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초상화 아름다운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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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5.

다빈치 새 초상화 아름다운 왕녀발견

 

전 세계 미술계가 흥분에 휩싸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화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더타임스가 13일 고미술품 전문지 안티크 트레이드 가제트를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문제의 그림은 르네상스 의상 차림의 젊은 여인이라는 제목의 인물화로 색분필과 펜, 잉크 등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지난 199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9000달러(2200만원)에 팔렸었다.

 

그러나 최근 전문가들의 감정결과 이 그림이 다빈치의 작품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으며 만약 그의 작품으로 확인 될 경우 그림의 가치는 1억 파운드(185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다빈치의 작품으로 판명될 경우 이는 희대의 발견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 인물화는 그동안 탄소 연대 측정과 적외선 분석 등을 통해 작가의 기법이 다빈치와 일치한다는 결론을 얻었으며 특히 그림 상단에 찍힌 지문 자국이 결정적인증거 역할을 했다.

 

캐나다 몬트리올의 예술 감식전문가인 피터 폴 비로는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회사가 개발한 혁신적인 다중분광 카메라를 사용해 이 지문을 분석했으며 분석 결과 지문은 중지 또는 검지의 것으로 로마 바티칸 성당의 () 예로니모에 찍힌 다빈치의 것과 매우 유사한것으로 드러났다.

 

성 예로니모는 다빈치의 초기 작품으로 당시 다빈치는 조수를 둘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에 그림에 나타난 지문은 다빈치 본인의 것이 분명하다는 지적이다.

 

화살표 부분이 다빈치의 손자국으로 추정되는 지문이다. 분석 결과, 지문은 중지 또는 검지의 것으로 로마 바티칸 성당의 다빈치 그림에 찍힌 것과 유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크리스티 경매 당시 ‘19세기 독일학파라는 카탈로그 속에 포함돼 판매됐던 이 그림은 또 탄소 연대 측정결과 1440~1650년 사이로 판명됐으며 적외선 분석결과도 다빈치의 다른 작품 속에 나타난 기법과 흡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빈치는 질감과 명암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손들을 사용했는데 분필 속의 손바닥 자국을 비록한 인물화의 기법이 이와 유사하다는 것. 옥스퍼드 대학 예술사 명예교수인 마틴 켐프는 인물화가 다빈치의 것임을 확인한다면서 조만간 이 그림에 대한 책을 출간할 것이라고 밝혔다.

 

켐프 교수는 또 인물화 속의 주인공을 밀라노 공작인 루도비코 스포르자(1452~1508)의 딸인 비앙카 스포르자로 밝혀냈으며 이에 따라 그림의 제목도 아름다운 왕녀로 개칭했다.

 

켐프 교수는 인물화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다면서 이는 모나리자로 알려진 다빈치에 걸맞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이것이 다빈치의 작품으로 판명되면 다빈치가 송아지 피지에 그린 유일한 작품으로 남게된다.

 

켐프 교수에 따르면 다빈치는 1494년 프랑스의 궁정화가 장 페레알에게 송아지 피지에 색분필 사용하는 법을 문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인물화는 1998년 경매에서 뉴욕의 거래상인 케이트 갠즈에게 판매됐으며 그는 2007년 같은 값에 캐나다 출신의 애호가인 피터 실버맨에 다시 팔았다.

 

갠즈는 당시 이 그림이 이탈리아에서 공부 중이던 독일 미술학도가 다빈치 기법을 본 떠 그린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 그러나 매입자이자 현 소장자인 실버맨은 그림을 처음 본 순간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즉각적으로 피렌체인이 그린 것일 수 있다는 감이 들었다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이름이 섬광처럼 떠올랐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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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왕녀 초상화

 

1억 달러를 호가하고 있는 그림.

 

미국 뉴욕주에 있는 크리스티즈 경매소에 특이한 작품 하나가 등장합니다. 이 작품의 적정가는 $12000-$16000 으로 시작합니다.

 

미술품 수집가 피터 실버만은 이 작품에 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고 경매에 참여 하였으나 적정가를 너무 낮게 내는 바람에 그림은 다른 사람에게 $22,000 정도에 넘어갑니다.

 

9년후 이 그림이 한 겔러리에 나타나고 실버만은 바로 이 그림을 $22,000 에 구입합니다.

 

파리로 돌아온 실버만은 이 그림을 연구하면 연구 할수록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 아닐까 의심을 품게 됩니다.

 

탄소 연대 측정법을 통해서 양피지 가 르네상스 시대 임이 밝혀지고 과학적인 연구 결과 화가는 왼손잡이로 밝혀집니다. 그러나 더 확실한 증거를 위해 그림안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밝혀내기 시작합니다.

 

그림안의 여성의 머리 스타일이 르네상스 시대의 왕실해서 유행했던 스타일임을 알아내고 그림 정밀 검사 왼쪽 부근에 칼자국과 3개의 구멍을 발견한다.

 

이 구멍이 책의 한페이지 였으며 누군가 칼을 이용해 잘나낸것으로 추측을 하게 이릅니다. 그리고 이 책의 원본이 폴란드 국립박물관에 있다고 운좋게 알아내며 이작품은 다빈치가 그린 비앙카 스포르짜의 초상화이며 결혼을 기념해 제작한 책의 삽화라는 것도 알아냅니다.

 

 

폴란드로 그림을 가지고 가서 원본의 책과 맞쳐본 결과 3개의 구멍이 정확이 일치 하면서 이 그림이 다빈치의 그림이 맞다는게 더욱 확실해집니다.

 

아직 100프로 정확히 다빈치의 작품이 밝혀진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한 수집가가 8천만 달러(한화 약 800) 에 그림을 구입하겠다고 제안을 해왔지만 실버만은 이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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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과학자·기술자·사상가. 15세기 르네상스미술은 그에 의해 완벽한 완성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다. 조각·건축·토목·수학·과학·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보였다.

 

         

 

출생-사망 : 1452.4.15 ~ 1519.5.2

국적 : 이탈리아

활동분야 : 예술, 과학, 철학

출생지 : 이탈리아 피렌체 근교의 빈치

주요저서 : 회화론

주요작품 : 모나리자》《성 안나》《최후의 만찬(1498)

 

1452415일 피렌체 근교의 빈치에서 출생하였다. 공증인 세르 피에로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카타리나(Catarina)라는 이름을 가진 농사꾼의 딸이며 신분의 차이로 아버지와 결혼을 하지 못했으며 그가 태어날때 다른 여자와 결혼하였다.

 

어릴 때부터 수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학문을 배웠고, 음악에 재주가 뛰어났으며, 유달리 그림 그리기를 즐겨하였다. 그래서 1466년 피렌체로 가서 부친의 친구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에게서 도제수업을 받았다. 이곳에서 인체의 해부학을 비롯하여 자연현상의 예리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를 습득하여, 당시 사실주의의 교양과 기교를 갖추게 되었다.

 

그의 특색인 깊은 정신적 내용의 객관적 표현은, 그의 놀라운 사실적 표현기교의 구사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사실상 15세기 르네상스 화가들의 사실기법을 집대성하여, 명암에 의한 입체감과 공간의 표현에 성공하였다. 점차 15세기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이 주관과 객관의 조화의 고전적 예술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과학적 관심을 갖고, 수많은 소묘를 남겼다. 인체해부를 묘사한 그림들은 인체묘사와 의학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과학적 연구는 수학·물리·천문·식물·해부·지리·토목·기계 등 다방면에 이르며, 이들에 관한 수기(手記)나 인생론·회화론·과학론 등이 많이 남아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과학으로 분류하는 해부학·기체역학·동물학 등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연구결과는 19세기 말에 들어서 주목을 받으면서, 다시 그의 과학적인 천재성으로서 조명되고 있다. 현재 그의 기록이 23권의 책으로 남아 있다.

 

르네상스의 가장 훌륭한 업적, 즉 원근법과 자연에의 과학적인 접근, 인간신체의 해부학적 구조, 이에 따른 수학적 비율 등이 그에 의해 완벽한 완성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명성은 몇 점의 뛰어난 작품들에서 비롯하는데, 최후의 만찬·모나리자·동굴의 성모·동방박사의 예배등이 그러하다.

 

그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생존했던 가장 경이로운 천재 중 하나다. 1519년 프랑수아 1세의 초빙으로 프랑스의 보아주에 가서 건축·운하 공사에 종사하다가 죽었다.

 

이렇게 그는 조각·건축·토목·수학·과학·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재능을 보였다. 이러한 그의 생애를 대개 5시기, 즉 제1차 피렌체 시대(1466~1482), 1차 밀라노 시대(1482~1499), 2차 피렌체 시대(1500~1506), 2차 밀라노 시대(1506~1513), 로마·앙부아즈 시대(1513~1519)로 구분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1452.4.15 ~ 1519.5.2.]

 

1519. 4. 23 레오나르도 다 빈치, 유서를 작성하다

 

우리는 이따끔씩 자연이 하늘의 기운을 퍼붓듯, 한 사람에게 엄청난 재능이 내리는 것을 본다. 이처럼 감당 못 할 초자연적인 은총이 한 사람에게 집중 되어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예술적 재능을 고루 갖게 되는 일이 없지 않다.

 

그런 사람은 하는 일 조차 신성해서 뭇 사람들이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으니 오직 홀로 밝게 드러난다. 또 그가 내는 것들은 신이 손을 내밀어 지은 것과 같아서 도저히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보기 어렵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스승은 어린 레오나르도의 재능에 놀라 붓을 꺾고 조각에만 전념했다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가 극찬한 이 사람. 그는 바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레오나르도는 1452년 이탈리아의 빈치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피렌체의 유명한 공증인인 세르 피에르의 아들이었지만 적자가 아닌 사생아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사생아에 대한 대우가 다른 나라들 보다는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귀족 가문의 피를 물려받지 않은 일반 사생아들은 의사도 약사도 될 수 없었고 대학에도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역시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레오나르도는 피렌체로 갔다. 그곳에서 아버지 세르 피에르는 어렸을 적부터 데생에 소질을 보이던 아들 레오나르도를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라는 화가의 공방에 견습생으로 들여보냈다. 만약 레오나르도가 합법적인 아들이었다면 아버지는 그를 공증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의사의 길을 걸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와 같은 출신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화가는 그나마 나은 직종이었을 것이다.

 

어린 레오나르도는 다른 견습생들과 마찬가지로 바닥 청소나 잔심부름 같은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다 붓을 닦고 안료를 빻는 일 등을 하면서 그림 그리는 일을 배웠다. 레오나르도는 열심히 그림 실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스승과 함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물론 레오나르도가 스승과 동등하게 짝을 이뤄 작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스승이 그리다 만 그림의 귀퉁이에 천사들을 그려 넣었다. 제자의 솜씨는 스승을 놀라게 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스승은 나이 어린 제자가 자신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린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그날 이후로 더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조각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훗날 레오나르도는 스승을 능가하지 못하는 제자는 무능하다라고 말했다.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

레오나르도가 천사를 그려 넣었고 스승을 뛰어넘는 솜씨를 보여주었다.

 

공방 시절 레오나르도는 스승인 베로키오 말고도 보티첼리를 비롯해 유명한 여러 예술가들을 곁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단지 그들을 따라하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방법을 개발해 나갔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예술은 자연의 딸이다. …… 다른 예술가의 방식을 흉내내지 말라.

 

그렇다면 예술은 자연의 딸이 아니라 자연의 손녀가 되고 말테니까.”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화가 조합에 가입했고,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472년에는 정식 회원이 되었다.

 

이제 자신의 공방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실력을 더 키우기 위해 스승 베로키오의 조수로 남았다.

 

이 시절 레오나르도의 그림 실력은 누가 보더라도 최고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결점이 있었다. 주문받은 일감을 끝까지 완성시키지 않는 일이 잦았다. 1478년 처음으로 그림 그리는 일을 단독으로 맡았을 때도 밑그림만 겨우 그리고 그만 두었다.

 

1481년에 주문 받은 제단화인 <동방 박사의 경배> 역시 완성시키지 못했다. 이런 습관은 평생을 따라 다녔다. 그가 그린 것이 분명한 완성작의 수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스무 점을 넘지 않는다.

 

1472-1475년경에 제작된<수태고지>.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베로키오 공방에 있을 때 그린 그림으로 추정.

이 당시 최고의 솜씨를 가지고 있었지만 스승의 조수로 남았다.

 

몇 시간씩 작품을 주시하면서 붓질 한 번 하지 않고 사나흘을 보내기도

 

서른이 된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밀라노는 피렌체 보다 큰 도시였다. 예술과 과학과 학문이 발달한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스포르차 공작의 전속 화가이자 군사 기술자이자 건축가로 일하며 17년 동안 머물렀다.

 

이 시절 그는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식물학, 광학, 수력학, 천문학, 해부학 등 온갖 분야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그는 웬만한 학자들보다 책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한편 레오나르도는 자코모라는 열 살짜리 사내 아이를 집으로 들였다. “소년 두 명 몫의 음식을 먹고, 소년 네 명 몫의 말썽을 일으키는이 아이에게 레오나르도는 살라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살라이는 악마라는 뜻을 지닌 말이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에게 그는 제자이자 조수였으며, 아들 같은 동료였다.

 

그는 이 아이에게 굉장한 애착을 보였다. 아이는 거의 삼십 년 동안 레오나르도의 곁에 있었다.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식당 벽에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성당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 중 한 사람이었던 마테오 반델로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거기에 새벽부터 왔다가 해가 질 때까지 머물렀다. 잠시도 붓을 놓지 않고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잊은 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그는 팔짱을 끼고 서서 그림을 스스로 검토하고 비판하면서 매일 몇 시간씩 작품을 주시하는데도 불구하고, 때때로 붓질 한 번 하지 않고 이틀이나 사나흘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나는 그가 …… 그늘에 몸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발판을 기어올라가 붓을 잡고는 두세 번 붓질을 하고 나서 돌아가는 것도 보았다.”

 

레오나르도는 이 작품을 당시에 일반적으로 쓰이던 프레스코 기법이 아니라 템페라 기법으로 그렸다. 하지만 안료에 달걀을 섞어서 그리는 기법을 택한 것은 그에게나 우리 모두에게나 엄청난 재앙이었다.

 

이 걸작은 몇 해를 가지 못해 벽화 바닥이 들뜨고 곰팡이가 생기는 등 상태가 나빠졌다. 재료를 잘못 선택한 것이었다. 원래대로 복원하려는 시도가 되풀이되었지만, 그때마다 상황은 더욱 더 나빠지기만 했다. 오늘날 이 그림은 거의 누더기 상태로 남아 있다.

 

1500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를 떠났다. 밀라노가 프랑스에 함락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피렌체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또 하나의 걸작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그림 역시 평생의 습관이 다시 도진 때문인지 완성되지 못했다.

 

그리고 1517년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고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에서 말년을 보냈다.

 

남자와 여자의 시체를 30구 넘게 해부하고 세밀하게 스케치

 

레오나르도는 미술뿐만 아니라 과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말 그대로 르네상스적인 인물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쪽지 종이에 이런 저런 글과 스케치를 남겼다.

 

낱장의 그 종이들은 큰 것도 있었고 5-7센티미터 정도로 작은 것들도 있었다. 그는 이 쪽지 종이에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글을 적어 넣었다.

 

심지어 거울에 비춰보아야만 해독할 수 있도록 좌우를 바꾸어 쓰기도 했다. 왼손잡이였던 그로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나가는 것이 더 편했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자신의 생각을 누군가가 가로챌까봐 두려워서 그랬을 수도 있다.

 

레오나르도가 쪽지 종이에 남긴 글과 그림을 보면 그가 얼마나 천재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이었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다. 그가 쪽지 종이에 남긴 그림들 중에는 오늘날의 낙하산, 비행기, 전차, 잠수함, 증기기관, 습도계에 해당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고안해 낸 헬리콥터 장치를 직접 제작해 시험 비행을 하고 있다.

 

그 중에는 당시의 기술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것들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실제로 만들어진 것은 거의 없었다.

 

레오나르도는 사람과 동물의 해부도를 평생 동안 끊임없이 그렸다. 당시 의학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그린 것보다 훨씬 더 세밀하고 훌륭한 그림들이었다.

 

 

쪽지 종이에 그린 자궁 속의 태아(왼쪽) 인체 장기와 혈관 해부도(오른쪽)

 

그는 화가는 해부학에 무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레오나르도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남자와 여자의 시체를 30구 넘게 해부해 보았다.” 시체를 냉동시킬 방법도 방부제도 없던 그 시절, 그는 썩는 냄새를 참아가며 시체 한 구당 적어도 일주일 동안의 시간을 함께 보냈고 장기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스케치로 남겼다.

 

어떤 이는 <모나리자>의 저 신비로운 미소는 어쩌면 얼굴 표정과 관계된 안면 근육의 구조를 나타내려다 보니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보기에도 끔찍할 정도로 온몸이 잘리고 피부가 벗겨진 시체들과 밤마다 함께 지낸그의 열망을 감안한다면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천재의 한탄,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다"

 

또한 레오나르도는 채식주의자였다. 부유층들이 기름진 음식과 진수성찬을 즐겨 먹던 그 시절, 그는 샐러드, 과일, 채소, 면 등을 즐겨 먹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쌀과 야채로 걸쭉하게 만든 수프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만의 건강관리 규칙을 쪽지 종이에 적어 놓기도 했다. “식탁을 떠나자마자 서 있고, 점심을 먹은 뒤에 바로 잠들지 마라. 술은 절제할 것이며, 자주 마시되 적게 마시고……화장실에 가는 일을 미루지 말라……

 

1519423, 레오나르도는 살라이에게 포도밭의 절반을 주겠다는 내용 등이 담긴 유언장을 작성했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이에게 돌아갈 몫으로 보기에는 조금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52, 그는 예순 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미술사에 길이 남을 걸작,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엄청난 분량의 쪽지 종이를 남겼으면서도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다고 한탄하던 그는 어쩌면 지나치게천재적인 인물의 전형이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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