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김씨

(萬年承 萬孫興)

어릴적 내고향 많이 변했네요. 황간면 금계리 -- 3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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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건강,사랑방/가볼만한 곳(등산)

2012. 1. 24.

우리고향 황간면과 금계리 고백당을 2009년에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은 고향의 효자문인 정려문과 금계리 일반현황 입니다.

 

어릴적 보았던 모습들을 간직하기 위하여 옛 추억을 더듬어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합니다.

 

이글은 고향의 선후배님들이 고향생각에 지명이나 유적을 인터넷으로 검색하시다 보면 접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디지털카메라가 아닌 폰카로 찍은 사진이라 선명도는 낮지만 그래도

봐 줄만은 한데 기록으로 남기기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습니다.

스마트폰이 공급되고 나서 디카녀석은 휴식 중입니다.ㅎㅎ

 

1탄

내고향 황간 향교, 가학루, 월류봉, 회도석, 반야사, 백화산, 궐리사

http://blog.daum.net/yescheers/8597671

 

2탄

경주이씨 익재공후 청호공파 세거지 고백당, 족보

http://blog.daum.net/yescheers/8597669

 

이번에는 내가 자란 고향마을 "금계리" 를 포스팅 해 봅니다. 3탄

 

금계리 마을 현황

이장 : 배은희

지도자 : 윤주식

부녀회장 : 배은희

 

연혁

본래 황간현 서면 지역으로 긴 내가 있어 진개, 금계라 하였다.

1909년 황간군 서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계리(金溪里)와 죽전리(竹田里)와 수석리(水石里)를 병합하여 금계리라 칭하고 영동군 황간면에 편입되었다.

 

 

죽전 마을 전경 

 

 

죽전 경로 마을회관

 

 

 

 

 

자연마을

- 금계 (원금계, 김계)

- 죽전 (대맡말)

- 수석 (수시기)

 

현황

- 가구수 : 84세대

- 인구수 : 173명

 

마을비

 

 

 

 

 

 

 

죽전 마을은 황간현 서면에서 1909년 황간군 서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죽전리, 금계리, 수석리를 병합하여 금계리라 칭하고 영동군 황간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동으로 태백산맥 줄기의 백화산이,

 

남으로 배형으로 누어 최고봉인 한성봉과 주행봉을 중심으로 동남으로 뻗어 느추리 들을 이루고,

 

북으로 경북 지름산의 맥이 흘러 마을을 이루어 기름진 들판이 업고 있다.

 

남서로 금강 상류 송천(초강천)이 북에서 흘러온 금계천과 합류하면서 화평들이 펼쳐지고 있으며 꽃들이라고도 부른다. 서북간 곳곳에 대나무 밭이 있어 죽전(竹田)이라 칭하였다.

 

470년전 경주이씨가 터를 잡고 살던 중 익제 문충공 제천 7세손인 이우인공께서 금계리 11-2번지에 후학 양성을 위해 머물던 고백당이 향토문화제로 보호 받고 있고,

 

우인의 13세 손인 종면은 항일독립투사로서 1916년 국권회복으로 투쟁하다 충혼이 되어 국립묘지 장군묘역에 잠들고 있고,

 

죽전마을 위쪽에 부여서씨 병두의 효자문이 있으며, 고종 43년 경주인 우인의 후손 종음의 아내 상산김씨가 효열부상을 받아 이 시대의 귀감이 되어 그 맥이 이어진다.

 

선대의 애향 애국심을 이어 받아 앞들의 기름진 옥토에 고소득 작목반을 운영하여 아름다운 환경을 이루고 잘사는 마을로 영원히 빛나는 마을의 전통을 후대에 물려주기 위하여 마을 주민 모두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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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리(金溪里)는 본래 황간현 서면 지역으로 그 지형이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의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 하여 금계(金鷄), 또는 마을 앞에 긴 내가 있어 ‘진개’라 하였다.


1909년에 황간군 서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금계리(金溪里), 죽전리(竹田里), 수석리(水石里)를 병합하여 금계리라 칭하고 영동군 황간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 금계(원금계)와 죽전(대밭말), 수석(수시기) 등이 있다. 금계 남쪽에 위치한 죽전마을은 대나무 밭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계에는 경주 이씨(慶州 李氏) 이우인(李友仁) 공이 즐겨 머물던 고백당(孤栢堂)이 있으며,  (본문상단 참조)

 

감모재(感慕齋)는 조선말기 흥선대원군의 6촌인 이용직이 한양에서 낙향하여 거처하던 곳으로 현재 집터에는 솟을대문과 집은 없어지고  안채와 사랑채를 다시 지어 박씨가 살고 있으며  재실은 영산 김씨 문중에서 소유하다가 다른 분에게 소유권이 넘어갔으며 재실은 없어지고 빈 터만 남아있다.


또한 대밭말 즉 죽전마을의 동쪽 약 1km 지점의 백화산(白華山) 서쪽 기슭에 옛 절터의 흔적으로 석축이 남아 있고, 유물로는 석탑의 옥개석이 있다.  죽전마을 위쪽에는 서병두(徐秉斗) 효자문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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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 서병두 효자문

구 분 : 향토유적

지정번호 : 제60호

지 정 일 : 1997년7월4일

관 리 자 : 서용선

소 재 지 : 영동군 황간면 금계리 죽전마을

 

 

 

영동군 향토유적 제 60 호 서병두의 호는 농은, 본관(本貫)은 부여인(扶餘人)이며 19세기 중엽의 인물이다.

 

그는 대원군의 자손(子孫)으로 효행이 지극했다 하는데 자세한 효행 행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가 죽은 후 고종 35년(1898)에 효행을 기려 정려문을 세웠고, 동몽교관(童蒙校官)에 증직(贈職) 되었다. 정려문은 정면 1칸, 측면 1칸, 맞배 기와집이다.

 

※ 정 려 문 : 충신, 효자, 열려 등을 위하여 세운 문

※ 동몽교관 : 조선 초 어린이 교육을 위해 각 군현(郡縣)에 두었던

            관직, 현재의 초등학교 교사

※ 증 직 :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죽은 뒤에 품계, 관직을

            높여 주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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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두 효자문 설명중 대원군의 자손이란 백제시대 왕의 생부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부여서씨는 의자왕의 아들 서융(徐隆, 부여융이라고도 함)을 시조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참고로 대원군이란 조선시대에 사용된 봉작입니다.)

 

아니면 대원군이 아닌 "00군" 봉작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부여서씨의 기록중 대원군과 관련된 기록으로는 외계(外系)인 조선왕족 

영안군 이수(靈安君 李洙, 1605년 ~ 1666년)이며 이분은 조선중기의 왕족으로 덕흥대원군의 증손이며 부인은 부여인(扶餘人) 서극공(徐克恭)의 딸로 현부인 부여서씨(縣夫人 扶餘徐氏)이다.

* 조선시대 대원군 자손 기록이 잘못이라면 윗부분 서극공의 후손이란 표현이

   잘못 전해 졌을 수도 있지만 서씨문중의 일인지라 더이상 추측글을 쓰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 하여 생략합니다. 

   혹여 이글이 잘못된 내용이라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바로 잡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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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大院君)이란?

조선시대에 왕위를 계승할 적자손(嫡子孫)이나 형제가 없어 종친 중에서 왕위를 이어받을 때 신왕의 생부(生父)를 호칭하던 말입니다.

 

보통 대원군이라고 하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지칭하는데, 조선의 대원군제도는 선조(宣祖)의 아버지 덕흥군(德興君)을 덕흥대원군으로 추존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철종의 아버지 전계(全溪)대원군 등이 있다.

 

조선시대 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德興君)을 덕흥대원군으로 추존(追尊)한 데서 비롯되어, 4인이 대원군에 봉(封)하여졌다.

 

즉, 1623년(광해군 15) 광해군을 폐출(廢黜)하고 선조의 5남으로 인빈김씨(仁嬪金氏) 소생 정원군 부(定遠君琈)의 아들 능양군 종(綾陽君倧)을 왕으로 옹립하여 인조가 되자, 정원군을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으로 추존하였고, 그 뒤 1632년(인조 10) 다시 원종(元宗)으로 추존하였다.

 

또, 1849년(헌종 15)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순원왕후(純元王后 : 純祖妃 金氏)의 명에 따라 전계군(全溪君 : 莊獻世子의 손자 恩彦君의 아들)의 아들 덕완군 승(德完君昇)이 왕위에 올라 철종이 됨에 전계군을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으로 추존하였다.

 

1863년(철종 14)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조씨(大王大妃趙氏 : 翼宗妃, 憲宗의 生母)의 명에 따라 흥선군 하응(興宣君昰應)의 2남 형(0x9836)가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자, 하응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봉하여졌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대원군에 봉해진 사람은 모두 4인이지만, 흥선대원군을 제외한 3인은 그들이 죽은 뒤 추존되었고, 오직 흥선대원군만 생전에 대원군으로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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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 이전(약 40년전) 정문 둘레에 흙벽돌담이 있었고 이후 블럭담 모습사진인데 재 보수된 정려문은 흙벽돌 담장은 안보이네요.

 

이곳 정문에는 벌침을 못쏘는 벌 즉 머리부분에 흰점이 있는 벌인데 사람을 쏘지 못하는 벌이 많아서 친구들과 잡아서 갖고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정문 뒷편 동산은 대나무 뿌리로 활을 만들어 활쏘기 하던 장소이고

단오날에 큰 소나무에 그네를 달아 그네타기를 하던 놀이동산이기도

한 곳이었습니다.

 

* 벌은 꽁무니에 침이 1개 있어 사람을 공격하여 쏘는데 머리에 흰점  이 2개있는 벌은 꽁무니에 뭉턱한 벌침 2개를 갖고는 있는데 사람  을 쏘지 못 하는 벌입니다.

 

 

 현재의 모습 (2012.1.22)

 

 

 

 

 

 

 

 

 

부여서씨는 의자왕의 아들 서융(徐隆, 부여융이라고도 함)을 시조로 하고 있다.

 

서융은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패한 뒤에 마지막으로 멸망되어 의자왕과 태자 등 2,000여명은 당나라에 압송되었다.

 

당나라 고종은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아들 서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부여서씨의 문호는 열렸으나, 그 후 세계는 알 수 없었는데 서융의 원손으로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일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부여서씨는 4,486가구 총 14,312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도 금계리 죽전마을에는 부여서씨 후손들이 살고 있습니다.

 

큰 대문집이라 하여 솟을대문과 중문이 있던 서씨양반집도 오래전에

솟을대문과 중문이 철거되고 지금은 양옥집과 넓은 앞마당으로 변했습니다. 제기억으로 약 40년전 일입니다. 

 

솟을대문옆에 창고용도 같은 것이 대문 양옆으로 몇칸정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어릴적에 술레잡기 놀이를 많이 했습니다. ㅎㅎ

어릴적에 본 비슷한 이미지를 넷상에서 찾아 보았는데 예전 양반집

솟을대문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허난설헌 생가터(문화재자료 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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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모재(感慕齋)

 

감모재(感慕齋)는 조선조말 이용직 대감이 한양에서 낙향하여 살던 곳으로 이후 영산김씨(山金氏) 문중에서 매입하여 감모재라고 하였다.

 

제 기억으로 지금부터 약 30년 전까지는 솟을 대문과 재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 볼수 없네요. 

 

지금까지 보존되었더라면 국가 지원을 받아 영구보존이 가능할텐데 정말 아쉽습니다.

 

시골에 갈때마다 사진이라도 찍어 두어야지 하면서 미루었다가 오늘에 가보니 옛모습은 간 곳이 없습니다.ㅠㅠ

 

현재 거주하고 계시는 할머니의 말씀을 들어보니 솟을대문과 중문은

너무 오래되고 낡아서 오래전에 철거하였다고 합니다. 

 

재실은 빈터만 남아있어 여쭈어 보지 않았는데 영산김씨 문중에서 보유 하다가 개인에게 소유권을 넘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영산김씨(永山金氏) 제실 감모재(感慕齋)   ○ 우찬성 김종경 재실, 황간면 금계리 수석마을 소재

    ※ 고종황제의 6촌 이용강의 집을 구입하여 집에 딸린 재실(齋室)을

        사용했으나 지금은 폐사로 있어 10월 2일 풍계사에서 시제

        ***  훈과 수온-풍계사 10월 2일(음)합

 ○ 김종경 묘비 및 관비 - 황간면 용암리 가리재   ※ 풍계사(楓溪祠) - 승유재 감모재 폐사로 10월2일(음)

        영산김씨 길원, 종경, 훈, 수온 네 선조님을 합동 시제로 모신다.

        영동군 용산면 용산리에 있다.

 



김종경(金宗敬)에 대하여
 
생졸년 미상. 본관은 영산(永山), 호는 풍천당(楓川黨).
조부는 김영이(金令貽)이고, 부친은 김길원(金吉元)이다.
 
조부 김영이는 영산김씨의 시조로서 신라 신문왕(神文王)의 넷째 아들 김익광(金益光)의 후예이다. 부친 김길원(金吉元)이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을 토벌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후 후손들은 영산(永山: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永同))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관직은 고려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후에 영상(領相)으로 증직되었다.
 
허조(許稠)‧맹사성(孟思誠) 등과 교유하였으며, 박돌(朴堗)‧서호(徐皡)와는 같은 고을에 살면서 마을의 풍속을 바로 잡는데 힘썼다.
 
손자로는 김수온(金守溫)이 있다.
 
현재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용산면(龍山面) 용산리(龍山里)에는 김종경(金宗敬)이 1413년(태종 13)에 설립한 풍천서당(楓川書堂)이 남아 있다.
 

 

 

 

솟을대문과 중문이 있던 곳 (금계리 수석마을)

 

 

안채와 사랑채가 있던 곳, 오른쪽 담옆으로 재실이 있던 곳 

 

 

가운데 감나무 뒷편이 재실 있던 곳

 

 

재실터 왼쪽은 안채와 사랑채가 있던 곳

 

 

 

 

옛 모습은 찾을수 없어 아쉬움에 넷상에서 예전 감모재 솟을대문과 비슷한 이미지를 찾아 보았습니다.

 

 

독락당 보물 제 413호

회재 이언적 독락당(獨樂堂) 솟을대문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소재)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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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대문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솟을대문은 집에 들어가는 주 출입문(대문)이다.

 

양반집의 대문은 보통 3칸으로 만들어지는데 가운데 칸의 솟을대문은 양반가에서 바퀴가 하나 있는 초헌을 타고 출입할 때 머리가 닿지 않게 하기 위해 높여 놓은 것으로 양반가의 상징이다. 이후 초헌을 타고 다니지 않는 일반 주택에서도 사용함에 따라 널리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초헌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초헌(軺軒) 조선시대 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던 수레.

명거·목마·초거·헌초라고도 한다.

 

 

 

 

초헌을 탄 구한국군 장군. 1904년 초헌은 종2품이상의 고관들이

타든 외바퀴 수레였다.

 

 

 

사인교(四人轎) : 앞뒤에 각각 두 사람씩 모두 네 사람이 메는 가마.

 

 

 

사인교(四人轎) 

 

교자

 

교자 

 

 

 

 인력거

 

 

솟을대문은 보통 남성들의 출입문으로 이용되며 이에 반해 높이를 똑같이 만든 문이 있는데, 이를 평대문이라고 한다.

 

살림집이 아닌 궁궐이나 사당처럼 중요한 건물의 출입문은 3칸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를 3칸문이라는 의미로 三門이라고 한다. 사당의 삼문은 보통 솟을대문과 같이 가운데 칸이 높은데 이때는 솟을 삼문이라고 하며 서민들의 대문은 보통 한 칸으로 만들며 판문을 여닫이로 해 다는 경우도 있으며 가장 보편적인 것은 사립문이다.

 

사립문은 싸리로 엮어 만든 대문을 말하나 민가의 대문을 통칭하는 명칭으로 통용됨에 따라 일반 나뭇가지나 수숫대, 대나무 등으로 엮은 문도 사립문이라 한다.

이런 사립문 중에는 대나무 등으로 가로세로 문양을 넣어 가면서 잘 짠 대문이 있는데 이를 특별히 바자문이라고 한다.

 

특히 양반집은 안채, 사랑채, 대문간채, 사당 등을 두루 갖춘 전형적인 양반주택이며, 대문은 행랑채 지붕보다 높게 만든 솟을대문으로 당시 양반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문은 드나드는 출입문의 역할과 건물간의 경계를 지워주는 역할을 한다.

 

울타리를 쌓아 담을 만들었으니 출입할 문이 필요하게 된다. 문을 크게 달면 대문, 대문 안쪽에 다시 내면 중문, 쉽게 다닐 수 있게 문을 내면 편문, 대문 옆에 조그만 문을 내면 협문, 대문 키가 행랑채와 같으면 평문, 행랑채보다 높으면 솟을대문, 솟을대문 셋이 연속돼 있으면 평삼문, 솟을대문의 기둥이 넷이면 사주문이라 한다.

 

시골의 소박한 집은 솟을대문이라도 키를 살짝 낮춰 일각대문처럼 만든다. 이때 꽃담 대신 토석의 맞담을 쌓기도 하며, 마을의 가장 깊은 곳 막다른 골목 끝에 대문이 서게 된다. 이런 집들의 후원이나 사랑채로 통하는 작은 문이나 샛담에 달린 작은 문을 일각문이라고 한다. 중요한 전각마다 둘레에 행각과 담장을 치고 일각문을 내어 내전으로 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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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항리 상여는 1909년 고종 황제가  이용직(이용강) 대감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하사했다고 전해져 오고 있는 왕가의 상여이다.

 

이용강은 본명이 이용직(李容稙)으로 1875년(고종 1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 형조와 예조의 참판, 대사헌·개성부유수·경상감사와 공조판서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황간면(黃澗面) 수석리(지금의 금계리 金溪里 수석마을)에 낙향하여 1909년(순종 3)에 사망하였다.

 

영동 신항리 상여 [永同新項里喪輿]

 

 

 

 

 

영동 신항리 상여

 

• 한자永洞新項里喪輿
• 분야사회/가족
• 유형유물
• 시대근대/개항기
• 성격상여
• 제작시기/일시1909년
• 수량1습(襲)
• 재질나무|천
• 크기(높이, 길이, 두께, 너비)총길이 10m(대차)|둘레 47㎝(대차)
• 소장처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신항리 24
• 문화재 지정번호충청북도 시도민속문화재 제10호
• 문화재 지정일1994년 12월 30일

 

영동 신항리 상여
 
[정의]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신항리에 있는 한말의 상여.

 

[내용]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0호. 1습(襲). 1909년(순종 3)에 제작된 것으로, 재료는 목재와 천이고, 대차와 소차 이중구조이다. 1994년 12월 30일 충청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왕가의 상여로 고종의 6촌 형인 이용강 대감이 충정북도 영동군 황간면 금계리로 유배 온 뒤 1870년에 세상을 떠나자, 고종이 그를 애도해 하사한 것으로 알려 졌으나, 실제는 세종의 열셋째 아들인 밀성군(密城君)의 15세손 이용직(李容直, 1824∼1909)의 것으로 밝혀졌다.

 

한 동안 주민들이 고종의 6촌 형인 이용강 대감의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은 이용직이 용강 현감을 지낸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용직은 철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용강현감을 거쳐 여주목사, 영남어사, 경상도감사에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다. 홍문관·예문관 제학을 지냈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묘소는 황간면 수석리 후록에 있다.

 

이 상여의 특징은 보통 상여와는 달리 대차와 소차 등 2중 구조로 대차 32명, 소차 24명이 메도록 되어 있는데, 규모가 크고 외부장식이 섬세하고 다채롭다. 대차는 총길이 10m, 둘레 47㎝로 만들어져 있다.

 

또, 교차판(칠성판)이 있어 관을 칠성판(가로 123㎝, 고리 8개)에 고정시킬 수 있으며, 장식은 용머리가 앞뒤로 1개씩 2개씩 4개, 봉(鳳: 수컷)이 앞뒤로 2개씩 4개, 황(凰: 암컷) 앞뒤로 1개씩 2개, 동자상이 앞뒤좌우에 6개씩 12개 등으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고 연꽃 등 단청과 풍경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 외에 매듭과 바닥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단청이 섬세하여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남은들 상여와 강원도 춘천시 청풍부원군 상여와 비교하여 크기와 모양이 비슷하다.
혼백을 모시는 요여(腰輿)는 4명이 들도록 되어 있다.

 

 

 

 

 

 

 

 

 

 

 

 

 

 

 

 

 

소재지 : 영동군 용산면 신항리 24

지정문화재 : 지방민속자료 제8호

 

이 상여는 1909년 고종 황제가 6촌형인 이용직(초명은 이용강) 대감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하사했다고 전해져 오고 있는 왕가의 상여이다. 보통 상여와는 달리 대차·소차의 2중 구조로 되어 있다.

 

실제 상여의 주인공은 세종의 열셋째 아들인 밀성군(密城君)의 15세손 이용직(李容直, 1824∼1909)의 것으로 밝혀졌다.

 

대차는 36명, 소차는 24명이 메도록 되어 있어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외부장식이 섬세하고 다채롭다.

 

대차의 총 길이는 10m이고 둘레 47cm이며, 교자판(칠성판)이 있어 칠성판(가로 1.2m, 고리 8개)에 고정시킬 수 있다.

 

장식은 용머리가 앞뒤로 2개씩 4개, 봉(鳳:수컷)이 앞뒤 2개씩 4개, 황(凰:암컷)이 앞뒤로 1개씩 2개, 동자상이 앞뒤 좌우에 6개씩 12개 등으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고, 연꽃 등 단청과 풍경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혼백을 모시는 요여(腰輿)는 4명이 들도록 되어 있다.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상여의 주인이던 이용직(李用直:1824∼1909)은 철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용강 현감을 거쳐 여주 목사, 영남 어사, 상주 감사에 이어 공조 판서를 역임하고, 홍문관 예문관 제학(提學)을 지냈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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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0호. 1습(襲). 1909년(순종 3)에 제작된 것으로, 재료는 목재와 천이고, 대차와 소차 이중구조이다. 1994년 12월 30일 충청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왕가의 상여로 고종의 6촌 형인 이용강 대감이 충정북도 영동군 황간면 금계리로 유배 온 뒤 1870년에 세상을 떠나자, 고종이 그를 애도해 하사한 것으로 알려 졌으나, 실제는 세종의 열셋째 아들인 밀성군(密城君)의 15세손 이용직(李容直, 1824∼1909)의 것으로 밝혀졌다.

 

한 동안 주민들이 고종의 6촌 형인 이용강 대감의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은 이용직이 용강 현감을 지낸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용직은 철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용강현감을 거쳐 여주목사, 영남어사, 경상도감사에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다. 홍문관·예문관 제학을 지냈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묘소는 황간면 수석리 후록에 있다.

 

이 상여의 특징은 보통 상여와는 달리 대차와 소차 등 2중 구조로 대차 32명, 소차 24명이 메도록 되어 있는데, 규모가 크고 외부장식이 섬세하고 다채롭다. 대차는 총길이 10m, 둘레 47㎝로 만들어져 있다.

 

또, 교차판(칠성판)이 있어 관을 칠성판(가로 123㎝, 고리 8개)에 고정시킬 수 있으며, 장식은 용머리가 앞뒤로 1개씩 2개씩 4개, 봉(鳳: 수컷)이 앞뒤로 2개씩 4개, 황(凰: 암컷) 앞뒤로 1개씩 2개, 동자상이 앞뒤좌우에 6개씩 12개 등으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고 연꽃 등 단청과 풍경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 외에 매듭과 바닥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단청이 섬세하여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남은들 상여와 강원도 춘천시 청풍부원군 상여와 비교하여 크기와 모양이 비슷하다.

 

혼백을 모시는 요여(腰輿)는 4명이 들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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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직 [李容直]

이칭별칭 : 자 수경(受卿), 수경(授卿)

유형 : 인물

시대 : 근대

출생-사망 : 1824년(순조 24) ~ 1909(순종 3)

성격 : 문신

성별 : 남

본관 : 전주

대표관직(경력) : 여주목사, 경상도관찰사, 궁내부특진관

 

정의 : 1824(순조 24)∼? 조선 말기의 문신.

 

내용 :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수경(受卿, 授卿). 병구(秉九)의 아들이다. 1850년(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용강현령ㆍ홍문관교리를 거쳤고 실록청기주관을 겸하였다.

 

이후 사간원헌납을 거쳐 사헌부집의ㆍ장악원정ㆍ동부승지ㆍ공조참의 등을 역임하였고, 1864년(고종 1) 성균관대사성, 1865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여주목사로서 호남소모사(湖南召募使)가 되어 장정을 모집하였다. 이 후 한성부 좌윤ㆍ우윤, 병조ㆍ이조ㆍ예조의 참판을 역임하였고, 1882년 대사헌이 되었다.

 

공조판서ㆍ의정부좌참찬을 지냈고,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ㆍ경연관(經筵官)을 겸하였으며, 1893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관제개혁 후 1902년 궁내부특진관을 역임하였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909년(순종 3)에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철종실록(哲宗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문품안(文品案)』

『청선고(淸選考)』

 

(1) 패배한 농민군의 무주에서 용산까지의 행진

동학 농민군의 남북 세력이 합쳐져서 최후로 왕조의 정부군과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 곳을 공주 우금티라 한다. 우금티 고개 동쪽 기슭에는 기념탑이 서 있으나, 당시의 싸움과 관련된 유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여기서 우세한 무기에 대하여 농기구와 죽창으로 대항하여 충청도 감영을 확보한 후에 서울로 진격하려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동학의 지휘부는 급히 나머지 동학 농민군을 거느리고 남하하였다.

충청도 지역의 농민군을 주축으로 하는 농민군은 일단 남하하여 전라도로 들어갔다가 보다 동쪽의 산악지대로 이동하며 흩어진 농민들을 규합하여 장수.진안을 거쳐 무주에서 충청도로 들어와 영동의 용산으로 이동하였다.

동학군의 이동은 무주에서 충청도의 경계로 진입하여 결국 보은읍 종곡리 북실에 이르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충청도 경계로 들어온 것은 [감영보고문]에 의하면 12월 8일 청산의 이교(吏校)들이 말한 내용에

“적도(동학 농민군) 수만 명이 무주로부터 영동에 이르면서 설천(雪川)과 월전(月田)의 의병(당시 지역 유력자들이 조직한 토벌을 외치며 왕조 정부에 충성한다고 일어난 사람들이 스스로 의병이라 함)을 격파하고 12만이라 일컫고, 청산과 상주를 함락하겠다고 한다”

라 하였고,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서는

“(양력) 1월 3일 오전 3시쯤 황간 현감으로부터 통보해 오기를 동학도 약 1만여 명을 최법헌(최시형)이 이끌고 전라도 무주로부터 행진해 와, 이미 황간 부근의 옛 근거지인 서수원(西水院)에 머물고, 바야흐로 황간을 습격하려 한다고 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로써 본다면, 동학군은 무주→설천→원전→서수원→황간의 경로를 이용하였다.
[토비대략]에는 12월 5일에 동학군이 7천여 명이 되고, 또 무주를 함락하고 바야흐로 영동.상주로 향한다는 소문을 쓰고 있다.
또 북실 입구에서 붙잡힌 동학군이 얘기한 내용을 적은 [감영보고문]에는 ‘안성 포(包).관동 포(包) 등이 호남에서 여러 번 싸워 17차에 이르고, 12월 6일에는 무주로 들어와 설천.월전 두 곳의 의병을 격파하고, 영동을 함락하고 황간의 군기를 빼앗아 영동 땅 용산 저자에 웅거하여,

수석(水石)의 이판서 집과 양반 정반씨 집 등 두 채, 그리고 죽전(竹田)의 백성 집 40여 채를 불태우고…’라고 하였다.


따라서 동학군의 이동 경로는 전라도 무주의 설천(현재의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서 남대천을 건너서(남대천은 무주.영동의 경계뿐만 아니라 전라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이다) 해발 497.8m의 오봉산(五峰山) 동쪽과 서쪽의 고갯길을 넘어 월전(月田 : 영동군 용화면 월전리)을 점령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고갯길은 가까운 길이기는 하지만 험하다.
따라서 무주에서 남대천을 따라 동쪽으로 용강리 솔뫼에 이르르고, 여기서 한편으로는 남대천을 건너서 용화리를 거쳐 월전에 이르고, 한편은 보다 동으로 이동하여 설천을 점령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설천?월전에서 영동.황간에 이르는 길은
① 해발 900m 이상의 천마령.천만산.도마령을 넘어가는 길과
② 각호산.민주지산.석기봉.삼도봉을 잇는 능선을 넘어 영동군 상촌면.매곡면을 지나는 길로 크게 구분된다.

①의 경우는 월전리에서 안정리.장동리.천마령.산막리를 지나 영동으로 똑바로 북진하는 길이 있다. 영동에서는 동으로 황간에 이르기 전에 서송원(西松院)이 있다.

②의 경우는 설천에서 오봉산을 넘어 월전.안정리를 지나 도마령을 넘어 둔전리와 고자리?상도대리?하도대리.임산리를 거쳐 돈대리 아래의 수원리(水院里)에 이르며, 여기서 유전리.노천리.장척리를 거쳐 황간에 이른다. 동북방향의 길이며 매우 험준한 길이다.

모두가 물줄기를 거슬러 고개를 넘으면 다시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는 길이 된다. 아마도 월전에서 영동에 이르고, 다시 동으로 황간의 서송원에 이른 후에 북진했다고 여겨진다.

서송원에서도 황간에서도 북으로 회포리를 거쳐 곧바로 용산 장터에 이른다.
용산에 이른 동학군은 용산의 북쪽 천관산의 연봉에 있었던 청주병.옥천의병과 교전케 되었고, 그 후방으로는 황간에서 일본군이 쫓아오고, 동쪽의 상주군 모서면 지역에서 상주 소모영의 김석중 부대가 토벌에 참여하고 있으면서 경상도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강화하면서 한편으로는 동학군을 추격하고 있었다.

동학군이 말한 수석(水石)은 영동군 황간면에서 용산의 경계에 가까운 수석마을이며, 바로 북쪽에 죽전마을이 있다.
이들 모두가 송천의 상류로 상주 모서에서 흘러내리는 금상천(錦上川)이 앞으로 흐르는 곳이며, 용산 저자로 가는 길목에 해당된다.



따라서
① 동학군은 황간에서 동남향하여 경상북도로 향하려다 일본군이 이 방향에 있음을 알고 황간면 금계리에 이르렀고,

② 금계천(금상천)을 따라 북상하면 상주 소모영 군과 마주치므로 서북향하여 영동 용산 저자에 들어갔다.

③ 용산 장터에 있게 되자 청주병과 옥천의병이 공격하다가 실패했는데, 이에 앞서서 상주 소모영 군이 기습하다가 퇴각하였다.

④ 청주.옥천의병을 퇴각시킨 동학군은 북쪽으로 청산을 점령하였다.
라고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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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대한 동학혁명 기록을 올려 드립니다. 

 

손병희 통령과 동학혁명

 

표 영 삼

 

머 리 말

 

1894년 9월 18일(양 10월 16일)에 신사 해월 최시형(神師 海月 崔時亨, 1827년. 이하 海月선생으로 약함)이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기포령을 내리자 호서 지역에서도 일제히 일어났다.

 

처음 기포한 곳은 음성군 만승면 광혜원(廣惠院, 당시는 鎭川郡)이었다.

 

얼마 후 음성 삼성면 황산(黃山)에 있는 충의포 도소(忠義包都所, 大接主 孫秉熙, 1861년. 혁명당시 34세)로 옮기면서 본격적인 혁명운동을 시작하였다. 손병희 대접주는 10월 6일 괴산전투를 치루고 보은으로 갔다가 10월 12일에 청산(靑山縣, 옥천군 청산면)으로 내려가 해월 선생을 만났다.

 

해월 선생은 손병희에게 통령의 직임을 주고 논산으로 가서 전봉준 장군과 합류하여 일본군을 물리치라는 명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손병희는 논산으로 떠나 10월 16일에 전봉준 장군과 합류함으로써 호남·호서 동학군은 하나가 되어 공주성 공략을 벌이게 되었다.

 

동쪽의 곰티에서 서쪽의 우금티에 이르기까지 30리에 걸친 전선에서 10월 23일부터 혈전의 막은 올랐다. 그러나 무기의 열세로 많은 희생자를 내고 11일에 노성까지 물러서게 되었다. 손병희 통령은 전봉준 장군과 생사를 같이하여 논산, 전주를 거쳐 원평에 이르러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고 11월 25일에 다시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역시 무기의 열세로 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태인, 정읍, 순창 복흥을 거쳐 임실 갈담(葛潭)으로 넘어왔다. 여기서 해월선생을 모시고 장수, 무주, 영동, 황간을 거쳐 보은 북실에 이르렀다. 11월 17일 밤부터 18일까지 민보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세칭 북실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패하여 금왕 되자니로 가서 마지막 전투를 벌인 다음 호서 동학군은 끝내 해산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손병희 통령이 광혜원에서 기포한 이후의 행적과 전투과정을 개관해 보기로 한다.

 

1. 충의포 황산서 기포 해월 선생은 보은 대도소에서 9월 18일(양 10월 17일)에 기포령을 내렸다. 이에 앞서 호남 호서 동학지도자들은 9월 11일부터 12일까지 이틀간 전라도 삼례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한 재기포 여부를 놓고 격론을 벌인 끝에 재기포(再起包) 하기로 의견을 모은 바 있다. 이에 따라 해월 선생도 기포령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백범일지(白凡逸志)}에 의하면 "후보(後報)가 들어왔다.

 

어떤 고을 원이 도유(道儒)의 전 가족을 잡아 가두고 가산을 강탈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를 들으신 선생(海月)은 진노하는 낯빛을 띠고 순 경상도 사투리로 호랑이가 물러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워야지 하시니 선생의 이 말씀이 곧 동원령이었다.

 

각지에서 와 대령하고 있던 대접주들은 물 끓듯이 상기를 띠고 물어가기 시작하였다. 각각 제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싸우자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7월경까지만 해도 해월 선생은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여왔다. "근일 교도가 혹 가탁 관리하고 탁명 수간( 奸)하야 도처 사악(肆惡)에 경외의 심이 불소하니 틈심해당(闖甚駭 )한지라 성훈에 왈 인시천(人是天)이라 하고 우왈 타인(打人)이면 타천(打天)이라 하였으니 피아를 물론하고 균시(均是) 천주를 시(侍)한 동포이니 설혹 유과(有過)할지라도 절물(切勿) 구타하고 자관(自官) 재결함을 유지하라"고 타일렀다 한다. 이러한 해월 선생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판다놔여 결단을 내린 것이다.

 

백범은 황해도로 내려가다 광혜원에 들렸을 때 동학군이 기포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즉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벌써 곳곳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이고 평복에 칼찬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되었다. 광혜원 장거리에 오니 만 명이나 됨직한 동학군이 진을 치고 행인을 검사하고 있었다.

 

가관인 것은 평시에 동학당을 학대하던 양반들을 잡아다가 앉히고 짚신을 삼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증거를 보이고 무사히 통과하였다"고 하였다. 김구(白凡) 일행이 광혜원을 지난 것이 22일쯤이므로 이 곳 동학군들은 9월 20일경에 모이기 시작한 것 같다. 이 때 일부 관원과 유림세력들은 동학도를 가혹하게 탄압하여 생존을 위협하고 있었다.

 

진천군의 허문숙(許文淑)과 조백희(趙百熙), 지평(砥平)의 맹영재(孟英在)를 꼽을 수 있다. 맹영재는 8백 명의 토병을 모아 강원도 홍천, 횡성, 지평, 원주 지역에서, 허문숙과 조백희는 토병 5백을 모아 진천, 괴산지역에서 동학도들을 학살하였다 한다.

 

한편 김홍집 내각도 9월 22일(양 10월 20일)에 신정희(申正熙)를 도순무사(都巡撫使)로 임명하고 순무영(巡撫營)을 창설하게 하였으며, 각 군현에는 민포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초멸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두황(李斗璜)을 죽산부사로 임명하는 한편 장위영(壯衛營) 영관으로 임명하였고 성하영(成夏泳)을 안성군수와 경리청(經理廳) 영관으로 임명하여 출동시켰다.

 

그리고 일본군도 출동준비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포한 동학군은 우선 무장을 갖추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양호우선봉일기}에 의하면 9월 25일에 음죽(陰竹) 관아를 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였다 하며 29일에는 진천 관아를 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였다 한다.

 

진천 관아에 쳐들어 간 동학군은 안성과 이천 동학도하 하였다. 안성과 이천 관아 무기는 벌써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에서 기포한 동학군들은 3개소에 모여 있었다.

 

진천, 이천, 안성, 여주, 음죽 동학군들은 광혜원에, 손병희 충의(忠義)대접주 휘하 동학군과 강원도 일부 동학군들은 황산(黃山, 현 음성군 금왕읍 황새마을)에, 충주 신재련(辛在蓮, 載淵) 접주 휘하의 동학군들은 보들(洑坪, 현 금왕읍 도청리, 신평리 일대)에 모여 있었다. 이들은 10월 초에 충의대도소(忠義大都所)의 대접주 손병희의 지휘를 받아 움직이게 되었다.

 

{천도교회사초고}에 의하면 황산에 모인 인물은 광주의 이종훈, 황산의 이용구, 충주의 홍재길(洪在吉)과 신재연(辛載淵), 안성의 임명준(任命準), 정경수(鄭璟洙), 양지의 고재당(高在堂), 여주의 홍병기(洪秉箕), 신수집(辛壽集), 원주의 임학선(林學善), 이화경(李和卿), 임순호(林淳灝), 이천의 김규석(金奎錫), 전일진(全日鎭), 이근풍(李根豊), 양근의 신재준(辛載俊), 지평의 김태열(金泰悅), 이재연(李在淵), 광주의 염세환(廉世煥), 횡성의 윤면호(尹冕鎬), 홍천의 심상현(沈相賢), 오창섭(吳昌燮) 등이라고 하였다.

 

이 밖에 음죽의 박용구(朴容九)를 비롯하여 여러 명이 있었다. 이들이 이끌고 온 동학군은 수만 명이라 하였으나 약 1만 명은 되었다고 여겨진다.

 

2. 호남·호서 동학군 합류 황상 도소에 수만 동학군이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선유사(宣諭使) 정경원(鄭敬源)이 10월 4일경에 포군 5백 명을 이끌고 황산으로 출동하였다. 5리 밖인 사창(社倉)에 주둔하게 되자 경기도 편의장인 이종훈는 그를 직접 찾아가 싸우지 않고 서로 물러서자고 담판을 벌였다.

 

정경원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동학군 측은 당초 계획대로 보은으로 이동하였다.허문숙과 맹영재도 출동했으나 동학군이 엄청난 것을 보고 물러가고 말았다.

 

충의포 동학군은 10월 6일에 황산을 출발, 괴산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괴산읍 인근에 이르자 수성군과 일본군이 총격을 가해 왔다. 동학군은 이들의 저지를 받고 몇 시간을 교전하였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보은군 장내로 왕할 차로 괴산으로 향할새 괴산 쉬( )가 충주에 주둔한 일병 수백 명을 요청하여 도중을 시살( 殺)하니 피차에 살상이 막심하였다.

 

일병이 충주병참으로 귀하거늘 도중이 일제히 괴산읍내에 입하여 일야를 경하고 익일에 보은 장내로 출발할새 괴산 쉬 본군 거 서접주 모를 포착하여 군민으로 하여금 타살한지라 기자 13세 아가 부수(父讐)를 복키 위하여 읍내에 방화하니 관청과 민사 수백 호가 회신(灰燼)하였더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이와는 달리 "지난(11월) 3일(음10월 6일) 원전(原田) 소위가 2개 분대를 인솔하고 충주에서 괴산지방까지 정찰하던 중 적군 약 2만 명을 만나 격전을 벌이다 겨우 다음날(4일) 오전 6시에 충주로 돌아왔고 원전 소위 이하 4명이 부상, 사병 1명이 즉사했다고 가흥병참사령부로부터 전보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 전투는 저녁 때에 벌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일본군의 피해는 5명의 사상자에 지나지 않았으나 동학군 측도 심중(甚衆)한 사상자가 있었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10월 6일에 이르러 동학도 누 만 명이 두 길로 나누어 살분(殺奔) 입경하였다. 이때 일본군 25명이 지나다가 북쪽에서 동학도가 오는 것을 보고 다가갔으며 남쪽으로 들어오는 적은 수성군이 맞아 싸웠다.

 

동학도는 많고 수성군은 적어 버틸 수가 없어 남쪽 전투는 불리하게 되었고 북쪽에서도 역시 패하여 일본군 1명이 사망하였다. 수성군과 부민도 11명이나 죽었으며 창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중상을 입은 자도 30여 인이나 되었다. 그리고 읍하 5동의 민가도 5백여 호가 불타버렸고 관아 공해들도 모두 부서졌으며 오직 객사만 남았다. 군기나 즙물, 문부는 불살라졌고 환곡 40석과 공전 8천여 금도 빼앗겼다"고 하였다.

 

7일 아침 일본군이 철수하자 동학군은 괴산에 들어가 하루를 쉬고 8일에 보은 장내리로 갔다. 여기에 있는 민가 200호와 인근 마을에 있는 민가로 분산하여 하루 밤을 자고 다음날 옥녀봉 아래 천변 일대에 4백여 개소의 초막을 치고 유숙하였다.

 

다시 충경포(忠慶包, 보은 동학군)와 문청포(文淸包, 문의 및 청주) 동학군이 합류하여 2만여 명으로 늘어나자 12일에는 해월 선생이 있는 청산으로 내려 갔다. 이 지역 동학군과 영동, 옥천 동학군까지 동원되어 대기하고 있었다.

 

근 3만 명에 이르는 동학군은 청산일대 여러 마을에 포진하고 있었다. 해월 선생은 각 포 두령에게 "지금은 앉아서 죽움을 당하기 보다 일어나 일체로 용진할 때라"는 유시를 내리고 손병희에게 통령을 임명하고 논산으로 가서 전봉준과 합류하여 일본군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였다. 12일부터 식량을 비롯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고 13일에는 전투병력의 편제를 정하였다.

 

선봉은 전경수, 후진은 전규석, 좌익은 이종훈, 우익은 이용구, 중군은 손병희가 맡았다. 그런데 호서 동학군의 뒤를 따라 내려 오던 이두황(李斗璜) 관군은 15일 늦게 보은 장내에 도착하였다. 2백호의 민가는 거의 비어 있고 겨우 남아 있던 20여 인도 관군이 오자 산으로 도망쳤다.

 

관군은 400여 개의 초막에 불을 지르고 보은읍으로 돌아갔다가 16일에 회인으로 떠나버렸다. 전라도 동학군이 북상하므로 돌아 오라 하여 돌아간 것이다. 전봉준 장군은 10월 14일 삼례에서 출동하여 논산, 노성 일대에 진격하게 하였다. {전봉준공초}에 재기포한 날자가 10월 12일(양 11월 9일)이라 하였으므로 아마도 14일에는 논산으로 가 있었다고 보인다.

 

한편 손병희(1861년생) 통령은 14일에 청산을 출발하였다. {기문록}에는 "14일 저녁 때에 6∼7만 대진이 청산으로부터 (본읍, 영동에) 왔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손병희 통령이 이끄는 호서 동학군은 약 5천 명이었고 14일에 청산을 따나 영동 심천(深川)과 진산(珍山)을 거쳐 16일에 논산에 당도하였다.

 

한편 옥천, 황간, 영동 동학군 2만여 명 중 1만 명은 회덕(懷德) 지명(芝明)으로 가서 관군과 교전한 다음 공주군 장기면(長岐面) 대교(大橋, 한다리)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호남·호서 동학군이 공주를 공격할 때 금강 북쪽에서 위협하도록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동학군이 공주를 목표로 삼은 것은 북상하는데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점일 뿐만 아니라 지형적으로 산이 성처럼 사방으로 둘러있고 북서쪽에는 금강이 감싸고 있어 방어하기에 뛰어난 곳이었기 때문이다.

 

전봉준 장군은 공초에서 "공주감영은 산이 막히고 강이 둘러있어 지리가 뛰어나 이 곳을 차지하고 굳게 지킨다면 일본군도 쉽게 빼앗지 못할 것이므로 공주에 들어가 일본군에 격문을 보내 버텨보고자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이 먼저 차지하여 당초 계획은 빗나가 버렸다. 10월 16일 전봉준 장군은 손병희가 이끄는 호서 동학군이 도착하자 양호창의영수(兩湖倡義領袖) 명의로 충청감사에게 일본군을 같이 물리치자는 서한을 보냈다. 즉 "일본 원수가 트집을 잡아 틈을 내어 군대를 움직여 우리 군부를 핍박하고 우리 민중을 어지럽히고 근심케 하니 어찌 말하지 않으랴 … 각하는 맹성하고 의로써 같이 싸우자"고 하였다.

 

당시 논산에는 여산, 익산, 논산, 노성, 부여, 공주 동학군들도 모여들어 2만여 명에 이르렀다. 20일부터는 행동을 개시하여 노성(魯城)일대와 경천(敬天)일대로 진출하였다.

 

{전봉준공초}에 의하면 공주 공격은 10월 23일부터라 하였다. 그리고 전투를 시작한 것은 23일부터이다. 공주로 들어가는 길은 많은데 동쪽은 효포를 거쳐 참새골, 남다리를 지나 금강을 끼고 장기대 나루로 가는 길이 있고, 효포(新基洞)에서 서쪽 산을 타고 곰티(熊峙)로 넘어가는 길이 있다. 그리고 동남쪽은 가마울을 거쳐 능선을 넘어 공주 금학동(金鶴洞) 큰골로 넘어가는 길과 남쪽 오실동(梧實洞) 뒷산을 넘어 금학동 하성다리로 가는 길이 있다.

 

다음은 남쪽 우금티로 넘어가는 길이 있으며 우금티 서쪽 견준산(犬 山)과 공주 서쪽 봉황산(鳳凰山) 사이에 있는 새재를 넘어 봉황동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으며, 서쪽 금강을 따라 저대와 한산을 거쳐 봉황동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1차 공격은 효포 쪽과 이인 쪽으로 나누어 들어갔다. 호남 동학군은 효포 쪽을, 호서 동학군은 이인 쪽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그러나 일부병력은 호서동학군이 효포 쪽으로, 호남 동학군이 이인 쪽으로 뒤섞여가기도 하였다.

 

{시천교종역사}에는 "이인역에 이른 이용구는 옥녀봉에서 경병과 전투하였으며 경병은 패해 달아났다"고 하였다. 경리청 대관 백낙완(白樂浣)도 {남정록}에 손화중이 참전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손병희를 손화중으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공방전이 벌어진 지점은 동쪽 효포(孝浦, 龍溪面 新基里)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길목인 웅치(熊峙, 곰티, 용계면과 공주시의 경계) 일대와 남쪽 우금티 길목인 이인 일대였다.

 

호남 동학군은 23일에 널티(板峙)를 넘어 효포에 이르러 관군을 물리쳤다. {남정록}에 의하면 22일에 동학군이 경천에 왔다고 하자 경군 280명을 효포에 배치하여 파수케 하고, 280명은 부내에서 방수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23일에 동학군이 널티를 넘어 효포를 향해 올라가자 효포에 배치되었던 관군은 겁을 먹고 도망쳐버렸다. 즉 "효포를 파수하던 장졸(280명)이 … 놀라 겁내어 … 금강을 건너 도망쳤다". 그래서 호남 동학군은 전투를 하지 않고 효포 일대를 장악하였다.

 

전봉준 장군은 24일 새벽에 4천 명의 정예병력을 투입하여 곰티 산줄기에 뻗어 있는 여러 갈래의 능선으로 기어오르게 하였다. (후일 전봉준 장군과 공주성 공격을 다룰 때 자세히 소개키로 함). 관군은 2개로 나누어 곰티 아래와 위에 배치하고 급히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홍운섭이 이끄는 관군과 모리오(森尾)가 이끄는 일본군은 서둘러 24일 저녁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곧 금강진두(錦江津頭)와 봉수재(月城山)에 1개 소대씩 배치하고 방어에 들어갔다. {순무선봉진등록}에 의하면 안성군수 홍운섭(洪運燮)과 대관 조병완(曺秉完)은 1개 소대 병력으로 금강진두를 수비하였고, 참령관 구상조(具相祖)는 1개 소대병력으로 봉수재를 방어하게 하였다. 25일에는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은 계속 곰티를 방어케 하였고, 구상조와 일본군 30명은 남쪽에 있는 동학군의 좌측을 공격케 하였으며 홍운섭과 조병완은 동학군의 북쪽 우측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한다리에 진주하였던 동학군은 24일에 관군의 기습을 받고 힘없이 무너져 협공작전은 차질을 가져 왔다. 관군은 한다리로 바로 가지 않고 북쪽 25리 지점에 있는 수촌(壽村)으로 돌아서 한다리 배후로 접근하였다.

 

한다리 뒷산 숲과 들에 포진하고 있었던 동학군은 서쪽과 남쪽만 경계하고 있었다. 뜻밖에 북쪽 산 숲속에서 관군의 기습을 받게 되자 당황한 나머지 한나절만에 패하고 말았다. {순무사정보첩}에 의하면 "옥천포 동학도 수만 명이 동쪽 30리 지점에 있는 한다리에 모여 전봉준과 회합하려한다. … (24일) 첫 닭이 울자 곧 출발하였다. 25리 정도 돌아서 수촌에 이르러 조반을 먹고 한다리 뒷길을 따라 20리를 전진하였다.

 

멀리 바라보니 마을 뒤에 작은 골짜기 숲 속에 수천 명이 모여 있었다. 들에는 깃발을 둘러 세우고 수만 무리가 모여 있었다. 몰래 배후로 접근하여 숲 속의 적을 먼저 기습하였다. 조금 후에 산 아래서 포를 쏘며(ㅈ항하던 동학군은) 들에 있는 적들과 합류하였다.

 

숲이 있는 골짜기를 탈거(奪據)하자 서로 총을 쏘며 한나절 전투를 벌였다. 적 20여 명을 사살하였고 생포도 6명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동학군은 관군과 일본군이 배치되어 있는 맞은편 계곡이나 능선에 올라 대치하고 있었다. 전봉준 장군은 곰티에서 직접 지휘하여 공격에 들어갔다.

 

{순무선봉진등록}에 의하면 "적세는 듣던 대로 산과 들에 가득 덮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소위 우두머리인 전봉준은 휘장을 드린 가마에 타고 깃발을 흔들고 태평소를 불며 벌떼처럼 둘러싸고 공격해 왔다"고 하였다. 곰티만 넘으면 공주이므로 전봉준 장군은 관군의 지원병력이 늘어나기 전에 곰티를 넘으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지형이 험준하여 2주야를 잠도 못 자고 공격했으나 좀처럼 전진할 수 없었다. 식량과 탄약도 떨어지고 피로도 겹쳐 할 수 없이 30리 후방인 경천으로 철수하였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은 다음과 같다.

 

1, 22일(음 10월 25일) 오전 6시 공주 동면 능치치(陵峙峠, 곰재) 월성산(月城山) 등을 수비케 했던 경리영병으로부터 우세한 적군(대략 3백여 명)이 공주 동편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으며 3천여 명은 냉천(冷泉) 뒷산으로 진격해 오고 있다고 보고해 왔다.

 

2, 이러한 상황하에 공주에 있는 적도 정토대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 일본군 제2중대(1소대와 2분대), 한국군 810명.

 

3, 오전 8시 30분 중대가 능암산(陵庵山)에 이르러 적의 정세를 정찰해 보았더니 적도 약 3천여 명이 능암산에서 약 1천m 전방에 있는 냉천 뒷산에 있으면서 능치산과 월성산 등의 한국군과 교전 중이었다. 그리고 적군 몇 명이 우리의 우익인 능암산 기슭으로 나와 이 산을 점령하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니시오까(西岡) 조장에게 2분대를 이끌고 가서 능암산을 점령하려는 적도를 격퇴하고 또 냉천 뒷산에 있는 적도의 인원수를 정찰케 하였다.

 

4, 여기서 우리 군대를 월성산과 능암산과의 중간에 배치하여 적의 측면과 배후를 향해 몇 번의 일제사격을 시도했지만 탄착점이 보이지 않고 거리가 맞지 않아서 사격을 중단하였다. 이렇게 서로 대치한 상태에서 오후 1시가 되었다.

 

5, 오후 1시부터 냉천 뒷산의 적이 뒷쪽 산 위로 퇴각하였다. 그래서 한국군으로 냉천 뒷산을 점령하고 경계하도록 맡기고 중대를 이끌고 공주로 철수하였다.

 

6, 적은 일몰에 이르러 결국 퇴각하여 경천지방에 집합한 듯하였다.

 

7, 적정을 정찰토록 파견했던 니시오까 조장이 이끄는 분대의 병졸 스스기(鈴木善五郞)가 적의 유탄에 맞아 오른쪽 정강이에 부상을 입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의하면 곰티를 공격하던 동학군 중에는 40명 정도의 청국군이 끼어 있었다고 하였다. 즉 "11월 27일(음 11월 1일)자 재 공주 모리오(森尾)대위의 필기보고에 의하면 11월 21일(음 10월 24일)에 공주에 도달하여 동남에 있던 수만의 적도와 교전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다음날 22일(음 10월 25일) 미명부터 적도는 재차 공격해 왔으나 우리 군대가 이를 막았고 오후 1시경 이들을 격퇴하였다. … 일몰에 이르러 적도는 경천, 정산(定山) 방향으로 퇴각하였으며 그 중에는 청국군 40명 정도가 있었다"고 하였다. 아마도 동학군 중 일부가 양총으로 무장한 것을 보고 청국군으로 오인한 것 같다. 한편 우금티의 길목인 이인 쪽을 담당했던 손병희 통령 휘하 호서 동학군은 23일에 이인으로 진출하여 우금티로 진출하려 하였다.

 

관군은 성하영(成夏永) 휘하 경리청 대관 윤영성(尹泳成)과 참모관 구완희(具完喜)가 이끄는 관군 약 350명이었고 일본군은 스즈끼(鈴木) 군조가 이끄는 약 30명이었다. 동학군은 지형이 유리한 산(翠屛山)으로 올라가 포진하고 공격에 나섰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동학군이 회선포(回旋砲)를 쏘아 관군의 공격을 저지하였다고 하였다. 동학군 일부는 신식무기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나절을 대항하던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군에 밀려 우금티로 후퇴하고 말았다.

 

일부 동학군이 이인 뒷 쪽으로 돌아가 포위작전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관군과 일본군은 소수병력으로 출전하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공주를 방어하는 데 치중하였다. 동원된 관군병력은 대략 810명이었고 공주 관영군은 약 4∼500명 정도, 그리고 일본군은 1개 중대(1개 소대와 2개 분대가 빠진 140명 내외)였다고 추측된다. 이인에 진출했던 동학군도 역시 노성으로 철수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11월 3일에 이르러 관군은 널티와 이인에 경리청 소대를 파견하여 동학군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동학군측에서도 10여 일간이나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증원병력의 보충과 식량 확보, 화약 비축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추운 날씨에 싸우자면 솜옷도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전투지역에는 인가가 모두 비어있었고 날씨가 몹씨 추원 솜옷을 마련하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었다. 3. 피의 우금티 공방전 2차 공격은 11월 8일부터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약 3만 명이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공주를 지키는 관군병력도 늘어나 2천 명 정도였고 일본군은 140명 정도였다. {순무선봉진등록}에 의하면 판치에 나가 있는 구상조로부터 "8일 오후에 … 동학도 몇 만 명이 혹은 정천점(敬天店)에서 바로 올라오고, 혹은 노성 뒷쪽 봉을 넘어 포위하며 올라오고 있다. 포성이 진동하고 깃발이 어지럽고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진격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하영도 "동학도 몇 만 명이 논산에서 곧바로 고개를 넘어 밀려오고 있으며 또한 몇 만 명은 오실(梧室) 산길을 따라 뒤를 끊고 에워싸고 있다"고 하였다. 적은 병력으로 막아내기 어려워 지형이 유리한 효포와 곰티 고봉 요새로 진지를 옮겨 … 동태를 살피고 있다"고 하였다.

 

이인에 나가 있던 관군은 밀려오는 동학군을 막지 못하고 우금티로 후퇴하였다. {남정록}에 의하면 140명의 관군을 거느리고 이인 남쪽에 있는 취병산에 있던 관군은 동학군에 포위되어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하였다. "11월 7일에 이인역 취병산에서 파수하고 있었는데 저녁 때에 동학군이 대군을 몰아 취병산을 둘러샀다. 포성은 우레와 같고 탄환은 우박 내리듯 하여 움직일 수 없었다.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밤중에 안개가 자욱히 산록을 뒤덮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자 겨우 빠져 나와 공주로 달려왔다"고 하였다.

 

관군과 일본군은 공주 산봉우리 요지를 지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반면 동학군은 험준한 산으로 공격해 올라가는데 온 힘을 기우렸다. {순무선봉진등록}에 의하면 "9일 날이 밝자 적의 진세(陣勢)를 살피니 각 진에서 서로 보이는 봉우리마다 온갖 깃발을 꽂고 있었다. 동쪽 널티 후봉에서 서쪽 봉황산 후록까지 30∼40리에 연달아 산상에 진을 치고 마치 사람으로 평풍을 두른 듯이 기세가 대단하다"고 하였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나타난 전투상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12월 4일(음 11월 8일)오후 4시 널티 지역을 맡고 있던 경리영병으로부터 오후 3시에 우세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자 점차 공주로 퇴각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2. 그 당시 공주에 있던 관군은 다음과 같다. (일본군) 중대병력(1개 소대와 2개 분대가 빠졌음). 한국군 810명. 3. 위와 같은 보고서에 따라 한국군(통위영병) 250명에게는 월성산에 가서 요지를 점령하여 적을 막게 했으며 한국군(경리영병) 280명에게는 향봉 부근에서 월성산과 연락을 취하면서 적을 막게 하였다.

 

이인에 있던 경리영병 280명은 점차 우금치산으로 퇴각케 하였다. 2중대가 우금치산을 점령하였다. 오후 5시 20분 스즈끼 특무조장에게 그의 소대와 이인에서 퇴각해 온 한국군을 이끌고 우금티산과 이인가도를 수비케 하였다. 대위 모리오는 제3소대(2분대 빠짐)를 대리고 향봉 부근에 있었다.

 

4. 향봉에 이르러 적의 정세를 정찰하니 향봉산 위로부터 약 1, 400m 떨어진 산 위 일대에 적도가 무리로 모여 있었다.(약 2만 명). 활활 불을 지피고 동남쪽을 포위하면서 계속 총과 포를 쏘아댔다. 이렇게 해서 다음날 아침까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5. 5일(음 11월 9일) 오전 10시 이인 가도와 우금치산 사이 약 10리에 걸친 곳에 적도가 대략 1만여 명이 나타나 우리의 우익 서쪽을 향해 급진해 왔다. 그 기세가 맹렬하였다. 우금치산은 공주의 요지로서 이 곳을 잃으면 다시 공주를 지킬 방도가 없다. 이와 동시에 삼화산(三花山)의 적 (1만여 명)도 오실(梧實) 뒷산을 향해 전진하였는데 그 정세가 매우 급하였다. 그리고 이 곳 역시 공주의 요지로 천연의 험지이다. 그래서 나가노(中野) 군조에게 1개 분대와 한국군 1개 분대를 이끌고 오실 뒷산을 단단히 지키도록 하였다.

 

오전 10시 40분 우금치산에 이르러 적의 정세를 정찰하니, 적이 우금치산 전방 약 5백m에 있는 산 위로 전진해 왔다. 이 때 스즈끼(鈴木) 특무조장은 다음과 같이 배치하였다.

 

⑴ 1개 분대를 견준산(犬 山)의 산허리, 또 1개 분대를 우금치산 산허리와 이인가도 오른쪽(전방 도로를 막을 수 있는 곳). ⑵ 한국군(경리영병) 280명을 봉황산(전면과 오른 쪽 방어를 말함). ⑶ 나머지 2개 분대는 우금치산. 여기서 제3소대를 우금치산에 증파하여 일제사격으로서 전방 산 위 약 8백m가 되는 곳에 군집한 적을 대적케 했으며 경리영병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적을 향해 사격토록 하였다. 그러나 적은 교묘하게 지형물을 이용, 약 2백여 명이 우금티산 꼭대기에서 약 150m 되는 산허리로 진격해 왔다.

 

그 선두의 5∼6명은 몇 m 앞 사각지점에 육박했고 앞산 위에 있던 적은 더욱더 전진해 왔다. 수 시간 동안 격전했는데 우리 군대가 가장 힘써 사웠다. 6. 오후 1시 40분 경리영병의 일부(50명)를 우금치산 전방 산허리로 진격시켜 우금치산 산꼭대기에서 140∼150m의 산허리에 걸쳐 있는 적의 왼쪽을 사격케 하였다. 그래서 적은 전방 약 5백m의 산꼭대기로 퇴각하였다. 오후 1시 20분 우금치산의 우리 군대를 그 전방 산허리로 진격시키고 경리영병에게 급사격을 시켰으며 적이 동요하는 것을 보고 1개 소대와 1개 분대로써 적진에 돌입케 하였다.

 

이에 이르러 적이 퇴각했으므로 경리영병에게 추격을 맡기고 중대는 이인가도로 나가 적의 퇴로를 다가가려고 하였다.

 

 7. 중대는 이인가도로 나가 급추격, 드디어 이인 부근에 이르러 그 일대의 산허리에 불을 지르고 몰래 퇴각하였다. 그러나 동남쪽의 적도가 여전히 퇴각하지 않으므로 한국군에게 우금치산, 오실 뒷산, 향봉, 월성산 등의 경계를 맡기고 기타 대원은 공주로 철수하였다. 이 때가 오후 8시였다.

 

당시의 병력배치를 보면 통위영병 250명은 동쪽 월성산에, 경리영병 280명은 향봉 부근에 배치하여 월성산과 연락을 취하며 막게 하였다. 이인에 나가있던 경리영병 280명은 우금치산으로 철수시켜 배치하였다. 그리고 일본군 100명 정도는 우금치산 일대에 배치하였다. 나머지 40명은 향봉 부근에 배치하였다. 이에 비해 동학군 3만 명은 맞은편 봉우리마다 수백 명 씩 배치되어 있었다. 숫적으로 절대 우세하였으나 무기는 고작 유효사거리 30m 정도인 화승총으로 무장하였으므로 사거리 300m의 신식무기를 당해 낼 재주가 없었다. 그래서 제대로 접근할 수 없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피아간의 전투는 11월 9일 12시경부터 시작되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의하면 "(12월) 5일(음 11월 9일) 오전 10시 우금티 산에서 약 10리 떨어진 이인가도에 적도 1만여 명이 나타나 우익 서방을 향하여 다가왔다"고 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화산(二花山)의 적(약 1만명)은 오실 뒷산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었다 하며 10시 40분 경에는 우금티에서 500m 떨어진 산상까지 이미 전진하여 왔다"고 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동학군이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아, 저 비류 기만명의 무리들이 40∼50리에 걸쳐 둘려 쌌으며, 길이 있으면 쟁탈하고 고봉이 있으면 점거하고, 동쪽을 치는 척하고 서쪽을 치고 좌측에서 번득이다가 어느새 우측에 나타나 기치를 흔들고 북을 치면 이에 따라 죽음을 무릅쓰고 산에 먼저 오르려하니 그들의 의리는 어떤 것이며 그들의 담략은 어떤 것으로 설명하랴. 그 상황을 생각하면 등골이 떨리고 마음이 섬뜩해진다"고 하였다.

 

12시경에 동학군 2백여 명은 교묘하게 지형을 이용하여 우금티 전방 150m까지 접근하였다. 그 중 5∼60명은 몇 미터까지 다가왔다. 그러자 피아간의 공방전은 치열하게 벌어졌다.

 

{갑오관보}에는 동학군의 공격모습을 "산등에 늘어서서 일시에 방포하고 산 안쪽으로 몸을 숨겨버렸다. 적이 봉우리를 넘으려 하면 (관군은) 다시 산등에 올라 총을 발사하기를 40∼50차례나 하니 시체가 산에 가득히 쌓였다"고 하였다. 수세에 몰렸던 일본군과 관군은 1시 40분경에 역공으로 나왔다. 경리영병 50명을 전진시켜 140m 내지 150m 떨어져 있는 동학군의 좌측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동학군은 즉각 산상으로 후퇴하여 응전하자 이때 일본군도 엄청나게 집중공격을 퍼부었다. 소비탄약이 2천 발이라 하였으니 집중공격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동학군은 움츠러들었고 2시 20분경에 일본군은 정면으로 공격하여 왔다.

 

손병희가 이끄는 호서 동학군은 이 때 우금티 서쪽과 봉황산 일대에서 공격전을 벌였다. {천도교서}에 의하면 이종훈(李鍾勳), 홍병기(洪秉箕), 이용구(李容九), 임학선(林學善), 이승우(李承祐), 최영구(崔榮九) 등이 측근에서 할동하였다 한다.

 

{시천교종역사}에 의하면 "드디어 봉황산으로 진격하자 경병과 일병이 산을 따라 사격하여 왔으며, 교도들은 죽움을 무릅쓰고 전진하여 양군은 10여 차례나 교전을 벌였다. 이용구는 정강이에 총상을 입었으며 일본군이 압박하자 힘이 딸려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다. 논산까지 물러가 다시 모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렇게 맹열히 공격하던 동학군은 어째서 멈칫거렸을까. 일본군과 경리영병의 집중사격으로 많은 전사자가 생긴 탓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탄환과 화약이 떨어진 것이 주요 원인이 아닌가 싶다. 이 때를 놓지지 않은 일본군과 관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여유를 주지 않고 맹렬히 추격하였다.

 

이인쪽으로 10리 가량 후퇴하였을 때 그들은 추격을 포기하고 산에다 불을 지르고 몰래 돌아갔다. 그러나 곰티와 향봉 쪽 동학군은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이 곳에서는 11일 정오까지 피아간의 공방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순무사정보첩}에 의하면 "적도 수천은 험준한 곳을 지키며 나오지 않아 격파할 계책이 없었다. 정오에 이르러 교장 이봉춘이 정병 10명으로 하여금 군복을 벗고 비류로 위장한 후 살며시 전진하였다. 적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산으로 올라가 앞에 나타나 일제 사격을 가하자 4∼5명이 쓰러졌다.

 

무리들은 무기를 버리고 몸만 빠져 달아났다. 고군(孤軍)이 될 염려가 있어 추격하지 못하고 총만 연달아 쏘았다. … 적의 동태를 탐지하니 흩어진 여당들은 곧 계룡산 등지로 갔다"고 하였다. 관군 10명이 기습하자 도망쳤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허황된 기록은 관군기록에 가끔씩 나타난다.

 

노성으로 물러난 호남·호서 동학군은 12일에 창의소의 명의로 충청감사에게 척왜척화(斥倭斥華)를 위해 동심협력하자는 글을 보냈다. 요지는 "도는 다르나 조선사람끼리 척왜와 척화는 그 뜻이 같으니 두어 자 글로 의혹을 풀어 알게 하노니 각기 돌려보고 충군우국지심이 있거든 곧 의리로 돌아와 상의하여 척왜척화(斥倭斥華)하여 조선으로 왜국이 되지 않게하고 동심합력하여 대사를 이루게 하자"고 하였다. 이 글을 받아본 충청감사의 반응은 감감했다.

 

4. 원평서 마지막 전투 동학군은 노성에서 항전해 보려고 수습해 보았으나 사기가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식량과 탄환도 여의치 않아 논산으로 다시 후퇴하였다. 논산 소토산(지금의 대건고등학교)에 일단 진지를 구축하였다가 여의치 않아 다시 전주로 후퇴하였다. 이 때 최난선(崔蘭善)이 이끄는 여산과 논산·강경, 익산지역 동학군 1천여 명이 달려와 이 곳에 진을 쳤다.

 

{여산종리원연혁}에는 "본군 대접주 박치경 외 최난선 … 등이 미륵리에 집강소를 설하다. … 11월에 경병으로 더불어 공주, 논산 양처에서 교전하다"고 하였다. 김의환(金義煥)은 {혁명투사 전봉준}에서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군이 후퇴하고 있을 때 강동(江東, 江景)방면으로부터 1천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공주전투를 후원하기 위해 달려오던 여산 접주 최난선은 … 은진 황화대로 모아 추격해오는 관군과 최후의 혈전을 시도하였다"고 하였다. 이 전투는 여산 접주 최난선이 이 지역 동학군을 이끌고 와서 치룬 전투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전봉준 장군과 손병희 통령은 11월 15일에 논산을 떠나 18일경에 전주로 들어갔다. 견고한 성을 이용하여 저항해 보려 했으나 군량미 마련이 여의치 않아 22일에 다시 금구 원평으로 떠났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의 요지를 보면 "전봉준이 성에 있으면서 주민을 선동하고 있다 하였다. … 정면은 일본군이, 그 뒤는 교도대가, 그리고 장위영·통위영 관군은 사방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본대가 10리쯤 전진했을 때 척후가 돌아와 말하기를 적군은 전날밤(22일)에 성을 버리고 금구로 도주하여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다.

 

금구 원평으로 간 것은 김덕명 대접주가 있으므로 군량미 조달과 화약을 확보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재기포 이후 용계장(龍溪丈, 金德明)은 동학군의 군수물자를 마련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김덕명판결선고서 designtimesp=7907>에도 "금구지방에서 취군성당(聚群成黨)하야 관고의 군물을 찬탈하고 민간의 전곡을 약탈했다"고 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에도 "원평점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공곡과 공전을 거두어들이며 평민을 학대했다"고 하였다. 바로 원평(大都所)에서 김덕명은 동학군 군수물자 조달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23일부터 다시 대오를 정비하고 항쟁할 준비에 들어갔다. 한편 태인에도 만여 명 동학군이 집결해 있어 두 곳에서 최후의 결전을 시도해 보기로 하였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전주에 이르러 수일을 유하고 금구군 토성에 이르러 관군으로 더불어 교전하다가 원평역에 이르러 견패(見敗)하다"고 하였다.

 

{천도교서}에도 "관군으로 더불어 교전하다가 패하여 남으로 향할 때 논산, 여산, 익산, 전주, 금구, 태인, 정읍, 고부, 장성, 순창 등 제군을 경하여 임실군 갈담시에 지하다"고 하였다. 원평전투는 11월 25일 아침에 시작되었다. 일본군과 관군은 24일 아침에 전주에 입성했다가 이 날 오후에 다시 출발, 금구로 내려왔다. 여기서 하루를 자고 25일 아침 일찍 원평으로 출동한 것이다.

 

{순무선봉진등록}에 의하면 오전 9시부터 최영학(崔永學)이 이끄는 교도대 일대(약 350명)와 일본군 60명이 공격하면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하였다. 교도중대장 보고에 의하면 이 달 24일 미시에 대관 최영학(崔永學)이 교도병 일대와 일본병 일대를 파송하여 금구읍에 이르러 밤을 새고 25일 오전 6시경에 행군하여 원평에 도착하니 적도 수만이 나팔소리 한번에 삼면으로 진을 벌려 品자형을 이루었다. 천보의 거리에서 서로가 포진하였다가 아침 9시경부터 저녁 5시까지 (전투를 벌였다). 포소리는 우레와 같았고 총알은 비 오듯하였다.

 

적은 산상에 있었고 우리는 들에 있었다. 사면 주위에서 지르는 함성은 천지를 흔들었고 포연이 자욱해서 원근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대관 최영학은 칼을 뽑아들고 앞장서서 산에 오르며 호령 지휘하자 대오는 동서로 나뉘어 일시에 힘을 내어 다투어 올라갔다. 혹은 찌르고 혹은 참하며 37명의 적을 죽이니 나머지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 모이면 동학인 줄 알겠으나 흩어지면 농민과 같아 뒤쫓아 죽이기가 불가능하였다.

 

탈취한 군물은 화룡총 10자루, 조총 60자루, 총알 7석, 화약 5궤, 자포 10좌, 도창 200자루, 쌀 500석, 돈 3천냥 … 등이었으며 일본군에게 넘겼다. 원평 전투에서 패한 동학군은 바로 태인으로 후퇴하여 이 곳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군과 합류하였다. 그런데 손병희 통령은 태인에 머물지 않고 바로 임실로 향하였다. 태인 전투는 11월 27일 11시경부터 벌어졌다. {양호우선봉일기}에 의하면 관군은 230명이었고 일본군은 60명이었으며 동학군은 5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동학군은 성황산, 한가산, 도리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관군과 일본군은 두 갈래로 나누어 한가산과 도리산을 목표로 공격하였다. 하나는 대관 윤희영이 이끄는 관군 90명과 일본군 30명은 서쪽 길로 공격하였고 대관 이규식이 이끄는 관군 140명과 일본군 30명은 동쪽 길로 공격하였다. 몇 시간만에 관군은 산상을 점령했으나 이미 동학군은 성황산으로 모두 집결하여 맹렬히 저항하였다. 관군과 일본군은 하산하여 다시 두 갈래로 나누어 공격하였다. 몇 시간을 두고 고전하다가 유리한 지형을 확보한 관군과 일본군은 집중사격을 가하여 해질 무렵에 동학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동학군은 30명이 쓰러졌고 40명이 생포되어 살해당했다. 생포자에게 물오보니 거괴는 전봉준이며 그 밑에 김문행(金文行), 유공만(劉公萬), 문행민(文行敏)이 지휘하였다고 한다. 손병희 통령이 갈담으로 넘어 온 경로는 분명치 않다.

 

{천도교회사초고}에 "익일 태인, 정읍 등지에서 다시 취합하니 도중이 수십만이라, 장성군 노령(갈재)을 유하여 유진하고 익일에 순창군을 경하여 임실 갈담으로 행진하니 도중이 피곤함을 불감하더라"고 하였다. 아마도 정읍 내장산 가을재(秋嶺)을 넘어 순창 복흥(福興)을 거쳐 쌍치, 산내, 임실 갈담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다. 내장산 가을재를 갈재로 알고 장성 갈재로 갔다고 착각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임실 갈담으로 간 것은 청운면 새목터(鳥項)에 해월 선생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임실현 민충식(閔忠植) 현감은 동학에 입도한 사람이므로 안전한 곳이었다. {천도교서}와 {천도교회사초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0월 13일 신사 호남으로 행하실 새 임실군 이병춘(李炳春)가에서 9일간을 유숙하다가 다시 동군 새목터(鳥項里) 조석걸(趙錫杰)가에 지하사 연류하시더니 1일은 신사 '도인을 불러 갈담시(葛潭市)에 왕견하라'하시다.

 

시시에 손병희 과연 당도하거늘 영접하여 신사에 배알케 되니 시는 11월 19일이러라"(천도교서) 11월에 해월신사주 … 장수군 계남면 신전리(薪田里) 박일양(朴一陽)가에서 일야를 숙하시고 동면 동촌리(東村里) 김종학(金鍾學)가에서 일야를 숙하시고 동군 산서면 동곶이(東串址)로, 남원을 경하시어 임실군 양경보(梁景寶)가에서 수일을 유숙하시고 동면(靑雄面) 조항리 허선(許善)가에서 수일을 유류하실새 일일은 봉서를 수하사 왈 '가단시(柯團市)를 가면 대군이 지할 것이니 차 서신을 전하라'시고 인을 파송하셨더니 과연 대군을 가단시에서 봉한 바 그 대군을 통솔한 이는 손병희러가.(천도교회사초고) {천도교서}에 손병희 통령이 이끄는 동학군이 갈담(柯團市)에 당도한 날자를 11월 19일라 한 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11월 27일에 태인을 떠났으므로 11월 29일이 될 것이다. 손병희는 새목터로 와서 신사를 모시고 12월 1일에 새목터 고개를 넘어 오수(獒樹)로 갔다. 여기서 다시 장수와 무주를 거쳐 12월 9일에 영동까지 진출하였다. 오는 도중 장수에서 "누차 관군과 교전하였다" 했으나 지방 민보군을 만나 소규모의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주에서도 "이응백(李應伯)이란 자 민보군을 솔하고 추격하거늘 … 도중이 대성 돌격하자 민보군이 대궤하다"고 하였다.

 

이응백은 민보군이 아니라 무주접주였으며 11월 9일에 용담현을 공격할 때 삼부자가 동학군 수천 명을 이끌고 성을 점령했던 분명한 동학지도자이다. 장수, 무주를 거치면서 인원 수는 늘어났으며 다시 영동에 이르러 더욱 늘어나 약 3천 명은 되었다고 짐작된다. 즉 장수와 무주에서 약 1천 명이 늘어났고 영동에 이르러 약 1천명이 더 늘어났다고 추측된다. {소모일기}에 보면 "영동지방의 비도는 1천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인원이 늘어나자 무기와 식량이 더 필요했으며 그래서 영동 관아를 점령하는 한편 황간까지 진출하여 무기 등을 탈취하였다.

 

{토비대략}에 의하면 "무주로부터 어제(9일) 오후에 나타나 영동과 황간을 점령하고 군기와 재물도 약탈해 갔다"고 하였다. 이에 앞서 영동군수는 무주 설천(雪川)과 영동 월전(月田, 설천에서 2㎞) 의병들이 동학군의 습격을 받고 접전했으나 대패하고 말았다고 알려왔다. 이 소식을 듣고 사태가 위급해지자 밤을 새워 인근 고을과 관군 주둔지에 구원을 청하였다.

 

5. 용산장과 보은 북실전투 원병이 오기 전에 영동은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군수는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김산 군수는 영남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정예포수 200명을 선발하여 추풍령에 배치하는 소동을 피웠다.

 

또한 김산 군수는 상주 소모영에 "비류 4∼5천명이 무주에서 영남으로 방향을 돌려 이미 옥천 양산(陽山) 등지에 이르렀으니 … 상주 소모영병 200명 정도를 파송하여 추풍령에서 힘을 합쳐 막도록 하자"고 청원하였다. 상주의 모동(牟東), 모서(牟西) 대소민들도 "비도 기천 명이 지금 청산 등지에 유진하고 있으니 상주로 넘어올 염려가 있으므로 방어대책을 세워달라"고 촉구하였다.

 

동학군은 일단 무장을 보충한 후 용산장으로 이동하였다. 영동에 모였던 일부 동학군은 옥천 양산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일부 동학군은 용산장으로 직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서원(水西院, 水松院)을 거쳐 황간으로 진출했던 동학군도 용산장으로 북상하였다.

 

그 중 일부 동학군은 상주 모동까지 진출했던 것 같다. 또한 용산장에 거의 와서 수석(水石)에 들러 이판서와 정반(鄭班) 두 집을 불사르고 죽전(竹田)에 들러 40여 호를 불살랐다.

 

{기문록}에 의하면 죽전에서는 노치선(盧致先) 형제를 살해했으며 용산에서는 강용구(姜容九)를 살해했다고 하였다. 호서 동학군이 공주를 공격하러 갔을 때인 10월 14일 이후 11월 9일 사이에 보수세력들은 지방 동학지도자와 교도를 많이 잡아다 학살하였다. 아마도 이와 관련이 있는 자들을 골라 그 죄를 추궁한 것으로 보인다.

 

상주 소모영은 다급한 나머지 150명을 선발하여 모서 모동을 거쳐 용산장으로 급파하였다. 이들은 밤에 길을 재촉하여 80리를 달려 10일에 모서 적도(杓桃, 작두벌)에 이르렀다. 한편 북에서는 청주 관병과 박정빈(朴正彬)이 이끄는 옥천 민보군 450명이 출동하여 청산에 갔다가 용산장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11일 아침에 출동한 상주 소모영군은 용산장 인근에 이르러 살펴보니 동학군들은 용산장 뒷산에 올라가 포진하고 있었다. 그 형세는 철통같았으며 엄청났다. 11일의 전투상황에 대해 {토비대략}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병력을 3개대로 나누어 전초 50명에게는 용산 뒤 골짜기로 들어가면 사면이 산인데 그 속에 길이 있다. 반쯤 들어가면 적이 반드시 치러 나올 것이다. 너희들은 거짓으로 패하는 척하고 골짜기 입구로 끌어내도록 하라. 동북 모퉁이에서 총소리가 연달아 들려오면 몸을 돌려 발포토록 하라고 명을 내렸다.

 

중초와 후초에게는 용산 골짜기 입구의 산머리가 높으니 너희들은 좌우산하에 매복해 있다가 동북에서 포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방포토록 하라. 나는 동북 모통에서 지휘할 것이니 대기하라고 명령하였다. 전초는 명령대로 길을 따라 반쯤 들어가 적을 만나 총을 쏘며 교전하였다. (그런데) 적이 먼저 달아나자 적이 달아난다고 고함을 질렀다. 이 소리를 들은 복병은 일제히 일어나 급히 달려갔다.

 

적은 드디어 산 위로 올라가 어지럽게 총을 쏘아대니 마치 비를 쏟아 붓는 것 같았다. … 적이 달아난다는 소리만 듣고 제김에 용기가 생겨 다투어 추격하여 들어갔다. … 이미 마간능에 이르러 골짜기 속에 갇히게 되었다. 적들은 산 위 사면에 둘려 있었다.

 

나는 달려가 소리쳐 전초를 구출하여 동북 모퉁이로 나와 추격하는 적을 쏘았다. 중초와 후초도 잠시 후에 돌아와 모이게 되어 대오를 갖추고 다시 싸웠다. … 드디어 (후퇴를 거듭하여) 적도(작도벌)에 이르자 동민들이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이를 끌고 길을 막았다. 말하기를 인근 동민들 … 공은 떠나지 말라고 하였다. … 곧 동민을 시켜 숲 속 여러 곳에 연기를 피우게 하고 밤이 되자 살며시 군졸을 율계(栗溪)로 옮겨 목을 방비하였다.

 

{토비대략}은 상주 소모영 유격장 김석중이 기록한 것으로 과장된 흔적이 너무나 많다. {기문록}에 보면 "11일 … 상주 병정은 회고치(灰古峙)에서 싸우다 병정 2인이 죽었으며 패주했다"고 하였다. 회고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여기서 패했다고 하였다. {소모사실}에 의하면 "11일 아침에 병졸을 인솔하고 용산 후곡에 이르러 곧 그 예봉을 막고 전투에 들어갔다.

 

드디어 적이 후퇴하자 의병들은 추격하여 산골짜기 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적의 포군 수천은 산 위 좌우에 둘러싸고 굽어보며 총을 쏘아대니 총알이 비오듯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하였다. 의병들은 올려다보며 공격하다가 얼마 후 한발씩 물러서며 총을 쏘며 동편 맞은 산에 올라가 일제히 방포하니 포성은 천둥소리와 같았다. 적은 비록 약간 움츠러 들었으나 지형이 불리한데다 적은 많아 대적하기 어려워 부득이 대오를 수습하여 서서히 퇴진하면서 평지로 유인해 보았다. 적은 역시 매복해 있는 것을 알고 끝내 하산하지 않았다.

 

서로 대치하다 저녁 때가 되자 드디어 율계(栗溪)로 후퇴하여 유진했다"고 하였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시에 손병희 대진을 솔하고 영동군 용산시장에 전지하니 후에는 경군이 추격하고 전에는 태산이 앙천한데 청주 관병과 부상배와 민보군이 사위로 포격하니 포연이 장천하여 진퇴유곡이라. 어시에 신사 손병희로 더불어 송전에 입하여 천사께 고하고 전행(前行)할 계를 협의하여 왈 제인이 만일 천을 신하거던 관군이 재전함을 불구하고 전진하라 하시니 수만 도중이 다 북향 고천하고 일심으로 궤위(潰圍) 전진하니 관군이 총검을 기척(棄擲)하고 사산(四散) 도주하더라.

 

시시에 손병희는 주의에 탄흔이 다하고 강건회(姜健會, 관군)는 중환 혼도하였다가 인히 회생하니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사실과 전반대되게 기록하였다. 당시의 전투상황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처음 전투가 벌어진 곳은 용산장터 뒷산이 분명하다.

 

현재 용산장터는 구촌리에 있으나 1921년 이전에는 용산리에 있었다. "동학군들은 용산장 뒷산으로 모두 올라가 포진하고 있었다"하므로 상용산리 서북쪽에서 용산리 동남쪽까지 약 3㎞에 걸쳐 길게 뻗은 야산 일대에 동학군이 포진하였던 것이다. 이 야산줄기를 넘어가면 노루메기에서 수리(壽里)에 이르기까지 긴 계곡이 있다. 산세는 완만하며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서 동서로 여러 지맥이 뻗어 계곡을 이루웠다. 동학군은 상용산과 용상리, 구촌리, 그리고 뒤쪽인 노루메기, 수리, 율리 일대에 있는 민가에 머물고 있었다.

 

신항리(新項里) 2구 배정열(87) 부부는 부친으로부터 들었다며 "동학군이 마을마다 가득 찼었다"고 하였다. 배정열 부인(90)은 "여자들도 돌을 날라다 주었다"고 하며, 타지에서 온 동학군도 많았지만 이 지방 동학군들도 많았다고 하였다.

 

{토비대략}에는 동학군의 추격을 받고 간신히 상주 모서면 작두벌까지 20리나 후퇴하였다. 그래도 안심이 안되어 밤중에 다시 10리를 후퇴하여 율계(栗溪, 牟西面 花峴里)에 갔다. 다음 날인 12일에는 청주병과 옥천 민보군 450명의 상용산리 동북쪽에서 공격해오자 전투가 벌어졌다.

 

청산에 주둔했다가 동학군이 용산장에 있음을 알고 공격해 온 것이다. 동학군은 역시 산으로 올라가 유리한 지점을 점령하였다. 이날은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지리를 잘 모르는 청주병과 옥천 민보군은 골짜기로 깊이 들어갔다가 어느덧 포위상태에 빠졌다. 결국 몇 시간 전투하다가 수명의 사상자를 내고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

 

{토비대략}에는 김석중이 달려가서 구원했다 하였으나 앞뒤가 맞지 않는다. 40여리나 떨어진 율계에서 오고가자면 7시간은 걸린다. {소모사실}에는 상주 소모영군이 "사람을 보내 정탐하니 청주병정과 옥천의병이 적과 접전하고 있다 하므로 병사를 이끌고 40리를 달려가 앞뒤를 공격하려 했으나 이미 청주, 옥천 병정은 퇴각하고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청주병과 옥천 민보군은 "탄환이 떨어져 부득이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고 있다. 관군과 민보군을 물리친 동학군은 13일에 청산으로 넘어가 15일까지 머물렀다.

 

{기문록}에는 "14일 청산에 머물렀는데 소사동(小蛇洞, 靑山面)에서 전투가 벌어져 다시 승리했다"고 하였다. 아마도 청산 민보군의 공격을 받자 이를 물리친 것으로 보인다. 집으로 돌아온 많은 동학군은 휴식을 취하는 한편 신발과 식량과 겨울옷을 준비하였다.

 

일본군과 관군이 추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자 15일에 다시 떠나야 했다. 원암을 거쳐 일단 16일에 보은으로 들어가 하루를 묵고 17일 저녁에 북실로 이동하였다. 이 날 밤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한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은 낙동에 있던 병참군인 1개 분대와 대구에 있던 1개 분대, 그리고 금산지역에서 군로(軍路)실측을 하고 있던 14명의 병력을 차출하여 동학군 토벌에 투입하였다.

 

황간현감으로부터 "동학도 약 1만여 명을 최법헌(신사 해월 최시형)이 이끌고 전라도 무주로부터 행진해와 이미 황간 부근 옛 근거지인 서수원에 머물고 바야흐로 황간을 습격하려 한다"는 통보를 받은 구와하라(桑原) 소위는 14명의 병력을 이끌고 12월 10일(양 1월 5일) 황간으로 처음 출동하였다. 황간으로 갔으나 용산으로 떠났으므로 13일에 뒤 따라 갔다. 그러나 용산에도 없었으므로 하루를 자고 14일에 상주 모서면 율계로 진출하여 상주 소모영군 200명을 위시하여 용궁현의 포수 20명, 함창 포수 19명과 합류하였다. 김석중이 사람을 보내 일본군을 율계로 오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오후 11시쯤에는 낙동의 이세가와(伊勢川) 군조도 1개 분대(8명)를 이끌고 도착하여 합류하였다. 이들은 동학군의 뒤를 따라 청산을 거쳐 원암으로 갔다.

 

대구의 미다꾸(三宅) 대위가 1개 분대(13명)를 이끌고 와서 여기서 다시 합류하였다. 일본군과 민보군 270명은 보은 북실에 동학군이 주둔한 것을 확인하고 출발하였다. 귀인교(貴人橋, 求仁里의 긴다리)에서 저녁을 먹고 야간공격을 하기로 결정한 후 밤 10시까지 기다렸다. 밤 10시 30분에 이 곳을 출발한 일본군과 민보군은 종곡리 입구 인근에 접근하여 파수를 보던 동학군 4명을 붙잡아 동학군의 동태를 알게 되었다.

 

{소모사실}에 의하면 "오른 쪽을 파수하고 있던 4명의 비도를 덮쳐 잡아 먼저 거괴들의 소재처와 적들의 정세를 물었다. 대답하기를 거괴 최시형은 저녁 전까지 본촌 김소촌가에 있었으나 그 사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그 집에는 차괴 임국호, 정대춘, 이국빈, 손응구가 같이 있었다. 방금 밥을 지어 먹으며 술과 떡을 먹으려 한다. 나머지 무리들도 집에 가득하며 이 마을 남녀들은 모두 다른 마을로 달아나 숨었다"고 하였다.

 

일본군과 민보군은 누하리(樓下里)에 있는 김소촌가를 덮쳐 동학지도부를 잡으려고 포위 사격했으나 일반 동학군 5명만 즉사하고 지도급은 한 사람도 잡을 수 없었다. 불을 질러 시신을 불태우자 인근의 동학군은 총성을 듣고 불길을 보자 곧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일본기록에는 종곡까지 몰래들어가 불을 피우고 있던 동학군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소모사실}에는 좌변 산상에서 포성이 들리더니 총알이 우박을 뿌리듯 하였다고 했으며 달빛아래 둘러보니 그들은 산상에 널려 있고 우리 병사는 골짜기에 있었다. 해시(10시∼11시)부터 전투가 벌어져 급히 위로 공격하였다.

 

종곡은 넓은 골짜기이지만 한 가운데 삼태기처럼 생긴 야산이 들어앉아 있다. 길이 1㎞, 너비 400m 가량의 야산으로 이 곳 사람들은 솥처럼 생겼다하여 가마실이라 하며 안쪽 지형은 높고 양쪽 날개는 둥글게 뻗어내려 마치 양팔을 벌려 둥글게 안고 있는 형태이다. 특히 양쪽으로 밋밋하게 흘러내린 산줄기의 안쪽은 완만한데 비해 바깥쪽은 가 팔아 토성처럼 되어 있다.

 

동학군은 이런 지형을 이용하려고 이 곳에 왔던 것 같다. 지방민들은 처음 전투가 벌어진 곳은 이 가마실 입구였다고 한다. 전투가 몇 시간 계속되자 동학군은 밀리기 시작하더니 날이 밝자 1㎞ 가량 후퇴하여 가마실 끝자락을 벗어나 종곡 뒷산과 우측 다라니 뒷산 일대에 포진하였다. {토비대략}에서는 이 야간 전투에서 3백여 명이 사살되었다고 하나 파수보던 동학군 외에 사살된 사람은 피아간에 없었던 것 같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8, …야습을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오후 6시쯤 종곡에서 10리 남짓 떨어진 귀인교읍에 이르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9, … 오후 10시 30분 이 곳을 출발 미다꾸(三宅) 대위와 상주 한병 240명은 왼쪽 큰길로 행진하고 소관(桑原少尉)은 부하 14명과 이세가와 군조의 1개 분대를 이끌고 오른쪽 산길을 행진하였다.

 

이날 밤은 눈이 많이 내려 추위가 뼈를 쑤셔 걷기에도 곤란하였다. 거의 5리 넘게 행진했을 때 전방에 불길이 오르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지방민을 만나 물어보니 바로 동학도의 짓이라 하였다. 즉각 앞으로 전진하여 종곡 남쪽 고지(종곡에서 약 80m 떨어진 곳)를 점령하였더니 동학도 약 1만 명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각기 몸을 녹이고 있었으며 조금도 방비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이 부근 파랑부랑(바람부리)으로부터 진군해 오는 미다꾸 대위에게 사자를 달려가게 하여 함께 공격하도록 통첩해 놓고 흩어져서 세 번 일제사격을 가해 그들의 정신을 교란케 한 다음 돌입하였다. 그들은 당황하여 마을 밖으로 달아났다.

 

약 1천m를 추격하여 요지를 택해 점령하였다. 이 때가 오전 3시였다. 미다꾸 대위도 와서 회동했다. 잠시 후 그들은 또 몇 번 역습해 왔으므로 마침내 전투를 계속하면서 밤을 새웠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도중이 수히 보은군 북실리에 지하여 야(밤)에 청주병이 습격함을 조하여 사상이 심중하였고"라 하였다. 그리고 {토비대략}에는 "세 갈래로 진군하는데 대위는 본병(민보군) 50명과 일본군 22명을 이끌고 좌측 길로, 소위는 본병 50명과 일본군 16인을 이끌고 우측 길로 들어갔다. 나는 나머지 별포 40명을 이끌고 중로로 들어갔다. 그리고 삼초장(三哨長)에게 50명을 나누어 먼저 가도록 하였다.

 

세 길이 합하는 데서 접응(接應)하기로 약속하였다. 이 부분은 인원수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일본기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해시(밤 11시)에 드디어 일제히 방포하며 삼로에서 진공하였다. … 적도들은 … 동분서주하다가 … 갑자기 포성이 들리자 하늘이 동하고 함성이 들리자 땅이 흔들렸다. 마치 앉아 있던 사람 산(人山)이 서북 모퉁이에서 부출(浮出)하는 것 같더니 팽팽 소리를 내며 머리와 어깨 위로 벌이 지나듯하며 우박이 떨어지는 듯하였다.

 

모든 병사들을 급히 일자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포 한방 쏘고 한 발 나가게 하였다. 전투는 인시(새벽 4시경)에 이르자 적의 포향이 약간 자자들었다. 18일 아침 8시쯤 동학군은 함성을 지르며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외로 엄청난 동학군이 맹렬하게 공격해 오자 민보군들이 두려워 어찌할 줄을 몰랐다. 엄하게 단속하여 중앙으로 전진하라고 독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은 좌우로 나뉘어 가마실 야산에서 종곡과 다라니 쪽으로 전진 배치하여 공격을 저지하면서 전투는 치열하게 벌어졌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9, … 10, 13일(음 18일) 오전 7시 다시 공격하기 위해 약 500m를 전진하여 종곡 부근 고지를 점령하였다. … 그들도 고지를 점령하여 내려다보면서 우리와 맞섰으며 그 기세가 매우 사나웠다. 싸움이 한창 벌어졌을 때 동학도가 우리의 양측으로 나와 포위하는 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앙으로 돌격해와 오만하기가 그지없었다.

 

오전 8시 소관은 그들을 가까이 다가오게 하여 공격하려고 약 200m 전진, 잠시동안 완만한 사격을 하다가 패주를 가장하여 본래 있던 고지로 돌아 왔다. 그러자 그들은 함성을 지르며 돌격해 왔다. 가까운 자는 거의 80m 거리 안에까지 왔다. 그래서 급사격을 가했더니 오전 9시쯤에 이르러 동학도의 제 1선이 조금 취약해졌다. 이 기회를 틈타 아군이 전선에서 돌격을 감행하였다.

 

동학도는 지탱하지 못하고 두 길로 나누어 동북쪽으로 무너져 달아났다. 약 2천m를 추격하여 모두 소탕하였다. 이 때가 오전 10시였다. 적도 전사자 300여 명, 무기 수십 점 노획. 이 18일의 전투상황에 대해 {토비대략}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과는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즉 전투도중에 일본군이 후퇴하려는 것을 자신이 못하게 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18일 … 날이 밝아 보니 적도들은 산상에 늘어서서 겹겹이 둘러싼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일본군 미다꾸(三宅)는 우변 산하에 엎디어 올려다 보며 공격하고 구와하라(桑原)는 좌변 산하에서 올려다 보며 공격하고 있었다. 나는 비어 있는 중로를 조이며 공격하였다. 사시(巳時 10시)경에 적의 공세는 점차 치열했으며 도륙한다고 소리쳤다. 적들은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밟아버리려고 삼키려고 내리 공격하여 4∼50보에 이른 자가 수십번이었다. 곧바로 50명씩 3개대로 나누어 의병(疑兵)을 만들어 풍점 ,장내, 장암 등 요충에 연기를 피우 방포하여 돌아가는 길을 막도록 했으며 또한 10인이 적도 하나에게 몰아 쏘게 하니 적은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나 적은 비록 시체를 밟고 고전하지만 연달아 포를 쏘고 있다.

 

이처럼 위급하자 일병은 짐을 챙겨 타적치중( 賊輜重) 먼저 피하려 한다고 하자 곧 결박케 하고 왈 너희들 30여인 때문에 우리 병사 2백여 인이 죽으란 말인가. … 일본 장교는 이 말을 듣고 급히 정지하였다. 이때 적들은 대담하게도 거칠게 고함을 지르며 충돌해 오니 마치 바닷물이 용솟음치고 조수가 밀려오듯 하였다.

 

아군은 밤부터 정오가 되도록 물 한 모금 먹지 못해 기력이 점점 떨어져 모두 겁을 먹고 있었다. 드디어 검을 빼어들고 크게 외치기를 …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는 자는 참하리라 하자 모든 군졸들은 분발 전진하여 죽기로 직분을 다했다. 그러나 적의 포위가 점차 핍박하니 결국 물리칠 길이 없었다. 바로 일본장교를 불러 왈 공들은 많은 싸움에 종군했으니 좋은 계산이 있을 것이라 이 상황은 힘으로써 격파할 수 없으니 계책이 필요하다. 이길 계책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가.

 

일본 장교 왈 나는 싸움터에 많이 종군했으나 이처럼 적이 끈질긴 것은 보지 못하였다. … 공은 계책을 말하니 대위 소위 우리 병사를 각 15명씩 모을 수 있는가 하니 승낙하였다. 그래서 또한 별포 15일씩을 분별하여 45인을 모아 몰래 언덕으로 내려가 군복을 벗고 흰옷을 입히고 총을 갖고 산자락을 돌아갔다. 적은 위에서 바라보고 흰옷을 입었으므로 자기 무리로 알았다. 산꼭대기 가까이에 이르러 45인의 포군은 일제히 산상의 적을 총을 쏘아대니 소리를 내며 쓰러져 낭떨어지에 별 떨어지듯, 깎아지른 골자기에 잎이 끝으르 듯 하는 자가 수 십 인이었다.

 

산하의 아병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탄환을 무릅쓰고 치고 오르니 일병도 역시 검을 휘두르며 위로 올라갔다. 적은 드디어 크게 패해 … 마구 쏜 총에 죽은 자가 2천 2백여 인이요 야간 전투에서 죽은 자도 3백 93인이었고 우마 60여 두를 노획하였다. 기록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이를 종합해 보면 전투의지와 전술면에서 동학군은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다만 무기체계가 뒤떨어지고 훈련되지 않은 농민들이라는 점에서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가 되어 힘없이 물러서야 했는가는 숙제로 남는다.

 

일본군은 38명이고 민보군은 230명에 지나지 않은 소수병력이다. 1만여 명의 동학군은 자신감을 가지고 18일 아침부터 거세게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200m나 후퇴하였다. {도비대략}에 의하면 일본군은 철수할 기미까지 보였다고 한다. 좀 더 밀어붙였다면 승리를 거머쥘 전투를 포기한 느낌이 들어 아쉽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화약과 총알이 떨어져 싸울 수 없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았다면 퇴색이 짙은 일본군과 민보군에게 밀릴 이유가 없었다.

 

12월 24일 금왕읍 되자니(道晴里)의 최후 전투에서도 몇 시간 싸우다 동학군이 패주한 일이 있는데 그 이유는 탄환이 떨어졌기 때문이라 한다. 즉 공격하던 전투원이 휘대하였던 하약과 총알이 떨어져 머뭇거리자 이 틈을 타서 일본군과 민보군은 맹렬히 공격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전사한 동학군은 대략 일본기록 대로 3백 명 정도라고 여겨진다.

 

{소모사실}에는 395명으로 기록하였고, {토비대략}에는 야간전투에서 393명, 주간전투에서 2, 200명이 사살되었다고 한다. 과장해도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300명의 전사자도 80m까지 다가갔던 동학군이 탄약이 떨어져 등을 돌리고 후퇴하자 역공을 당하면서 후방 진영이 혼란해지자 많은 이가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소모사실}에 기록된 노획 물품을 보면 총 15자루, 환도 9자루, 활 1장, 창 42자루였다. 총 15자루는 공격하다가 또는 후퇴하다가 전사하여 벌어진 것으로 보이며 대부분의 전사자들은 무장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이들이라고 여겨진다. 2천 6백 명 정도가 전사하였다면 노획된 총이 수백 자루가 되었을 것이다.

 

6. 결 론 패전한 동학군 대부분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수백 명 정도만 신사와 손병희를 따라 괴산 지역을 거쳐 음성군 금왕읍 되자니로 갔다. 이 되자니는 충의도소가 있던 황산에서 불과 20리 정도 동남쪽에 있다. 말하자면 이 곳에서 기포하여 공주, 원평까지 가서 싸우다가 한 달만에 제자리로 돌아 온 셈이다. {천도교서}에 의하면 "보은 북실에 지하사 관군으로 더불어 교전하시고 청주 화양동에 지하시었다가 익일에 충주 외서촌(外西村) 되자니(都孱里)에 지하사 … "라 하였다. 이 곳으로 온 동학군 중에는 많은 지도자급 인사가 있었다.

 

{시천교역사}에는 천주병과 일본군으로부터 무극장대의 전후에서 협공을 받아 도중들은 충주 사창(社倉)으로 후퇴하였는데 이 곳에 모인 인사 중에는 "해월 선생을 비롯하여 강시원, 손병희, 김연국, 손천민, 조재벽(趙在壁), 이관영(李觀永), 박규석(朴奎錫), 김연순(金演順), 이춘경(李春敬), 이국빈(李國彬), 손병흠(孫秉欽), 정봉학(鄭鳳學) 등이 있었다"고 하였다. 1894년 12월 24일(양력 1895년 1월 30일)은 호서 동학군이 최후로 치룬 전투가 되었다.

 

도청리에 사는 정조헌(鄭祖憲= 1907년 典校)은 당시 동학군은 남쪽에서 올라와 3일간 체류하면서 식량과 의복을 조달했다 하며 이 곳 주민이 청주병영에 연락하자 관군과 일본군이 출동하여 무극방면에서 협공해 왔다하며 지세가 불리한 동학군은 건너편 능선으로 이동하여 응전했다 한다. 한나절 전투가 벌어졌으나 동학군은 끝내 탄환이 떨어져 패주했다고 하였다. 공주 공격전에서 생사를 같이한 것은 손화중도 아니요 김개남도 아니다. 바로 호서 동학군을 이끌었던 손병희 통령이었다.

 

10월 6일 황산도소를 떠나 12일에 청산에 도착한 손병희는 해월 선생으로부터 통령의 임직을 받고 논산으로 가서 전봉준 장군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일본침략군을 물리치기 위해 10월 23일부터 11월 10일까지 이인과 우금티 공격전에서 호남동학군과 피를 같이 흘렸다. 그리고 공주에서 실패한 후 원평까지 같이 내려와 최후의 혈투를 벌인 것도 호서 동학군이었다.

 

전봉준 장군과 손병희 통령은 동학의 신념체계나 일본 침략세력을 물리쳐 보국안민을 이루겠다는 생각에는 조금도 틈새가 없었다. 삼례와 왕궁에서 8월에 잠시 일났던 세칭 남북접대립은 9월 재기포 이후 말끔히 청산되었다. 그리고 해월 선생도 용산장 전투부터 북실전투, 되자니 전투에 이르기까지 직접 전투에 참가했다. 해월 선생의 평가도 다시 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전봉준 장군과 김개남, 손화중을 비롯한 호남 동학군 지도자들은 관에 체포되어 재기의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호서 동학군 지도자들은 감싸주는 도인들에 의해 살아남아 1896년부터 동학 재건에 나설 수 있었다. 그만큼 동학의 지도자들은 튼튼한 기반을 갖고 있엇기 때문에 되살아 날 수 있었다..   (교사교리연구 제 9호 - 포덕 141년 12월)

 

 

황간 (黃澗)

 

 

 

 

 

현재의 위치와 범위

읍치 위치 : 충청북도 황간면 신흥리고을 범위 :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상촌면(황간면(), 용산면()-백자전리·청화리, 추풍령면()-계룡리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광천리·덕천리·상금리·신암리·예지리·태화리, 대항면()-덕전동·복전동·향천동

 

지도의 지명찾아보기

한자 한자소리 불리던이름 현재위치
駕鶴樓 가학루 - ()남성리
客舍 객사 - ()남성리
乾川寺 건천사 - ()어촌리
掛榜嶺 괘방령 - ()어촌리
南面 남면 -
南面倉 남면창 - ()태화리
冷泉 냉천 참샘 ()원촌리
訥伊項烽臺 눌이항봉대 누리산·느릅산 ()계룡리
梅下面 매하면 -
白華山 백화산 - ()우매리
三道峯 삼도봉 - ()물한리
揷峙 삽치 삽재 ()서송원리
上村面 상촌면 -
西面 서면 -
石橋山 석교산 - ()흥덕리
石川橋 석천교 - -
所伊山烽臺 소이산봉대 (봉대산) ()광평리
松溪書院 송계서원 - ()수원리
松峴 송현 솔티·소재 ()원촌리
衙舍 아사 - ()남성리
吾谷面 오곡면 -
龍淵臺 용연대 - ()원촌리
牛峙 우치 솔티 ()원촌리
月留峯 월류봉 - ()원촌리
邑內面 읍내면 -
臨淸樓 임청루 - ()남성리
長川橋 장천교 - -
鼎岩1) 주암 - ()원촌리
- ()남성리
秋風嶺 추풍령 - ()추풍령리
寒泉書院 한천서원 - ()원촌리
鄕校 향교 - ()남성리
華岳樓 화악루 - ()남성리
黃岳山 황악산 - ()궁촌리

면의 상세 정보

南面(남면) : 김천시 봉산면 광천리·덕천리·상금리·신암리·예지리·태화리, 대항면 덕전동·복전동·향천동

한자 한자소리 불리던이름 현재위치
可幕里 가막리 가매기 ()태화리
可幕柳器店里 가막유기점리 가매기 ()태화리
可城里 가성리 가재 ()신암리
可店里 가점리 - -
高道巖里 고도암리 고대미 ()신암리
坤川里 곤천리 - ()광천리
舊藍田 구남전 - ()덕천리
金化沙器店里 금화사기점리 - ()상금리
金化店里 금화점리 - ()상금리
都山里 도산리 - ()광천리
敦睦里 돈목리 돌목 ()광천리
馬甘里 마감리 - -
馬田里 마전리 - ()복전리
方下峙里 방하치리 방아재 ()향천동
上里 상리 - ()상금리
細松里 세송리 - ()덕전리
松羅谷里 송라곡리 - ()광천리
枾木里 시목리 감나무골 ()광천리
新藍田 신남전 - ()덕천리
新村里 신촌리 새삼골 ()신암리
汝里洞里 여리동리 - -
龍背里 용배리 - ()덕천리
立石里 입석리 선돌 ()예지리
井浦里 정포리 샘재 ()덕천리
中里 중리 - ()상금리
太平里 태평리 - ()태화리
下里 하리 - ()태화리

梅下面(매하면) : 영동군 매곡면 강진리·공수리·돈대리·수원리·어촌리·유전리, 상촌면 임산리

한자 한자소리 불리던이름 현재위치
江津洞里 강진동리 - ()강진리
坤德里 곤덕리 건덕리 ()유전리
功須洞里 공수동리 공숫골 ()공수리
官基里 관기리 관터 ()임산리
官基店里 관기점리 관터 ()임산리
橋洞里 교동리 다릿골 ()돈대리
九萬里 구만리 - -
敦大里 돈대리 돈대 ()돈대리
銅店里 동점리 퉁점 ()강진리
暮煙臺里 모연대리 모른대 ()수원리
物如大里 물여대리 물여대 ()강진리
沙也洞里 사야동리 새별 ()공수리
桑林里 상림리 - ()돈대리
楊州里 양주리 양주골 ()임산리
漁村里 어촌리 오두니 ()어촌리
梧里洞里 오리동리 오리골 ()공수리
院村里 원촌리 서원마 ()수원리
林山里 임산리 - ()임산리
見龍里 현룡리 - ()돈대리

上村面(상촌면) : 영동군 상촌면 궁촌리·대해리·둔전리·물한리·상도대리·유곡리·하도대리·흥덕리

한자 한자소리 불리던이름 현재위치
道大里 도대리 도대 ()하도대리
物閑里 물한리 물한이 ()물한리
盤店里 반점리 - ()상도대리
白如大里 백여대리 - -
上弓村里 상궁촌리 웃활골 ()궁촌리
石峴里 석현리 돌고개 ()대해리
宣化峙里 선화치리 선화티 ()상도대리
雪五味里 설오미리 설보름 ()흥덕리
柳谷里 유곡리 버드실 ()유곡리
二老里 이로리 - ()하도대리
竹谷里 죽곡리 대실 ()유곡리
車踰洞店里 차유동점리 수레너미 ()상도대리
土項里 토항리 흙목·흘목 ()대해리
下弓村里 하궁촌리 아래활골 ()궁촌리

西面(서면) : 영동군 용산면 백자전리·청화리, 황간면 금계리·노근리·서송원리·용암리·우천리·회포리

한자 한자소리 불리던이름 현재위치
曲巖里2) 곡암리 누룩바우 ()용암리
金雞里 금계리 진개 ()금계리
老隱里 노은리 노근 ()노근리
唐底里 당저리 당저 ()용암리
陶洞里 도동리 도골·독골 ()우천리
木花谷里 목화곡리 목화실 ()노근리
栢子洞里 백자동리 잣밭골 ()백자전리
西松院里 서송원리 - ()서송원리
新儀店里 신의점리 - ()서송원리
安大里 안대리 안대 ()노근리
如洞里 여동리 - -
牛川里 우천리 쇠내 ()우천리
竹田里 죽전리 - ()금계리
靑化里 청화리 - ()청화리
回浦里 회포리 구미·후미 ()회포리

梧谷面(오곡면·오리실면) : 영동군 매곡면 광평리·노천리·옥전리·유전리·장척리, 추풍령면 계룡리

한자 한자소리 불리던이름 현재위치
巨皮洞里 거피동리 - -
廣坪里 광평리 너분들 ()광평리
內洞里 내동리 안골 ()노천리
德谷里 덕곡리 - ()계룡리
寶賢里 보현리 - -
上赤良里 상적량리 - -
石亭子里 석정자리 - -
安寧里 안녕리 안니이 ()옥전리
五里谷里 오리곡리 오리실 ()유전리
玉田里 옥전리 구삿 ()옥전리
泥村里 이촌리 - ()장척리
藏尺洞里 장척동리 장자울 ()장척리
中赤良里 중적량리 - -
檜谷里 회곡리 저실 ()계룡리

邑內面(읍내면) :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남성리·마산리·소계리·신흥리·우매리·원촌리

한자 한자소리 불리던이름 현재위치
槐村里 괴촌리 - -
校村里 교촌리 향교골 ()남성리
南門里 남문리 - -
南城里 남성리 - ()남성리
馬山里 마산리 말미 ()마산리
栢子洞里 백자동리 - -
上東部里 상동부리 - ()신흥리
上西部里 상서부리 - -
邵溪里 소계리 - ()소계리
松溪里 송계리 - -
瑟峙里 슬치리 슬실티 ()우매리
新興里 신흥리 - ()신흥리
艾橋里 애교리 쑥다리 ()소계리
完亭里 완정리 - ()우매리
牛馬里 우마리 우매 ()우매리
牛峙里 우치리 소재·솔틔 ()원촌리
院村里 원촌리 한천 ()원촌리
土閑里 토한리 - -
通川里 통천리 - ()남성리
下東部里 하동부리 - ()신흥리
下西部里 하서부리 - ()신흥리

 

각주

1) 를 잘못 옮겨 쓴 것이다.

2) 을 잘못 옮겨 쓴 것이다.

 

황간 [黃澗] (고지도를 통해 본 충청지명연구 2, 2012. 11. 30., 국립중앙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