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태극기는 고종 임금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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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 28.

태극기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박영효가 아닙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태극기를 최초로 제작하라고 지시한 사람은 고종 임금님이며 지시받은 김홍집이 역관 이응준(李應俊·1832~?)에게 국기를 만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따라서 태극기를 직접 제작한 실무자는 이응준이지만 태극기를 도안하고 만들라고 지시하신 분이 고종 임금님이므로 최초의 태극기 창안자가 된다고 봅니다. 

  

고종임금님은 사각형의 옥색바탕에 태극원(두개의 소용돌이 문양)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일본에 수신사로 가는 박영효에게 내렸고,

 

일본에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로 파견됐던 박영효가 메이지마루(明治丸) 선상에서 그려 1882년 9월 25일 일본 숙소에 게양했다고 합니다.

 

박영효가 선상에서 태극기를 제작한 것은 시기상으로  이응준이 국기를 제작하여 1882.5.22 조미 수호통상조약 조인식에 게양되었던 시기보다 4개월이나 늦으며,

종합해 보면 박영효는 태극기를 공식적으로 최초 사용한 사람도 아니고 최초로 만든 사람도 아닙니다.

 

1882년 5월 조미(朝美) 수호통상조약 당시 조선은 국기가 없어 5월 14일 미국 전권대사 슈펠트(Schufeldt) 제독은 조선 대표 신헌(申櫶)과 김홍집(金弘集)에게 조인식에 사용할 국기를 제정하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고종임금님의 지시를 받은 김홍집으로부터 국기를 만들라 명령을 받은 사람은 역관 이응준(李應俊·1832~?)이었습니다.


이응준은 1882년 5월 14일에서 22일 사이 미국 함정 스와타라(Swatara) 선상에서 국기를 만들었고, 이 국기는 제물포에서 조인식이 열린 22일 성조기와 나란히 게양되었습니다.

 

고종황제의 얼굴과 태극문양이 새겨진 황제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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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태극문양은 중국에서 유입된 것이 아닌 우리나라 고유의 문양으로

신라시대 부터 태극문양이 나타나며 근거로 경주 감포의 감은사지의 기단석에 태극 문양이 있고 미추왕릉의 보검에도 태극문양이 세겨져 있으며,

고려 말 공민왕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범종 몸체에는 지금의 태극기와 꼭 닮은 태극기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신라시대 감은사 기단석                                                                                           고려말 공민왕 때 추정 범종

 

큰이미지 사진은 본문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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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가 대한민국의 공식 깃발이 된 지 꼭 60년이 된다.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 제2호에 의해 국기(國旗)로 제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 태극기가 만들어진 것은 127년 전 조선 고종 19년인 1882년이었다.


태극기를 만든 사람은 오랫동안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 명인 박영효(朴泳孝·1861~1939)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본에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로 파견

됐던 박영효가 메이지마루(明治丸) 선상에서 그려 1882년 9월 25일(이하 양력) 일본 숙소에 게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새로운 자료들과 연구에 의해 이 같은 백과사전적 상식은 전면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그렇다면 태극기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 1882년 5월 이응준 태극기  /  1882년 9월 박영효 태극기  /  1949년 10월 국기가 된 태극기


1882년 5월 조미(朝美) 수호통상조약 당시 조선은 국기가 없었다. 5월 14일 미국 전권대사 슈펠트(Schufeldt) 제독은 조선 대표 신헌(申櫶)과 김홍집(金弘集)에게 조인식에 사용할 국기를 제정하라고 요청했다. 김홍집으로부터 국기를 만들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역관인 이응준(李應俊·1832~?)이었다.


이응준은 5월 14일에서 22일 사이 미국 함정 스와타라(Swatara) 선상에서 국기를 만들었고, 이 국기는 제물포에서 조인식이 열린 22일 성조기와 나란히 게양됐다. 이 국기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그 동안 정확한 기록이 없었다.


그런데 2004년 1월에 획기적인 자료가 발굴됐다. 태극과 4괘를 갖춘 조선의 깃발이 실린 미국 해군부(Navy Department) 항해국(Bureau of Navigation)의 문서 해상 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이 윤형원 아트뱅크 대표에 의해 공개됐던 것이다. 지금의 태극기와 비교할 때 4괘(卦)의 좌·우가 바뀌고 태극 모양이 약간 다를 뿐이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1882년 7월 19일로 기록된 이 책의 출간일자였다. 조미조약이 체결된 지 불과 2개월 뒤였고, 박영효 태극기보다도 2개월 이상 앞서 있었던 것이다. 태극기를 통념대로 태극과 4괘를 갖춘 깃발로 본다면 박영효 태극기 창안설은 마땅히 수정돼야 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지난해 5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주최로 열린 국기 원형(原形) 자료 분석 보고회에서 국내 태극기 연구의 권위자들인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이 태극기는 조미조약 체결 당시 걸렸던 이응준 태극기’”라는 데 동의했다.


이응준은 1850년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던 임시 시험인 증광시(增廣試) 역과(譯科)에 2위로 합격한 뒤 역관으로 나섰다. 중국어를 할 줄 알았던 그는 조미조약 때 영어를 아는 청나라 역관을 통해 미국과의 통역을 담당했다.


1889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갔던 이응준은 귀국 즉시 체포돼 의금부에 수감됐다. 청나라 북양(北洋) 군벌의 실력자로 조선에서 서슬 퍼런 위세를 떨치던 원세개(袁世凱)가 이응준이 왕을 속이고 2만 금(金)을 가로챘다고 했던 것이다.


벌을 받고 하루아침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세종 때의 장영실처럼, 이응준 역시 그 뒤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논픽션 태극기를 쓴 박충훈씨는 “‘우리 청룡기를 국기로 쓰라는 권유를 무시 당했던 청나라가 조선의 국기를 창안한 이응준을 눈엣가시로 봤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럼 태극기 제정 과정에서 박영효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박영효의 일기 사화기략(使和記略)은 그가 준비해 간 태극팔괘도를 영국인 선장 제임스(James)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괘도로 고쳤다고 기록했다.


학자들은 이 기록의 의미에 대해 조미조약 당시 이응준의 깃발이 일본 국기와 혼동되니 팔괘도를 국기로 삼으라고 했던 청나라 특사 마건충(馬建忠)의 건의를 자연스럽게 배제하기 위해 제임스를 끌어들인 것이라고 해석했다.


박영효는 이응준의 태극기에서 괘의 좌·우를 바꾼 태극기를 만들었고, 이 태극기가 1883년 3월 6일 조선의 국기로 공식 선포됐던 것이다. 박영효 태극기가 이런 모양이었음은 지난해 발견된 1882년 11월 1일 일본 외무성의 요시다(吉田) 문서가 뒷받침해주고 있다.


결국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최초의 태극기는 1882년 7월 미 해군부 문서에 수록된 태극기이며, 태극기의 창안자는 이응준이었던 것이 된다. 그러나 정작 태극기를 만든 사람으로 역사에 이름이 남은 것은 중인 신분의 일개 역관 이응준이 아니라 철종 임금의 사위였던 금릉위(錦陵尉) 박영효였다.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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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일본 수신사로 떠나는 박영효에게 태극기의 도안, 재질, 도형의 설명, 그리는 방법까지도 직접 언급하고 지시하였고, 박영효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태극기를 제작하였답니다. 이러한 사실은 박영효의 일기[使和記略](新製國旗縣寓樓旗等白質而從方長不及廣五分之二主心畵太極塡而靑紅四隔畵四卦會有受命於上也)에 기록이 있습니다.

 

 

 1882년 11월 1일 일본외무성의 요시다 기요나리가 주일 영국공사 해리 파크스에게 보낸 문서에 그려진 ‘박영효 태극기’(좌측상단), ‘이응준 감정본’ 태극기. 1882년 5월 22일 조미통상조약에서 사용된 기로 조선측 수행원인 이응준이 창안했다.(우측상단)

1886년 청이 발간한 통상장정성안휘편에 수록된 ‘대청국속 고려국기’. ‘조선국왕자문(朝鮮國王咨文)’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좌측하단), 1884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공식인쇄해 해외공관에 반포한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우측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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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박영효가 아니다.


흔히들 태극기는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가 일본 가는 배 안에서 급조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박영효는 태극기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최초로 만들어낸 사람은 아니다.


우리 조정에서 국기에 대해 처음으로 눈뜨게 된 것은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에 비롯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개화와 외교에 막중한 영향을 끼쳤던 이 소책자에 조선이 독립국이려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 것까지는 좋은데 그 국기 도형을 중국의 용기(龍旗)를 본떠서 만들되 사각(四角)으로 하지 말고 삼각기(三角旗)로 해서 청나라의 허락을 받도록 할 것을 권하고 있는 점이 고약하다.


이 `조선책략'에 좇기로 한 조정에서는 1880년 동지사(冬至使) 가는 편에 중국의 국기가 어떻게 생겼으며, 조선 국기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이에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은 용 모양을 그려 속국임을 표시하고 그 이름을 용방기(龍方旗)라 함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태극기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고종과 김홍집이다.


이 같은 속국 표시에 불만을 품었던 고종과 개화 내각에서는 이를 묵살하고 없었던 일로 덮어 두고 있다. 그 후 국기 문제가 재론된 것은 1882년 한미수교조약을 맺을 때였다.


수교의 실무를 돕기 위해 보낸 청나라 외교관 마건충(馬建忠)이 조선측 대표인 김홍집(金弘集)에게 먼나라와의 수교에 있어 국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조선 조정에서 생각하고 있는 기식(旗式)이 일본 국기를 닮았다 하여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아마도 당시의 조정에서 청나라 속국을 탈피한 나름대로의 국가 도안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임금을 뜻하는 붉은 바탕에 조야의 관원을 뜻하는 푸른 색과 백성을 뜻하는 흰색을 화합시킨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던 것 같다.


`임금님은 붉은 옷을, 관원들은 푸른 옷을, 백성은 흰 옷을 입기에 발상된 도식' 이라고 김홍집이 설명하자, 교활한 마건충은 다음과 같은 수정안을 내놓고 있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니 국기의 바탕을 흰색으로 하고 임금을 붉은 용 그림으로, 관원을 파란 구름 무늬로 타나내되 용발톱을 네 개로 함으로써 중국 국기의 다섯 용발톱과 구분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김홍집은 마건충 안에 다시 수정을 가한다. `홍룡청운(紅龍 靑雲)은 그리기에 번잡하니 흰 바탕에 반홍반청(半紅半靑)의 태극 무늬로 하고 그 둘레에 조선 8자도를 뜻하는 팔괘(八卦)를 그리면 일본 국기와 비슷함을 면할 게 아니요' 했다.

이런 일이 있는지 넉 달 후에 태극기가 국기로서 공식 채택되고 있다.』



[만물상]


김홍진 논설위원 mailer@chosun.com 입력 : 2009.10.14 22:04


1948년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국기로 여러 가지 태극기가 쓰이자 국기보양회라는 단체가 국기의 도식과 규격을 통일해 달라고 건의했다. 1949년 1월 이승만 대통령 지시로 각계 대표 42명으로 구성된 국기제정위원회가 출범했다. 일부 위원이 "나라가 새로 섰으니 국기도 새로 제정하자"고 했으나 대다수는 "많은 선열이 태극기 밑에서 순국했다"며 반대했다. 위원회 이름도 국기제정위원회에서 국기를 바로잡는다는 의미로 국기시정(是正)위원회로 바꿨다.


▶ 위원들은 왕궁에 소장했던 도안과 군정(軍政) 문교부가 발표했던 도안, 국기보양회가 제출한 도안, 이정혁 위원이 건의한 도안을 놓고 논의했다. 저마다 팽팽히 맞서자 정인보, 이병도, 안재홍, 이선근, 최현배 등 12명의 특별심사위원회가 정하도록 했다. 2월에 특위는 국기보양회 도안을 채택했지만 닷새 뒤 독립문에 있던 태극기 원형이라는 새 도안이 등장했다. 위원회는 갑론을박 끝에 독립문 도안으로 번복 결정했다.

 

▶ 3월 3차 전체회의에선 독립문 도안이 역리(易理)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왔다. 3, 5 홀수 괘가 밑으로 가고 4, 6 짝수 괘가 위로 올라간 것은 음양이 뒤집혔다는 주장이었다. 다시 표결한 결과 원래 정했던 국기보양회 도안이 최종안으로 결정됐다. 고희동 등 화백들이 만든 무궁화 봉오리를 국기봉으로 정했다. 문교부는 10월 15일 고시 2호로 국기를 공포했다.


▶ 태극기는 제정 이후에도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태극이라는 말이 주역에 나오고 문양은 1070년 송나라 때 주돈이가 쓴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나오기 때문이다. 태극이나 역괘가 중국만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팽팽했다. 태극도설보다 388년 앞선 682년 신라가 창건한 감은사의 주춧돌에도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다. 문교부장관을 지낸 사학자 이선근은 1959년 "부질없는 중국식 해석은 삼가야 한다. 문교부가 결정한 대로 따라야 한다"고 선언했다.


▶ 우리 국기가 제정된 지 오늘로 60돌을 맞았다. 국경일에도 국기 게양 비율이 3~8%밖에 안 되고 태극기박물관도 없이 맞는 회갑이다. 많은 나라들이 국기가 만들어진 날을 '국기의 날(Flag day)'로 기념하지만 우리는 국가 차원 기념행사가 없다. 15일 국기홍보중앙회와 국기사랑회, 두 민간단체가 서울 탑골공원에서 '국기 환갑잔치'를 갖는다고 한다. 정부부터 국기에 대한 인식과 사랑이 부족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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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2년에 만들어진 감은사 금당 기단 장대석의 태극 도형 모양은 다음과 같습니다.


 

 

태극문양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많이 변한 것 같지는 않네요...

사실 8괘(八卦)를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태극문양 양쪽으로 8개의 대각선이 문양으로 새겨져

있음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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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기 태극기를 처음으로 만든 인물에 대하여 조선말 정치가 박영효라는 사람도

있고, 조선말 고종 임금이라는 사람도 있는데, 정확히 말해서 고종 임금이 맞다.


왜냐하면 최초의 태극기를 만들었던 시기는 1882년으로 그 당시라면 절대 왕권시대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권력과 제도는 물론 풍습까지도 임금의 어명대로 따라 했던 시기이다.


하물며 나라를 국내외적으로 상징하고 표시하는 국기를 일개 정치인 신분이 만들었다는 것은 납득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영효로 진해왔던 것은 태극기가 만들어지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은 조선왕조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주권은 물론, 한글과 풍습까지 송두리채 없애고 일본식으로 바꾸려했다.


이런 과정에서 고종의 치적중에 하나인 태극기 자료를 아예 없애고 말았는데, 다행이 태극기 연구가 송명호에의해 고종임금이 최초의 태극기를 창안했다라는 근저 자료를 일본동경도립중앙도서관 고서부에 소장되어 있는 1882년 10월 2일자 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 에 게제된 자료를 발견하여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신문 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때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 만한 것이 없어 지난번에 탁지부를 방문한 중국의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바탕에 용을 그려야 하며, 본국인 중국은 황색을 사용하나 조선은 중국의 동방에 위치하는 나라이므로 동쪽은 청색을 귀히 여긴다는 뜻에 따라 청색바탕을 이용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이에 국왕은 분히 여겨 절대로 중국의 국기를 흉내내지 않겠다하여 사각형의 옥색바탕에 태극원(두개의 소용돌이 문양)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고 한다.」


이 내용만 보더라도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이 만들었으며 그 당시 중국으로부터 심한 간섭을 받았으나 이을 물리치고 독자적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도리 것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사대주의 발상에 의해 중국 사신 마건충이 고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으로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임금이 고안했다고 보는게 맞다

                                                                                                   야후의 songpr 님의 답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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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 황제 작품이었다


(서울신문발행 뉴스피플 1997년 10월 9일자 제288호 특종)


지금까지 우리 나라 국기인 태극기는 박영효가 창안, 도안한 것이 정설로 돼 있었다. 1882년 고종의 허락을 받아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러 가던 중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일행과 숙의해 그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태극기의 유래는 잘못 알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박영효가 주도한 작품이 아니라 고종의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으로 새삼 밝혀졌기 때문이다.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도쿄에서 발행된 일간신문 「시사신보」(1882년 3월 창간,1936년 폐간) 는 당시 일본을 방문한 박영효 수신사 일행과 기자 회견을 갖고, 태극기는 자국의 국기를 모방하라는 청나라의 압력을 뿌리치고 고종이 직접 도안을 하고 색깔까지 지정한 것으로 보도했다. 박영효는 고종이 구상한 작품을 고종의 지시에 따라 일본으로 가던 도중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시사신보 기사는 생생하게 전하고 있어 태극기의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사실은 최초의 태극기가 게재된 시사신보 축쇄판을 동경도립중앙도서관에서 단독 입수, 지난 광복절날 일간신문(동아, 한국일보)을 통해 태극기 그림을 공개한 서울시청 총무과 송명호씨에 의해 밝혀졌다. 송씨는 당시 일간지가 서둘러 보도하면서 최초의 태극기 발견 사실에만 기사의 초점을 맞추고 정작 태극기가 고종의 작품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간과한 점을 중시, 이를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관련 자료를 작성, 주요 도서관과 학술연구기관에 무료 배포하기에 앞서 뉴스피플에 제공했다. 그가 제공한 화제의 시사신보 관련 기사는 「잡보」란을 통해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일본 방문을 조선의 유신이라고까지 장황하게 극찬한 다음 「조선국기」라는 캡션이 붙은 태극기 그림과 함께 국기의 재정 배경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때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만한 것이 없어 지난번에 탁지부를 방문한 중국(원문에는 지나로 표기했으며 청나라를 지칭함)의 마건충(청나라 덕종때 사람으로 1882년 군함 수척에 군인 4천5백명을 인솔, 조선에 와 임오군란을 조정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대원군을 천진으로 압송하는 등 조정에 친청파를 구축하며 내정에 깊이 간여한자임)이 조선의 국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야 하며 본국인 중국은 황색을 사용하나 조선은 동방에 위치하는 나라이므로 동쪽은 청색을 귀히 여긴다는 뜻에 따라 청색 바탕을 이용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에 국왕(고종)은 분하게 여겨 절대로 중국 국기를 흉내내지 않겠다고 해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원(두개의 소용돌이 모양)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역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고 한다」


이 신문의 관련 기사 첫 머리는 「지난달 28일(1882년 9월 28일 가리킴) 하나부사공사와 함께 도쿄에 도착한 조선인의 이야기에 의하면....」이라고 돼 있어 박영효 수신사 일행중 한명과 인터뷰를 통해 기사를 작성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개혁파 지식인들인 김옥균, 서광범 등도 박영효와 동행했다고 이 신문은 적고 있어 이들중 한명과 인터뷰를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련 기사에서 고종은 청나라 마건충의 강요에 분노하며 독창성을 발휘, 도안과 도형의 설명, 그리는 방법까지 직접 언급하고 있다. 이는 국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외세를 단호히 배격했음을 의미한다.

당시는 청나라가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고 임오군란을 이용, 제물포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자국군의 서울 주둔을 강요하며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열강의 틈사이에서 국왕이 국정을 제대로 펴기조차 힘든 시기였음을 볼 때 고조의 이같은 자주정신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고 송씨는 설명했다.

 

태극기 연구가이기도 한 그는 「관련 기사가 발견되기 전에는 주역의 태극도를 그렸다는 등 태극기의 유래에 대해 별의별 억측이 많았으나 이젠 이러한 의구심을 말끔히 해소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 나라 최초의 태극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82년 9월 25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날 박영효 일행이 고베에 도착, 숙소인 니시무라야(西村屋) 옥상에 국기를 게양했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그로부터 사흘 뒤 일행이 도쿄에 도착했고 이를 시사신보 기자가 취재해 10월 2일자에 보도한 겁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 나라 태극기는 모두 다섯 번의 변천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첫 번째는 시사신보의 보도처럼 고종의 지시에 따라 박영효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두 번째는 1885년 고종이 외무담당 미국인 데니씨에게 선물한 태극기로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세 번째는 1896년 독립신문 제호에, 네 번째는 1900년 파리박람회 때 사용했던 태극기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은 1949년 정부에서 42인 국기제정위원회를 구성, 제정한 것이다. 그동안 태극기의 유래에 대해 가장 상세하게 언급한 것은 1961년 진단학회가 펴낸 「한국사」로 전문가들 사이에 금과옥조로 여겨왔다.

 

우리 나라에서 국기문제가 논의된 것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당시 강화도 회담에서부터 대두됐다. 이때부터 국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이를 눈치챈 중국이 황준헌을 통해 중국의 용기를 본받아 그려서 전국적으로 사용하라는 간섭을 했다. 그후 우리 나라와 중국은 국기 제정에 따른 양국 위원을 임명했는데 우리측 위원은 이응준이었고 중국측 위원은 마건충이었다.

 

그러나 국기 제정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수신사 박영효 일행은 일본을 방문하게 됐고 이때 출발에 앞서 고종황제로부터 내략을 받았다.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동숭한 수신사 일행, 영국 영사관 아스톤, 선장 제임스 등과 태극 8괘의 도안을 가지고 숙의한 끝에 최종적으로 4괘의 태극기를 국기로 결정, 제작했다. 아마 이 결정은 일본으로 출발에 앞서 고종황제가 지시한 대로 따랐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사」도 고종이 지시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고종이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태극 무늬의 모양과 색, 4괘, 바탕색까지 지정하는 등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지나치고 말았다. 시사신보의 보도 내용에 대해 서울대 국사학과 한영우 교수는 처음 듣는 말이라며 「최초의 태극기 제정 배경 등 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김광남 연구관도 이같은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태극기 변천사를 다시 써야 할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평가했다.


최초의 태극기를 발견한 송씨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최초의 태극기 그림과 자료가 국내에서 발견되지 않고 일본서 찾게된 것은 부끄럽기 그지 없지만 태극기의 역사가 제가 만든 자료를 근거 삼아 새로 정리할 수 있게 된 점은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종의 지시대로 박영효가 완성시킨 최초의 태극기는 애초 3점이 제작됐으나 왕조의 몰락 등 격변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실물이 자취를 감춰 아쉽다는 말을 덧붙였다.(김철호기자)


이번에 시사신보에서 태극기 그림을 발견하기까지 가장 힘들었던 점은 역사연표의 숱한 오류였다. 즉, 年 표기는 양력인 서기로 하고 달과 날짜를 음력으로 표기하므로써 우리 역사의 기록을 탐구하는데 심한 혼란을 초래시켰다. 가령 우리 나라의 여러 기록에 의하면 수신사 일행이 고베에 도착한 달을 1882년 8월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은 1882년 9월이었다. 이런 아이러니 때문에 115년이 지나서야 최초의 태극기 그림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서기로 표기한 것은 모두 양력으로 환산해야만 한다. 우리는 왜 캐캐 묵은 최초의 태극기를 찾아야 하는가라고 질문할지 모르나 그 질문 자체가 우둔할 뿐이다. 현재의 태극기가 제정되기 전에 최초의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했다라는 기록이 엄연히 있는 한 그 실체를 찾지 않는다면 스스로 역사의 단절을 자행하는 과오를 저지르는 것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최초의 태극기를 찾는데 진지하지 못했거나 방관하였다. 그 동안 잘못 알려진 태극기의 변천사를 다시 고쳐 쓰는 일은 발굴자의 즐거운 소명이 될 것이다.


아울러 태극기의 이름이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1919년 3.1운동때 부터임...



■ 현재 사용하고 있는 태극기의 맨처음 국기 이름은 '조선국기'


우리나라의 국기가 맨 처음 만들어졌던 조선왕조 시대 때에는 나라의 이름인 '조선'과 함께 '조선국기'라 불렀다. 당시 조선왕조를 나타내는 국가의 명칭이 '조선'이었기 대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1882년 최초의 국기가 만들어지고나서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기전까지 27여년 동안은 '조선국기'로 불리어져왔었다.


'조선국기'가 '태극기'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하던 때부터였다.


18세기 말엽 조선왕조는 관리들의 당파 싸움과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나라 꼴이 허약해기기 시작하였다. 이런 기회를 노려오던 일본은 마침내 1910년 조선왕조를 송두리채 빼앗아갔다. 이에 격분한 애국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으로 일본에 맞섰다. 1919년 3월 1일 정오에 맞춰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과 함께 전국적으로 대한독립 만세 운동를 펼치기로 하였다.

 

이날 참여한 모든 국민들은 누구를 가리지 않고 손에 손'기'를 들고 나오기로 하고, '기' 제작을 하였는데, 그때만해도 '조선국기'로 부르던 국기 이름을 일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태극기'로 부르자고 약속을 하면서부터 새롭게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일본 경찰은 탑골공원이며 종로거리이며 동대문 성벽까지 가득 메운 인파들이 그렇게도 많은 태극기를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하여 매우 당혹한 나머지 태극기를 든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팔뚝을 자르는 등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 우리나라 애국지사들은 중국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만들고, 국기를 바라보며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해방되기 3년전인 1942년 3월 1일에는 한국 임시정부수립 23주년 3.1절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거기에 국기 이름을 '태극기'로 정하고 그 존엄성을 명문화 하였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태극기가 국제적으로 사용된 것은 실로 1882년의 일이며, 그로부터 태극기는 한국의 독립주권을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3.1대혁명 발동에 있어서도 여전히 태극기를 썼으며, 그 깃발은 혁명군중의 선혈에 물든 채 적의 총검 위에 꽂혀졌다. 이처럼 태극기는 3.1대혁명의 발동을 위해서도 없을 수 없는 큰 힘이었으니, 한국 주권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역사의 빛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태극기에는 부숴질 수 없는 존엄과 인상이 아로새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인 살고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한 폭의 태극기를 걸어 놓고 자신이 조국을 잊지 않고 있으며,나라를 되찾겟다는 민족적 신조를 간직하고 있다는 결심을 표시하여 왔다.」


                                                                                  참조 : http://myhome.nate.com/songpr/



제정유래

 

국기문제가 처음 거론된 때는 1880년(고종 17)이다. 일본에서 귀국한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가져온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에서 조선이 중국용기(中國龍旗)를 군기와 국기로 사용하도록 권고한 내용에 따라 조선정부는 청(淸)나라에 자문을 구하게 되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 구체화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뒤 82년 4월 6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될 때 조선의 전권부관 김홍집과 청사(淸使) 마건충(馬建忠) 사이에서 국기문제가 재론되었다.


마건충은 중국 용기의 사용을 반대하고 11일 흰색 바탕 중앙에 반홍반흑(半紅半黑)의 태극도(太極圖)와 그 둘레에 팔도(八道)를 뜻하는 검은색 팔괘(八卦) 및 빨간색 주연(周緣)이 있는 도식을 제안하였다.


같은 해 8월 9일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 박영효(朴泳孝)가 메이지마루[明治丸]를 타고 일본에 가던중 영국인 선장과 상의하여 태극기 대·중·소 3본(本)을 만들었으며, 태극도가 마건충이 제안한 반홍반흑에서 반홍반청으로, 팔괘가 사괘로 발전하였다. 박영효는 8월 22일 태극기 소본(小本)과 국기제정 사실을 군국기무처에 보고하였으며, 83년 1월 27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장계(狀啓)에 따라 팔도사도(八道四都)에 행회(行會)함으로써 태극기가 정식 국기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사괘와 태극양의(太極兩儀)의 위치에 통일성이 없었으나 1948년 정부수립을 계기로 도안과 규격을 통일, 49년 10월 15일 문교부고시 제 2 호로 현행 태극기를 대한민국 국기로 정식 공포하였다. 그 뒤 문교부개정고시 제 3 호(1950. 1.25)에 의거하여 국기제작법이 공고, 시행되었으며, 대통령고시 제 2 호(1966. 4.25)에 의거하여 국기게양법이 공포, 시행되었다.


구조와 원리

 

태극기는 흰색 바탕의 중앙에 음(陰, 靑)·양(陽, 紅) 양의(兩儀)가 포함된 일원상(一圓相)의 태극이 있고 건(乾)·곤(坤)·감(坎)·이(離)의 4괘가 네 귀에 배치된 구조이다. 흰 바탕은 순일무잡(純一無雜)한 한민족의 동질성과 결백성 및 평화애호성을 상징한다.


중앙의 태극무늬는 고대로부터 한민족이 사용해 온 것으로, 628년(신라 진평왕 50) 건립된 감은사(感恩寺)의 석각(石刻)과 1144년(고려 인종 20)에 죽은 허재(許載)의 돌널[石棺] 등에 이미 그 무늬가 나타나고 있다. 태극은 우주만상의 근원이고 인간생명의 원천으로서 사멸이 없는 영원의 상(相)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된다.


존귀를 의미하는 붉은 색의 양과 희망을 나타내는 청색의 음이 위아래로 머리와 뿌리를 맞댄 대립관계 속에서 상호의존하여 생성, 발전하는 모습이며 이를 화합하고 통일하는 것이 일원상의 태극이다. 4괘는 건[乾;≡ 천(天)·춘(春)·동(東)·인(仁)], 곤[坤; 지(地)·하(夏)·서(西)·의(義)], 감[坎; 월(月)·동(冬)·북(北)·지(智)], 이[離; 일(日)·추(秋)·남(南)·예(禮)]인데, 건은 태양(太陽)으로서 양이 가장 성한 방위에, 곤은 태음(太陰)으로 음이 가장 성한 방위에 배치되어 있으며 감은 소양(少陽)으로 음에 뿌리를 두고 자라나는 모습을, 이는 소음(少陰)으로 양에 뿌리를 박고 자라나는 모습을 표현한다.


건은 이로, 이는 곤으로 성장하며, 곤은 감으로, 감은 건으로 성장하여 무궁한 순환발전을 수행한다. 즉 음양이 생성, 발전하는 창조적인 우주관을 담고 있다. 태극기 전체로는 평화·단일·창조·광명·무궁을 상징한다.


제작 및 게양

 

태극기의 깃면은 길이와 나비의 비율이 3:2이다〔그림 1〕. 깃봉은 아랫부분에 꽃받침이 5개 있는 무궁화봉오리모양으로 황금색으로 하며 제작법은 〔그림 2〕와 같다. 깃대는 대나무·쇠 등의 견고한 재질을 사용하고, 색은 대나무색이나 이와 비슷한 색으로 한다.


국기는 비나 눈이 내리지 않는 날에 게양함을 원칙으로 한다. 깃봉은 아랫부분에 꽃받침이 5개 있는 무궁화꽃 봉오리모양으로 하여 황금색으로 한다. 경축할 때는 깃봉과 깃폭을 사이 없이 달고, 조의를 표할 때는 깃폭만큼 내려서 달거나 깃대가 짧을 경우는 깃대의 한중간에 단다. 외국기와 같이 게양할 때는 최우선의 위치에 단다.


태극기와 외국기 하나를 같이 세울 때 태극기는 왼쪽, 교차시에는 태극기의 깃면이 단상을 향하여 왼쪽에 오게 한다. 외국기가 홀수인 경우 태극기는 중앙에 게양하고 외국기가 짝수이면 맨 왼쪽에 게양한다. 또한 기폭만 달 경우 바로 달 때는 건을 왼쪽 위로, 늘여서 달 때는 건을 오른쪽 위로 오게 한다〔그림 3〕. 일반가정의 대문에는 집 밖에서 보아 왼쪽에 세우고, 아파트에서는 밖을 향하여 베란다 오른쪽에 게양한다.



우리나라 국기는 1882년 최초로 만들어진 이후 숱한 시련과 수난 속에서도 그 뿌리와 정신만은 굳건히 지켜왔다. 특히 일제 36년 동안이라는 잔인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그 육신은 비참하게 찢기었어도 '태극기' 그 이름만은 고이 간직해왔다. 이런 과정속에 존재 하기 위해서 여러 모습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음 변천단계들은 변천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태극기가 굳건히 지켜지기까지의 우여곡절속에 나타난 수 많은 종류들을 분류해 본 결과 시대와 지역에따라 주로 많이 사용된 유사 종류들중에 특징적인 것 하나씩을 이해 본위로 내세운 것이다.


               ▲ 1882년 5월 이응준 태극기  /  1882년 9월 박영효 태극기  /  1949년 10월 국기가 된 태극기


 

 박영효가 만든 태극기의 사본을 토대로 실물 크기로 복원한 태극기 앞에서 한철호 동국대 교수(왼쪽)와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이 설명하고 있다. | 남호진기자

 

한철호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왼쪽)와 김삼웅 독립기념관장(가운데)이 28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이달 초에 영국국립문서보관서(National Archives)에서 확인.발굴한 최초의 태극기 원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번에 공개된 최초의 태극기는 1882년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제작한 태극기의 원형을 그대로 그린 것으로 크기는 가로 142.41㎝, 세로 115.14㎝, 태극의 지름 81.81㎝이다. /이동훈기자 photoguy@newsis.com

 

아래 단계별 태극기 내용은 참고로만 보시기 바랍니다.

 

□ 1단계 태극기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는 1882년에 수신사 박영효일행이 일본을 방문 할 때 고종황제로부터 허락받은대로 배안에서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은 있으나 당시 그렸다는 태극기모습이 나타나지 않아 애를 태웠으나 태극기연구가 송명호(시인. 필명 송명)씨가 115년만에 일본 동경도립중앙도서관에서 조선에 처음으로 국기가 만들어졌다는 기사와 함게 태극기 그림이 실린 시사신보(1882.10.2.월요일)를 발견,이사실을 1997년 8월 15일 언론에 공개하므로써 115년만에 그 발자취를 찾아내게 되었다. 괘의 모습은 현재의 태극기와 상당히 다르고 음방과 양방의 배치도 좌우 대칭되어 있다.


□ 2단계 태극기

  

 1885년 고종황제가 당시 외무담당 미국인 데니씨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시사신보가 발견되기전까지만해도 이 태극기가 최초의 태극기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하였다.현재는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있다.

 

 

□ 3단계 태극기

  

1896년에 발행한 독립신문 제호에 도안된 태극기.독립신문의 제호 태극기는 발행될때마다 그 모양이 다르게 되어 혼란을 초래했다.



□ 4단계태극기

  

 1900년 파리 박람회 장소에 게양하였던 태극기. 특징으로는 유연한 곡선의 음방(청색)과 양방(홍색)이 좌우로 배치된 것과 4괘가 귀퉁이에 있지 않고 열십자 방향으로 배치되었다는 점이다.



□ 5단계 태극기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 제2호로 공표한 대한민국 국기. 지금의 태극기 도안이 되기까지에는 42인의 국기시정위원회의 수차례 의논과 우여곡절을 겪고나서 결정되었다. 당시 이왕에 해방과 함께 새로룬 국가가 탄생하였으니 국기도 새로운 도안으로 만든 것이 어떻겠는가는 논란이 가장 두드러졌으나 ,일제 36년동안 일본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애국지사들이 태극기를 가슴에 묻고 조국의 광복을 빌었으니 그분의 넋을 달래고 또 갈라진 남북이 통일되면 한반도 전체의 의견이 수렴된 국기를 만들 기회가 있으니 도안과 4괘의 이치가 다소 논란이 있드라도 일제 36년.동안 가장 많이 그려지고 사랑하였던 태극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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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태극기' 최초 국기 논란 가열


                                                                                           기사입력 2008-05-28 03:03


 

 

         1882년 11월 1일 일본외무성의 요시다 기요나리가 주일 영국공사 해리 파크스에게 보낸 문서에 그려진 ‘박영효 태극기’(왼쪽), ‘이응준 감정본’ 태극기.

        1882년 5월 22일 조미통상조약에서 사용된 기로 조선측 수행원인 이응준이 창안했다. "1882년 日 외무성 입수할 수 있었던 유일본"

 

"실물도 발견 안됐고 일본측의 자료에만 근거"

"이응준 감정본·대청국속 고려국기가 최초" 주장도


‘박영효의 태극기가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國旗)다.’ ‘실물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확증할 수 없다.’


일본 수신사인 박영효가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1882년 11월 일본 외무성이 주일영국공사에게 보낸 문서를 근거로 지난 2월 독립기념관이 복원한 일명 ‘박영효 태극기’(본보 2월28일자)를 둘러싼 논란이 식지않고 있다.


독립기념관 주최로 서울 대우재단빌딩 세미나실에서 27일 열린 ‘최초의 국기 수집자료 보고회’에서는 최초 국기의 도안자와 제정자는 누구인가, 최초의 국기를 무엇으로 볼 것이냐 등 초기 태극기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다.


 

  

     1886년 청이 발간한 통상장정성안휘편에 수록된 ‘대청국속 고려국기’.

‘조선국왕자문(朝鮮國王咨文)’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왼쪽),

           1884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공식인쇄해 해외공관에 반포한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

 

‘박영효 태극기’ 자료의 발굴자인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일본 외무성이 주일영국공사에게 ‘박영효 태극기’의 사본을 보낸 시점은 박영효가 일본에 체제하던 1882년 11월1일” 이라며 “당시 일본 외무성에서 입수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조선국기는 박영효가 일본체제 중에 제작ㆍ사용됐던 국기 밖에 없었으므로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라고 주장했다.


1882년 5월22일 조미통상조약에서 사용된 깃발인 이른바 ‘이응준 감정본’을 최초의 국기라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 한 교수는 “국왕의 재가와 정부대신의 논의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는 ‘국기대용’으로 사용된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이응준 감정본’은 1899년 미국 해군부 설비국이 간행한 ‘해상국가들의 깃발들’이라는 책에 ‘Corea Ensign’ 이라는 명칭으로 수록돼 있는 태극기로 ‘박영효 태극기’와 ‘리’와 ‘감’의 위치만 다르고 모양이 거의 동일하다. 한 교수도 “이런 점에서 최초의 국기 창안자는 이응준으로, 최초의 국기 제안자는 박영효로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는 “실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국기 제정 주체인 우리 정부측 자료가 아니라 일본측 자료라를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교수가 제시한 ‘박영효 태극기’를 최초의 국기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그는 최초의 국기는 1886년 청에서 발간한 ‘통상장정성안휘편’에 수록된 ‘대청국속 고려국기’로 보아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대청국속 고려국기’란 고종이 1883년 3월6일 정식으로 태극기를 국기로 반포한 뒤 같은 달 18일 청에 그려 보낸 태극기로 ‘박영효 태극기’와 괘의 위치는 같으나 바탕이 황색이고 태극의 음과 양 내부에 또 다른 태극이 그려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김 교수는 “‘통상장정성안휘편’ 에 이 기를 설명하면서 조선국왕이 자문을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공식(official)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한 교수가 공개한 박영효 태극기는 ‘해외에서 사용된 최초의 국기’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라며 “그러나 관련인물 중심의 제작설은 과거 조선정부무능론이 팽배할 때 ‘선각자 찾기’ 형태로 진행된 연구의 결과물인 만큼 앞으로는 초기국기의 도안 자체가 가지는 사상적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한 교수는 이날 1884년 조선정부의 외교를 담당했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공식인쇄해 외국공관에 배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도 공개했다.


                                                                                                                           이왕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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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건충(馬建忠)이 제안한 태극도.

청(淸)나라 사신 마건충이 반홍, 반흑의 태극에 8쾌를 그려서

조선(朝鮮)의 국기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고종(高宗)이 크게 노하여 새로운 태극기를 창안하였다.

 

 

조선왕조 말기 정치인이었던 박정양(1841~1904)이 서장하던 태극기.

1884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그후 1900년 이화학당 4대

총장 쥬디씨가 똑같이 그려 사용하였고,

현재 스미스 소니언(Smith sonian)에서 구입, 소장(所藏)중이다.

현존하는 태극기 중 가장 오래된 태극기이다.

 

 

 

 

1886년 외교 고문이었던 데니시(Deny, Owen N)가 재임시 고종황제(高宗皇帝)로부터

하사(下賜)받은 태극기이다.

데니씨는 당시 조선왕조를 간섭하던 청(淸)나라를 신랄하게 비난하였던 미국인 외교고문(顧問)이었다.

태극기의 특징은 통상약장 태극문양과 비슷하나 음방과 양방의 위치가 다르며

몸체가 가늘고 길다.

 

 

1900년 무렵의 태극기로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 되자 이를 단호히 저항하면서

굳건히 항일운동을 펴자는 글이 태극기 양쪽에 새겨진 항일 독립운동 태극기이다.

일본이 이 태극기를 빼앗아 갔다가 1967년 반환하였으며 지금은 독립기념관에 소장(所藏)되어 있다.




우리 태극기


 

위의 그림은 조선일보 사 기자 유석재 기자의 기사

karma@chosubmcom

2008년5월30일 03시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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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시대의 태극 문양


 

경주 감포의 감은사지의 기단석에 새겨진 태극 문양은 신라의 국력이 왕성

하던 7세기초에 나타났다.


중국에서의 태극은 그 용어만 [주역]에서 나타나고, 문양은 1070년 주돈이의

[태극도설]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는 우리의 것보다 380년 뒤진 것으로 보아 태극은 중국에서 유입된 것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문양임을 입증하고 있다.

  

 

 

 


 

고려 시대의 태극 문양

 

  

 

고려 말 공민왕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범종 몸체 (모형)에는 지금의 태극기와 너무나 닮은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1365년 노국공주 정릉의 태극과 공민왕-개성

 

 

 

 

조선 시대의 태극 문양


조선시대 궁궐과 왕의 무덤에서 태극문양은 많이 보인다.

 

 

 


종묘의 태극문양 : 태조4년 1395년의 종묘는 비록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중건한 건물이지만, 중수할 적에 역사적 근거에 기초한 중수하였기에 원형을 그대로 살려 복원하였을 것으로 본다. 종묘의 돌계단과 태실 입구의 기둥에 새겨진 삼태극 문양은 마치 태실의 수호 상징처럼 보이기도 한다. - 조선 왕실에서 태극문양을 소중히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사진 3개]

  

  

 

태극 깃발도 옛날부터 있었다.


태극 문양뿐 아니라, 태극 깃발도 이미 조선의 고종이 국기로 제정하기 전부터 사용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임진왜란 종전화가가 그린 태극 문양 깃발은 가운데의 태극을 중심으로 구름이 사방을 에 두르고 있다. 이는 아마 명나라의 군선과 구별 짓기 위함이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수군진법 그림(작전도)에는 태극문양의 깃발이 발견되고 있다.

이는 아마 최고의 지휘관이 타고 있는 본부 군선(軍船)을 표시하는 듯 하다.

 

  

경원대학교 아시아 문화연구소가 중국의 중앙 민족 대학교와 함께 중국 내의 한국문화와 한민족의 뿌리를 찾기 위한 한중 교통로 답사 위한 사료 조사를 하던 중에 북경의 조그마한 도서관에서 발견 20폭의 화첩에는 태극문양의 깃발이 그려져 있다.


이 두 장의 그림은 청나라 사신이 조선 영조의 책봉례에 참석하는 과정을 청의 사신이 그린 것이며, 조선에 온 청나라 사신 앞에 태극 문양의 삼각기가 펄럭인다.


청나라 사신은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 용기를 펄럭이고, 조선의 영조를 시위하는 병졸들은 태극 문양 삼각기 들고 있다. 이는 아마 압록 강변에서 청의 사신을 접견하는 과정에서 의장용으로 사용된 깃발로 추증하고 있다.

◦  (게재 : 1998년 7월 10일 KBS 9시 뉴스)

 

 

 

프랑스의 성 루이 성당 안에는 병인양요 당시에 프랑스가 한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 문양의 삼각기가 걸려있다. 이는 위의 봉사도 안에 나타나는 태극삼각기와 매우 비슷하다.

 

 이상의 자료를 통하여 볼 때 태극기는 조선의 고종 때 제정하기 전부터 이미 태극 문양 깃발이

사용되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1875년-1883년 : 논의와 제정의 역사


국기 제정에 대한 최초의 관심 : 1875년, 일본은 우리나라의 개항을 요구하면서 운요오호를 몰고 왔다. 1876년(고종13년)1월 운요오호사건(雲揚號 事件)을 계기로 한 일 양국간에 강화도 조약 체결이 논의 동안 일본측은 "운요오호에는 엄연히 일본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왜 포격(砲擊)을 가하였는가?"라고 트집을 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 조정의 인사들은 국기가 무슨 의미와 내용을 지니고 있는지조차 몰라서 어리둥절하기만 했었다.


이것을 계기로 비로소 조정에서는 국기 제정의 필요성이 활발하게 거론되었다. 일본은 이미 명치유신 2년 뒤, 1870년에 흰색 바탕에 국왕을 상징 붉은 태양을 그린 일장기를 국기로 제정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직접적 계기 : 1882년 미국과의 수호조약 시, 미국의 대표 슈펠트는 우리나라가 독립 국가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독자적 국기를 가져야 한다며 국기 제정의 필요성 언급하였다. 이에 김홍집은 통역관 이응준에 급히 태극기를 제작할 것을 명하니 이에 이응준은 흰색 천 중앙에 태극문양(청홍색의 태극양의기)을 그린 국기를 제작하였다. 아래의 그림은 1882년 5월 조미조약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상상하며 그린 이응준의 태극양의기(추정)와 미 성조기의 모습이다.


 한미조약 참관 차, 와 있던 청나라의 마건충과 김홍집과의 대화

 

마 : "조선의 국기는 일본기와 비슷하여 혼동을 주니 새로 제정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

김 : "그렇다."

마 : "조선의 왕과 신하와 백성은 무엇을 입는가?"

김 : "임금은 용이 새겨진 홍포를 입고 신하는 푸른색 관복을 백성은 백색을 즐겨 입는다."마 : "내가 생각하건데, 귀국의 국기는 백성을 상징하는 백색 바탕에 신하를 상징하는 청색 구름과 임금을 상징하는 붉은 용을 그리되, 우리 청국기의 용 발톱이 5개이니, 4개로 구별 짓는 것이 어떻겠는가?" (청나라의 국기에 그려진 용의 발톱은 5개이며, 조선을 속국으로 보는 의미에서 4개의 발톱을 그릴 것을 권했다.)

 

김 : "그것은 그리기에 너무 어렵다. 그냥, 태극양의기를 활용하겠다."

마 : "그렇다면, 반홍 반흑의 태극양의 둘레에 팔괘를 그리면 되겠다."



그러나 마건충이 제안한 태극 팔괘도는 주돈이의 태극도설(1070년)를 응용한 것으로

우리 고유의 전통적 태극문양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진설명> 주렴계 저서의 태극도설(1070년)(좌)과 박영효(朴泳孝)가 1882년 태극기를 만들 때 마건충이 제안했던 태극 팔괘도에 근거하여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팔괘도'(우)는 건곤감리와 손태리진의 8괘를 모두 나타내고 있다.

참조 : 태극 팔괘도 발견 (1998. 11. 2일 조선일보)

참조 :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와 이황의 태극도 풀이

 

 

 

제목 : 淸 使臣 그림 속 깃발, 태극기 원형일까?
     게재 : 1998년 7월 14일 (화), 조선일보


 

학계, [奉使圖]내용에  비상한 관심…[바퀴 달린 기암 괴석]도 의문 .

 

  • 18세기 초반 조선의 상징으로 현재의 태극기와 비슷한 깃발이 있었을까?
  • 10일 공개된 청(靑) 사신 아극돈(阿克敦)의 봉사도[奉使圖]중 중국사신이 여행중 묵었던 숙소(행관·行館) 부근에 걸린 태극 문양의 깃발에 학계가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 길 중간에 두 개의 대를 세워 건 이 깃발은 태극기와 전체적인 분위기가 너무도 흡사하다.
  • 사괘 중 광명과 정열을 뜻하는 '리(離)'와 지혜와 활력을 의미하는 '감(坎)'이 위 아래에 있으며, 가운데 음양의 위치가 바뀌어 적색이 아래로, 청색이 위에 위치했다.
  • 현존 유물로는 7세기 말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경주 감은사 탑이나 고려 중기 돌로 만든 한 관에도 태극문양이 나타나긴 하지만, 19세기 말 박영효 등에 의해 태극기가 제정되기 이전에 태극문양과 사괘 를 사용해 국가의 상징으로 썼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 김원모 단국대교수는 "국기는 아닐지라도, 중국 사신을 환영한다는 의미에서 어쨌든 조선의 상징으로 걸지 않았나 추정한다"고 밝혔다. 이태진 서울대교수는 "중국사신이 묵었는데 조선을 상징하는 기 를 걸었다는 것은 의문"이라고 말했다.


<사진>

  • 중국 사신을 환영하는 의미의 조선 상징물로 보이는 깃발. 태극음양 양의를 가운데 두고 4괘중 '리'괘와 '감'를 위아래로 두고 있다.
  • 위의 바퀴 달린 기암괴석은 일종의 사신 환영을 위한 장식품의 일종으로 보이나 매우 특이한 모습이다.

 1881년 충청도 관찰사 이종원이 제출한 태극 팔괘의 도식에 의해 비로소 국기를 정하였으나 실제로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한 것은 1882년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인 박영효 일행이 일본으로 갔을 때 태극 도형과 4괘가 그려진 태극기를 사용한 것이 처음이다.


 최초의 제작과 게양(태극기의 효시) :1882년 8월 9일 특명전권대사(特命全權大使) 겸 수신사(修信使)인 박영효(朴泳孝) 등 일행이 인천에서 일본 배인 <메이지 마루>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 갈 때, 당장 게양하여야 할 국기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출발 전 고종의 왕명으로 이미 조정에서 어느 정도 찬성을 본 국기 도안 내용을 다소 수정한 태극 사괘(太極四卦)의 도안이 그려진 기를 국기로 게양할 것에 의견을 모아 박영효가 타고 간 일본 배 <메이지 마루>호에서 이것을 만들었다. 이 때 이 배에는 개화당의 주역인 서광범, 김옥균 등도 타고 있었다. 이들 일행은 8월 14일 고오베에 도착, 숙소를 정하고 건물의 옥상에다가 태극 사괘를 게양했는데, 이것이 태극기의 효시(嚆矢)이다.


 아래의 사진은 아마 박영효가 <메이지 마루>호 안에서 제작하여 일본에 게양한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공식 태극기 모양이다. 이같은 사실은 1997년에 발견된 1882년 10월2일자 도쿄 일간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에 실린 태극기 제작배경기사로 알게 된 것이다. - 일명,'박영효의 태극기'라 부른다.

 

아래 이미지는 공식 태극기가 아닌 것으로 결국 판명됨


 

<사진설명> (왼쪽) 1882년 일본의 [시사신보]에 기재된 태극기의 모양, 박영효가 일본에 게양했다는 최초의 태극기 아닌가 추정된다. 바탕이 옥색이며, 4괘의 모양이 지금까지 발견된 태극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오른쪽) [시사신보]에 기재된 배치와 색깔 설명에 따라 칼라로 처리해본 태극기의 모습이다.

참조: [1997년 8월 15일 동아일보 1면 (종합)기획]

 


아래 사진은 공개된 박영효 태극기 원본

 

 

영국국립문서보관서(National Archives)에서 확인.발굴한 최초의 태극기 원형

 

 

 

 국기 제정반포 (1883. 1. 27) : 그 이듬해인 1883년 음력 1월 27일 고종은 왕명으로 태극도형과 4괘가 그려진 국기를 공식으로 제정, 반포하였으나 구체적인 작도법 등이 정해지지 않아 개인이나 단체에 따라 다소 다른 문양의 태극과 4괘 도안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883년-1900년 : 최초의 태극기 (태극 문양과 색깔 규정)



 쥬이 태극기와 데니의 태극기 :1883년 제정 당시의 태극기는 남아 있지 않지만 현존하는 최고의 태극기인 쥬이 태극기와 데니(1890년)의 태극기를 통하여 그 원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우선 두 태극기의 비교 분석해보면,

쥬이 태극기 : 1883년 푸트 미국 공사의 조선 방문 수행원이던 쥬이가 1884년 입수하여 미국으로 가져간 태극기로 실물크기 중 가장 오래되었다. 현재 미국의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제작연도 : 1884년, 실물크기 : 53×36cm

데니의 태극기 : 광무황제(고종)가 조선정부의 외교 고문으로 일하던 미국인 데니(O.M.Denny) 에게 하사한 태극기로 태극과 4괘가 재봉틀 박음질로 되어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장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이다.(1890년)



태극의 소용돌이가 지금의 태극기 보다 매우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양 태극 방향이 서로 다르며 쥬이 태극기의 음은 흑색인 반면, 데니 태극기의 음은 청색이다.

괘의 색깔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쥬이 태극기의 4괘는 흑색인 반면, 데니 태극기의 4괘는 청색이다.


 

 

<사진>우리나라 최고의 태극기 - 왼쪽, 쥬이의 태극기(1884년)와 오른쪽, 데니의태극기(1890)



서양인 눈에 비친 태극기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신 소설가 게오르규는 《25시에서 영원(永遠)의 시간으로》에서 우리의 태극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국기는 유일한 것이다. 어느 나라의 국기와도 닮지 않았다. 거기에는 세계의 모든 철학의 요약 같은 것이 새겨져 있다. 태극기는 멋지다. 거기에는 우주의 대질서, 인간의 조건이나 살아 있거나 죽어 있는 모든 것의 운명이 선, 점, 원, 붉은 색, 흰 색 그리고 파란 색으로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가 태극기를 제정한 것은 1882년이다. 그 이후부터 서양인들은 우리의 태극기에 대해 매우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그들의 나라에 소개하고 있다. 그 몇 가지를 살펴본다.

1883년 조선의 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하여 태극기를 게양했을 때 미국인들은 태극 문양에 매우 깊은 호기심을 보였으며, 9월 27일 뉴욕 타임즈 신문에서는 우리 태극문형을 '상형문자와 같은 상징'으로 '행복'을 의미한다고 소개하였다.


 

 


1886년 미국의 로우엘 저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표지에 인쇄된 태극문양

 

 1895년에 발행된 헤세 마르텍의 저서 [코리아]의 표지에서의 태극기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한국관 소개 책자에서의 태극기 : 태극기의 4괘는 태극을 중심으로 열십자(十)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


 

 

 1910년 파리에서 통용 엽서 - 서신을 양반에게 전달하는 엽서 (신분 사회의 한 단편을 보여준다.)

  

 

 리빅사 발행의 판촉용 카드에 새겨진 청홍 태극문양 (조선의 신식 군인과 함께) 청홍태극문양은 1900년의 쥬이 태극기의 태극양의를 많이 닮았다.

 


태극기 4괘의 배치와 색깔은?



 박영효가 처음 태극기를 제정하여 일본에 게양했을 당시는 4괘의 색깔에 대해 분명히 밝히지 않았으며, 1883년 태극기 제정, 공포시에도 '널리 시행토록 하라'는 말만 있었을 뿐 하늘, 땅, 물, 불을 상징하는 4괘에 대한 색깔과 구체적 작도 규정은 없었다.



 이후, 태극과 4괘의 색깔을 처음으로 분명히 밝힌 책은 유길준의 [상회규칙]인데, 태극음양을 청색(靑繪), 홍색(紅繪), 4방의 괘는 청색으로 한다고 기록하였다.



 

 

 1874년 청나라가 외국과 맺은 조약과 외국 사신의 서신 등을 기록해 놓은 청나라의 『통상장정(通尙章程)』에 나오는 태극기는 '대청속국, 고려국기'라 소개하면서 청국을 상징하는 노란색 바탕으로 우리나라를 속국으로 표시하고, 괘의 색깔은 청색으로 표시하였는데, 청색은 대한 제국의 색깔을 의미한다. (고려대대학원 도서관에 소장돼있는 1898년의 [통상약장유찬(通商約章類纂)]이란 문헌에도 이와 같은 모양

 

 

1900년 파리의 만국 박람회의한국관 소개 책자에 실린 태극기는 건곤리감 4괘가 태극을 중심으로 대각선 모서리 방향이 아니라 열십자(十) 방향으로 배치되었으며, 청홍양의의 태극은 상하가 아니라 좌우로 배치되어있는 매우 낯선 모습이다.

참조 : 1900년 파리의 만국 박람회의 한국관 소개 책자에 실린 태극기


1900년-1910년 : 태극기 수난사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해, 11월 18일에 대조선국(大朝鮮國) 정부는 태극기를 홍보하기 위해 최초의 우표를 발행하였는데, 여기서부터 태극기 최초의 수난이 시작된다.

 태극문양이 새겨진 우표를 인쇄하려 했지만 우리나라에는 인쇄시설이 없어 일본에 인쇄를 의뢰하였지만 애당초 우리의 요구와 관계없이 중국의 전통 태극 문양이 인쇄되어왔다. 이는 우리나라의 주권을 조금씩 약화시키려는 저의가 숨어 있는 최초의 태극 수난사였다.

 


<아래 사진설명> 우리가 주문한 우표는 왼쪽 모양이었으나, 일본에서 인쇄되어 온 최초의 우표와 주문과는 달리 중국전통의 태극 문양이 인쇄되어 왔다.

 

 

 이듬해 1885년 미국에서 인쇄한 우리나라 우표에는 우리 고유의 태극기 문양이 인쇄되어 있다.


 

 

1906년 발행된 엽서에는 일장기와 태극기를 나란히 놓는가 하며, 또한 일본왕자와 대한제국의 황제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상대적으로 우리의 황제를 왜소하게 인쇄함으로써 우리의 주권이 서서히 꺼져가는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1910년의 일제 강점기 바로 직전의 엽서에는 우리의 태극기가 일본군모 밑에 깔려있고, 열차시간표가 인쇄되어 있어 마치 주권이 다해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의 태극기는 주권선언을 위해 제작되었고, 주권상실과 함께 수난을 받았다. 태극기의 수난은 민족의 수난이오, 태극기의 영광은 민족의 영광이었다.태극기는 민족이요 주권이다.




1910년-1945년 : 태극기 투쟁사

나라를 빼앗긴 민족은 제 나라의 국기도 제대로 그릴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선열은 몰래 태극기를 그렸으며, 몰래 그려진 태극기를 중심으로 광복의 열정을 불태웠다. 민족은 태극기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다.




독립문의 태극기- 자주 독립 국가임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파리의 개선문을 본 딴 독립문에는 태극기가 좌우 양편에 돌에 새겨져 있다. 이 태극기의 모양은 독립 신문의 태극기와 같다. 지금의 태극기와 비교해 보면 상하가 뒤집어 져 있는 모양이며, 음양 태극양의의 소용돌이가 매우 역동적인 것을 알 수 있다.

 

 

 

 

항일 독립 운동 태극기 :1900년경 만들어진 국기로서 일제시대 일본에 빼앗겼다가 1962년 한일문화 협정체결후 1967년 4월 국내에 반입된 태극기


 

 

1900년대의 태극기 :고종황제 시절 광무9년 정삼품 통정대부 벼슬을 지냈던 종로구 홍지동에 사는 박영민씨의 조부 박기준씨께서 사용하던 국기 제작연대 : 1900-1905년, 실물크기 : 정사각형 80cm

1907년 [불원복(不遠復) 태극기] :전남 구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 고광순이 일본군과 싸울 때 사용한 태극기이다(1906). 그는 굳은 신념으로 "멀지 않아 국권을 회복한다" 는 글자를 이 태극기에 써 넣었다.


 

'태극기' 최초의 호칭 : 1919년 3월 1일 정오에 맞춰 서울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문 낭독과 함께 전국적으로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을 펼치기로 하였다. 이 날 참여한 모든 국민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손에 '기'를 들고 나오기로 하고, '기'를 제작하였는데, 그때만해도 '조선국기'로 부르던 국기 이름을 일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태극기'로 부르자고 약속하면서부터 국기의 이름이 '태극기'로 정착되었다.


 1919년 삼일 운동 때 경북 영덕에서 사용된 김세영의 태극기


 

 1919년 삼일운동 때의 남상락 태극기

 

 

1919년 평양 숭실 학교 태극기 :삼일운동 이틀 전에 평양의 숭실학교 조만식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반드시 너의 손으로 태극기를 올려야 한다." 이 말씀에 따라 학생 김건이 동료들과 함께 제작하여 1919년 3월 1일 평양 숭실학교 교정에 이 태극기를 높이 내걸었다. 이 태극기는 이후 숭실학교의 마포삼열(모페트)학장 선생님이 몰래 1년 동안 보관하여 오다가 이후, 미국의 아들에게 보내어져 보관되다가 1974년 숭실대학교로 기증되었다.


 

 

1919 태극기를 인쇄하기 위한 목판각과-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어내기 위하여 만든 목각판. 이렇게 인쇄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구 선생님의 성함이 새겨진 태극기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1941년 3월 16일 안창호의 부인인 이혜련 여사 에게 보낸 친필서명 태극기. "망국의 서러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인력.물력을 광복군에게 바쳐 강노 말세인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광복을 완성하자" 는 말을 어디에서나 한국인을 만나는 데로 전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광복군 이름이 새겨진 태극기 : 1945년 중국 방부에 있던 광복군이 광복에 대한 소감과 이름을 기록한 태극기. - 4괘의 배치는 이괘와 감괘의 위치가 지금과 바뀌어 있고, 태극 음양의 머리꼬리의 소용돌이도 바뀌어 있다.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 직원 일동 사진의 태극기 :1940년 12월 26일 서안(西安)에서 찍은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 직원 일동 사진. 대일 공작 추진을 위해 한 덜 전인 11월 29일 [광복군 총사령부]는 전방 전선인 서안으로 옮겨 왔다. 총사령관 대리는 황학수 장군이었다. 이청천 총사령과 이범석 참모장은 중경에 남아 중국 군사위와 군사협의를 진행했다.

 

1943년 삼일절 경축 전시공채에서의 태극기 :1943년 호눌룰루 [한·미 전시공채위원회]는 삼일절 경축 전시공채 발매를 개시하고 '동경폭격을 위한 비행기 구입을 도웁시다."는 선전지를 살포했다. (이때의 태극기는 건곤리감 4괘배치는 현재와 같으나, 음양태극은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상해 임시 정부 요인상과 독립 선언서에 새겨진 태극기


 

 김구 선생님, 안중근의사와 태극기


 

 

 이봉창 열사, 윤봉길 의사와 태극기


 

 1945년 이후 : 해방 후의 태극기 역사


1945년 일제는 망하고 우리는 드디어 해방을 맞이했다. "만세, 만세"


 

 

 

김구선생님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돌아 오시고, 국민들은 밥 공기를 엎어서 그토록 그립든 태극기를 그렸다.

 

  

8·15 광복으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유골도 조국에 돌아와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46년 1월 11일 미 군정청은 태극기 정식 게양하고.......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미소신탁통치의 역사적 틈새를 비집고 조국은 점점 남북으로 금이 가고 있었다.그러나 태극기는 남북한 관계없이 게양되었다. 북한의 김일성도 태극기 앞에서 연설을 하였으나,

48년 7월 24일 결국 북한은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를 게양하였다. 국기가 둘로 갈라지면서 조국 또한 둘로 갈라졌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정부에서는 이때까지 조금씩 다른 도안으로 사용되어 돈 태극기 문양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당시 문교부에 사학자. 미술가. 언론인 등 사계 권위자 42명으로 "대한민국 국기 시정위원회(大韓民國國旗是正委員會)"를 구성. 설치한 후 전문적인 검토를 거침과 아울러 국민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수차의 회의를 거듭하여 오늘날과 같은 태극기를 국기로 채택하기로 하고,1949년 10월 15일 이를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그 후1984년 2월 21일 국기의 제작· 게양방법 등 기본적인 사항을 정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 11361호)를 제정· 공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라의 상징이며 민족의 얼이 깃들어 있는 태극기를 자랑스럽게 게양하고 예절을 지키는 일은 나라 사랑의 작은 실천이며 조국에 대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손쉽게 표현하는 길이라

하겠다.



<국기 관련 규정 연혁>



 1883. 1월(음) : 고종 20년 태극과 4괘가 그려진 기를 국기로 사용토록

                         왕명으로 공포

 1949.10월 : [국기 제작법] 공포 (문교부 고시 제2호)

 1950. 1월 : [국기 게양방법] 공포 (국무원 고시 제8호)

 1966. 4월 : [국기 게양 방법에 관한 건] 공포 (대통령 고시 제2호)

 1984. 2월 : [대한민국국기에 관한 규정] 제정 (대통령령 제11361호)

 1987. 4월 : [대한민국국기에 관한 규정] 제정 (대통령령 제12148호)

 ※ 국기 강하시각 등 개정

 1989. 3월 : [대한민국국기에 관한 규정] 제정 (대통령령 제12642호)

 ※ 국기의 실내게양 방법 등 개정

 1996. 3월 : [대한민국국기에 관한 규정] 제정 (대통령령 제14943호)

 ※ 국기에 대한 경례시 애국가를 주악할 경우 맹세문 낭송 생략

 1996.12월 : [대한민국국기에 관한 규정] 제정 (대통령령 제15182호)

 ※ 국기의 연중, 24시간 게양 및 국기 문양의 생활용품 활용제도 도입



6·25 전쟁 속의 태극기 :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의 최대 비극인 동족 상잔의 전쟁을 도발하였다. 피난 속에서도 미래 조국의 주인공들에 대한 교육은 계속되었는데.... 천막을 치고 태극기를 걸고 수업을 하는 당시소래초등학교의 모습. 

 

 

학도병이 사용한 태극기(1950년) : 한국동란(6.25) 당시 제3차 학도병 지원시(1950. 9) 학도병들이 조국을 구하기 위한 전쟁에 나서기 직전 구국의 결의를 기록한 태극기.


 

 

서울수복 태극기(1950년) : 그 해 9월 27일 다시 서울을 되찾게 되고 중앙청 앞에는 태극기가 게양된다. 해병 2대대 6중대 1소대 소위 박정모(왼쪽)와 수병 최국방(오른쪽)

 

 

조국 근대화의 태극기 : 그리고 동족 상잔의 민족 좌절은 한 때의 역경, 다시 민족은 일어 선다. 1970년의 경제 개발은 우리 겨레의 삶을 정적인 삶에서부터 동적인 삶으로, 농업 중심에서 공업 중심으로 바꾸어 놓았다. 1972년 시흥군(지금의 시흥시) 월곳·장곡동에 대형 꽃다발과 태극기를 앞에 꽂고 안양에서 버스가 처음 들어 오던 날. 흙 먼지 속에서도 아랑곳 않고 버스와 함께 달리는 아이들 모습이 힘찬 조국의 미래를 기약하는 듯 하다. "와! 우리 마을에도 버스가 다닌다. 버스가..." 하면서

 

 

 민족은 태극기를 중심으로 세계의 기적을 창출하였다. 한강의 기적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한민족의 역량을 세계 만방에 과시하였다. 지금은 잠시 역경에 처해 있지만, 21세기는 분명코 한민족, 태극민족의 세기가 되리라.

- 1988년 서울 올림픽 10주년 기념 엠블림에 사용된 태극 문양과 2002년 월드컵 FIFA 공식 엠블림

 

 

 

"태극기는 겨레의 힘과 단결, 자존심과 긍지, 좌절과 희망으로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그는 꺼지지 않은 순환과 영원이며, 민족의 구심점이었다. 이젠 우리 모두 통일 한국의 위업과 선진 문화 강대국 건설을 위해 태극깃발 아래에서 하나가 되자! "


 

깃면
- 국기의 깃면은 그 바탕을 흰색으로 하고 태극과 4괘로 구성한다.
- 깃면의 길이(가로)와 너비(세로)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3 : 2의 비율로 한다.

 

 

 

 

① 3(가로)
② 2(세로)
③ 지름(세로x1/2)
④ 지름x1/2
⑤ 지름x1/4
⑥ 지름x1/2
⑦ 지름x1/3
⑧ 지름x1/12
⑨ 지름x1/24
⑩ 직각(90도)
[가로:세로=3:2]

태극의 작도
- 각태극의 원은 깃면의 두 대각선이 서로 만나는 점을 중심점으로 하는 원을 그리며,지름은 깃면 너비(세로)의 2분의 1로 한다.
- 태극의 빨강과 파랑을 구분하는 곡선은 영문 S자형(두 반원의 한쪽 끝을 이은 곡선)을 왼쪽으로 50°정도 기울인 선으로, 깃면의 왼쪽 윗모서리에서 오른쪽 아래 모서리로 대각선을 그었을때 태극의 원 안에 나타나는 직선(태극 원지름)을 2등분하여, 그중 왼쪽 직선을 지름으로 한 아래쪽 반원을 그리고, 오른쪽 직선을 지름으로 한 윗쪽 반원을 그린다.
태극기의 표준색도
색 표시방법 태극기 빨강 태극기 파랑
CIE 색좌표 x = 0.5640
y = 0.3194
Y = 15.3
x = 0.1556
y = 0.1354
Y = 6.5
Munsell 색표기 6.0R 4.5/14 5.0PB 3.0/12
- Pentone 가이드 (1996-1997, 제9판)에서 태극기의 빨강은 186C를 태극기의 파랑은 294C를 가장 가까운 색으로 추천함
- 위 표준색도는 백색아트지(120g)에 별색 잉크로 구현하여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표준광원C로 측색한 수치를 기준으로 함.
괘의 작도
- 4괘는 건(乾:)·곤(坤:)·감(坎:)·이(離:)로 하되 깃면의 왼쪽 윗부분에 건을, 오른쪽 아랫부분에 곤을, 오른쪽 윗부분에 감을, 왼쪽 아랫부분에 리를 각각 배열한다.
- 괘와 태극과의 간격은 태극 원지름의 4분의 1이다. 4괘는 깃면의 두 대각선과 태극의 원이 만나는 4점에서부터 대각선을 따라 바깥쪽으로 태극 원지름의 4분의 1을 각각 띄워 그린다.
- 괘의 가로길이는 태극 원지름의 2분의 1, 괘의 세로길이는 태극 원지름의 3분의 1로 한다.
- 괘의 가로길이의 중심은 깃면의 대각선상에 두되, 괘의 가로가 깃면의 대각선과 직각을 이루도록 한다.
- 괘의 구성부분은 3개의 효(爻)로 하되, 각 효의 세로길이는 괘의 세로길이의 4분의 1로 하고, 효와 효 사이는 괘의 세로길이의 8분의 1로 하며, 2등분으로 끊어진 효의 끊긴 간격은 효와 효 사이의 간격과 같다.
- 괘는 검정색으로 한다.
국기의 흑백표시
- 국기는 원칙적으로 규정 이외의 색으로 제작·사용하여서는 아니된다.
- 특히, 외국인의 열람을 위한 인쇄물 등에 국기를 표시할 때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흑백으로 표시하여서는 아니된다.
- 다만, 부득이한 사유로 인쇄물 등에 국기의 깃면을 흑백으로만 인쇄하여야 하는 경우에는 깃면의 바탕과 태극의 윗부분은 인쇄물 등의 바탕색으로, 태극의 아랫부분과 4괘는 검정으로 나타 내야 한다.
국기의 호수별 표준규격
- 국기의 호수별 표준규격은 아래와 같다. 다만, 건물규모나 게양대의 높이 등 필요에 따라 국기 깃면의 길이(가로)와 너비(세로)의 비율을 3 : 2로 하여 그 크기를 달리할 수 있다.
호수 깃면의 표준규격
(길이 × 너비)
비 고
특호 540cm 이상 × 360cm 이상 용도별 권장규격

· 건물게양대용 : 특호, 1호∼7호
· 가 정 용 : 7호 또는 8호
· 차 량 용 : 9호 또는 10호
1호 450cm × 300cm
2호 306cm × 204cm
3호 270cm × 180cm
4호 225cm × 150cm
5호 180cm × 120cm
6호 153cm × 102cm
7호 135cm × 90cm
8호 90cm × 60cm
9호 45cm × 30cm
10호 27cm × 18cm
금실의 부착
깃면의 둘레에 금실을 부착할 수 있는 경우는 다음의 경우에 한한다. 이때의 금실의 폭은 깃면 너비(세로)의 1/7∼1/8로 하고 깃대에 접하는 부분에는 달지 아니한다.
-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의 승용차에 다는 경우
- 의전용으로 쓰이는 경우
- 실내에서 게양하는 경우
- 각종 국제회의시에 탁상용으로 쓰이는 경우
- 국기를 게양하여야 하는 날을 아래와 같이 정하고 있으나 다른 날에도 국기를 게양할 수 있다.
국기를 전국적으로 게양하는 날
경축일 기념일
- 4대 국경일(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 1월 1일·국군의 날·한글날
조의를 표하는 날(조기게양)
- 현충일, 국장기간, 국민장일
기 타
- 정부가 따로 지정하는 날
- 지방자치단체가 조례 또는 지방의회의 의결로 정하는 경사스러운 날 (당해 지방자치단체에 한함)
국기를 연중 게양하는 곳
-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기타 공공단체의 청사, 각급 학교에는 연중 국기를 게양하여야 한다.
- 다음의 장소에는 가급적 연중 국기를 게양하여야 한다.
* 공항·호텔 등 국제적인 교류장소, 대형건물·공원 등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곳
* 주요 정부청사의 울타리, 기타 많은 게양대가 함께 설치된 곳
국기의 게양시간
- 국기는 24시간 게양할 수 있으며, 야간에 그 게양효과를 높이기 위해 가급적 조명시설을 하여야 한다.
- 다만, 학교 및 군부대의 주된 게양대는 교육적인 목적을 고려, 낮에만 게양한다.
국기를 낮에만 게양할 경우 게양·강하시각
기간 게양시각 강하시각
3월 ~ 10월 07:00 18:00
11월 ~ 다음해 2월 07:00 17:00
- 국기는 심한 비·바람(악천후) 등으로 국기가 훼손되어 그 존엄성이 유지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 게양치 아니한다.
- 재외공관의 국기게양 및 강하시각은 주재국의 관례에 따른다.
국기 게양·강하식
대상기관
- 각급학교및 군부대
식의 거행방법
- 식은 애국가 주악에 맞추어 행하되, 자체방송(녹음) 시설을 이용할 수 있으며 주악 시간과 게양·강하 시간이 일치되도록 하여야 한다.
- 애국가 주악은 건물안과 경내에서 들을 수 있도록 한다.
- 일기변화로 정해진 시간 외에 게양·강하할 때에는 식을 생략한다.
- 게양식의 경우에는 애국가의 주악을 생략할 수 있다.
식중 경의 표시방법

건물 밖에 있는 사람
- 게양·강하되는 국기가 보이는 곳에 있는 사람은 국기를 향하여 경례를 한다.
- 주악만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 방향을 향하여 선 채로 차렷자세를 하여 경의를 표한다.

건물 안에 있는 사람
- 국기가 있는 경우 그 국기를 향하여 선 채로 차렷자세를 한다.
- 국기가 없는 경우 주악방향을 향하여 선 채로 차렷자세를 한다.

울타리 안에 있는 차량탑승자
- 차량을 정지하고 앉은 채로 차렷자세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