재워왔던 것이다.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미국과 전쟁을 한다면 언제 끝낼건가?"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의 키, 류큐③-제2차 일 제국주의 출항지, 류큐>
청나라는 류큐를 일본에 빼앗기지 말라는 미국의 조언을 무시했다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의 진원지는 류큐의 윤택한 해상무역자금을 수백년간 흡수하며 세력을 길러온 사스마(薩摩· 현재 가고시마)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7~1877)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1830~1878), 메이지 유신의 두 주역, 역시 사스마 출신이다.

사이고는 메이지유신의 장본인이면서도 일본의 서구화에 회의를 느끼고, 사무라이 후예로서의 봉건적 향수를 떨치지 못한 채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정국의 안정, 국력충실의 준비기간 없이 곧바로 조선을 침략하고자 하였다,

오쿠보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등과 함께 태평양을 건너 미국을, 미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영국과 독일 등 구미제국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그는 특히 통일독일을 이룬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그들 일행에게 들려 준 훈수,‘국제사회에서는 윤리도 없고 정의도 없다. 오로지 군사력과 관료제를 치밀하게 강화해나가는 길만이 부국강병의 첩경 ’이라는 대목에 깊은 감명를 받았다. 오쿠보는 독일에서 일본이 나가야 할 길을 발견하였다. 그는 서남 해역의 배후를 튼튼히 하는 류큐 병합 우선 노선을 주장하고 자유민권운동가들과 타협하면서 정국안정을 기하였다.

일본제국호의 첫 출항지 선정문제로 오쿠보는 마치 1609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류큐를 공격하여 이중속국화한 것처럼 류큐병탄론을 주장함으로써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흡사한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를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축출했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인들은 대체적으로 도쿠가와보다 도요토미를 존경하고 있듯, 오쿠보도 사이고를 의리의 혁명가로 숭앙하고 있다.

1872년 오쿠보는 메이지유신 축하사절단을 파견하라고 류큐에 압력을 넣어 류큐 사절 일행을 동경으로 불러들였다. 류큐국왕을 일본귀족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다는 칙서를 내렸으며 류큐를 일본 외무성 관할하에 둔다고 발표하였다.

1875년 오쿠보는 외무대신 마쓰다 미츠유키(松田道之)를 류큐에 파견해 청나라에의 조공을 금지할 것과 류큐가 맺은 미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와 맺은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과 일본식으로 류큐의 법제를 변혁할 것을 강요하였다. 왕국의 수명이 경각에 달렸음을 직감한 류큐 왕은 1877년 4월, 청나라에 임세공(任世功) 등 3인의 밀사를 파견하여 원조를 청하였다. 이에 청나라 조정은 귀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만 주일 공사 하여장(何如章)이 “일본이 류큐를 취하고 나면 그 다음 차례는 조선일 것이다. 지금 일본은 서남전쟁 뒤인지라 피폐해 있고 청나라가 해군력이 우세를 점하고 있다. 류큐에 함대를 파견하여 무력으로 일본을 축출하자”며 강경론을 펼쳤다. 그러나 당시 최고 실권자 이홍장(李鴻章)은 먼 바다에 떨어진 몇 개의 섬들 때문에 군사력을 동원할 수 없다며 류큐의 구조요청을 외면하였다. 절망에 빠진 류큐의 밀사 임세공은 베이징에서 류큐왕국이 있는 동남방을 향하여 삼배한 후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30년 터울, 일본의 류큐와 조선 병탄사]편에서 상술예정)

1879년 4월 4일은 오백년 동북아의 해상왕국, 류큐의 마지막 날이다. 이 날, 오쿠보의 직계 마쓰다는 ‘류큐 처분관’ 자격으로 군경 600여명을 이끌고 류큐의 수도 슈리성을 무력 점령하였다. 반발하는 류큐의 고관들을 모조리 체포 고문하고 막대한 보물과 문서를 약탈하였다. 류큐‘왕국’을 말소한 자리에 오키나와‘현’을 신설하였다. 류큐인은 이제 `일본인이 되어야 했다.

◇ 메이지유신의 두 주역, 가고시마 출신의 오쿠보와 사이고는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오쿠보가 승리하여 류큐를 우선 병탄하게 된다.


그해 4월 30일 일본은 류큐의 마지막 왕 상태를 동경에 유폐하고 후일 후작 작위를 하사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류큐의 구지배계층을 회유하기 위하여 이들에 대해 토지와 조세체제 등 봉건적인 특권을 인정하고 신분에 따라 사은금을 제공하였다.

이듬해 미국의 18대 대통령을 역임한 그랜트(Ulysses S.Grant,1822~1885, 재임기간, 1869~1877)가 태평양을 건너 청나라로 왔다. 일본의 류큐흡수로 인하여 동아시아 세력의 균형추가 급속하게 일본으로 기울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랜트는 이홍장을 직접 만나 류큐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청나라가 류큐를 포기하여 두고두고 후회할 일은 말아야 한다고 극구 만류하였다.

그랜트는 이홍장에게 류큐의 북부는 일본이, 중부는 청일이 공동 관리하고, 남부는 청나라가 관할하는 이른바 ‘류큐 3분안’까지 제시하였으나 불발로 끝났다.([류큐와 미국의 대통령들]편에서 상술 예정)

결국 일본은 1592-1609년 한반도를 침략함으로써 출발하고 류큐로 잠입하였던 순서와는 거꾸로, 1879년 먼저 류큐를 병탄하여 오키나와현으로 일본 영토화한 것을 일대 전환점으로 삼아, 대륙에 대한 수천년 동안의 콤플렉스를 극복, 팽창주의 제국주의 노선으로 줄달음치게 되었다.

류큐를 병합한지 15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지 300여년 만인 1894년, 일본은 조선의 갑오동학혁명을 구실로 청일 전쟁을 일으키고 청나라로부터 이듬해 4월 대만과 팽호열도를 얻었다. 1905년에는 백년전만 하더라도 나폴레옹을 몰락시켰던 북극곰 러시아와 러일전쟁을 일으켜 사할린 남반부를 얻고 만주(동북)의 조차권을 장악했다. 동북아 지역에 경쟁상대가 없어진 힘의 공백을 틈타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전락시킨 대일본제국은 1910년 8월 29일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완전 병합하여 버렸다.

류큐에서부터 출발한 일제의 군홧발 행진은 끝없이 이어진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14년 일제는 중국의 산둥 반도를 공략하여 독일이 중국에서 점유하고 있던 권익을 그대로 승계하고 여순과 대련의 조차권, 남만주 철도의 권리 기한을 다시 99년간 연장하고 동부 내몽골 남만주 일대의 권익을 획득하였다. 1931년 9월 18일 심양 북쪽 리우타오고우(柳條溝)폭파를 구실로 일본 관동군은 그해 11월 만주(동북)전역을 점령하였다.

1932년에는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괴뢰로 앉혀놓은 만주국을 건설하여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1933년에는 내몽골의 동부와 허베이성의 동북쪽 르허(熱河)지방을 점령하여 만주국에 편입하고, 그해 5월에는 만리장성을 넘어 베이핑(北平, 지금의 베이징)의 대부분을 점령하는 등 중국의 심장부까지 진출하였다. 이미 대일본제국의 판도는 해양을 뺀 육지면적만 치더라도 중국본토보다 훨씬 넓어졌다.

1937년 7월 7일 베이징 남부의 루가오챠오(蘆溝橋) 사건을 계기로 류큐에서 출발할 때부터 엘셀러레이터만 있었지 브레이크가 없었던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 본토를 전면 침공하였다. 그해 11월 당시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여 1개월 여만에 30여만의 양민을 학살하는‘남경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1938년 10월까지 일본은 파죽지세로 산시, 산둥, 허베이, 상하이, 광저우, 우한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일제가 점령한 중국본토는 면이 아닌 선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전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져 돌파구를 찾던 일제는 인도차이나에 진격하여 중국에의 물자수송을 방지함과 동시에 남방진격을 근거지로 마련코자 하였다. 이에 미국은 미일 통상조약을 파기하고 대일 석유수출 금지조치를 취하였다. 1941년 9월 6일 미국과의 전쟁을 결정하는 역사적인 어전회의가 열렸다. 천황은 스기야마 하지메(杉山 元)육군참모총장에게 물었다.

“미국과 전쟁을 한다면 언제 끝낼 자신이 있는가?”

“3개월쯤이면 태평양 전역을 끝장낼 수 있습니다.”

“그까짓 중국에서도 질질 끌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린가?”

“중국이 너무 넓어서 그렇습니다.”

그러자 천황은 큰소리로 질책했다.

“태평양은 중국보다 훨씬 넓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이때 해군 참모총장은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1941년 12월 8일 대일본제국호는 마침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 기습을 감행하였다. 인류 전쟁사상 최대의 전쟁터로 화한 지구 최대의 바다 태평양에서 일본군의 질주는 거침없었다.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얀마, 태국을 점령한데 이어 파푸아뉴기니, 미크로네시아 등 남태평양까지 점령지역을 확대해 갔다.

싱가포르 점령 당시 일제는 일본내지인은 물론 대만과 한국, 만주의 식민지인에게 싱가포르를 닮은 고무공을 선물하는 호기를 부렸다. 연전연승 파죽지세로 공격을 계속한 대일본제국의 최대판도는 과거의 로마제국의 극성기보다 훨씬 넓었다. 해양면적을 포함할 경우 징기스칸의 대원제국에 비견되는 광대무변한 것이었다.

◇ 징기스칸의 대원제국에 필적하는 극성기의 대일본제국의 광활한 판도. 출처 http://image.baidu.com/


이를 시간과 공간의 각도를 넓게 펼쳐 인류사를 조감해 본다면 태평양전쟁은 각각 지중해와 대서양의 헤게모니를 얻기 위한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과 대영제국과 스페인의 무적함대와의 전쟁처럼, 태평양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내세운 대동아공영권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피지배민족을 탄압하는 대단히 이기적이고 편협한 것으로, 문화적 우월의식이 높은 한국인이나 중국인은 물론 피지배민족의 자발적인 공감과 협조를 불러일으키기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류큐는 일본영토에서 벌어진 유일한 지상전이자 2차 대전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의 현장이 되었다.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군은 원주민에게 집단자살명령을 내리는 등 만행을 저질러 류큐 전체 원주민의 3분의 1인 약 15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무렵 일제는 ‘오키나와를 불침항공모함’이라고 선언하였다. 약 40년 뒤인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일본이 자유진영을 수호하기 위한 불침항공모함이라고 공언하였다.)

그해 4월 1일 류큐의 오키나와를 점령당하자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내각은 붕괴하고, 4월 5일부터 스즈끼 간따로(鈴木貴太郞)의 항복준비 내각이 들어섰다.

이해를 돕기 위해 태평양전쟁을 축구경기에 비유하자면 이렇다. 태평양의 키스톤(Keystone of the Pacific), 류큐를 확보함으로써 노쇠하고 둔중한 중국을 제치고 서태평양의 대표가 된 일본은, 역시 쇠락한 유럽제국을 제치고 서방세계최강대국으로 등극한 동태평양의 대표 미국과의 결승전을 갖는다. 센터서클 하와이에서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기선을 제압하였던 일본은 결국, 류큐를 상실하면서 전의를 잃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 가던 1943년 11월 23일부터 27일까지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 그리고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카이로에서 전후질서를 구상하며 합의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11월 27일에 나온 카이로 선언이었다. 여기서 3대국은 일본의 영토제한과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개시된 이후로 일본이 탈취, 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도서는 원상회복된다.

2. 만주, 대만, 팽호도 등 일본이 청으로부터 빼앗은 땅은 중국에 반환하여야 한다.

3. 조선은 적당한 절차(in due course)에 의하여 자주 독립시킨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게 되자, 위의 카이로 선언에 따라 일제가 통치하였던 우리나라를 비롯한 만주, 대만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여러 섬들은 광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단 한나라 류큐왕국만은 돌아오지 않는 왕국이 되어 버렸다.

카이로 회담은 류큐 왕국을 부활시키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 왜 장제스는 일본의 태평양 도서의 주권박탈 기산점을 1879년이라 하지 않고 1914년이라 하였는가.

2. 왜 장제스는 만주, 대만, 팽호도와 같이 류큐를 포함시키지 않았는가.

3. 왜 장제스는 류큐의 독립이나 원상회복을 거론하지 않았는가.

이는 필자가 19년 전에 제기하였던 의문이었다. [류큐와 미국의 대통령들]편에서 그 의문의 실마리를 풀고자 한다.

<주요참고문헌>
강효백, “좁은 중국, 넓을 일본”,『동양스승,서양제자』 서울: 예전사, 1992.
高良創吉, 『琉球王國』,東京: 岩波書店, 1993.
上村忠男, 『沖繩の記憶/日本の歷史』,東京: 未來社, 2002.
高之國&8729;張海文, 『海洋國策硏究文集』, 北京: 海軍出版社,2007.
Hook, Glenn D.and Richard Siddle.2003. "Introduction: Japan? Structure and Subjectivity in Okinawa" Glenn D. Hook and Richard Siddle eds. Japan and Okinawa: Structure and Subjectivity.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Curzon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일중 해양대국화는 한국 해양을 자르는 가위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의 키, 류큐④-제3차 불침항공모함 출항지, 류큐>
해상제국 중국 꿈 이뤄지면 우리나라 제주-이어도-7광구 관할권 손실

 

 

‘가오리연 일본’의 꼬리, 류큐

가오리연을 날려본 적이 있는가? 가오리연의 비밀은 꼬리에 있다. 가오리연의 특징은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꼬리가 균형을 잡아 주면서 바람이 꼬리를 타고 흐르게 하여 하늘 높이 띄울 수 있다는 점이다.

일본이 ‘가오리연’이라면 류큐는‘가오리연의 꼬리’이다. 일본은 1500여㎞의 기나긴 류큐 군도를 확보한 그만큼 오르막(팽창)으로 치달았고 류큐에 대한 일본의 권력이 손상을 입은 그만큼 내리막(축소)에 접어들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지 류큐 미군정시대는 근대 일본사에서 ‘축소 일본’시기였다.

2차 대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자 류큐는 일본으로부터 분리되어 미군정하에 들어갔다. 미국의 류큐 분리의 근거에는 류큐 군도가 원래 일본의 영토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하였다.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국 최고사령관은 미 국무성에 보낸 전보에서 류큐 군도는 역사학적, 민족학적으로도 일본의 고유한 영토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이 섬들을 확보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한편 맥아더는 점령지 일본 당국에게는 류큐를 미군기지화하면 일본이 재군비를 하지 않아도 방위에 문제가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류큐 기지화와 일본의 전쟁포기 및 군대보유금지를 정당화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에서 류큐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 중국의 공산화와 냉전의 격화, 6.25전쟁 과정에서 공군기지로서의 류큐의 결정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류큐는 태평양의 키스톤(keystone)으로서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핵심적인 거점으로 부각되었다.

◇ 1972년 이후 일본 해양제국주의 팽창 추세


미일 이중종속지 류큐

1952년 4월 발효된 대일강화조약 제3조에 규정된 류큐의 법적 지위는 인류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었다. 류큐의 잠재주권(residual sovereignty)은 여전히 일본에게 있었으나, 미국의 군정을 받는 변칙적인 이중 종속의 지위에 놓이게 된 것이다.

미국이 류큐 주민에 대한 입법&8228;행정&8228;사법의 권한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영토라고 하기 힘들었다. 잠재주권을 일본에게 남겨두었다는 점에서 미국이 합병한 영토도 아니었다. 류큐는 아주 새로운 유형의 점령지이자 식민지였다. 미군정하의 류큐 주민 역시 매우 애매모호한 지위를 지녔다.

류큐는 미국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이었지만 류큐 주민은 미국 시민권자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일본국적자도 아니었으며 ‘류큐왕국’으로 원상회복되지 못한 상황에서 ‘독립국 류큐’의 국적자도 아니었다. 류큐 주민이 일본 본토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종의 여권인 도항증을 지참하여야 했다. 도항증에는 국적표시는 없고 류큐 군도 거주자라는 괴이한 법적 신분이 기재되었었다.

미국이 류큐를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한 이유는 2차 대전 이후 소련을 새로운 가상 적국으로 설정한 세계전략에 따라 류큐를 소련과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는 해상 장벽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1953년 당시 닉슨 미국 부통령은 ‘공산주의의 위협이 있는 한, 미국은 오키나와(류큐)를 보유할 것’이라고 말하였고 1954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기지를 무기한으로 보유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이르자 2차 대전 후 정점에 달했던 미국의 헤게모니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은 미국의 안보 우산아래에서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여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미국과 일본의 역학관계가 변화함에 따라 미&8729;일간에 군사&8729;경제적 역할분담을 조정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 결과 1969년 닉슨 미국 대통령은 ‘아시아는 아시아인 손으로’라는 유명한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연이어 닉슨 미국 대통령과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일본 총리는 한국의 안전이 일본 자체의 안전에 긴요하다는‘한국 조항’과 함께 류큐의 일본반환을 협의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미국은 일본에 류큐를 반환하는 대가로 아시아에 대한 짐의 일부를 일본이 떠맡기로 한 것이다. 류큐 반환협상은 8년간이나 일본 총리를 역임한 사토 에이사쿠의 뛰어난 업적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마침내 미국은 1972년 5월 15일, 류큐 군도와 주변의 광대한 해역을 통째로 일본에 돌려주었다.

여기서 류큐 군도를 잠시 홋카이도 북쪽에 위치한 이른바 ‘북방 4도’와 비교해보자. 러시아가 현재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하보마이, 시코탄, 구나시리, 에토로후 등 4개의 섬은 류큐처럼 독립왕국이었거나 이중 종속국이었다는 영욕의 역사가 없으며 19세기 말 침략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점령지였다. 북방 4도에 비하면 일본의 입장에서 볼때, 가히 횡재라 할 만한 호박이 그것도 140여개씩이나 넝쿨째 현재 일본 전체해역의 30%이상에 해당하는 광대한 해역(약 140만㎢)이 일본의 품속으로 굴러들어왔다.

그러나 또 다른 이면을 톺아보면 현재까지 류큐의 미군기지가 반환된 예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여전히 류큐 전체 면적의 약 10%(오키나와 본도 면적의 약 20%)가 미군기지화 되어 있다. 본토에서 미군 기지는 축소되었지만 류큐에서는 거의 변함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류큐에 주둔하는 주일 미군의 비중이 더 높아졌다.

일본 국토(뭍)면적의 0.6%에 해당하는 류큐에 주일 미군기지의 75%가 집중되었다. 즉 류큐 군도의 핵심 부분은 여전히 일본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미국 영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은 미일안보조약에 따라 일본 전토를 기지로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지 사용과 기지 운용의 특권이 보장된 류큐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이러한 기지화 방침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 센카쿠, 중국명; 다오위다오 (釣魚島)의 위치. http://news.jschina.com.cn/china/200909/t178518.shtml


센카쿠를 둘러싼 일-중 쟁탈전


1972년 류큐를 환수받으면서부터 팽창지향성 대외정책에로의 전환에 탄력을 받은 일본은 그해 9월, 미국보다 앞서 대만과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동시에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고 중일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때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의 유명한 동양학자 티보르 멘데는 “일본과 중국이 미래를 공유하게 되는 때, 그것은 서구로서는 콜럼부스의 신대륙발견에 결코 뒤지지 않는 큰 사건이고, 백인의 우월성이 처음으로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경탄하였다.

당시 서구 학자들은 일본과 중국이 서로 세력균형을 이루면서 일본의 활력과 기술이 중국의 신문명 노력과 결합된다면, 서구사회에 중대한 교훈을 주는 또 한 번의 문화적 대격동을 야기시켜, 전혀 새로운 사회도덕 관념이 형성될지도 모른다고 예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이 지역적으로 아시아에 속해있기는 하나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인식이 근본적으로 미흡하고, 아시아의 공동발전을 위한 진정성 있는 노력을 게을리함을 간과한 ‘1+1=2’라는 단순한 산술적 계산이라고 할 수 있다.

중일수교 교섭당시 중국은 류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 우선 류큐 군도의 맨 남쪽에 있는 센카쿠(중국명, 다오위다오) 영유권 문제가 그것이다. 센카쿠는 류큐의 중심섬인 오키나와 서남쪽 약 400km, 중국대륙 동쪽 약 350km, 대만 북동쪽 190km 동중국해상에 위치한 8개 무인도로 구성되어 있고 총면적은 6.3㎢이다.

현재 일본이 점유하고 있으나 중국, 대만, 홍콩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센카쿠 해역은 1895년 청·일전쟁 승리이후 일본이 청으로부터 대만의 부속도서로서의 하나로 할양받으면서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귀속되었다가 대일 강화조약 체결시 미국으로 이양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센카쿠에 대한 이렇다 할 분쟁은 발생하지 않았으나, 1969년 유엔이 센카쿠 해역의 석유부존 가능성을 발표한 이후 중국과 대만 측에서 영유권 주장을 제기하였다.

센카쿠 영유권 분쟁에서 일본과 중국의 주요 논거는 이렇다. 일본의 주장에 의하면 19세기 말까지 무주지였던 센카쿠를 일본이 먼저 발견하고 1895년 오키나와현에 정식 편입하였다. 2차대전후 대일 강화조약에 의거하여 미군 관할하에 있던 것을 1972년 오키나와 반환으로 되찾은 일본의 영토라는 것이다.

중국의 주장에 의하면 센카쿠는 명나라시대에 중국이 처음 발견한 중국 고유영토였다. 청일전쟁후 대만의 부속도서의 하나로서 일본에 강제 할양되었으며 2차대전후 중국의 고유영토를 일본이 불법적으로 미국에 이양했으며 미국의 센카쿠를 포함한 오키나와 반환은 중국 영토에 대한 미&8729;일간의 불법적인 밀실 거래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센카쿠를 연(鳶)으로 비유하도록 한다.

일본이 가오리연이라면 류큐 군도는 가오리연의 긴 꼬리이고 센카쿠는 꼬리중의 맨 끝 부분이다. 그런데 중국은 센카쿠가 대만이라는 ‘방패연’에 달린 머리줄이었던 것을 일본이 훔쳐내어 자기네 가오리연 꼬리에 덧붙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격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중일 국교 정상화는 센카쿠 문제를 보류해 둔 채 체결되었다. “같은 점을 먼저 찾아내고 다른 점은 일단 그대로 접어두자” 라는 구존동이(求存同異)와 센카쿠의 영유권 귀속문제를 후세에게 맡기는 ’차세대 해결론‘을 채택하여 분쟁해결을 후세에게 맡기는 보류전략을 선택하였다.

중국은 1969년, 류큐 해역의 1만분의 1도 안되는 북방의 영역, 즉 우수리 강 가운데 섬인 진바오(珍寶·소련 명칭‘다만스키’) 섬을 위해 같은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과의 일전을 불사했지만, 여전히 드넓은 태평양을 향하는 출구 류큐 군도와 그 광활한 해역의 관할권 제기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다.

그러나 중일 국교 정상화 이후 센카쿠 영유권을 둘러싼 양국간의 마찰은 지속되고 있다. 1978년, 1988년, 1996년 3차에 걸쳐 일본의 극우단체인 ‘일본청년사’가 센카쿠에 등대를 설치하여 일본의 지배를 기정사실화 하려는 행위에 대해 중국, 대만 및 홍콩에서 대대적인 일본 규탄시위 및 항의가 발생하였다. 1996년 9월에는 센카쿠 인근 해역에서 일본의 등대설치를 항의하는 한 홍콩의 시민단체 회원이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중국은 1998년 6월 남사군도, 서사군도 및 센카쿠 해역을 포함하는 <배타적경제수역 및 대륙붕법>을 발표하여, 일본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중국 선박과 항공기의 센카쿠 영해 진입은 다반사가 되었다. 특히 작년 9월 7일에는 센카쿠 해역에서 중국 어선과 일본 해상순시선이 충돌하면서 중일 간 심각한 외교 분쟁이 벌어졌다.

센카쿠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일본 정부는 “국내법에 따라 엄정히 처리하겠다”며 중국인 선장을 구속했다. 그러자 중국정부는 고위급 회담 전면 중단, 일본 관광 취소, 희토류 수출 중단 등으로 일본을 압박했고, 일본은 결국 선장을 조기 석방했다. 중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일본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고, 중국에서는 대규모 반일 시위가 벌어졌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환치우시바오>(環球時報)를 비롯한 중국 각종 언론매체에는 센카쿠뿐만 아니라 오키나와를 포함한 류큐 군도 전체의 독립 또는 중국에로의 반환을 요구하는 특집기사와 칼럼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처럼 중일 양국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는 이유는 센카쿠를 포함한 류큐 해역의 전략적 중요성과 해양자원의 가치가 급상승했기 때문이다. 중국에게는 중국 군사력의 태평양 진출을 위한 전진 기지이며, 일본에게는 중국대륙의 대양에로의 팽창을 봉쇄하는 전략적 방어체인이 된다. 200해리 EEZ확보를 통한 어마어마한 용적의 해양과 이를 통한 해저자원의 자원 확보 및 해상교통로와 관련된 사활지역인 것이다.

◇ 더블베드만한 바위섬을 인공 원형섬으로 확장공사한 후의 오키노토리시(좌), 대한민국 독도, 일본의 오키노토리보다 18000여배 큰 국제법상의 엄연한 섬(Island) 출처: 네이버 검색 (중), 오키노토리시마에 설치한 일본영토(우).


더블베드 면적의 바위섬으로 일본 육지면적의 1.1배 확보

여기에서 보다 거시적 관점으로 조망하여 보자. 시공을 일본이 류큐를 반환받은 1972년으로 되돌려 본다. 그 해는 현대 세계사와 국제관계에 있어서 일대 전환점을 맞이하는 한해였다. 그 해부터 일본은 여러 차례에 걸친 방위력 정비 계획을 통하여 획기적인 군사력 증강을 꾀하였다. 류큐 군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방위 체제 정비와 육&8729;해&8729;공군의 노후 장비 갱신을 위해 신예 장비를 확충하기 시작하였다.

1879년 류큐를 합병한지 15년 후 절대군주제 일본제국은 청일 전쟁을 일으켜 대만을 얻었다. 그렇다면 1972년 류큐를 회복한지 15년 후에 현대적 민주국가이자 입헌군주제 일본은 무엇을 했을까? 1987년 일본은 방위비의 GNP 1퍼센트 억제선을 철폐하고 본격적인 군비 확장에 박차를 가하였다. 잠수함, 미사일, 항공기 등 공격형 무기 분야에서 세계 정상을 목표로 다시 무섭게 달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해 일본은 총 한발 쏘지 않고 어마어마하게 넓은 해역을 차지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것은 바로 오키노토리시마(沖の鳥島,중국명; 沖之鳥礁). 오키노토리시마는 원래 만조 때는 바위섬 거의 전부가 해수면에 잠기는 암초였다. 다만 가로 2m, 세로 5m, 높이 70cm 정도의 바위만 2개 수면에 드러나는데 해면에 노출되는 면적은 10㎡(독도면적의 약 18,000분지 1)가 채 되지 않는 ‘현초(顯礁; 드러난 암초)’였다.

그 더블베드 넓이만한 노출 부위마저 파도가 조금만 세게 몰아쳐도 잠겨버리곤 하는 현초를 일본 정부는 1987년 11월 26일부터 1989년 11월 4일까지 바위주변에 철제블록을 이용, 지름 50m, 높이 3m의 원형 벽을 쌓아올리고 그 내부에 콘크리트를 부어 파도에 깎이는 것을 막아 인공 원형섬으로 재탄생시켰다.

일본은 이를 기선으로 하여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설정함으로써 오키노토리시마의 EEZ 면적은 일본 국토 면적(38만 ㎢)보다 넓은 약 42만㎢나 된다. 더 나아가 일본은 오키노토리사마 주변을 매립하여 제트기 이착륙이 가능한 활주로도 만들어 해양리조트를 건설할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다. 중국은 현재까지 오키노토리를 ‘섬’이 아닌 ‘현초 또는 바위(岩)’에 불과하다며 이를 기선으로 한 EEZ 설정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이 오키노토리에 가한 행위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며 해양제국주의 전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이 일본의 주장대로 현초가 아닌 섬이라고 해도 유엔해양법 협약 제121조 3항에는 ‘인간이 거주할 수 없거나 독자적인 경제활동을 유지할 수 없는 암석은 배타적 경제수역(EEZ)이나 대륙붕을 가지지 아니한다.’는 유엔 해양법 협약 제121조 3항에 따라 기점으로 삼을 수 없다.

국제사회의 비판에 아랑곳 하지 않고 1996년 일본은 「배타적 경제수역 및 대륙붕법」을 제정하면서 류큐 군도 해역과 오키노토리시마 해역, 그리고 태평양 망망대해상의 미나미토리시마(南鳥島)해역(약 43만㎢) 등 총 447만㎢의 관할 해역을 선포했다.

◇ 류큐해역을 관통하여 오키노토리시마까지 항진하는 중국함대(2010.4.10) 출처: http://nf.nfdaily.cn/huati/content/2010-04/22/content_11320016.htm


일중 해양대국화는 한국의 해양을 자르는 가위인가

그동안 독도에 대한 망발을 일삼던 일본은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부터는 망언(妄言)에서 망동(妄動)으로 더욱 공격적으로 구체적으로 도발을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2008년 4월 일본은 중학교 교과서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을 표기하였다. 당시 유명환 외교통상부장관은 일본 정부에 신중한 판단을 당부(request‘부탁’의 외교적 표현)했다.

독도는 당연히 우리 땅인데 일본정부에 강력하게 ´항의(protest)´를 했어야지 왜 ‘부탁’만 했는가. 게다가 지난해 3월 일본은 모든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명기하여 독도와 동해를 ‘다케시마’와 ‘일본해’로 만들기 위한 야욕을 갈수록 현재화하고 있다(추후 상술 예정).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은?

섬나라 일본은 바다를 닮아 퍼지기를 좋아하고 늘 움직인다. 자기 확대를 좋아하고 자기 한정을 싫어한다. 21세기 일본은 더욱 면밀하고 세련된 제국주의, 해양제국주의(Maritime Imperialism)로 줄달음 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뭍(육지)만 중시하던 중국이 물(해양)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어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실크로 포장된 중화제국의 해양대국화로 성큼 성큼 나아가고 있다.

현재 중국 군사전략가들은 과거 서구 열강에 침략 당했던 것이 대양 해군의 부재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에 중국은 항공모함을 비롯해 잠수함과 이지스함 등의 건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은 2014년까지 2척의 항공모함을, 2020년까지 5척의 항공모함을 운용하는 체제를 구축할 방침이다. 지금 중국의 의도는 중국 군함이 류큐 해역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해군의 방위선을 태평양까지 확장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작년 4월 중순에는 10여척의 군함과 함정탑재 헬리콥터 수 십대, 수 미상의 잠수함으로 구성된 중국해군함대가 일본 당국에 사전 통고도 없이, 센카쿠 영해와 류큐 해역을 뚫고 오키마토리시마 해역까지 진출하여 일본조야를 경악하게끔 하였다.

만일 해상제국 중국의 꿈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나라 제주 해역과 이어도 해역, 그리고 7광구에 대한 우리의 관할권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것임에 틀림없다. 도서국가로서 생래적 팽창주의자인 일본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차라리 바다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과거의 대륙성국가 중국이 우리에겐 행복한 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 식탐이 유난히 강한 이들 양대국의 참을 수 없는 팽창욕구의 희생양이 될 위험성도 없지 않다. 즉 우리나라를 사이에 두고 동서에 각각 위치한 일본-중국의 해양제국주의노선은 한국의 해역을 잘라내 삼켜버리는 가위의 양날이 될 수도 있다. 냉철한 현실인식의 기초 위에서 주도면밀하면서도 담대한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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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5년 사토 에이사쿠 총리는 일본의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류큐를 방문하여 “오키나와(류큐)의 복귀가 실현되지 않는 한, 일본의 전후(戰後)는 끝나지 않는다.”라고 성명했다.
2) 리덩후이(李登輝) 전 대만총통은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30주년 대담(오키나와 타임즈)에서부터 최근 각종 일본매체와의 인터뷰에서까지, 센카쿠 열도를 일본 영토라고 계속 주장하여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그의 논거는 센카쿠 열도가 오키나와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결국 일본 영토. 중국이 아무리 영유권을 주장해도 증거가 없으며 중국의 주장은 국제법적 근거가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중국과 대만 언론은 리덩후이의 부계혈통이 일본인 경찰이었다는 항간의 의혹을 기정사실화하며 리덩후이를 악랄한 친일매국노라고 맹비난하고 있다. [오키나와 타임즈] 2002-09-24. 중국의 [中&22269;日&25253;] 2010-11-2, 대만의 [中央日報] 2011-01-15 등 참조
3)독도면적 187,554㎡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48656참조. 국내 학계 일각에서는 오키노토리보다 18,000여배나 더 넓은 독도가 섬(island)이 아닌 바위(rocks)라며 독도를 기선으로 하여 영해 및 배타적경제수역을 설정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견해에 대한 비판을 유보한다. 그 대신 대한민국의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서 일본의 콘크리트를 들이부어 건설한 인공섬 오키노토리시마의 사례를 참고로 독도항만과 공항, 독도촌 건설 등에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4)금년 벽두(2011년 1월 3일)에 일본정부는 중국의 희토류 수출금지 조치에 대응하기 위해 미나미토리시마 인근 해역에서 망간단괴, 망간 각 개발 사업에 착수하였다. [중앙일보] 2011-01-04 참조.
5)[마이니찌(讀賣)新聞)], [요미우리 (每日)新聞], [아사히(朝日)新聞)],[산케이(産經)新聞)] 2000.4.21자 참조


<주요참고문헌>
강효백, “좁은 중국, 넓은 일본”,『동양스승,서양제자』 서울: 예전사, 1992.
정근식&8729;전경수&8729;이지원 편저, 『기지의 섬, 오키나와』, 서울: 논형, 2008.
上村忠男, 『沖繩の記憶/日本の歷史』,東京: 未來社, 2002.
廉德珪, 『“大國” 日本與中日官階』, 上海:上海新世紀出版社,2010.
高之國&8729;張海文, 『海洋國策硏究文集』, 北京: 海軍出版社,2007.
Hook, Glenn D.and Richard Siddle.2003. "Introduction: Japan? Structure and Subjectivity in Okinawa" Glenn D. Hook and Richard Siddle eds. Japan and Okinawa: Structure and Subjectivity.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Curzon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조선을 사랑한 류큐 국기는 ´태극기´였다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의 키, 류큐⑤-이중종속 왕국, 류큐의 흥망사>
"한국의 빼어남을 모아놓고 중국과는 보차 관계, 일본과는 순치 관계"
강효백 경희대 교수 (2011.02.05 12:31:20)


 

 

해상왕국, 류큐의 황금시대

류큐는 독립왕국이었다. 류큐는 지리 역사적 풍토의 특수성에 조성된 고유한 전통과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아름답고 풍요로운 해상왕국이었다.

규슈와 타이완 사이의 태평양에 점점이 펼쳐있는 류큐 군도의 섬들에는 10세기경부터 부족국가의 형태들이 출현하였다. 이들 섬에는 저마다 안사(按司)라고 불리는 족장들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족장의 지위는 서로 평등하였고 이들은 평화로운 교류를 하고 있었다.

12세기경 류큐 군도의 최대 섬인 오키나와에 산남(山南), 중산(中山), 산북(山北)의 세 왕조가 탄생하였다. 류큐의 ‘삼산시대’ 또는‘삼국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삼국 중에는 오키나와 섬 가운데 위치한 중산왕국의 국력이 최강이었고 산북왕국이 최약체였다. 류큐의 삼국시대에는 류큐 군도 북부의 아마미제도와 남부의 사키시마제도는 미개한 상태였다.

◇ 삼국(삼산)시대의 류큐왕국. 출처 http://image.baidu.com/

1372년 명태조 주원장은 양재(楊載)를 류큐의 삼국에 파견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류큐는 푸젠(福建)지방에 거주하는 36개 성(姓)씨의 선박제조 전문기술자들을 받아들였다.

1406년 중산왕 찰도(察度)의 왕세자 무녕(武寧)은 재상 파지(巴志)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 파지는 1416년에는 산북왕국을, 1429년에는 산남왕국을 차례로 정복하여 삼국을 통일하고 슈리(首里)성을 수도로 정했다. 조선의 세종대왕 시절에 해당하는 1430년, 명나라 선종은 파지에게 상(尙)씨를 하사하여 그를 중산국왕으로 책봉하였다. 역사는 상파지를 ‘제1 상씨왕조의 개창자’로 부른다.

제7대 상덕(尙德)왕은 쿠메지마, 도쿠노지마 등 오키나와 주변의 열도를 정복하여 세력을 확장하였으나 1469년에 발생한 궁정 쿠테타에 의해 참살당하였다. 이듬해 어쇄측관(御锁侧官·지금의 재무부 장관)에서 왕으로 추대된 금원(金圆)은 왕세자의 신분으로 명나라에 부친상을 입었다고 보고하였다. 1472년 명나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금원을 상원(尙圓)으로 성을 바꿔 부르고 그를 국왕으로 책봉하였다. 류큐왕국사의 ‘제2 상씨왕조’가 개창된 것이다.

제3대 상진(尙眞)왕의 재위기간(1478~1525)은 류큐의 황금시기였다. 상진왕은 북으로는 토카라 열도, 남으로는 미야코와 아에야마 열도를 정복하여 류큐 군도 전역을 장악하였다. 또한 상진왕은 류큐의 품관제도, 신관제도, 조세제도 등을 정비하고, 순장의 악습을 폐지하고, 불교를 국교로 삼고, 류큐 군도의 족장들을 슈리성에 거주하게 하고 사인(私人)의 무기소지를 금지하는 등 류큐의 정치경제체제를 확립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상의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을 한 몸에 겸했다고나 할까. 상진왕은 동아시아 해상왕국 류큐의 최고 명군이었다.

류큐는 중국과 일본,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과의 중개무역을 통해 국부를 축적하고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당시 류큐 무역선의 활동범위는 조선의 부산포, 중국의 푸젠과 광둥, 일본의 규슈, 안남(베트남), 샴(타이), 자바(인도네시아), 루손(필리핀), 말라타(말레이시아) 등 동아시아 전역의 해외무역을 주름잡게 되었다.

특히 류큐는 명나라에 2년에 1회씩의 조공무역을 하였는데 이는 명나라에 매년 4회씩의 조공무역을 행한 조선 다음으로 잦은 횟수이다. 류큐는 조공을 바친 대가로 중국과의 무역독점권을 획득하였으며 중국의 상품을 수입하여 조선과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수출하였고 조선과 일본, 동남아시아의 물산을 수입하여 명나라에 수출함으로써 해상중개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황금시대를 구가하였다.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3국의 해양의 요충지에 위치한 류큐는 지정학적 우위를 살려 활발한 무역을 전개함으로써 찬란한 번영을 누렸다.

◇ 류큐왕국의 슈리궁전(오키나와 소재). 출처 http://wapedia.mobi/zh/%E7%90%89%E7%90%83%E5%9B%BD?t=2.7


조선을 사랑하였던 만국의 가교, 류큐왕국

지금 오키나와 현립 박물관에는 슈리 왕궁의 정전에 걸려있던‘류큐만국진량(琉球萬國津梁·류큐 만국의 가교)’동종이 전시되어 있다. 거기에는 이런 명문이 세겨 있다.

“류큐는 남해에 있는 나라로 삼한(三韓·한국)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大明·중국)과 밀접한 보차(輔車·광대뼈와 턱)관계에 있으면서 일역(日域·일본)과도 떨어질 수 없는 순치(脣齒· 입술과 치아) 관계이다. 류큐는 이 한가운데 솟아난 봉래도(蓬萊島·낙원)이다. 선박을 항행하여 만국의 가교가 되고 외국의 산물과 보배는 온 나라에 가득하다.(琉球国者,南海胜地而钟三韩之秀,以大明为辅车,以日域为唇齿,在此二中间涌出之蓬莱岛也,以舟楫为万国之津梁,异产至宝)”

동종의 명문이 한-중-일 동북아 삼국 중에서도 조선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 데에서 류큐는 다른 나라를 좀처럼 침략할 줄 모르는 평화애호국인 조선에 대하여 동병상련이라 할까, 각별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류큐가 조선보다 양국간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 개국 원년 1392년, 류큐 국왕의 명을 받을 공식 사절단이 조선을 예방하여 태조 이성계를 알현하였다. 태조는 사절단대표에게 정5품, 수행원들에게 정6품에 준하는 대우를 베풀었다. 류큐는 조선을 최초로 승인한 국가인 셈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류큐 공식 사절단의 조선방문은 40회인데 반하여 조선 사절단의 류큐방문은 3회로 기록하고 있다. 그 밖에도 양국의 각종 사료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거의 전 기간에 걸쳐 류큐와의 밀접한 관계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재위기간 1469~1494)은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인쇄본을 류큐 왕국에 선물을 보내기도 하였다. 슈리성 아래 있는 연못가의 한 건물이 대장경을 보관하던 장경판고였다.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학자중의 한 사람인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서 '류큐는 땅은 좁고 인구가 많기 때문에 바다에 배를 타고 다니며 무역하는 것으로 생업을 삼는다. 서쪽으로는 남만(동남아시아)및 중국과 통하고, 동으로는 일본 및 우리나라와 통하고 있다. 일본과 남만의 상선들도 류큐 수도에 모여든다. 류큐 백성들은 수도 주변에 점포를 설치하고 무역을 한다'고 서술하였다.

또한 허균의 <홍길동>은 실존인물이며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소개되는 류큐 남서부 아에야마(八重山) 민란의 주인공이며 민중 영웅인 적봉(赤峰) 홍(洪)가와라와 동일한 인물임을 주장하는 학설마저 있다(설성경, <홍길동전의 비밀>, 서울대학교출판부,2004년). 설성경 교수는 홍길동은 연산군에 의해 비밀리에 석방되었으며 홍길동이 진출한 율도국이 바로 지금의 류큐라는 논지를 펼치고 있다.

예로부터 조선과 류큐가 이처럼 밀접한 교류를 맺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양국의 뛰어난 해상운송능력과 쿠로시오해류 덕분이었다. 계절풍을 타고 동남아로 남하하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류큐에 도착할 수 있고, 조난당한 조선인들이 류큐에 많이 표착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게다가 뛰어난 해상왕국이었던 신라와 고려의 전통을 이어받은 조선이 동남아 항해의 출발점이 될 류큐에 주목을 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 것이다.

조선과의 무역에 류큐는 적극적이었다. 중국과 동남아 각국의 물산을 매매하는 시장으로서도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부산포로 향하는 류큐 무역선의 항해 루트는 ‘왜구’가 출몰하는 바다였다. 류큐는 15세기 말엽에 방침을 바꿔 조선에 직접 무역선을 파견하지 않고 규슈와 대마도의 상인을 매개로 한 간접 무역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왜구들이 류큐의 사신이라고 사칭하며 조선과의 무역을 요구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리하여 조선-류큐 사이의 직접 무역은 빈껍데기만 남고, 양자 사이에 왜구가 끼어드는 형태가 되었다.

◇ 류큐만국진량종9키나와 현립박물관 소재). 출처 http://image.baidu.com/

‘아빠 나라, 중국, 엄마 나라, 일본’

류큐의 황금시기는 1609년 도쿠가와 막부의 사주를 받은 사스마번(지금의 가고시마현, 2011.1.26-2.1. 화산이 폭발적 분화를 일으키고 있는 지역)이 류큐를 침략함으로써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1609년 3월 22일 사스마 번주 시마즈는 3천여 병사를 100여척의 함선에 싣고 가와야마(川山)항을 출항하였다. 4월 1일 오키나와에 상륙하고 4월 5일 슈리성을 함락하였다.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 속에서 무사 안일의 단잠을 자고 있던 류큐는 일본의 무력침략에 저항다운 저항을 못해보고 불과 닷새 만에 정복되어 버렸다. 5월 17일 사스마군은 상녕왕과 왕자와 관리들 백 여명을 포로로 잡아 사스마 번으로 끌고 갔다. 사스마 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할 당시 류큐에 군량징발 요구를 하였는데 류큐가 이를 거부하자 사스마번이 대신 지불한 빚을 갚기 위한 것이라고 침략의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그것은 구실일 뿐이고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단기적으로는 류큐를 정벌해서 얻은 이익으로 사스마가 임진왜란과 일본내전에 참전시에 들어갔던 군비와 손실을 충당하려는 것이었고 장기적으로는 중국과 류큐 사이의 무역이익을 갈취하려는 것이었다.

상녕왕은 사스마 번에 끌려간지 2년 만에 돌아와 복위되었지만 그때부터 류큐는 왕년의 해상독립왕국 다운 면모는 사라지게 되었다. 류큐의 역사서 <구양>(球陽)은 '사스마 번은 류큐에 재번봉행(在番奉行)이라는 감독관을 슈리성에 주재하게끔 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농지를 측량하고 감독관 휘하에게 분배해주고, 사스마번에 막대한 세금과 공물을 바칠 것과 사스마의 허가없이 제3국과의 무역을 금하도록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사스마번의 괴뢰국으로 전락하게 된 류큐는 1693년 토카라지마 등 류큐 북부 5개 섬을 사스마번에 할양하였다. 현재 류큐 군도 최북단의 섬들인 토카라 제도의 행정구역이 오키나와현이 아니라 가고시마현에 속하게 된 사연이기도 하다.

결국 류큐는 ‘아빠 나라 중국’, ‘엄마 나라 일본’을 옹알거려야 연명할 수 있는 병든 병아리처럼 쇠약한 이중속국이 되어버렸다. 중국은 책봉체제하에서 류큐를 상징적으로만 지배했으나 경제적으로 수탈하지 않았던 반면, 일본은 사스마번을 통하여 가혹한 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하였으며 경제적으로 류큐 주민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사스마번은 류큐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네지 조수(羽地朝秀 1617~1676)를 비롯한 관변학자들에 명하여 류큐와 일본이 고대로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으며 류큐인은 일본인과 동일한 대화민족이라는 논조, 즉 일본과 류큐는 조상이 같다는 ‘일유동조론(日琉同祖論)’에 근거한 류큐 국사 <중산세감>(中山世鑑)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사스마번은 중국 몰래 류큐의 무역이익을 독점하기 위하여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나라 황제가 파견한 ‘천사(天使·천자의 사절)’가 류큐왕을 책봉하기 위하여 류큐로 올 때마다 그 섬들이 일본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흔적을 감추도록 하였다. 청나라는 말엽에 이르기까지도 류큐가 오래전에 이중 속국이 되어버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를테면 1847년 청나라 정부는 류큐의 마지막 왕 상태(尙泰)를 책봉하기 위하여 조신(趙信)을 책봉사로 파견하였는데 조신이 보고한 <속유구국지략>에는 일본이 류큐를 실제로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이 나타나 있다.

◇ 류큐국기(1854-1879). 출처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Flag_of_the_Ryukyu_Kingdom.svg?uselang=zh

페리제독과 미-일, 미-류 화친조약

1854년 3월, 미국의 페리Matthew C. Perry)제독이 가나자와에 흑선 함대를 정박시켜놓고 에도 막부와의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류큐의 나하 항을 개방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때 일본 측은 ‘류큐는 아주 멀리 떨어진 독립국가로서 일본은 나하 항의 개방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둘러대었다.

그러자 1854년 7월 페리제독은 직접 류큐의 나하항으로 예의 흑선 함대를 몰고 왔다. 결국 류큐 정부는 페리 제독과 나하항을 개항한다는 내용의 영문과 중문으로 각각 기재된 ‘미-류(琉) 화친조약’을 체결하였다. 류큐는 완전한 독립국의 자격으로서 미합중국정부와 국제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류큐는 역시 완전한 독립국의 자격으로서 1855년에 프랑스, 1859년에 네덜란드, 1860년에 이탈리아와의 수호조약을 연이어 체결하였다.

류큐가 체결한 국제조약들에 어떠한 이의표시도 하지 않던 일본은 1871년 청나라에 대만에서의 류큐인 살해사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면서 류큐인은 일본인이고 류큐는 일본영토라고 공언하였다. 1874년, 메이지 유신정권의 우이를 쥐고 있던 오쿠보 도시미치는 메이지정부에 외교수단만으로 류큐의 병탄이 불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프랑스 국적 법률고문 바나쌍의 자문을 받은 오쿠보는 만국공법(국제법)상의 조약은 얼마든지 왜곡 가능한, 즉 해석하기 나름인 종잇조각일 뿐이며, 무력에 의해서만 류큐의 완전한 정복이 가능하다고 역설하였다. 오쿠보의 변설은 메이지정부의 제국주의 대외팽창노선의 일환으로 최우선 채택되었다. 류큐는 일본제국주의의 첫 먹잇감이 된 것이다.

1875년 초, 오쿠보는 류큐의 3정승격인 삼사관들을 도쿄로 소환하여 류큐에 대한 천황의 처분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오쿠보는 삼사관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류큐의 정치제도를 메이지 유신의 폐번치현식으로 뜯어고칠 것과 청나라에 조공을 금하고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삼사관들은 오쿠보의 요구는 류큐에 대한 자살명령이나 다름없다고 판단, 즉답을 피하고 류큐로 돌아가 류큐왕에게 보고한 후에 왕의 재가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삼사관들의 보고를 접수하는 자리에서 류큐왕은 시일을 최대한 끄는 지연책을 쓰는 한편 청나라에 비밀리에 조공을 계속 바칠 것을 주문하였다. 류큐왕은 청나라와 조공관계를 지속해야만 장래 류큐가 청나라의 원조를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 일본과 류큐를 개항시켜 각각 화친조약을 체결한 페리제독.


일제의 첫 먹잇감이 된 류큐, 30년 후 대한제국

일본은 류큐의 이러한 지연책을 그냥 두지 않았다. 1875년 7월, 일본은 내무대신 마쓰다 미츠유키를 류큐에 파견하여 이른바 ‘마쓰다 10개조항’을 반포하게 하였다.

1. 2년에 1회 청에 조공을 바치는 것과 청 황제 즉위식에 경축사절을 파견하는 것을 금함.
2. 류큐 번왕의 즉위시에 청의 책봉을 받는 것을 금함
3. 류큐는 메이지의 연호를 따라야 하고 일본의 의례를 받을 것
4. 형법은 일본이 정하는 바대로 시행하여야 하며 2-3명의 전문가를 도쿄에 파견하여 학습할 것
5. 류큐번의 내정을 개혁할 것, 류큐 번왕은 1등관으로 보하고 관제를 개정하여 칙임, 진임, 판임 및 등외관의 명목을 정할 것

여기에다 마쓰다는 자신의 설명서를 덧붙여 여러 조항을 증가시켰다.

6. 청의 연호를 따른 것을 금한다.
7. 류큐 번왕은 반드시 직접 정책을 집행하여야 하고 섭정할 수 없다.
8. 중국 푸저우(福州)에 있는 류큐 영사관을 폐지하고 류큐의 상업을 일본 영사관의 관할하에 둔다.
9. 류큐 번왕 자신이 직접 도쿄로 와서 메이지 천황의 은혜에 감사를 표한다.
10. 일본은 류큐 번내에 일본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다.

‘마쓰다 10개 조항’이 공포되자 류큐의 각지 주민들은 격분하여 시위와 폭동을 일으켰다. 상태왕은 충격에 빠져 며칠간 실어증에 시달려야 했다. 류큐측 삼사관과 일본측 마쓰다간의 논쟁의 귀결점은 류큐가 계속 중국과 일본의 이중종속국 지위를 유지하는가 아닌가의 문제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의 훈령을 받고 온 마쓰다측이 물러날 리 없었으며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류큐 측은 청의 책봉를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은 중-일 양국을 부모의 나라로 여겨온 류큐왕국의 기틀을 갑작스레 변경시킬 수 없는 것이라 하며 난색을 표하였다. 연호에 관해서도 대내적으로는 일본연호를,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해 온 것이 관례이므로 갑자기 고칠 수는 없는 일이며, 류큐왕의 도쿄행도 왕자가 대행토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류큐의 지배층은 마쓰다 10개조항의 수용은 곧 그들의 지배체제를 일거에 붕괴시키는, 국가존망의 일대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반발하였다. 류큐의 평민층의 민심은 더욱 흉흉하였다. 류큐 평민들은 각급학교에 운집하여 일본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할 것을 촉구하는 대일본규탄대회를 개최하였다. 특히 슈리성의 민중들은 마쓰다가 머무는 숙소 앞에 시위를 벌이고 즉각 류큐땅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였다.

2개월에 걸친 지리한 협상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성과를 보지 못한 마쓰다는 일단 빈손으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마쓰다가 귀국선에 오르자마자 류큐왕은 도쿄에 친서를 휴대한 특사단을 보낸다.

“류큐와 중국은 5백여 년에 걸쳐 서로 인연을 맺어 왔으며 신의로 연결되어 있어 그 인연을 끊기란 실로 어려운 일은 줄로 알며, 더구나 중국식 직제와 연호 및 의례 등을 일거에 폐지하고 귀 일본정부를 따르는 일이라는 실로 곤란한 줄 아뢰오.”

류큐의 특사들은 메이지 정권의 최고 실세 오쿠보를 만난 자리에서 만약 일본이 청나라와 직접 교섭하여 ‘마쓰다 10개조항’을 청나라가 승인한다면 류큐도 일본의 요구에 따를 것이라고 마지노선을 제시하였다. 그러자 오쿠보는 류큐가 일본의 판도라는 사실은 이미 청나라가 명시적 묵시적으로 승인하였는바, 류큐는 순전히 일본 내정문제라고 선을 분명히 그었다.

한편으로 일본은 류큐가 청나라에 직접 구원을 요청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24세에 미국공사가 되어 이름을 떨친 외교관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1847-1889)의 책략을 받아들였다. 즉 모든 류큐 주민이 청나라에 가려면 반드시 우선 일본정부에 신청하여 여행허가를 얻어야 하며, 사사로이 청나라를 여행하는 자는 극형으로 다스린다는 것이었다.

그해 일본정부는 류큐에 대한 관리를 외무성에서 내무부로 전환하는 등 류큐의 외교권과 사법권을 박탈하여 완전한 류큐병탄의 길을 닦아 놓았다. 그로부터 30년 후 1905년, 일본제국은 대한제국을 강박하여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을 체결케 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주요참고문헌>

강효백, “좁은 중국, 넓은 일본”,[동양스승,서양제자], 서울: 예전사, 1992.
설성경, [홍길동전의 비밀] 서울: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아라사키 모리테루 저, 김경자 역, “또 하나의 일본; 오키나와 이야기” [역사비평] 1988.
高良創吉, [琉球王國],東京: 岩波書店, 1993.
謝必震, 胡新, [中琉關係史料與硏究], 北京: 海軍出版社,2010.
高之國,張海文, 『海洋國策硏究文集』, 北京: 海軍出版社,2007.
Hook, Glenn D.and Richard Siddle.2003. "Introduction: Japan? Structure and Subjectivity in Okinawa" Glenn D. Hook and Richard Siddle eds. Japan and Okinawa: Structure and Subjectivity.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Curzon.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일본인으론 못산다" 그들도 이준처럼 자결했다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⑥-30년 터울, 류큐와 조선의 병탄사>
류큐왕 밀사로 청 이홍장 찾아 파병요청…사실 알려지자 일본 병력급파

 

 1876년 일본정부는 모든 류큐 주민의 중국여행을 엄금하였다. 그해 12월 어느 날 밤, 오키나와 나하항의 후미진 부두 어귀에는 작은 어선 한 척이 닻을 올렸다. 어선에는 초라한 어부행색의 ‘특별한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3인의 밀사, 류큐 마지막 왕의 밀명을 받은 향덕굉(向德宏), 임세공(林世功), 채대정(蔡戴程)이었다.

어선의 항로는 희한했다. 이렇다 할 풍랑도 없었는데 처음에는 북동쪽 일본으로 향했다가 닷새쯤 되던 날, 선수를 반대편으로 슬그머니 돌려 남서쪽 중국으로 한 열흘간 항행하였다. 그렇게 어선은 닷새는 북동쪽으로, 열흘은 남서쪽으로 항행하길 반복했다.

◇ 삼국(삼산)시대의 류큐왕국. 출처 http://image.baidu.com/


어선은 이듬해, 1877년 4월에야 푸젠(福健·타이완의 맞은편에 위치한 중국 남동부의 성) 해안에 상륙하였다. 3인의 밀사는 하선하자마자 곧장 푸젠성 순무(巡撫·성 최고행정책임자)에게 류큐왕의 친서를 올렸다. 거기에는 류큐가 일본의 사실상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실정은 누락한 채 다만 일본이 류큐가 청나라에의 조공을 방해하고 있으니 청나라가 일본에 압력을 가해달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푸젠성 순무는 6월 14일 마땅히 류큐를 구해주어야 한다는 의견서를 첨부하여 베이징 조정에 상신하였다.

류큐왕의 밀서를 받은 청나라 조정은 난감했다. 당시 청나라는 자국의 방위에도 힘겨웠다. 북으로는 러시아와의 영토갈등으로, 남으로는 월남문제로 인한 프랑스와의 분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홍장을 수뇌로 한 양무파들은 평화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강을 꾀하려 하였다.

초기 양무파의 외교구상의 골간은 ‘연일항아(聯日抗俄)’ 즉 ‘일본과 연합하여 러시아의 남침에 대항하자’는 것이었다. 이홍장은 미약한 중국의 해군력으로 류큐를 구하려는 것은 무모한 행위일 뿐만 아니라 동중국해 바다 건너 조그만 섬들보다는 광활한 북쪽과 남쪽의 영토를 지키는 것이 훨씬 시급한 일이라고 판단하였다. 결국 청정부는 류큐에 원군을 파견하지 않기로 최종결정을 내렸다.

철석같이 믿었던 종주국의 ‘류큐 포기’라는 비보를 전해들은 향덕굉과 임세공은 배신감과 절망감에 치를 떨었다. 두 밀사는 머리를 삭발하고 탁발승으로 변장, 텐진을 향해 떠났다. 텐진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그들은 이홍장의 관저 대문 앞에 꿇어 앉아 혈서를 썼다.

류큐 신민들은 살아서도 일본인으로 살 수 없고, 죽어서도 일본의 귀신이 될 수 없다. 대청제국은 조속히 출병하여 류큐를 구해 달라.”

두 밀사는 며칠을 단식하며 빈사의 조국을 구해 달라고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간혹 행인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수군거리며 지켜볼 뿐, 굳게 닫힌 이홍장 관저의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던 일주일째, 임세공은 남동쪽 머나먼 류큐 왕궁을 향해 세 번 절한 후 비수로 심장을 찔러 자결하였다.

류큐왕이 사신을 청나라에 비밀리에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한 사실을 알게 된 일본 정부는 최후의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입안에 넣은 눈깔사탕 같은 섬나라를 목구멍 속으로 삼켜 완전한 자기 것으로 삭혀버려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1879년 3월 27일, 일본정부는 내무대신 마쓰다에게 500여 명의 병력을 딸려 류큐로 급파했다. 일본군은 도성인 슈리성을 무력 점령하고 4월 4일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둔다는 포고령을 전국에 포고하였다. 연이어 류큐의 마지막 왕 상태와 왕자들을 도쿄로 압송하였다.

1875년 류큐가 ‘마쓰다 10개항’으로 사실상 일본에 합병된 지 30년이 되던 해, 1905년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의 사실상 식민지가 되었다.

1877년 류큐 상태왕의 3인의 밀사가 실패한지 역시 30년만인 1907년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헤이그에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3인의 밀사를 파견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일제의 무력적 침략행위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국제적인 압력으로 이를 막아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준은 현지에서 분사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일제에 역이용 당하여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류큐의 청나라 밀사 사건 3년 만에 일본은 류큐를 완전히 병탄하였던 것처럼, 헤이그 밀사 사건 3년 만에 일본은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한반도를 병합하여 버렸다.

이처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류큐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공간(지리)에서 되풀이된 시간(역사)의 반복성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만 그 반복성의 색조가 지나치게 어두워 슬프다.


* 뱀의 발(사족): 필자가 역사의 반복성을 발굴, 비교 고찰하려는 목적은 21세기 태평양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를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위에서 점검해보고, 밝은 미래를 위한 지혜로운 선택이 무엇인가를 성찰하고 교훈을 얻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땅은 쓸모없고 바다는 막혀 중국은 비좁다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⑦-좁은 중국의 족쇄, 류큐>
대륙 정책만 고집 외면했던 태평양 이제는 팽창주의 발톱 드러내

 

 

“단 한 점의 녹색도 볼 수 없었다. 오로지 회색과 암갈색, 암황색 뿐.”

나는 실크로드 기행을 떠나는 중이었다. 중국 간쑤(甘肅)성 중심도시 란저우(蘭州) 공항에서 둔황의 모가오(莫高)석굴로 날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중국 지방의 중소도시를 연결하는 여객기는 저속으로, 저공비행하는 습성을 알고 있는 나는 일부러 창가쪽에 자리를 잡았다.

새가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전체를 한눈으로 관측하는, 즉 조감(鳥瞰)의 쾌감을 맛보기 위해서였다. 회색의 사막이 망망대해처럼 끝없이 펼쳐졌다. 무(無)를 연상시키는 회색이 주는 무료함의 모래사막지대를 건넜다 싶더니 암갈색의 암석사막지대가 전개되었다. 간간이 모래사막과 암석사막사이에 풍화된 암황색의 잔구가 섬처럼 스쳐 지나갔다.

청량음료수를 몇 잔씩 들이켰다. 갈증을 다스릴 수 없었다. 뭔지 모를 그 목마름의 원천은 뭘까. 나는 물줄기나 오아시스, 초원이나 산림지역을 굽어 살피고 싶었던 것이다. 녹색을 향한 갈증이었다. 녹색을 만나면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무려 세 시간의 짧지 않는 비행을 마친 여객기가 둔황공황에 나래를 접을 때까지 단 한 점의 녹색도 볼 수 없었다.

지도를 살펴보니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란저우- 둔황 간 약 1500㎞의 비행항로 주변지역에는 초원이나 산림은커녕 단 한 줄기의 내천이나 한 방울의 오아시스도 없는 이른바 ‘무인지대’였다.

◇ 중국 간쑤성의 고비(戈壁; 암석사막). 출처: http://image.baidu.com

우리가 흔히 고유명사로 알고 있는 ‘고비 사막'(Gobi Desert)의 ‘고비'(戈壁 중국어 발음으로 거비)는 중국에서는 사막의 일종인 보통명사로 사용된다. 고비란 원래 몽골어로 ‘풀이 잘 자라지 않는 거친 땅’이란 의미로서, 모래땅이란 뜻은 내포되어 있지 않다. 중국에서 고비는 대부분의 지역이 암석사막을 이루어 모래사막으로 된 지역은 매우 적은 지형을 가리킨다.

국토면적이 넓어 별에별 지형이 많은 중국에서는 사막지역도 크게 넷으로 구분된다. 모래사막의‘사막’, 암석사막의‘고비’, 풍화된 건조한 구릉의‘풍화잔구(風化殘丘)’, 사막화가 진행중인 ‘사막화지역’ 등이다. 이러한 사막지역의 총면적은 2008년 현재 198.24만㎢로 중국 전체면적의 20.6%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면적(남한 면적의 약 20배)이다.

설상가상으로 근래 중국의 사막화상황은 개선되기는커녕 악화일로에 있다. 1980년대는 매년 제주도 넓이만 한 약 2천㎢의 사막화가 진행되더니 2000년대 들어와서는 충청북도 면적만한 7천여 ㎢의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비단 사막뿐만이 아니다. 아래 <중국지형도>를 살펴보라. 시장(西藏 티벳)과 칭하이(靑海)의 대부분, 스촨(四川)과 신장(新疆), 간쑤 일부지역은 보통 사람이 산소통없이는 호흡하기조차 곤란한 해발 3~7천m이상의 고산지대(중국 전체 면적의 약 5분의 1)이다.

중국은 저 남미대륙의 띠처럼 긴 칠레가 아니다. 동부해안지역의 번화한 도시가 중국대륙의 언뜻 기름지게 보이는 뱃가죽이라면 중서부 내륙의 피폐한 농촌은 아직도 간고함을 면치 못하고 있는 중국의 뱃속이다. 내륙의 보통사람들에게는 아직 의식주가 아닌 식의주가 통용되고 있는 나라가 중국이다.

사람들이 가장 착각하고 있는 것은 중국은 땅도 넓고 물자도 풍부하다는 생각이다. 중국은 넓지만 비좁다. 한반도의 44배, 남한영토보다 96배나 넓은 960만㎢의 영토면적, 세계 3위의 중국은 얼핏 보면 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국 땅은 13억 인구를 먹여살릴 만큼 물자가 풍부하지 않고, 특히 중국의 바다는 일본보다도 좁다. 미국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80%를 차지하나 중국에서 경작할 수 있는 땅은 불과 15%밖에 되지 않는다. 석유나 철광 등 지하자원도 미국이나 러시아의 20~30%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은 세계 경지가능 총면적 중 50분의 1을 점유할 뿐이다. 그런 중국이 인류의 5분의 1을 굶기지 않고 먹여 살린다는 것은 참 용하다. 중국인이 생활하기에 적합한 생존적지는 좁아 동부의 평야지대에 인구가 밀집해 있다. 상하이시의 도시지역만 하더라도 서울시의 8배 인구밀도로 1㎢당 약 4만명이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세계 5분의 1 인구가 세계의 50분의 1의 경작지에서 세계의 생활하기 적합한 생존적지의 7%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제아무리 중국의 힘이 커진다손 치더라도 지정학적 특성상 사막이나 고원이 대부분인 서쪽으로 나아가 보아야 별 볼이 없다. 결국 현대중국의 팽창욕구 주력방향은 동쪽의 바다로 쏠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중국지형도. 출처: 바이두 http://image.baidu.com


돌아누운 태평양

바다는 옆으로 퍼지기를 좋아하고 늘 움직인다. 바다는 자기확대를 좋아하고 자기 한정을 싫어한다. 바다는 도로라고는 따로 없고 바다 자체가 누구나 통할 수 있는 길이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마저도 경계선을 모르고 살고 있지 않은가. 바다는 활동하기 좋아하는 메신저이기도 하다. 바다는 이 해안 저 해안에 부딪쳐 보기도 하고, 세계의 흐르는 물을 다 안아보는 것이다. 바다는 개방주의자요, 세계주의자인 것이다.

헤겔은 ‘바다는 정복과 무역을 위해 인류를 부른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바다의 여왕 태평양을 바로 곁에 두고서도, 그 여왕이 부르는 노래 ‘자유와 무역’을 중국인들은 악녀의 유혹으로 알았을까? 중국인의 눈에는 뭍이나 대륙만 보였지 바다는 보이지 않았나 보다.

아담 스미스는 1776년에 유명한 국부론을 발표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한 나라의 침체는 해외무역을 중시하지 않는데 그 원인이 있으며, 쇄국은 반드시 자살로 향하게 된다'고 했다. 인류에게 있어 15세기는 매우 중요한 전환기가 되었다. 인류는 뭍으로부터 바다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바다는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을 막론하고 뭍위에 사는 모든 인류들을 향해 넓은 가슴을 활짝 펼쳤다.

이 중요한 시기에 하필 명태조 주원장은 항해 금지령과 해안 봉쇄령을 반포했다. 그는 역대 중국왕조 창업자가 으레 그러하듯, 홍건적의 졸병으로서 두각을 나타내다가 세계 최대 최강의 대제국이었던 몽골의 원을 몰아내고 다시 한족 중심의 중국을 건설했다. 국가의 정치이념은 관방적 유가사상과 쇄국정책으로 유럽과 교역을 차단하는 대신 중국대륙을 관통하는 대운하의 완성을 이루었다. 이로 인하여 해안을 통해 실어 나르던 공물을 해적들로부터 지키던 당시 세계 최강의 해군을 해체시켰다.

중국은 거대한 영토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곡식과 물건만으로도 철저하게 자급자족이 이루어졌고 또한 강력한 전제적 정치력을 행사하기 위해, 무역을 통해 번 많은 돈을 가지고 세력을 행사하던 지방 토호들을 제압하여 외국과의 교역을 단절하게 된다.

이와 같은 ‘금해(禁海)’정책은 중국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고, 사회의 분업과 상품경제의 발전 및 자본주의 싹의 성장을 가로막은, 중국사에 있어서 가장 어리석은 자충수였다. 중국은 아시아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자 태평양을 누빌 수 있었던 역사적 선택의 좋은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오히려 태양을 다시 떠올리기 어렵게 태평양 연안에다 만리장성 아닌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리고 돼지 앞에 진주라는 말이 연상되듯, 류큐라는 진주알 140여개를 일본에 고스란히 넘겨 주고 말았다. 중국과 태평양을 잇는 가교인 류큐를 중국은 바보처럼 자신이 꼰 새끼줄로 자신을 묶어 버렸다. 위대한 중국의 시대는 끝났다. 중국은 태평양을 영영 잃고 만 것이다. 태평양은 바다중의 바다요, 바다중의 황제이다. 바다는 본래 모든 생명의 고향이다. 지국의 돌변 속에서 일찍이 바다는 인류조상의 생명을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듯 보호하고 키워주었다. 그런 어머니의 바다. 태평양을 중국인은 외면하였다. 태평양 역시 중국을 외면하고 돌아누웠다.

그런데 오늘날, 중국이 미국과 함께 세계를 주도하는 명실상부한 G2가 되려면 미국과 함께 태평양을 반분해야 하며, 우선 중국이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을 봉쇄하는 철책 기능을 하고 있는 류큐체인을 돌파해야 하는 일이 급선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인가. 지금 중국은 스스로 버리다시피했던 류큐를, 이미 130여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굳어진 류큐군도 140개 섬과 해역을 몽땅 돌려달라고 한다.

힘이 좀 세졌다고 객기를 부리는 말로 여기며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문제의 심각성은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기 시작하는데 있다. 개혁개방 초기 주로 국제무역과 경제관계를 통한 소프트 파워를 키워왔던 중국이 이제는 류큐 해역에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는 등 노골적인 무력도발을 감행하고 있다. 21세기 중화제국, 그 팽창주의의 야욕의 발톱이 류큐 해역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적나라하게.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조공을 못한 일본은 아시아의 왕따였다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⑧-그랜트의 류큐 3분안>
이홍장 만난 그랜트 "류큐로 인해 천하의 패권은 일본이 쥔다”

 

1879년 4월 4일은 류큐 왕국이 숨을 거둔 날이자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다시 태어난 날이다. 그날로부터 달포 반쯤 지난 뒤, 5월 27일 미국의 제18대 대통령을 역임한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Ulysses Simson Grant, 1822 ~ 1885, 미국남북전쟁 때의 북군 총사령관, 대통령 재임기간 1869~1877)는 중국대륙의 텐진(天津)에 첫 걸음을 내디뎠다.

고향 오하이오에서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던 그랜트는 일본의 류큐병탄 소식을 접하자마자 샌프란시스코행 미대륙횡단 열차를 잡아탔다. 그는 태평양과 아시아로 향하는 관문인 아름다운 샌프란시스코에서 머뭇거리지 않았다. 곧장 항구로 달려가 요코하마 경유 텐진행 태평양횡단 여객선에 노구를 실었다.

미대륙횡단열차에 이은 태평양횡단여객선 40여일의 긴 여정 끝에 텐진항에 도착한 그랜트는 여독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 배에서 내린 다음날 곧바로 청조정의 실세인 이홍장과 만나고 5월 30일에는 베이징으로 가서 공친왕을 예방하였다. 6월 12일 다시 텐진으로 돌아온 그랜트는 수행원 융(J.R. Young)과 부영사 페식(W.N. Pethic)을 대동하고 이홍장의 관저를 방문하였다.

◇ 전 미국대통령 그랜트와 청나라 실권자 이홍장, 1879. 6. 12. 텐진.


이처럼 그랜트의 휘황한 동선(動線)에서 필자는 철인3종(바다수영, 사이클, 마라톤을 한사람이 쉬지 않고 실시하는 인간체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경기)이 오버랩 된다. 그 무엇이 전직 미국 대통령으로 하여금 마치 철인3종에 임하는 선수처럼 초강행군을 불사하게 만들었을까?

서부개척이 완료될 무렵 당시 미국 지도층은 태평양을 미국의‘내륙호’로 보았다. 그랜트는 일본의 류큐 병탄은 아시아의 힘의 균형이 중국에서 일본에로의 이동을 의미한다고 내다보았다. 그리하여 향후 내륙호 서편에서 미국이 차지할 몫을 일본이 선점하도록 방관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본인은 미합중국의 현직 대통령 자격이 아니라 은퇴한 민간인의 신분으로 귀국을 방문했다. 류큐 처리 문제를 대인과 상의할 목적으로 태평양을 건너오게 되었다.”

동양의 노대국과 서양의 신흥강대국의 전 현직 정상이 처음으로 마주한 역사적 회담의 키워드는 다름 아닌 ‘류큐 ’였다.

“본 대청제국은 골치 아픈 여타 국내외문제들 때문에 류큐에는 미처 신경 쓸 여력이 없었는데......그 섬들이 귀국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류큐군도는 미합중국의 국익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비록 류큐는 작은 섬들로 구성 되어있지만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은 실로 크다. 류큐가 일본의 손에 들어가면 천하의 패권은 귀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 원래 왜구의 소굴이나 매한가지인 섬나라 일본이 작은 섬 몇 개 더 얻었다고 천하의 패권을 쥐게 된다니, 지나친 기우이다. 다만 미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류큐를 일본이 무력으로 병탄한 것은 미국의 체면을 손상한 것이다. 미국과 청국간에는 류큐해역을 통과하여 상하이로 도착하는 항로가 뚫려 있는데, 만일 청-일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하면 귀국의 상선도 순조롭게 항행할 수 없을 것 같다. 각하가 류큐문제를 해결할 묘안이 있으면 알려 달라.”

그랜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내게 좋은 묘책이 있다. 류큐군도의 북부 아마미제도는 일본에게, 류큐의 중부(오키나와)는 독립을 회복시키되 청-일이 공동 관리하고, 류큐의 남부 미야코와 아에야마 제도는 귀국이 직접 통치하는 방안이다. 이는 청-일-류큐 3자에게 모두 좋은 묘안이라고 생각한다.”

이홍장은 그랜트의 묘책이 겨우 ‘류큐 3분안’이라는 사실에 약간 까칠하게 대꾸했다.

“류큐는 원래 명나라 초엽부터 지금까지 500년 동안 조공을 바쳐온 대청제국의 속방이다. 류큐의 국왕도 대청제국의 황제가 임명(이때 통역관은 이홍장이 말한 ‘책봉’을 ‘임명’이라고 통역)하여 왔다. 류큐 군도의 모든 섬들은 종주국인 우리 대청제국에 관할권이 있다.


그랜트는 이홍장의 입에서 줄줄이 나오는 ‘조공’,‘종주국’, ‘책봉’, ‘속방’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동서양의 문화차이였다. “그럼 대청제국이 류큐왕을 임명해왔다는 말인가? 그리고 종주국은 또 무언가? 속방과 식민지의 차이점은? 무수한 의문부호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기포처럼 떠올랐다.

난감해하는 그랜트의 표정에서 이홍장은 이쯤에서 고자세에서 저자세로 내려와야겠다고 작심하였다. 일본의 문호를 열게 한 나라가 미국이고 그랜트가 비록 전직대통령이지만 일본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속방인 류큐의 단 한 개의 섬도 일본에 할양해줄 수 없는 것이 대청제국의 철칙이다. 그러나 힘이 마음을 따르지 못한다. 차선책으로 각하의 류큐3분안을 수락할 용의도 없지 않다. 각하는 귀국하는 길에 일본에 들릴 계획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측을 설득해주길 부탁한다. ”

 

이토 히로부미의 ‘류큐2분안’

이홍장의 중재요청을 수락한 그랜트는 7월 4일(미국의 103주년 독립기념일), 도쿄에 도착하였다. 7월 22일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만나 류큐 문제에 대한 중재에 나설 뜻이 있음을 표명했다. 이토오는 류큐 병합의 정당성을 극력 해명했다.

“류큐는 삼백년 동안 일본의 속국이었다. 류큐의 작은 섬들은 본래 일본 영역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류큐가 이전에 청에 조공을 바친 것은 류큐와 중국 간의 무역 형식의 일종일 뿐이지 종주국과 속국관계의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랜트는 8월 13일 이토에게는 류큐3분안을 최후의 중재안으로 제시하고, 이홍장에게는 서한을 보낸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랜트는 서한에서 “청일 양국이 화평의 정신으로써 고위관료를 특사로 파견하여 협상할 것을 바란다. 본인은 간사한 어느 나라가 귀국이 쇠약해지는 것을 틈타 야욕을 취하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청일 양국의 불화로 인하여 서양제국이 어부지리를 취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며 청일 양국이 상호 양보의 정신으로 협상 테이블에 나와 줄 것을 호소했다.

그 무렵 일본 조야에는 미국과 영국, 독일 등 서구열강이 청나라에 군함과 무기를 지원하여 류큐에 대한 군사행동을 감행하도록 부추기고 있다는 괴담이 저녁안개처럼 퍼져있었다. 이듬해 3월 이토오는 청 정부에 그랜트의 류큐3분안을 변형한 ‘류큐2분안’을 제안하였다. 즉, 류큐군도의 북부와 중부는 일본이 지배하고 류큐군도의 남부는 청이 관할하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그랜트에게 당초 류큐3분안에 근거하여 도쿄에 유폐 중인 류큐의 마지막 왕 상태에게 복위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가 오키나와의 척박한 땅으로 돌아갈 의사가 없어 하는 수 없이 ‘류큐2분안’으로 개정했다고 적당히 둘러대었다.

1880년 10월 20일, 류큐2분안을 핵심으로 하는 [류큐 수정조약 초안]이 작성되었고 이에 청의 총리아문대신 심계분(沈桂芬)과 일본측 협상대표 이토오가 서명하였다.

그 후, 청 조정은 이홍장에게 초안의 비준여부를 총괄 검토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홍장은 “일본인의 요구를 응한다면 응한 이상으로 손해를 보고, 거절하면 거절한 이상으로 보복 당하게 된다. 일본인에 대하여는 입장 표명을 최대한 늦추는 묵묵부답의 ‘무대응 지연책’이 최상책이다.”라는 요지의 보고서를 올렸다.

청 조정은 이홍장의 보고서를 채택, 초안에 서명을 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무대응 지연책은 일본의 전체 류큐군도 병탄을 저지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무대책’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무대응 지연책은 국제법상으로도 ‘묵시적 승인’으로 간주되기 십상이었다.

◇ 중화질서 - 전근대 중국적 조공질서, 동심원 구조


◇ 대동아공영권 -일제가 구상하였던 아시아 신질서, 피라미드구조. 일제시대, 일본은 자국을 정점으로, 일본이 점령하거나 식민지화한 순서대로 차등 대우하는 피라미드 구조의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구상한 바 있다.


이홍장을 비롯한 당시 청 지도층이 최소한의 해양의식과 지정학적 사고능력, 국제법적 식견만 갖
추었더라면 일본의 류큐병탄을 저지하기에는 무기력한 당시 자국의 현실을 감안하여 류큐2분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렇게 중국은 아주 간단하게, 역설적으로 국제법에 부합되게, 센카쿠를 포함한 류큐군도 남반부와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출구를 상실해버렸다. 이렇게 부활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류큐 왕국은 영영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또한 이렇게 중국을 중심으로 했던 동아시아의 전통적 조공체제는 결정적인 첫 균열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중화질서는 동심원, 대동아공영권은 피라미드

‘조공’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김에 한마디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흔히들‘조공’하면, ´상납´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공’을 사대주의의 징표라 하며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괜한 역사적 열등감에 빠져드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러나 이는 일제 식민사관에 기반한 왜곡된 역사교육이 남겨준 인식상의 오류이다. 조공은 일방적인 상납이 아니라 물물교환 형식의 정부주도형 무역이다.

국경지역에 개설된 시장에서 행해지는 변경무역이나, 민간상인에 의한 무역을 금지하고 국가에서 임명한 관납상인들에게 무역상품의 조달권을 독점하게 한 억상정책의 질곡을 뛰어넘는 거상의 활약상을 그린 소설 [상도]에서나, 맹인 홀아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인신공양물이 되어 인당수에 빠져 죽는 [심청전]에서 나오는 밀무역 등, 이러한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민간무역행태 이외에는 조공무역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한마디로 조선시대 무역형태의 주류는 조공무역이었다. 조공국에서 조공을 바치면 사대국에서는 사여(賜與)를 내린다. 사여품이 조공품보다 몇 배 많은 것이 원칙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조공을 1년에 3번 바치던 것을 1년에 4번 바칠 것을 요청했으나 명은 월남처럼 3년에 1번만 바치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명나라 멸망의 주요원인의 하나는 과도한 사여품의 방출로 인한 국고의 탕진이었다.

중국은 책봉 관계(상명하복관계가 아닌, 의례적인 외교형태)에 있는 나라에 대해서만 조공무역을 허용하였다. 중국적 조공질서의 동심원(<그림 1> 참조)안에 들어온 조선(매년3공)과 류큐(격년1공), 월남(3년1공)은 중국과 가장 밀접한 이너서클의 일원이었다.

이와 반면에 일본은 극히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동아시아 제국 중에서 특히 조선과 비교하며 중국에 조공을 바치지 않은, 중화질서의 밖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였던 유일한 나라인 것처럼 교과서에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일본이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된 것이다. 중국과의 조공무역을 하지 않더라도 일본은 왜구(일본에서는 왜구를 주로‘민간무역업자’라고 미화하여 부른다)의 눈부신 활약(?)을 위시하여 류큐를 통한 중개무역, 네덜란드와의 교역 등으로 무역수요를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과 조선, 류큐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을 주로‘왜(倭)’또는‘일역(日域)’으로 칭하여 왔다. 왜라고 부르는 밑바닥에는 일본을 왜구의 본거지로 폄하하는 어감이 배어 있었고, 일역이라 칭하는 이면에는 일본을 중국적 세계질서의 동심원내의 멤버로 함께하기에는 부적절한, ‘국가’로서의 자격에 미달하는‘지역’으로 보는 시각이 깔려있었다. 자주독립의 역사를 자부하여온 일본은 사실상, 동아시아 국가사회에서의 아웃사이더 내지 왕따였다.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한국과 류큐의 명운, 윤봉길이 갈랐다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⑨-루즈벨트와 장제스>
루스벨트의 류큐 복속 제안을 마다한 장제스의 속셈과 실책

 

요즘 중국은 과거 3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마치 300년 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시절의 대청제국 같다. 점(點)을 돌려달라는 게 아니라 선(線)과 면(面)을 통째로 삼키고 싶다고 공공연히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중국은 지금 중일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센카쿠(첨각(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만 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최근 중국 일각에서는 센카쿠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沖繩, Okinawa)를 포함한 140여개 류큐(瑠球, Ryukyu) 전체가 중국 영토라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 가고 있다. 2009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한 국제심포지엄에서는 쉬융(徐勇) 베이징대 교수를 비롯한 중국 역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돋웠다.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강압에 의한 1879년의 류큐 병탄, 2차 세계대전 후인 1972년 미국의 오키나와 반환 등은 국제법상 근거가 없으니 센카쿠는 물론, 류큐 군도내 140여개 섬과 해역 전체를 송두리째 중국에 반환해달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류큐를 중국 영토라는 주장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가 2006년 이후 다시 수십 편의 논문을 비롯한, 언론 학계의 주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중국당국은 묵인을 넘어 조장 내지 권장하고까지 있다는 동향마저 감촉되고 있다. 도대체 중국의 이런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필자 주>

영웅사관이냐?, 민중사관이냐?, 내게 칼로 두부를 자르듯 일도양단식 선택을 강요하지 말라. 택일은 불가능하다. 역사는 극소수의 영웅과 그 시대를 살아간 민중이 함께 만들어가는 합작품이다. 영웅과 민중은 상호모순 대립보다는 상호보완과 조화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시의 카이로회담, 한국과 류큐의 엇갈린 운명에 관한 대목에서는 자꾸만 영웅사관 쪽으로 고개가 기울어진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3년 11월 22일부터 27일까지 미국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영국 처칠(Winston Churchill) 수상, 중화민국 장제스(蔣介石) 총통 등 세 연합국 수뇌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전후질서를 구상하며 합의를 이루었다. 여기서 3대국은 일본의 영토제한과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제의하였고 특히 한국의 독립문제가 처음 언급된 회담으로 특징된다. 카이로 회담 결과 발표한 <카이로 선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개시된 이후로 일본이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한다.

2. 만주, 타이완, 펑후도와 같이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하여야 하고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모든 지역으로부터 축출될 것이다.

3. 한국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게 되자, 카이로 선언에 따라 일제가 통치하였던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여러 지역들은 물론 한국을 비롯한 만주, 타이완 등의 식민지는 광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류큐 왕국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잊혀진 왕국이 되어 버렸다. 사실 카이로회담은 류큐왕국이 독립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당시 연합국측은 유럽전쟁에 주력을 쏟고 있었고 아직 류큐는 미국의 점령하가 아니라 일본의 수중에 놓여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 왜 장제스는 일본의 태평양 도서의 주권박탈 기산점을 1879년이라 하지 않고 1914년이라 하였는가.

2. 왜 장제스는 류큐를 만주, 타이완, 펑후도에 포함시키지 않았는가.

3. 왜 장제스는 류큐의 독립이나 원상회복을 거론하지 않았는가.

이는 필자가 19년 전에 제기하였던 의문들이었다(졸저, 동양스승 서양제자, 1992).

근래 공개된 카이로 회담 회의록과 장제스의 일기(미국 스텐포드대학 후버연구소 보존)를 참조하여 그 의문의 실마리를 풀어보기로 한다.

 

루스벨트, ‘류큐를 통째로 중국에게 주겠다.’

미-중 양국간의 첫 정상회담은 11월 23일 오후 7시경에 시작하였다. 장제스는 왕총훼이(王總惠)국방위원회 비서장을 대동하고 루스벨트의 숙소로 건너갔다. 두 정상은 주로 일본이 점령한 지역의 전후처리문제를 숙의하였다. 시침이 밤 11시를 가리킬 무렵, 루스벨트의 입에서 졸음을 확 깨는 말이 튀어 나왔다.

"류큐는 일본에 의해 불법강점당한 활모양의 호형(弧形) 군도이다. 마땅히 탈환되어야 한다. 류큐는 중국과 지리적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각하가 원한다면 류큐 군도 전부를 중국에 넘겨주겠다."

루스벨트의 ‘통큰 제안’에 장제스의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하였다.

“류큐는 우선 미국과 중국이 공동관리한 후, 국제신탁통치에 위탁하여 관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틀 후인 11월 25일에 재개된 미-중 양자회담에서 루스벨트는 류큐를 다시 거론하였다.

“류큐의 미래에 대해 숙고해보았다. 타이완에서 규슈까지 서태평양을 둘로 가르는 류큐는 중국의 안보방파제이다. 그 전략적 가치가 매우 크다. 중국이 타이완만 탈환하고 류큐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타이완은 물론 중국본토의 안보도 위협받게 될 것이다. 더구나 이처럼 중요한 류큐를 침략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의 손아귀에 놓아둘 수 없다. 본인은 아무래도 류큐를 타이완과 펑후열도와 함께 귀국이 관할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

장제스의 침묵이 답답하였는지 루스벨트는 간략 명료한 어조로 말하였다.

“각하가 원한다면 전쟁이 끝난 후 류큐를 중국에 주겠다.”

"류큐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아무래도 류큐는 중미 양국이 공동 신탁관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장제스의 불가사의한 우답에 루스벨트는 두 번 다시 류큐를 거론하지 않았다.

◇ 좌로부터 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1943,11,22~27. 카이로.


장제스는 왜 류큐를 마다했는가

장제스는 왜, 무엇 때문에 카이로에서 루스벨트가 거저 주겠다는 류큐 군도를 마다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중국과 대만, 홍콩 등 중화권의 전문가들은 저마다 분분한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중국측 입장으로서는 역사의 비디오테이프라는게 있다면 그것을 앞으로 되돌려 교정하고 싶은, 참으로 아쉬운 장면인가, 장제스에 대한 원망과 비판 일색이다. 그 중 중요한 것 셋만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제스의 가슴속에는 만주(동북)와 타이완만 있었고 류큐는 없었다. 더구나 장제스는 루스벨트가 류큐를 거론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며 류큐에 대한 사전준비가 전혀 없었다.

둘째, 장제스의 머릿속에는 일본보다는 중국공산당을 궤멸하는 책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중국의 전문가들은 “이 전쟁이 끝나면 마오쩌둥 일당 제거에 총력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혹시 일본의 도움이 필요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 올 수 있다. 그런데 류큐를 차지하여 일본에 척을 지는 어리석은 짓은 할 수 없다”라고 마치 장제스의 머릿속을 들어가 보기라도 한 듯이 목청을 돋운다.

특히 중국대륙측 일각에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장제스가 청년시절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이력을 들면서 그가 겉으로만 ‘항일’이지 ‘골수 친일파’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장제스가 항일전쟁을 하게 된 계기마저도 시안(西安)사태라는 감금된 상태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명하기 위하여 ‘울며 겨자 먹기’ 시작한 것이라고 악담에 가까운 인신공격성 비난을 퍼붓고 있다.

셋째, 장제스는 루스벨트의 진정성을 의심하였다. 장제스는 루스벨트의 발언이 중국의 류큐에 대한 영토야욕의 유무를 떠보는, 페인트모션의 일종으로 파악하였다는 것이다. 류큐 왕국이 독립국이었다는 역사를 잘 알고 있을 루스벨트가 류큐를 송두리째 중국에 거저 주겠다니, 거기에는 반드시 내밀한 흉계가 숨어있다고 지레짐작하여 그처럼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는 분석이다.

 

장제스를 위한 변명과 해양의식의 미흡

필자는 위의 지적들을 조목조목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장제스가 류큐문제에 대해 미처 준비를 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장제스는 1943년 11월 15일 일기에 이렇게 다짐한다. “류큐와 타이완은 서로 다른 자위에 있다. 류큐는 독립왕국이며 그 지위는 한국과 대등하다. 나는 류큐는 언급하지 않는 대신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즉 장제스는 류큐는 미중 공동신탁통치로, 한국은 자주독립을 제안하기로 카이로 회담 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다음은 장제스가 ‘항일’보다는 ‘반공’에 힘썼다는데,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류큐의 귀속문제와는 별 상관없는 부분이다. 장제스가 자본계급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공산당을 적대시하고 공산당 궤멸을 위하여 전력투구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일전쟁 기간동안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일본군에 총력을 기울여 맞대응하다가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그와 반면에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허허실실의 유격전을 구사하면서 암암리에 공산군의 전력향상에 힘썼다. 이는 장비와 병력에 있어서 공산당을 압도하였던 국민당 군이 국공내전에 연전연패하고 결국 타이완으로 패퇴하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중의 하나이다.

세 번째 지적에 대한 것으로, 장제스는 루스벨트의 진의 파악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장제스는 루스벨트의 ‘통큰 제안’에 중-미 공동신탁 통치안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었다. 류큐의 완전한 독립 회복을 요구했어야 했다.

동시에 일본이 탈취한 영토회복의 기산점을 1914년에서 1879년으로의 소급을 제안하였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중국의 영토팽창욕구에 대한 서방세계의 의구심도 불식시켰을 뿐만 아니라‘일본 점령지의 해방’이라는 카이로회담의 종지와도 부합되는 양수겸장의 카드로 작용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래도 여전히 중국측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아쉬운 원망과 후회, 탄식이 남는다. 장제스가 평소 그답지 않은,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였을까?, 이에 필자는 기존의 중국의 전문가들이 언급하지 않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 단 한 가지만 들고자 한다.

한마디로 해양의식의 미흡이다. 장제스는 대부분의 중국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바다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박약했다. 중국에서 물고기라면 으레 강과 호수에서 사는 담수어를 의미할 만큼 바다의 쓸모는 기껏해야 소금을 생산하는 곳으로 여겨져 왔다. 아니, 소금마저도 바위소금(암염), 소금우물(염정)에서 상당부분 충당될 수 있었기 때문에 바다와 완전히 담을 쌓고도 살아도 생활에 별 지장이 없었다.

더구나 오랜 세월 지속된 금해(禁海)정책으로 바닷가는 왜구의 침략에 상시 노출되어 있는, 귀족은 물론 평민도 살기에 부적격한 위험지대로 여겨졌다. 당연히 장제스는 류큐군도가 차지하는 전략적 가치를 읽지 못하였다. 또 당연히 장제스는 공산당 치하의 화북지방과 만주지방의 육지영토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 의거 이틀 전 1932.4.27. 태극기 앞에서의 윤봉길 의사(당시 만23세)

한국은 윤봉길이 있었고 류큐는 윤봉길이 없었다

끝으로 가장 궁극적이며 현실적인 문제, 왜 한국은 독립하였는데 류큐는 일본의 일부로 남게 된 걸까? 한국과 류큐 둘 다 중국과 실리호혜의 조공관계에 있었지만, 엄연한 자주독립국이었다. 그런데 왜 장제스는 류큐의 독립 또는 중국영토화를 마다하고 한국의 독립만을 주장했을까?

실제로 카이로 회담에서 처칠은 한국에 대해 미-영-중 3국의 신탁통치안을 제안하였으나 장제스는 이를 일축하는 대신 한국의 독립의 약속을 선언에 발표하자고하여 기습적으로 제안하여 관철시켰다. 누구 때문이었을까? 무엇 때문이었을까? 딱 한 사람만, 딱 한 사건만 들라면, 역사는 명쾌히 대답할 것이다. 그 누구는 한국의 청년 윤봉길(1908-1932)이고, 그 무엇은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1932.4.29.)라고.

장제스는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를 일컬어 중국의 백만 대군이 이루지 못한 것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극찬했다. 윤봉길 의거 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참 외로웠다. 장제스는 임시정부를 할 일없는 망명객들이 내부투쟁이나 일삼는 파락호집단으로 쯤으로 여기고 한 푼도 돕지 않았었다.

 

 

 



그런데 수통 폭탄 한방으로 일본 침략군 사령부 이동체를 일거에 섬멸한 윤봉길의 쾌거를 접하고서야 장제스는 물심양면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돕기 시작했다. 반면에 류큐인은 류큐의 독립을 위해 무엇을 했던가? 일찍이 일본에 병합된 그만큼 일본에 의해 완전히 순치되었는지, 독립의지와 그 실천이 너무나 미약하고 미미했다.

카이로 회담전인 1943년 7월 26일 장제스는 김구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의 완전한 독립과 국제공동관리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임시정부의 요구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 첫날인 11월 22일, 그의 일기에‘종전후 한국의 완전 독립과 자유의 건의 예정’이란 자구를 명기하기까지 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자 프린스턴대 국제정치학 박사인 이승만도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시킨 최대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렇다. 답은 윤봉길이다. 한국은 윤봉길이 있었기 때문에 광복을 성취했고, 류큐는 윤봉길 같은 항일독립영웅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표1>참조).



심난했던 동북아의 창공을 찬란하게 수놓은 의거를 감행한 윤봉길 의사의 24년의 생애는 너무나 짧았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의거가 항일독립운동의 기관차 역할을 하였고 그 위에 대한민국이 섰다.

<참고문헌>

강효백, ‘윤봉길의사 연행시 사진진위 문제(논문)’, 서울: [중국학연구],제2권-제1호, 2001. 11.
강효백, ‘좁은 중국, 넓은 일본’, [동양스승, 서양제자], 서울: 예전사, 1992.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의열투쟁과 한국독립운동], 서울: 국학자료원, 2003.
胡德坤, [戰時中國對日本政策硏究], 北京: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10.

 


 

 

 

해양대국은 중국 수천년 팽창야욕의 종결자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⑩-실크로 포장한 중화제국>
모택동은 내륙확장, 등소평은 해외진출, 강택민은 내륙개발...

 

 

중국의 붉은 꽃

공산주의가 어떤 몰골로 남아 있을까
마지막 남은 공산주의 대국 중화인민공화국에 가 보았더니
공산주의 세 떨기 붉은 꽃
프롤레타리아독재, 계급투쟁, 폭력혁명은 다 지고 없고
그들의 노랫가락 속에는 옛날 것만 남았더라
중화사상,
천하통일, 실용주의만 남았더라
그것도 돈독만 잔뜩 올라 남았더라.


- 강효백


 

 

 

중화사상은 무엇인가

중화사상은 천하통일, 실용주의와 함께 반만년 중국의 시공을 일관하는 가장 뚜렷한 흐름이고 원동력이자 중국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빠뜨려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중화사상은 한마디로 중국이 원형(圓形)의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는 자존심 충만한 세계관이다. 원래 자존심이란 배타도 교만도 아니다. 자존심은 자기 확립이고 자기 강조다. ‘나’자신의 힘으로 살아간다는 강력한 신념, 그것이 곧 자존심이다. 위대한 개인, 위대한 국가와 민족이 필경 다른 것이 아니다. 오직 이 자존심 하나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존이 상대의 도를 넘어 독선으로 치닫고 자존을 균형잡아 주는 겸허를 잃은 순간 자존은 교만으로 변해버린다.

중화사상도 다른 각도로 뒤집어 보면, 자신만이 전세계의 중심이라는 과대망상적 사고방식에서 출발한다. 자신을 중화라 부르고 주변 이민족들을 동이, 서융, 남만, 북적으로 송두리째 열등한 오랑캐로 경시해온 중국인의 혈맥 깊은 곳에는 교만성이 잠재하고 있다.

중국, 중국인은 짧게 잡으면 일본이 류큐를 합병하여 중화질서에 첫 균열이 가기 시작한 1879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1949년까지, 길게 잡으면 아편전쟁에 무참히 패배한 1840년부터 20세기 말엽까지, 약 70~150여 년간을 제외하고는 자존심과 교만성이 매우 강한 국가, 민족이다.

그러나 명실상부한 세계의 중심국가‘중국(中國)’을 이루었던 8세기 무렵 당나라 시대를 제외하고는, 중국의 중화사상은 엄밀히 말하자면 다민족국가사회의 융합을 위해 무한히 확대재생산이 필요한 자아도취성 이데올로기다.

모래시계 또는‘역(逆)’Z형이라 할까. 중화사상을 불멸의 국가융합에너지로 삼아 찬란한 중화제국의 부활을 꿈꾸고 있는 현대중국은 지역개발전략과 대외정책의 주력방향을 연계하여 전환시키는 특유의 궤적을 보여 왔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서남방의 내륙 확장에, 제2세대 덩샤오핑((鄧小平)은 동남방의 해외 진출에, 제3세대 장쩌민(江澤民)은 서북방의 내륙 개발에 주력했다면 지금 후진타오(胡錦濤)를 비롯한 제4세대 지도층은 동북방의 진출에 몰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 중국의 제5세대 지도층은 어느 쪽으로 방향을 틀 것인가?

◇ 8세기 성당(盛唐)시대 실크로드, [中國綜合地圖集]. 2000. 中國地圖出版社. (중국정부발간 국정 지도책) p.183 스캔. 발해가 토번, 돌궐 등과 함께 당나라의 영토로 표기(연노란색 부분)되어 있다. 특기할 사항은 오른 쪽 하단에 유독 ‘신라’를 고국명(故國名; 옛날 나라이름)으로 명기하여, 인도, 페르시아 등 여타 국가는 제쳐놓고 신라만 ‘국가’로 기재하고 있다. 더구나 육상 실크로드의 기점과 종점을 신라 ‘경주’로 표시하고 있다.


제1세대, 서남방 티베트와 인도를 침공하다

인민복을 입은 공산황제, 마오쩌뚱의 지역개발전략의 기본 이론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식 계획경제 이론에 입각한,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균부론(均富論)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중국인민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한 ‘균빈론(均貧論)’이 되어버렸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식 계획경제이론 자체가 ‘균빈론’의 숙명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의 대외전략 기조는 군사력을 앞세운 전방위적 팽창주의였다. 마오는 측근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6.25전쟁에 인해전술의 대군을 파병하여 광활하고 윤택한 동북(만주)을 차지하였다. 덤으로 마오의 일생에서 가장 껄끄러웠던 정적인, 동북왕 가오강(高崗)을 숙청하고 북한지역을 세력권 하에 두었다.

그런 후 마오는 서남방의 영역 확장에 눈독을 들였다. 일찍이 국민당군에 쫓기며 서남부의 17개성의 18개의 산맥과 준령을 넘은 2만 5천리 대장정시절에 품었던 야심 때문이었을까. 1959년, 마오는 티베트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복속시켰다. 중국 전체 면적의 8분의 1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마오는 멈추지 않았다. 서남방 더 먼 곳으로 여세를 몰아붙였다. 1962년 10월 인도를 침공하였다. 히말라야 설산을 넘어온 중국군은 3천명의 인도군을 사살하고 4천명을 포로로 잡는 전적을 세웠다. 서남아시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확보한 것에 만족하고 퇴각하였다.

마오는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에도 일격을 가했다. 1969년 3월 우수리 강, 강 가운데 섬인 다만스키(중국명 珍寶島·전바오도)에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대규모 군사 충돌로 이어졌으나 핵전쟁 발발을 우려한 양국 지도자들의 회담으로 분쟁은 봉합되었다.

1974년 1월 중국은 돌연 남베트남과 전쟁 중이던 북베트남(월맹)의 서사(西沙·Paracels) 군도를 점령하여 하이난다오(海南島)로 편입시켰다.

웬일로, 중국이 해양과 바다의 섬에도 군침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중일수교와 닉슨 미대통령의 중국방문이 있은 지 2년 후, 마오가 사망하기 2년 전의 일이다.

제2세대, 동남방의 여의주를 입에 물다

마오쩌둥의 비판적 후계자 덩샤오핑은 서남방에서 동남방으로, 닫힌 뭍의 내륙에서 열린 물의 바다로 나아갔다. 덩은 집권 이듬해인 1979년 2월 동남쪽의 베트남을 총 20만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침공하였다. 그러나 중국침략군은 개전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약 4만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다. 세계최강의 미국을 패퇴시킨 통일 베트남의 저력을 얕보았던 것이다.

덩은 베트남에게 교훈을 준 이른바 ‘교훈전쟁’이라고 자위했으나 대국으로서 체면을 구긴 사실상의 패전이었다. 기실 교훈의 수혜국은 베트남 보다는 중국이었다. ‘교훈전쟁’에 큰 충격을 받은 덩샤오핑은 그 후부터는 경제발전에 일로매진하는 내실우선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베트남전쟁 이후 중국 대외정책의 중심도 “칼날의 빛을 숨기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르자”의 도광양회(韜光養晦)로 수렴되었다. 덩은 동남부지역의 발전을 내륙지역으로의 파급효과를 기대하는 선부론(先富論)을 내걸었다. 마오의 균부론이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균빈론이었음을 간파하였던 것이다. 사회주의 중국의 바다에 동남부 3개성에 5개의 자본주의 섬, 즉 선전, 주하이, 산터우, 샤먼, 하이난 등 경제특구를 설립하였다.

덩샤오핑은 1984년과 1987년, 각각 절묘한 홍콩, 마카오 흡수 통치이론인 ‘일국양제(一國兩制)’로써 중국-영국 공동성명과 중국-포르투칼 공동성명을 체결하였다. 중국이 용이라면 여의주로 비견되는 홍콩을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반환받는 위업을 거두었다.

또한 중국은 1988년 3월, 남사(南沙·Spratlys)군도 7개 섬을 무력으로 점령했고, 1992년 중국 영해법으로 남중국해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선언했다. 1988년, 일본의 극우단체인 ‘일본청년사’가 류큐군도의 최남단 센카쿠에 등대를 설치하여 일본의 지배를 기정사실화하려는 행위에 대해 중국은 민간 차원에서, 그러나 조직적인 일본 규탄시위 및 항의를 하게끔 조정하였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은 그의 집권기간 내내 동남방의 바다를 향하여 일관된 정향성을 유지하였다.



제3세대, 서북방 국경에서 달콤한 과실을 따먹다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 와중에 집권한 장쩌민은 열린 물의 바다가 부담스러웠던지 다시 닫힌 뭍의 내륙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북방 내륙으로 전환하였다. 그는 부익분 빈익부, 양극화의 선부론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해, 지역간 균형발전의 ´신균부론’에 입각한 ‘서부대개발’을 내세웠다.

서부대개발의 핵심은 낙후한 서북지역의 위구르 자치구를 비롯한 소수민족밀집지역의 불만을 완화하고 사회 안정과 국경 방위를 위한 것이었다. 1996년 장쩌민은 서북 국경과 인접한 러시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의 국가원수들을 상하이에 불러내어 상하이-5 회담을 주도하였다. ‘서북 국경지대 군사부문 신뢰강화에 관한 협정´과 ´국경지역 군대감축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회담은 2001년 우크라이나를 포함시킨 ‘상하이 협력기구’(SCO)로 확대 개편하였다. 중국의 지명을 딴 첫 국제조직을 국제무대에 등장시키는 업적을 이루었다.

장쩌민이 심어둔 서북확장의 묘목은 어느새 자라나 최근 10년 새 중국은 러시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과 경계를 확정하며 3천여 ㎢ 영토를 새롭게 획득하는 등 서북국경에서 달콤한 과실을 따먹고 있다.

제4세대, 실크로 포장한 중화제국, 동북공정으로 드러내다

장쩌민의 동향 후배로 2003년 집권한 후진타오는 서북에서 동북으로 방향을 확 틀었다. 망막한 사막과 설산지대로 꽉 막혀있는 중국의 서부는 젖과 꿀이 철철 넘치는 미국의 서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외적으로 “평화적으로 강대국으로 우뚝 선다”는 화평굴기(和平崛起)의 기치를 들었다. 화평굴기의 본질은 ‘평화’라는 실크로 포장한 ‘중화제국주의’이다.

수동적이고 방어적이던 중국의 대외정책이 외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적극적 공격적인 정책으로 변화하였다. 중국의 대외정책 기조가 수렴의 제2, 제3세대와 달리 팽창의 제1세대로 복귀한 것이다. 특히 동북아지역은 중국이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통해 지역질서에 영향을 끼치려 하는 가장 우선적인 지역이기도 하다.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6자회담장을 마련하고 중국은 의장국으로 등극하였다. 장쩌민 시대의 상하이협력기구가 ‘서북6자회담’이라면 후진타오 시대의 북핵6자회담은 ‘동북6자회담’이라고나 할까.

후진타오는 국내적으로는 조화로운 사회건설이라는 균형발전전략의 틀을 수립하고 동북3성의 인프라를 개발하는 동북진흥전략을 내놓았다. 이와 함께 동북3성의 고구려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역사왜곡작업의 일환인 동북공정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동북진흥과 동북공정이 팽창의 대외정책, 화평굴기와 맞물리며 원래의 지역경제발전이나 역사왜곡의 수세적 범위를 뛰어넘어 한반도까지 공세적 차원으로 전환되고 있다. 북한의 존재가치를 중국에 대한 안보 위협을 줄여주는 완충지대에서 중국모델의 이식과 팽창욕구해소의 최전선으로 변환시키려는 동향은 후진타오 시대 후반으로 갈수록 도드라지고 있다.

제5세대, 중국은 북한과 류큐로 나아갈 것이다

내년 가을에 출범할 중국 제5세대 최고 지도층의 대외정책주력방향은 어디로 방향을 틀 것인가? 포스트 후진타오-원자바오 팀을 이어 중국을 이끌 시진핑-리커창 팀은 육해(陸海) 양면으로, ‘과거를 계승하여 미래를 여는’계왕개래(繼往開來)로 나아갈 것으로 예견된다.

육지 쪽으로는 동북지향의 제4세대를 계승하여 북한으로 한 발 더 나아갈 것이다. 제5세대는 ‘동북3성 개발’이라는 지역개발전략을 넘어 ‘북한의 동북4성화’라는 대외확장노선으로 전환할 것이다. 중국은 이미 북한에 많은 자원을 장기적으로 계약해서 탄광개발권, 동해 어업권 등을 확보한데 이어 2009년 나진항을 50년 조차를 해두었다.

베이징-단둥 고속철도를 비롯하여 동북3성 내의 교통 통신 발전소 항만 등 인프라구축 준공시한이 제4세대 집권 마지막 해인 2012년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에 단둥-평양, 단둥-원산, 투먼-나선, 창바이-김책 등 동북3성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북한땅을 땀땀이 꿰매 내려가는 고속도로와 철도건설 준공시한은 제5세대 집권 기간 중으로 맞춰 놓고 있다.

한편으로 제5세대는 해양대국화에 몰입할 것이다. 그들은 덩샤오핑 시대의 해양진출유업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남서군도 뿐만 아니라 류큐 해역으로 진출할 것으로 보인다. 작년 9월 7일, 센카쿠 해역에서 중국 어선과 일본 해상순시선이 충돌하면서 중일 간 심각한 외교 분쟁이 벌어졌다. 일본이 저자세에 가까운 타협안을 내놓아 미봉되었으나 중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일본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고, 대규모 반일 시위를 벌였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환치우시바오>(環球時報)를 비롯한 중국 각종 언론매체에는 센카쿠뿐만 아니라 오키나와를 포함한 류큐 군도 전체의 독립 또는 중국에로의 반환을 요구하는 특집기사와 칼럼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작년 11월 16일 일본의 국제문제 전문가들은 아사히 TV 시사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중국해군이 노리는 것은 센카쿠뿐만 아니라 오키나와를 포함한 류큐 군도 전체이다”라고 입을 모아 성토했다. 니시오간지(西尾 幹二)와 같은 극우파 인사는 “중국은 언제라도 류큐를 공격해 올 것이다. 그런 중국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라고 공언하고 있다.<계속>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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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간 김정일이 베이징에 못갔던 이유는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⑪-순망치한의 입술은 만주>
중국의 6.25 참전 이유는 동북지방 만주 확보와 친소파 정적제거

 

다산 정약용은 이렇게 말했다.

“만리장성의 남쪽에 있는 나라를 중국이라하고 요하의 동쪽에 있는 나라를 동국(조선)이라 한다. 동국의 사람으로서 중국으로 가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은 서로 부러워하면서 치하를 드리지 않는 자가 없다. 그러나 내가 보는 바로는 그 이른바 중국이라는 중은 어디를 기준으로 하여 중이라 하며, 동국이라는 동은 또 어디를 기준으로 하여 동이라 하는지 모를 일이다. 다만 우리가 말하는 중국이라는 것은 무엇을 두고 가리킴인가?”

우리에게 중국은 우방인가? 일단 외견상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형식적 외교관계등급상, 각종 인적 물적 교류 지표상으로 볼 때 우방이라고 해야만 자연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한중관계는 1992년 수교이후 유례를 찾아볼수 없을 만큼 급속도로 가까워져왔다. 한반도의 자유민주 북진통일을 일보직전에서 좌절시켜 분단상태를 지속시켜 버린 원흉, 붉은 오랑캐 ‘중공’이라는 주적관계에서부터 경제·통상 중심의 선린우호를 거쳐 1998년 협력동반자관계로 들어섰다. 2003년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로 승급되더니 2008년 양국 정상의 상호국민방문을 계기로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격상되었다. 양국의 전략목표가 상호이해에서 상호공유로 승격되는 한편 양국이 맺을 수 있는 최상위 수준까지 발전한 것을 의미하였다.

이는 중-러시아보다는 못하지만 중-미나 중-일, 중-캐나다 관계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이다. 또한 대중무역액은 대미무역과 대일무역액을 합친 규모를 훨씬 초과한지 이미 오래이며 갈수록 양적 질적으로 가속도가 붙어 늘고 있다. 그리고 2010년말 현재 중국의 한국유학생은 약 8만명이며 한국의 중국유학생은 6만명에 육박하여 상대국가의 유학생 중 최다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묻는다. 중국은 우리에게 ‘진정한’ 우방인가? 이번에는 대부분 선뜻 ‘그렇다’고 답할 수 없을 것이다. 아예 솔직히‘우방은 무슨 우방?’라고 답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한-중 양국의 외견상 친밀도와 실제로 느끼는 애정지수의 체감온도는 어쩌면 반비례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바로 5월 20일, 그래도 명색이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인데 김정일의 방중 일정도 통보를 하지 않은 것을 비롯하여 최근 양국간의 관계는 정치경제사회문화 거의 모든 면에서 왠지 모르게 서먹하고 뜨악하다.

이를 양국 정부의 공식적 비공식적 외교채널의 부재로만 나무랄 수 없는 뭔가 근본적이며 만성적인 고질병 같은 게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60년이 지나도 씻기 힘든 트라우마(trauma·집단적 상처 또는 정신적 외상),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때문이다.

역사의 미스테리, 만신창이 중국이 6.25 참전한 진짜 이유는

도대체 중국은 무슨 의도로 6.25에 참전했던 것일까. 사회주의 진영의 수호를 위해서, 소련의 파병종용 때문에, 이른바 순망치한의 지정학적 안보 이익을 위해서 등등을 국내외의 고명한 정·관·언·학 인사들이 수없이 반복하며 거론하여 왔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것들만으로는 중국의 그 부나방같은 6.25 참전이유를 설명하기에 2%는 어림없고 20% 이상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짧게는 8년간의 항일전쟁과 4년간의 국공내전, 길게는 1840년 아편전쟁부터 100여년 간 지속되어온 전천후 전방위적 외침과 내란으로 기진맥진의 정도를 넘어 만신창이 상태였는데다가, 건국된 지 한 돌도 채 지나지 않은 신생 정권이 당시 친소일변도인 북한 정권을 도우려고 세계최강 미군을 위시한 16개국 연합군과 맞서 싸워야 할, 국가의 존망을 건 사투를 벌려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었을까.

인류의 보편적 합리적 이성적 가치판단의 잣대로는 도저히 풀기 어려운 미스터리중의 미스터리이다. 오죽했으면 중국의 참전가능성을 묻는 트루먼 대통령의 질문에 맥아더 원수조차도 ‘아주 적다’라고 오판했을까.

중국의 한국전 참전에 얽힌 비밀을 풀기 위해 필자는 마오쩌둥과 동북(만주)과 가오강(高崗), 타이완과 장제스와 관련된 지정학적 인식과 중요성, 은원관계를 최근 공개된 중국내 각종 자료를 참고로 하여 풀어보고자 한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중국은 지방군구를 중심으로 크게 동북, 화북, 화동, 중남, 서북, 서남 6대 행정구로 구분했다. 화북만 중앙이 직접관할하고 그중에서 가장 노른자 자리인 동북지역의 당·정·군 최고 책임자를 친소파의 거두인 가오강이 담당하였다. 동북지역은 풍족한 자연자원에다가 일본의 괴뢰정권 만주국과 소련군의 무혈개입 등으로 산업화가 잘 전개 보존된 지역일 뿐만 아니라 당시 최신 장비로 무장된 25만여명의 정예병력을 지닌 제4야전군의 본거지였다. 그러나 가오강은 공산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숙청되고 1954년 자살로 비극적 생을 마감하였던 중국 최고위급 정치군사지도자이다.

건국 전 3개월 전, 1949년 7월 류샤오치(劉少奇)와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한 가오는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동북이 소련의 17번째 가맹 공화국으로 편입될 것과 칭다오항에 소련 함대를 파견하고 소련이 점유하고 있는 뤼순과 다렌항에 소련군 병력을 증파하여 미국의 위협에 대응할 것을 제안했다. 류는 가오를 매국노로 질타하며 그의 발언을 베이징에 보고했다.

그러나 마오는 보고서조차 읽지 않은 듯 가오를 더욱 우대해주고 국가부주석을 겸직시켜 주었다. 1949년 9월 마오쩌둥은 동북지역의 모든 가정과 공공건물에 스탈린의 초상화만 걸려있고 마오의 초상화는 전혀 걸려 있지 않으며 동북은 중국이라기보다는 소련의 일부처럼 보인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다. 마오는 정치국회의를 소집하여 가오에게 스탈린의 초상화는 소련관련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1949년 12월 초 모스크바 방문길에 오른 마오쩌뚱은 선양에 도착하여 시찰하는 동안 마오는 스탈린의 초상화만 보았지 자신의 초상화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외지인에게 동북은 중국보다 소련의 일부처럼 보였다. 또한 가오는 동북인민정부 단독으로 소련 중앙정부와 국제무역협정을 체결하는 호기를 부렸다. 중앙정부의 지시를 묵살하기 다반사였던 가오는 베이징의 방문요청을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하는 대신 선양으로 와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중앙군구와 타 군구소속의 병력과 군수물자의 동북관내로의 진입을 전면 통제하기도 하였다.

마오가 이처럼 방약무인한 가오를 방치하였던, 또는 속수무책이었던 까닭은 당시 여타 지역을 압도하던 동북의 경제력, 군사력과 아울러 그에 대한 소련의 적극적 후원과 뤼순다렌항에 거점을 둔 소련의 군사기지와 창춘 철도에 대한 소련의 이권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당시 마오쩌둥의 제1주적은 소련의 괴뢰 가오강보다는 국민당의 장제스였기 때문이다. 마오는 하루빨리 바다 건너 일본식민지였던 섬으로 도망가 내륙남부와 해안 도서 지역에서 완강한 저항을 조종하고 있는 장제스 국민당 일당을 섬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스탈린에 거부당한 김일성, 다시 마오쩌둥 만나 설득

일찍이 1949년 3월,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해보겠다는 구상을 밝혔으나 스탈린은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스탈린이 거부한 까닭은 당시 소련은 핵무기도 없었고(1949년 9월 3일 소련 핵실험 성공), 한국에 미군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추정된다. 이에 김일성은 남침 야심을 포기하지 않고 그해 4월 하순 내무부상(차관) 김일을 베이징에 파견하여 마오쩌둥의 동의를 구하였다. 이에 마오는 중국이 장제스의 잔당을 궤멸하느라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남침은 미국의 참전을 불러일으킬 위험성이 큰 무모한 행위라며 간단한 몇 마디로 김일을 돌려보냈다. 마오쩌둥-김일성의 회담시간은 통역을 포함, 총 20분이 넘지 않은 극히 짧은 것이었다.

일부 기존 자료에는 1949년 12월 마오쩌둥이 소련 방문시 스탈린과 김일성과 중국 참전에 관한 밀약을 맺었다고 적혀있는데 현재 공개된 구소련 자료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중국측의 자료도 마오쩌둥의 소련 방중의 주요 목적은 타이완과, 신장 위구르, 티베트, 동북(만주) 등지에 대한 소련의 지원과 양보를 얻어내는 것이었으며 북한에 의한 무력통일은 거론조차 하지 않았고, 할 필요성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1950년 1월, 미국 국방부 장관 에치슨은 충격적 선언을 하였다. 그동안 미국이 공산주의에 대항해 해당 국가의 안전을 지켜준다는 의미였던 ´안전보장선´에서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시킨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공산주의 극동방어선이 알류샨 군도에서, 일본열도, 류큐군도에서 필리핀 군도로 이르는 이른바 ‘에치슨 라인’으로 후퇴되었다. 에치슨 선언을 미국이 남한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으로 지레짐작한 김일성은 그해 2월, 재차 소련을 방문한다. 스탈린은 이번에는 김일성의 남침 주장에 동의하였다. 소련에 원자폭탄도 생겼고 미국이 에치슨라인 뒤로 물러난다고 공언하였기 때문이다.

5월 13일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은 당일 밤 마오쩌둥과 회담시 스탈린이 남침을 승낙했으며 남침에 대한 소련의 지원을 약속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자신은 마오에 대하여 남침 동의만 요구하는 것이지 중국의 원조는 필요 없다고 장담하였다. 마오쩌둥은 다음날 주중 소련대사를 초치하여 김일성의 발언에 대한 진위여부를 확인요청하였다. 주중 소련대사는 스탈린에게 유선상으로 통화한 결과 김일성의 발언이 사실임을 재확인했다. 이에 기고만장한 김일성은 세계 공산제국황제인 스탈린의 지원을 받는다고 자부하며 마오에게는 남침의 구체적 계획을 발설하지 않았고 주로 동북제1서기인 가오강과의 연락을 긴밀히 취했다. 마오쩌둥 역시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한 1949년부터 6.25전쟁이 끝나고 숙적 가오강을 제거한 1953년까지 중국은 사실상 삼국시대였다. 중국 내지(동부)의 대부분을 차지한 마오쩌둥의 공산당, 내륙남부와 해안과 도서 지역에서 완강한 저항을 계속한 장제스의 국민당, 그리고 광활하고 윤택한 동북지역을 장악한 가오강의 친소세력, 중국은 여전히 3분된 상태였다. 마오가 가오를 숙청하여 동북을 완전히 독차지한 1954년에서야 중화인민공화국은 제헌헌법을 제정하였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마오는 애시당초 당시 30대 중반인 김일성 출신성분 자체가 가오강보다 더한 극렬 친소파라 경멸했으며(마오가 평생 가장 증오하였던 정적은 친소파였으며 그의 최후 최대의 주적국은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때마침 중국의 2번째로 큰 섬인 하이난다오를 점령하여 국민당 잔당의 본부인 타이완 상륙작전에만 모든 정력을 집중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6.25전쟁 발발전 중국과 북한은 수교하였지만 주 평양 중국대사관은 정식으로 개설되지 않았으며 중국 초대대사는 병을 핑계되고 우한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북한 측 역시 베이징에다가는 대사관 청사를 물색조차 하지 않고 오직 가오강이 지배하고 있는 동북위원회 선양에다가 상무대표처만 파견하였다. 즉 6.25이전 중국은 타이완을 점령하여 장제스 국민당을 섬멸할 것에만 골몰하였지 한반도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1950. 6.25전쟁 발발후, 중국은 여전히 국민당 잔당과의 전투 중이었다. 6월 27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공군과 해군부대는 한국정부를 엄호하고 지지할 것과 미국은 중국이 타이완 침공을 무력으로 결정하였다고 선포하였다. 그러자 28일 저우언라이 총리겸 외교부장은 미국수중에서 타이완을 해방시킬 때까지 전쟁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이는 엄포였을 뿐이었다. 미국 지상부대가 실제 참전을 하자 마오쩌둥의 주의력은 타이완에서 동북으로 확 바뀌어버렸다.

아직도 베이징측이나 타이완측의 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6.25전쟁 발발 덕분에 타이완이 적화되지 않고 살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엄밀히 말하여 사실과 거리가 멀다. 당시 중국군의 해군 및 수륙양용작전에 투입될 해병대전력은 0에 가깝고 상륙작전에 동원될 무기수준 역시 형편없었다. 중국군이 역시 섬인 하이난다오 점령에 성공했다고 하지만 하이난다오는 타이완과 달리 육지와의 거리가 매우 가깝고 국민당 주력부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중국 공산군 역시 그들 조상처럼 육전에는 선수였지만 해전에는 잼뱅이었다. 중국이 해전에 승리다운 승리를 한 번이라도 한 적이 있던가?

불세출의 전략가 마오쩌둥은 ‘출구전략’이 필요했다. 마침 미국 지상부대가 참전하자 마오의 눈길은 타이완이라는 작은 섬에서 한족이 주체가 된 제국으로는 한번도 차지한 적이 없는 신천지 저 동북방 광활한 대륙으로 돌렸다. 마오는 8월 11일 중앙군사위원회에 ‘타이완해방 전쟁 연기’를 지시했으며 ‘타이완 해방 ’구호를 잠정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표면적인 대반전은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후 발생했다. 그간 소련의 하수인, 가오강과의 내밀한 연락을 취하고 베이징에 대해서는 얼마나 신속하게 남한을 공산화하는가를 지켜보기만 하라는 듯 기고만장하던 김일성은 박일우 차수(대장)를 압록강 건너 안동(현재 단동)에 파견해 중국의 파병을 애걸했다. 또한 1950년 10월 1일 새벽 2시 50분(모스크바 시각) 스탈린은 김일성의 구원의 편지를 받는다. 10분 후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전보를 처서 중국의 파병을 요청하는 급전을 때렸다. 심야에 받은 급전을 받은 마오쩌둥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담담한 표정에 약간의 미소마저 담겨있었다고 그의 러시아어 통역관 스저(師哲)는 후일 회고했다.

10월 2일 새벽부터 10월 4일 오후까지 마오쩌둥은 중앙서기처와 중앙정치국확대회의를 소집하여 중난하이에서 마라톤 회의를 개최했다.

먼저 국방위원회 부주석 주더(朱德)가 군사력 면에서 중국은 미국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며 참전을 극력 반대했다. 2개 보병사단과 1개 기계화사단으로 구성된 미군 1개 군단은 탱크와 70미리 곡사포와 240미리 장사정 방사포 등 각종 고성능 대포를 1500여문이나 보유한 반면 중국 3개 사단, 1개 군단이 갖춘 포는 겨우 198문뿐이다. 또한 미군은 각종 전투기와 폭격기와 1천 백 여대를 동원하여 제공권을 장악한데 반하여 중국은 공군 자체가 없었으며 해군 역시 타이완 침공을 대비해 1949년 말 급조된 것이라는 구체적 상황을 곁들었다.

정무원 총리겸 외교부장 저우언라이도 중국인민은 오랜 전쟁으로 약간의 염전사상이 팽배해 있으며 참전은 세계최강대국 미국과의 척을 지게되어 결국 국제관계에서의 고립을 초래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베이징 군구사령관겸 베이징 시장인 에지엔잉도 미국과의 전쟁은 중국을 폐허로 변해버리게 할 수 있는 경거망동이라고까지 격렬히 반대했다. 중국본토의 안전에 위협을 받게 될 경우 참전을 검토해도 늦지 않다고 주장했다.

늦게 회의에 참여한 펑더화이, 역시 경거망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며 소련의 공군력과 물자를 지원받는다는 조건이라면 참전을 검토해볼만하다고 꼬리를 붙였다.

정치국원겸 난징 인민정부시장 쑤위(粟裕)도 중국군이 참전한다 해도 북한군은 중국군의 지휘를 받지 않으며 제멋대로 행동할 것이라면서 참전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후일 실제로 동북방어군총사령관의 임명됨에 불구하고 병을 핑계되고 부임하지 않았다.

가오강의 직속선배로서 동북방면의 제4야전군 총사령관이었던 린뱌오(林彪)는 북한은 산이 높고 숲이 우거지고 지형이 동서로 협소하여 북한진입후 작전방식과 국민당과의 작전방식이 많이 달라 작전수행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미군은 국민당군이 보유한 전투기와 탱크, 대포보다 질적 양적 면에서 훨씬 우수하기 때문에 중국군은 더욱 더 많은 희생을 거둘 것이다라며 참전을 극구 반대했다. 그는 후일 병을 핑계되고 지원군 총사령관의 직위를 거부했다.

동북의 오랑캐로 서양의 오랑캐를 무찌른 마오의 전략

한편 동북지역 당-정-군 최고 책임자 가오강은 정치국원 대부분이 참전에 반대의견을 표시하자 그렇게 결정될 것으로 알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참전에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는 대다수의 정치국원들을 집요하고 진지하게 설득했다. 마오가 역설한 중국군 참전 이유 요지는 이렇다.

스탈린은 인천상륙 작전후 사실상 북한을 포기하고 김일성에게 패잔병들을 동북으로 퇴각하도록 명령했다. 미군은 그들을 끝까지 추격해 올 것이다. 만약 미군이 동북을 침략한다면 소련은 중-소 군사동맹 조약에 근거해 수십만 명의 소련군을 동북에 추가로 진주시킬 것이다. 장춘철도와 뤼순과 다렌항은 여전히 소련이 점거하고 있다.

만약 미군을 패퇴시키더라도 어떻게 그 많은 소련군을 철군시킬 것인가. 동북이 전쟁터로 변하면 전체 중국의 경제건설계획이 파괴되고 민족자산계급과 일부계층이 우리에게 적대적으로 돌아설 것이다. 동북의 미국이나 소련의 영유를 막기 위해서 동북까지 이어지는 전란의 도화선을 미리 끊기 위해서는 북한으로 출병해야만 한다.”

그러자 군사적 열세를 들어 가장 먼저 반대하던 주더가 가장 먼저 찬성의 뜻을 표시했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이라는 사자성어를 외쳤다. 필자는 이때 주더가 말한 입술은 ‘북한’보다는 ‘동북’을 지칭한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마오쩌둥의 발언 중에 ‘동북’이 전쟁터로 화하면 ‘전체 중국’의 안위가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강조했을 뿐이지, 북한의 안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정치국 위원중 최고 연장자인 그의 ‘순망치한’의 외침에 정치국위원들은 박수로서 동의를 표했다.

팔짱을 끼고 침묵을 지키던 가오강이 그때서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북한은 소련이 책임지는데 왜 중국이 끼어들려고 야단인가.’라며 고함을 치며 참전반대의사를 고수했지만 대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중국군의 주력부대는 대부분 동북 출신 제4야전군으로 충당, 소모되었고, 총사령관은 펑더화이가, 병참지원은 가오가 떠맡았다. 기름기로 반질반질한 살찐 돼지 등처럼 윤기 넘치던 동북의 인적, 물적 자원과 마오(毛)의 코털도 마음대로 뽑을 것처럼 막강하던 가오의 권력은 하수구에 물이 빠지듯 전쟁 후반부로 갈수록 급격히 소진되었다. 중국보다 소련의 국익에 부합되는 가오의 친소행각과 동북의 독자세력화는 중국의 한국전 참전을 유발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가장 총애하던 아들이자 장남인 마오안잉(毛岸英)을 참전시켰으나 압록강을 건넌지 한달도 채 못돼 미군의 폭격기에 의해 폭사당했다. 마오가 마오안잉을 참전시킨 내면적 동기는 그 어느 책과 자료에도 찾을 수 없다. 다만 필자는 정치국원 대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로 동북지역출신의 젊은이들을 인해전술로 사지에 몰아넣게 한 데 대한 마오쩌둥식 솔선수범 내지 자기희생, 노블리스오블리제적 퍼포먼스라고도 분석된다. 마오안잉의 시체는 마오의 명에 의해 북한에 매장되어 있다. 마오안잉의 묘는 중국-북한간의 혈맹의 상징이자(대다수 우리 언론에서는 이렇게만 표현하지만), 중국이 북한에 대하여 요구하는, 썩지 않는 ‘피의 채권’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편 중국의 일부 지식인들은 자국의 초대 주석의 장남의 목숨까지 희생시켜주며 구해준 북한정권이 3대 세습을 하려는데 대하여 극도의 배신감과 경멸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반면 비록 일당독재를 유지하지만 이미 30여년 전부터 세습제는 말할 것도 없고 종신제도 폐지했으며 예측 가능한 임기제와 후계자 양성, 선발제를 순조롭게 실시해오고 있다는데 대해 일종의 체제적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마오의 장남을 포함, 20여만 명의 사망자(대부분 동북출신, 만주족이 상당수를 차지)를 낸 한국전에서 중국이 얻은 대가는 무엇인가. 마오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껄끄러웠던 정적을 축출했고, 동북을 소련과 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는 중국의 영토로 확보했다. 즉 동북의 오랑캐로써 서양의 오랑캐를 무찌른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 거둔 전리품이었다. 그 전리품은 현재 중국 곡물생산량의 70%이상을 생산하는 곡창이자 각종 석유와 석탄 철광이 노다지로 나오는 비옥하고 알찬, 중서부지역 모든 성을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황금땅(전 랴오닝 성 당서기의 발언)이 되어가고 있다.

또한 그 전리품은 삼황오제의 전설시대로부터 왕국, 제국이나 공화국시절까지를 모두 포괄한 반만년 중국사에서 한족(漢族)이 주체가 된 정권으로는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중국땅으로 편입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60년 도 채 안 된, 1953년부터.

그래서 우리는 일찍이 다산 정약용이 갈파했던 ‘만리장성의 남쪽에 있는 나라를 중국이라 한다.’를 이제는 ‘압록강 북쪽에 있는 나라를 중국이라 한다.’고 고쳐 불러도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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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의 발 1>
김정일의 방중 동선이 작년 8월에도 이번에도 만리장성 이남을 넘어 베이징에 쉽게 닿지 못하고 동북3성 범위내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까닭은 제16회 ‘실크로 포장한 동북공정’과 제18회 ‘중국 차세대 팽창목표는 북한과 류큐’편 등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뱀의 발 2>
필자는 잘 알려진 것, 많이 논의되어온 것보다는 덜 알려진 것과 잊혀진 것을 사랑합니다. 상술한 내용은 필자가 몇해전 모 일간지에 짤막한 칼럼으로 언급했던 내용을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이 넉넉하게 허용해준 지면을 활용해 더욱 상세하게 기록해 본 것입니다. 강호제현과 선배학자들의 거작과 통설을 조금이라도 보충 보완해보려는 의도이니 아무쪼록 지탄과 질책보다는, ‘아 요런 시각도 있구나’하는 식으로 참조사항 정도로 너그러이 보아 주시길 바랍니다.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마오쩌둥을 키운건 마르크스 아닌 진시황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⑫-티베트와 인도를 침공하다>

공산주의 경전 자본론을 읽지도 않아…진시황같은 무한팽창주의자

 

 

어쩐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으레 중국하면 빨간 칠을 해놓고 ‘주의’를 붙여 사회주의, 공산주의(사회주의의 이상적 형태, 이하 ‘공산주의’로 통칭) 중국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런 붉은 중국이 외환보유고, 미국국채보유고, 수출총액, 에너지생산량 등등 각종 (자본주의적) 경제지표에서 세계 1위를 차지, 자본주의 대표국가 미국을 추월하며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고 있으니.

옛 소련이나 동구권 국가 등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 공산주의체제는 초장에는 일사불란하게 효율적으로 잘 나가는 것 같이 보이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급격히 붕괴하는 ‘서든 대스’ 현상을 보여 왔는데, 중국 붕괴론, 중국 분열론, 중국 거품론 등등 서방세계의 저주에 가까운 예상을 깨뜨리며 저 이른바 ‘좌빨 원조 대국 중국’은 좀처럼 죽거나 쪼개지지 않고 마치 빅뱅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무한 팽창하고 있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필자는 감히 원초적 의문을 몇 가지 던져보기로 한다. 중국의 공산주의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중국의 속살까지 빨간색일까, 혹시 겉만 빨간색으로 포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 반만년 생래적 자본주의자 비단 장사 왕서방인 중국인, 그들이 공산주의를 과연 뭐 하는데 쓰는 것으로 알고 있을까? 오늘의 공산중국 초대 황제 마오쩌둥이 동양사람이 이해하기에는 난해한 마르크스 공산주의 따위의 참의미를 알았을까, 아니 알 필요조차 있었을까? 마오의 필생의 멘토(mento, 인생 길잡이)는 과연 누구였을까?

 

마오는 마르크스를 알았을까?

◇ 청년시절 마오쩌둥. 출처:http://image.baidu.com/

“마오 동지, 당신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소,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손자병법뿐이오.”

이 말은 마오쩌둥이 1935년 1월 대장정 중에 거행된 준의회의에서 중국공산당의 최고지도자로 첫 등극하게 되었을 때, 소련
유학을 갔다온 중국공산당의 이론가 한 사람이 내뱉은 비난의 한마디이다. 그 비난이 시사해주는 바는 매우 크다. 만약 마오가 마르크스를 이해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설적으로 말해 그는 마르크스 공산주의를 잘 몰랐고 중국의 시간(역사)과 공간(지리), 즉 중국을 잘 알았기 때문에 중국혁명의 최후승리자가 되었다.

비록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였으나
해외유학은커녕 대륙을 석권하기까지 단 한 번도 중국땅을 벗어나 본적이 없는 중국판 신토불이, 토종 혁명가인 마오가 독일의 관념주의 철학에 뿌리를 둔 마르크스의 난해한 이론을 이해하기란, 마치 서양인이 동양고전 <주역>에 녹아든 동양의 우주적 직관과 상상력, 그리고 사유의 심오한 뜻을 깨달으려고 하는 것처럼 극도로 어려운, 실제로는 지극히 불필요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1918년 무렵 베이징 도서관 열람실에서 한 사서청년이 책을 읽고 있었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훤칠한 키에 꿈꾸는 듯한 커다란 눈, 넓은 이마와 단정히 빗은 머리카락, 그리고 감각적인 입에 매력적인 미소를 지닌 여성과 흡사한 미남청년, 후일 공산 중국의 황제로 등극하는 청년 마오쩌둥의 모습이다.


후일 마오는 그의 사서시절 베이징 도서관 장서의 절반 이상을 뒤지며 열심히 책을 읽었지만 그의 영혼을 흡인시킬 수 있는 책은 주로 수호전, 삼국지연의, 홍루몽, 사기, 한서, 정관정요, 자치통감, 25사, 중국지리와 세계지리 관련서적 등 주로 중국 고전과 역사지리서였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사상과 과학기술, 경제무역 회계학 관련 서적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마오쩌둥 연구로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는 하버드 대학 로스 테릴(Ross Terrill) 교수도 그의 저서 에서 마오의 독서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오는 독서광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드골을 뛰어넘는, 20세기 세계지도자 중 제일의 독서가이자 저술가였다. 특히 역사와 지리방면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독서광이었으나 과학기술이나 경제경영, 서구의 정치사상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포함한 서구의 정치사상서적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마오는 공산주의 경전 <자본론>을 읽지 않았다.

비단 사서시절뿐만 아니라, 마오는 평생 한 번도 마선생(馬先生·중국인이 마르크스를 지칭하는 말)과 마음을 열어놓고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이 말은 마르크스가 대영제국 의회도서관에서 18년 동안의 장구한 세월을 기울이며 1867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펴낸 <자본론 Das Kapital> 원문은 물론, 1872년 러시아판, 20세기 초반에 나온 영문판, 일문판은 커녕 중문본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정통 공산주의자들에게 자본론은 기독교인의 성경과 같은 근본적인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을 읽지 않은 자를 참된 기독교도라고 할 수 없듯, 공산주의의 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론을 본적이 없는 마오쩌둥을 이제껏 동방의 공산주의 수괴로 지칭해왔다.

하도 난해하고 방대해 웬만한 서구의 지식인이 읽기에도 힘든 거작 자본론이 들어올 만큼 당시 중국의 사정은 그렇게 여유작작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중국 땅에 자본론 중역본이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38년 9월 일본세력하의 상하이에서였다.

그것도 궈다리(郭大力)라는 퇴직교사출신이 독문원본이 아닌 영문번역본을 초벌 번역한 것으로 후일 엉터리번역이 많아 1968년에 재번역한 것이다. 오리지널 독문 자본론을 직접 중문으로 완역된 것이 처음으로 베이징의 중국공산당 본부에 등장한 때는 마오쩌둥 사망 11년 후인 1987년도. 그것마저도 오역 투성이라는 믿기지 않는 사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라 생각한다.

중국 공산당 생활에 있어서 마오쩌둥은 매우 불우했다. 마오는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창당 멤버 중의 하나였으나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은 조악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소련에서 직접 파견한 고문단이나 소련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배우고 돌아온 소련유학파들에 의해 지도되고 있었기 때문에 마오는 후난 성 출신의 고집 센 촌뜨기로 경멸받고 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합리적 사유와 근대 이성주의의 한계를 초극하지 못하는 독일의 관념주의보다는 진시황을 비롯한 중국의 황제들과 수호전, 손자병법 등 역사소설과 병법서 속에서 그의 혁명이상과 전략전술, 투쟁재료를 찾아내기에 익숙했다. 마오는 또한 일찍이 농민이 독자적으로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는 데 착안해 농민을 중국 혁명의 주도세력으로 보았다.

초기 중국 공산당의 간부들은 거의 소련 유학파 지식인 출신이었는데 그들은 중국현실과 중국인의 본성에 전혀 맞지 않는, 마르크스이론을 주절대는 것에나 능했지 중국의 사회현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더구나 중국인의 90%이상이 살고 있는 농촌상황에 대해서는 더군다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진시황을 닮은 카리스마, 통일과 팽창에의 강력한 욕구,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의 진승,오광의 난을 필두로 평등을 혁명이념으로 내걸며 중국의 시공을 수놓은 무수한 농민봉기들, 성공한 혁명사와 실패한 반란사와 자신과의 관계에 관한 역사 지리적 인식, 묵가사상(평등을 주창하여 오늘날의 민주사회주의와 유사), 도가사상(무정부주의, 자급자족적 이상사회 추구)을 위시한 중국의 제자백가사상 그리고 마치 ‘걸어다니는 백과사전’ 같은 박학다식과 상식이 혼합된 종합체와 중국의 후진 농업환경의 교차지점에서 마오의 능력은 어느 누구도 항거할 수 없는 힘으로 빛나게 되었다.

◇ *진시황의 통일 진나라의 최대 판도, 마오쩌둥이 팽창시킨 현대 중국의 판도는 진시황 시절 비해 4배가량 넓다. 진시황 통일이전의 진나라와 마오의 초기 공산정권 근거지는 오늘날 싼시(陝西)성 부근에 해당되어 서로 겹친다. 출처: 필자가 1990년대 중반 상하이에서 수집, 소장중인 CD롬 자료.


마오는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무한팽창주의자

1949년 10월 1일, 만 56세의 마오쩌둥은 그의 서재를 나왔다. 중화인민공화국성립을 선포하고 국기게양식을 하기 위해서였다. 창안지에(長安街)는 인파로 가득 찼다. 마오쩌둥이 탄 전용차량앞에는 탱크 한 대가 길을 열고 있었다.

미제 샤먼 탱크,
일련번호
237438W14. 디트로이트에서 태평양을 건너 상하이항에 상륙한 그 탱크는 마오쩌둥 섬멸을 지원하기 위해 루스벨트가 장제스에게 보낸 선물이었다. 샤먼 237438W14는 ‘자유세계’에서 한 시절을 보냈으나, 이제는 육중한 소리를 내며 텐안먼 광장 앞으로 이어지는 창안지에를 통하여 ‘또 다른 세계’를 향하여 전진하였다.

마오쩌둥은 텐안먼 망루에 올라 외쳤다. “ 인류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인은 이미 일어섰다. 중화민족은 모욕을 받지 않는 민족이 되었다.”로 시작되는 건국 기념사와 국기게양식 축사에서 마오는 단 한 마디도 ‘주의(ism)’나 ‘외국인’을 거론하지 않았다. 아주 특별한 그 날의 키워드는 중국, 역사, 지리, 국가, 민족 등이었다.

중화민국의 국기, 청천백일기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오성홍기가 게양되었다. 손문이 열었던 푸른 하늘은 감빛 노을로 붉게 물들고 손문이 가리켰던 하얀 태양은 금빛 찬란한 다섯 개의 별로 바뀌었다. 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의식이자 공산 황제의 등극식을 거행하던 날 수많은 중국의 평민백성들의 뇌리에는 무엇이 되살아나고 있었을까?

오랜 과거의 추억이 가까운 과거의 기억보다 오히려 생생하게 떠오르는 노인들처럼 중국인들의 뇌리에는 역사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무수한 영웅호걸들의 영상들이 오버랩되며 파노라마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특히 마오의 청년기와 정강산(井岡山)시절의 멘토였던 수호전 양산박의 108영웅들을 이어, 대장정 시기의 멘토였던 명말 유적집단의 총두목 이자성(李自成)이 화면을 반쯤 매운 모습으로 등장했다.(졸저, <협객의 칼 끝에 천하가 춤춘다>, <협객의 나라 중국> 참조 바람)

그런데 파노라마의 맨 끝 부분, 이전의 모든 출연자들을 깡그리 압도할만한 거대한 형상의 캐릭터 하나가 화면을 독점하더니 정지화면으로 고정되었다. 그는 바로 진시황(BC259-BC210). 1936년 공산당통치거점 엔안(延安)시절 이후 1976.9.9 베이징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의 마오쩌둥의 최대, 최고, 최후, 궁극적 멘토인 진시황이었다.

마오쩌둥의 커밍아웃, ‘나 역시 진시황이다’

“진시황은 중국 봉건사회의 제일 유명한 황제이다. 나 역시 진시황이다(我也是秦始皇). 린뱌오는 나를 진시황이라고 욕했다. 중국 역사는 두 개 파로 나뉜다. 하나는 친 진시황파, 다른 하나는 반 진시황파. 나는 진시황에 찬성하나 공자는 반대한다. 왜냐하면 진시황은 중국을
하나로 통일했고 문자를 통일했고 사통팔달의 도로를 건설했다. 또한 나라 속에 나라를 조장하는 지방분권제를 혁파하고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였다. 중앙에서 임기제 지방관을 파견하여 토호세력의 세습제를 철폐하였다.”

이는 80세의 마오쩌둥이 1973년 9월 23일, 이집트 부통령 후세인 알 사페이(Hussein Al-Shafei)를 접견한 공식석상에서 한 발언이다. 참으로 경악스러운 ‘고백’이자 ‘커밍아웃’이었다. 특히 마오를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지만 토종 공산주의자정도로 옹호해왔던 골수 친소파와 극좌파들에게는 초대주석의 봉건황제적 정치지향과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벼락같은 ‘배신의 피날레’였다.

마오쩌둥의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1949년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과 이후가 극명하게 다르다. 신중국 건국 이전 마오는 진승, 오광, 이자성, 홍수전 등 중국사의 농민봉기 지도자들에 대한 어록을 많이 남겼으나 진시황에 대한 언급은 가급적 회피하였고 간혹 거론하더라도 분서갱유 등 부정적 측면만을 유독 강조하였다. 당시 진보적 사상으로 치부되었던 마르크스 공산주의를 지도사상으로 하여 조직된 중국공산당, 당 주석이 어찌 함부로 봉건황제를 찬양할 수 있겠는가. 제 아무리 당주석이라 하더라도 반당 반혁명분자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우행으로 판단했으리라.

마오쩌둥은 진시황
천하통일 이전의 진나라 판도에 속한 싼시성 일대를 장기점거하면서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세력을 확장해가는 혁명과도기(1936-1949년)에, 아주 자연스럽게 진시황을 자신의 멘토로 ‘내밀히’ 삼았다. 정강산과 대장정시절에 각각 공개적으로 수호전 108영웅과 이자성을 ‘공개적’으로 멘토로 삼은 것과는 달리.

혁명과도기에 마오는 진시황의 천하통일과 무한팽창정책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마오 자신의 가치체계로 소화한, 이른바 진시황의 내면화(internalization)를 이루었다고 분석된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신중국 건국 이후부터 진시황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공개 발언을 시작하였다. 진시황에 관한 마오의 수많은 발언이 있지만 지면 관계상 마오의 제8기 당중앙회의 2차회의시 (1958년 5월 8일-18일) 어록 한두 구절만 더 들기로 한다.

“진시황은 현실을 중시하여 구습을 혁파하는 일의 전문가였다. (이때 린뱌오가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저질렀다’라며 마오의 발언을 끊고 들어왔다. 잠시 침묵 후) 나 역시 진시황을 인용하는 것에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시황의 분서갱유쯤이야 나에 비하면 새발에 피다. 진시황은 겨우 460명의 유생을 생매장했지만 우리는 4만 6천명의 유생을 생매장했다. 우리가 혁명을 하면서 무수한 반혁명지식인들을 죽이지 않았나? 언젠가 한 민주파 인사와 논쟁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당신은 내가 진시황이라고 욕한다. 그렇다. 나는 진시황이 아니라고 한 번도 부인한적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신의 비난은 너무 부족하다. 더욱 심한 욕설을 해다오, 나 마오쩌둥은 진시황보다 백배 심한 독재자라고.”

“‘공산주의’, ‘제국주의’등 현재 우리가 밥 먹듯이 쓰고 있는 상용어는 원래 소련이나 미국 영국 등지에서 나온 외래어를 중문으로 번역한 것들이다. 중국인과 외국인이 이들 외래어에 대한 인식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완전히 다르다. 진시황이후 중국인은 외국인을 눈 안에 넣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청나라 말엽부터 영국과 소련 등 제국주의세력의 침입으로 중국인은 노예가 되어 버렸다. 과거의 오만이 지금은 굴종으로 변해버렸다. 지금 당내에는 외래품이라면 막무가내로 숭배하는 풍조가 있다. 공산주의, 제국주의 따위의 함의도 알지 못하면서 외래용어들을 아는 채 하는 폐습은 반드시
교정하여야 한다.”

위의 마오의 첫 어록에서 알 수 있듯 마오는 진시황의 정체성마오 자신의 정체성에 융합시키는 동일시(identification)현상을 노출하고 있다. 급기야는 제2의 분서갱유, 즉 10년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2천만 명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의 살생부에 생(生)으로 표시된 자 빼놓고는 모두가 타도되었다.

자신을 영원한 붉은 태양(紅太陽)으로 부르도록 우상숭배를 음양으로 강요하였다. 죽음을 3년 앞둔 시점 마오 자신 스스로 ‘나 역시 진시황이다.’라는 나쁘게 말하면 심각한 착란현상에 빠지고, 좋게 말하면 ‘만년(晩年)의 진솔한 고백’을 하게 된다. 또한 위에 제시한 두 번째 어록에서 마오가 ‘공산주의’를 서양에서 건너온 ‘외래품’의 일종으로 간주할 정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확연하게 볼 수 있다. 의외이다.

◇ 중국의 ‘영해’라고 홍갈색으로 표시된 서사군도와 남사군도. 국제해양법에 저촉되며 최근 베트남 등 주변 동남아 국가들과 심각한 국제분쟁이 발생하고 있거나 분쟁이 우려되는 해역. 출처: < 中國國家地理 > 2010.10. 總600卷, 中國海洋 特輯珍藏版, 속지에서 스캔.


마오쩌둥의 중국은 진시황 시절 영토의 4배 팽창

천하통일과 팽창정책 면에서 진시황과 마오쩌둥의 업적을 비교하자면 다음과 같다.

통일 전에 진시황은 진나라의 국왕이었다. 당시 천하는 7개국으로 분할 웅거하고 있었다. 진나라 하나로 보면 최강이었지만 나머지 6국의 국력을 합친 종합국력으로 보면 진나라는 약소국이었다. 그러나 6국은 역시 6국, 느슨한 동맹체제하의 개별 국가의 국력은 분산되는 법이라서 결국 6국은 진나라에게 멸망당했다.

국공내전시 중국에는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맞서고 있었다. 당시의 국민당은 중국의 최고 부유한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공산당은 진시황 통일 이전의 진나라 영토였던 서북방의
황토
고원 일대만 점거하고 있었다. 진나라처럼 초기의 마오쩌둥 세력은 미약하였으나 갈수록 창대하여졌다. 전국시대 6국과 흡사하게 국민당은 겉보기에는 풍만한 한 몸이었으나 실제로는 각지에 할거하는 군벌들이 사리사욕과 부정부패로 찌들어 흩어진 모래와 같았다. 최후에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대륙을 석권했으며 천하를 탈취했다.

진시황은 황제로 등극한 후 도로를 건설하고 만리장성을 연결하고 북으로는 흉노를 정벌하고 남으로는 지금의 장쑤성과 저장성 일대를 점거하고 베트남 북부까지 일시 진출하는 등 혁혁한 영토팽창업적을 거두었다.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난 ‘청출어람’이라 할까. 마오쩌둥은 영토확장면에서 그의 멘토 진시황을 훨씬 능가했다. 동북으로는 6.25를 기화로 소련세력을 물리쳐서 한족이 주체가 된 정권이 단 한 시도 점유한 적이 없었던 저 광활하고 비옥한 만주를 차지하였다. 북방의 강 가운데 조그만 섬 하나를 놓고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과의 핵전쟁 일보직전까지 가는 격렬한 지상전도 불사하였다.

서남으로는 평균 해발 4900미터 호흡곤란과 만년설 지대 티벳을 점령하는 것도 성에 안 찼던지, 한니발과 나폴레옹이 넘은 알프스산맥보다 훨씬 더 높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북부까지 찍어 누르는 ‘미친 팽창’ 야욕을 마음껏 능력껏 발산했다. 마오쩌둥은 진시황 시절의 판도를 4배 이상 확장하는 휘황찬란한 위업을 거두었다. 끝으로 한 가지, 필자의 눈조리개를 쫙 펼치게 하는 사건- 1974년 1월 중국은 돌연 남베트남과 전쟁 중이던 북베트남(월맹)의 서사(西沙·Paracels) 군도를 점령하여 하이난다오(海南島)로 편입시킨 이른바 ‘중국의 서사군도 점령사건’을 돌아보기로 한다.

이 사건발생 2년 전에 있은 중일수교시에 일본측에서는 중국측이 행여 돌려 달라 할까보아 노심초사하였던 센카쿠 열도를 비롯한 류큐 군도와 주변 해역 문제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마오가 아니었던가. 마오쩌둥의 대외전략 기조는 군사력을 앞세운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는 전방위적 무한 팽창주의였으나 어디까지나 산악과 평야, 사막과 고원지대 등 뭍(육지)에 국한되었다. 그런데 바다 건너 남의 나라, 그것도 같은 공산국가의 섬들까지 냉큼 집어 삼키기 시작했으니, 이는 두루뭉수리 넘어가서는 안 될 예사로운 사건이 아니다.

진시황을 비롯한 대부분의 황제들처럼 뭍만 무한정 탐하던 마오의 식성이 말년에 이르자 걸신들린 것처럼 ‘물뭍’을 가리지 않는 잡식성으로 변했는지, 필자는 그 내막을 써레질 하듯 살펴보았다.


아 그런데, 키 작은 부도옹 하나가 오뚝, 무논의 찰진 흙덩이처럼 걸려드는 게 아닌가!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 서사군도 침략의 주도자는 덩샤오핑이었다. 당시 덩은 2번째 사면 복권되어 부총리직을 맡아 막장의 끝물에 이른 문화대혁명 정국을 잠시 장악하고 있었다. 덩샤오핑이 주도한 서사군도의 침략은 후일 남사군도 침략, 센카쿠 및 류큐 군도 반환요구 등으로 이어지는, 즉 중국이 대륙확장에서 해양진출로 팽창의 방향을 돌리는 일대 전조였다. <다음회에 계속>
<참고자료>

강효백, <협객의 칼 끝에 천하가 춤춘다>. 한길사 1995.
강효백, <차이니즈 나이트 Ⅱ>, 한길사, 2000.
강효백, <협객의 나라 중국>, 한길사, 2002.
Ross Terrill, Mao: A Biography ,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9.
<中國國家地理 > 2010.10. 總600卷, 中國海洋 特輯珍藏版,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중국은 자본주의, 한국은 사회주의?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⑬-동남방의 여의주를 입에 물다>

마오쩌뚱은 티벳 학살 등 육지영토 확장에 급급 덩은 해양영토 눈독

 

생래적 자본주의자 중국인들이여, 우향우!

8년 전이던가, 주한 중국대사관의 고위외교관 L은 한 공식석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말로만 자본주의라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국가나 다름없고, 중국은 말로만 사회주의국가이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노선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중국의 고위외교관의 발언치고는 하도 거침없는 언사라서 잠시 귀를 의심했지만,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라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 바 있다.

중국은 한마디로 말하기에 너무 어렵고 너무 거대하고 너무 복잡하다. 그래도 20여년의 실제 중국체험과 십여 권의 중국관련 책을 펴낸 중국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한 가지만은 분명히 말 할 수 있다.

중국은 길게 잡으면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이 1978년 개혁개방노선을 정립하였던 30여년전, 짧게 잡아도 19년 전 남순강화(1992년 덩샤오핑의 동남부연해지역 순시)적에, 이미 보혁 갈등, 좌우대립 따위의 이념 논쟁을 걷어치웠다. 개혁개방과 부국강병을 위해 사회주의 독재정에서 자본주의 독재정으로 줄달음쳐왔다. 문화대혁명시 문자 그대로 ‘자본주의를 향해 치달려가는 주자파 (走資派)의 수괴로 숙청당했던 덩샤오핑. 그는 재집권 하자마자 ’우향우‘ 로 내달았다.

다만 덩의 후배 최고지도층은
실사구시의 실천과정 중에 초고속성장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계속 쾌속 질주해 나갈 것이냐, 아니면 내실을 기하며 착실히 점진할 것이냐 하는, 즉 속도의 완급조절에 지혜를 모으고 있다. 즉 중국은 뒤뚱거리는 좌우의 프레임에서 돌파, 쾌속이냐 초쾌속이냐 속도의 완급차원으로 들어선지 이미 한 세대가 지났다.

중국말로 셩이(生意)는 인생의 의의, 즉 왜 사냐, 무엇 때문에 사느냐 따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의미가 아니다. 장사나 영업을 뜻한다. 중국인에게 삶의 뜻은 한마디로, 장사를 잘해서 잘 먹고 잘사는 현실적 이익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지금의 중국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중국 땅은 온통 시장이며 중국인은 모두 상인이다.

서구식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굳게 단련되었다며 자신만만하던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중국인들이 ‘자본주의적인, 너무나 자본주의적인’사람들이란 것이다. 세계최초로 지폐와 어음, 수표를 상용하고 상업광고를 했던 이들, 이미 3천년 전부터 세계최초의 계산기인 주판을 만들어 주판알을 튕겨 왔던 그들 앞에서 우리나라 자본주의 수 십년의 경험은 어쩌면 가소로운 것이리라.

상인종(商人種)의 나라가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를 실험하였던 시기는 1949-1978년 딱 30년간뿐이었단 사실을 간과하지 말일이다. 한 마디로 덩샤오핑 개혁개방 이후 지금의 중국 땅은 온통 시장이고 중국인은 모두 상인들이며 중국정부는 이름만 공산당 사회주의를 둘러쓴, 본질은 경제성장제일의 원조 자본주의 독재정이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은 아래 <표 1>에서와 같이 마오쩌둥 시대의 사회주의 독재정 (D)을 자본주의 독재정(
C)으로 이동시켰던 것이다.

덩샤오핑은 중국인의 잠들어 있던 본능을 일깨웠다. 그는 개혁개방의 자명종을 울려 중화민족본성에 걸맞지 않는 사회주의계획경제 30년 긴 악몽에서 신음하던 비단장사 왕서방, 생래적 자본주의자들을 깨어나게 했다. 그렇다면 덩샤오핑 이후 이제껏 우향우를 향해 줄달음쳐온 중국이 꿈꾸는 미래
모델은 어느 나라일까. 자본주의 민주국가 미국이나 서구제국일까. 국민의 80%이상이 중국화교인 싱가포르, 싱가포르만큼 알차고 풍요로우나 통제된, 싱가포르보다 1만 5천배 넓은 거대한 자본주의 독재정 국가일까(<표1 참조>).

◇ <표1> 민주 독재 자본 사회주의와 중국의 방향


나의 유해를 바다에 뿌려 달라

“각막은 기증하고 시체는 해부한 후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 달라.”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의 유언이다. 1997년 3월, 오색 꽃잎에 쌓인 덩의 유해는 중국 동남부 앞바다에 뿌려졌다.

덩샤오핑이 바다를 처음 만난 때는 그의 나이 15세 되던 해, 1920년이었다. 비교적 부유한 전직관료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그토록 어린나이에도 프랑스로
유학
을 떠날 수 있었다(마오쩌둥에서부터,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에 이르기까지 현대중국 역대 최고지도자들은 모두 중산층 이상의 가정출신이라는 사실에 대해 심층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상하이에서 닻을 올린 여객선이 망망대해 인도양을 건너 수에즈운하를 거쳐 지중해를 가로질러 프랑스의 마르세이유 항에 닻을 내리는 길고 긴 해상여행에서 소년은 무엇을 꿈꾸었을까.

1922년 18세이던 덩샤오핑은 프랑스에서 중국소년공산당에 입당했다. 그 후 모스크바의 중산대학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1929년 광시성에서 폭동을 주도하였다. 1934년 대장정에 참가, 마오쩌둥파의 유력한 간부가 되어 야전군의 지도자로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덩샤오핑은 평생 바다를 사랑하였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처럼 수영을 좋아했다. 마오는 강이나 호수에서의 수영하길 즐겼지만 덩은 거센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의 수영, 즉 바다수영 마니아였다. 헤엄을 칠 때 마오의 시선은 딱딱한 내륙을 향해 고정되어 있는 반면, 덩의 눈길은 바다 수평선 건너편을 향하고 있었다고 한다.

3번 쓰러지고 3번 일어선 73세의 덩샤오핑이 재집권했을 당시, 전임자 마오에게 물려받은
유산은 죽의 장막에 갇힌 채 평등 가난하게 살아가는, 13억 인민의 과부하에 걸린 극빈국이었다. 집권 이듬해인 1979년 1월 벽두, 덩샤오핑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을 방문하였다.

중국역대 최고지도자로서는 사상 최초로 방미한 덩은 워싱턴에서 지미카터 미 대통령과 중-미 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마오 시대 중국은 봉건제국시절 중원에 앉아서 속방으로부터 조공이나 받아오던 전통때문인지 초청외교가 주를 이루었고 방문외교는 드문 편이었다.

덩샤오핑은 방미기간 중 “쇄국은 중국에 정체와 빈곤, 우둔과 낙후를 가져왔다. 쇄국정책으로는 국가 발전은 불가능하다.” “바다는 우리의 장벽이 되어서는 안 된다. 태평양은 중국과 연대하여야 한다.”라고 누차 강조했다.

미국방문에서 돌아온 후 덩샤오핑은 중국을 발전시키는 데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관계없다고 주장하며 유명한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남쪽 기슭이든, 북쪽 기슭이든 정상에만 오르면 된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원래 이 말은 그의 고향 스촨 지역에 널리 전해오는 속담이다. 실질적이고 실효성을 중시하는 스촨 지역민의 가치관을 대변해주는 격언이기도 하다.

◇ 84세의 고령이던 1988년 바다에서 수영을 즐기며 노익장을 과시하던 덩샤오핑


바다는 물이라기보다는 영토이다

덩샤오핑에게 바다는 물이라기보다는 진출할 시장이자 확보하여야 할 영토이다. 자본의 선박이 종횡무진하는 탁 트인 영토, 바다에서 덩은 경제특구, 일국양제, 외상투자기업제 등 창의적이면서 실사구시적인 정책들을 건져 올렸다.

세계적인 중국학 석학, K 페어뱅크 하버드대 교수마저도 “덩샤오핑의 문호개방 정책은 중국의 유구한 대륙성 전통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라고 어리둥절했다.

중국대륙의 옆구리에는 바다가 항시 있어 항해업이 잠시 발달한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는 바다가 부여한 문명이 없었다. 바다는 중국인의 문화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좀체 바다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설령 연해지역에 위치해있더라도 역사상 어떤 왕국도 바다 쪽으로 발길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원래 바다를 두려워하는 ‘공해증(恐海症;필자의 조어)’이라도 걸렸는지, 오로지 내륙의 중원을 차지하려고만 하였다.

지정학적으로 중국은 내륙적 환경을 이루고 있어 해외로의 진출은 제약을 받아왔던 곳이라서 폐쇄적인 주민생활을 영위해왔다. 오직 공간만 있을 뿐 시간은 멈춘 대륙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은 중국민족으로 하여금 황하의 중하류, 즉 중원지역이 천하의 중심으로 보이게끔 하였다. 이민족이 사방에서 포위한 피해의식 속에서 그들은 강력한 응집력과 내향성 문화의 심리구조와 전통적 가치관을 형성하여왔다.


그런데, 불굴의 작은 거인 덩샤오핑은 돌파구를 바다에서 모색한 것이다. 바다로 향하는 것만이 중국의 개혁개방 부국강병의 유일한 활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성공적 사고치기’를 상상하는 가능성을 특히 동남연해와 남중국해에서 찾았다. 대륙성에서 해양성으로 전환, 반만년 대륙성 일변도 중국사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었다.

바다는 마치 어머니가 자녀를 낳아 기르듯 자유무역을 낳아 기르는 것 같다.비옥한 논밭과 평원은 인간을 토지에 속박시키지만 드넓고 변화무쌍한 바다는 인류로 하여금 이윤을 추구하게 하고 무역에 종사하게 한다. 외골수적 대륙지향성이라는
자폐증에다 중화사상이라는 과대망상증의 합병증을 앓아오던 중국사에서, 경제발전과 무역진흥의 씨앗을 광대무변한 바다의 전답에 최초로 파종한 자는 다름 아닌 덩샤오핑이다.

그는 특히 동남부해안 광둥지역의 발전을 내륙지역으로의 파급효과를 기대하는 선부론(先富論)을 내걸었다. 산을 등지고 바다를 마주보는 자연환경은 광둥사람에게 개방과 자유를 중시하는 기풍을 함양시켰다. 일찍이 송나라 시절부터 광둥의 중심 광저우는 만국의 상인들이 끊이지 않고 출입한 대외무역항구였다.

명나라 시절에는 광둥에만 오늘의 세관격인 행(行)이 13개소나 설립되었고 청나라 때에는 중국의 대외통상항구가 되기도 했다. 대외무역과 중상전통의 기풍은 광둥사람들을 바다쪽으로 향하게 했으며, 끊임없이 외국사람과 교역을 하며 살아가게 했다. 광둥은 현대 중국의 자생적 하이파이(海派; 바다와 같은 개방파)의 근거지였다. 이러한 광둥사람들은 덩샤오핑 필생의 열렬한 지지세력이기도 하였다.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중국 동남부 바다에 5개의 자본주의 섬, 선전, 주하이, 산터우, 샤먼, 하이난 등 경제특구를 설립하였다. 개혁개방과 현대화건설의 총설계사는 바다의 기백으로 중국대륙에 개혁개방의 거대한 물결을 일게 하여 싱싱한 활기로 되살아나게 하였다. 덩샤오핑은 바다를 등지고 누워있던 중국을 일으켜 세워 바다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였다. 검버섯 가득한 노대국의 뺨에 홍조가 돌게 만들었다. 빈곤의 어둠에 혼곤히 젖어 있던 중국대지를 윤기 자르르 흐르는 피부로 빛나게 만들었다.

육지면적은 업그레이드, 해양면적은 무단 팽창

1984년, 용의 여의주에 비견되는 홍콩을 반환받는 중영공동성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덩샤오핑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1997년에도, 다시 말해서 신중국이 성립되고 48년이 지나서도 홍콩을 회수하지 못했다면 중국 지도자나 정부 모두 중국 인민에게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현 중국정부는 청조 말엽이나 다를 바가 없고, 현 중국 지도층도 류큐군도와 대만을 일본에 할양해준 이홍장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해안선을 가진 국가가 바다를 제패하지 못하고 바다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다면 바다는 재화와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비탄과 고통을 가져온다.”

정치 군사적 목적만으로 획득한 제해권은 온전히 유지될 수 없다. 재해권 장악의 주요목적이 무역증진과 경제발전이어야만 오래 유지될 수 있다. 명나라 초에 취해진 금해(禁海)정책이후 중국의 바다는 텅빈 곳간과 같았다. 비록 정화(鄭和)의 함대가 15세기 전반 7차에 걸친 해외원정을 실시했으나 그 원정의 주요목적은 무역이 아니라 명나라 황제의 권위 선양이었다. 무역이익은 전무했고 내륙농업의 가치만 소모하였을 뿐이었다. 설령 금해정책이 없었더라도 경제적 이익의 동기가 부실한 제해권은 대가가 비싼 사치였을 뿐이었다.

“칼날의 빛을 숨기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르자”의 도광양회(韜光養晦)를 기치로 내걸며 마오쩌둥에 비해 비교적 온건한 대외정책을 펼쳤던 덩샤오핑은 해양영토 팽창에만은 무력침략도 마다하지 않았다. 1988년 3월, 남사(南沙·Spratlys)군도 8개 섬을 베트남으로부터 무력으로 강탈하였다.

1992년 중국 영해법으로 남중국해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선언하여 남사군도를 1974년 점령한 바 있는 서사군도와 함께 하이난성 관할에 포함시켰다. 230여개의 섬, 초(礁), 탄(灘)과 사주(沙柱)로 구성되어 있는 남사군도의 전체육지 면적은 작지만 그것의 해역 면적은 약 80여만 ㎢로서 중국 해양국토면적의 3분의 1에 달한다. (이는 마치 류큐군도 해역이 일본 전체해양국토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것과 흡사하다.)

그리하여 덩샤오핑은 중국 27개 성급 광역행정자치구에서 원래 가장 작은 하이난 성(육지면적 3.4만 ㎢)을 배타적 경제수역 등 관할해양면적 213.4만 ㎢을 더하면 가장 큰 성으로 팽창시켰다. 마오쩌둥은 산소결핍지역인 티벳을 무수한 피를 흘려가며 거칠게 점령하는 등 육지영토만을 팽창시키는데 몰입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덩샤오핑은 육지영토는 경제발전으로서 질적 업그레이드를 기하고, 해양영토는 민첩 윤활(潤滑)하고, 무단하게 팽창시켜왔다.

◇ <표2> 중국 세대별 팽창 방향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중국 일본은 이미 해군기지 세웠는데 독도는 왜?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⑭-남서군도, 이어도와 영서초>
중, 1평 바위섬을 해군기지로…일, 더블베드만한 섬에 활주로 가설

 

 

독도에 대해 일본은 양심이 없고 한국은 대책이 없다. 일본의 망언은 이미 망언 수준을 넘었다. 망동으로 치닫는 일본의 행태에 대다수 우리국민들은 치 떨리는 배신감과 공분을 금치 못하고 있다. 명명백백한 대한민국 국토를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과서에 자국 영토로 표시해 놓고 가르치고 있는 데도 ‘아직 나는 배가 고프다’는 식인지, 최근 일본 국회의원들마저도 독도탈환을 공언하며 울릉도를 방문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어이없는 일본의 행위에 더욱 어이없는 것은 우리 지도층 일부의 패배주의에 함몰된 지나친 저자세이다. 아니 이제 좀 식상하지 않는가, 수 십 년 간
앵무새처럼 반복해 온 ‘독도를 분쟁지역화하려는 일본의 의도에 넘어가지 않아야’,‘조용한 외교’, ‘(실행 없이) OOO검토해야’ 따위의 상투어들은 스스로 생각해도 무의미하고 민망하지 않는가. 만일 남이 자신의 사유지를 뺏으려고 할 때도 자신의 정당한 소유권의 주장을 감정적 대응으로 매도하면서 주구장창 ‘조용한 교제’만을 읊조리고 있을까.

독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주도에 버금가는 큰 섬이다. 독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독도관할해역은 남한 육지 전체면적과 맞먹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한민국 국가 부동산이다. 맞대응하지 않음으로써 분쟁지역화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실제로 독도는 남사군도와 센카쿠, 오키노도리와 북방4개 도서처럼 분쟁도서(Disputed Islands)가 된지 이미 오래이다. 국내절차법과 달리 설사 일본이 독도영유를 주장하며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더라도 한국이 응소만 하지 않으면 소송이 진행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국제절차법원칙이다.

어떤 땅을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기 위해서는 현재 국제법상으로는 선점이론이 적용된다. 선점이론은 해당 지역을 점유의 의사를 갖고 먼저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나라가 그 땅의 영유권을 갖는다는 이론이다. 즉 국제법상으로도 사실상으로도 ‘실효적 지배’만 확실히 유지, 강화하면 영유권의 주체가 교체되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는다.

독도에 대해 갈수록 도를 더하고 있는 일본의 망언과 망동에 대해 몇십년 캐캐묵은 레퍼토리로 끌고 나가면, 즉 당연한 우리땅 독도인데 일본정부에 강력한 항의나 실효적 지배강화조치 없이 미지근한 ‘당부(부탁)’만 하다보면, 자칫 국제법상 ‘묵시적 승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 위험성도 없지 않다.


따라서 필자는 지금 물과 뭍을 가리지 않고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중국과 전통적인 해양 식탐(食貪)국가 일본이 그들 분쟁도서의 실효적 지배를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떠한 조치를 감행하는지 비교분석해보고자 한다. 단 일본의 센카쿠와 오키노도리의 실효적 지배 책략과 그 실천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고 또 앞에서 상당부분을 할애하여 다룬바 있기에 생략하기로 하고 최근 중국과 베트남간의 영토분쟁이 백열화되고 있는 남사군도를 살펴보겠다<표1참조>.



개혁개방과 경제건설가의 이미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덩샤오핑을 다른 각도로 뒤집어 보면, 그는 매우 능란한 지능적 팽창주의자였다. 설산과 사막지대와 같은 별 쓸모없는 육지영토 확장에 광분하여 세계적 호전광으로 비난의 십자포화를 한 몸에 받은 마오쩌둥과 달리 덩샤오핑은 돈맛이 쏠쏠한 해상영토의 확장에의 은근한 탐닉을 즐겼다.

독도 2배 넓이 섬에 군용공항을 건설한 중국

1974년 1월 서사군도의 무력점령을 주도한 덩샤오핑은 그의 정책노선이 쾌속의 탄력이 붙은 1987년 말에서 1988년 3월까지 중국 해군으로 하여금 영서초(永署礁, Fiery Cross Reef), 태평도(太平島 Itu Aba), 적과초(赤瓜礁, Johnson Reef), 증모암사(曾母暗沙, James Shoal) 등 남사군도의 9개의 섬과 바위섬(현초 顯礁: 드러난 암초)을 기습 공격하게 하였다.

남사군도 해전에서 중국 측은 함정 3척 손상, 사망 6명, 부상18명의 비교적 가벼운 희생으로써 군함 1척 격침, 4척 파손, 사살 60여명, 소령 1명 포함 40여명의 베트남 해군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해전은 덩샤오핑이 집권한 이듬해 1979년에 북부베트남을 침공하다 사실상의 참패당한 치욕에 대한 복수전이라고 할 수 있다. 덩은 오히려 베트남 전체육지면적보다 광활한 해양영토를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유엔 해양법에 따르면 인공적으로 형성된 지형물은 섬이 아니며, 만조 때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 것도 섬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남사군도에서 중국해군은 섬이 아닌 바위섬(현초)까지 점령하고, 이곳 전역에 인공적인 시설을 설치, 운영하면서 자국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남사군도의 거의 모든 섬과 바위섬에다 오성홍기를 게양하고 등대를 건설하였다.

태평도와 영서초 등 6개 섬에는 해군을 상시 주둔시키고 있는데 특히 남사군도 최대섬인 태평도에는 군용공항을 건설하여 남중국해의 중국의 제공권을 확보하였다. 독도 면적의 2.3배가량인 태평도(0.443㎢)는 원래 야자수와 각종 열대수가 우거진 작은 섬이었는데 점령이후 중국은 해군기지와 군용공항을 건설하였다. 현재 태평도 해군기지에는 구축함 제162호와 고속초계정 제443호 등을 위시한 수척의 중국함대가 나들락거리고 있다.

◇ 독도면적의 약 2.3배 넓이 태평도 전경 출처(사진 왼쪽) 태평도에 건설한 군용공항 활주로를 이룩하고 있는 중국 공군기(사진 오른쪽) 출처 http://image.baidu.com/


1평 바위섬을 해군기지로 만든 무서운 중국

지면 관계상 영서초 하나만 더 살펴보기로 한다. 영서초는 원래 도저히 섬이라고 부를 수 없는, 만조시 1평 남짓한 총면적 3.6㎡! 단 한 사람이
바다낚시
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초미니 바위섬을 중국은 몇 년 만에 완전한 해군기지로 탈바꿈시켜버렸다.

영서초는 북위 9도 37분, 동경 112도 58분에 위치하며, 중국대륙과 거리 약740해리, 하이난다오로부터 약 560해리, 홍콩에서 싱가포르까지의 남중국해 중앙항선으로부터 250해리 떨어져 있다. 만조시 남서쪽 끝단에 0.6m가량이 수면에 돌출되고 나머지는 수중에 잠기는 간출지에 해당하는 바위섬이었다.

1988년 2월 중국은 군사작전을 통해 베트남으로부터 이 바위섬을
탈취, 인공섬 및 헬리콥터 착륙장, 보급기지 등을 건설하고 4000톤급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300m 길이의 부두시설까지 갖추었다. 그 후 중국은 해양관측기지를 건설하고 최첨단 장비를 비치해서 해양자료를 수집, 인근을 항행하는 항공기와 선박들에게 기상관측 정보 등을 제공하고 있다. 최근 4세트의 소형위성접안시설과 인터넷통신설비를 추가로 설치하여 400여명의 해군병사들의 문화학습과 여가생활을 개선하였다고 발표했다.

지금 중국 중학교 1학년과정의 역사 및 사회교과서와 영해법 등 관련법규에는 중국의 최대 성(省)은 하이난다오로, 남사군도 전체를 중국 영토로, 영토의 최남단을 남사군도 증모암사로 명기하고 있다.

◇ 영서초 만조시에 드러난 부분 1평 남짓한 바위부분에 표지석을 세웠다.(사진 왼쪽) 400여명의 중국 해군이 진주하고 있다.(사진 오른쪽) 출처,http://image.baidu.com/


중국의 해상 전략은 남사군도 분쟁에서 중국은 계속 시설물을 설치하는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여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이들 바위섬들에 대한 영유권을 정당화하고 있다.

중국이 이처럼 도서분쟁에서 시설물, 특히 군사기지를 설치하는 (이점은 일본도 마찬가지) 등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는 공격적 전략을 취하는 근본원인은 두 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중화주의적 팽창주의의 연장선상에서 동아시아 해상의 지배권을 차지하는데 있다.

둘째,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것이다. 19세기 말 일본의 류큐병탄에 대한 무대응 지연책으로 결국은 국제법상으로도 묵시적 승인으로 간주되어 태평양 출구봉쇄와
광대한 류큐해역 상실이라는 치명적 패착을 다시는 저지르지 않으려는 인식개선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과거 중국의 류큐군도에 대한 영향력 상실과 현재 중국의 남사군도에 대한 영유권확보와 관련한 자기반성적 책략과 과감하게 결정짓고 단호하게 나가는 추진력은 대한민국의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 강화에도 참조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다.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독도에만 흥분하고 이어도는 나몰라라´
중국 야욕 막으려면 제주에 해군기지를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⑮ 제3세대, 달콤한 과실을 따먹다>

서산다오서 이어도까지 13시간 부산선 21시간 8시간이나 중국이 빨라

 

 

‘바다로 나가자’의 상하이에서 상하이방은 바다로 나갔다

상하이(上海), 아시아 대륙의 최장 민물줄기 장강(양쯔강)이 지구의 육지를 풍덩 다 집어넣어도 남을 만큼 가없이 드넓은 바다
태평양을 향해 행진하다 점차 짠 해수로 농도가 짙어가는 ‘델타 황금 삼각주’ 거기쯤이 바로 오랜 잠에서 깨어난 21세기 중국인의 꿈과 야망이 불꽃놀이를 하는 곳, 이름하여 상하이라는 도시이다.

중국 제1의 경제 무역 금융도시 상하이 도심은
빌딩 바다, 상하이 교외 동쪽 끝은 동중국해와 태평양, 교외 남서북 장쑤성과 저장성 동북부는 가도 가도 끝없는 우리나라 김제평야와 만경들 수백 개 수천 개를 합쳐놓은 듯한 초록 바다이다.

그런데 상하이는 어찌하여 상하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혹시 바다위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상하이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전설의 해저도시 아틀란티스 말고 이 세상에 바다 아래 있는 도시가 어디 있겠는가.

중국말로 ‘차를 타자’는 말로 ‘상처’(上車)다. 상하이의 ‘상’(上)은 동사이고 ‘하이’(海)는 명사다. 즉 상하이는 ‘바다로 나가자’는 뜻이다. 바다로 나가자, 이 얼마나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도시 이름인가! 바다로 나가서 장사하겠다는 말은 지난 150여년 동안 상하이의 인근 지역인 저장성의 난징, 양저우(장쩌민과 후진타오의 고향), 장쑤성의 항저우와 닝보 등지에서 성행했다.

뿐만 아니라 멀리 영국의 런던과 미국의 뉴욕 등 세계 각지에서도 유행했다. 당시 세계에서 유일한 무비자 여행도시였던 상하이는 모든 사람들이 상하이에서
창업하는 것을 장려했고 이곳으로 몰리는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의 피부색과 머릿속과 가슴속의 칼라를 묻지 않았다.

20세기 후반, 덩샤오핑 역시 색, 즉 컬러를 묻지 않았다. 아니 컬러 구별을 지극히 혐오하였다. 덩샤오핑은 검은 고양이나 흰 고양이나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니,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허튼 색깔놀음에 빠지지 말고 실사구시 정신으로 경제발전에 일로매진하자고 외쳤다. 권좌에 물러나기 직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개혁개방의 신호탄을 광둥 선전이 아니라 상하이 푸동(浦東)에서 쏘아 올려야 했다. 중국의 미래는 상하이에 달려 있고 상하이의 미래는 푸동에 달려있다.”

이러한 덩샤오핑의 술회와 기대는 마치 바둑대국에서 불계승을 거두지 못한 승자의 복기를 연상케 한다. 그가 이토록 안타까워하고 편애한 상하이 푸동은 어디인가? 푸동은 중국 경제 제1의 도시, 상하이 시내를 가로지르며 황푸(黃浦)강 동쪽 땅을 말한다. 서울의 강남인 셈이다.

동방불패 상하이방은 기적의 활을 쏘았다

덩샤오핑은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진압한 후 이를 은밀히 지지했던 자오즈양을 숙청했다. 당시 상하이 제1인자 당서기를 맡고 있던 상하이방(上海帮)의 거두 장쩌민을 그의 마지막 후계자로 지명, 중앙당총서기로 등극시켰다.

세세대대로 윤택한 도시 양저우의 자본가 가문출신인 장쩌민은 상하이 시장과 상하이 당서기 시절 같이 일했던 인물들을 대거 베이징으로 끌어들였다. 경제부총리를 거쳐 국무원 총리를 지낸 주룽지도 상하이 시장을 지낸 사람이다. 이들 상하이방은 아직도 막강한 파워를 보유하고 있는 중국 정치의 실세이다.

현재 중국 최고지도층 9인의 정치국상무위원중 권력서열 2위 우방궈, 4위 자칭린, 5위 리창춘, 9위 저우융캉 등 4명은 상하이방 직계로, 1위 후진타오와 7위 리커창도 범(凡)상하이방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들은 태자당과 손을 잡고 시진핑(習近平 1953년생, 전 상하이 당서기, 칭화대학 법학박사)을 차기 후계자로 지명한 것도 동방불패 상하이방의 저력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상하이방은 정치 이념보다는 경제건설에 중점을 두고 중국 전체를 상하이처럼 만들겠다는 계획을 추진해 왔다.

상하이방은 상하이를 용의 머리, 장강(양쯔강)을 용의 몸에 비유하였다. 과감한 개혁개방 정책으로 용의 머리를 자극하고, 그 힘이 용의 몸통, 장강을 통해 꼬리인 중서부 내륙까지 미치게 하자는 것이다. 그들은 거짓말처럼 상하이를 중국을 움직이는 용두마로, 푸동을 상하이를 이끄는 용의 눈으로 변신시켰다.

장쩌민 시대가 정식으로 개막된 1993년, 상하이방은 대외개방에 대한 인식을 동남연해의 광둥의 실험실 차원에서 실제적 차원으로 전환했다. 상하이를 경제 무역 금융 중심지로 건설하여 장강 델타(삼각주)와 장강 전 유역에 걸쳐 지역경제의 발전을 촉진한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장쩌민 정부는 상하이 및 장강 델타 지역을 화살촉으로, 연해지역을 활로, 장강을 화살로서 비유했다. 1980년대는 연해지역의 활을 지속적으로 확장시킨 시기였고, 1990년대는 화살촉을 날카롭게 연마하는 시기로, 다시 2010년까지는 화살을 쏘아야 할 기간으로 설정했다(아래 그림 참조). 그리고 지금 그들의 꿈은 기적처럼 현재화되고 있다.


상하이방은 개방개방 정책으로 용의 머리(상하이)를 자극하고, 그 힘이 몸통(장강)을 통해 내륙까지 미치게 한다는 경제발전계획을 상당부분 실현하였다.

중국의 서부,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동쪽 하늘은 맑으나 서쪽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네”

중국의 번화한 동부 연해지역과 낙후되어 있는 서부 내륙지역간의 격차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구절이다. 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짙은 법인가. 덩샤오핑의 동남지역을 우선 배부르게 하자는 선부론은 극심한 지역격차를 유발하였다. 덩샤오핑의 경제발전 일변도정책은 원가를 고려하지 않고 동서간의 엄청난 양극화를 초래하여 심각한 사회적 불안요인이 되었다.

앞에서 여러번 언급한 대로 장쩌민은 지역균형발전의 신균부론에 입각해 이른바 ‘서부대개발’을 내세웠다. 낙후한 소수민족 밀집지역인 서북지역의 개발과 국경지대에 초점을 맞추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서부대개발은 순전한 ‘국내용 낚시성 구호’였다. 21세기형 동부해안의 눈부신 번영에 19세기형 원시 유목민사회에 머물러 있는 서부지역민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의 서부는 미국의 서부가 아니다. 중국의 서부는 젖과 꿀이 흐르는 미국의 캘리포니아주나 워싱턴
주가 아니다. 주로 설산지대와 사막 등으로 구성된 신장위구르와 시장(티벳) 등 중국의 서부는 인류생존 부적합지역이 대부분이다. 중국서부는 미국서부처럼 태평양이라는 지구최대의 광장과 접하지 않았다. 중국서부는 출구가 없는 꽉 막힌 벽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내불만 무마용 구호에 지나지 않는 ‘서부대개발’을, 우리기업들을 향해 중국서부에로의 투자진출을 장려하였던 적지않은 수의 국내 ‘중국전문가’들의 글과 말을 접할 때마다 나의 뇌리에는 이상(李箱)의 시 ´오감도(烏瞰圖)´가 생뚱맞게 떠올랐다.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로 질주하오 /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2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하략)

명(名)따로 실(實)따로

중국에서는 명실상부가 드물다. 중국은 ‘명(名)따로 실(實)따로’ 공화국이다. 좌회전 깜박이 등을 켜놓고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우회전하는 게, 사회주의를 내걸고는 자본주의로 질주하는 게, 제1인자보다 제2인자가, 막전의 리더보다 막후의 실세가 판을 쳐온 중국이다. 장쩌민의 행적과 전략을 종합분석해보면 더욱 그렇다.

그의 행태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고사성어를 찾기 어렵지만 가장 유사한 것을 들라면 성동격서(聲東擊西).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적을 친다는 뜻으로, 동쪽을 치는 듯이 하면서 서쪽을 치는 병법의 하나로서 상대를 기만하여 공격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하지만 성동격서가 아닌, ‘성서격동(聲西擊東)’이라고 할까, 장쩌민을 비롯한 상하이방은 서부내륙을 개발하자며 소리쳤으나 실제로는 동부해안으로 줄창 진출하였다.

약 14~15간 집권하였던 장쩌민의 최대업적은 뭐니 뭐니해도 15년 연속 9% 이상이라는 경이적인 경제
성장
률과 매년 평균 15%이상의 총수출액 성장률을 기록한 것과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가입을 성공시킨 것이다. 특히 그의 집권 첫해인 1989년에는 총무역액 1168억 달러, 세계 23위의 마이너리그 무역중소국이던 중국을 후진타오에게 바톤을 넘겨준 2003년 총무역액은 8,512억 달러, 세계 제4위의 메이저급 무역대국으로 업그레드시킨 것이다. 2010년말 현재 중국은 대외무역액, 외환보유고, 외자유치액 세계1위의 3관왕을 달성하였고 국내총생산과 국민총소득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2위를 차지하였다. 명실상부한 경제통상대국이 되었다.

31개 해군기지 신설, 리모델링하여 해군력 증강

이러한 휘황찬란한 무역증진과 경제발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상하이방이 궁리하고 추진한 일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국제경제법과 국제해양법을 열심히
공부
한 것이고, 둘째, 중국 전역에 31개의 해군기지(군항)를 신설하거나 리모델링하여 해군력을 증강시킨 것이다.

우선, 장쩌민을 위시한 정치국상무위원 9인은 상하이 화동정법대학 국제경제법교수인 차오젠밍(曹建明)을 비롯한 저명 국제법 교수들을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베이징 중난하이(중국의 청와대 격)으로 초빙하여 90분간 국제경제법과 국제해양법에 대한
강의를 수강하는 것으로 한 주의 업무를 시작한 것이다. 국제경제법은 WTO 가입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고 국제해양법은 제해권 확보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공로로 차오젠밍은 2011년 현재 중국 최고인민검찰원 검찰장(한국의 검찰총장격)으로 재직 중이다.

◇ 중국의 중대형 해군기지(군함) 위치도

장쩌민은 1992년 영해및 접속수역법에 1996년에는 배타적 경제수역 및 대륙붕법에 서명 시행하였다. (일본도 1996년 배타적 경제수역 및 대륙붕에 관한 법을 제정하였다. 반면에 우리나라만 배타적 경제수역법만 제정하고 대륙붕에 관한 별도의 법을 두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앞으로 한, 중, 일 당사자간 협상시 제7광구와 같은 배타적 경제수역 이외의 대륙붕에 대해 우리의 권리를 주장할 국내법적 근거가 취약한 실정이다. 입법적 보완이 시급하다.)

중국역사상 최초로 국가원수가 해상사열식 거행

한편 장쩌민은 북해(발해와 서해)에 7개소, 동해(동중국해, 제주도 이어도해역, 류큐해역, 타이완해협)에 8개소, 남해(남중국해)에 16개소, 전국 총 31개소에 중대형 해군기지를 신설하거나 보강하여 해군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그림 <중국의 중대형 해군기지 위치도> 참조). 지면관계상 ‘전대미문적 사례’ 두 가지만 들고자 한다.

1995년 10월 19일은 아시아의 유구한 대륙성 노대국은 왕과 황제, 주석에 이르게까지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일을 저질렀다. 장쩌민 당 총서기 겸, 국가 주석, 당 중앙군사위주석 장쩌민은 황해(서해)모 해상에서 당정군 고위 간부를 배석시켜 놓은 자리에서 대규모 관함식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관함식이라는 국가 최고 통치자가 군함의 전투태세와 장병의 군기를 검열하는 해상 사열식이다.

순양함, 유도미사일 구축함, 헬리콥터구축함, 미사일 호위함, 초계함, 대형수송함, 고속정, 고속전차 상륙함, 상륙지원정, 미사일 핵잠수함, 재래형 디젤 재래식 잠수함, 기뢰함 등등 항공모함 하나만 빼고 거의 모든 유형의 군함들이 바다의
무대
위에 출현하였다. 핵잠수함을 포함한 절대다수의 각종 군함들은 중국자체기술로만 개발한 것이다.

이에 최신예 전투기와 전폭기, 헬리콥터, 군사형해상 선박위그(WIG)선 등도 찬조 출연하였다. (2010년 현재 중국해군은 25만 5천명 구축함 26척, 프리깃함 52척 상륙함 60척, 디젤잠수함 62척, 핵잠수함 8척을 보유한 것을 알려져 있다.) 이날 중국인민해방군 해군의 대공사격과 대함사격 능력 등을 선보이는 시범사격이 진행됐다.

중국역사상 미증유의 국가원수가 참관한 해상사열식을 마친 직후 치사에서 장쩌민은 이렇게 강조했다. “해양을 개발하고 이용하는 것은 중국의 장기 발전에 있어서 갈수록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우리는 반드시 전략적으로 높이 해양을 인식하고 전인민들의 해양의식을 증강해야 한다.”

1997년 2월 20일, 덩샤오핑이 사망했다고
발표한 바로 다음날, 112호와 166호의 미사일구축함, 남운 953호의 종합보급선으로 구성된 대규모 중국함대는 태평양을 횡단한 것이다.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항과 본토의 센 디아고 군항에 입항하여 각종 전술 공수 훈련을 하였다. 연이어 중국함대는 멕시코 페루 칠레의 중남미 3개국의 주요항구에 오성홍기를 게양한 군함들을 정박시켰다. 이 역시 파천황적 일대 사건이다.

제주 해군기지건설 서둘러야

최근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싸고 정부와 여야, 좌우 시민단체, 현지주민과 외부단체간에 찬반논란이 격렬해지고 있다. 이에 필자는 제주해군기지에 대한 언론기사를 훑어보았더니 해군기지반대론자들의 반대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 해군기지 건설로 인하여 환경파괴가 우려되기 때문, 둘째 중국이나 일본 등 주변국의 자극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군기지가 환경파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의 진해시를 보아라, 깨끗하고 아름다운 도시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지 않은가. 중국의 하이난다오(海南島)에도 해군기지가 4군데나 있으나 중국 27개성 중에서 가장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다고 평가받으며 중국최대의 관광휴양단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남한 육지 전체면적보다 넓은 제주도 및 이어도 남쪽해역을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우리나라의 수출입물량의 90%이상이 제주 남방해역 항로를 이용한다. 이어도 등에서 중국 등 주변국과 해양분쟁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주변국의 자극을 우려하여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것은 현실을 등한시한 배부른 소리이고 안보영역에서는 평화를 위한답시고 자국의 생존위협을 희생하면서까지 타국의 탐욕을 배려할 가치도 없고 이유도 없다. 기지건설 반대론자 일각에서 우려하는 부분,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만드는 것은 미국에 대한 군사적 의존도를 줄이려는 노력이지 미국을 위한 노력이 아니다.

이미 정치 군사력을 제외하고는 경제무역과 이공과학기술분야에서는 작지만 강한 나라, 강소국이 된 대한민국 영토에 우리나라 해군기지 세우는데 주변국가 눈치 보는 게 옳은 태도일까. 불필요한 도발은 자제해야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는 것처럼 그들이 불편해야 할 만큼 요충지라면 국가의 주권수호를 위해 해군기지 건설은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 강효백교수 자료제공 ⓒ국민일보 2009.04.14

중국, 이어도를 노리고 5개소에 해군기지 건설?

“아차 한발 늦었구나.”중국이 한국의 해양정책의 실행중에서 제일 부러워하는 것은 이어도 건설이다.

중국은 누구나 기피하는 수중 암초인 이어도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1995년 이어도 해양과학연구기지 건설을 착수한 것은 지점과 시점을 절묘하게 선택한 것으로 한국의 이러한 심모원려와 그 실천에 극찬하였다.

그래서일까. 암초에 불과한 통다오(童島)를 이어도의 기점으로 삼던 중국이, 1997년 상하이 앞바다의 서산다오(0.3㎞ 독도의 1.5배 크기)로 기점으로 이동, 중국 측으로 대거 후퇴하였다. 그런 후 중국 정부는 서산다오를 불침항공모함식의 해군기지화를 서둘렀다.

2009년 1월 국토해양부 산하 국립해양조사원은 이어도의 중국측 기점을 이어도에서 287㎞ 떨어진 서산다오(余山島)로 변경했으며 당초 이어도에서 245㎞ 떨어진 퉁다오를 기점으로 한 것에서 42㎞더 멀어진 것이다. 외교통상부는 이를 근거로 해외 공관지도에 이어도 기점을 시정한 바 있다.

앞서 필자는 해양주권 확보차원에서 이어도의 중국측 기점을 서산다오로 바로잡고자 필자는 한국 최초로 <데일리안>에 제기한 이래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중국 측의 이어도 관련 사진 및 지도를 보면 퉁다오를 기점으로 한 것은 한국측 지도를 인용한 것 외에는 한 건도 없으며 지금까지 우리스스로 중국측에 유리한 입장을 취해 온 것이었다.

이어도 기점 및 관할권과 관련하여 <데일리안>은 2008년 8월 9일자 기사를 비롯 10여차례의 집중탐사보도한 바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일부 언론과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아직도 통다오로 표시된 잘못된 지도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넓은 의미의 국토참절행위에 해당될 수 있으니 빠른 시정을 촉구한다.

◇ 중국측 변경된 이어도 기점인 서산다오에 건립한 기점 표시석.(사진 왼쪽) 서산다오의 해군기지, 이어도로부터 불과 13 시간 거리, 반면 부산은 21시간 거리.(사진 오른쪽)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시 중국보다 5시간 먼저 이어도에 도착

이어도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부산 작전사령부에서 출동하려면 21시간 (481㎞,시속 22㎞기준), 현재 이어도의 중국측 기점이자 해군기지가 있는 서산다오에서는 13시간 (287㎞)이다. 중국 해군이 한국보다 무려 8시간 먼저 이어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제주 서귀포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불과 8시간(174km)거리로 우리가 중국보다 5시간이나 먼저 이어도에 다다를 수 있다.



비단 서산다오 뿐만 아니다. 한국의 제주도와 이어도해역 및 일본의 류큐 해역에 대응하는 중국의 해군기지는 난통, 저우산, 닝버, 원저우 등 5개소나 된다. 섬 전체가 중국경제특구이자 관광특구이자 현재 제주도와 자매결연관계를 맺고 있는 하이난다오만 하더라도 하이커우, 양푸, 바수오, 산야 등 무려 4개소에 해군기지를 건설해놓고 있다.

이들 해군기지들은 대부분 장쩌민을 위시한 상하이방의 주도로 건설하거나 보강한 것이다. 주변 상황이 이런데도 오로지 평화, 평화만을 시조 읊듯 하면 제주도는 원래 평화의 섬이니 저절로 제주도와 주변해역의 평화가 유지되리라고 보는가.

끝으로 동북아 해상왕국 류큐 멸망의 최대 원흉은 누구일까? 그는 일본도 중국도 아닌, 류큐 왕국 자신이었다. 평화애호라는 미명하에 안보는 일본이나 중국 등 외세에 맡겨버리고 돈벌이에만 몰두했던 극단적인 ‘숭상경무(崇商輕武)주의’를 실행한 류큐 왕실 자신이었다.

700년 무역왕국 류큐는 불과 500명 일본군대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류큐는 수천척의 상선만 있었지 한척의 군함도 없었다. 상인만 득시글거렸지 군인은 반 사람도 없었다. 류큐의 무력이라고는 경무장한 궁중 호위병 몇몇과 왕실 주변의 치안을 맡은 순라꾼 수십 명이 전부였다. 이러고도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류큐 망국은 필연이었다.

참고로 사(士)는 우리나라에서는 으레 문사인 선비를 의미하고, 일본에서는 무사인 사무라이로 통하게 되지만 중국에서는 문사와 무사를 불가분적으로 통칭하는 뜻으로 쓰이고 막내 류큐는 무역관원을 뜻하였다. 평화는 주어지는 게 아니다. 강한 국방력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균등한 힘을 가지는 사이에서만 평화는 오래계속 된다.

우리는 막대하고도 참혹한 값을 치르고서야 평화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워왔다. 단순히 평화를 사랑하는 것만이 아닌, 정신무장과 아울러 군비무장에 힘쓰는, 즉 평화의 창조가 평화를 지키는 가장 유효한 수단의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화를 창조하려는 자는 반드시 무력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有文事者 必有武備) <공자세가>




<참고문헌>

張世平, 中國海權, 人民日報出版社, 2009.
李明春, 海洋權益與中國&23835;起, 海軍出版社, 2007.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중국에게서 간도 되찾는 다섯가지 방법은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16-1,  제4세대, 동북공정으로 드러나다>

국제법에도 없는 ´100년 시효설´ 유포자는 중국인 아닌 한국인들…

 

 

간도를 잃지 않으려면 잊지 않아야 한다
한국과 중국 사이(間)에는 섬(島)이 있다. 그 섬은 바로 간도(間島)이다. 간도는 주위가 물로 둘러싸인 예사 섬은 아니다. 간도는 사방이 동북아 민족의 혈사(血史)로 에워싸인 ‘역사적 섬(Historic Island)’이다.

바다의 섬들이 21세기 세계 각국에게 그 중요성이 갈수록 도드라지는 땅이라면 대륙의 섬 간도는 대한민국에게 체념과 망각의 피안너머로 사라지게끔 해서는 안 될 우리의 소중한 옛 영토이다. 잃지 않으려면 잊지 않아야 한다.

간도라는 지명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조선과 청나라의 사료를 검토해보면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원을 석권한 뒤 만주 중북부지역을 약 200년간 사람의 주거와 수렵활동이 금지된 중간지대인 봉금지역으로 정한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지도들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과 청나라 양국간의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었다. 압록강과 두만강보다 훨씬 북쪽으로 들어간 지역에서 양국간의 경계가 획정되었다. 지금의 랴오닝, 지린 성의 남부지역은 조선땅이었다. 랴오닝과 지린 성의 중북부와 헤이롱장성은 중간지대 즉 간도였다. 간도는 세계역사상 최장 최대의 비무장지대(DMZ)였던 셈이다.


따라서 이제껏 간도로 알고 있었던 현재의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는 19세기 중반까지는 중간지대, 간도가 아니라 완전한 조선영토에 속하였다. 원래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이북지역에 위치해 있었던 간도가 19세기 후반에 이르자 남만주 지역으로 축소 후퇴하여 원래의 간도지역은 북간도로, 조선영토였던 지역은 두만강 이북의 동간도와 압록강 이북의 서간도로 불리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 1745년 키친(T. Kitchin)이 제작한 ‘A Map of QUAN-TONG or LEA-TONGE PROVINCE ; and the KINGDOM of KAU-LI or COREA’ 지도. 동해를‘SEA OF KOREA’라고 표기했다. 중국과 한국의 국경선이 압록강, 두만강 이북에 형성 된 것으로 나온다. 경희대 부설 혜정박물관 소장, 신동아 2005년 3월호 참조 출처: http://blog.naver.com/solhanna?Redirect=Log&logNo=80010346647


◇ 1749년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리에(D’Anville)가 제작한‘et des Rojaumes de COREE ET DE IAPAN’ 지도. 한국 평안도(PINGAN·왼쪽 밑줄)가 압록강 이북의 현 중국 집안지역까지로 돼 있고, 함경도(HIENKING·오른쪽 밑줄)도 두만강 이북 간도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18세기 제작된 서양의 여타 지도에도 양국간의 국경선은 이와 흡사하게 표시되어 있다. 경희대 부설 혜정박물관 소장, 신동아 2005년 3월호 참조, 출처: http://blog.naver.com/solhanna?Redirect=


동북공정, 암탉(중국)이 병아리(북한)를 데리고 가듯

장쩌민시대의 서부대개발이
경제
적 접근논리에 중점을 두었다면, 후진타오시대의 동북공정은 역사적 문화적 지정학적 접근논리에 중점을 두고 있다. 동북공정은 중국의 동북지역(만주)과 한반도의 역사적 문화적 지정학적 상관성을 부정한다.

동북공정에서의 ‘동북’이라는 범위는 동북 3성에 국한하지 않는다. 간도(남만주)는 물론 북한지역(특히 대동강과 원산만 이북 지역)과 그 해역, 나아가 제주도와 이어도 해역 등 한반도를 모두 포괄한다는데 문제의 엄중성을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동북공정은 초기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는 논리개발에서 진화를 거듭하여 이제는 한반도와 주변 해역까지 넘보는 전 방위 공세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북한지역의 동해 어업권을 획득하고 나진항을 50년조차(기한자동연장계약식 조약체결로서 사실상 영구조차)한 후진타오 정권은 자국의 내해를 북한의 동해 해역으로까지 확장하려는, 즉 중국의 군함이 동해에까지 진출하는 중장기플랜을 수행하려는 동선(動線)을 예고하고 있다.

중국은 근래 <환구시보(環球時報)>를 비롯한 각종언론매체를 통해 북한급변사태 발생시 중국군의 북한지역내 주둔 계획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일부언론에도 공개된 바 있는 ‘암탉이 병아리를 데리고 가는’, 이른바‘모계대소계(母鷄帶小鷄)계획’을 중국의 북한전문 인터넷 사이트 <朝鮮中國>에 네티즌 논객 논단 형식으로 슬금슬금 흘리고 있다. 암탉은 중국을, 북한은 병아리를 의미하는 이 계획의 골자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북한 급변 사태 때 남포와 원산을 잇는 대동강 이북지역을 점령하여 북한전역의 치안을 유지해 북한 주민들의 동북3성 유입을 막는다는 것이다.


동북공정의 궁극적 목표가 북한지역 점령과 한반도 주변해역 침탈이라는 마각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 주변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도를 비롯한 북방영토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대응을 살펴보았더니, 피해의식과 무사안일을 넘어 자책골이 연상될 만큼 심각한 문제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 다섯 가지만 들자면

1. 간도 100년 시효설
2. 헌법 제3조
3. 통일신라 시대명칭
4. 북한의 반민족적 저자세
5. 총체적인 대응전략 미흡 등이다.

이들 5개 문제점과 관련한 심층 분석과 함께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자책골 1호, 간도 100년 시효설

무엇보다 우선 척결해야 할 것은 ‘간도 100년 시효설’이다. 영토를 점유한지 100년이 지나면 나중에 무효로 할 수 없다는 고약한 괴담이 우리나라 온오프라인에 정설로 둔갑해 창궐하고 있다. 내로라할만한 한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조차도 각종 시론과 칼럼에 100년 시효설을 근거로 하여 “이제 간도는 영영 중국 땅”식으로 적고 있다. 때문에 일반 국민들 다수는 간도가 중국으로 넘어간 지 100년이 지났으니 간도는 영원히 중국 땅으로 굳어져버렸다고 탄식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국제법상 영토문제는 시효가 없다는 것. 필자가 16세기부터 2011년 현재까지 동서고금의 모든 영토관련 국제규범과 다자조약, 양자조약, 국제판례를 전수분석한 결과 남의 나라 영토를 ‘100년간 점유’하면 자기 나라 땅이 된다는 조항이나 판례는 단 한 구절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4세기 전의 단 한 사람만의 주장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바로 ´국제법의
아버지
(필자 의견: 서세동점의 제국주의시대 유럽우월사관에 근거한 과잉칭호) ´로 불리는 네덜란드의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 그는 저서 <전쟁과 평화의 법>에서 “실효적으로 점유한 영토가 100년이 지나면 해당국의 영토로 간주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로티우스가 이런 주장을 한 시대적 배경은 무엇일까. 그가 활약하던 17세기초 네덜란드가 자바에서 영국세력을 몰아내고 인도네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에 부응하기 위한 일종의 ‘주문자생산방식의 맞춤학설’내지 ‘어용학설’이었다. 만일 100년 시효설이 영원불변의 진리라면 그로티우스의 모국인 네덜란드가 350년간 통치한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네덜란드 땅이 되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간도 100년 시효설 유포자는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

간도 100년 시효설을 최초로 유포자는 누구일까? 필자는 먼저 중국측을 의심하고 샅샅이 뒤져보았다. 그러나 중국의 논문과 언론매체에서는 한국이 간도 100년 시효설을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 외에는 중국측이 조작 유포한 혐의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간도 관련기사 말미에 “한국 너희들 말처럼 이제 100년 지났으니 간도는 영원히 우리 중국땅이다. 으흐흐흐”식으로 비웃거나 표정관리하는 중국 네티즌들의 댓글은 다수 발견할 수 있었다.

간도 100년 시효설의 최초 유포자는 중국인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한국인 김 모 교수였다. 김 교수는 2009년 11월 9일 한 인터넷 매체에다‘간도영유권 100년 시효설의 긍정적
수용 제의’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이다. 이는 필자가 언론매체 칼럼으로는 한국 최초로 (국민일보 2009. 5.20) 간도 100년 시효설이 허구라는 견해를 밝힌 것을 계기로 하여 우리학계 일각에서 일기 시작한 의문에 대한 해명성 글로 여겨진다.

김 교수는 그 기고문에서 100년 시효설은 1977년 백산학회 창립 제31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에 기원한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밝혔다. 김 교수 글의 요지를 그대로 인용해본다.

당시 필자는 그로티우스의 100년 시효기간을 원용하여 “1909년 이래 간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중국은 한국의 항의가 없는 경우 적어도 2009년에는 국제법상 간도의 영유권을 취득하게 된다”고 주장하여 상기 ‘시효취득 100년 시효설’을 주장한 바 있다.

상기 김교수 이외에도 또 다른 김 모 재미학자는 실효지배 100년을 넘기면 국제소송조차 제기할 수 없다고 하며 그로티우스의 100년 시효설을 가장 먼저 제기한 주인공이라고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하였다.
두 김 교수들은 서로 그로티우스 100년 시효설을 먼저 말했다며 이른바 ‘원조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이는 마치
축구경기에서 자책골을 자기가 넣었다고 우기는 격이다.

먼저 후자의 김 교수에게 묻겠다. 100년을 넘기면 국제소송조차 할 수 없다고 그로티우스가 언급한 적이 있던가? 두 김 교수에게 묻겠다. 설령 그로티우스가 국제법의 아버지, 아니 국제법의 할아버지라고
치자, 그렇지만 그로티우스의 주장이 국제법세계에서 영원히 따라야 할 전지전능한 신의 말씀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17세기 일개 학자의 주장의 효력이 현대에 통용되고 있는 국제협약, 다자조약, 양자조약, 국제판례, 국제관습법, 보편적인 국제법원칙보다 우선하는가? 이것과 17세기 조선시대 일개 학자의 주장이 21세기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보다 우선 적용해야 한다는 얼토당토 않는 주장과 그 무엇이 다른가?

◇ 1700년대 중반 중반 정상기(鄭尙驥)가 만든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한국지도인 동국대전도(보물 제1538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로가 2m72cm에 달하는 대형 조선전도로 표현된 범위는 남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고 있다. 특히 18세기 무렵 청나라가 봉금조치를 내린 북만주의 간도지역과 조선영토의 경계를 명확하게 표시해주고 있다. 출처: http://cafe.naver.com/secretofisland/25

99년 만에 중국이 홍콩을 반환받았다고?

물론 그로티우스의 100년 시효설을 원용하고, 민간단체들이 이 설을 유포한 동기를 최대한 좋게
해석한다면, 간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고 정부에 간도문제의 해결을 촉구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100년 시효설은 결과적으로(단, 누구라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던 결과), 중국에게 간도를 내주는 가장 완벽한 논리를 제공한 셈이다. 두 김 교수가 그로티우스의 주장을 간도 100년 시효설의 근거로 원용한 것은 참으로 근시안적이고 자가당착적인 국토 참절적 언행이 아니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이러한 치명적 자책골로 연결되는 백패스‘100년 시효설’이 우리 수비수의 몸에 맞아 골문 가까이 진입한 시점은 1997년 홍콩반환 무렵이었다. 당시 한국의 정 언 학 일각에서는 중국이 홍콩을 99년 만에 반환받았으니 우리도 2009년이 되기 전에 일본이 중국에 불법으로 넘겨준 간도를 되찾아보자고 목청을 돋우었다. 100년 시효설이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원칙인양 더욱 그럴싸한 철칙처럼 굳어졌다.

흔히들 조차조약 기간은 대부분 99년간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조차조약의 조차기간은 조약 당사국이 정하기 나름이다. 99년만에 중국이 홍콩(홍콩섬+구룡반도+신계)을 반환받은 것이 아니다. 중국은 영국에 1842년 영구조차당하였던 홍콩섬을 155년 만에, 1860년 영구조차당하였던 구룡반도를 137년만에 되찾은 것이다. 중국이 99년 만에 되찾은 지역은 1898년 제2차 북경조약으로 99년간 조차당하였던 홍콩변두리지역인 신계지역 뿐이다.

그리고 100년 시효설이 맞는 것이라면 신계를 제외한 홍콩의 핵심부분인 홍콩섬과 구룡반도는 여전히 영국 땅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100년 시효설이 정설이라면 포르투칼이 450여년간 점령한 마카오도 여전히 포르투칼 땅이어야 한다.

대못을 뽑아내듯 간도 100년 시효설을 척결해야

간도협약은 법적 권원이 없는 제 3국에 의한 영토 처리이므로 국제법상 무효이다. 일제가 1909년 간도협약을 체결한 바탕이 된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역시 강압에 의한 것으로 원천 무효이다. 국제법상 보호조약이란 보호국이 외교권을 장악할 뿐, 피보호국의 영토처분권까지 갖게 하는 것은 아니므로 동 조약이 법적근거가 될 수 없다.

거듭 강조하건데 국제법상 시효기간이 없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팔마스섬사건과 베네수엘라와 가이아나국경분쟁사건 등 소수의 국제 판례에서는 어떤 국가가 다른 국가의 영토를 통치권을 행사해왔는데, 당해 영토의 국가가 ‘오랫동안’ 항의하지 않은 경우, 그 영유권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된다고 판시하고 있다.

이처럼 국제 판례는 구체적 시효기간은 명시하지 않고 있지만 100년이라면 ‘오랫동안’으로 유추 해석될 위험성이 전혀 없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하루빨리 간도협약이 무효임을 공식 선언하여야 한다. 아울러 우리 정부는 대못을 뽑아내듯 다수 국민들을 체념하게 만든 원흉, 간도 100년 시효설이 터무니없는 허구라는 실상을 공포하고 이를 널리 홍보하여야 할 것이다.

100년 시효설을 주장하거나 그것의 유포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사들은 지금이라도 100년 시효설이 오류였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9년 백산학회와 간도되찾기 운동본부는 100년 시효설은 오류였다고 솔직히 고백한 바 있다. 지식인일수록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시정할 수 있는 용기는 목숨을 바치는 용기보다 더욱 어렵다고 한다. 필자는 이러한 진솔한 용기를 실행한 두 민간단체를 높이 평가하며 필생의 연구태세의 거울로 삼고자 한다. -계속-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당신이 소한민국 아닌 대한민국서 살고 싶다면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16-2,  제4세대, 동북공정으로 드러나다>
임시정부 헌법에도 "대한민국 강토는 구한국의 판도" 명시 간도 포함

 

큰 한국, 대한의 고유한 판도를 꿈꾸자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항상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이는 중남미의 독립혁명가 체게바라의 명언이다. 현실을 직시하되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잘못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원대한 이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또한 필자의 앞선 기고문에 ‘간도는 이제 중국 땅이니 잊자’, ‘독도나 지킬 것이지 간도는 무슨?’등의 의견을 주신 몇몇 네티즌께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 하다.

꿈이 없는 개인과 국가는 타인과 타국의 꿈을 위해 살게 된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개인과 국가는 마침내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다. 이러한 신념을 글 쓰는 동력
원으로 삼고, ‘오랜만에 보는 개념 글’,‘그의 기고문들은 기립박수감!’등의 공감과 과찬을 보내 주신 대다수 독자분들의 성원을 날개삼아 계속 졸고를 이어나가도록 하겠다.

대못을 뽑아내듯 ‘100년 간도 시효설’을 척결한 다음, 급선무는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제3조를 손질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라는 조항은 장래 중국과의 간도협상에서 우리 스스로 손발을 묶는 족쇄가 될 수 있다. 만일 중국이 "당신네 영토는 한반도라고 헌법에까지 명시해놓고는 왜 남의 땅을 넘보는 거야" 라고 한다면 우리는 무슨 논거로 항변하겠는가. 헌법 전문에도 밝힌 바와 같이 대한민국이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헌법들을 한강의 원류를 찾듯 거슬러 가보다가 필자는 두 번이나 놀람의 탄성을 터뜨렸다.

첫 번째 탄성은 임시헌법에는 우리나라의 영토를 한반도로 국한하지 않았다는 대목에서, 두 번째 탄성은 임시헌법의 개정 차수가 거듭될수록 영토의 범위가 확대되었다는 깨달음에서 터져 나왔다.

1919년 임정 수립 원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공포한 임시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강토는 구한국의 판도’로 규정했다. 1944년 충칭(重慶)으로 천도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최종헌법, 즉 헌장 제2조는 ‘대한민국 강토는 대한의 고유한 판도’라고 규정하였다. 한반도는 물론 간도를 비롯한 북방영토의 주권회복을 국가목표로 설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초 임시헌법의 ‘구한국(Old Korea)의 판도’가 최종 임시헌법 ‘대한(Great Korea)의 고유한 판도’로 해상도와 배율이 더욱 뚜렷해지고 확대된 배경과 취지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더욱 총체적이고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우선 세 가지만 들자면 다음과 같다.

◇ 1749년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리에(D’Anville)가 제작한 한국지도, 요하((遼河,랴오허)강의 이동을 조선의 영역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상의 국경선과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의 “요하의 동쪽에 있는 나라를 동국(조선)이라 한다.”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경희대 부설 혜정박물관 소장, 신동아 2005년 3월호 참조,


조선시대 대표실학자와 대표지도 모두, ‘간도는 우리땅’

첫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뇌부들의 머리와 가슴속의 국토영역은 지금의 한반도에 국한된 ‘작은 한국, 소한(小韓)’이 아니라 한반도와 간도를 아우르는 ‘큰 한국, 대한(大韓)’이었다고 추론된다. 이는 그저 그런 막연한 추정이 아니라 알려진 사실에서부터 새로운 사실을 찾아가는 추론과정의 결과물이 실체적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확인해 해 줄 수 있는 증인들과 증거들을 다수 확보할 수 있었다. 그중 대표적 증인은‘다산 정약용’이고, 대표적 증거는 ‘동국대지도’이다.

조선시대 대표적 실학자인 정약용은 저서 <아방강역고, 1811년 간행>에서 “만리장성의 남쪽에 있는 나라를 중국이라하고 요하(遼河)의 동쪽에 있는 나라를 동국(조선)이라 한다”라고 조선과 청의 영토범위를 정의하였다. 공리공담과 신비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정확한 고증과 사실에 토대를 두는 과학적 객관적 인식을 중시하는 실사구시학파의 거두, 정약용이 쇼비니스트나 징고이스트가 뇌까리는 허튼 소리를 할리는 없을 터.

그래도 만에 하나, 그것이 조선시대의 보편적 영토의식이 아니고 정약용 개인의 광신적 애국심이나 당파적 이익에서 발로한 사설(私說)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반청북벌의 목소리는 사라진지 오래이고, 청나라와의 우호관계유지를 외교원칙의 최우선으로 삼고 있던 정조-순조연간의 조정이 아니던가. 3족이 능지처참형에 처해지는 멸문지화를 당한다 해도 아무 소리없이 죄값을 달게 치러야 할 망발중의 망발이었으리라. 과문한 탓인지 필자는 이제까지 정약용의 요동지역과 남만주를 포함하는 북방영토관에 대한 반론을 접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다. 조선시대 대표적 국가공인지도인 ‘동국대지도’ 역시 만주와 조선을 아우르는 조선전도로 표기하고 있다. 1750년대 정상기가 제작한 동국대지도가 대동여지도보다 훨씬 널리, 오래, 그리고 영조이래 역대 조선 왕실에 의해 공인된, 조선시대 대표지도라고 할 수 있다. 영조는 동국대지도를 홍문관에 보내 모사하도록 하고 영조는 70평생에 이런 지도를 본 일이 없다면서 감탄을 했다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흔히들 1861년 평민출신인 김정호가 동국대전도를 토대하여 사적(私的)으로 제작한 대동여지도를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지도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일제의 식민사관이 만들어낸 ‘상식의 오류’이다. 대동여지도가 조선을 대표하는 지도처럼 인식된 계기는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1934년에 교과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수록한 후부터다.

우리에게 알려진 김정호에 대한 이야기들, 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세 차례나 답사하고 백두산을 일곱 번이나 등정했으며, 대동여지도가 완성된 후에는 국가의 기밀을 누설했다고하여 분노한 흥선대원군이 옥에 가둬 죽였다는 이런 이야기는 <조선어독본>에 실린 내용으로 실제 사실이 아니다.

지금도 대동여지도보다 앞서 만들어진 정교한 고지도가 동국대전도를 비롯한 4백여 종이 남아 있다. 당시에는 더 좋은 고지도가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일제가 발행한 <조선어독본>은 김정호가 지도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조선의 지도 제작 수준이 형편없었던 데 있었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이었을까? 거기에는 우리 민족의 전통과 우수성을 깎아 내림으로써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음모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공교롭게도 대동여지도는 동국대지도와 달리 만주지방을 국토에서 제외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어 일제의 구미에 부합한 것도 일제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부각시킨 요인의 하나라고 분석된다.

요컨대, 정약용과 동국대지도에서 우리는 18세기 이래 일제강점 직전까지 우리의 영토관은 한반도만의 ‘소한’이 아니라, 한반도와 간도를 아우르는 ‘대한’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임정정부는 이러한 북방영토의식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이를 헌법에 수용하였다고 판단된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상의 영토관, 1750년대 무렵 정상기(鄭尙驥)가 만든 조선시대 대표지도이자 왕실공인지도인 동국대지도(보물 제1538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동국대전도상의 국경선 역시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의 “요하의 동쪽에 있는 나라를 동국(조선)이라 한다.”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한반도(울릉도,대마도, 독도 포함)와 간도지역을 아우르고 있는 영토범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상의 대한의 고유한 판도의 영토관과 합치된다. 출처: http://cafe.naver.com/secretofisland/25

한족(漢族)에게 만주는 없었다

두 번째, 유사 이래 20세기 전반까지 중국의 주류민족인 한족(漢族)들의 머리와 가슴속의 영토에는 만주는 없었다. 만주가 중국인의 영토의식의 판도밖에 있었다는 것을 방증해줄 수 있는 자료들이 반만년 중국사의 벌판에 수북하게 널려있다. 지면 관계상 한 가지만 소개하겠다.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을 때 대부분의 세계열강들은 강력하고 분명하게 일본 제국주의 야욕을 규탄하고 가능한 한 강경한 제재조치를 가했다. 그러나 정작 피해 당사국인 중국정부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중국이 일본과 밀약을 맺어 만주지역을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에게 넘겨주었을 것이라는 의구심이 들만큼 중국정부의 저항은 미약했다.

세세대대로 한족들에게 만주지역은 쓸모나 이익은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운 계륵(鷄肋)이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계륵보다 훨씬 못한, 뽑아내야 할 ‘충치’이거나 떼어 내어야 할 ‘종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족들의 입장에서 만주는 조상대대로 국경선인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의 본토를 위협하거나 지배하여온 오랑캐들, 흉노, 부여, 고구려, 발해, 말갈, 거란, 여진, 몽골, 만주족들의 본거지였으니.

더구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오랜 세월 동안 중국 국민당 수뇌부와 피난행렬을 같이하며 맺어진 끈끈해진 관계를 통해 그들의 내면 의식 깊숙한 곳에 숨겨진 영토의식의 실체를 엿볼 기회가 많았을 것이리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인의 내심의 국토에는 만주가 없었으며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만주의 수복의지 역시 미약하였음을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세 번째, 종전 1년전이라는 1944년이라는 시간과 힘의 진공
상태에 임박한 만주라는 공간이다. 연합국의 승리와 일본의 패망을 목전에 둔 시점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만주지역에서의 일본세력의 패퇴와 그로 인한 만주지역의 힘의 진공상태가 도래할 것을 예견하였다. 임정수뇌부는 간도 및 북방영토를 ‘대한의 영토’로 수복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파악, 이러한 염원을 임시정부의 최종 헌법인 헌장 제2조에 전격 수용한 것이라고 파악된다.

그의 국가관과 영토의식이 의심스럽다

영토관련 대한민국 헌정사의 강물을 하류쪽으로 허위단심 내려오던 필자는 검붉은 소용돌이를 그리며 역류하는 점액질 오물덩어리를 마주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2005년 정동영 당시 통일부장관의 국회에서의 발언. 그는 생뚱맞게도 영토를 휴전선 이남지역으로 제한하는 영토조항의 개헌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북한에 실효적 지배가 미치지 않기에 남한지역만을 대한민국 영토로 국한시키자는 것이다. 1991년 북한의 유엔 가입과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북한을 사실상의 정부로 인정하는 현실을 반영하자고 외쳤다.


그의 영토축소 개헌주장은 반통일적 반민족적 반역사적 망언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간도 되찾기는커녕 북한지역의 수복의지마저 말살하고 대한민국에서 북한의 존재를 배제해 분단을 영구화하려는 짓이다. 스스로 반통일 반민족주의자라고 고백하는 꼴인 그의 주장은 마치 상대팀에게 매수(?)당한 축구 감독이 모든 선수들을 하프라인 자기진영(한반도)내에 가둬놓고 시종일관 수비로만 일관하라는 것도 모자라 아예 페널티박스(남한 영역)내로 가둬넣고 백패스로 자책골을 유발하라는 암호를 보내는 짓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제주해군기지건설을 반대하는 불법시위와 공권력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 벌어졌던 일련의 불필요하고 불행한 사건의 단초 역시 정동영이 제공한 것이다. 그는 지난달 6일 야 5당이 참여한 ‘제주 해군기지 백지화 강정
평화대회’를 주도한 자리에서 “제주 해군기지는 우리가 정권을 잡고 있을 때 한 일이라고” 사과한다며 “강정마을 해군기지가 아닌 평화공원을 조성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망언하였다. 그는 이어 제주해군기지가 건설되면 제주도가 중국의 ´목에 가시´가 돼 미국과 중국의 갈등과 대결구도를 자초하는 꼴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은 바 있다.)

필자는 그의 국가관과 영토의식을 의심한다. 간도는 논외로 치자. 육지영토(북한지역)를 영원히 내주려는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해양영토(제주도 이어도 해역)까지 무방비상태로 만들려고 하는 그의 사상과 배후가 심히 의심스럽다.

◇ 국내 일부 정파가 획책하는 대한민국 영토범위

간도는 대한민국의 미수복지이다

실패는 죄가 아니다. 목표가 낮은 것이 죄다. 나의 창이 독수리(북한)를 겨냥하였다가 바윗돌에 빗맞아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 하늘의 태양(간도)을 겨냥했다가 독수리를 잡는 편이 더 낫지 않은가.

남과 북, 분단의 좁고 답답한 프레임
에 갇혀 체제의 우위를 주장하는 시대는 끝난 지 30년이 다 되어 간다. 이제는 김씨왕조의 붕괴와 통일 이후의 상황변화에 대한 준비에 전념하여야 할 때이다. ‘북한은 물론 간도 역시 대한민국의 미수복지’라는 ‘큰 한국-대한(大韓)의 영토의식’을 함양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의 헌법 제3조는 남북이 갈라지던 해방공간에서 통일의 염원을 담은 소중한 조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48년 헌법제정안 초안 검토
시에 제헌의원 일부는 “대한민국 영토를 반도라고 쓴 것은 일본의 의도를 따른 것이다. 간도의 모든 권리는 한민족에게 있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 국토로 편입해야 할 것”이라고 개정을 촉구했던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갈수록 노골화되는 중국의 간도를 포함한 동북공정 공세에 헌법 제3조는 독소조항으로 작용할 위험성이 매우 크다.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한반도는 압록강-두만강 이남지역으로 의미하므로, 우리 헌법은 이미 간도지역을 포기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혹자는 영토조항을 헌법에 규정한 세계각국의 헌법례가 거의 없다는 점을 들어 영토조항을 헌법에서 아예 삭제해버리자고 말한다. 그러나 영토조항을 완전히 지워버린다면 북한이 급격히 무너질 경우 속수무책이다. 중국과 일본 등 제3국에게 북한에 대한 내정간섭을 하지 말라고 요구 할 수 있는 헌법상 근거를 스스로 제거하는 꼴이 된다.

따라서 필자는 향후 헌법을 개정할 때 임시정부 최종헌법인 헌장 제2조를 원용하여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간도를 아우르는 대한의 고유한 판도로 한다.”라고 규정할 것을 제안한다. 만일 이러한 개헌이 번거롭다면 가칭 [영토 기본법]을 제정하여 ‘헌법상의 한반도는 간도 등 북방영토를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것을 명기한 조항을 규정할 것을 제안한다.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간도 되찾기 최대 걸림돌은 중국에 비굴한 북한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16-3, 제4세대, 동북공정으로 드러나다>
주체사상 주창 우리민족끼리 선동하며 중국 팽창야욕 방관 역사의 죄인

 

 

동북공정에 대해 북한은 묵언수행중인가

“참 이상한 노릇이다. 중국은 당초 실제로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북한의 반발을 우려했었다. 그런데 중국과 (육지)국경이 단 한 뼘도 접하지 않은 현실적 제3국에 지나지 않는
한국이 이토록 강력하게 반발할 줄은 정말 예상 밖이었다.”

2004년 제1차 동북공정 파문 당시, 평소 터놓고 지내는 중국인 교수 한사람이 내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중국의 역사침탈 도발에 대해 2004년 8월 양국 정부가 갈등을 봉합하기로 합의한 후에도 고구려연구재단을 설립하고 또 이를 동북아역사재단으로 확대 출범시키는 등 미흡하나마 안간힘을 쏟아왔다.

그런데 중국측 말대로 정작 당사국인 북한은 동북공정에 길고 긴 침묵을 지키고 있다. 동북공정은 단순한 역사왜곡이라기보다 북한전역에 대한 중국의 지배력 강화를 위한 팽창전략이라는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오늘까지도.

북한은 지난 1994년 10월 단군릉을 새롭게 단장해 북한이 고조선과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과시한 바 있다. 북한의 최고지도이념이자 연호로 사용하고 있는‘주체’사상에 따르면 중국이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킨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노골적인 역사왜곡이자 주권침탈이라고 실성이라도 한 듯 펄펄뛰며 온갖 비난을 퍼부어 대야 정상이 아닌가.

그런데 북한은 중국의 국시라고 할 수 있는 ‘개혁개방’이라는 단어를 쓰면 총살형에 처하는 금칙어로 정해놓는 반면에 ‘간도와 동북공정’이라는 단어에는 갑자기 눈뜬 소경이 되어버렸는지 어둠과 침묵이다. 빛도 기척도 없다.

북한땅 코앞에서 중국의 2008년 동계 아시아경기대회 성화 채화, 백두산 인근 관광 개발, 백두산 유네스코 자연
문화유산 등재 추진, 아리랑과 태권도 농악 장구춤 모두를 중국의 문화로 등재시켰는데도 묵언수행중인가, 숨소리조차 얼어버린 절대침묵상태다.

북한정권의 비굴한 침묵과 반민족적 행태

“침묵은 승낙의 표시이자 자백에 해당된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시인 에우리피데스가 갈파한대로 동북공정에 대한 북한의 침묵과 반민족적 행태는 그저 세습정권유지만 시켜주면 중국이 북한의 모든 것을 다가져가도 좋다는 승낙의 표시이자 주권국이 아니라 중국의 종속국내지 지방정권이라는 자백에 해당된다.

2009년 북한은 중국에 나진항을 50년간 조차(기한 만료후 자동연장조약으로 실질적으로 영구할양)해주어 동해와
태평양에로의 출구를 내주었고 동해어업권을 양도했다. 그것도 모자라 양강도 보천군 보천광산, 갑산군 문락평광산을 비롯한 10여개 광산들의 중석, 몰리브덴, 마그네사이트, 철, 무연탄, 역청탄, 금, 은, 동 광물 채굴권을 중국에 넘겨주었다. 이에 따라 약 3000조원으로 추정되는 북한 광물 자원이 고스란히 중국에 넘어갈 것으로 우려된다.

◇ 지난 2010년 10월 2일 평양시 강동군 단군릉에서 북한 시민들 및 해외동포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천절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또한 중국-조선 경협이라는 미명하에 황금평과 나선 개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북한땅을 땀땀히 꿰매 내려가는 단둥-평양, 단둥-원산, 투먼-나선, 창바이-김책의 고속도로 건설등 SOC 개발에 따른 각종 이권을 음으로 양으로 팔아넘겼거나 넘기고 있는 중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동북공정에 대한 북한정권의 비굴한 침묵과 중국에 산과 바다, 물길과 뭍길을 넘겨주는 반민족적 행태를 감안할 때 중국의 북한지역 점령은 한낱 시나리오가 아니라 임박해 오고 있는 엄연한 현실이다.

어쩌면 좋을 것인가? 필자는 지난 한달에서 달포가량 간도와 동북공정에 관한 온오프라인상의 온갖 사료와 선행자료를 검토해보았다. 중국의 야욕에 대한 비판과 우리 정부의 미온적 자세에 대한 지적만 넘쳐났지 구체적이고 현실성있는 해결책은 찾을 수 없었다.

대책이라고는 기껏해야 고대사에 대한 연구와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원칙론만 되풀이 할 뿐. 다시 며칠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뇌즙을 짜내듯 고민을 거듭했으나 지려천박하고 천학비재한 필자가 묘책을 찾는다는 것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다만 모노크롬으로 새하얗게 표백된 머릿속에 남은 고통과 번민의 유리조각 같은 것 몇 개를 다음과 같이 꺼내드니 강호제현께서는 이를 너그러이 보아주시길 바란다.

바보야, 문제는 북한이야

우선, 북측이 내세우는 민족이라는 단어에 대한민국 사회가 더 이상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중국인이 생래적 자본주의자라면 한국인은 생래적 민족주의자이다. 반만년 비단장사 왕서방 중국인이 ‘실리’에 집요하다면 단일민족이라는 일종의 도그마와 신화로 살아온 한국인은 ‘민족’에 열광하는 경향이 있다.

간도와 동북공정에 대한 북한의 무한침묵에서 우리는 북한 정권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민족끼리’의 우리민족은 ‘김일성민족’이지 한민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냉철하게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 북한의 비겁한 침묵과 반민족적 행태를 강력하게 비판하여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들은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자세만 지나치게 미온적이라니, 신사대주의라니 자기학대의 쓴소리만 줄창 퍼부어왔다. 그러나 중국의 동북공정을 방관하고 용인한 당사자는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라 북한당국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된 셈인지 우리나라 각계각층에서 북한의 반민족적 저자세에 대한 지적과 비판을 찾기는 모래사장 바늘만큼 찾기 어렵다. 우리 정부로서는 중국과 한 뼘의 국경도 접하지 않은 실질적 당사자가 아닌 분단상황에서 할 만큼 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우리는 북측에 대해 간도와 동북공정에 벙어리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면, 더 이상 주체니 자주니라는 말을 입 밖에도 꺼내지 말라고 분명하게 요구해야 할 것이다.

셋째, ‘고마해라, 마이 묵다 아이가’ 영화 <친구>의 명대사를 중국에게 들려주고 싶다. 동북공정의 최신 버젼인 ‘모계대소계(母鷄帶小鷄)’계획, 즉 암탉이 병아리를 데리고 가듯 북한을 삼키려는 식탐을 그만두라. 중국 당신네는 암탉이 아니라
베이징덕 요리재료인 어미오리다. 길 잃고 병든 병아리를 어미오리가 데려가면 쓰겠는가.

끝으로, 북한당국에 최소한의 민족적 존엄과 양심을 회복하길 바란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 진다해도 대다수 굶주린 북한 동포는 한 핏줄 한 민족이고 피폐해진 북한 땅은 대한민국의 일부다. 세습정권의 연명을 위해서 추악한 침묵을 집어치우고 북한동포와 북한땅을 팔아먹지 말고 개과천선할 것을 권고한다.

중국의 우리역사지리침탈에 대해 고조선과 고구려와 발해 유물이 많이 남아있는 북한이 이제라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주면 중국도 당황하고 주춤거릴 것이 아닌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동북공정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북측이 진정성있게 동참한다면 이는 남북관계개선과 민주통일을 위한 새롭고 획기적인 계기이자 아젠다(agenda)로 발전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내일 10월 3일은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개천절이다. 김정일과 북한 당국자들은 그대들이 만든 단군릉에 찾아가 중국의 팽창야욕을 수수방관하는 죄를 역사와 민족 앞에 반성해야한다.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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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중국해에 초대형 괴물 '류큐공정' 등장하다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17. 독도와 센카쿠>남부전선 이상있다
중국이 류큐 해역 장악하면 제주도-이어도 해역은 중국 내해로 전락할것

 

10월 20일, 후진타오 중국 중앙군사위주석 겸 국가주석은 중국 군수 공장 건설 80주년 기념식에 보낸 축하 메시지에 무기연구와 생산에 있어 질과 효율성을 한층 높여 달라고 군수산업관계자들에게 지시했다.

후진타오를 핵심으로 하는 중국 제4세대는 국방산업 현대화에 집중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우선투자순위는 해군> 공군> 육군 순으로, 특히 해군력 강화에 총력을 집중하여 왔다.

중국은 지난 8월 동아시아 국가로서는 최초(세계에서는 10번째)로 항공모함 바라크호를 시험운항한데 이어 중대형 항모 제작 계획을 세우고 있다. 중국 해군의 허브포트로 잘 알려진 다렌과 칭다오 외에도, 상하이와 가까운데다가 수심이 깊어 중국 최고의 양항으로 유명한 저장성 닝버와 우리나라 제주도의 자매결연지자체인 하이난에는 각각 항공모함을 비롯한 20여척의 핵과 디젤추진 잠수함을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해군기지를 건설중이다.

항공모함의 운항 시스템은 항공모함 단독이 아닌 구축함, 순양함, 잠수함등과 연합한 전단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동아시아 해군력은 중국이 장악하게 될 것으로 관측된다.

2020년까지 중국은 3만~4만톤급 중형항모 2척과 6만톤급 핵추진 대형 항모등 6척의 항공모함을 건조할 것이며 이들 항공모함 전단의 전력비중은 동중국해>남중국해>서해>발해 순으로 배치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필자는 내년 10월경부터 출범할 중국 제5세대 지도층의 팽창주력 방향은 센카쿠를 포함한 류큐해역(제주-이어도해역 포함)과 북한지역이라고 생각한다.

마오쩌둥(서남지역), 덩샤오핑(동남지역), 장쩌민(서북지역)에서부터 지금의 후진타오(동북지역)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대 지도층은 그들이 선택 집중한 지역의 개발과 대외정책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어 왔다. 시진핑을 비롯한 차세대 지도자들은 G2로 불릴 만큼 강해진 중국의 국력을 바탕으로 전임세대들보다 훨씬 유리한 여건에서 더욱 대담하고도 주도면밀한 정책을 펼칠 것이며 그만큼 성공확률도 높을 것으로 관측된다.

센카쿠-류큐해역이 중-일, 중-미간의 해양세력쟁탈전이라면서 우리는 신경 끄고 독도나 잘 지킬 것이지 하며 팔짱을 끼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면 큰일 난다.

만일 중국이 류큐해역을 장악하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대외무역항로의 명맥은 끊겨지고 제주도-이어도 해역은 중국의 내해로 변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즉 국토전체가 마치 도로에 접하는 부분이 없는 맹지(盲地)처럼 전락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센카쿠, ‘류큐반환’에서 ‘류큐독립’, 류큐독립에 대한 중국의 개입의도, 이어도, 제주해군기지 문제 등
상호 긴밀히 연동되는 이슈들을 3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 "중화통일을 수호하고 류큐군도를 환수하자!" (维护中华统一,还我琉球群岛)


중국이 확 변했다

센카쿠 영유권 중-일간 논전에서 필자는 창과 방패가 전도된 착시현상을 겪어왔다. 2005년까지, 센카쿠 영유권에 관한 일-중간의 주장을 단 한 줄로 축약하자면 이렇다.

일본 ; 센카쿠는 일본의 류큐(오키나와현)에 속하기에 당연한 일본 땅이다.
중국 ; 센카쿠는 류큐가 아닌, 타이완의 부속도서이기에 중국의 고유한 영토이다.

먼저 센카쿠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일본측 논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일본은 1879년 류큐왕국을 오키나와현으로 만든 후 인근의 센카쿠를 1885년부터 10년간 실지 조사하였다. 센카쿠는 청나라 지배 흔적이 없는 무인도였으므로 1895년 오키나와현으로 편입시켰다.

둘째, 청일전쟁 승전 이후 1895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 제2조에 의하면 센카쿠는 청나라가 일본에게 할양한 바 있었던 타이완과 펑후제도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센카쿠를 중국에 돌려주어야 할 하등의 근거가 없다.

셋째,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2조에 의하더라도 센카쿠는 일본이 패전후 포기한 영토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한 동조약 제3조를 보더라도 미국의 군정관할지역인 류큐군도 등 ‘서남제도’에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1971년 미일 오키나와반환협정에 근거하여 센카쿠의 영유권은 일본으로 합법적으로 반환되었다.

넷째, 중국과 대만은 전쟁 후에 단 한 번도 센카쿠 영유권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다가 1970년 석유가 발견된 후에야 센카쿠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맞선 중국의 주장은 이렇다. 각종 고문서와 고지도에 근거하면 센카쿠는 명나라시절부터 중국의 고유영토였다. 센카쿠는 류큐가 아닌, 대만의 부속도서의 하나로서 청일전쟁 패전으로 대만과 함께 덤으로 일본에 강제 할양되었으니 이제 되돌려달라는 것이다.

센카쿠 영유권 논전에서 중국 측이 즐겨 사용하여 왔던 무기는 주로 역사적 근거 특히, 근대이전의 해묵은 문헌고찰에 편중되어 있던 반면 현대국제사회의 논전에서 약발이 가장 강력한 국제법적 공세는 거의 없었다. 제아무리 역사의
쓰레기통에서든지, 어디서든지 주어다가 잘도 가져다 붙이는 데 도통한 중국이라지만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던 무인도에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내기란 참으로 난처하고 궁색한 일이 아니었으리라.

센카쿠를 실효적 지배하고 있어 수비자 격인 일본이 든 방패는 창처럼 날카로운데 반하여 공격자 중국이 치켜들었던 창은, 창이 아니라 방패처럼 둔탁하고 편편한 모양으로 혹시 방패를 창으로 잘못 알고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뻘쭘한 중국의 모습이었다.

그러던 중국이 2006년을 기점으로 확 바뀌었다. 중국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느닷없는 언사들을 신기전의 다연발 불화살로 마구 쏘아대기 시작하였다.

“그렇다. 일본 말이 맞다. 센카쿠는 대만의 부속도서가 아니라 류큐에 속한다. 그러나 류큐 왕국은 원래 중국의 속국으로서 류큐 군도 전부를 일본이 불법 점령한 것이다. 미국의 센카쿠를 포함한 오키나와 반환은 중국 영토에 대한 미&8729;일간의 불법적인 밀실 거래이다.”

심지어 중국의 일부 관방학자들은 “류큐군도 140여개 전부를 중국에게 돌려주어야만 한다”는 난폭한 직사포형 말빨을 날리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21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한 모사는 완곡한 곡사포형 논리를 펼치고 있다.

“일본이 애당초 센카쿠를 류큐에 속한다고 주장한 의도는 중국을 자극하여 센카쿠가 일본의 류큐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기왕 일본이 센카쿠가 류큐에 속한다고 하는데 중국이 극력 센카쿠가 류큐에 속하지 않고 타이완의 부속도서에 속한다고 강변하는 것이야말로 류큐가 일본에 속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이는 중국정부가 일본의 류큐점령을 승인하도록 하는 일본의 속임수에 빠져드는 것이 아닌가.”

일본은 경악했다

‘센카쿠의 점 하나가 아닌, 류큐의 면 전체를 돌려달라니, 일본 전체 해역의 30%에 달하는 류큐해역을 몽땅 돌려달라니”

일본은 경악했다. 필자가 2006년부터 약 2~3년간 일본측 반응을 조사해본 결과, 초기에는 너무 놀라서 정신을 추스를 시간을 벌 셈이었던가, 아니면 ‘요즘 돈깨나 벌었다고 미쳤나 저게’, 하는 식이었던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중국 일부 과격파의 일회성이겠거니 무시작전으로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그럴 수만은 없었다. 중국측의 류큐관련 발언빈도와 발언강도와 정확성은 갈수록 잦아지고 강력해지고 날카로워졌기 때문이다.

중국은 마치 역사교과서만 펼쳐들고 어눌한 논전을 펼쳐왔던 고등학생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기술 역사지리와 국제법, 중국법, 일본법 등등 모든 분야에 통달한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또는 세계적 석학이자 노련한 달변가로 변신해버린 것 같다.

지면관계상 중국이 2006년부터 들고 있는 국제법적 주요 논거 3가지만 들고자 한다.

첫째, 1946년 2월 2일, 맥아더 일본점령군 최고사령관의 명의로 발표한 성명에서 일본정부의 행정구역은 혼슈우,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 등 일본 4대 섬 및 북위 30도
이북의 1천여 개의 일본열도의 부속도서로 국한한다고 했다. 북위 30도 이남의 류큐는 일본에 속하지 않는다.

둘째, 1946년 11월 미국은 유엔에 류큐를 미국의 신탁통치지역으로 설정해줄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947년 4월 2일 미국의 제안을 승인하여 일본 신탁통치도서에 관한 결정을 공포하였다. 즉 류큐는 유엔헌장에 의하여 재2차 세계대전의 결과물로서 적국으로부터 분리된 지역이다. 따라서 일본의 류큐에 대한 점유권은 국제법에 의하여 박탈된 것이 명백하다.

셋째, 유엔헌장 제78조는 유엔회원국의 영토는 신탁통치제도를 적용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류큐가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사실은 즉 류큐가 일본 영토라고 아니라는 증거이다. 유엔 헌장 제79조, 제83조, 제85조도 신탁통치하의 영토의 관할에 관한 변경 및 그 조항의 개정에는 반드시 안전보장이사회 또는 유엔총회의 승인을 받도록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유엔헌장상의 규정을 이행하지 않은 미-일간의 오키나와 반환조약은 국제법 위반으로 무효이다.

‘류큐독립’으로 치장한 ‘류큐공정’ 개봉박두

작년 9월 7일 센카쿠 부근에서 일본해상 보안청 순시선과 중국어선이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중일간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센카쿠 열도에 대한 일본 정부 대응이 국내 여론으로부터 질타를 받으며, 외교실패로 규정되는 등 심각한 우려의 표출로 이어졌다. 중국측은 결국 센카쿠에 대한 중국의 강력한 대응에 일본이 무릎을 꿇는 식의 외교적 승리를 이뤄내었다.

 

 


◇ 류큐독립관련 각종서적, 출처http://str.chinaiiss.com/html/201010/28/wa3b30.

 

◇ 류큐독립관련 각종서적, 출처http://str.chinaiiss.com/html/201010/28/wa3b30.html

그리하여 필자는 더욱 기세등등해진 중국이 요즘은 어떤 궁리를 하고 있을까? 궁금하여 류큐와 관련한 최근 1년여 간의 중국 측의 온오프라인 자료를 열람하다가 너무 놀라 ‘경악절도’할 뻔했다.

류큐군도를 몽땅 중국에 돌려주라는 난폭성 논조들은 잦아들었다. 그것들이 떠나고 남은 자리에 그득히 들어찬 ‘유구독립(琉球獨立)’이라는 키워드, 그 수량의 폭증과 품질의 급성장에 숨이 턱 막힌다.

작년이맘때 검색 했을 때는 500개에 불과했는데 1년 사이에 4배 가량 늘었다.
외마디 욕설이나 낙서는 물론 중복된 내용도 거의 없고 하나같이 논리정연한 문장들이다.

주지하다시피 권위적 개발 독재정체제인 중국정부(사회주의 절대 아님, 자본주의 개발독재정임)체제는 인터넷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 음란물은 어느 정도 허용할 수 있지만 중국의 국정목표, 국가정책에 반하는 글은 단 1자도 단 1초도 게재될 수 없다.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진, 그것도 메인 페이지에 오른 글들은 중국정부에 의해 공인된 글로써 세계최다에 달하는 5억여 중국네티즌들에게 홍보하는 중국정부정책 선전물이나 다름없다.

또한 최근 1~2년간 중국내 류큐관련
전문서적은 5권이 출판되었고 수십편의 학술논문들이 각종 학술지에 게재되고 있다. 인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는 물론 수천 종에 달하는 중국의 온오프라인매체에 ‘류큐’는 인기 일일연속극의 주인공처럼 각광을 받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베이징 상하이를 비롯한 도시의 가판대에서 군사관련 월간전문잡지 10여종이 팔리고 있다. 믿지 어려운 사실이지만 해군함정과 해군무기만 전문으로 다루는 월간잡지도 불티나듯 팔리고 있다. 손이 가는대로 펼쳐보면 류큐 관련 기사가 ‘나 여기 또 있지 ’ 하듯 등장한다.

일제의 강요에 의한 수십만 류큐인의 집단자결과 대학
살사건의 비극, ‘이른바 <일본의 국내식민지>로서 서러움 받는 류큐인의 처지’, 류큐독립을 외치는 류큐인들의 아우성, <류큐독립당>을 위시한 류큐독립 운동전개 현황 등은 신선한 지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류규독립에 대한 중국의 적극개입 내지
원격조정 로드맵,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철수 유도전략, 류큐독립이후 중국의 위성국화, 이에 일본이 저항할 경우 즉각 함대를 파견하여 류큐를 무력으로 정복하는 시나리오 등의 글들에 이르러서는 필자는 전율하였다.

온 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충격과 공포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동중국해에서 ‘류큐공정’이라는 초대형 괴물을 보고야 말았다.(계속)

 

 

 

◇ 류큐공화국의 국기, 삼성천양기(三省天洋旗) 출처:http://www.bekkoame.ne.jp/i/a-001/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22만명 집단자살시킨 도마뱀 일본의 꼬리 자르기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17-2. 독도와 센카쿠>오키나와 잔혹사
간 나오토 총리 "류큐 독립시키자"에 극우파들 "중국 간첩" 맹비난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도마뱀을 본 적이 있는가. 도마뱀은 위험에 부딪치면 꼬리를 흔들어 적을 유인한 다음, 꼬리를 잘라 적이 당황하는 동안에 도망쳐 숨는다. 1945~1951년의 시간과 서태평양의 공간이 교차하는 접점에서 필자는 일본은 도마뱀, 류큐는 도마뱀 꼬리, 미국은 대머리독수리(미국의 상징)같다는 생각이 든다.

1945년 2월 10일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가운데 어전회의가 열렸다. 일왕과 군부 및 내각은 이미 전세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고 있었다.
고노에 총리는 히로히토 일왕에게 진언했다.

“이제 일본의 패전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화평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러자 일왕은 “그것은 다시 한 번 전과를 올린 후에 해도 늦지 않겠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항복을 거부하였다.

일본은 류큐를 단지 미군의 본토 상륙을 최대한 늦추고 군국주의 천황체제를 보존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한 버리는 돌, 사석(捨石)내지 도마뱀 꼬리로 취급했다. 일본은 일본 본토방위의 준비가 완료될 때까지 오키나와 본섬의 요미칸, 차탄에 비행장을 만들고 미국과의 일전에 대비하였다. 때문에 미군 입장에서는 오키나와를 점령해야 일본 본토 침공의 발진 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45년 3월 26일 새벽, 미군은 오키나와 본섬 동쪽에 있는 게라마(慶良間)에 발을 디뎠다. 미일간 최대 지상전이 시작된 것이다. 4월 1일에는 오키나와 본섬 동해안에 상륙했다. 그로부터 약 3개월간 거대 병력 54만명의 미군이 류큐의 왕성옛터에 투입되었다.

이에 비해 일본 황군의 병력은 겨우 6만여명, 일제는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하여 만 14세에서 70세까지의 오키나와 남성과 여학생을 전쟁에 강제 동원했다. 하지만 '철의 폭풍'((鐵の暴風))이라 불리는 이 전투는 처음부터 일본군에는 승산이 없는 무모한 전투였다.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고 비참했던 오키나와 전투, 희생자 총 30여만명 중 류큐 주민이 22여만명, 미군이 약 1만 2천명, 일본군이 약 5만 5천명, 징용이나 종군위안부로 끌려온 한국인 약 1만명으로 군인보다 류큐 민간인 사상자가 훨씬 많았다.

◇ 오키나와 결전 최후의 땅, 마부니 언덕에 있는 평화의 공원, 14만 8136명의 류큐인, 7만 4796명의 일본 본토인과 기타 일본식민지인, 1만 4005명의 미국국적인, 82명의 영국국적인, 28명의 대만국적인, 82명의 북한국적인, 189명의 한국국적인 등 모두 23만 7318명의 전몰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군은 류큐 주민들에게 “항복하면 미군이 여자는 강간한 후 죽이고 남자는 사지를 잘라 처참하게 죽인다”고 거짓 정보를 주면서 집단자결할 것을 강요했다. 집단자결에는 주로 수류탄이 동원되었고 쥐약과 청산가리와 같은 독약이나 돌, 낫과 곡괭이 , 식칼 등 온갖 도구들이 이용되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끔찍한 비극이 벌어졌다. 결국 약 22만 여명의 류큐 민간인이 이른바 옥쇄작전으로 미화된 강요에 의하여 집단자결하거나 학살당하였다. 이 숫자는 당시 류큐 인구의 3분의 1이상에 해당한다. 나치 독일의 유태인 대학살에 버금가는, 30만 남경대학살에 맞먹는, 그러나 그것들보다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이른바 ‘류큐인 대학살 사건’이었다.

1945년 2월 어전회의 당시 일왕이 총리의 진언을 받아들여 항복 결단을 하였더라면, 수십만 류큐주민의 참혹한 희생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도 없었을 것이다. 최고 전범은 다름 아닌 히로히토 일왕이다. '천황'의 어명으로 전쟁이 수행되었고 '천황 만세'를 외치며 앳된 병사들이 죽어갔다.

미, 중, 소, 한국이 일본을 분할통치할 수도 있었는데?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였다. 그 후에도 미군은 오키나와 본도 뿐만 아니라 그해 12월 류큐군도 남부의 미야코, 아에야마 제도를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이듬해 1월에는 류큐군도 북부인 아마미와 오시마 제도에 진주했다. 미군은 승자의 군대, 즉 점령군으로서 류큐군도를 일본 본토에서 분리시키고 이곳에 눌러 앉았다.

1948년 2월 히로히토 일왕은 멕아더 점령군 총사령관에게 오키나와에 대한 메시지를 보낸다. 미국이 오키나와의 주권을 일본에 남겨 두고, 조차하는 형식으로 25년 내지 50년 또는 그 이상 장기간 오키나와를 지배하는 것은 미국의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일본의 이익도 된다는 메시지를 극동사령부에 전달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때 오키나와 내 미군기지가 전후 처음으로 타국 공격의 출격기지가 사용되었고, 이후 류큐는 태평양의 요석(keystone of Pacific)으로 불리며 전략 요충지로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에서 전후 처리를 두고 미국과 일본이 강화조약을 맺었는데, 그 안에는 류큐를 미국에게 주고 일본은 독립국으로서 지위를 회복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결국 도마뱀 일본은 도마뱀꼬리 류큐군도를 잘라서 대머리독수리 미국에 내어 준 덕분에 몸체를 온전히 보전하게 되었다. 패전 후 미, 영, 불, 소 4개국의 점령지로 변해 국토가 거열형에 처해져 사지가 찢겨진 마냥 처참한 전쟁도발 죄의 대가를 받은 독일과 대비한다면 일본은 저지른 만행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운 형벌을 받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전범국인 일본은 통일된 자유 국가로 남고, 식민지로 질곡의 세월을 겪어야 했던 한반도는 갈라져 지금까지도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으니 말이다.

2010년도 중국 10대 블로거로 선정된 차이(蔡)모 푸저우(福州) 대학 교수는 태평양전쟁이 조금 만 더 늦게 종전되었더라면 일본 본토는 미, 중, 소, 한국 4개국에 의해 4분되고, 이들 4개국에 의한 분할 통치를 받았을 것이라는 만화 같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차이 교수는 일본 본토가 마침 4개의 큰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혼슈는 미국이, 시코쿠(류큐 포함)는 중국이, 홋카이도는 소련이, 규슈는 한국이 사이좋게 갈라 먹기가 독일보다 훨씬 편리하였을 것이라는, 일본이 들으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고약한 독설을 내뱉고 있다. 또 이러한 독설들이 지금 중국의 대표 포털사이트
메인페이지에 버젓이 걸려 있다.

류큐의 다음차례는 슬픔이었다

일본을 추방하고 류큐의 새 주인이 된 미국은 류큐인에게 많은 자치권을 주었다. 미군정은 의식적으로 ‘오키나와’란 일본식 용어 대신에 원래의‘류큐’를 쓰길 장려했으며 일왕의 연호사용을 금지했다. 류큐인은 일정기간의 자치 뒤에는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1962년 사모아 독립에 이어, 1970년 피지
와 통가 등 류큐보다 면적이 작고 인구가 적고 역사도 일천한 태평양상의 여러 군도들이 속속들이 독립국이 되어갈 무렵 ‘다음차례는 우리겠지’, 하며 류큐인의 꿈은 금방 이루어질 것 같았다.

◇ 일본 교과서 왜곡을 규탄하며 류큐독립을 외치는 오키나와 주민, 사진 출처:http://image.baidu.com/


그래서 1970년 7월 류큐 토박이인 다케히코(武彦)를 중심으로 한 류큐의 독립지사들은 일본제국에 무력 점령되었던 옛 류큐 왕국을 류큐 공화국(琉球共和國, Republic of the Ryukyus)으로 되살려 명실상부한 독립국 수립을 최고강령으로 하는 ‘류큐독립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류큐의 다음차례’는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슬픔이었다. 류큐인의 부푼 꿈은 무너졌다. 1972년 5월 15일, 미국의 일본에 대한 오키나와 반환은 류큐인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그 후 류큐는 다시 ‘오키나와’로 불리게 되었고 일본 본토에서 오키나와로 가던 국제선은 국내선이 되었고, 미국식으로 우측에서 달리던 차량은 일본식으로 좌측으로 달리게 되었다.

일본에 대한 반감은 류큐인들의 히노마루(일본국기), 기미가요(일본의 국가)에 대한 태도에서 표출된다. 일본에 반환된 이후에 류큐에서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에 대한 거부가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1987년에는 오키나와에서 개최된 전국체전의 소프트볼 개회식장에서 지역주민이 게양대에 걸려 있던 히노마루를 끌어내려 소각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류큐인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자신을 일본정부에 의해 여러 차례 희생양으로 이용되었던 경험 때문에 독특한 류큐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오늘날 류큐인들은 일본어
는 사용하지만 자신들의 언어인 우니나 구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류큐어를 일본인들이 그리고 일본어를 류큐인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과 류큐인들 사이의 문화적 차이는 류큐가 독자적 국가를 형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크다.

2006년 류큐독립당 당수 야라 조스케(屋良朝助)는 당명을 류큐어로 행복, 자연과의 조화를 뜻하는 가리유시 클럽(かりゆしクラブ)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미-일제국주의의 공동지배를 철폐하고 완전독립주권을 건국한다” “일본정부는 300억달러의 전쟁배상금을 류큐인에게 지불하여야 한다” 등의 모두 3개 장, 23개조로 구성된 당헌을 제정하였다.

그 무렵 타이완의 지롱(基隆)을 거점으로 '류큐독립'을 내걸고 활동하고 있는, 류큐혁명동지회와 류큐독립협회는 다음과 같은 6대 강령을 반포하였다.

1. 류큐인은 일본의 류큐의 식민통치를 더 이상 용인해서는 안 된다.
2. 류큐는 유구한 역사의 자주독립의 평화애호 왕국이었다.
3. 류큐의 주권을 회복하고 전체 류큐군도에 대한 영토의 완전성을 회복하여야 한다.
4. 류큐 공화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5. 류큐독립후 채택하는 정치제도는 류큐인의 염원을 반영하여야 한다.
6. 어떠한 개인, 단체, 당파, 국가도 류큐독립을 저해하는 언행을 할 수 없다.

이 밖에도 ‘류큐독립운동 지하본부’, ‘류큐코 선주민족회(先住民族會)’ 등 사회단체들도 미국이나 일본으로의 편입이 아닌, 류큐공화국이란 한 국가로서의 독립국가를 주장하였고,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2005년 국립 류큐대학 린췐중(林泉忠) 교수(동경대학 법학박사)팀이 18세 이상의 류큐인에게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질문에 답한 1029명의 류큐인 중 40.6%의 류큐인은 자신이 류큐인이며 일본인이 아니라고 하였다. 21%만 일본인이리고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으며 24.9%의 사람은 류큐독립운동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2006년 류큐인을 대상으로 한 또 다른 설문조사에서 75%가량은 주민투표를 통한 류큐독립을, 25%가량은 독립에는 반대하나 자치의 확대를 찬성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11만 여명에 달하는 류큐인들은 2007년 9월 29일, 오키나와 기노완시 해변공원에 집결하여 류큐독립을 외치는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들은 일본 문부과학성이 심의한 역사교과서에 제2차 세계대전시 일본군이 류큐인에게 강제로 집단자살을 하게 한 내용을 삭제 한 과거사 은폐에 대해 강력히 규탄하였다.

일 총리, 아싸리 류큐를 독립시켜버리자

비단 류큐에서뿐만 아니다. 류큐차별과 류큐독립의 핫이슈는 일본 본토의 각계에서도 꾸준히 거론되어왔다.

1978년 일본인 나까무라(中村) 교수는 류큐의 일본에 대한 경제예속관계 등 구체적 지표를 들어 류큐가 ‘국내식민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은 류큐인의 정서를 전혀 위무하지 않고 류큐인을 ‘천민’으로 천시하며 류큐에 잔혹한 식민통치를 자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1982년 일본인 야마자끼(山崎) 교수도 국내식민지론에 대한 구체적 해석을 더했다. 즉 류큐는 국가내의 종속지역으로서 착취, 약탈, 압제, 소외, 멸시 등 5중고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일본정부는 류큐문제의 본질인 국가침략과 민족박해 등 주요모순에 대한 해결을 외면하고 있다고 질타한 바 있다. 실제로 2010년말 현재 오키나와현은 일본 47개 현 가운데 가장 넓은 면적(바다면적 포함)을 차지하고 있지만 소득수준은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1997년 2월 13일, 일본중의원 예산심사회의에서 류큐 출신 중의원 한 사람은 당시 하시모토 총리에게 류큐는 모욕과 착취를 당할 만큼 당해왔으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니 이제 류큐왕국을 부활시키거나 차라리 류큐를 독립시켜 줄 것을 공식 요구했다.

더구나 2009년 일본본토 출신 민주당 참의원 한 사람은 <오키나와의 자기 결정권-지구의 눈물에 무지개가 걸릴 때가지>라는 책을 펴내면서 중국이 류큐에 대한 권리를 공식적으로 요구하기 전에 일본은 류큐독립을 위한 준비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압권은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직전 총리의 발언이다. 2009년 9월 그가 부총리겸 국가전략상을 맡고 있을 때 한 참의원에게 류큐의 강력한 반미 반일 정서와 후텐마 기지이전 등 현안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기지문제는 속수무책이다. 우리가 어떻게 해도 미국인도 류큐인도 만족시킬 수 없다. 아싸리(あっさリ) 류큐를 독립시켜버리는 게 좋다.”

간 나오토의 발언은 일본의 우익분자들에게는 중국 간첩이자 매국노라는 비난의 돌팔매가 되었으나 중국에게는 ‘류큐공정’이라는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기폭제가 되었다.


◇ 류큐독립을 외치는 류큐 주민 2009년 9월 29일 오키나와 기노완시 해변공원, 사진 출처:http://image.baidu.com/


바다와 섬과 반도로 향진하는 ‘류큐공정’
 
제1세대 마오쩌둥에서 제4세대 후진타오 전반집권기까지의 중국의 팽창전략범위는 대부분 청나라 말엽 당시의 국경내로 국한되어왔다. 이때까지 동북공정(초기)을 비롯한 서남공정, 서북공정 등은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2006년 12월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의 해양대국화’를 선포한 이후부터는 중국의 팽창전략범위는 중국의 국경 밖의 바다와 섬과 반도로까지 향하고 있어 탈이다.

최근 중국은 자신의 영역을 이른바 조공국 관계였던 류큐군도와 제주-이어도 해역, 북한지역에까지 확장시키려는 움직임이 갈수록 도드라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상황을 자국에게 유리하도록 바꾸어 보려는 전략적 공세를 백열화하고 있다.

류큐공정은 동북공정의 초기 단계처럼 중국과 류큐간의 역사 문화관계를 중점적으로 연구하여 류큐를 우선 역사 문화적으로 편입시키려고 하고 있다. 이를테면 2010년 중국국가사회과학기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중국해군의 직속기관 ‘해군출판사’는 <중국-류큐관계 연구 총서>의 발행을 시작하였다.

이 총서는 중국-류큐관계 사료연구, 중국-류큐문화 교류사, 중국-류큐역사관계 및 문헌연구논고, 복건인과 류큐, 명청시대 사대부와 류큐, 명청시대 중국-류큐 우호관계역사, 청대 류큐사신 조공활동보고, 청대 중국-류큐관계연구, 중국-류큐 희곡비교연구, 류큐- 무기가 없는 나라, 류큐왕국 흥망사, 고대중국교육체제하의 류큐유학생, 명청시대 중국-류큐교류중의 중국전통섭외제도 등 모두 13권의 방대한 서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서 중 제1권 ‘중국-류큐관계 사료연구’를 펼쳐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를 이룬다.

정치 경제 문화 사상 풍속 등 류큐의 모든 전통들은 중국으로부터 오지 않는 것이 없다. 혈통으로 말하자면 중국 푸젠지방에서 이주한 36개 대성의 자손이 류큐 인구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가 한반도와 동남아에서 온 이주민이며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이주민의 비율은 극소수이다. 류큐방언은 일본어보다는 중국의 푸젠 남부지방 방어인 민난어와 유사한 점이 많다. 실제로 일본어와 류큐방언은 마치 프랑스어와 스페인어가 다른 만큼 다르다.

류큐인의 과반수는 중국말에 가까운 류큐방언을 쓰는 중국혈통이기에 류큐인은 중국의 동포나 마찬가지다. 그러한 류큐 동포가 고통을 받고 있는데 중국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면 안 된다.

류큐어로 엄마는 ‘움마’ 이다

그렇게 따지면 류큐는 우리나라와도 유사한 점이 없지 않다. 자국이 삼한(三韓)의 빼어남을 모았다며 동북아 3국 중 조선을 유난히 따랐던 류큐왕국이 아니던가. 일례로 류큐어로 엄마는 '움마' 라고 한다.

일본은 돼지고기를 구워먹는 문화가 없지만 류큐는 한국과 같이 삼겹살 구이를 좋아하고 일본의 가부키는 얼굴에 화장을 하고 춤을 추지만 류큐는 우리의 안동하회탈과 유사한 탈을 쓰고 추는 탈춤을 즐긴다.

<홍길동전>의 홍길동은 류큐왕국의 혁명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는 아에야마제도의 이시가키섬의 아카하치와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아카하치는 홍가와라(洪家王)라고도 불리었는데, 홍가와라가 홍길동이라는 분석이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삼별초가 제주도를 탈출, 오키나와 본섬의 남쪽 우라소에성(浦添城)으로 가서 류큐왕국을 세운 기초를 다졌다는 연구도 있다 ('삼별초 오키나와로 갔는가' KBS 역사추적 2009년 4월 20일 방송 참조). 2009년 12월1일 오키나와 시립극장에서는 '고국의 고려전사 삼별초'가 공연됐다. 실제로 류큐에서는 고려의 기와 양식과 문양이 동일한 기와가 발견되고 있고, 조선식 산성과 초가집, 칠기, 도자기 등 유적과 유물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계속)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중국 "제주-이어도 점령이 제일 쉬웠어요" 한다면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18. 류큐로 눈돌린 제5세대>
변변한 해군기지 하나 없는 제주도는 모자없는 돌하르방 신세

 

중국이라는 이름의 황색 항공모함이 연청색(light blue) 바다에서 감청색(navy blue)바다로 향진하고 있다. 연안방위를 임무로 했던 중국해군은 대양해군으로 치닫고 있다. 중국은 발해와 동중국해(주1)와 남중국해를 내해로,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영해로 여긴다. 이는 중국이 배타적 경제수역 내에 있는 이어도 해역을 자국 영해라고 주장하고 있는 근거이다.

2003년 우리나라가 이어도 해양과학기지를 완공한 뒤 중국이 본격적으로 분쟁지역화를 시도한 것에서부터 올해 여름 수차례 중국 해양경비정단이 이어도에 나타나 “허가 없이 중국 영해에서 인양작업을 하고 있다”면서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이유 또한 이에 기인한다.

류큐공정의 궁극적 목표는 북으로는 제주-이어도해역에서 남으로는 센카쿠에 이르는 류큐해역을 포함한 동중국해를 중국의 내해로 만드는 것이다. 앞서의 서남, 서북, 동북공정들과는 달리, 류큐공정은 중국의 무장력, 특히 중국해군이 처음부터 전면에 나서 진두지휘를 한다는 대목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어야 할 것이다.

◇ 동중국해상의 중국 항공모함 바랴그(2011.11.29). 출처: http://image.baidu.com

임란과 호란 직전을 방불케 하는 주변정세

작년 9월 센카쿠 해상에서 발생한 중-일 선박 충돌사건은 21세기 해양패권전의 전초전이자 전환점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해군의 주요 훈련장소는 발해와 황해에서 동중국해와 태평양으로 바뀌었다. 대륙을 칭칭 동여매고 있던 류큐 체인을 돌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 8월 첫 출항에 나섰던 중국의 항공모함이 지난 달 29일 두 번째 출항에 나섰다. 중국 함정 6척은 지난달 22~23일 류큐의 오키나와섬과 미야코(宮古)섬 사이 공해를 통과해 태평양으로 진출하였다. 올해 6월에도 중국 동해함대 군함 11척이 서태평양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훈련을 벌이기 위해 류큐해역을 관통한 바 있다.

일본열도의 최전선도 홋카이도에서 류큐(주2)로 이동하고 있다. 홋카이도 주둔 자위대 제7사단 정예병력을 빼내어 류큐의 요나구니(與那國)섬과 미야코섬, 이시가키(石垣) 섬에 상주시키고 최첨단 레이더를 설치하였다. 지난달 23일 일본의 겐바 고이치로 외무상은 중국을 방문해 동중국해 영유권 분쟁의 긴장을 낮추기 위한 중-일 해상위기관리 기구 설립과 핫라인 개설을 제의하였다.

미국의 해양패권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특히 동중국해와 류큐해역에서 그렇다. 비록 미국은 최근
호주 다윈에 미 해병대 2500명을 주둔시키기로 하고 호주, 베트남, 필리핀과 남중국해에서 군사훈련을 진행하였으나 그곳들은 어디까지나 서태평양의 외곽이다.

서태평양에서의 영향력 유지와 회복을 위한 미국의 움직임은 서태평양의 광활함에 사위어 그 범위가 모호하다. 내핵인 동중국해와 류큐해역 방위에는 한 마디로 역불종심(力不從心), 힘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대규모 재정적자에 따른 국방비 삭감으로 신규 투자가 어렵다. 세계경제질서개편에 이은 해양질서의 재편은 불가피해 보인다.

제주-이어도해역을 둘러싼 주변상황이 이처럼
전시상태를 방불케 할 정도로 긴박하게 돌아가는 이 때, 한국의 해양인식과 대응태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직전만큼 태평무사하고 지리멸렬하다.


이어도의 중국 기점은 ‘퉁다오’가 아니라 ‘서산다오'

가령 우리나라 지도층 인사들이 독도를 다케시마로, 동해를 일본해로 부른다면 우리 국민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가령’같은 일이 이어도문제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중국이 우리나라를 얼마나 비웃고 있을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 발생하고 있다.

국가간 영토분쟁에서 지리 표기는 한 치의 오류도 불허하는 절체절명의 필지 사항이다. 그런데도 이어도의 중국 기점이 초소형 바위섬에서 군함으로 득시글한 해군기지로 이동한지 언제인데, 우리나라 각계 인사 다수는 아직도 “이어도는 제주 남단 마라도에서 149km, 중국 퉁다오(童島·주3)에서 247km에 위치한다.”는 식의 자멸적 오류를 남발하고 있다.

그것이 국가안보와 국토수호에 얼마나 치명적 악영향을 미치는지, 또한 기점 표시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간의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2008년 초 필자는‘한중해양경계획정’과 관련한 논문을 준비하면서 이어도의 중국 기점 표시, 즉 ‘퉁다오’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해 9월 필자는“이어도 기점 표시 실수 한국 측에서 한 듯 ”이라는 의문을 인터넷 신문 <데일리안>에 최초 제기했다.

이후 더 세밀하고 심도 있는 연구 끝에 그해 10월 국회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열람 또는 접촉 가능한 모든 중국측 온오프라인상의 이어도 관련 자료(중국 해양법학계 최고권위 高之國의 논문 포함)를 전수 분석 검토한 결과 ‘서산다오(주4)’가 기점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관련기사 : “이어도 기점 표시 실수, 우리측에서 한 듯”


아울러 기존의 중간선보다 21㎞나 더 중국 측으로 우리 바다를 확대시켜 이어도의 관할권 확보는 물론 한국에 더욱 유리하게
광대한 해역 (약 +2~3만㎢ 해양) 확보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한편 수년 전부터 중국측이 ‘서산다오’를 이어도의 기점으로 표시했으며 이런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우리측 언론이나 이어도 전문
사이트 지도에도 ‘퉁다오’로 잘못 게재해 온 점은 해양법적 차원은 물론 국가이익에도 반하는 그 어떤 합리화적 변설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오류라고 판단하여 강하게 비판해왔다.

그러던 2009년 1월 어느 날 이례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일개 학자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공식 수정한 사건이다. 국토해양부는 이어도의 중국 기점을 퉁다오에서 서산다오로 변경한 사실을 공식확인한 것이다. 외교통상부도 이를 토대로 해외 공관의 지도에 이어도 기점을 변경했다.

그해 3월 14일 국토해양부 산하 국립해양조사원은
홈페이지에 게시돼 있는 이어도의 중국측 기점을 이어도에서 287㎞ 떨어진 서산다오로 변경한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당초 이어도에서 245㎞ 떨어진 퉁다오를 기점으로 한 것에서 42㎞ 더 멀어진 것이다. 네이버 백과사전도 이어도의 중국측 기점을 서산다오로 시정하였다.

◇ 중국측 이어도 기점 서산다오의 해군기지(좌상), 서산다오 기점 표지석(중), 퉁다오에서 서산다오로 바뀐 이어도 기점 변화도(우하)


이에 필자는 우리 정부가 이미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이어도에 대한 그간의 잘못된 표기를 인정해 받아들여 이어도 기점의 수정을 공식발표하면서 한국측이 가진 이어도에 대한 권리를 더욱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환영의 뜻을 표한 바 있다. (<데일리안> <연합뉴스>, <국민일보>, <세계일보> 2009년 4월 14일, 15일 기사 및 칼럼 참조)


☞관련기사 : 이어도 기점 ‘서산다오’로 바로잡았다


이처럼 이어도 중국측 기점을 정부차원에서 공식 시정하고 언론이 공개한지 몇 년이 흘렀는데도, 우리 대다수 매체는 계속 틀린 표시를 고집하고 있는 이유를 도대체 알 수 없다.(서산다오로 올바르게 표기한 우리 매체는 <데일리안>, <서울신문>등 5개에 불과함).

올해 들어서만도 세 번째 부탁이다. 빠른 시정을 촉구한다.

3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중국식 선전포고

그렇다면 왜 중국이 중국답지 않게 이어도에서 42㎞나 후퇴하는 손해를 감수하고 서산다오로 기점을 옮겼을까? 중국이 기점을 바꾼 이유에 대해 공식적으로 나온 자료는 없지만 이렇게 분석된다. 우선, 국제법 위반에 따른 비난을 회피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국제법에 따르면 무인 바위섬을 기점으로 삼을 수는 없다.

도서와 관련한 해양경계획정에서 최우선 고려해야 할 원칙은 해양법협약 제121조 3항이다. 이 조항에는 “사람이 지속적으로 거주하거나 자체 경제생활이 불가능한 바위섬(rocks)은 배타적 경제수역 또는 대륙붕을 가질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중국이 1996년에 선포한 49개 기점 중 제12번 기점 퉁다오는 바다 한가운데 아주 작은 바위섬이다. 이를 제11번 기점 서산다오로 변경해도 42㎞ 정도 후퇴하는 것이고 그래도 200해리 안에는 포함돼 있어 명색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데 굳이 국제법까지 위반해가며 무리수를 둘 필요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런데 왜 하필 중국의 49개 기점 중에 유일하게 해군기지가 있는 섬, 서산다오로 옮겼을까? 그것은 바로 전삼후일(前三後一), 3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전략이다. 전삼후일은 사자가 먹이를 노릴 때 세 발은 앞으로 향해 있고 한 발은 뒤로 버티고 서 있는 자세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사자는 뒤로 뻗어 있는 한 발 때문에 힘을 크게 낼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이어도에 대해 트집을 잡기 시작하던 무렵, 2005년 11월 1일 중국 해군은 서산다오에 중국 기점의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한번 결정하면 좀처럼 변경하지 않고,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중국 정책결정 및 집행 특성상 매우 이례적인 행태이다.

중국의 해군기지 서산다오에로의 기점이전은 조만간 이어도를 무력으로 점령하겠다는 암시. 자신의 다음 행보를 쉽게 알아차리게 하는 면에서 본다면 암시보다는 명시행위에 가깝다. 아니, 암시도 명시도 아니다. 정확한 공격 시기만을 감춘 중국식 선전포고이다.

돌발점령의 세계 챔피언, 제주-이어도 해역 침탈은 시간문제

중국의 이어도 점령 가능성은 얼마나 클까? 필자가 판단하기엔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허점을 노출하고 저자세 미봉책으로 일관한다면 중국의 제주-이어도 해역 침탈은 시간문제이다.

이에 혹자는 “설마 우리나라의 최대무역상대국인 중국이 이어도를 무력으로 점령하랴, 쓸데없는 기우는 금물이다”하면서 태평성대인 지금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그런 요설을 함부로 퍼뜨리지 말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의 휘황한 전과기록을 훑어보면 금방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어금니도 꽉 깨물게 될 것이다.

돌발 점령의 세계 챔피언은 중국이다. 1974년 1월, 중국은 선전포고 없이 서사군도를 전격 점령했다. 당시 같은 공산국가 월맹이 ‘어어~’할 새도 없는 순간에. 또한 개혁개방과 경제건설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이 평화로운 국제환경 조성을 강조하던 1987년 3월, 남사군도를 베트남이 ‘헉!’하고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통째로 꿀꺽 삼켜버렸다. 지금껏 베트남 동부해역 거의 전부가 중국의 뱃속에서 삭혀지게 되었다.

이어도의 중국 기점이 변화한 사실과 의미는커녕 정확한 기점 자체도 모를 만큼 우리의 취약한 해양영토 의식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설령 중국이 어느 날 이어도를 꿀꺽한 후 시치미를 떼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까짓 암초와 암초 위의 시설물 하나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없다”고 충고하는 우리 지도층 인사의 수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중국에게 이어도 침략의 동기를 부여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는 생각이다.

문제는 주변강대국의 망언과 망동에 대한 우리정부의 패배주의에 기반한 일관된 저자세이다. 노골적인 도발에 대해 제대로 된 보복조치는커녕 정당한 원칙주장조차도 손에 꼽기 힘들 정도이다. 이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을 하자니 가슴속 울화가 치밀어 이만 생략하고자 한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지인도 “군사 초강대국 중국이 항공모함 전단을 동원하여 이어도를 드시겠다는데 뭐라 할 수 있겠어요, 약소국이 참아야지”하고 정색하며 말하는 데 할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

◇ 한국의 중심 세계의 중심 제주도, 해군기지없는 제주도는 모자없는 돌하르방 ⓒ강효백 교수팀


중국이 “제주-이어도 뺏기가 젤 쉬웠어요” 한다면

류큐군도에 대한 중국의 무력점령은 일본이 재기불능의 빈사 상태에 빠지지 않는 한, 오키나와에 미군을 주둔시킬 수 없을 만큼 미국의 힘이 쇠락하지 않는 한, 가까운 장래에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중국은 당분간 ‘류큐공정’을 은근하면서도 치밀하게 전개할 것이다. 그래서 부담스런 두 강자, 미-일이 팔짱을 끼며 지키고 있는 갈비짝(류큐)을 넘보기 전에 만만한 약자, 한국의 발끝에 내팽개쳐있는 포크(이어도)를 뺏으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은 이어도로 간을 보려고 할 수 있다. 이어도 점령으로써 한-미-일 동맹의 견고성을 시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내년 말부터 출범하는 시진핑(주5)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 제5세대 지도층의 최고목표는 명실상부하게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강대국 중국의 실현이다. 현재 미국과 견주어 중국이 손색이 있는 부분은 전 세계 해군력의 90%를 장악하고 있는, 미국의 막강 해군력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해양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대장정의 출발선상에서 중국은 워밍업 최적 대상으로 이어도를 선정할 수 있다.

류큐공정은 한마디로
나무 한 그루(센카쿠) 뽑아가려고 끙끙대던 중국이 일본 해양영토의 30%에 달하는 숲 전체(류큐)를 몽땅 먹어버리려는 계획이다. 이러한 중국의 야욕이 센카쿠에서 류큐로 팽창되듯, 이어도에서 제주도로 번질 가능성은 전혀 없을까?

우리나라가 제주도 해군기지건설 등 긴요한 대응조치를 하지 않고 미봉책으로 차일피일 미룬다면, 이어도의 중국기점을 오히려 중국측에 유리하게끔 오기하는 등 자책성 오류를 계속 범한다면, 중국의 제주- 이어도 해역 침탈 가능성은 개연성으로 변할 것이다.
중국이“제주-이어도 뺏기가 제일 쉬웠어요.”라며 의기양양해 하는 꼴을 볼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말라” 주제넘은 중국의 망언

<인민일보> 자매지인 <환구시보>는 9월 6일 랴오닝성 사회과학원 변강연구소 뤼차오(呂超) 소장의 "제주해군기지가 건설되면
중국관광객이 제주도관광을 거부해야 한다"는 칼럼을 실었다. 동북공정 전문가로 유명한 뤼 소장은 한국 정부가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는 데에는 이어도 문제와 관련해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주해군기지가 건설되면 정기적으로 군함 등을 동원해 이어도 정찰 활동을 벌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뤼는 이어 "제주도에 매년 수십만명의 중국 관광객이 찾고 있고 일부 투자도 이뤄지고 있다"며 "한국 정부가 ‘중국인들의 마음’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점을 직시하고 제주도 관광을 거부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참으로 오만방자하고 주제넘은 내정간섭성 망언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전문가의 칼럼이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타국의 국방문제까지 간여하는 내용이, 중국 공산당과 중앙정부의 대외관련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환구시보>에 실렸다는 사실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대사건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고맙다. 중국이 한국을 얼마나 얕잡아 보고 있는지, 영토침탈 야욕의 범위가 얼마나 광활한 것인지, 그런‘중국인들의 마음’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어 참 고맙다.

이에 필자는 몇 마디 묻고자 한다. “중국은 무슨 의도로 제주-이어도해역에 대응하는 해군전용기지를 이어도의 중국 기점인 상하이 서산다오를 비롯하여 5군데나 세웠는가?, 중국 경비정은 시도 때도 없이 이어도에 몰려와 ‘이어도는 중국 영해’라고 억지소리하며 윽박지르는데 한국은 왜 제주도에 해군기지 하나 건설하면 안 되고 이어도를 지키는 군함도 보내서는 안 되는가?

제주도의 자매결연지자체이자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하이난에는 중대형 해군기지가 4개나 있는데도 모자라 항공모함 전단을 수용하는 초대형해군기지는 왜 신설하려하는가? 또 하이난 산야(三亞)를 사령부로 하는 제4함대는 무슨 목적으로 창설하려는가? 어떤 한국의 중국전문가가 이어도를 겨냥한 중국내 해군기지를 모두 철거하고 하이난의 초대형해군기지 건설과 제4함대 창설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며 이를 중국이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한국인의 중국관광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앞서 언급한 중국의 방약무도하고 속 보이는 칼럼이 발표되자, 더욱 한심한 사태가 발생했다. 평화와 환경보호 등 황당한 논거를 내세워 여론의 몰매를 받았던 국내의 해군기지건설 반대론자들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맞장구를 치며 목소리를 다시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 필자는 중국관광객들에게 제주도에 해군기지 하나 없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웠는데, 이제는 국내의 이런 맞장구쟁이들이 더 두렵다. 이런 이유로 반대한다면 우리나라에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고 대한민국 육해공군은 전부 없애버려야 한다는 말이나 무엇이 다른가.


제주도는 남부전선의 최전방이자 해양영토의 중심지

“군대생활은 주로 어디서 했나요?”

이번 학기 초 필자는 병역을 마치고 갓 복학한 한 학생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겸연쩍은 표정으로“최전방 철책선에서 복무한 친구들에게는 좀 미안한 곳인데요, 최후방인 제주도 해안초소에서 보냈습니다.”라고 답했다.

“제주도 해안이 어째서 최후방인가, 우리나라 해양영토의 최전방 아닌가!

“.......,”

대한민국 남부전선의 최전방은 제주도이다. 우리나라 지도를 180도로 뒤집어 보면 제주도는 머리에 해당한다. 변변한 해군전용기지 하나 없는 제주도는 모자를 벗은 채 서 있는 돌하르방 같다.

세계 최대의 대륙과 세계 최대의 바다 태평양이 마주치는 접점에 위치한 대한민국, 그 대한민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남한(관할해양 포함)의 지리적 중심은 ‘제주도’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해양의 시대, 21세기 세계 전략적 경제적 중심은 서태평양이다. 서태평양의 중심은 한국이며 한국의 중심은 제주도이다. 즉, 서태평양시대 제주도는 한국의 중심이자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우방국도 적성국도 없다.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한 세계 중심국가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북쪽의 방위에만 다걸기하고 동쪽과 서쪽, 특히 남쪽의 국방에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 우리의 우방이자 라이벌인 종합국력 세계 2, 3위의 중국, 일본 등 주변 강대국과의 전방위 안보에도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호랑이 모양의 국토에 걸맞지 않게 우리나라의 국방태세는 한 마리 악어를 보는 듯하다. 북쪽의 등 부분(휴전선)은 두꺼운 가죽으로 덮고 있으나 남쪽의 복부 부분(제주-이어도 해역)은 연한
피부재질로 취약하기 이를 데 없다.

제주도 면적의 3분의 1에 불과하지만 아시아 제1부국인 싱가포르(주6)는 구축함과 호위함, 잠수함 등 30여척의 각종 전함들로 중무장한 해군전용기지를 보유하고 있다. 싱가포르보다 수백배 수천배 넓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등 주변의 대국들이 싱가포르를 집적거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경외의 눈길만을 보내고 있는 이유이다. 이러한 해운입국=해군강국 싱가포르의 성공사례는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문제로 갈팡질팡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역의존도가 85%인 우리나라의 무역 물동량 중 99.8%가 해상을 통해 이뤄지고, 대부분 제주-이어도 해역을 통과한다. 무역입국 한국에 안전한 바닷길은 필수이다.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은 한국의 중심이자 세계의 중심 제주-이어도 해역을 방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우리나라 무역의 남대문이자 남부전선의 최전방인 제주도에서 대한민국 무적함대가 웅혼한 기상으로 발진하는 일은 하루 빨리 현실화 되어야 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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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중국은 흔히 ‘동중국해’를 ‘동해’로 약칭한다. 중국이 우리나라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까닭은 중국이 일본 편을 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동해와 자국의 ‘동중국해(동해)’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동해표기 문제에 중국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동해’를 ‘동한국해’로 표기하는 방안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 일본은 류큐를 ‘오키나와’로 통칭하고 류큐군도를 자국의 남서쪽에 있는 섬들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난세이(南西)제도’로 부르고 있다.

3. 총면적 0.044㎢ 퉁다오의 중국식 공식 명칭은 해초 (海礁; 하이자오)이다. 간혹 섬이라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아 어린이(童) 섬(島)이라는 의미인 ‘퉁다오’로 별칭하기도 하는데 일본에서는 이를 직역하여 ‘고모도시마’로 부르기도 한다. 참고로 중국은 한국과 일본과 달리, 섬을 ‘도(島 다오)’, ‘서(嶼 위)’, 초(礁 자오), 암(岩 엔)으로 4단계로 세분하고 있다. 島는 1㎢이상 상주인구가 있는 섬을, 嶼는 0.05㎢-1㎢의 무인도 또는 비상주인구가 있는 작은 섬을, 礁는 0.0005㎢-0.05㎢ 무인 바위섬을, 岩은 0.0005㎢이하의 바위를 지칭한다. 湖北人民出版社, 『中國文化知識精華』,(武漢 : 湖北人民出版社, 2001), 36-38쪽.

4. 서산다오를 여산다오(余山島)나 蛇山으로 표기한 중국측 자료도 간혹 발견되나 이는 드문 한자인 사람 인(人) 밑에 보일 시(示)가 합쳐진 산이름 '사' 자(중국어 독음 she)’를 비교적 흔한 한자 ‘余’로 잘못 읽거나 사와 같은 발음인 ‘蛇’ 로 오독한 것에 연유된 것으로 판단된다.

5. 차세대 최고지도자 시진핑 현 국가부주석이 저장성에서 당서기를 5년 넘게 역임한 바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중국동해함대 사령부가 위치한 저장성(닝보 寧波)은 류큐군도를 마주보며 제주-이어도 해역으로 나가는 출발선상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6. 싱가포르의 주요산업은 해운,
금융, 관광, 방위산업이다. 중국계가 주류이며 베이징 표준시를 따르는 싱가포르는 2010년 1인당 GDP 4만 3117달러로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에서 개인소득수준이 제일 높은 부자나라로 부상하였다. 중국정부는 현재 GDP총액 면에서는 중국이, 1인당 GDP면에서는 싱가포르가 각각 일본을 앞질렀다는 사실을 유난히 부각시키고 있다.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필자소개 :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만 국립사범대학에서 수학한 후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대학과 중국인민대학, 중국화동정법대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주 대만 대표부와 주 상하이 총영사관을 거쳐 주 중국 대사관 외교관을 12년간 역임한 바 있다.


출처/ http://blog.daum.net/kk1990/2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