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각대사 비(先覺大師 碑) / 궁예왕의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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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태봉국 (궁예)

2013. 10. 20.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無爲寺 先覺大師 遍光塔碑)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無爲寺 先覺大師 遍光塔碑)

시대 : 고려

연대 : 946(고려 정종1)

유형/재질 : 비문 /

문화재지정 : 보물 - 507

크기 : 높이 250cm, 너비 115.5cm, 두께 29cm, 글자크기 2.1cm

출토지 : 무위사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274

소재지 : (한국)무위사-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274

서체 :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 최언위(崔彦撝) / 유훈률(柳勳律)

                         / 김문윤(金文允), 최환규(崔奐規)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

 

최연식 목포대교수, 형미·경유 비문 분석

 

"궁예 무주·나주 직접 공략, 선승도 우대"

 

무주(광주) 출신으로 신라말 고려초 선승이었던 형미(逈微·864~917)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불교계의 새로운 동향으로 조동종 사상을 전했다. 특히 나주 지방을 정복한 왕건과 인연을 맺게 되어 철원에 올라갔다가 궁예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성과를 보면 상당 부분 다르다. 형미는 궁예와 처음부터 가까운 관계를 가졌고, 왕건과 연결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고 한다. 궁예가 전남 남부를 직접 공략하는 과정에서 형미를 만나 철원행이 이뤄졌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전남 남부 공략의 주체도, 형미와 관계를 가진 이도 왕건으로 파악해왔다.

 

최연식 목포대 사학과교수는 전남 강진군 무위사에 세워진 선각대사(형미)비를 포함한 두 비문을 꼼꼼하게 해석했다. 그는 궁예의 행적을 재검토한 내용을 학회지('목간과 문자' 7, 6월 발행)에 발표했다.

 

기존에 파악한 내용을 보면, 태봉은 903년 금성을 공격, 나주로 개칭하고 전라도 거점으로 삼았다. 909년에는 진도 등 주요 도서를 장악했고, 910년에는 이 지역들을 뺏으러 온 견훤의 부대를 물리쳤다. 하지만 무주는 견훤군의 저항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작전의 주체는 모두 왕건이었다.

 

그러나 새로 밝혀진 사실은 달랐다. 태봉의 국왕 궁예는 9128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주와 무주 등 전라도 남부 지역을 공략했다. 그뿐 아니라 또 다른 법경대사(경유·慶猷)비문을 통해서 908년에도 궁예가 전남 남부를 직접 공략했고, 무주 근처에 은거했던 경유를 만난 궁예의 요청으로 태봉의 수도로 갔다는 점이 파악되었다.

 

형미는 당에서 귀국한 이후 견훤의 세력권인 무주의 실력자 왕지본(王池本)의 후원을 받아 월출산 무위사에서 자리를 잡고, 선문(禪門)을 운영했다. 이때까지 형미는 견훤과 가까운 관계였다. 하지만, 912년 궁예가 남부지역을 공략하면서 인연을 맺게돼 철원의 사찰로 이주하였다. 형미와 동문수학했던 경유의 예처럼, 궁예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두 비문은 기존 사서보다 먼저 기록된 1차자료. 이 자료들은 나주와 무주에 대한 공략계획과 지휘를 궁예가 했고, 왕건의 역할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후대의 자료들은 왕건의 역할을 실제보다 과장하여 기록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궁예에 관해서는 기성의 불교와는 다른 토착신앙과 결합된 불교사상의 측면이 강한 것으로 파악되어왔다. 하지만 궁예는 형미와 경유의 예처럼 선종 승려들에 대해 우대정책을 폈다.

 

특히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하고 승려들을 탄압했다는 것은 형미의 비문에서 어떤 언급도 없다는 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왕건의 선종 승려들에 대한 우대는 궁예의 정책을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삼국사기''고려사' 등이 왕건의 업적으로 제시하는 태봉의 남부공략은 후대에 왕건의 업적을 선양하고 고려왕조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궁예의 역할이 지워졌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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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재검토

라채욱(역사문화학부)

전라남도 강진군 월출산(月出山) 무위사에는 선각대사 형미(先覺

大師 逈微)의 비가 있다. 918년에 형미가 죽자, 왕건이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946(정종 1)에는 선각대사를 기리는 탑비를 세워 편광탑(偏光塔)이라 하였다.

 

선각대사 사후 30여년 뒤에 쓰인 기록이지만, 1145년경에 쓰인 삼국사기와 조선 세종 대에 쓰인 고려사보다 사료적 가치와 신뢰도가 훨씬 더 높다.

 

형미는 912년에 나주에 있다가, 태봉(泰封)의 군대가 왔다가 철원으로 돌아갔을 때, 따라갔다.

 

그렇기 때문에 선각대사 형미의 행적이 기록된 이 비는 궁예나 왕건의 행보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이 비는 편의상크게 네 단락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단락은 905년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형미가 월출산 무위사에 오게 된 상황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 단락은 형미가 전라도 남부지역을 공략하러 온 궁예와 만나게 된 내용이다. 세 번째 단락은 궁예를 따라 철원에 가고, 그곳에서 처형된 이야기다.

 

네 번째 단락은 궁예 사후, 왕건이 형미에게 선각대사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는 내용이다.

 

인용문 생략

 

해석문에는 대왕(大王)’이라는 표현이 3차례 나온다. 대왕의 해석에 따라서 금성경략의 주체가 달라진다. 선각대사탑비가 건립된 시기는 왕건이 즉위한 이후이다. 그래서 기존의 해석에서는 비문의 주인공인 선각대사 형미를 데려온 대왕을 왕건이라고 이해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왕건이 나주에 왔다가 형미를 만나서 그에게 함께 돌아갈 것을 청하여 태봉으로 간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논문에서는 대왕을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으로 보고, 형미가 효공왕의 초청으로 경주에 갔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비문에서 사람을 나타내는 동일한 단어가 다른 사람을 지칭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선각대사탑비에 있는 대왕은 모두 궁예다. 특히, ‘대왕은 그 시기와 내용으로 볼 때 왕건이 아닌 궁예가 확실하다.

 

게다가 형미를 데려온 시기에 대왕이 단조(丹詔)를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단조라는 용어는, 서술되고 있는 시대의 현직 국왕에게 사용하는 용어이므로, ‘대왕은 궁예가 분명하다.

 

왕건이 금성경략의 주체가 아니라는 또 다른 증거로는, 선각대사비가 왕건 이후에 만들어진 비임에도 불구하고, 원정의 주체를 궁예라고 한 것이다.

 

반면, 기존에 금성경략을 주도했다고 알려진 왕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하지만 왕건이 형미의 죽음을 기리며 그에게 선각대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절과 높은 탑을 세워주었다는 내용만 있다.

 

궁예가 직접 갈 정도로 중요한 전투였으니, 지휘와 계획 등은 궁예가 직접 했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자세하지는 않지만 912년 궁예의 친정 사실을 서술한 부분이 있다. 한편, 궁예가 직접 참가하지 않은 전투에서 왕건이 궁예의 자리를 대신해 훌륭히 싸웠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 예로 실제로 왕건은 궁예의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엄청난 승진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예의 친정 역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고려사가 왕건의 활약상만을 중점적으로 다룬 점을 보면 의심스럽다.

 

그래서 삼국사기고려사의 내용은 왕건의 업적을 보여주기 위해 후세에 만들어진 서술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후삼국 통일에 있어서, 왕건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 금성경략을 재평가해야 한다.

 

라채욱_후고구려의 금성경략에 대한 재조명.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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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사에 있는 신라말 고려초의 선사 선각대사 형미[先覺大師 逈微, 864(경문왕 4)~917(경명왕 원년)]의 비.

 

고려초의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유훈율(柳勳律)이 구양순체의 해서로 써서 김문윤(金文允)과 최환규(崔奐規)가 새겨서 대사가 입적한 29년 후인 946(정종 원년)에 세웠다.

 

귀부와 비신, 이수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비로서 사실적인 조각 기법을 보여주는데 비문은 풍화로 마멸이 심하다.

 

비문의 내용은 선각대사가 탄생하여 가지산문의 체징(體澄)에게 출가하고 당()에 유학하여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전하고 귀국하여 무주의 세력가 요청으로 무위사에 머물다 왕건을 만나 왕건의 요청에 따라 함께 태봉의 서울인 철원에 가서 궁예에게 간언하다 죽음을 당하는 생애와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여 오관산의 산사를 수리하고 탑을 조성하여 장사를 지냈으며 2년 후 시호를 내린 사정을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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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高麗國) 고무위갑사(故無爲岬寺) 선각대사(先覺大師) 편광영탑비명(遍光靈塔碑銘)과 아울러 서문.

 

태상(太相) 검교상서(檢校尙書) 좌복야(左僕射) 겸어사대부(兼御史大夫) 상주국(上柱國) 지원봉성사(知元鳳省事) () 최언위(崔彦撝)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정조▨▨평시랑(正朝▨▨評侍郞) 주국(柱國) 단금어대(丹金魚袋)를 하사받은 유훈율(柳勳律)이 교지를 받들어 비문을 쓰다.

 

대개 들으니 부처님께서 취두(鷲頭)에서 출세하시어 인류를 이롭게 하는 교문(敎門)을 열었고, 가섭은 열반할 때가 되어 계족산(鷄足山)에 들어가 중생 교화하는 집을 닫았으니, (결락) 축건(竺乾)에서 성인이 돌아가시자 인도인이 부처님을 흠모하여 학수(鶴樹)에서 열반하셨음을 슬퍼하면서 미륵불이 출현할 용화회상(龍華會上)을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였다.

 

(결락) . 그 교풍이 점점 쇠잔하여졌으니, 어찌 조조(祖祖)가 전심한 것을 마땅히 (결락) 微之. (결락) 사사(師師)가 자취를 상접(相接)하여 높은 산과 같이 숭앙(崇仰)하는 무리가 있어왔다. 그 후 원각(圓覺)조사가 그 깊은 원력으로 중국 남해(南海)에 도착함에 이르러 대홍석덕(大弘碩德)이 숭산에 머물고 있었다.

 

(결락) 대면하여 토론할 자를 구하던 신광(神光)의 마음이 달마의 마음과 부합되어 한 송이 연꽃에 육엽(六葉)이 거듭 빛났다. 그 후로 중간 (결락) 上之. (결락) 법등(法燈)이 상속되어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계승하였는데, 사람만이 능히 도()를 홍포(弘布)할 수 있는 것이니, 조종(祖宗)을 보휘(保輝)할 이는 참으로 우리 스님만이 그를 감당할 사람이라 하겠다.

 

대사의 법휘는 형미(逈微), 속성은 최씨니, 그 선조는 박릉(博陵)의 귀족이며 웅부(雄府)의 동량이었으나 계림에 사신으로 왔다가 토군(兎郡)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마음을 운수(雲水)에 두고 자취를 해연(海壖)에 멈추어 이제는 무주(武州) (결락)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낙권(樂權)이니, 일찍부터 노장사상에 심취하였으며, 거문고, 서예, 적송자(赤松子), 그리고 왕자교(王子喬)의 초은지편(招隱之篇)을 유독 좋아하면서도 항상 절에 가서 공문(空門)의 스님과 친교(親交)하였다.

 

어머니는 김씨니, 어느 날 밤에 홀연히 상서로운 징조의 꿈을 꾸었는데, 어떤 호승(胡僧)이 방에 들어와 나무로 된 책상을 주었다. 문득 꿈을 깬 후 고침(藁砧)에게 물었더니 답하되, “반드시 보배로운 아들을 회임(懷妊)할 것이므로 미리 아들을 낳을 경사를 예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로부터 어머니의 거실(居室)에는 언제나 환한 불빛이 있었다. 갑자지년(甲子之年) (결락) 에 등광(燈光)의 상서가 증명(證明)되어 함통(咸通) 5410일에 탄생하였다. 대사는 날 때부터 수승한 상호를 타고 났으며, 어려서부터 함부로 아이들과 사귀지 않았고, 배움에 뜻을 둘 나이에 이르러서는 그윽이 집을 떠나 입산할 생각이 간절하였다. 이 때 눈물을 흘리면서 양친에게 고하기를 세속을 버리고 불문(佛門)에 투신할 마음이 간절합니다하였으나, (결락) 부모는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지유휘(志維諱) (결락) 爲山, 莫恒 (결락) 드디어 비스듬히 기로(岐路)를 밟아 장흥 보림사에 가서 보조체징선사(普照體澄禪師)를 친견하였다.

 

법을 받아 이었으니, 진전사(陳田寺) 도의(道義)선사의 손자에 해당한다. 체징선사가 처음 보는 순간 비록 초면이지만 문득 오래전부터 서로 잘 아는 것 같다하고, “옛날 서로 이별한 지 오래전이거늘 어찌 그리 늦었는가하며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 (결락) 于玆, (결락) 禪宗 (결락) 釋子 (결락) 구의사미(救蟻沙彌)보다 더하였다.

 

그로부터 부지런히 정진하여 항상 스님의 좌우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중화(中和) 2년에 이르러 화엄사 관단(官壇)에서 비구계를 받을 때 대사가 계단에 올라가 제자리에 앉는 순간 백색 무지개 기운이 법당을 가득 덮었다.

 

이때 (결락) 知有 (결락) (결락) (결락) 기름 발우를 기울여 (결락) 인계주(人戒珠)이니 감히 초계비구(草繫比丘)의 마음을 이지러지게 할 수 있으리오. 더욱이 시라(尸羅)인 계율을 보존함에 있어서랴! 그 해 하안거(夏安居)가 끝날 무렵 도륜산(度倫山)에 가서 융견장노(融見長老)를 친견하니 (결락) 어떤 스님이 묻기를 (결락) 서하(西河)의 위에서 북해(北海)의 스님을 추모하였다.

 

그러므로 여러 날 동안 선()을 논함에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中霄 (결락) 諱長 (결락) 道知在 (결락) . 어찌 구름 덮인 산의 구름을 헤치며, 약산(藥山)에서 약을 캐지 아니 하리오. 노승(老僧)이 서소(西笑)를 따르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여 길을 물어 6(六祖)의 탑을 조계(曹溪)에서 참배하고, (결락) (결락) 이섭(利涉)하였다.

 

그럭저럭 세월을 허송하지 말라.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으니 어찌 자기의 생각대로 얽혀 있으랴하고, 멀리 망상(罔象)을 쫓아 (결락) 玄珠於 (결락) 黃龍 (결락) 청구(靑丘)의 언덕을 비추었다. 대순(大順) 2년 초봄에 이르러 홀연히 입조사(入朝使)를 만나 몸을 의탁하여 서방(西方)으로 가서 피안(彼岸)인 당나라에 도달하였으니, 배를 경수(鏡水)에 메어 놓고, 곧바로 종릉(鍾陵)을 향해 가다가 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를 친견하고 법문을 들을 계획을 세웠다.

 

先佛 (결락) 之化. 실로 부촉(付囑)하신 마음을 따라 꾸준히 수행하였다. (결락) (결락) 대사의 출현이 마치 황각(皇覺)이 나타난 것과 같았다. 대사가 이르되 자네가 돌아왔으니 미리 올 것을 알았노라. 네가 승당(昇堂)하고자 하니 그 보배가 감추어진 곳을 가르쳐 주겠다. 바라는 바는 (결락) 실가(室家)의 아름다움을 보고, 선교(禪敎)의 종지를 전해 받도록 노력하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깊고 깊은 문턱을 보았으며 현리(玄理)의 굴을 탐색하고, 參尋 (결락) (결락) 그 어찌 가유(迦維)에서 연설하신 법에는 아난다가 석문(釋門)의 다문제일(多聞第一)로서 독보적이었으며, 궐리(闕里)에서 유교의 경()을 담론(談論)한 것에는 안자(顔子)가 호학(好學)으로 유교의 (결락) 室而已矣哉인지라. 경복(景福) 3년에 담주(潭州) 절수(節帥)인 마공(馬公)(결락) 절도부사(節度副使) 김공형(金公夐)이 스님의 도풍(道風)을 흠양하여 안개를 헤치고 찾아와서 지극히 공경하였다. (결락) (결락) . 당시의 4부 대중으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음이 모두 이와 같은 류()들이었다.

 

천우(天祐) 26 (결락) 무주(武州) 회진(會津)으로 돌아와 주석하였다. 이때 지주소판왕공(知州蘇判王公)인 지본(池本)이 대사를 친견할 생각이 간절하여 배를 타고 평진(平津)에 이르자마자, (결락) (결락) (결락) 항상 세간(世間)으로 나아가 부처님의 혜일(慧日)을 비추어 주었다. 그리고 4사공양(四事供養)을 계속 궁중에서 보내왔으니 실로 (결락) (결락) 무위갑사(無爲岬寺)에 주지(住持)하도록 간청하므로 대사는 그 명()을 받아 영경(靈境)에 옮겨 가서 주석하였다.

 

이 절은 林泉 (결락) 意寂 (결락) . 그러므로 그 기지(基址)를 중수하고 8년 동안 주석하였다. 찾아오는 사람은 구름 같았고, 모인 대중은 바다와 같았다. (결락) (결락) 6년에 나라가 어지럽기는 유조(劉曹)의 시대보다 심하였고, 위로 성주(聖主)가 없음은 고슴도치들이 모인 것 같았으며, 아래로는 용렬한 무리들만 모여 있어 경예(鯨鯢)의 난()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결락) 사해(四海)가 물 끓듯 하며, 삼한(三韓)은 소요하였다. 98월 중에 이르러 전주(前主)가 영평(永平) (결락) 왕건(王建)이 축로선(舳艫船)을 발하여 친히 군졸을 이끌고 대공세를 취하였다.

 

이때 나주(羅州)가 항복하니, 군대를 포서(浦嶼)의 곁에 주둔시켰고, 무부(武府)는 저항하여 군중을 교기(郊畿)의 광장에 운집하게 하였다. (결락) 이 무렵 대왕께서 오월(吳越)로부터 귀국한 대사의 소식을 들었으니 마치 마니주(摩尼珠)를 해우(海隅)에 감추고, 미옥(美玉)을 하늘 밖에 간직한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먼저 조서(詔書)를 보내어 초빙하여 스님의 도간(道竿)을 굴()하였다. 대사는 왕명을 받들어 배를 타고 풍랑을 무릅쓰고 왕궁에 도착하여 호익(虎翼)을 친견하니 왕은 좌우에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세워둔 용두(龍頭)를 치우기까지 하였다.

 

(결락) 吳王 (결락) 明之下 (결락) 이보다 더할 수 없었다. 그 후 반사(班師)하는 때에 스님과 함께 돌아가자고 특별히 청하여 2~3일만에 북안(北岸)에 이르렀다. 드디어 (결락) (결락) (결락) 스님에게 올리는 공양물은 모두 내고(內庫)에서 지출되었다. 그러나 한탄스러운 바는 많은 마군들에게는 항복받기 어려웠고, 중병(重病)을 제거하지는 못하였다. 비록 (결락) 法以栖 (결락) (결락) (결락) 禍者遍 (결락) 그러나 무고한 사람이 죽는 어려움을 만나기도 하였으니 운둔(雲屯)을 모조리 죄인(罪人)으로 처벌하였다.

 

이러한 즉 불도징(佛圖澄)의 도덕으로도 감히 호석(胡石)의 흉악을 고칠 수 없으며, 혜소(慧昭)의 인자(仁慈)함으로도 어찌 혁련(赫連)의 포악을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모두가 나라를 떠나려하였으니 오직 사람들만을 죽게 한다고 부르짖었다.

 

可謂 (결락) (결락) (결락) . 대왕은 봉필(鳳筆)을 보내 스님을 궁중으로 초빙하여 자취가 끊어진 공사상에 대한 법문을 듣고 무언(無言)의 이치인 선리(禪理)를 알고자 하였다.

 

대사(大師)(결락) . 주상이 당상(堂上)에 우뚝 서있는 것을 보고, 그 단예(端倪)를 헤아리기 어려워 거조(擧措)를 잃었으니, (결락) 玄高之 (결락) (결락) 마침내 거짓 시대를 만났다. 이것은 (결락) 업보의 대응이 장차 다가오니 어찌 인연을 피할 수 있겠는가. 겸하여 최호(崔皓)가 불교를 사견(沙汱)시킬 간계를 품고, 구겸지(寇謙之)(결락) 대왕이 대사에게 이르되 우리 스님은 인간의 자부(慈父)이시고 세상의 도사이시니, 어찌 그릇하심이 있으리요마는 피차(彼此)는 없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바야흐로 화()가 급하여 (결락) 嬰莒僕之 (결락) 者懷恩. 어찌 상신(商臣)과 같은 악당에 참여하겠는가. 그러나 한마디의 말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결락) 더욱 목숨을 버리고 열반할 때라고 하였다.

 

세상에서의 (결락) ()을 다하였으니 세속의 나이는 54세요, 승랍은 35였다. 이 때에 개울과 못의 물이 마르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으며, 도속(道俗)이 슬픔을 머금고, 인간과 하늘 또한 변색(變色)하였으니, (결락) 請秦 (결락) (결락) 한실(漢室)이 용흥(龍興)하였다. 금상(今上)이 용상(龍床)에 있으면서 여러 신하(臣下)들에게 이르되 고요히 생각해보니 입적(入寂)하신 대사의 도()는 십지(十地)를 지났고, ()은 제방(諸方)을 덮었다.

 

遠出 (결락) 낙토(樂土)에 돌아오셨다. 과인(寡人)이 일찍 첨앙(瞻仰)하며 공경히 귀의하였다.” 원하옵건대 유득(有得)의 인연을 생각하면 항상 스님을 잃은 아픔이 간절하여 눈물을 비오듯 흘렸으니, (결락) 俾修 (결락) 다음해 3월에 이르러 드디어 제자인 한준(閑俊)과 화백(化白) 등을 불러놓고 이르되 개주(開州)(결락) 冠山 (결락) 지장태처(之藏胎處)이니, 이 산은 산세가 아름다우며, 지맥(地脈)이 편안하여 마땅히 집을 짓고 살만하며, 반드시 존종(尊宗)을 이룰 만 한 곳이다고 하였으니, 가사(可師) 등이 유사(有司)와 함께 산사(山寺)를 수축하고 석탑(石塔)을 세우기로 하고 때가 되어 먼저 인사(仁祠)를 짓고 이어서 높은 탑을 조성하였다.

 

탑이 이루어지니 가사(可師) 등 제자들이 슬퍼하며 색신(色身)을 받들어 건립한 탑몽(塔冢)에 옮겨 봉안하였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조칙(詔勅)을 내려 법답게 스님의 선덕(禪德)을 현창하여 마땅히 가명(嘉名)을 하사하리라하고는 시호를 선각대사(先覺大師), 탑명(塔名)을 편광영탑(遍光靈塔)이라고 추증하고, 사액(寺額)을 태안(太安)이라 하였으니, 추모함을 받는 영광이 이와 같이 융성한 적은 없었다.

 

하신(下臣)은 변변치 못한 학문인데도 외람되게 중책을 맡게 되어 윤색(潤色)을 선재(仙才)에 사양하고 지언(知言)을 철장(哲匠)에게 미루었다. 선대(先代)에는 옥실(玉室)이었고, 과거에 급제하여 금방(金牓)에 올랐으나, 어찌 비문을 짓는 일을 감당할 수 있으랴마는, “자니(紫泥)를 필문(蓽門)에 내려 황견(黃絹)을 연우(蓮宇)에 새기도록 하라하시기에 억지로 붓을 잡아 대군(大君)께서 불법을 숭상하신 연유를 밝히며, 애오라지 선명한 문장을 지어 스님의 문인(門人)들이 마지막으로 보내는 정성을 위로하는 것이다.

 

()하여 이르되, 깊고 깊은 깨달음 신령한 그 경지여!

(결락)

정력(定力)으로 뭉쳐진 선열(禪悅)로 밥을 삼고,

수도하는 그 마음 강력한 군사일세.

 

()이지만 색이 아니고 공()이지만 공이 아니니

이름 있는 삼라만상 모두가 가명(假名)이요,

이 세상 모든 것을 방편이라 말하지만

모두가 중생을 제도코자 하는 것일 뿐.

여기에 스님의 제자(弟子)인 승승(僧乘)이 있어

(결락)

(결락)

 

마군들로 하여금 항복을 하게 하여

모두들 불교에 귀의(歸依)시켜 제도하였네.

문하(門下)에는 우중(雨中)에 도마(稻麻)처럼 모이고

서리 내린 후라야 그 지조(志操) 알 수 있네.

 

친견한 불자(佛子)들은 모두가 찬탄하네

그토록 우아함을 감출 길 전혀 없고

움직이는 거동마다 불사(佛事)가 아님 없어

일거 일동 그 모두가 중생을 위함이요.

 

진리(眞理)는 쇠해지고 속()됨은 왕성하며

불법(佛法)은 약해지고 마군(魔軍)은 강해지네.

신체는 욕되지만 이름은 고상하며

목숨은 끝났지만 도덕은 빛이 나네.

 

생전(生前)을 회고하니 한점도 후회없다.

조사(祖師)의 남겨주신 거룩한 그 업적을.

도덕을 추모하여 비석에 새겨두어

후세에 영원토록 썩지 않고 남아 있어

창자를 베어내 듯 제자(弟子)들의 애도함을

(결락)

(결락)

(결락)

멀고 긴 반석겁(磐石劫)의 그 시간 다하도록

하늘처럼 영원하고 땅처럼 끝이 없네!

 

개운(開運) 3년 세차 병오(丙午) 5월 경인삭(庚寅朔) 29일 무오(戊午)에 세우고,

김문윤(金文允)과 최환규(崔奐規)는 글자를 새기다.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

[출전 :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1(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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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國 故無爲岬寺 先覺大師 遍光靈塔碑銘 幷序

      太相檢校尙書左僕射兼御史大夫上柱國知元鳳省事臣崔彦撝奉      敎撰

      正朝▨▨評侍郎柱國賜丹金魚袋柳勲律奉 敎書

고려국 고무위갑사 선각대사 편광령탑비명 병서

      태상검교상서좌복사겸어사대부상주국지원봉생사신최언휘봉      교찬

      정조▨▨평시낭주국사단김어대류훈률봉 교서

 

盖聞佛陁出世鷲頭開利物之門迦葉乘時雞足闔歸全之路越竺軋去聖身毒懷仁傷鶴樹之昇遐竢龍華之▨▨▨▨▨▨隱其風漸衰豈謂祖祖傳心當具體而微之侶師師

개문불타출세취두개리물지문가섭승시계족합귀전지노월축알거성신독회인상학수지승하사룡화지▨▨▨▨▨▨은기풍점쇠개위조조전심당구체이미지려사사

 

接踵有高山仰止之流至於圓覺深仁遠居南海大弘碩德曾栖山有待之心諧於郢匠一蓮啓處六葉重光中間徒上之▨▨繼在雲居之嗣人能弘道保祖宗唯我大師則其

접종유고산앙지지유지어원각심인원거남해대홍석덕증서산유대지심해어영장일련계처륙섭중광중간도상지▨▨계재운거지사인능홍도보조종유아대사칙기

 

人也 大師法諱逈微俗姓崔氏其先博陵冠盖雄府棟梁奉使雞林流恩兎郡所以栖心雲水寓蹟海壖今爲武州▨▨父樂權早閑莊老所愛琴書松▨▨招隱之篇蕭寺結

인야 대사법휘형미속성최씨기선박능관개웅부동량봉사계림유은토군소이서심운수우적해연금위무주▨▨부낙권조한장노소애금서송▨▨초은지편소사결

 

空門之友母金氏魂交之夕忽得休徵見胡僧入房擎玉案爲寄欻焉驚覺尋報藁砧答云必生懷寳之兒先告弄璋之慶後於▨▨室內每有鐙煇之甲子之▨▨證定光之瑞以咸

공문지우모김씨혼교지석홀득휴징견호승입방경옥안위기훌언경각심보고침답운필생회보지아선고농장지경후어▨▨실내매유등휘지갑자지▨▨증정광지서이함

 

通五年四月十日誕生大師生有殊相幼無雜交洎于志學之年潛蘊辭家之念此時忽垂雙淚虔告二親曰切欲去塵投其▨▨父母不▨▨志維諱▨▨▨▨▨爲山莫恒▨▨」

통오년사월십일탄생대사생유수상유무잡교계우지학지년잠온사가지념차시홀수쌍누건고이친왈절욕거진투기▨▨부모불▨▨지유휘▨▨▨▨▨위산막항▨▨」

 

遂乃斜登歧路直詣寶林謁體澄禪師禪師法胤相承東田孫子也和尙雖云一見便似相知謂曰昔別稍遙今來何暮許令▨▨于玆敬禪宗▨▨▨▨▨▨▨▨▨釋子▨▨」

수내사등기노직예보림알체징선사선사법윤상승동전손자야화상수운일견변사상지위왈석별초요금내하모허영▨▨우자경선종▨▨▨▨▨▨▨▨▨석자▨▨」

 

於救蟻沙彌勤苦增勞不離左右至於中和二年受具戒於華嚴寺官壇 大師經陟戒壇爲安坐白虹之氣來覆法堂▨▨知有▨▨▨▨▨▨▨傾油知

어구의사미근고증노불리좌우지어중화이년수구계어화엄사관단 대사경척계단위안좌백홍지기내복법당▨▨지유▨▨▨▨▨▨▨경유지

 

戒珠敢 虧草繫之心尤保尸羅之律及其夏末往度倫山禮見融堅長老▨▨僧陳問▨▨▨西河之上追思北海之中所以數論禪中諱長▨▨▨▨▨▨道知在

계주감 휴초계지심우보시라지률급기하말왕도륜산례견융견장노▨▨승진문▨▨▨서하지상추사배해지중소이삭논선중휘장▨▨▨▨▨▨도지재

 

盍雲巘披雲藥山采藥老僧恨不隨他西笑問徑上游禮祖塔於曹溪巡▨▨▨▨▨▨▨▨利涉莫以因循時不待人曷維其已所屬遠從 罔象玄珠於▨▨▨湏龍黃之

합운헌피운약산채약노승한불수타서소문경상유례조탑어조계순▨▨▨▨▨▨▨▨리섭막이인순시불대인갈유기이소속원종 망상현주어▨▨▨회룡황지

 

鏡於靑丘之畔洎于大順二年春首忽遇入朝使車託足而西達于彼岸維舟鏡水指路鍾陵企聞▨▨道膺大師先佛▨▨▨▨▨▨▨▨▨▨之兆實㳂付囑之心行道遲遲遠經▨▨▨▨▨▨▨▨▨▨▨」

경어청구지반계우대순이년춘수홀우입조사거탁족이서달우피안유주경수지노종능기문▨▨도응대사선불▨▨▨▨▨▨▨▨▨▨지조실부촉지심항도지지원경▨▨▨▨▨▨▨▨▨▨▨」

 

大師若披皇覺 大師謂曰吾子歸矣早知汝來如欲昇堂指其實藏所喜者▨▨室家之美傳禪敎之宗由是覩奧幽扃探玄理窟參尋▨▨▨▨▨▨▨▨▨▨▨▨▨▨▨▨▨▨▨▨▨」

대사야피황각 대사위왈오자귀의조지여내여욕승당지기실장소희자▨▨실가지미전선교지종유시도오유경탐현리굴삼심▨▨▨▨▨▨▨▨▨▨▨▨▨▨▨▨▨▨▨▨▨」

 

豈惟迦維演法阿難之獨步釋門闕里談經顔子之▨▨▨室而巳矣哉景福三年潭州節帥馬公節度副使金公聞風欽仰拂霧敬恭▨▨▨▨▨▨▨▨▨▨▨▨▨▨▨▨▨」

개유가유연법아난지독보석문궐리담경안자지▨▨▨실이사의재경복삼년담주절수마공절도부사김공문풍흠앙불무경공▨▨▨▨▨▨▨▨▨▨▨▨▨▨▨▨▨」

 

居其爲時所瞻依皆如此類也迺於天祐二年六月退定武州之會津此時知州蘇判王公池本竊承 大師纔諧捨 已抵平津之攀▨▨▨▨▨▨▨▨▨▨▨▨▨▨」

거기위시소첨의개여차류야내어천우이년륙월퇴정무주지회진차시지주소판왕공지본절승 대사재해사 이저평진지반▨▨▨▨▨▨▨▨▨▨▨▨▨▨」

 

每以趍塵如窺慧日常於四事遠假天厨實展▨▨▨▨▨▨仍以那山無爲岬寺請以住持 大師唯命是聽徙居靈境此寺也林泉意寂▨▨▨▨▨▨▨▨▨▨▨▨▨」

매이추진여규혜일상어사사원가천주실전▨▨▨▨▨▨잉이나산무위갑사청이주지 대사유명시청사거령경차사야림천의적▨▨▨▨▨▨▨▨▨▨▨▨▨」

 

地然則重修基址八換星霜來者如雲納之似海之年亂甚於劉曹之代上無聖主猶鋪猬聚之徒下有庸流莫防鯨鯢之歎物▨▨▨▨▨

지연칙중수기지팔환성상내자여운납지사해지년난심어류조지대상무성주유포위취지도하유용유막방경예지탄물▨▨▨▨▨

 

四海沸騰三韓騷擾至九年八月中  前主永平北▨▨▨▨▨▨▨▨發舳艫親駐車駕此時羅州歸命屯軍於浦嶼之傍武府逆鱗動衆於郊畿之場此時倐

사해비등삼한소요지구년팔월중  전주영평배▨▨▨▨▨▨▨▨발축로친주거가차시라주귀명둔군어포서지방무부역린동중어교기지장차시숙

 

大王聞 大師近從吳越新到秦韓匿摩尼於海隅藏美玉於天表所以先飛 丹詔遽屈道竿 大師捧制奔波趍風猛浪親窺虎翼暗縮龍頭僧▨▨壽吳王轉明之下▨▨」

대왕문 대사근종오월신도진한닉마니어해우장미옥어천표소이선비 단조거굴도간 대사봉제분파추풍맹낭친규호익암축룡두승▨▨수오왕전명지하▨▨」

 

無以加也其後班師之際特請同歸信宿之間臻于北岸遂於▨▨▨▨▨▨供給之資出於內庫所恨群魔難伏衆病莫除唯奉法以栖眞迺▨▨▨▨▨▨禍者遍▨▨▨」

무이가야기후반사지제특청동귀신숙지간진우배안수어▨▨▨▨▨▨공급지자출어내고소한군마난복중병막제유봉법이서진내▨▨▨▨▨▨화자편▨▨▨」

 

枉殺無辜而乃遭艱者塡其雲屯同歸有罪然則澄公道德敢悛胡石之兇慧始仁慈寧止赫連之暴况又永言移國唯唱喫人謂多疑者不信以十▨▨▨▨▨▨

왕살무고이내조간자전기운둔동귀유죄연칙징공도덕감전호석지흉혜시인자녕지혁련지포황우영언이국유창끽인위다의자불신이십▨▨▨▨▨▨

 

大王驟飛鳳筆令赴龍庭冀聞絶跡之譚猶認無言之理 大師狼▨▨ 主上鶚立當軒難測端倪失於擧指豈思就日玄高之復▨▨君無▨▨▨▨▨▨▨終遭僞代是

대왕취비봉필령부룡정기문절적지담유인무언지리 대사낭▨▨ 주상악립당헌난측단예실어거지개사취일현고지부▨▨군무▨▨▨▨▨▨▨종조위대시

 

業對將至因綠靡逃兼被崔皓懷姧寇馮▨▨大王 大師曰吾師人閒慈父世上導師何有存非不無彼此 大師方知禍急网避危期▨▨▨▨嬰呂僕之謀仁

업대장지인록미도겸피최호회구풍▨▨대왕위 대사왈오사인한자부세상도사하유존비불무피차 대사방지화급망피위기▨▨▨▨영려복지모인

 

者懷恩寧厠商臣之惡然而壹言不納遷以加捨命之時世▨▨緣俗年五十有四僧臘三十有五于時川池忽竭日月無光道俗呑聲人天變色豈謂秦原▨▨▨▨▨即世之▨」

자회은녕측상신지악연이일언불납천이가사명지시세▨▨연속년오십유사승납삼십유오우시천지홀갈일월무광도속탄성인천변색개위진원▨▨▨▨▨즉세지▨」

 

漢室龍興當

한실룡흥당

 

今上居尊之際謂群臣曰竊惟故 大師道高十地德冠諸遠出方來儀樂土寡人早披瞻仰恭歸依願思有得之緣常切亡師之痛仍於雨泣實慟▨▨▨▨▨俾修▨▨」

금상거존지제위군신왈절유고 대사도고십지덕관제원출방내의낙토과인조피첨앙공귀의원사유득지연상절망사지통잉어우읍실통▨▨▨▨▨비수▨▨」

 

至明年三月日遂召門弟子閑俊化白等曰聞州之冠山▨▨之藏昭處此山也山崗勝美地脉平安宜爲置冡之居必致▨▨▨▨尊宗之祐可師等與有司宜速修山寺尋造石塔

지명년삼월일수소문제자한준화백등왈문주지관산▨▨지장소처차산야산강승미지맥평안의위치몽지거필치▨▨▨▨존종지우가사등여유사의속수산사심조석탑

 

者至其月日先起仁祠便成高塔塔成師等號奉色身遷葬于所建之冡越二年 詔曰式旌禪德宜賜嘉名賜諡爲

자지기월일선기인사변성고탑탑성사등호봉색신천장우소건지몽월이년 조왈식정선덕의사가명사시위

 

先覺大師塔名爲遍光靈塔乃錫其寺額勑号太安追遠之榮未有如斯之盛者也下臣謬因宦學叨典樞機辭潤色於仙才謝知言於哲匠先是玉室獻賦金牓題名何期降

선각대사탑명위편광령탑내석기사액래호태안추원지영미유여사지성자야하신류인환학도전추기사윤색어선재사지언어철장선시옥실헌부김방제명하기강

 

紫泥於蓽門銘黃絹於蓮宇所冀强揺柔翰申

자니어필문명황견어련우소기강요유한신

 

大君崇法之由聊著鮮文慰門下送終之懇銘曰 奧哉靈境▨▨▨爲食道情是兵卽色非色惟名假名雖云方便祇爲衆生爰有僧英▨▨禪伯能使魔軍克歸▨▨雨中稻

대군숭법지유료저선문위문하송종지간명왈 오재령경▨▨▨위식도정시병즉색비색유명가명수운방변기위중생원유승영▨▨선백능사마군극귀▨▨우중도

 

麻霜後松栢須拜昌言難欺雅動爲佛事翻被人眞衰俗盛法弱魔身辱名高命終道光無懴遺跡祖師舊芳紀德于玆傳於不杇神足傷心▨▨▨▨▨▨▨▨▨▨▨石刧

마상후송백수배창언난기아동위불사번피인진쇠속성법약마신욕명고명종도광무유적조사구방기덕우자전어불오신족상심▨▨▨▨▨▨▨▨▨▨▨석겁

 

頻移天長地久

빈이천장지구

 

 開運三年歲次丙午五月庚寅朔二十九日戊午立 ▨▨▨金文允崔奐規

 개운삼년세차병오오월경인삭이십구일무오립 ▨▨▨김문윤최환규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출전 : 『한국김석전문중세상편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