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 추명학(四柱 推命學) 고수들 - 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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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사주학)/사주학(사주팔자)

2014. 1. 3.

사주 추명학(四柱 推命學) 고수들 - 3

 

사주팔자(추명학)의 대가 3는 자강 이석영, 도계 박재완, 제산 박재현 선생이다.

 

사주(四柱)란 연월일시(年月日時)의 네 기둥을 말한다. 각각 두 글자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팔자(八字)가 된다. 그래서 세속에선 사주팔자(四柱八字)란 말을 쓰고, 역리학자들은 사주추명학(四柱推命學) 또는 명리학(命理學)이라고 한다.

 

추명학의 고수 빅3의 첫 번째, 이석영 선생

 

사주첩경의 저자 자강 이석영 선생의 업적은 사주첩경(6), 자강진결, 추명가 등을 지어 역학자들의 노하우를 공개해서 음지의 학문을 양지의 학문으로 현대화시키는데 공헌했다.

 

1920년 평안북도 삭주군 삭주면 남평리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한학과 역학에 조예가 깊었던 조부 이양보(李陽甫)로부터 훈도받았다.

1948년 월남해 충북 청주에서 몇년간 살다 그후 서울로 옮겨 1983년 사망하였다.

 

자강이 본격적으로 명리를 연구하게 된 시기는 1948년 월남한 후에 생계 수단으로 명리를 보면서부터인데 사주첩경’ 6권은 1969년에 완성되었는데 1948년부터 대략 20년간의 연구와 실전체험을 정리해 저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자강 이석영은 '사주첩경(四柱捷徑)'(6)이라는 명저를 남겼고, 도계 박재완은 무욕담백한 인품을 통해 명리학자의 품격을 끌어올린 인물이었고, 제산 박재현은 좌충우돌과 종횡무진의 삶을 살면서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한편의 드라마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같은 명리학을 하면서도 서로 주특기가 달랐고 인생행보도 달랐다. 팔자가 다르므로 행보도 다를 수밖에 없다.

 

먼저 자강의 스토리를 살펴보자. 그는 '사주첩경'이라는 명저를 남기고 갔다. 사람이 죽을 무렵 생각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자신을 황홀하게 했던 로맨스 건()수이고, 다른 하나는 저술한 책이라고 한다. 인생무상을 그나마 위로해 주는 양념인 것이다. 자강은 '사주첩경'이라는 명저를 남기고 감으로써 태어난 보람이 있었다'사주첩경'은 명리학계의 '동의보감'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사주 공부를 하려면 중국의 원전에 매달려야만 했지만, 중국 원전은 한문으로 되어 있어 어지간한 실력이 아니면 해독하기가 쉽지 않다.

 

이뿐 아니라 연습문제도 수백년 전의 명.청대 사례이므로 현장감이 상당히 떨어진다. 그런데 '사주첩경'은 이 문제를 모두 극복했다.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어 한문 원전보다 한결 쉽다. 책에 소개되는 연습문제도 60, 70년대를 전후한 한국 사람들의 팔자를 분석한 것이라 훨씬 피부에 와 닿는다. 허준의 '동의보감'이 등장함으로써 한국이 중국 의학에서 독립할 수 있었듯이, '사주첩경'이 등장함으로써 한국 명리학계는 중국에서 어느 정도 지적 독립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이석영은 수십년 동안 읽은 중국 원전과 바닥에서 갈고닦은 실전 노하우를 소화해 자신의 책에다 대부분 공개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이석영이 명리학에 입문하게 된 배경에는 사회적인 원인도 있지만, 개인적인 원인도 무시할 수 없다. 그의 조부인 이양보가 이미 명리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석영은 명리학의 고수였던 조부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사주첩경’ 4권에 보면 1927(정묘년) 이석영 본인의 집안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사건이란 이석영의 조부가 혼사를 앞둔 손녀딸(이석영의 누님)의 궁합이 좋지 않다고 보고 손녀딸 혼사를 반대한 일이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의 조부님께서 우리 누님과 신랑 될 사람의 궁합을 보시고 나의 아버님께 하신 말씀이 , 그 청년이 지금은 돈도 있고 명망도 있고 학교도 중학까지 나왔으니 나무랄 데가 하나도 없으나 단명(短命)한 게 흠이야. 거기에 혼사 하디 말라. 만약 하면 길레(吉女:누님의 애명)30을 못 넘어 과부가 된다. 그러니 안하는 것이 좋을 거야하셨다.

 

그러나 좋은 사윗감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아버님과 어머니의 심정이었고 또 누님도 매우 그곳에 출가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결정짓기로 하여 마지막으로 조부님의 승낙을 청하였을 때의 일이다.

 

조부님께서는 - . 명은 할 수 없구나, 너희들이 평소에는 내 말을 잘 듣더니 왜 이번에는 그렇게도 안 듣느냐, 저 애가 팔자에 삼십 전(三十前, 누님은 1911년생)에 과부가 될 팔자다.

그 청년은 서른 셋을 못 넘기는 팔자이고 보니 기어코 팔자를 못 이겨 그러는구나. 이것이 곧 하늘이 정한 배필인가 보다.

이 다음 네가(누님을 가리킴) 일을 당하고 나서 나의 사당 앞에서 울부짖으면서 통곡할 것을 생각하니 참 가엾구나. 안하고 하는 것은 너희 마음에 있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씀하셔서 혼인은 성립된 것이다.

 

그 후 재산과 부부간의 금슬 면에서는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하게 살았는데, 자손에 대해서는 애가 태어나면 죽고, 나면 죽고 하여 6남매(42)를 낳아 모조리 실패하였다.

기유(己卯)(1939) 914일에 득남하고 매형은 그 해 1230일 별세하고 말았다.

조부님은 이미 2년 전인 정축년에 작고하셨고 누님은 기묘년에 상부(喪夫)하여 과연 조부님의 사당 앞에 가서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누님의 모습이 지금도 나의 눈에 훤하고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나의 매형 사주는 무신(戊申)년 정사(丁巳)월 기묘(己卯)일 경오(庚午)시였다.(‘四柱捷徑4, 韓國易學敎育學院, 309~311)

 

심리학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유년시절의 체험이 그 사람의 인생행로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사주첩경의 저자인 이석영도 어린 시절 누님의 운명에 얽힌 참담한 광경을 목격하였다.

나의 사당 앞에서 울부짖으며 통곡할 것이라는 조부의 예언이 현실로 들어맞았을 때 그 장면을 목격한 이석영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고인들이 탄식하였던 명막도어오행’(命莫逃於五行·운명은 오행(사주)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의 이치를 깨달았던 것일까. 이석영이라는 걸출한 명리학자의 출현은 서북지역의 소외감, 명리학의 대가였던 조부의 영향과 어린 시절의 체험이 모두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빅쓰리 가운데 나머지 두사람. 도계 박재완과, 제산 박재현은 이석영과는 전혀 다른 인생행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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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명학의 고수 3의 두 번째, 도계 박재완 선생

 

 

어느 분야에 있어서건 명인, 고수, 달인이 없지 않겠지만, 세상이 술객(術客)이라 말하는 좌도방문의 분야처럼 소문 무성한 고수들이 있는 곳도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현대 사주 추명학의 빅3의 스승이 되시는 구한말의 명인, 전백인(全白人) 선생이다.

, 현대 우리나라 명리학의 비조를 꼽으라면 구한말에 살았다는 전백인이라는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전백인(全白人) 말 그대로 온몸이 흰 사람이라는 뜻으로 본명은 재학. 아호를 백사(白蛇흰뱀)라고 하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알비노인데 이런 특이한 몸의 특징으로 인해 약재로 쓰려고 왕실로 잡혀 왔다가 눈동자가 까맣다는 이유로 풀려났다는 일화가 있다.

그 뒤 삼각산 밑으로 숨어들어가 명리학을 익혔는데 한공부 한다음 대륙으로 가서 군벌들의 사주를 풀어줬다고 한다.

 

조선 총독의 일(전쟁터로 나간 사위의 생사)을 감정하여 사주면허증을 발급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수제자로는 맹인 김선형 - 김선영이라고 전하는 자료도 많이있는데

사람들이 팔자를 불러주면 세네번 정도 그 사주간지를 되뇌인 뒤

곧바로 점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고 하니 그 공부가 어느 정도인지는 측량하기 어렵다.

 

김선형에게 매형의 생사를 알아보러 갔다가 남방에서 사주풀이로 벌어먹고 살 팔자라는

말을 듣고 사주를 배우게 된 사람이 바로 빅3 중 하나로 꼽히는 이석영이다.


이석영은 6권짜리 책 사주첩경이 유명하다.

몇년 전까지 동대문 한의학서점에서 14만원. 큰 서점에서 16-17만원대에 거래가 됐는데

근근히 나가긴 나가는지 얼마전 교보에서 검색해보니 20만원이더라.

(최근 교보문고에서도 사주첩경은 20만원선... 값은 어마어마하지만

그 내용은 가히 국내에 다시 나오기 어려운 명저이자 필독서라고 한다 - 옮긴이)

 

어느해 학력고사에는 400명이 몰려들어서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했다.

근데 융통성이 없는 팔자라 그런지 단골이면 슬쩍 먼저 봐주고 그래야 하는데 그런것도 없고

들어갈 대학이름이랑 합격 불합격 여부만 일러주면 될것을 한사람 들어오면 그사람 평생운로까지 봐주고 있다가 손님들이 기다리다 지쳐 "이놈의 철학관 다시 오나봐라..."

 

그래서 그런지 운이 그래서 그런지 점점 오는 손님이 줄어들고

50대에 치매가 오고 60대에 풍으로 몇년을 고생하다 가셨다.(잠시 묵념)

역술인,무속인들의 말로는 그리 좋지 않은 거 같다. 천기누설 덕분인가?

 

사주 추명학의 빅3 중 두명이 전백인 직계이다.(이석영,박재완)

 

박재완은 대륙에서 전백인을 만나 명리를 배웠다고 전해지는데

(그러니까 이석영은 박재완 사질. 이석영이 연배도 20년 정도 아래고 해서 깍듯이 대했다고 전해짐)

독특한 감명방법-사주+황극수-으로 후학의 골치를 꽤나 썩히셨다. ^^

저서로는 이론서인 명리요강 명리사전이 있고

한문으로 된 감정지를 수제자가 번역하여 책으로 만든 도계실관이라는 책이 있는데

명리요강 명리사전에 나오는 이론만으로는 도계실관의 감정이 이해가 안된다고 한다.

(이건 들은 말이다. 박재완 책은 너무 비싸서 보질 못했..쿨럭; 이런 건방진 제자들)

 

어쨌든 박재완은 이석영보다 20년 먼저 태어나서 10년 늦게 죽었으니(90세 정도에 사망)

그 내공은 가히 무당파의 장삼봉에 비할 만 하겠다. 일설엔 사주의 모든 종류를 경험했다고 한다. (사주 전체 숫자 60X12X60X12=518400)

상담료도 티끝모아 태산이라고 엄청나게 벌었는데(점술종사자들에 대한 세금이 없다시피한 시절) 자식복이 없는 팔자라 그런지 아들이 또 엄청나게 말아먹었다는 후문이다.

 

유명한 점사로는 풍표낙엽 차복전파(박통시절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1979년 운세)이 있는데

직역하면 '단풍이 낙엽이 되는 시절에 차가 엎어져 전부 파손된다'는 뜻인데

1979년이 되자 김재규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각별하게 조심히 몰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이 10.26의 예언격이 되어버릴 줄이야.. (차복전파의 차와 전은 차지철과 전두환을 의미한다)

 

나머지 한명은 '박도사'라고 불리우는 박제현인데 솔직히 잘 모른다.

앞의 두사람이 소림과 무당에 비유할 수 있다면 박도사는 '이소룡' 인간형에 가깝다.

학맥이 전백인을 시조로

김선형-이석영-이병렬-역학학원 수료생들(..)

박재완-유충엽-김동완(이분은 도계 직계라고 하는데 연배가 아무래도 적은 편이니)-역문관 제자들

 

이렇게 문파적으로 나뉘어 있는데 반하여

이소룡 사후 절권도의 수많은 제자들이 서로 정통을 주장했듯이

박도사라는 거인이 2000년 들어 작고(사실은 그 훨씬 전부터 치매가 들어서 어린아이 지능이었다고..)한 이후 많은 제자들이 박도사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데는 좀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데가 있어서..

 

야심이 있었던 김재규는 1970년대 초반 이미 도계 박재완을 찾아가 미래 운명을 점쳐 보았다. 그때 나온 내용 가운데 하나가 풍표락엽 차복전파(楓飄落葉 車覆全破)라는 구절이었다.

이 문구는 보통 단풍잎이 떨어져 낙엽이 될 즈음 차가 엎어져 전파된다로 해석된다. 김재규는 그래서 차를 아주 조심했다.

자동차를 탈 때마다 운전기사에게 조심하라고 여러 번 주의를 주곤 했다. 그러나 김재규의 인생을 놓고 볼 때 차복전파에 대한 해석은 잘못되었다.

차(車)는 자동차가 아닌 차지철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전(全)은 전두환 대통령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김재규가 미리 알았다면 역사는 과연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금강산은 개골산이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산 전체가 바위산이다.

수련가의 안목에서 보면 바위산은 수련하기에 적합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금강산은 지리산파와 함께 한국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양대 파벌인 금강산파의 본거지가 됐다.

'승자의 기록은 태양의 조명을 받아 역사로 남고, 패자의 기록은 달빛에 바래져 신화가 된다.’ 소설가 이병주가 남긴 명언이다. 필자는 이 말을 좋아한다.

 

특히 역술계 고수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행적을 추적할 때마다 이병주가 남긴 이 말이 오버랩 되곤 한다. 사주팔자를 통해 염라대왕의 비밀스러운 장부를 슬며시 훔쳐보아야 하는 역술가의 삶이란 태양의 조명을 받는 양지(陽地)의 삶은 분명 아니다.

차라리 어슴푸레한 달빛에 익숙해져야 하는 음지(陰地)의 삶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역사의 정면에 나서지 못하고 항상 이면(裏面)에 머물러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음지의 삶이 지닌 애환은 활자로 남겨진 기록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개개인의 깊숙한 사생활을 다루는 업무 성격상 외부에 공개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오로지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로만 후세에 전해질 뿐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아다니던 이야기들이 뭉쳐 세월의 이끼가 쌓이면 신화와 전설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 아닌가!

 

근래 한국 한국에는 역대로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 기인·달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로부터 시작해 조선조 창업에 깊숙이 관여했던 무학대사의 속성도 박씨였다. 그런가 하면 계룡산 신도안의 바위에 새겨져 있던 풍수도참의 글씨도 불종불박’(佛宗佛朴)이다. 박씨 가운데서 미륵불이 나온다는 예언이다.

 

이로 인해 계룡산에는 박씨 성을 가진 도사들이 엄청나게 몰려 왔었다. 근래 신앙촌으로 유명했던 감람나무 박태선 장로도 박씨이고,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도 박씨다. 왜 박씨인가? 한국의 지리적 위치는 동방이다. 동방은 오행으로 따지면 목()의 방향에 속한다.

 

()자에는 나무 목()이 들어 있다. 따라서 동방의 나라에 부합하는 성씨는 박씨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나무 목의 오른쪽으로 복()이라는 글자가 첨가된다. ‘자의 의미는 점을 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배출되는 영()적 능력자 가운데 박씨가 많을 수밖에 없다는 설이 있다. 필자에게 풍수를 전수해 준 선생님의 성씨도 공교롭게 박씨였는데, 언젠가 그 선생님과 토론 끝에 내린 결론이 한국에서는 나무 목자가 들어간 성씨인 박()씨와 이()씨를 주목해야 한다였다.

 

박재완 납치한 12·12 신군부 주체들

 

도계 박재완이 남긴 일화 가운데 하나만 소개해 보자. 19791212일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경복궁 일대에서는 정치적 격변이 발생했다. 이름하여 12·12 사태. 이틀 후인 1214일 이른 아침 대전에 살고 있던 박재완은 서울 경복궁 근처의 모 안가로 강제로 모셔져야만 했다. 신군부의 군인들에 의해 부랴부랴 대전에서 서울의 안가로 납치되다시피 온 것이다. 그 이유는 12·12 거사 주체세력들의 명리를 보아주기 위해서였다.

 

과연 거사는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실패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인가. 평상시에야 합리와 이성에 바탕한 판단을 중시하지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수를 던질 때는 이성보다 초월적인 신의 섭리에 의존하게 마련인 것이 인간이다. 그렇다면 그 신의 섭리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신의 섭리를 인수분해하면 사주팔자가 나온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사주팔자를 신의 섭리이자 전생(前生)성적표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1214일이라면 12·12 불과 이틀 후다.

 

이틀 후라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던 시점이다. 그 긴박한 시점에 신군부 주체들이 다른 일 제쳐두고 자신들의 사주팔자부터 보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칼을 숭상하는 군인들은 사주팔자와 같은 흐리멍텅한 미신(?)을 무시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줄로만 알았다. 사주팔자는 다분히 문사적(文士的) 취향 아니던가.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군인들 역시 사주를 본다는 것은 의외였다. 사주팔자에는 문무의 구별이 없음을 깨달았다.

 

12·12라는 긴박한 역사의 수레바퀴 한쪽에서 벌어졌던 이 은밀한 일화가 세간에 알려지게 된 데는 계기가 있었다. 그 계기는 바로 만세력’(萬歲曆) 때문이었다.

 

사주팔자를 보려면 반드시 만세력이라고 하는 달력이 필요하다. 만세력은 생년···시를 육십갑자로 표시한 달력이다. 일명 염라대왕의 장부책이다. 염라대왕의 장부를 보지 않으면 운명을 알 수 없다. 만세력이 없으면 사주를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보통 사람들의 필수품은 신용카드이지만, 도사의 필수품은 만세력이다. 신용카드는 놓고 가더라도 만세력은 반드시 휴대하고 다녀야 한다.

 

도사는 주머니에 만세력 하나만 가지고 다니면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굶어 죽을 일은 없다. 자기 앞날의 운명에 대해 관심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잠재적인 고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214일의 박재완은 만세력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군인들이 대전의 집으로 들이닥쳐 순식간에 납치했으니 미처 만세력을 챙길 심리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박재완은 서울에 도착하자 종로에 사는 제자인 유충엽에게 전화를 했다.

 

나 지금 서울에 있네. 급히 오느라 만세력을 안 가지고 왔는데, 자네 만세력 좀 보내주게.”

그러겠습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글쎄. 여기가 어디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사람을 그곳으로 보내겠네.”

 

이 전화가 끝나고 15분 정도 지났을 때쯤 건장한 청년 몇몇이 검은 안경을 쓰고 역문관에 나타나 유충엽으로부터 만세력을 받아 총총히 사라졌다. 이 만세력 일화는 그때 스승인 도계 박재완으로부터 갑자기 전화를 받고 만세력을 전해준 유충엽씨의 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1997년 월간시사지 ‘WIN’(월간중앙의 전신)역문관 야화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글이 바로 그것이다. 유충엽씨는 역술인으로는 드물게 해방 이후(1949) 대전사범을 나온 인텔리다. 대전사범이라도 나왔으니 이 일화를 그냥 흘려버리지 않고 글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잉크방울은 핏방울보다 진하다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박재완이 감정한 신군부 주체들의 사주는 이러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운이 좋다. 그러나 10년쯤 지나면 재월령즉 위재이환’(財越嶺卽 爲災而還) , ()가 재()를 넘으면 재()가 되어 돌아온다.”

 

신군부 주체들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다. 김재규는 신군부로부터 당한 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김재규 역시 박재완으로부터 사주를 본 적이 있었다.

 

원래 야심이 있었던 김재규는 1970년대 초반 이미 박재완을 찾아가 자신의 미래 운명을 점쳐 보았던 것이다. 그때 나온 내용 가운데 하나가 풍표낙엽 차복전파’(楓飄落葉 車覆全破)라는 구절이었다. 이 문구는 보통 단풍잎이 떨어져 낙엽이 될 즈음 차가 엎어져 전파된다로 해석된다.

 

유의할 점은 이 구절이 김재규의 1979년 운세에 해당하는 내용이었다는 점이다. 1970년대 초반 도계로부터 이 문구를 전해 받은 김재규는 1979년이 되자 차를 아주 조심하였다. 차가 엎어진다고 되어 있으니 자동차를 탈 때 조심한 것이다. 그래서 자동차를 탈 때마다 운전기사에게 조심히 운전하라고 여러번 주의를 주곤 했다. 그러나 김재규의 인생을 놓고 볼 때 차복전파에 대한 해석은 잘못되었다.

 

()는 자동차가 아닌 차지철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역술계에서는 해석한다. 차지철은 죽을 때 화장실에서 엎어져 죽었고(車覆), 김재규는 전두환에게 격파당했기(全破)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김재규는 죽었으니 차가 엎어진 것이나 마찬가지 결과를 초래했지만, 만약 차가 차지철을 의미하고 전이 전두환을 의미했다는 사실을 김재규가 미리 알았다면 역사는 과연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2만명의 사주는 봐야 물리가 터진다

 

박재완은 1903년에 태어나 92년에 사망하였으니까 90세의 장수를 누렸다. 90세의 장수를 누렸기 때문에 도계는 많은 사람들을 접할 수 있었다.

 

고관대작과 기업가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 사람들의 사주를 보았다. 모모한 고위관료와 사업가 치고 그에게 사주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만큼 적중률이 높았다.

 

그가 남긴 저술은 명리요강’(命理要綱)명리사전’(命理辭典), 그의 사후(死後) 그의 제자들이 간행한 명리실관’(命理實觀) 등이 있다. ‘명리요강은 명리의 핵심 원리들을 요약한 책이고, ‘명리사전은 그 원리들을 사례별로 풀어 놓은 책이다.

 

특히 명리사전은 일본의 추명학자들이 일어로 번역본을 내자고 두번이나 요청했던 명저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재완은 이를 완강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한국 명리의 노하우가 일본으로 흘러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리실관은 도계가 직접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사주를 본 임상기록이다. 이것을 보통 간명지(看命紙)라고 부른다. 수제자인 유충엽이 한문으로 된 간명지를 해석한 것이 명리실관이다.

 

사주에 대한 적중률도 적중률이지만 그의 인품도 남달랐다.

담백무욕(淡白無慾)해서 별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명성이 높아지고 적중률이 높아질수록 돈에 욕심을 내기 쉬운 법인데 그는 돈 문제에 담백하였다고 전한다. 그만큼 단순한 술객의 차원이 아니라 내면 수양에도 어느 정도 성취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1992년 임종을 맞이해서도 그냥 가지 않고 후학들에게 감동적인 일화를 하나 남겼다. 바로 자신이 죽는 날짜와 시간을 미리 정해준 일이다.

 

죽음을 귀천(歸天)이라 했던가! 운명의 이치를 다루는 명리학자 입장에서 볼 때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날짜도 정해져 있듯 죽는 날짜도 정해져 있다고 본다. 정해진 날짜에 하늘로 돌아가야만 끝맺음을 제대로 한 것이다.

 

귀천 날짜에 가지 않으려고 바둥거리는 모습도 과히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갈 때는 가야 한다. 이 이치를 박재완은 몸으로 직접 보여 주었다. 그는 임종에 즈음해서 자식들에게 자신의 귀천 날짜와 시간을 미리 예견하였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신신당부하였다.

 

정해진 그 날짜와 시간에 자신이 하늘나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그러므로 절대로 링거 주사를 꽂지 말아 달라는 당부였다. 링거 주사를 맞으면 인위적으로 얼마간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하늘의 법도를 어긋나게 하는 일이 된다.

 

박재완은 자신이 예언한 그 날짜, 그 시간에 조용히 운명하였다. 과연 일세를 풍미한 명리학자의 죽음다웠다. 도인이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즈음하여 일생 동안 닦은 내공을 바탕으로 초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커다란 서비스이기도 하다.

 

초연한 죽음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도록 해주는 법문이다.

 

도계가 지녔던 명리학의 내공을 파악하기 위해 명리실관의 임상사례들을 분석한 바 있다. ‘명리실관에는 무수한 실전 사례들이 소개돼 있다. 내공은 실전체험에서 나온다. 명리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실전 사례를 분석하는 작업은 내공 증강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도계는 아마도 수십만 명의 임상경험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십 년을 보았으니 말이다. 역술계에서 회자되는 이야기에 의하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약 2만명 정도의 임상을 해보아야 한다는 설이 있다. 2만명 정도의 임상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물리가 터진다는 것이다.

 

쉽게 설명한다면 사주팔자는 바코드와 같다. 서점에서 책을 구입할 때 스캐너로 바코드를 한번 휙 그으면 책값이 단박에 나오는 것처럼, 2만명 이상의 임상 경험을 가진 역술가는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사주팔자를 한번 휙 쳐다보기만 해도 격국(格局)이 나온다고 한다.

 

이는 여덟 글자라는 디지털을 인간사의 희로애락이라는 아날로그로 전환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여덟 글자의 디지털 속에 잠복되어 있는 숨은 그림을 찾아내는 작업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아무튼 궁즉통’(窮卽通)이라는 말이 있듯 어떤 일이든 낑낑거리면서 골몰하다 보면 어느 순간 돈오(頓悟)의 깨달음이 오는 법이다.

 

2만명이라면,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10명씩 본다고 가정해도 1년이면 3,650명밖에 되지 않으니 줄잡아 6년은 쉬지 않고 중노동해야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양도 양이지만 질도 문제다. 전업 역술가가 아니고 필자와 같이 대학에 있는 사람은 상대하는 계층이 주로 학교 선생들이나 평범한 봉급쟁이가 많다. 그러다 보니 재미있는 사주를 가진 사람을 만날 기회가 적다는 불리함이 있다. 엎어지고 자빠지며 스리고에 피박까지 당하는사람들의 사주를 보아야 재미도 있고 실력도 팍팍 는다.

 

아침에 출근했다 저녁에 퇴근하는 나인 투 파이브들은 인생의 기복이 적어 피박을 당하지 않으니까, 사주도 믿지 않는 경향이 있고 재미 또한 없다. 종교도 그렇지만 사주팔자도 수준이 높은 상근기와 수준이 낮은 하근기가 제일 잘 믿는 반면 중근기들은 잘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상근기는 계산이 빨라 믿고 하근기는 남들이 믿으니까 덩달아 믿지만 중간치기들은 이리저리 주판만 놓다 결론을 내지 못하고 눈치만 보다가 끝난다.

 

어쨌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사는 사람의 사주가 실력을 증강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공부거리다. 그런 면에서 제일 보기 좋은 사주가 정치인들의 사주이다. 정치인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이라서 한발 옆으로 디디면 교도소다. 인생살이에서 길흉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사주상에 나타난 길흉과 대조하기 쉽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정치인들이야말로 이 세상이라는 연극무대에서 가장 화려한 배역을 맡은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정치인 다음에는 연예인들이 좋다. 연예인들 역시 기복이 심하고 길흉이 확실하게 나타난다는 장점이 있다.

 

현직 검사가 집필한 사주책 四柱精說 (사주정설)

 

도계는 사주팔자를 통해 많은 중생들을 도와주었다. 사업에 부도나 자살하기 일보 직전에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몇년이 고비이니 이 고비만 넘으면 좋은 운이 찾아온다. 그때까지만 어떻게 해서든 참아 보라든가. 남편이 몰래 바람을 피워 낳아 숨겨놓은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인이 찾아와 하소연하면 팔자소관이려니 하고 넘어가라, 그렇지 않으면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이혼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라고 위로하였다.

 

한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차마 말못할 고민을 정신과 의사에게 가서 상담하는 것이 아니라 점쟁이를 찾아가 털어놓는다. 누군가에게 속을 털어놓아야 정신병에도 안 걸리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자살도 방지할 수 있다. 털어놓고 상의할만한 최적의 상대가 바로 점쟁이·역술가·명리학자다. 점쟁이가 2~3만원의 복채를 받는 것도 따지고 보면 상담료이니 그까짓 복채 몇푼 너무 아까워하지 말라! 점쟁이도 공돈은 안 받는 셈이다. 점쟁이도 역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고 순기능도 있는 것이다.

 

명리학자였던 도계는 그러한 고충을 지닌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안심시켰다. ‘팔자소관으로 돌려라, 지금만 버티면 다음에 좋은 때가 온다, 기다려라의 상담초식이었다. 엄청난 불행을 당한 사람에게 무슨 이야기로 위로할 것인가. 그 해답은 주님의 섭리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거나 팔자소관으로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다.

 

불행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미치거나 병들거나 자살하는 수밖에 없다. 도계를 찾아와 상담했던 사람들 중 이색적인 그룹이 있는데, 그 그룹이란 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수험생들이었다. 고시에 여러번 낙방하다 보면 마음이 초조해진다. 고시원에서 시험준비만 하다 내 인생 끝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이런 연고로 고시생들이 사주팔자를 많이 연구한다. 낙방을 거듭하던 고시 수험생이 어느날 도계를 찾아와 물었다.

 

저 아무래도 고시공부 집어치워야 할까 봐요.”

아니네, 이 사람아, 자네는 고시에 합격할 운이 있네, 2년만 더 참고 공부하면 그때 합격할 것이네,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소.”

아닌게아니라 2년후 그 수험생은 고시에 합격하였다. 합격하고 나서 이 수험생은 사주팔자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의문을 품고 고시공부 하듯 명리학 서적들을 독파했다.

 

그리고 나서 쓴 책이 바로 사주정설’(四柱精說)이라는 책이다. 고시 합격자가 핵심 원리만 뽑아 정리했기 때문에 보기에 일목요연하고 부피도 얇아 초입자가 공부하기에 좋은 책이다. ‘사주정설의 저자는 백영관(白靈觀)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저자의 실명이 아닌 가명이다. ‘사주정설을 집필할 때(1982) 저자는 현직 검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현직 검사가 실명으로 사주팔자 책을 저술한다는 것은 여러 모로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판단해 부득이 가명으로 책을 낸 것이다.

 

도계의 실전사례를 기록한 명리실관을 보자. ‘명리실관을 보면서 필자가 놀란 것은 그 유려한 한문 문장이다. ‘명리실관에 등장하는 사주풀이는 전부 한문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여자의 사주팔자를 이런 식으로 평하였다. ‘주옥세진(珠玉洗塵) 왕금수기(旺金秀氣) 봉시영달(逢時榮達) 귀가지부(貴家之婦). 총명출중(聰明出衆) 임사불루(臨事不漏).’

 

이를 해석하면 주옥이 먼지를 씻어내니 왕성한 금의 기운이 빼어나구나. 때를 만나 영달하게 되니 귀한 집의 부인이로다. 총명이 출중하여 일에 임해 소홀함이 없구나이다.

도계가 명리실관에서 사용하는 문장은 모두 4자씩 규칙적으로 결구를 이루고 있다는 특징이 발견된다. 한문 4자 안에 내용을 함축한 것이다. 이를 가리켜 변려문’(騈儷文)이라고 한다. 4자씩 규칙적으로 반복되니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리듬감을 느끼게 한다.

 

유교 경전 가운데는 사자소학’(四字小學)이 대표적이고, 불경 가운데는 능엄경이 이와 같은 변려문으로 되어 있어 읽기에 편하고 운율을 감상할 수 있다. 능엄경 좋아하는 사람들은 변려문 스타일에 매우 익숙하게 마련인데, 대학에서 불교의 능엄경 가지고 박사학위를 받은 필자로서는 도계의 한문 문체가 입맛에 맞는다. 아울러 고색창연한 변려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인생사의 파란만장을 유장하게 담아낼 수 있었던 도계의 학식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명리실관을 읽으면서 당혹스러움을 느꼈던 부분은 명리학 이론서에는 나오지 않는 해석이 발견될 때다. 예를 들면 경오(庚午), 기축(己丑), 기축(己丑), 무진(戊辰)’의 여자 사주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40세에 이르니 모든 사람들이 신뢰하고 존경한다. 43~44세는 구리기둥에서 좀벌레가 생기는 격이라 믿는 곳에서 피해를 입으니 이 역시 운수소관이다.’

 

43~44세에 구리기둥에서 좀벌레가 생기는 격과 같은 해석은 필자로서는 불가능한 대목이다. 명리학 이론서 가지고는 해석해낼 수 없는 부분이다. 필자의 과문 탓인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43~44세에 구리기둥에서 좀벌레가 생긴다고 해석할 수 있었을까. 이론서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대목이다. ‘명리실관을 읽다 보면 도처에서 이처럼 불가해한 부분이 발견된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이는 명리학 이론서에 나온 말이 아니라 도계가 지녔던 독특한 영감 내지 직관력에서 나온 해석이라고 여겨졌다.

 

사주 공부는 첫째, 이론서를 섭렵하고 둘째, 실전문제를 많이 풀고 셋째, 직관력을 갖춰야 한다. 직관력이란 영적인 힘을 가리킨다. 사주 내공의 완성단계는 직관력이다. 이것이 없으면 최후의 5%에서 오차가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해석이 아주 모호한 상황에서 이것이다 하고 판정할 수 있는 힘은 직관력이다. 역사도 결국 자료가 아니라 그 자료를 어떻게 해석해 내느냐서 좌우되지만, 사주도 마찬가지다.

 

같은 여덟 글자를 보고도 보는 사람의 능력과 관점에 따라 정반대로 해석해낼 수 있다. 문제는 영발’(靈發: spiritual power)이다! 영발을 얻으려면 입산수도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를 종합하면 도계는 한쪽에는 이론, 다른 한쪽에는 실전체험과 영적인 힘까지 아울러 갖추었던 실력자였음을 알 수 있다. 비유하자면 쌍권총을 찬 것과 같다. ‘O.K목장의 결투에서처럼 쌍권총을 차면 한쪽이 불발이더라도 나머지 한쪽은 작동하게 마련이다.

 

전국의 명산대찰 순례하며 도력 쌓은 도계 선생

 

그렇다면 도계는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어떠한 수련 과정을 거쳤을까 궁금해진다. 그의 이력을 더듬어 보자. 도계는 190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0세 전에는 곽면우(郭傘宇) 선생 문하에 입문해 사서삼경을 수학하였다. 곽면우, 그는 구한말 영남의 유명한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다. 3·1운동 이후 일본정부에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글을 보냈다가 대구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그는 유학자요,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도학에 깊은 조예를 지녔던 인물이다.

 

소설 ’()을 보면 그는 정신수련에서 상당한 경지에까지 들어간 인물로 묘사된다. 단순한 유학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필자는 평소 곽면우 선생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의 풍수 선생님인 박의산(朴懿山:1926~) 선생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면 이환조 선생이 나오고, 이환조의 스승이 정봉강이고, 정봉강 선생의 사부가 바로 곽면우 선생이 되기 때문이다. 풍수계보상으로 따져 보면 곽면우 선생은 필자의 고조부 뻘이 된다.

 

비록 유학이 아닌 풍수이기는 하지만, 풍수를 연결고리로 해서 필자와 곽면우 선생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몇해 전에 경남 거창에 있는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기도 하였다. 곽면우의 풍수 수제자인 정봉강도 일본 경찰을 때려 죽이고 전국으로 유랑하였듯 도계도 곽면우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을 하려고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단체 내부의 파벌싸움을 목격하고 환멸을 느껴 명리학에 입문하게 된다.

 

당시 이 분야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중국 무송현의 왕보(王甫) 선생 문하에서 태을수(太乙數황극수(皇極數) 그리고 명리를 사사 받는다. 대가 밑에서 이론 공부와 함께 국내에서 구할 수 없었던 진귀한 서적들을 이 시기에 입수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인연도 팔자소관이다. 여기까지가 이론 공부였다면 중국에서 귀국하여 192826세 때는 금강산 돈도암(頓道庵)을 비롯한 여러 명산 대찰에서 수도를 한다. 정신세계의 깊은 곳으로 침잠(沈潛)하는 수련의 과정을 겪었던 것이다.

 

금강산은 개골산(皆骨山)이라는 명칭에서도 드러나듯 산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수련가의 안목에서 보면 금강산은 고단백질이 풍부한 산이다. 지구에서 방사되는 지자기(地磁氣)는 바위를 통해 올라오므로 바위산에서 생활하거나 수도하면 강력한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다. 강력한 지기가 있어야만 내면세계라는 지하실 깊숙이 진입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힘이 없으면 내면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 바위산에서 도인이 많이 배출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금강산이 주목받는 산이 되었다. 산 전체가 바위산인 금강산에서 한국 정신세계의 양대 파벌 중 하나인 금강산파(金剛山派)가 나온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또 다른 파벌 중 하나인 지리산파(智異山派)의 인물들은 심법이 후덕한 경향이 있다면, 금강산파는 신출귀몰한 도력을 갖춘 인물들이 많다. 도계는 돈도암을 비롯한 금강산 이곳 저곳을 역방하면서 금강산파의 내로라 하는 인물들과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기운 좋은 암자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심도 있는 정신수련도 하지 않았나 싶다. 요즘 사주공부 하는 사람들은 책 몇권 읽고 함부로 간판을 내거는 경향이 있다. 위험한 일이다. 돌팔이는 남도 망치고 자기도 망치는 법이다. 이론을 거친 다음 최소한 3년 정도는 입산해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수련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도계 같은 대가도 공부 과정에서 전국의 명산대찰을 순례하였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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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명학의 고수 3의 마지막, 제산 박재현 선생

 

3 가운데 마지막으로 제산 박재현을 이야기해 보자. 도계가 담담한 성품의 도학자적 스타일이라면, 제산은 좌충우돌 신출귀몰하는 천재형이었다.

 

그는 천재적인 두뇌와 아울러 격한 감정을 겸비하였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충돌하면서 스파크를 남겼다. 그가 남긴 스파크를 추적하다 보면 인생이라는 것이 하나의 만화경(kaleidoscope)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1996년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나 받은 인상도 대단한 재사(才士)라는 느낌이었다. 우선 제산은 관상부터 비범하였다.

 

보통사람이 제산의 관상을 보면 별로 잘생긴 얼굴은 아니라고 보지만, 관상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보면 제산의 얼굴은 원숭이형 관상이다. 눈과 눈썹 부분의 모습이 원숭이 같다.

 

자고로 원숭이형 얼굴을 가진 사람 중에서 천재가 많다. 우선 도올 김용옥부터 보자. 도올도 필자가 보기에는 원숭이형 관상이다. 도올이 TV에서 도덕경을 강의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필자는 손오공을 연상하였다. 그 변화무쌍한 초식을 동원하여 종횡무진으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신통력은 도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현재 한··3국에서 도올과 같은 손오공은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도올 선생! 원숭이라고 평했다고 해서 필자를 너무 욕하지 마시라! 역사적으로 볼 때 원숭이형들은 천재가 많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선생과 제산의 예를 든 것일 뿐이니.

 

일본의 원숭이형 천재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였다. 경북 안동의 강직했던 선비 학봉 김성일(金誠一·1538~93)은 일본에 가서 히데요시를 만나본 뒤 원숭이 같이 생겼다고 평가한 바 있다. 히데요시도 원숭이상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히데요시는 만고에 죽일 놈이지만, 일본 사람들은 히데요시를 가장 본받을 만한 인물로 꼽는다. 히데요시는 평지돌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말을 끌던 미천한 마부 출신이 입신하여 일본을 통일하고 조선은 물론 대국인 중국까지 삼켜버리려 했던 걸물이다.

 

평론가의 안목에서 볼 때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보다 히데요시의 인생이 훨씬 극적이다. 아무튼 제산은 원숭이상을 지닌 천재였다. 실제로 제산은 어렸을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던 인물이다. 그의 고향은 경남 함양의 서상(西上)이라는 지역인데, 유년시절부터 서상에 신동 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컸던 인물이다. 그 천재성이 바둑으로 갔으면 이창호가 되었을 것이고, 학문으로 갔으면 도올 같은 인물이 되었을 텐데, 아쉽게도 천대 받는 업종인 명리쪽으로 갔다.

 

그것도 결국 팔자소관이요, 주님의 섭리일 테지만 말이다. 필자가 명리학 연재를 시작하면서 월간중앙의 정재령 부장에게 우리나라 역술가 가운데 가장 알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하자 정부장의 즉각적인 답변이 박도사를 먼저 소개해 달라였다. 박도사는 바로 제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월간지 부장도 이미 그 명성을 알고 있었을 만큼 제산은 이 분야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다.

 

제산이 남긴 일화를 하나 소개해 보자. 1970년대 후반(아마 1978년쯤) 전국적으로 대단한 가뭄이 들었다. 몇 달째 비가 오지 않아 모내기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부는 비상이 걸렸고, 주무부서인 농수산부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농수산부 장관은 장덕진씨였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각료회의에서 가뭄대책을 세우라고 다그쳤고, 해당 부서 장관인 장덕진은 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대책이란 양수기 수만대를 외국에서 사오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생각난 인물이 평소 알고 지내던 박도사였다.

 

양수기 수만대를 수입하려면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데, 혹시 박도사에게 물어보면 무슨 수가 없을까 해서였다. 당시 계룡산에서 칩거 중이던 제산은 장덕진 장관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 내가 천기를 보니 몇월 며칠에 반드시 비가 오게 되어 있다. 그때까지 견뎌 보라는 답을 주었다. 제산의 말을 믿은 장덕진 장관은 가뭄이 계속되는데도 불구하고 양수기 수입을 차일피일 미뤘다. 얼마 후 정말 비가 온다면 양수기 구입하는 데 들어가는 예산을 아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날 비가 오지 않으면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이 잘못되면 일국의 장관이라는 사람이 일개 점쟁이의 말을 듣고 국사를 그르쳤다는 비판을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보름 동안 장덕진은 그야말로 애간장이 탔다. 정말 비가 올 것인가. 하지만 비가 오기로 예언한 날이 내일로 다가왔는데도 비가 올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녁 무렵 밖에 나가 하늘을 보니 별만 총총하게 빛났다. 일기예보도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장장관은 ! 나는 내일쯤 목이 날아가겠구나!’하고 체념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에도 날씨가 맑은 편이었는데, 점심 때가 지날 무렵부터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시커멓게 몰려오는 것 아닌가. 오래지 않아 장대 같은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전국적인 가뭄이 해갈된 것은 물론이었다. 필자는 이 비사(秘史)를 제산의 부인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당시 제산의 집이 서울 연희동에 있었는데, 억수 같은 비가 오자 장덕진 장관이 흥분한 목소리로 오후 6시까지 연희동 집으로 갈 테니 제산과 같이 만나자는 전화를 하였다. 계룡산에 있던 제산은 장장관의 연락을 받고 급히 연희동으로 올라오는 중이었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장덕진은 6시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5시쯤 되었을 때 비서관을 대동하고 미리 연희동에 와서 박도사를 기다렸다.

 

박도사 믿고 양수기 안사고 버틴 장덕진

 

제산의 내공이 절정기에 있을 때는 이처럼 언제 비가 올 것인가 하는 천기의 부분까지 꿰뚫는 능력이 있었다. 개인의 운명을 예언하는 것과 국가적 대사를 예언하는 능력은 차원이 다르다. 486 컴퓨터와 팬티엄 3의 차이라고나 할까. 언제 비가 올 것이라는 정도까지 적중하다 보니 1970년대 후반부터 제산의 이름은 정치인들이나 고관들 사이에서도 회자되었다.

 

1990년대 초반 포항제철의 박태준 회장은 헬기를 타고 제산이 살고 있던 서상까지 제산을 만나러 온 적이 있다. 박회장과 제산은 같은 박씨라서 인간적으로 서로 친한 사이였다. 포철 박회장이 헬기를 타고 직접 박도사를 만나러 왔던 일은 몇몇 일간지에서 이를 기사로 보도해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박회장은 사석에서 박도사를 가리켜 살아 있는 토정을 보는 것 같다고 칭찬한 바 있다. 정치인 김복동씨와 김기재씨도 제산과 왕래가 잦았다. 이들 유명 정치인들과 제산의 관계는 사판의 대가와 이판의 고수가 만난 격이었다.

 

제산이 남긴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하면 이렇다. 제산은 20대 시절 이곳 저곳을 방랑했다. 주로 지리산 일대였다. 함양·산청·남원의 운봉 등지였다. 특히 제산은 20대 춥고 배고팠던 시절 운봉에 자주 들렀다. 운봉에는 그의 절친한 친구인 노개식(盧价植)씨가 살고 있었다. 운봉은 지리산 일대의 명당이다. 해발 400m의 고지대라서 여름에도 기온이 30도를 넘지 않는다. 풍수적으로도 지세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여름에 시원하고 땅 기운도 좋아서 예로부터 기인·달사들이 이곳에 많이 뿌리내리고 살았다.

 

노씨의 집안도 그 중 하나였다. 노씨는 당시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고, 유년시절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유교 경전을 단련받아 한문에 조예가 깊었다. 한약방을 운영하니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어서 친구인 제산이 찾아오면 항상 차비라도 줄 수 있는 여력이 있었고, 고전에 식견이 있어서 호학하는 성품이었던 제산과 잘 어울렸다. 어느날이었다. 제산과 운봉의 친구는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제산이 이렇게 말했다.

 

어이, 오늘 한약방에 오는 첫 손님은 남자일 것이네, 그런데 그 사람의 성씨가 황()씨일 거야, 그리고 이름은 하수(河洙)이고. 아마도 그 사람은 대나무 울타리를 두른 집에 사는 사람일 것이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과연 그럴까 하고 지켜보았다. 10시쯤 되어 한약을 지으러 첫 손님이 왔는데, 이 사람 성씨를 물어보니 황씨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과연 하수라고 하지 않는가. 깜짝 놀란 그는 그 손님의 집에 관해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나는 대나무 숲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하는 것 아닌가.

 

평소 제산이라는 친구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사람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아 맞추니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의심이 든 친구는 제산에게 다그쳤다.

자네 이보(耳報)로 안 것이지?”

이보라는 말은 귀신이 귀에 보고해 준다는 뜻이다. 산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보통령’(耳報通靈)이라고 부르는데, 줄여서 통상 이보라고 부른다. 산에서 기도를 많이 하다 보면 접신(接神)되는 수가 있다. 접신되면 귀신이 접신된 사람의 귀에 대고 정보를 알려 준다. 이보가 된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마치 귀에 리시버를 꽂은 상태로 말하는 것과 같아서 두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귀신이 무슨 이야기를 해주는가 하고 귀를 쫑긋한 상태에서 상대의 말을 듣는다. 그래서 이보통령한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헷갈리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친구로부터 자네, 이보로 알게 된 것이지?”하고 추궁받은 제산은 아니다. 격물치지(格物致知)해서 안 것이다라고 답변하였다. 격물치지란 사물을 유심히 관찰해 알았다는 말이다. 귀신이 알려주어서 안 것이 아니고, 스스로 이성적으로 이치를 분석해서 알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격물치지의 근거를 말해 보라하니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침 햇살이 장판을 비추는데, 장판의 색깔이 노랗게 보이더라, 그래서 황()씨라는 것을 알았다. 머리맡에 목마르면 먹으려고 흰 대접에 물을 떠놓았는데, 그 대접에 담겨 있는 물이 아주 맑게 보이더라. 하수(河洙)는 그래서 알았다. 대접 위에 가로로 놓여 있는 대뿌리 회초리를 보고 오늘 오는 사람이 대나무 울타리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예측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운봉에서 원제당 한약방을 운영하는 노개식(63)씨로부터 듣고 제산의 천재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을해(乙亥)당의 지기(地氣)받고 태어난 박도사

 

인걸은 지령(地靈)이라!’ 인물은 땅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받고 태어난다는 믿음이다. 하다못해 시골 면장이라도 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받고 태어나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물며 제산과 같이 100년만에 한명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은 반드시 지령과 관계 있다는 것이 필자의 믿음이다.

 

제산의 고향은 함양군 서상면 극락산 밑의 산동네다. 무주에서 진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서상 인터체인지가 나오는데 이 인터체인지에서 나와 바로 우측에 자리잡은 동네다. 이 동네는 지리적으로 영·호남의 길목이었다. 경상도 거창·함양에서 전라도의 장계·장수 쪽으로 가려면 이 동네를 거쳐야만 한다. 그러다 보니 영·호남을 오가는 많은 과객들이 이 동네를 지나갔고,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제산 집안에서는 지나가는 과객들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과객 가운데는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었다. 그 중 특히 풍수와 사주에 밝은 과객들도 있었는데, 풍수에 관심이 많았던 제산의 집안에서는 이러한 술객들을 특히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들이 사랑채에서 몇 달이고 무전취식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제산의 집은 영·호남의 문화가 활발하게 오갔던 지리산 실크로드의 중요한 베이스 캠프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 과객들 중 풍수에 밝은 이가 명당자리를 하나 알려 주었다. 소위 을해(乙亥)명당이었다.

 

이 자리에 묘를 쓰면 후손 중에서 을해(乙亥)년에 태어난 손자가 큰 인물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을해년에 죽는 사람이 생기면 그 집안은 망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리하여 제산의 7대조는 그 을해명당에 묻히게 되었다. 그후 이 집안에는 60년마다 한번씩 돌아오는 을해년에 과연 어떤 자손이 태어나는가 하고 유심히 지켜보는 관습이 생겼다고 한다.

 

그 명당의 이름을 하필 을해라고 붙인 데는 까닭이 있다. 그 명당자리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지맥의 형태가 을자(乙字)의 형태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하면 영어의 S자 형태와 같다. 을자의 끝에는 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다. 저수지는 물이다. 십간십이지에서 해()는 물을 상징한다. 육십갑자를 순서대로 짚어볼 때 을과 짝을 이룰 수 있는 물은 해(). 그래서 을해(乙亥)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을자 모양으로 내려간 산줄기 밑에 저수지가 자리잡고 있는 명당이라서 이를 을해(乙亥)로 상징한 것이다.

 

67년 전인 1935년이 을해년이었다. 을해년을 맞이해 극락산자락의 박씨 집안에서는 인물이 탄생하기를 기다리는 설레임으로 출렁거렸다. 5월에 첫손자가 태어났다. 첫손자는 장남이 아니라 3남에게서 나왔다. 집안의 분위기는 5월에 태어난 3남의 아들이 인물인가 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아들을 낳았다고 새끼줄을 왼쪽으로 꼬아 문 앞에 금줄을 걸어 놓았는데, 아침에 보니 구렁이가 그 새끼줄을 타고 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구렁이가 금줄을 타고 간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그래서 이 손자는 인물이 아니다라고 판정되었다. 바로 이어서 손자가 또 태어났다. 이 손자는 둘째 아들이 낳은 자식이었다. 이 손자는 둘째 아들이 처가살이를 했던 덕분에 서상에 살지 않고 처가 동네인 서하에서 출생하였다. 외가인 서하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이 손자는 관심권에서 밀려났다. 을해년이 다 지나갈 무렵인 동짓달 22일 장남에게서 손자가 하나 태어났다. 그 손자가 바로 제산이다.

 

제산을 낳을 무렵 제산의 어머니는 이미 아들 딸을 다섯이나 둔 상태였다. 큰아들 하나에 그 밑으로 줄줄이 딸을 넷이나 낳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또 딸을 낳을 줄 알았다고 한다. 더구나 제산의 어머니는 당시 40세가 넘어 생리도 드문드문했는데 임신이 되어 창피한 데다 딸을 많이 낳아서 제산이 임신되자 또 딸인 줄 알고 낙태 시키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하였다. 간장을 바가지로 퍼먹거나 쓴 약초를 먹는가 하면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을해명당의 효력이 작동했는지 제산은 마침내 을해년 동짓달에 태어나고야 말았다. 낳아놓고 보니 얼굴은 시커멓고 볼품 없이 조그마한데 눈만 반짝거렸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조부는 과연 이 아이가 을해명당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아이란 말인가! 하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성장해 가면서 제산의 총기는 빛을 발하였다. 성격은 내성적이었지만, 한번 글자를 보면 단번에 외워 버리는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상동에 신동이 났다는 소문이 함양군 전체로 퍼져 나갔다. 바야흐로 흥미진진한 대하소설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박정희와 박제산, 운명의 여신은 두 사람의 관계를 끝까지 상생(相生) 관계로 놓아두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시절 이미 제산의 신통력을 파악했던 박정희는 197210월유신을 감행할 무렵 제산에게 사람을 보낸다.

 

이때 박정희의 메신저로 제산을 찾은 사람이 바로 청와대 S비서관이었다고 한다. S비서관은 제산을 찾아와 維新(유신)" 앞날에 대해 점괘를 물어 보았다. S비서관과 이야기를 나누던 제산은 담뱃갑에 幽神(유신)라고 볼펜으로 끄적거렸다. 維新幽神, 저승의 귀신이 된다는 무서운 예언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난 얼마후 건장한 기관원들이 제산을 잡으러 왔다. 제산은 남산 지하실로 끌려가 며칠 동안 죽도록 얻어 맞았다. 기관원들은 제산의 팔을 뒤로 묶어 놓고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고 한다.

 

지리산은 예부터 기인·달사·도사들이 숨어 지내는 산으로 이름이 높다.

 

제산 박재현은 청년 시절 지리산 일대를 10여년간 떠돌면서 가진 수많은 기인·달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영기(靈氣) 눈이 띄였던 것 같다.

한번 읽으면 그 내용을 모두 외워 버리는 일람첩기(一覽輒記)의 소유자. 한국 명리학계의 빅3 가운데 한 사람인 제산(霽山) 박재현(朴宰顯, 1935~2000). 경남 함양군 서상면의 극락산 자락에 맺혀 있는 을해명당(乙亥明堂)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제산은 과연 비범했다.

몸도 약하고 성격도 내성적이고 얌전해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아이로 보였지만, IQ만큼은 대단했다.

 

서상에 신동 났다는 소문은 헛소문이 아니었다. 제산의 유년시절 이름은 광태(光泰)였다. 광태는 어렸을 때부터 일람첩기였다. 한번 죽 훑어보고 단박에 암기하는 능력을 가리켜 일람첩기라고 한다. 말하자면 인간 스캐너(scanner)인 셈이다. 을해명당의 기운을 받은 인물을 수십년간 고대했던 광태의 조부는 신동 손자를 끔찍하게 아꼈다고 한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전설이 드디어 현실로 나타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손자인 광태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다. 광태가 학교에 가면서 혹시 도시락을 안 가져가는 날이 있으면, 조부는 직접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 문앞에 가서 기다렸다.

손자가 학교 끝나고 돌아오면 조부가 당신 방으로 불러 공부를 시켰다. 극성스러울 정도의 손자 사랑에 광태의 어머니는 아들을 시아버지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래서 지나치게 손자를 감싸고 도는 것 아니냐고 말하면 너희가 무엇을 안다고 광태를 나무라느냐고 호통치곤 했다.

후일 광태가 정상적인 인생행로를 포기하고 지리산 일대의 산천을 정처없이 유랑하는 낭인으로 전락했을 때도 손자에 대한 조부의 믿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너희 안목으로는 광태를 모른다. 내 말만 들어라. 산으로 가서 공부하겠다면 잡지 말아라. 가 하는 대로 가만히 둬라.” 이 말이 아들·며느리에게 남긴 조부의 유언이자 당부였다.

 

제산은 서상초등학교를 마치고 진주농림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진주농림은 당시 5년제였는데, 제산은 공부를 잘해서 장학생으로 뽑혔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제산으로 하여금 조용히 공부나 하게 놔두지 않았다. 26·25가 터진 것이다. 피난을 가야 했다. 부랴부랴 진주에서 고향인 서상으로 올라오기 위해 목탄으로 불을 지펴 움직이는 목탄차를 탔다.

 

서상으로 오던 도중 이 목탄차가 비행기 폭격을 피하려다 비탈길에서 그만 엎어져 버렸다. 그 바람에 제산은 다리가 부러졌고, 전쟁 와중에 변변한 치료를 받지 못한 제산은 그만 앉은뱅이가 돼 버렸다.

3년 동안 집에서 앉은뱅이로 있던 제산은 학교를 다닐 수 없어 집에서 놀아야만 했다. 그후 물리치료를 받아 겨우 몸이 회복되었을 때는 동년배 또래들과 많은 격차가 나 있었다.

 

집안의 다른 사촌들은 정상적인 과정을 마치고 이미 서울의 명문대학에 다니고 있던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광태(제산)는 시골의 거창농고에 다녔다.

 

거창농고의 선생들은 수업시간에 제산 학생의 날카로운 질문 때문에 곤란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거창농고 재학시절 제산과 같은 하숙방을 썼던 동기는 다음과 같은 술회를 남겼다.

하숙방에서 친구가 시험공부를 하고 있으면, 제산은 방에 누워 친구가 책 읽는 소리를 들었다. 제산은 몸이 약해 오랜 시간 앉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산은 친구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모조리 암기해 버렸다. 시험공부를 열심히 한 친구는 70점을 받은 데 비해 누워 있던 제산은 만점을 받는 희극이 연출되었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하였다. 하지만 제산은 보편적인 학문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런 공부를 해서 무엇 하느냐 하는 회의가 끊이지 않았다.

 

거창농고 졸업 후에는 정상적인 궤도에서 완전히 이탈해 이 산 저 산을 떠도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소위 말하는 낭인과’(浪人科)에 입학한 것이다. 머리 좋은 천재가 낭인과로 들어가면 관심 갖는 분야가 바로 도통(道通)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작하여 나는 왜 이런 팔자인가 라는 의문을 거쳐 이 세상과 우주가 돌아가는 이치가 도대체 무엇인가에까지 이른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도를 통하고 싶은 대원(大願)이라고나 할까. 청년 제산은 그것이 알고 싶다는 불타는 욕망을 가지고 지리산 일대의 도인들을 만나러 다녔다. 지리산이 어떤 산인가. 역사 이래 한국 최대의 도인구락부가 아니던가. 지금도 어림잡아 2개 대대 병력에 해당하는 2,000명 정도의 낭인과가 운집해 있는 산이 지리산이다.

 

이 시절 청년 제산의 모습은 거렁뱅이에 가까웠다. 춥고 배고프고 노잣돈도 떨어진 상황이었다. 완전히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외로운 구도자의 길을 걸었다. 불가의 의례집인 석문의범’(釋門儀範)에서는 이처럼 외로운 구도자의 심경을 독보건곤 수반아’(獨步乾坤 誰伴我)라고 읊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오로지 나 홀로 걸어가니 그 누가 나와 함께 할 것인가!’라는 뜻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일러 단독자(憺者)의 삶이라고 하였던가! 하지만 머리에 기름을 부은 자는 그 길을 회피할 수 없는 법.

 

제산은 지리산 둘레의 산청·함양·운봉·구례 등지를 방랑하면서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 숨어 사는 수많은 기인·달사들과 교류를 가졌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유교·불교·도교를 섭렵하게 되었다. 유교의 사서삼경과 불교의 금강경’ ‘화엄경’ ‘능엄경을 비롯한 제반 불경, 도교의 벽곡(酸穀도인(導引)을 비롯한 호흡법과 성명규지’(性命圭旨) 같은 비서(秘書)들을 접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말로만 듣던 천문·지리·인사로 통칭되는 재야의 학문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된다.

 

이러한 기인·달사들과 만남을 가지면서 제산은 어느새 영기(靈氣)가 개발되었던 것 같다. 대체로 머리 좋은 사람들은 영기(靈氣), 즉 직관력이 부족한 수가 많다. 분석적이기 때문이다. 매사를 하나 하나 논리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영기가 쇠퇴한다. 마치 모래시계의 양면과 같아서 논리가 강하면 반대쪽 사이드인 직관쪽 기능은 퇴화되게 마련이다.

 

반대로 직관이 강하면 논리가 약해진다. 필자가 많은 도사들을 만나본 경험에 의하면 산에서 기도발이 잘 받는 사람은 성격이 단순해 깐깐하게 따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쉽게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인다. 반대로 대학에서 논문 많이 쓰는 교수들을 만나보면 논리적이기는 한데 시원하게 터진 맛이 없다. 물증(物證)만 중시하고 심증(心證)은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답답하다. 기도만 많이 하고 학문을 하지 않으면 부황해지기 쉽고, 반대로 학문만 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성품이 속되게 변한다.

 

그래서 조선 중기의 서산대사(西山大師)사교입선’(捨敎入禪)을 강조했다. 학문을 어느 정도 연마했으면 마지막에는 이를 버리고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이 순서라는 말이다. 제산은 타고난 명민함에 이 산 저 산을 순례하면서 기도와 선정의 묘미를 터득하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되면 쌍권총을 찬 격이다. 제산의 지리산 시대를 계산해 보니 대략 10년 정도 된다. 31세에 결혼하면서 지리산 시대를 마감하였다고 보면 대략 20대 초반부터 30세까지 지리산 일대를 방랑한 셈이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는 말이 있듯 제산을 키운 것은 8할이 지리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정희의 제안 함양군수를 시켜 주마

 

제산의 지리산 시대에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박대통령과의 만남이다. 제산은 지리산 시절 중엽인 22~30세 무렵 군대에 갔다 와야만 했다. 그가 군대생활을 한 곳은 부산의 군수기지였다고 전한다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제산은 부산의 군수기지에서 군대생활을 하면서 당시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 장군과 인연을 맺었던 것 같다.

그 시기가 1950년대 후반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제산은 졸병으로 군대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령관인 박정희 장군과 졸병이었던 제산이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운명이 작용했을 것이다.

 

비록 계급으로는 졸병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람의 운명을 감정하는 데서는 이미 경지에 올라 있던 제산은 박장군과 계급을 떠나 인간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군대 계급으로 따지면 장군과 일등병의 관계였지만, 운명이라는 주제를 앞에 두고는 카운셀러와 내담자의 관계로 전환되었다.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역술가 앞에서 운명을 문의할 때는 지도받는 학생에 지나지 않는 법이다. 제산은 이때 박장군에게 특별한 운명을 예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신은 장군에서 끝나지 않고 앞으로 제왕이 될 수 있는 운명의 소유자라고 말이다. 박장군도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예언을 점쟁이 일등병의 헛소리로 흘려 듣지않고 상당히 현실성 있는 예언으로 받아들였다.

 

후일 제산이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시 박장군과 자신은 사석에서 만나면 형님, 동생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5·16 이후에는 박대통령이 제산에게 함양군수를 한번 해볼 생각이 있느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제산은 가끔 박대통령이 나에게 함양군수 하라는 것도 거절했다. 그까짓 함양군수 하면 뭐하나? 이렇게 산으로 돌아다니며 사는 것이 훨씬 자유롭지!”라는 이야기를 주변 친구들에게 털어놓곤 하였다.

 

남산 다녀온 후 한동안 기관원 공포증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두 사람의 관계를 끝까지 상생(相生)의 관계로 몰고 가지만은 않았다. 도가의 경전인 음부경’(陰符經)을 보면 은생어해 해생어은’(恩生於害 害生於恩)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원수에게서 은혜가 나오고, 은인으로부터 원수가 나온다는 뜻이다. 은인이 원수 되고 원수가 은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1950년대 후반 부산의 군수기지사령관 시절 이미 제산의 신통력(?)을 파악했던 박대통령은 70년대 초반 10월 유신을 감행할 무렵 제산에게 사람을 보낸다.

 

유신을 하려고 하는데 유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이었다. 이때 박대통령의 메신저로 제산을 찾아온 사람이 청와대의 S비서관이었다고 한다. S비서관은 제산을 찾아와 유신’(維新)의 앞날에 대해 점괘를 물어보았다. S비서관과 이야기를 나누던 제산은 담뱃갑에 유신’(幽神)이라고 볼펜으로 끄적거렸다. 저승 ’()자에 귀신 ’()자 아닌가. 만약 유신(維新)을 하면 그 결과는 저승의 귀신이 된다는 무서운 의미의 예언이었다. 그러자 S비서관은 제산이 끄적거린 담뱃갑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S비서관의 이 모습을 무심히 보고 있던 제산은 순간적으로 아차, 내가 실수했구나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들었다고 한다. 제산은 비서관에게 그 담뱃갑을 가져가지 말고 그냥 두고 가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S비서관은 설마 제가 이 담뱃갑을 박대통령에게 보이기야 하겠습니까?”하면서 주머니에 챙겨 집을 나갔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얼마 있다 건장한 기관원들이 제산을 잡으러 왔다.

비서관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박대통령이 격노했던 것이다. 제산은 남산 지하실로 끌려가 며칠 동안 죽도록 얻어맞았다. 기관원들은 팔을 뒤로 묶어 놓고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고 한다.

 

1970년대는 민주투사만 남산 지하실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지리산의 솔바람이 키워냈던 박도사도 초대 받아야만 했던 시대였다. 중생이 고통 받는데 도사라고 어찌 무사 하리오! 역사라는 쳇바퀴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치를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깨닫는 중이다. 그러니 사회과학자들이여, 역술가들은 역사인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너무 몰아붙이지 마시라! 남산 지하실을 방문한 뒤 제산은 내면의 상처를 입었다. 이른바 기관원 공포증이었다. 낯선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 가운데 혹시 나를 테스트하기 위해 기관원이 섞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였다. 실제로 많은 기관원들이 제산을 찾아와 별의별 테스트를 하기도 하였다.

 

道士(도사)는 어처럼 물 속에 숨어야 한다

 

명성이 알려진 도사는 익명의 다중을 상대해야만 한다. 익명의 다중. 그 가운데는 온갖 사람과 사건이 잠복되어 있다. 도사는 그 잠복된 지뢰를 미리 알고 피해 가야만 하는 고난도의 직업이다.

 

10개의 지뢰 중 9개를 피하더라도 마지막 1개를 피하지 못하고 그물에 걸려들면 그야말로 처참한 망신을 당한다. ‘그러고도 네가 도사냐?’하는 비아냥과 조롱을 감수해야 한다.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 비결은 은둔이다. 숨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서양의 신비주의자들은 악어 가죽을 거처에 걸어두고 보았다고 한다.

 

왜 악어인가. 이유는 두 가지. 우선은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악어의 두껍고 질긴 가죽처럼 욕심이 많다는 것을 통찰하기 위해서다. 다음은 악어처럼 물속에 숨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위해서였다. , 악어처럼 처신해야 한다. 악어는 평상시에는 물 속에 숨어 있는 동물이다. 오로지 두 눈만 내놓고 몸은 물 속에 숨어 있으므로 밖에서 볼 때는 잘 띄지 않는다.

 

악어는 밖을 잘 관찰할 수 있지만, 밖에 있는 상대방은 물 속에 숨어 있는 악어를 관찰할 수 없다. 나는 상대방의 움직임을 볼 수 있지만, 상대방은 나의 움직임을 볼 수 없도록 하는 처신은 천기(天機)를 다뤄야 하는 도사의 필수 덕목이 될 수 있다. 악어가 물 밖으로 나아가 바위 위에서 햇볕을 쪼일 때는 대단히 위험하다. 노출되어 있으므로 사냥꾼의 집중사격을 받을 수 있다.

 

제 아무리 신통력이 있다 해도 일단 무대 위로 올라가면 집중사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총을 쏘면 어떻게 하겠는가. 맞아야지 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도사는 무대 위로 올라가기 전에 삼십육계 놓을 자리를 확보해 두어야 한다. 36번째 마지막 계책은 역시 튀는일이다. 이 세상은 어찌 되든 튀어야 산다.

 

탈출구가 봉쇄된 무대 위로 올라간 도사에게는 불행한 결과만이 기다린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초한지(楚漢誌)에 나오는 장량은 역시 멋진 도사였다. 한몫 챙겨 산으로 과감하게 튀지 않았던가! 도사가 행해야 할 처신의 전범을 보여준 사례다. 산으로 튀지 못하고 세간에서 머뭇거리던 한신은 그 뒤로 어떻게 되었던가.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하지 않았던가.

 

()나라 때 저명한 풍수이자 도사였던 곽박 역시 도망가지 못해 결국 권력자에게 희생당했다. 그런가 하면 당대(唐代)의 도사 양구빈과 송대(宋代)의 도사 오경만은 머리를 깎고 산사(山寺)로 숨어 버렸다. 자고로 도가(道家) 지향적인 인물(taoist)들은 세간에서 한몫 챙겨 산으로 줄행랑을 놓는 것이 모범답안이다. 키스 앤 굿바이(kiss and say goodbye!)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일급 도사들은 세상에 나오지 않고 은둔을 고집한다. 이 역사적인 진리를 간파한 필자도 몇년전 산으로 튀려고 나는 산으로 간다는 제목의 책까지 쓴 바 있지만, 아직 세간에서 챙기지 못해 사바세계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사바세계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초조해진다. 영국의 독설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자꾸 뇌리를 스치기 때문이다. 버나드 쇼가 생전에 자기 묘비명에 반드시 새겨 달라고 부탁했던 문구는 다음과 같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살인범은 一木撑天 木子之行(일목탱천 목자지행)" 이!

 

제산의 일생을 놓고 볼 때 지리산 시대 다음에는 가야산의 해인사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군대를 마치고 다시 지리산에서 공부하던 제산은 집안의 강권에 의해 결혼해야만 했다. 장손이어서 씨는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31세 때 결혼하였다. 그러나 신혼살림을 몇달 한 후 다시 산으로 간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부인에게 나는 산으로 가야 한다. 미처 끝내지 못한 공부를 해야 하니 나를 놓아 주어라하고 해인사로 들어간다. 함양에서 해인사는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다. 해인사가 어떤 절인가. 한국의 삼보사찰 아니던가. 순천 송광사가 국사가 많이 배출된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면, 양산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불보사찰(佛寶寺刹), 그리고 합천 해인사는 불법의 총체인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법보사찰(法寶寺刹)이다.

 

삼보사찰 가운데서도 법보사찰인 해인사는 기강이 엄하기로 유명하다. 예비 스님 과정인 행자생활에서도 해인사에서 행자생활 했다고 하면 제대로 한 것으로 친다. 해인사 행자생활이 다른 절의 행자생활보다 배는 힘들다고 한다. 행자뿐만 아니라 해인사 주지 노릇 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소문나 있다. 그만큼 원리원칙과 법대로 하는 해인사 가풍이다. 그래서 일반 스님들도 해인사에 들어가면 바짝 긴장한다. 머리 깎은 스님들도 그러한데 하물며 머리 기른 유발(宥髮)처사는 어떠했겠는가.

 

사실 머리 기른 처사들은 해인사에서 잘 받아주지도 않는다. 출가 수행자의 청정 공부 도량에 유발 처사들이 머무르면 엄격한 가풍이 흐려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명리를 연구하던 제산의 노선은 불가의 입장에서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외도(外道)에 해당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제산은 해인사의 허락을 받아 장기간 머무를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하숙비를 지불하지 않는 무전취식이었지 않나 싶다. 유발처사(有髮處士)가 한국에서 가장 규율이 엄한 사찰인 해인사에 장기간 머무르다 보니 알게 모르게 천대를 받았다. 그렇게 어정쩡한 신분으로 머무르는 과정에서 사건이 하나 발생하였다.

 

살인사건이었다. 참고로 제산은 31세이던 1965년에서 36세이던 71년까지 해인사에 머물렀다. 살인사건도 이 기간에 일어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살인사건이란 바로 20대 중반의 처녀가 해인사 경내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었다. 늦가을 이른 아침 장경각 밑에서 낙엽을 청소하는데 낙엽 밑에서 처녀 시체가 발견된 것이다. 사찰 경내에서 처녀 시체가 발견되자 해인사는 발칵 뒤집혔다.

 

범인은 누구인가. 관할 합천경찰서에서는 매일 해인사 스님들을 한명씩 경찰서로 호출하여 알리바이를 심문했다. 매일 돌아가면서 스님들이 합천경찰서로 출두해야 하는 상황이 한 달이 넘게 계속되었다. 범인이 나타나지 않으니 계속해서 스님들을 취조할 수밖에. 이러다 보니 해인사의 청정한 수행 가풍이 잘못하면 망가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하지만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없으니 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애가 타는 상황에서 홀연히 이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자청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제산이었다. 뒷방 요사채에서 밥이나 축내던 처사가 사건을 해결해 주겠다고 자청해 나섰던 것이다. 제산은 이 사건은 오직 나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동안 축적되었던 냉대의 설움을 한 순간에 만회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는 선언이었다. “내가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단 한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아무개 총무 스님이 가사장삼을 입고 공손하게 큰절을 3번 해야 한다.

 

총무 스님이 3배를 하고 난 후 지필묵을 나에게 바치면 그 붓으로 사건의 해결책을 써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총무 스님의 삼배를 요구한 이유는 당시 해인사 총무를 맡았던 아무개 스님이 평소 제산을 천대했기 때문이었다. 해인사 측에서는 달리 해결 방도가 없었으므로 오만방자한 이 처사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제산이 정식으로 총무스님의 3배를 받고 난 후 붓으로 써준 글씨는 다음과 같다. ‘일목탱천 목자지행’(一木撑天 木子之行). ()자는 버팀목 탱자다. 해석하면 하나의 나무로 하늘을 지탱하는데, 목자(木子) , ()씨의 소행이라는 뜻이었다. 하나의 나무로 하늘을 지탱한다는 의미는 바로 목수를 지칭한다. 목수는 나무 기둥을 세워 천장을 지탱하는 업종에 해당한다. 그 목수 중에서도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범인이라는 뜻이었다.

 

목수를 찾아보니 사건 한달 전에 대웅전 보수공사를 하느라 목수들이 해인사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공사가 끝난 후 목수들은 모두 흩어졌는데, 그 목수들 가운데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을 수소문 해본 결과 한 사람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다. 합천 경찰서에서는 즉시 형사대를 서울로 급파해 그 이씨 성을 가진 목수를 체포해 심문하였다. 알리바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씨 성을 가진 젊은 목수는 살인을 자백했다. 죽은 처녀는 목수와 사귀던 여자였고, 변심할 기미를 보이자 해인사로 찾아온 애인을 그만 충동적으로 살해했던 것이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과 인연을 맺다

 

이 일로 해서 제산의 명성은 경상도 일대에 널리 퍼졌다. ‘해인사에 천출귀재’(天出鬼才,하늘이 내린 귀신 같은 인물)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제산을 만나기 위해 많은 인파가 해인사로 몰려왔다. 그러던 어느날 50대 중반의 남자가 제산을 만나러 왔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자신을 부산 자갈치시장의 갈치장수라고 소개한 남루한 행색의 그 남자는 제산에게 다른 사람의 사주팔자를 물었다. 자신은 권 아무개라는 사람의 심부름을 왔으니 그 권 아무개의 사주를 봐 달라고 하였다. 권 아무개라는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들여다보던 제산은 갑자기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보아하니 여기 써 있는 권 아무개가 바로 너구나! 네가 권 아무개지? 너는 대구검찰청에 있는 검사장이지? 나를 떠보려고 변장하고 왔구나. 네 놈이 검정고무신을 신고 와서 갈치장사를 한다고 하면 내가 속을 줄 알았나? 네 이놈,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나를 시험하느냐!” 하면서 내리 호통을 쳤다.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벌겋게 달아오른 권 아무개 검사장은 망신만 당하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제산은 격한 감정의 소유자라서 자신의 비위에 안 맞으면 직설적인 육두문자로 감정을 표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렇지만 뒤끝은 전혀 없었다.

 

권 아무개 검사장은 제산의 신통력을 혹독하게 체험하고 나서 평소 친분이 있던 삼성의 이병철 회장에게 해인사 갔다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제산은 한국 최고의 재벌 회장인 이병철 회장과 인연을 맺게 된다. 이병철과 제산. 당대 그 분야 최고수의 만남이었다. 사판(事判)의 대가이면서 남달리 이판(理判)에도 관심이 깊었던 이회장은 젊은 제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일반에서는 삼성의 각종 인사, 특히 중역급 이상의 고위 인사에 알게 모르게 제산이 많이 관여했던 것으로 회자된다.

 

물론 소문으로만 전해지니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다른 재벌 그룹에 비해 삼성맨 가운데 유달리 배신자가 적다는 항간의 이야기는 인사를 채용할 때 이판(理判)과 사판(事判) 양쪽으로 치밀하게 검토한 이회장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그러한 이판 참모 가운데 하나가 제산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무렵 이회장이 제산에게 부산에 있는 5층짜리 빌딩을 사준 것은 사실이다. 물질 가는 데 마음 간다고 5층짜리 빌딩을 사줄 정도로 이회장은 제산을 높이 평가하였고, 그만큼 후하게 대접했던 것 같다. 재벌 회장 가운데 이회장만큼 역술가들에게 대접을 후하게 해 주었던 인물도 따지고 보면 드물다.

 

부산의 효주양 유괴사건을 해결하다

 

제산의 신통력은 다양했다. 언젠가 부산에서 유괴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그 유명한 효주양 유괴사건이다. 이때 부산경찰국장이 이 아무개 씨였다. 유괴범의 단서를 잡지 못한 부산경찰서에서는 마지막 방법으로 제산을 찾아갔다. 그때 제산은 2번이나 범인이 어디 있다는 것을 알려준 바 있다. 제산이 알려준 장소에 효주양 유괴범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부산경찰국장에 새로 부임하는 인물은 모두 제산을 찾아와 안면을 텄다. 미제사건에 대한 최후 대비책으로 제산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해인사를 내려온 이후인 1970년대 초반부터 제산은 주로 부산에서 자리잡고 활동했던 관계로 부산 사람들은 박도사(제산)의 명성을 잘 알고 있다. 어지간한 사람은 박도사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 한두 가지쯤은 알고 있는 편이다. 복채는 평균 20만원 정도 받았다. 서민이 20만원이고 정치인은 200~300만원을 받았다. 1970년대 후반에 20만원이면 적은 돈이 아니다.

 

일반 서민은 부담을 느낄 만한 액수였다. 하지만 효과(?)에 비하면 그 정도 액수는 싸다고 여겼기 때문에 박도사의 집은 항상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몸이 약했던 박도사는 하루에 상담해 주는 사람을 15명 이내로 정했다. 그 이상은 사절하는 수밖에 없었다. 해 보면 알지만 남의 인생사를 들어주고 상담해 주는 일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지금도 부산 사람들은 옛날에 박도사가 풀어준 사주 간명지를 농 밑에 넣어 놓고 한번씩 꺼내 본다고 한다.

  

방으로 날아들어온 벌이 어데로 나갈꼬?”

 

19964월 하순경. 필자는 함양군 서상면 옥산부락에 있는 덕운정사(德雲精舍)를 방문하였다. 덕운정사는 제산의 탄생지에 자신이 직접 세운 도관(道館)이자 집이고 아카데미였다. 대지 2,000평에 50여 칸에 달하는 전통 기와집 형태다. 제산이 도회지에서 은퇴하여 말년에 이곳에서 제자도 키우고 자신의 못다한 정신수양도 하려고 지은 건물이었다. 일반주택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고, 그렇다고 불교 사찰로 보기에는 종교적 냄새가 덜 난다. 그게 바로 도교 도관의 형태다.

 

제산에 대한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얼굴을 대면하고 보니 위풍이 있는 풍채도 아니고 사람을 압도하는 압인지상(壓人之像)의 기운이 보이지 않았다. 알고보니 이때는 이미 건강이 무너지기 시작하던 상태였다. 첫인상은 솔직히 약간 실망스러웠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고 하던데 혹시 허명(虛名)만 요란해진 경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첫 대면에서 나는 아주 평범하면서 극히 세속적인 질문을 던졌다.

 

사주팔자를 한번 보러 왔습니다. 돈을 좀 벌 수 있겠는가 알아보러 왔습니다.”

그러면서 육십갑자로 된 나의 여덟 글자를 내보였다. 사주팔자를 한참 훑어보던 제산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물음을 나에게 휙 던졌다.

벌 한 마리가 날아들어와 요란스럽게 날아다니다 문창에 탁탁 부딪힌다. 이 벌이 어떻게 해야 밖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사주팔자에 언제 돈 벌 운이 올 것인가에 대한 답변치고는 너무나 차원이 다른 답변이었다. 아주 세속적인 물음을 던졌는데 제산은 격외(格外)의 선문답(禪問答)으로 되돌린 것이다. 필자도 난다긴다 하는 제방의 수많은 고수들과 일합씩 겨뤄본 경험이 있어서 어지간한 초식에는 방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언제쯤 대운(大運)이 올 것이라는 대답을 예상하고 있던 필자에게 제산의 벌 한 마리초식은 전혀 예상 밖의 급습이었다. 방심하다 단칼에 찔린 상황이라고나 할까.

 

! 이 사람은 사주팔자나 보아주는 단순한 술객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들었다. 순간적으로 나온 나의 답변은 창문에 부딪쳐 죽어버리죠!”였다. 그러자 제산은 웃으면서 “1급은 아니지만 2급은 되는구먼!”이라고 했다. “2급이라도 돼서 다행입니다하고 다시 맞받았다. 하지만 결과는 나의 판정패였음을 직감했다. KO패 당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어찌 되었든 최악은 면했으니까.

 

벌 이야기는 선가(禪家)에서 회자되는 선문답이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공부했으며 조계종 총무원장을 세번이나 역임한 경산(京山·1917~79) 스님의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는 책에 그 설명이 나온다. 중국 복주 교령사에 신찬선사(神贊禪師)가 있었다. 어려서 은사를 따라 경전공부를 어느 정도 마치고 어디론가 훌훌 떠나 잠적했다. 이윽고 10년만에 누더기 옷을 걸치고 은사를 찾았을 때 은사는 여전히 경전만 읽고 있었다. 어느 봄날 신찬선사는 은사 스님을 모시고 방에서 문을 열어놓은 채 앉아 있었다. 그때 벌 한 마리가 날아들어와 요란스럽게 날아다니다 문창에 탁탁 부딪치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신찬선사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는다.

 

열어 놓은 창으로는 나가지 않고(空門不肯出)

창에 머리를 부딪치니 어리석다 마다(投窓也大癡)

평생 고지(古紙)를 뚫은들(百年古鑿紙)

어느 때 밖으로 나가리오(何時出頭哉)

 

이 시는 벌의 우둔함을 노래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스승의 우둔함을 간접적으로 지적하는 계송이었다. 십년 백년 책만 본다 한들 깨치겠느냐. 아무리 책을 보아도 저 벌이 창을 나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제산이 선가(禪家)1,700 공안(公案) 가운데 하필 이 화두를 나에게 던진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책 좀 그만 보고 기도와 선()을 할 시기가 되었다는 충고로 이해하였다.

 

벌 화두를 통해 이 조용헌의 기를 일단 꺾어 놓은 다음 제산은 필사본으로 된 책을 책장에서 하나 빼왔다. 검정 사인펜으로 써 놓은 책 제목은 성명규지’(性命圭旨)였다. 필자는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다시 한번 놀랐다. 아니! 이 사람이 어떻게 성명규지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성명규지는 중국 명대(明代)의 내단서(內丹書)로서 유··(儒佛仙) 삼교합일(三敎合一)의 입장에서 성명쌍수(性命雙修)를 강조하는 일급 비서다.

 

국내에서도 이 책은 도교 전공 학자들 몇몇이나 알고 있을 뿐 일반인은 잘 모르는 책이다. ‘성명규지에서 강조하는 성명쌍수는 성()과 명()을 모두 닦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성은 불교의 주특기로 자기의 마음을 관찰하는 방법이고, 명은 도교의 주특기로 호흡법을 통하여 몸을 강철같이 단련하는 방법이다. 성만 닦고 명을 닦지 않으면 지혜는 밝지만 몸이 아프고 신통력이 나오지 않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명만 닦고 성을 닦지 않으면 몸은 건강하고 장수할지 몰라도 긍극적인 지혜(ultimate wisdom)는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선불교의 장점과 도교 수련의 장점을 모두 겸비해야만 진정한 도인이 된다는 입장이 성명쌍수요, ‘성명규지의 주장이다. 말하자면 도교와 불교의 장점을 모두 아우르자는 이야기이다.

 

아니 이 책을 어떻게 가지고 계십니까하고 물었다. “자네도 이 책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인가하고 이번에는 제산이 약간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제산이 이 책을 꺼낸 의도는 불교수행만 수행이 아니고 도교 수행도 해야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도불(道佛)수행을 아우르는 비전(秘傳)의 도서(道書)를 하나 소개해 주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젊은 사람이 지리산의 스승들이나 알고 있는 성명규지를 이미 섭렵한 기미를 보이자 제산도 의외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사주팔자 때문에 갔지만 그날 둘 사이의 대화 가운데 사주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4~5시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고금의 기인·달사들에 관한 일화들을 유쾌하게 주고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시간이 다 되어 헤어질 무렵 제산은 여름방학이 되면 거창 연수사로 공부하러 오라. 거기서 같이 지내보자는 제의를 하였다. 나에 대한 은근한 호의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해 여름 나는 중국 천태산(天台山)에서 한산(寒山) 합득(拾得)의 행적을 추적하느라 거창 연수사에 합류하지 못했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인연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자는 생리를 끊고 남자는 정액을 가둬야

 

이 일을 계기로 제산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바뀌었다. 사주팔자나 보아주는 단순한 술객이 아니라, 한국 고유의 선맥(仙脈)에 어떤 형태로든 맥을 댄 도가의 인물이구나 하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다면 제산이 지리산 일대에서 공부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들과 교류했다는 말인가. 그가 관계를 맺었던 도가의 인물들은 과연 누구인가. 어떤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가. 그 뒷조사를 한번 해보자. 그 추적 과정에서 중요한 단서가 하나 발견되었다. 그 단서는 선불가진수어록’(仙佛家眞修語錄)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경북 문경 희양산의 대머리 바위에서 수도한 개운조사(開雲祖師,1790~?)를 추종하는 개운조사파(開雲祖師派)에서 애호하는 수련서다. 성명쌍수가 핵심 내용이다.

 

그 내용을 보면 여자가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생리를 끊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참적룡(斬赤龍)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적룡을 베어라이다. 여자의 멘스를 붉은 용으로 표현하였다. 멘스가 나오면 영()이 빠져 버리므로 저수지에 수문을 세워 물을 가두듯 여자는 생리가 중단되어야만 본격적인 수행의 길로 접어든다는 내용이다. 나이가 들어 멘스가 이미 끝나버린 여자는 호흡을 통해 멘스를 회복시킨 다음 다시 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반대로 남자는 정액을 가두어야 한다.

 

항백호(降白虎)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정액이 흰색이므로 백호로 상징하고 이 정액을 밖으로 배출시키지 않고 내면에 가두어 두어야만 수행이 진전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호로부터 항복 받아야 한다. , 성적 욕망을 컨트롤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항백호와 참적룡이 남녀 수행법의 핵심이다. 필자는 이 책을 경남 합천의 가야산에서 구했다. 개운조사의 제자인 윤양성(尹暘星, 1892~1992) 스님이 있고, 윤양성을 통해 가야산의 혜강 스님에게 전해진 책이다. 그러므로 선불가진수어록은 개운조사파의 중요한 수행 지침서인 셈이다.

 

여기서 먼저 개운조사파를 주목한 이유를 밝힐 필요가 있다. 개운조사는 조선의 고승 가운데 최고의 경지인 아라한과를 가장 확실하게 증득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수행 경지를 말로만이 아닌 물증으로 확실하게 남겨 놓았다. 경북 문경군 화북읍 장암리 용유동 계곡 도로 옆에는 가로 세로 3~4크기의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커다란 초서체로 동천’(洞天)이라는 글씨가 각인되어 있다. 동천은 신선이 거주하는 장소를 일컫는다.

 

문제는 이 글씨가 사람의 주먹으로 새긴 글씨라는 점이다. 정이나 끌로 새긴 글씨가 아니다. 개운조사가 아라한과의 바로 전단계인 아나함과를 성취하고 그 증거로 남긴 물건이다. 개운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동천 글씨는 자신의 주먹으로 썼다고 분명히 나와 있다. 이 주먹 글씨를 남긴 이유는 도()라는 것이 헛된 관념론이라고 비방하는 사람들을 경책하기 위해서였다. 동천이라는 글씨는 도가 있음을 증명하는 물증이다.

 

개운조사는 불교의 승려였지만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고 전한다. 19934월 발행된 월간 신시’(神市)라는 잡지에서는 1970년대까지 개운조사가 생존해 있다는 항간의 소문을 기사로 다루고 있다. , 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의 효창선원(孝暢禪院)이라는 암자에 제자인 윤양성 스님을 만나기 위해 개운조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개운은 다산 정약용이 기중기를 발명하던 무렵인 1790년생이니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다면 200세에 가까운 나이다.

 

서울 여의도에서 주식투자 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포복절도(抱腹絶倒)할 이야기이지만, 지리산 일대에서는 개운조사가 현재까지 생존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수백명이나 된다. 과연 여의도가 현실적인지 지리산이 현실적인지는 대 보아야 한다. 지리산 일대에 개운조사를 추종하는 개운조사파가 형성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대략 200명 이상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전국의 명산 골짜기에 숨어 수행하고 있다. 개운조사가 주석을 단 정본능엄경’(正本楞嚴經)1993년 대구 대영문화사에서 활자화되었는데, 1,000페이지의 볼륨에 5만원의 정가가 붙은 수련 전문서적이다. ‘정본능엄경이 현재까지 팔린 부수만 해도 2,300권이다. ‘정본능엄경은 완전히 수련 전문가를 위한 서적이다. 그만큼 전문 도꾼들의 애호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말이 좀 길어졌지만 선불가진수어록은 개운조사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도서라는 점을 일단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 제산이 이 책의 발행인으로 되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오년(1978) 320일에 발행된 이 책은 저자가 백운산인(白雲山人) 윤일봉(尹一峯)으로 되어 있고, 발행인은 계룡산인(鷄龍山人) 박제산(朴霽山)으로 인쇄되어 있다.

 

그렇다. ‘선불가진수어록은 제산이 인쇄비용을 대고 만든 책이다. 1978년이면 장덕진 농수산부 장관에게 곧 비가 오니 양수기를 사지 말고 기다려 보라고 충고할 즈음이다. 이때 제산은 계룡산 신도안의 법정사에서 공부하던 중이었다. 부산에서 이름도 날리고 가족들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호구지책이 어느 정도 마련되자 훌훌 털고 다시 계룡산으로 입산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계룡산인으로 자처하였다. 각설하고 제산이 선불가진수어록을 발행했다는 사실은 근래 한국 최고의 선맥(仙脈)인 개운조사파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함양 백운산 백운사의 고운 물소리

 

그 관계를 좀더 추적해 보았다. 제산은 지리산 시절 이미 개운조사파와 관련을 맺었다. 개운의 전법제자인 윤양성 스님, 경남 함양의 백운산에 있는 백운사 주지인 문봉스님과 함께 백운사에서 수련하였다. 함양의 백운산은 상연대(上蓮臺)라는 수도처로 유명하다. 상연대는 전국의 한다 하는 도꾼들이 한번쯤 머무르고 싶어하는 영험한 곳이다. 일설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이곳에서 도통했다는 설이 있다. 근세에는 백용성(白龍城, 1864~1940) 스님이 반농반선(半農半禪)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화과원(華果院)을 설립했던 산이 바로 백운산이다.

 

봄에는 노랗게 핀 산수유가 만발하는 산이기도 하다. 백운산 들어가는 계곡 옆에는 백운사라고 하는 허름한 절이 있다. 보기에는 허름하지만 이 절은 계곡의 물소리가 아주 좋다. 커다란 바위절벽 옆에 붙어 있는 이 절은 경내를 감싸고 흐르는 물소리가 일품이다. 특히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의 계절인 봄이 되면 물소리가 나그네의 마음을 붙잡는다. 번뇌를 없애는 데는 계곡의 물소리가 가장 특효약이기 때문이다. 화창한 봄날 노란 산수유가 만발한 계곡에서 물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만가지 시름이 모두 사라지는 경험을 여러번 하였다. 수도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의식의 집중이다. 문제는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이다. 화두에 집중할 것인가, 염불에 집중할 것인가.

 

능엄경에서는 물소리에 집중할 것을 권하고 있다. 물소리에 대한 집중이 가장 쉬우면서도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소리에 집중하는 수행법이 바로 청각을 이용한 이근원통(耳根圓通)이다. 관음보살이 수행해서 효과를 본 수행법이 이근원통이다. 제산은 지리산 시절 고향인 백운사에서 개운조사파의 전법제자인 윤양성 스님, 그리고 백운사의 주지인 문봉 스님과 함께 능엄경의 이근원통 수행을 경험했다. 아울러 개운조사의 성명쌍수 수행법을 이미 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1970년대 후반 계룡산에 입산했을 때 다시 양성·문봉 스님과 함께 신도안의 법정사에서 수련하였다. 계룡산에서 수련할 때는 개운조사파 수련법 외에 약간 다른 비법을 입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약간 다른 비법이란 바로 주문수행이다. 주문은 개운조사파도 역시 하지만, 이 시기 제산이 했던 주문은 구령삼정주’(九靈三鼎呪)라는 주문이었다. 개운조사파는 능엄주(楞嚴呪)를 했지만, 제산은 구령삼정주를 하였다.

 

주문은 기도나 참선보다 효과가 빠르고 굉장한 파워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잘못하면 부작용이 크다. 마음이 강하지 못한 사람이 주문을 하면 정신이 돌아버리는 것이다. 심하면 죽거나 병신이 되는 수도 있다. 그래서 함부로 주문을 하지 못한다. 주문수련은 3가지 유형 중 하나로 귀결된다. 필자는 이를 죽통병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 ‘죽거나 통하거나 병들거나중 하나로 귀결된다. 제산은 구령삼정주를 통하여 한소식 한 것 같다.

 

사주는 이론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영발(靈發)이 있어야 한다. 사주팔자를 한눈에 파악하는 신통력은 구령삼정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구령삼정주는 어떤 주문이란 말인가. 하나를 알면 그 배후의 또 하나를 알아야 한다. 마치 고구마 줄기처럼 그 근원을 소급해 올라가면 한없는 도학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그 최종 근원은 어디란 말인가. 구령삼정주는 조선 후기 민간도교에서 유행했던 옥추경에 포힘되어 있는 주문이다.

 

사주 추명학의 대가들 내용은 촌노의 블로그에서 참조하였습니다.

https://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hs72hs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