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국왕 궁예의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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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태봉국 (궁예)

2013. 10. 19.

태봉국왕 궁예의 흔적을 찾아서

 

이번 기행에서는 우리 역사에서 폭군으로 치자면 1,2위를 다투던 사람, 아니 가장 운이 없었던 사람으로 1,2위를 다투는 사람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그 사람은 바로 후고구려, 마진, 태봉의 국왕이었던 궁예이다.

 

 

미치광이 폭군, 스스로를 미륵이라고 속여 혹세무민해 정권을 잡았지만 어버이의 나라 신라를 배반하고 자기 처자식을 무참히 죽이고 결국 부하 왕건에 의해 축출되었다가 농민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궁예라는 이름을 부정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고토인 만주땅을 회복하기 위해 철원(정사가 아닌 역사 해석에서는 철원을 지금의 중국 산해관 인근의 평천지역이라고 하며)에 도읍해 잃어버린 우리 영토를 회복해 부국강병을 꿈꿨던 백성들의 추앙을 받던 대군주라는 평가는 아직 소수의 의견일 뿐이다.

 

과연 왜 궁예라는 인물은 이런 극단적인 이분법의 평가를 받는 것일까? 과연 어떤 모습이 실재하였던 궁예라는 인물의 진짜 모습일까? 그리고 궁예라는 인물을 되도록 올곧게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는 기행으로 가져가 보고자 한다.

 

오늘 기행의 코스는

 

궁예에 대한 전설이 곳곳에 스며나는 철원과 포천 일대이다. 지장산(보개산) 명성산 일대에 중요 궁예에 관한 유적과 금학산 한탄강 등의 포천군 철원군 일대가 될 것이다.

 

 

궁예에 대한 각박한 평가

 

삼국사기 인물열전 궁예조

 

일단 일국의 왕이었던 사람을 열전에 기록하고 있는 것부터가 궁예에 대한 승자의 폄훼가 얼마나 개입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궁예는 신라인이니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 47대 헌안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자는 궁예가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그는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 났는데, 그 때 지붕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있어서 위로는 하늘에 닿았었다. 일관이 아뢰기를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에 났고, 나면서 이가 있으며 또한 광염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합니다. 기르지 마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중사로 하여금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다락 밑으로 던졌는데, 젖 먹이던 종이 그 아이를 몰래 받아 들다가 잘못하여 손으로 눈을 찔렀다. 이리하여 그는 한 쪽 눈이 멀었다. 종은 아이를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양육하였다.

 

그의 나이 10여 세가 되어도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나는 이를 차마 보지 못하여 오늘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러나 너의 미친 행동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남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화를 면치 못 할 것이니 이를 어찌 하랴?"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내가 이곳을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곧 세달사로 갔다. 지금의 흥교사가 바로 그 절이다. 그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이라고 불렀다. 

<삼국사기 열전 궁예열전 중에서>

 

고약하고 철없는 장난이나 일삼으며 자기를 살려낸 인물마저도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마치 곁에서 지켜본 것처럼 어린 시절부터 악담을 늘어놓는 것이 대략적으로 승자들이 패자의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인 것 같다. 전형적으로 궁예의 이야기에서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드러난다.

 

지금은 사찰터만 폐허로 남아 있는 삼국시대 세달사 고려때 흥교사가 있던 곳으로 전해지는 곳은 영월군 흥월리의 흥교지역이다. 이곳이 삼국사기에서 이야기하는 궁예가 출가하여 생활했던 신라 때 세달사가 있던 자리이며 고려시대에도 흥교사란 이름의 사찰은 이 지역에서 대가람에 속했나 보다.  

 

 

사람들은 보통 흥교분교가 있던 자리가 흥교사지라고 보고 있으며 흥교분교에서 나온 부도를 통해 이곳이 사찰이었음을 안다고 한다.

 

여하튼 신라왕의 후예로써 비록 후궁의 자식이지만 왕손으로서 대접받으며 살 수 있을 것 같던 궁예는 비극적 운명을 예고하는 점쟁이, 유모 등에 의해서 실명을 하고 버림을 받으며 점점 흉포해 지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원래 흉폭한 성격 때문에 운명이 비극적이 되는 건지 비극적 운명이라는 굴레 때문에 흉포한 성격이 되는 것인지 살짝 헛갈려 주시면서 말이다.

 

여하튼 27세 정도가 된 나이에 세달사에서 승려 생활을 하던 궁예는 세달사를 떠난다.

 

신라 말기에 정치가 거칠어지고 백성들이 분산되어 왕기의 밖에 있는 주현 중에서 신라 조정을 반대하고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다. 그리고 도처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던가 개미같이 모여 들었다. 선종은 이를 보고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진성왕 재위 5년, 대순 2년 신해에 그는 죽주에 있는 반란군의 괴수 기훤의 휘하에서 전투를 벌여 많은 사람들을 항복시킨다. 선종은 건녕 원년에 명주로 들어가 3천5백 명을 모집하여, 이를 14개 대오로 편성하였다. 그는 김 대검, 모 흔, 장 귀평, 장 일 등을 사상[사상은 부장을 말한다.]으로 삼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

 

이에 따라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 속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저족, 생천, 부약, 금성, 철원 등의 성을 쳐부수니 군사의 성세가 대단하였으며, 패서에 있는 적들이 선종에게 와서 항복하는 자가 많았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창건하고 스스로 임금이라고 일컬을 만하다고 생각하여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 삼국유사 열전 궁예조 중에서

 


신라시대 명주는 하서주 즉 지금의 강릉과 동해 삼척 울진에 이르는 지역을 일컫는 것이다. 여하튼 명주에 들어가 그 지역의 세력을 하나로 규합하여 장군에 지위에 오르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니 왕노릇까지 하고 싶어졌다고 쓰고 있다. 그렇게 나라를 세우고 왕건이 궁예에게 와 신하가 되기로 하니 그를 태수로 임명한다.

 

 

 

왕건의 정치 군사적 멘토로 전해져 내려오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 도선국사 그는 왕건이 왕재라는 것을 알아보고 그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새 왕조를 세우도록 돕는 도우미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우리나라 풍수지리 사상의 토대를 닦은 인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도선국사가 왕건에게 전수해 주었다는 도선비기는 우리나라 비기에 관한 전설의 원류라 할 것이다.

 

이런 도선국사가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려 하자 기왕이면 금학산 자락 즉 위 사진의 지역에 도성을 정하라고 하였으나 궁예는 말을 듣지 않고 지금의 태봉도성지에 있는 고암산을 주산으로 해 도읍을 정하는 바람에 풍수지리학적으로 꼬여 왕조의 역사가 단명하고 말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산이 바로 금학산이다.

 

여하튼 그리고 나서 궁예는 왕이 되고 왕건은 부대의 선봉장 역할을 하면서 연전연승을 하면서 송악 및 한강 이북지역을 차지하며 세력을 넓혀 가고 양길세력을 평정하고 당시 세력이 가장 컸던 견훤이 세운 후백제와 세력 다툼을 벌이며 당시 금성 지금의 나주 지역의 해상교역권을 두고 한판의 결전이 이루어지고 결국 궁예는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금성을 빼앗은 후 왕건은 지역 이름을 금성의 이음 동의어인 나주로 바꾼다.

 

나주를 빼앗긴 후백제는 급격하게 세력이 쇠잔되게 되고 결국 궁예를 내치고 고려의 국왕이 된 왕건에게 대구 공산성의 대승리에도 불구하고 결국 후삼국 통일의 패권을 넘겨주게 되는 결정적 분수령이 된다. 이 승리를 왕건이 아니라 궁예가 직접 참전하여 승리를 이끌어냈다는 것을 밝히는 선각대사비의 명문이 최근 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되어 궁예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어 주고 있다.

 

강진 무위사의 선각대사비

 

선각대사는 후삼국 시대에 명성이 높았던 형미를 말한다. 궁예는 이름이 높은 형미를 측근에 두면서 역시 승려 출신이며 미륵의 현신임을 백성들에게 인지시키기 위해 노력했는데 형미가 왕건의 편으로 돌아선 후 그를 내쳤다고 한다.

 

선각대사비에는 대왕이 금성을 쳐서 정벌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대왕이 당연히 태조 왕건을 이야기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비문을 정밀 분석한 결과 비문의 대왕은 왕건이 아닌 궁예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리고 궁예가 선택한 것이 도읍지를 철원으로 하고 국호를 마진으로 하였다가 다시 태봉국으로 고치며 대단위 민간인들을 이주시키는 작업이었다. 아마도 무리하게 천도를 하려는 이 때쯤부터 천도에 반대하는 세력, 백성, 군사들 마음에는 궁예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천복 원년 신유에 선종이 왕을 자칭하고 사람들에게 "이전에 신라가 당 나라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기 때문에, 평양의 옛 서울이 황폐하여 풀만 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고 말하였다.

 

아마도 자기가 태어났을 때 신라에서 버림받은 일이 원망스러웠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언젠가 남쪽 지방을 다니다가 흥주 부석사에 이르러 벽화에 있는 신라왕의 화상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천우 원년 갑자에 나라를 창건하여 국호를 마진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라 하였다. 이 때 처음으로 광평성을 설치하여 광치나[지금의 시중], 서사[지금의 시랑], 외서[지금의 원외랑] 등의 관원을 두었으며, 또한 병부, 대룡부[창부를 이른 것], 수춘부[지금의 예부], 봉빈부[지금의 예빈성], 의형대[지금의 형부], 납화부[지금의 대부시], 조위부[지금의 삼사], 내봉성[지금의 도성], 금서성[지금의 비서성], 남상단[지금의 장작감], 수단[지금의 수부], 원봉성[지금의 한림원], 비룡성[지금의 태복시], 물장성[지금의 소부감] 등을 설치하였다.

 

또한 사대[모든 외국어의 학습을 맡은 기관], 식화부[과수 재배를 맡은 기관], 장선부[성황 수리를 맡은 기관], 주도성[기물 제조를 맡은 기관] 등을 설치하고 또한 정광, 원보, 대상, 원윤, 좌윤, 정조, 보윤, 군윤, 중윤 등의 직품을 설치하였다. 가을 7월에 청주의 민가 1천 호를 철원성에 옮겨 살게하고, 이를 서울로 정하였다. 상주 등 30여 주를 쳐서 빼앗았다. 공주 장군 홍기가 항복해왔다. 
- 삼국유사 열전 궁예조 중에서 
 

멸망하는 것이 당연했던 신라 왕의 후손으로서 애초에 궁예는 고려 같은 새왕국을 세울 자격을 상실한 인물로 선 그어지는 결정적 사건이 아마도 자기 조상의 화상에 칼을 그었다는 일화일 것이다.

 

자기 조상에마저 칼을 들이댈 수 있는 품성, 그런 패륜적 태도를 강조함으로써 왕건을 상대적으로 정당화하는 논리를 우리는 경계해야만 했지 않았을까?

 

신라와 백제 등으로 세력을 뻗어나가고 한강 이북지역의 패자로 등극해 가는 과정 앞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참 의뭉스럽기 그지없다.

 

 

궁예는 정말 비참하게 죽었을까?

궁예는 뜻을 이루자 다시 철원으로 복귀했다. 그러면서 청주지역의 1000가구를 철원 땅으로 이주시킨다. 이것은 궁예가 송악세력 말고도 새로운 지지세력을 확보하려는 뜻이었다.

 

남으로 남으로 세력을 키워간 궁예로서는 ‘고구려 세력’만으로는 천하를 경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동안 궁예를 도왔던 송악세력, 즉 고구려 부흥세력은 불안에 떤다. 게다가 도읍지 건설에 엄청난 공력을 쏟았고, 때마침 흉년이 들면서 민심이 돌아섰다.

 

 

불승들도 관심법(觀心法)을 내세워 신하들과 심지어 부인, 아들까지 죽인 궁예를 외면했다. 결국 궁예는 918년 보수 호족들에 의해 축출된다. 그의 최후는 너무도 비참하다.

 

“궁예는 암곡(巖谷)으로 도망하여 이틀 밤을 머물렀는데, 굶주림이 심하여 보리이삭을 몰래 끓여 먹다가 부양(평강)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려사)

 

과연 그럴까. 물론 역사서는 한결같이 궁예를 역사의 패륜아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철원지역에서 지금도 채록되는 구비전설은 궁예왕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로 전한다

 

여하튼 궁예는 도성을 빼앗기고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처럼 곧바로 왕건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궁예는 철원 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그 인근에서 잔존세력을 활용해 저항을 한다.

 

지장산, 보개산 또는 보가산이라고 하는 산의 지장봉 일대에는 궁예가 왕건에 맞서 항전했던 흔적으로 추정되는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궁예는 도성을 잃고 보개산성, 명성산성, 운악산성 등을 옮겨 다니며 항전을 벌인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궁예가 나뭇가지를 한번 휘두르자 성이 지어졌다는 보개산성의 석축 ㅋㅋ  

 

명성산

 

경기도 포천시와 강원도 철원군을 잇는 명성산(鳴聲山) 자락에 위치한 전통사찰이다. 궁예가 자신의 부하였던 고려 태조 왕건에게 패한 후 이곳으로 쫓겨와 크게 울었다고 하여 이름 붙은 명성산은 산정호수와 어우러진 험준한 암벽, 억새밭이 절경을 이룬다.

 

깎아지른 암벽을 배경으로 자인사가 서 있으며, 다소 왜소한 대웅전에 비해 큰 규모의 석불이 있다. 그 외에 관세음보살상과 여러 개의 석탑이 오밀조밀하게 서 있고, 경내에는 맑고 깨끗한 샘물이 솟아난다.

 

자인사 우측에 난 길로 접어들어 넓은 계곡을 따라가면 절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며, 암릉에 올라서서 북동쪽으로 펼쳐지는 억새풀 가득한 평원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장관이다.

 

주변에 명성산, 산정호수, 등룡폭포, 삼부연폭포, 광덕산, 백운동폭포, 순담계곡, 임진강, 화적연, 금수정지, 재인폭포, 국망봉계곡 등의 관광지가 있다.

 

명성산 자인사

 

왜 하늘은 승려인 궁예의 기도가 아닌 태조 왕건의 기도를 받아들인 걸까? 명성산 자인사는 명성산에서 크게 통곡하며 울었다는 궁예의 아픔과 궁예를 배반하고 나라를 세운 왕건이 자신을 돌아보며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는 절이다.  

 

자인사

 

자인사 잿터바위

 

잿터바위

서기 905년 고려의 태조 왕건이 태봉국 궁예왕의 수하부장으로 있을 때 궁예왕의 명으로 후백제의 금성 지금의 나주를 공격하러 가기 전에 이 바위에다 제물을 올리고 산제를 지낸 후 현몽을 받아 승전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이 바위는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국가의 태평과 국민의 안녕을 기원했던 바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곳을 재를 올린 터 잿터절, 잿터바위라 하며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소원을 성취하게 되어 이 바위를 중심으로 절을 지어 현재까지 중생을 교화하여 오고 있다.

 

음양오행상으로 보았을 때, 이 바위는 계단에 오르면서 보시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뱀의 모양으로서 반대편의 개구리 모양의 바위를 낚아채기 직전의 형상이라 하여 형국풍수로 이곳이 명당 명혈임을 증명하고 있는 지석의 증표라고 한다.

 

과연 나주를 손에 넣어 후백제를 잘나가던 견훤을 제압할 수 있었던 공은 온전히 왕건에게만 있는 것일까? 사실 승산없는 싸움에 궁예는 승리를 독려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어 결정적인 패권을 움켜쥐는 기회를 잔뜩 노리고 만들어낸 것은 왕건이 아니라 궁예는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는 유적지인 것 같다.

 

여하튼 자인사란 절도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풍수지리적으로 길지이자 성지 비슷한 이 잿터바위를 중심으로 왕건이 즉위 전 즉위 후 자주 드나들면서 생긴 절이 바로 자인사인 것 같다.

 

명성산 천년수

 

명성산 정상 궁예 바위

궁예가 앉아 군사들의 행동을 내려다 보며 군사 지휘를 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궁예바위 

 

이곳에서는 명성산으로 들어오는 왕건군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신기하게 딱 한 사람 정도가 좌정하여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게 만들어진 바위의 움푹패인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명성산은 가을의 억새밭으로 매우 유명한 관광지이고 포천지역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억새군락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명성산이 울음소리산 즉 궁예가 처연하기만 한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자신이 세운 나라를 고스란히 왕건에게 빼앗기게 된 처지를 한탄하며 한없이 크게 울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산임을 우리는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궁예왕굴 추정 굴

궁예는 왕건에게 패퇴하여 물러난 후 명성산에 들어와 200여명이 머물 수 있는 토굴 안에서 머물렀다고 하는데 최근 궁예왕굴이라 추정하는 굴 하나가 명성산에서 발견되었다.

 

운악산 궁예성터

 

면경대

궁예는 운악산으로 넘어와 성을 쌓고 약 반년간이나 왕건에 맞서 끝까지 항전을 한다.

 

 

 

 

운악산 홍폭에서의 최후?

함께 꿈꾸지 않는 자기 혼자만의 꿈은 망상이 되어버리고 결국 공감대를 넓히지 못한 궁예의 꿈은 버림받게 된다.

 

 

 

 

왜 궁예는 왕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까?

자기 스스로도 뛰어난 전술과 전투 능력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되는 궁예는 왜 왕건을 자신의 오른팔로 묶어두려 했을까?

 

처음에 인물됨을 보아 왕재라고 판단되고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다면 죽여버리거나 무관 말직을 하며 선봉대장 역할이나 하게 했으면 좋았을 것을 말이다.

 

궁예에게는 뛰어난 모사도 있었을 테고 백성의 신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직접 군사를 이끌며 태봉국을 번성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왕건에게 힘을 실어주는 행위를 계속해 결국 자기 발등을 찍은 것은 궁예 자신이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ㅋㅋ

 

우리 사람들은 역시 궁예하면 탤런트 김영철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더 강한 카리스마 있는 배우가 나오기 전까지는 ㅋㅋ

 

여하튼 승자의 기록인 역사기록 특히 삼국사기의 김부식의 기록은 태조를 한껏 드높이고 궁예의 치세를 견디기 어려운 폭정으로 묘사하기에 급급하다. 그리고 왕을 폐위하고 새왕을 세우는 쿠테타의 장면에서도 모든 흉은 신하들에게 넘기고 끝까지 충성을 다하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충신들의 추대를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그 정통성과 정당성을 애써 제시한다.

 

송 함홍 등이 서로 말했다. "지금 주상이 이렇게 포학하고 난잡하니 우리들이 만일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젓갈이 될 뿐 아니라 파진찬도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다." 그들은 이 때문에 거짓말을 지어 보고하였다. 왕이 흉포한 일을 제멋대로 하니 신하들이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해 여름 6월에 장군 홍술, 백옥, 삼능산, 복사귀는 바로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젊은 시절의 이름이었는데, 이 네 사람이 은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마음대로 형벌을 남용하여, 아내와 아들을 죽이고, 신하들을 살육하며,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혼매한 임금을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우는 것이 천하의 큰 의리이니, 공이 탕왕과 무왕의 일을 실행할 것을 바란다"고 하였다. 태조가 얼굴빛을 바꾸며 거절하여 말하기를 "나는 자신이 충성스럽고 순직한 것으로 자처하여 왔으므로 임금이 비록 포악하다고 하지만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대저 신하로서 임금의 자리에 바꾸어 앉는 것을 혁명이라 한다. 나는 실로 덕이 적은 데 감히 은탕과 주 무왕의 일을 본받겠는가?"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열전 궁예조 중에서

 

 

경기도 안성 칠장사의 건물 벽면에 그려진 궁예의 일생을 다룬 그림

칠장사는 궁예와 인연이 깊은 절로서 이렇게 벽면에 여러 장의 그림을 통해 미륵부처를 자처하던 궁예의 일생을 그림으로 새겨놓았다.

칠장사는 궁예와의 인연뿐만 아니라 어사 박문수, 임꺽정 이야기도 만날 수 있는 좋은 현장체험학습장인 것 같다.

국사암의 석조 여래 입상 삼존불

흔히 궁예 미륵이라고 칭해지며 궁예를 존중하던 민중의 미륵신앙에 의해 궁예 대왕을 생각하며 기도하며 기리던 부처라 하여 궁예 미륵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으로 보아 당시 백성들이 궁예를 흉포한 폭군으로만 인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마지막으로 분명히 궁예와 태봉국과 관련한 유적이면서도 지금은 접근하기도 힘든 태봉도성지로 일컬어지는 군사분계선 안의 지형에 대해 이야기한다. 태봉국도성으로 이미 역사스페셜에서 소개된 성은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 있으며 별도의 여행 코스가 운행되고 있으므로 간략히 소개만 하고 넘어가려 한다.

 

지금은 민간인 통제선 안에 들어가야 볼 수 있으므로 고석정에 있는 철의삼각지대승전기념관에서 출발하는 통제구역 안의 관광 노선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지역이므로 잘 알아보고 들어가서 보기를 바란다.

 

현 철원평화전망대나 월정리역에 있는 철의삼각 전망대에서 보면 태봉국도성지로 알려진 성터가 정확히 남방 한계선과 북방 한계선 군사 분계선을 중심으로 대략 반반으로 나뉘어져 있어 역사의 아이러니함을 일으키게 한다. 남북이 통일되어야 하는 이유 하나, 즉 남북이 하루빨리 통일되어 태봉도성지를 발굴하고 다시 복원할 수 있게 되는 날이 되어야 저 DMZ는 전쟁과 분단의 상징에서 평화의 상징이 될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태봉국도성 석등

 

궁예는 역사 기록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망쪼가 들었던 폐주, 비록 야심은 있었지만 왕재가 아니었으며 결국 제 분을 못이겨 제 조상과 제 핏줄을 부정하고 스스로 부처를 자처하며 미쳐 돌아가며 사람을 죽이고 패악질을 하다 보리 이삭을 훔쳐 먹다가 맞아 죽을 정도로 버림받은 군주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재로 추앙받던 왕건을 휘하 장수로 부리며 무엇보다 미륵에 기대어 전화를 피하고 새롭고 힘있는 왕이 들어서서 백성을 자식처럼 보살피고 나라를 부국강성하게 하여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고 적어도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 헐벗는 고통에서만큼이라도 벗어나게 해 줄 왕으로서 기대하고 그의 만주 벌판 회복, 옛 고구려 영토의 회복이라는 희망에 동참해 같은 꿈을 꾸던 백성의 한 입장에서는 쿠테타에 의해 패자가 된 비운의 왕손으로 그가 도달하지 못한 그 위업 속의 이데아를 그리워하는 만큼이나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을 수도 있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냥 기록이나 일방적 견해를 수용하는 것만을 말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역사가 갖고 있는 문제점과 의의 그리고 그 배경과 문제 해결점 시사점 등을 읽어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한 역사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분단의 상징 안에 갇혀 접근할 수 없는 한 패자의 흔적 속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욕망과는 상관없이 도도하게 흘러가는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곳 철원에서 태봉국과 궁예의 이야기를 진짜 이해해 보기를 당부하며 이만 끝맺는다.

 

출처 : http://theplace2012.tistory.com/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