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김씨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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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김)

2014. 7. 25.

개성김씨의 연원

 

개성 김씨(開城金氏)의 시조 김용주(金龍株)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 아들인 의성군(義城君) 김석(金錫)의 8세손인 김공우(金公瑀)의 셋째 아들이다. 그가 고려 문종 8년(1051년) 문과에 급제하고 누차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추충공신(推忠功臣)으로 책록되었고, 개성부사(開城府事)를 역임한 후 평장사(平章事)에 가자(加資)되었으며,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짐으로 후손들은 의성 김씨(義城金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개성(開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았다. 그러나 고종 2년(1865년) 특령으로 일부가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환본(還本)되었으며, 시조의 묘는 개성 용수산(龍峀山) 중봉에 있었으나 실전되었다.

개성 김씨의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크게는 중경숭남파(中京崧南派)ㆍ삼남파(三南派)ㆍ북청파(北靑派)ㆍ호남파(湖南派)ㆍ평남강서파(平南江西派)ㆍ강계수하파(江界水下派)로 나뉘어지고, 작게는 중경숭남파에 봉산파(鳳山派) 등 6개파로, 삼남파에 의주파(義州派) 등 11개파로, 북청파에는 북청견처동파(北靑見處洞派) 등 5개파로, 호남파에는 임피파(臨陂派) 등 6개파로, 평남강서파에는 강서파(江西派) 등 6개파로, 강서수하파에는 영동작곡파(永同昨谷派) 등 6개파로 각각 나뉘어졌다.

 

 


▲ 충북 영동군 용산면 부릉리에 세워진 시조 개성군(開城君) 김용주(金龍株)의 세단비(世壇碑).

 

그런데 지선(之宣)은 분관(分貫)하여 설성 김씨(雪城金氏)의 시조가 되는데, 그의 맏아들 문원공(文元公) 원(源)은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고,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원(源)의 손자 문민공(文敏公) 남보(南寶)가 영의정에 증직(贈職)되었다.

황(滉)은 자는 호연(浩然), 호는 어촌(漁村)으로 조선 명종 21년(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군수(郡守)가 되었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아우 유(濡)ㆍ지(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삭녕(朔寧)에 주둔하여 학행(學行)으로 유명했으며, 조헌(趙憲) 등 우수한 제자를 배출해 세상 사람들이 어촌선생(魚村先生)이라 불렀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 용주(龍珠)의 손자 준(晙ㆍ1057~1124)은 자는 적중(適中)으로 선종 2년(1085년)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진주사록(晉州司錄)이 되었으며, 청백리로 선정되어 숙종 6년(1101년) 좌습유지제고(左拾遺知制誥)에 승진되었다. 형부낭중(刑部郎中)을 거쳐 예종 2년(1107년) 윤관(尹瓘)의 여진정벌 때 좌군판관(左軍判官)으로 종군, 싸움에 패한 부하를 죽이려 하는 윤관(尹瓘)을 설득하여 중지시켰다. 그후 상서우승 추밀원우승선(尙書右丞樞密院右承宣)ㆍ예빈경 추밀원지주사(禮賓卿樞密院知奏事)ㆍ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ㆍ좌산기상시 동지추밀원사(左散騎常侍同知樞密院事)ㆍ예부상서 지추밀원사(禮部尙書知樞密院事)ㆍ병부상서 추밀원사 겸 태자빈객(兵部尙書樞密院使兼太子賓客)를 거쳐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였다. 예종 12년(1117년) 검교사공 참지정사(檢校司空參知攻事)를 거쳐 판형부사(判刑部事)ㆍ상서우복야 겸 태자소부(尙書右僕射兼太子少傅)ㆍ수사공(守司空)ㆍ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ㆍ수사도 판예부사(守司徒判禮部事)가 되었으며, 그해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신(貞愼).

준(晙)의 맏아들 지선(之宣)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차남 지경(之慶)은 상서(尙書)를 지냈다.

 

 

 

▲ 복헌(復軒) 김응환(金應煥)의 작품. 클릭!

응환(應煥ㆍ1742∼1789)은 자는 영수(永受), 호는 복헌(復軒)ㆍ담졸당(擔拙堂)으로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으로 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와 찰방(察訪)을 지냈다. 그의 집안은 조선 후기의 뛰어난 화원을 배출하여 화가 가정을 이루었는데, 득신(得臣)ㆍ석신(碩臣)ㆍ양신(良臣) 형제는 그의 조카였으며, 이명기(李命基)ㆍ장한종(張漢宗)은 그의 사위였다. 산수화에 기량을 보여 정조 12년(1788년)에는 왕명으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금강산도(金剛山圖)를 제작하기도 했으며, 이듬해 그는 일본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김홍도(金弘道)와 출발했으나 부산(釜山)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김홍도(金弘道)가 어린 나이로 수행하여 장사를 치른 후, 혼자 대마도(對馬島)에 가서 지도를 그려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다. 그의 회화는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실경산수화풍을 계승했으며, 남종화풍(南宗畵風)을 구사한 산수화들도 알려져 있다. 정선(鄭敾)의 화법을 따른 작품으로는 영조 48년(1772년) 김홍도에게 그려준 개인 소장의 ‘금강산전경도’와 정조 12년(1788년) 왕명에 의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개인 소장의 ‘금강산화첩(金剛山畵帖)’이 전한다.

 

 


복헌(復軒) 김응환(金應煥)의 조카인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의 작품. 클릭!

득신(得臣ㆍ1754∼1822)은 자는 현보(賢輔), 호는 긍재(兢齋)ㆍ홍월헌(弘月軒)으로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으로 초도첨사(椒島僉使)를 지냈다. 인물화에 뛰어났으며, 풍속화의 경우 김홍도(金弘道)의 풍속화풍을 계승하면서 더 많은 배경을 삽입하는 등 특색이 있었다.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ㆍ겸재(謙齋) 정선(鄭敾)과 더불어 영조 때 3재(三齋)라 하였으며, 작품으로 ‘노안도(蘆雁圖)’ㆍ‘천양연출도(天洋年出圖)’ㆍ‘풍속팔곡병(風俗八曲屛)’ 등이 있다.

득신(得臣)의 아우인 석신(碩臣ㆍ1758∼?)은 자는 군익(君翼), 호는 초원(蕉園)으로 응환(應煥)에게 입양(入養)되었으며, 도화서(圖畵署) 화원으로 사과(司果) 벼슬을 지냈다. 풍속화와 산수화를 잘 그렸는데, 굵고 가는 필선과 터치가 짙고 옅은 먹에 의해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그의 화풍에는 정선(鄭敾)과 더불어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영향도 함께 보인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의 화풍은 정선(鄭敾)이나 김홍도(金弘道)에 비해 소박하면서도 섬약한 느낌을 준다. 대표작으로 ‘도봉도(道峰圖)’와 ‘가고중류도(茄鼓中流圖)’가 있으며, 그 밖에 도석인물화인 ‘좌수도해도(坐睡渡海圖)’가 있다.

 

 

 

김득신(金得臣)의 동생으로 복헌(復軒) 김응환(金應煥)에게 입양된 초원(蕉園) 김석신(金碩臣)의 작품. 클릭!

충장공(忠壯公) 절(節)은 일찍이 조헌(趙憲)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익혀 경학(經學)에 밝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조헌(趙憲)을 따라 고향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보은(報恩)ㆍ공주(公州)ㆍ청주(淸州) 등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금산(錦山)에 진을 치고 있던 왜적과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선조(宣祖)는 시호(諡號)와 함께 정려(旌閭)를 내려주어 그의 충절을 기렸다.

 

 


▲ 오소재(吾巢齋)

김여량(金汝亮)을 추가 배향한 충북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송천서원(松泉書院).



여량(汝亮ㆍ1603~1683)은 자는 명보(明甫), 호는 오소재(吾巢齋)로 10세 때부터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인조 11년(1633년)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 주부(奉常侍主簿) 겸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를 역임하였다. 1640년 음성현감(陰城縣監)을 시작으로 외직에 나가 현종 12년(1671년)까지 32년 동안 해미(海美)ㆍ인제ㆍ재령ㆍ창원ㆍ영원 등 12읍의 군수(郡守)ㆍ현감ㆍ부사(府使) 등을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다섯 고을에 ‘청백송덕동비(淸白頌德銅碑)’가 세워졌으며, 현종으로부터 말(馬) 한 필을 하사받았다. 현종 13년(1672년)에는 대사간(大司諫)에 오르고, 뒤에 자헌대부(資憲大夫)ㆍ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ㆍ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되었다.

 

※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5世孫은 24代孫)

 

▣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개성특급시

개성(開城)은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현재 개성직할시가 되었다. 본래 고려의 수도였으며, 그 이전까지 송악군(松嶽郡)·송도(松都)·개경(開京)·부소갑(扶蘇岬)·동비홀(冬比忽)·촉막군(蜀莫郡) 등으로 불리었다. 고구려 때에는 부소갑(扶蘇岬)이라 했으며, 465년(백제 개로왕 11)에는 100년 동안 백제 영토였다. 555년(신라 진흥왕 16)에 신라가 점령한 이후 송악군(松嶽郡)으로 개칭되었고, 898년(효공왕 2)에 궁예가 잠시 태봉의 도읍으로 삼기도 하였다. 919년(고려 태조 2) 1월 수도를 철원(鐵原)에서 송악산(松嶽山) 남쪽으로 옮긴 후 개풍군과 송악을 합쳐 개주(開州)라 불렀고 5부를 설치하였다. 960년(광종 11)에는 개경(開京)으로, 995년(성종 14)에는 개성부(開城府)로 개칭하였다. 조선이 개국하여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1467년(세조 13)에 개성부로 경기도에 편입되어 개성부윤(開城府尹)이 부임해 오다가 1906년 개성군으로 개편되었다. 1949년 시제(市制) 실시에 따라 개성시가 되었고, 1954년 10월 개풍군과 판문군(板門郡)이 황해북도에 편입되었다. 1955년 개성시와 황해북도 개풍군·판문군이 통합되어 개성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1961년 3월 황해북도 장풍군에 강원도 철원군 일부를 편입시키면서 개성직할시의 관할이 되었다. 2004년 1월 개성직할시를 황해북도 개성특급시(開城特級市)로 바꿨다.

 

▣ 인구수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개성김씨는

1985년에는 총 4,568가구 18,777명,

2000년에는 총 6,434가구 20,341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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