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도다리 도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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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건강,사랑방/가볼만한 곳(등산)

2013. 12. 25.

2013. 11. 27일 오후 2시 부산 중구 남포동 자갈치 매립지에서 열린 영도대교 개통식 중 다리 상판이 들어올려지자 오색 축포가 터지고 있다.

 

                      영도다리 개통식(복원식) 모습

 

6·25전쟁 당시 피란민의 애환 등 부산의 굴곡진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영도대교는 19669월 도개 기능이 중단된 이후 47년 만인 이날 도개 기능을 회복한 영도대교의 개통식(복원식)을 개최했다.

 

 

 

매일 낮 12시에 15분간 다리를 들어 올리는 도개행사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부산 중구 중앙동과 영도구 대교동을 잇는 길이 216m, 25m의 영도다리는 기존의 왕복 4차로에서 6차로로 확장된다.

 

교량 상판을 들어올려 선박이 아래로 통과하도록 하는 도개교는 길이가 31.1m이며, 두산중공업에서 제작했다.

 

영도다리 도개 시운전 2013.7.25. 11시 모습

 

지난 1934년에 개통된 길이 214.63m, 너비 18m, 왕복 4차로의 영도다리는 한국 최초의 연륙교다. 일제는 당초 영도에 조선소를 지으려 했고, 이미 1927년에 영도다리 건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1000t 이상급 선박의 돛도 걸리지 않고 다리 사이를 통과할 수 있도록 도개교(상판이 들어 올려지는 다리) 방식의 건설안이 확정됐다. 19324월 기공됐다. 당시 공사금액은 916000원이었다고 한다.

 

1934년 개통된 영도다리는 구구절절한 사연과 애환을 실어날랐다. 6·25 전쟁 당시 많은 피란민이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기약했고, 상봉하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한맺힌 피란민들은 가족을 꼭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의 점괘를 듣기 위해 다리 밑 점집을 찾았다. 1965년에는 눈물의 영도다리라는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6·25 전쟁 이후에도 자살자가 하도 많아 영도다리에는 잠깐만’ ‘생명은 하나뿐이라는 자살방지 푯말이 붙었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고 장기려 박사가 처음 천막병원을 연 곳도 영도다리 밑이다. 장 박사는 야전침대 하나만 놓고 숙식을 하면서 복음병원을 찾은 환자를 돌봤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전한다. 영도다리 밑에서 구두수선을 하던 노인은 평생 가난에 허덕였다. 자기가 샀던 애국복권이 당첨돼 큰 돈을 벌게 됐다.

 

들뜬 이 노인은 자기 밥벌이 밑천이던 구두수선 장비를 모두 영도다리 아래로 버렸다. 구두 수선통 안에 고이 끼워놓았던 애국복권도 바다로 떠내려갔다.

 

 

  ▲ 1938년에 촬영된 부산의 명물영도다리 전경. 다리의 상판이 번쩍 들어

    올려지는 가운데 발가벗은 어린이들이 다리 주변에서 수영을 하고 있다.

     출처 : 부산시 중구 반세기

 

▲ 일제시대 엽서 속의 영도다리

 

▲ 영도다리 개통 당시의 모습 1933

 

1966년 영도다리를 마지막으로 들어올릴 때 모습

 

 

 

 

 

 

 

 

 

 

 

 

 

 

 

 

 

 

 

 

 

 

 

 

 

 

복원식때 사용했던 영도다리 사진들......

 

복원식에 사용한 사진들을 영도다리 밑으로 진행중인 롯데 호텔 공사장 가림막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출입문을 내기 위해 잘려져 있어 흉물로 보인다.

 

 

 

영도다리 밑으로 건물을 지을 예정인지 기초공사 중이다.

전망대를 세웠으면 좋겠다.

 

 

 

 

오른쪽으로 용두산 공원 전망대 "부산타워" 가 보인다.

 

 

 

 

영도다리 밑으로 기초공사 진행중

 

오른쪽 갈매기 형상의 자갈치 시장 건물 모습, 중앙은 영도 방파제(防波堤) 예전에 이곳에서 고기도 많이 잡았는데...

 

중앙에 보이는 용두산 공원 전망대 "부산타워"  건물앞 공간은 방파제 안쪽에 작은 배들이 머물던 바다였는데 최근에 복개한 곳이다.

 

공동어시장에 잡혀온 상어 한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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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다리 도개 행사시에 들려주는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

 

작사 작곡 : 박시춘  / 현인 : 노래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 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 달만 외로이떴다.

 

철의장막 모진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에 너와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북진통일 그날이 오면

손을 잡고 웃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보자

 

 

현인

 

19511.4 후퇴 직후에 발표된 이 노래는 흥남부두, 1.4후퇴, 국제시장, 영도다리 등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들이 등장한다.

 

이와 함께 전쟁으로 헤어진 血肉(혈육) 금순이가 굳세게 잘 살아주길 바라는 심정이 담겨있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 온 실향민들의 애환을 노래한 가수 현인(본명 현동주)"굳세어라 금순아" 의 노랫말이다.

 

이 노래는 가장 부산적인 대중가수이자, 부산이 낳은 "1세대 가수"인 현인의 존재를 대중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시킨 노래이다.

 

현란하게 떨리는 바이브레이션으로 유명한 현인은 불어, 중국어, 영어, 일어 등 5개 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인텔리 가수로, "굳세어라 금순아" 외에도 "비 내리는 고모령","고향만리", "신라의 달밤", "서울 야곡", "베사메 무쵸" 1천여곡의 노래를 남긴 "국민 가수" 이다.

 

부산 영도에서 출생 현인은, 아버지 현 명근과 어머니 오 봉식의 21녀 중 맏이로 19191214일 부산 영도구 영선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영국 스탠더드 석유회사와 일본 마이니치신문 도쿄지사에서 기자로 근무했으며, 어머니는 일신여학교를 나온 신여성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풍족했다. 구포 소학교에 입학, 2학년 때 초량의 영주 소학교로 옮겼으며, 5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전학, 1931년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영어와 일어, 음악에 재능을 보였으며, 학교 배구선수로도 활약할 만큼 운동신경이 뛰어났고, 밴드부 활동을 통해 일본 대중가요나 미국의 포크송을 트럼펫으로 즐겨 불었다고 한다.

 

현인이 음악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일본 여인과 재혼하자이에 상심해, 아버지가 권한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포기하면서부터이다.

 

현인은 1935년 어린 시절의 꿈인 파일럿을 포기하고 우에노음악학교(上野音樂學校 - 현 도쿄예대) 성악과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한다.

 

관립(官立) 우에노 음악학교는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인 소프라노 윤 심덕, 바이올리니스트 홍 난파, 동요 작곡가 윤 극영 등 극소수의 조선인에게만 입학이 허용 될 정도로 조선의 음악 엘리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5개 국어 능수능란한 인텔리 가수... 그러나 음악학교에 진학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가 학비를 보내주지 않자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마이니치신문 보급소에서 신문포장 일을 하는 등 어려운 학창시절을 보낸다.

 

재학 당시에는 음악이론보다는 재즈나 샹송을 좋아했으며, 방송국에 드나들며 최신 음악정보나 악보를 구해 열심히 익혔다.

 

1942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성악교수가 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성보악극단의 음악교사가 된다.

 

1940년대에는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해 황해 등과 악극단을 구성해 중국 상하이와 텐진(天津)으로 건너가 악극단 활동을 했으며, 텐진의 클럽 "신태양" 에서 샹송 등 외국가요를 본격적으로 불렀다.

 

해방 후 1946년 귀국한 현인은 음악활동에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작곡가 박시춘과 인연을 맺고 본격적인 대중가수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는 미8군과 악극단을 오가며 활동하다 1947년 서울 명동 시공관(구 국립극장)에서 열린 영화 "자유부인" 개봉 축하공연을 통해 스타덤에 오른다.

 

그 자리에서 아직 음반 취입도 하지 않은 "신라의 달밤" 을 불러 "아홉 번 앙코르" 기록을 세웠다. 결국 박시춘 작곡 유호 작사의 '신라의 달밤'을 취입곡으로 데뷔, 데뷔곡이 빅 히트를 한다.

 

이국적인 멜로디, 가수 특유의 부르르 떠는 창법 등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데뷔곡 "신라의 달밤" 의 인기를 몰아 1949년에는 한국 최초의 음악영화 "푸른 언덕"의 주인공으로 등장, 영화 주제가를 부르기도 한다. 이와 함께 '베사메 무쵸' 등을 번안해 노래함으로써, 트로트 일변도의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으며, 1952년에는 "장밋빛 인생" 등을 불러 샹송 붐도 불러 일으킨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때 남태평양으로 징용간 젊은이들의 망향을 그린 "고향만리",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등지고 남하한 사람들의 그리움을 노래한 "비 내리는 고모령", 전쟁 중 국군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준 "전우여 잘 자라" 등은 고단했던 한국 현대사를 반영한 민족의 노래이자, 서민들의 아픔을 달래 준 희망의 노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현인은 부산에서 동아극장 은방울 악극단의 '은방울 쇼'에서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가수 남인수, 영화배우 황정자, 최은희 등과 활동을 함께 하는 한편, "현인과 그 악단" 을 만들어 무대에 오른다.

 

1952년에는 신청년 극단의 가극 "성웅 이순신" 에 남인수, 김정구, 신카나리아, 이난영 등과 출연하기도 했다.

 

영도다리에 노래비와 동상, 1967년 문화공보부 공로상을 받았으며, 가수의 날 특별 공로대상(1996), 6회 대한민국 연예 예술대상(문화훈장·1999) 등을 수상했으며, 20024월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래비는 현재 영도다리 입구에 세워져 있다.

 

 남포동 롯데백화점에서 영도다리 건너 영도경찰서 입구 소재

 

노래비는 가로 세로 각각 4m, 높이 3m로 부산을 상징하는 바다와 항구가 어우러진 배의 형상과 음반 파도 음표와 함께 갈매기가 나는 모습으로, 노래비 앞에는 현인이 앉아서 노래하는 모습의 1.2m 동상이 세워져,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기념촬영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대구 파크호텔 입구에 "비 내리는 고모령", 경주 불국사 앞에도 "신라의 달밤" 노래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