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암행어사 보고서 친필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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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5.

추사의 암행어사 보고서 친필본 발견

 

기사입력 2011-11-10 06:00

 추사 암행어사 보고서

 

김규선 선문대 교수 발굴 공개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조선 후기 금석학과 서예를 대표하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조정에 제출한 보고서 친필본이 발굴됐다.

 

추사학 연구자인 김규선 선문대 교양대학 교수는 최근 발간된 학술지 '한민족문화연구' 제38집에 기고한 '새로 발굴된 추사 김정희 암행보고서'라는 논문에서 고서점을 통해 입수한 이 보고서를 해제하는 한편, 그 전문을 영인해 소개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이 자료는 김정희가 41세 때인 1826년(순조 26) 2월20일 충청우도 암행어사에 임명된 직후 110여 일 동안 충청우도와 경기도 일부를 암행하며 해당 고을 수령의 공과를 적어 같은 해 6월25일 조정에 올린 친필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전 2책으로, 제1책은 16장(28쪽), 제2책은 11장(22면)이며 1쪽당 9행, 1행당 24자 분량으로 내용을 수록했다.

 

이 보고서는 조선왕조 공식 기록 중 하나인 '일성록'에는 내용 전반이 수록돼 있긴 하지만 일부 표현에 차이가 보이는가 하면 기술 순서도 약간 다르고, 특히 보고서 서문 격인 서계(書啓)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김 교수는 덧붙였다.

 

서계에서 김정희는 "읍내와 저자의 중요한 곳과 산골짜기와 도서지방 외진 곳까지 두루 찾아 특별히 내용을 수사하고 감찰한 결과 관리들의 선정 여부와 백성의 고락 등을 직접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하되, 반드시 충분히 정확함을 기하고 나서야…삼가 보고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추사 암행어사 보고서

 

문서 분석 결과 김정희가 암행 결과를 정리해 보고한 관리는 감사 1명, 목사 1명, 군수 9명, 판관 3명, 현령 1명, 현감 24명, 병사 1명, 수사 3명, 중군 2명, 영장 2명, 첨사 5명, 병우후 1명, 수우후 1명, 만호 1명, 찰방 4명 등 도합 59명으로 드러났다.

 

김 교수는 "보고서를 보면 선정을 펼친 관리에 대해서는 비교적 단순하고 명쾌한 짧은 문장을 구사한 반면, 문제가 많은 관리는 긴 문장으로 실례를 들어 구체적인 문제들을 적시했으니 암행어사로서 엄격한 감찰을 시행했음을 짐작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보고서는 두 가지 점에서 의의가 있다"면서 "하나는 추사가 암행어사로 임명된 시점을 그간 1826년 6월25일로 봤지만 이는 암행어사 활동 보고서를 제출한 시점으로, 정확히는 2월20일임을 알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조정에 올리는 공식보고서에 나타난 추사체의 새로운 면모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조정 제출용 보고서인 까닭에 추사는 이에서 정자체인 해서체를 썼다.

 

또 다른 추사학 연구자 김영복 문우서림 대표는 "추사의 작품 중 해서체는 희귀하다는 점에서 우선 이 자료를 의미가 자못 크다"면서 "더불어 지금까지는 간접적으로 알던 추사의 암행어사 활동 보고서를 생생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번 자료 발굴은 추사의 구체적인 활동을 알려주는 데 긴요하다"고 평가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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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암행어사 보고서 발굴, 서체개발 가능

 

기사입력 2011-11-10 16:32  

 

【서울=뉴시스】백영미 기자 = 조선을 대표하는 서예가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가 암행어사로 활동하며 조정에 올린 보고서 형식의 친필본이 발굴됐다.

 

추사학 연구자인 선문대 김규선(48) 교양대학 교수는 학술지 '한민족문화연구' 제38집에 논문 '새로 발굴된 추사 김정희 암행보고서'를 기고했다. 김정희가 1826년(순조 26) 2월20일 충청 우도 암행어사에 임명된 뒤 100여일 간 충청도와 경기도 일부를 암행 감찰한 결과물이다.

 

김정희는 같은 해 6월25일 조정에 친필 보고서를 올렸다. 감사 1명, 군수 9명, 판관 3명 등 관리 59명의 과실을 정리해 보고했다. 보고서는 2책이며 제1책은 16장, 제2책은 11장이다. 쪽당 9행, 행당 24자 분량이다.

 

 

김 교수는 10일 "그동안 김정희가 암행어사로 임명된 시점이 6월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는 암행 결과 보고서를 올린 시점이고, 임용 시점은 2월20일임을 알 수 있다"고 전했다. 또 "조정 제출용 보고서여서 흘림체로 쓸 수 없어 해서체로 썼다"며 "김정희가 공식문서에 쓴 글씨체가 어떠한 모습이었고 구체적으로 몇 년도에 썼는지 확인할 수 있다"고 알렸다.

 

김 교수는 "해서체는 규칙성이 있어서 다른 글자와 조합해도 큰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아 콘텐츠로 개발하기에 용이하다"면서 "간판에 추사의 글씨를 활용하고 서체로 개발하는 등 좋은 기초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positive100@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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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암행어사

 

암행어사는 보통 당하관(堂下官)으로 젊은 시종신(侍從臣:대간·언관·청요직 등을 말함) 중에서 뽑았는데, 왕이 직접 임명하거나 의정부에서 왕의 명령을 받고 후보자를 선정하여 천거하면 왕이 그중에서 선정하여 임명했다.

 

 

도랑형 기구들 되,밀대, 자, 저울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왕이 승정원을 통해 어사임명자를 불러서 직접 임무와 목적지를 알려주고 봉서 封書, 사목 事目, 마패 馬牌와 유척 鍮 尺을 직접 수여해 임명했으며, 더러는 하급관리에게 이 네 가지를 지참케 하여 비밀리에 사저로 보내 전달하면서 암행어사로 임명한 경우도 있었다.

 

봉서에 임명 사실과 주요 임무를 “동대문을 벗어나서 뜯어볼 것”, 또는“파견된 지방에 도착해 뜯어볼 것”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래서 어사는 남대문이나 동대문 밖에 나가서 또는 임지에 도달해 개봉해야 하였으며, 이를 받은후 자기 집에도 들르지 못하고 즉시 출발하는 것이 상례였다

 

사목은 임무 수행 방법을 규정임금이 암행어사에게 내린 봉서에 암행어사로서의 임명사실과 염찰지역 및 임무 등이 포괄적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암행어사로서 해야 할 임무와 그 임무수행에 있어 유의할 사항은 사목에 자세히 기재했다.

 

암행어사는 주로 지방수령(후에는 방백을 포함) 들이 행한 각종 업무처리와 그들의 공적·사적 생활 전반을 염찰대상으로 하였고, 선정을 베푼 사실과 불법이나 비리가 있는지 등을 주로 조사했다.

 

마패는 말 징발권을 표시 임금이 암행어사에게 내린 마패를 역에 보이면 마패에 그려진 말의 수만큼 말을 이용할 수 있었다.

병부 주머니와 마패

 

말이 한 마리 그려져 있으면 1마패, 두 마리 그려져 있으면 2마패, 세 마리 그려져 있으면 3마패라고 한다. 당시는 말을 타는 것이 가장 신속한 교통수단이었으며, 전국으로 통하는 큰길의 길목마다 역 驛이라는 관청을 두고 역마를 기르고 있었다.

 

마패는 동제 銅製로서 한 면에는 품수에 맞게 말(1필에서 10필까지)을 그리고, 다른 면에는 자호 字號, 연월과 상서원인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다른 사신들의 경우에는 마패보다 증명이 더 중요시되었으나 암행어사의 경우는 신분노출을 금했으므로 봉서는 보여주지 않고 마패만 보여주는 경향이 있었다.

 

영조는 3마패를, 고종은 주로 2마패를 주었다. 『 대전회통』에는 암행어사에게 상등마 1필, 중등마 1필과 태마 1필을 주도록 규정되어있다.

 

암행어사는 당하관인데도 당상관 이상의 고관만이 타는 상등마를 탈 수 있도록 한 것은 암행어사의 체면을 높여주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박만정을 비롯한 세 사람은 패초를 받은 후 상피단자를 써서 제출했다. 상피단자라 함은 어느 고을에 연고가 있거나 친척이 있음을 기록·보고함으로써 상피하려는 것이다.

 

그리고는 왕으로부터 직접 봉서를 받았는데, 이때 마패 ·유척과 구급약도 함께 받았다.

 

박만정이 받은 마패는 3마패 1개와 1마패 1개였는데 3마패는 자기가 소지하고 1마패는 보조자에게 주어 보관케 하였다.”

 

유척은 표준이 되는 자유척은 오늘날 6치 5푼( 약 19.7cm)에 해당하는 순구리제로 조선시대도량형 척도의 표준이었다. 암행어사는 이 유척으로 시중의 도량형뿐만 아니라 형구의 크기도 규격에 맞는지 검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