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최씨(耽津崔氏)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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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최)

2014. 7. 25.

탐진최씨(耽津崔氏)의 연원
 

 

탐진 최씨(耽津崔氏)는 고려 때 상약원 직장(尙藥院直腸ㆍ왕실에서 사용하는 약을 조제하던 관청의 정7품 벼슬)을 지낸 최철(崔哲)을 원조(遠祖)로 하고, 고려 때 장작감(將作監ㆍ토목 영선을 맡아보던 관청)을 지낸 정(靖)의 아들 사전(思全ㆍ1067~1139)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시조 장경공(莊景公) 최사전(崔思全)의 분산도(墳山圖)가 그려진 탐진최씨족보.


탐진최씨 (耽津崔氏) 始祖 : 思全 (사전)

 

해주최씨 시조 온(溫)의 증손(曾孫)이며 문헌공(文憲公) 충(冲)의 손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921년 개성의 묘소가 발굴되어 지금은 광주박물관에 있는 묘비명에 "사전의 조부는 상약국직장 최철, 부친은 장작감 최정이며, 그 선조는 탐진현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잘못임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의술(醫術)로 출사(出仕)하여 왕(王)의 신임을 받았다. 고려 인종(인종) 4년(1126) 조카사위 이자겸(李資謙 : 思諏의 첫째 사위)이 궁궐을 범하고 함부로 권세를 부리자 왕(王)과 협의하여 이자겸의 심복인 척준경(拓俊京)을 설득, 그를 제거하였다.

 

그 공(功)으로 공신(功臣)에 책록되고 병부상서(兵部尙書)가 되었다. 그후 승진을 거듭, 수태위 문하시랑 평장사(守太尉 門下侍郞 平章事)에 이르러 탐진백(耽津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탐진(耽津 :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으로 하였다. 그러나 오랜 병화(兵火)로 인하여 그 소목계통(昭穆系統)을 고증할 문헌이 없어져 버렸다.

 

그리하여 사전(思全)을 시조로 하고 그 후손 중, 응규(應奎), 준량(俊良), 효로(孝老), 총(聰), 윤덕(允德), 홍건(弘建) 그리고 유각(有恪), 정원(井元), 심충(深忠), 승태(昇泰), 장보(章甫) 등을 중시조(中始祖)로 기일세(起一世)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사전(思全)의 장남 변(弁)은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랐고, 차남 열(烈)은 효인(孝人)이란 칭호를 왕으로부터 받았다. 또 중시조(中始祖) 응규(應奎)는 중서령(中書令)에 오르는 등, 탐진최씨 혈통을 이어 가문을 더욱 빛냈다.


이전 탐진최씨 시조관련 참고 자료임

문헌에 의하면 사전(思全)은 자는 휼세(恤世), 경주 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한 해주 최씨(海州崔氏)의 시조(始祖) 최온(崔溫)의 증손(曾孫)으로 15세에 어의(御醫)로 기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소부소감(小府少監)ㆍ군기소감(軍器小監)에 이르렀다. 이에 선종(宣宗ㆍ재위 1083년~1094년)은 “그대는 완결무결한 경지에 도달한 뛰어난 상의(上醫ㆍ최고의 의사)”라고 극찬한 다음 사전(思全)이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 하사하였다.

 

▲ 장경공(莊景公) 최사전(崔思全)이 죽었다는 ‘고려사(高麗史)’ 17권 세가 17권 인종 17년(1139년) 3월 4일 기록과 인종(仁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는 ‘고려사’ 60권 지(志) 14권의 기록.

 

사전(思全)은 내의(內醫)로서 예종(睿宗)의 등창을 보고 가벼운 종기로 취급하여 별탈 없으리라고 여겨 즉시 치료를 행하지 아니하여 불치의 병이 되고 말았다. 이에 재상(宰相)인 한안인(韓安仁)과 문공미(文公美)는 의관(醫官)으로서 불성실하였으니 의법 처형해야 한다고 청하여 왕이 2년간 도형(徒刑)에 처했다.(安仁 公美等 以太醫崔思全 視 睿宗背疽 以爲微腫 不早治 欲置於法 王 罰徒二年 故 思全 亦頗怨望‘-高麗史節要 제8권)

인종 4년(1126년) 이자겸(李資謙)이 궁궐을 범하고 함부로 권세를 부리자 왕과 협의하여 이자겸(李資謙)의 심복 척준경(拓俊京)을 설복하여 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하게 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이 되었다. 그 뒤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이 더해졌으며 참지정사판상서형부사(參知政事判尙書刑部事)ㆍ수태위 문하시랑평장사(守太尉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탐진백(耽津伯ㆍ탐진은 강진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만년에 스스로 은총이 넘친다 하여 치사(致仕)하고 탐진(耽津)으로 낙향하였다. 인종 17년(1139년) 그가 죽자 조정에서는 삼일간 조회(朝會)를 중지하는 철조(輟朝)를 행하고 부의(賻儀)를 예외로 더 증정했으며, 의종 1년(1147년) 시호(諡號)를 장경(莊景)으로 내리고 인종(仁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 전남 강진군 군동면에 자리한 시조 최사전(崔思全)과 부인 순천 김씨의 합장묘와 묘지(墓誌).


그래서 후손들은 본관을 탐진(耽津)으로 하였으나 사전(思全)의 두 아들 변(弁)ㆍ열(烈) 이하의 기록은 누차의 전란으로 고증할 문헌을 실전(失傳)하여 계통을 밝힐 수 없어 사전(思全)을 시조로 하고, 그 후손 중 응규(應奎)ㆍ준랑(俊良)ㆍ효로(孝老)ㆍ총(聰)ㆍ윤덕(允德)ㆍ홍건(弘建)ㆍ유각(有恪)ㆍ맹상ㆍ해(海)ㆍ제노(悌老)ㆍ심충(深忠)ㆍ승태(昇泰)ㆍ계(啓)ㆍ장보(章甫) 등 각파(各派) 중시조(中始祖)들의 세거지를 따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 1927년 탐진 최씨 문중에서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 시조 최사전(崔思全)을 주벽(主壁)으로 하고 그의 후손인 손암(孫菴) 최윤덕(崔允德)과 금남(錦南) 최부(崔溥) 등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광주광역시시 광산구 월계동 무양서원(武陽書院ㆍ광주시문화재자료 제3호)과 사세오위단정비(四世五位壇庭碑).

사전(思全)의 큰아들 변(弁)은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랐고, 둘째 아들 열(列)은 자(字)는 문장(文章)으로 조정대부(朝正大夫)ㆍ사재 주부동정(司宰主溥同正)을 지냈고 ‘효인(孝仁)’이란 칭호를 왕으로부터 받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보면, 일찍이 사전(思全)은 두 아들에게 금 술병을 한 벌씩 주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첩(妾)이 그 하나를 훔쳐 내었다. 변(弁)이 화가 나서 매를 치려고 하니 열(烈)이 말하기를, “이는 선군(先君ㆍ아버지)이 사랑하시던 사람이라 마땅히 가산을 기울여서라도 구제해야 옳겠거늘 하물며 이 물건이 문제가 되겠소. 제가 얻은 것이 또 있으니 청컨데 이것을 형님에게 드리리다.” 하였다. 왕이 듣고 가상히 여겨 “효자요 또 인인(仁人ㆍ어진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하며 어필로 ‘효인(孝仁)’이라고 써 주었다고 한다.

 
▲ 탐진최씨족보(耽津崔氏族譜).
문헌에 나타난 각 파의 중시조(中始祖) 이래의 내력을 살펴보면 화성파(華城派)는 중조(中祖) 응규(應奎)가 고려 때 중서령(中書令ㆍ중서문하성의 종1품)을 지냈고, 그의 아들 상(尙)은 문종 10년(1056년)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문종 19년(1065년) 예부상서(禮部尙書)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거란에 다녀와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 조선 세종 12년(1430년)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최원습(崔原?)의 묘 앞에 세운 묘표(墓表).

상(尙)의 아들 원습(原?)은 태복시정(太僕寺正)을 지냈으며, 원길(原吉)은 중랑장(中郞將ㆍ정5품 무관직)에 올랐다. 원습(原?)의 아들 용폐(龍陛ㆍ판도판서)ㆍ용승(龍陞ㆍ병부상서)과 용승(龍陞)의 아들 숙륜(叔倫)이 호군(護軍ㆍ장군·정1품)을 지냈다.

강진금천파(康津錦川派)의 중조(中祖) 준량(浚良)은 생원(生員)으로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에 추증되었고, 아들 령(齡)이 예의판서(禮義判書ㆍ고려 때 정3품의 관직)를 지냈으며, 령(齡)의 아들 직림(直霖)은 판도판서(版圖判書)로 오산군(鰲山君)에 봉해졌다. 직림(直霖)의 아들 봉(鳳)은 조선 때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으며, 봉(鳳)의 아들 만(滿)이 조선 세종(世宗) 때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했다.

 

전남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모암서원(慕菴書院)이 1868년 훼철되자 그 자리에 단(壇)을 설치하고, 장성 출신으로 사림의 모범이 된 교리(校理) 최학령(崔鶴齡)을 비롯한 7인의 제사를 올리는 칠현유적지(七賢遺蹟址ㆍ전남문화재자료 제119호).

 

만경파(萬頃派) 중조(中祖) 효로(孝老ㆍ성균관 진사)의 현손(玄孫)인 학령(鶴齡)은 능참봉(陵參奉)을 지낸 숙(淑)의 아들로 자는 운로(雲老), 호는 율정(栗亭)으로 당대의 명신(名臣) 김인후(金麟厚)의 문인이다. 중종 34년(153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했으나 어사의 홍패(紅牌)에 틀린 글자가 있다고 받기를 거절하고 돌려 보낸 뒤 포의(布衣ㆍ벼슬 없는 선비)로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으로 일생을 보냈다. 교리(校理)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장성(長城)의 모암서원(慕菴書院)에 제향되었다.

보성조내파(寶城兆內派) 중조(中祖) 총(聰ㆍ영암군)의 아들 표(彪)는 당대에 명성을 날린 학자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공양왕(恭讓王) 때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고 조선(朝鮮)이 개국하자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그의 아들 귀령(龜靈)은 세종(世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담양부사(潭陽府使)를 지냈으며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강호(江湖)에 숨어 살았다.

광주성서파(光州城西派) 중조(中祖) 윤덕(允德)은 고려 말 영도첨의(領都僉議)로 조선이 개국한 후 광산(光山)으로 귀양가서 살았으며, 손자 호(灝)가 중종 때 계공랑(啓功郞)에 이르렀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총관(摠管)에 추증되었다. 호(灝)의 손자 언웅(彦雄)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 금남(錦南) 최부(崔溥)가 제주도 경차관(敬差官)으로 있던 중 부친상 소식을 듣고 배편으로 고향인 나주(羅州)로 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겪은 5개월간의 역정을 기록한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

금남파(錦南派) 중조(中祖) 정원(井元ㆍ진위부위)의 손자 부(溥ㆍ1454~1504)는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으로 아버지는 진사 택(澤)이다.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글을 배워 성종 13년(1482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교서관 저작(校書館著作)ㆍ군자감 주부(軍資監注簿) 등을 역임했다. 148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교리(敎理)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및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1487년 9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임명되어 제주로 부임했다가 다음해 1월 부친상의 소식을 듣고 나주로 돌아오던 중 초란도(草蘭島) 해안에서 풍랑을 만나 14일간 표류한 끝에 명나라의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도착했다. 왜구로 오인되어 살해될 뻔했으나 야음을 틈타 관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여 베이징(北京)으로 호송되었다가 5개월만에 귀국했다.

 

 

귀국 직후 성종의 명을 받아 그 동안의 견문을 일기 형식의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 3권을 저술, 중국 연안의 해로(海路)ㆍ기후ㆍ산천ㆍ도로ㆍ관부(官府)ㆍ풍속 등을 소개하였으며, 특히 수차(水車)의 제작과 이용법을 배워 뒤에 충청도 지방의 한발(旱魃) 때 이를 사용케 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1492년 지평(持平)에 올랐다가 사간(司諫)으로 전임, 연산군 3년(1497년)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무오사화(戊午士禍ㆍ戊午史禍)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이종준(李宗準)ㆍ이구(李龜)ㆍ김굉필(金宏弼) 등과 함께 붕당(朋黨)을 조직하여 국정을 비방했다는 죄로 단천(端川)으로 유배,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참형을 당했다.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 전남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최택(崔澤)의 묘 앞에 묻힌 아들인 금남(錦南) 최부(崔溥)의 묘와 전남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 최부의 집터에 세워진 유허비.



 

만경율리파(萬頃栗里派) 중조(中祖) 해(海)는 세조(世祖) 때 벽동군수(碧潼郡守ㆍ평안북도)를 지냈으며, 아들 한춘(漢春)은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ㆍ종7품)에 있었고, 한춘(漢春)의 증손 경란(景瀾)은 스무 살에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내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만경율리(萬頃栗里)에 은거(隱居)함으로 후손들이 문호를 열었다.

 

 

그밖에 인물로 경(涇)은 자는 사청(思淸), 호는 근재(謹齋)로 본래 경기도 안산에서 소금을 굽는 염부(鹽夫)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으며, 세종 때에 도화서 화원(圖畵署畵員)을 거쳐 별제(別提)에 이르렀다. 안견(安堅)의 산수화와 함께 인물화를 잘 그려서 유명하였다. 성종 3년(1472년) 소헌왕후(昭憲王后ㆍ세종의 왕비)와 세조(世祖)ㆍ예종(睿宗)ㆍ덕종(德宗)의 어진(御眞)을 그린 공으로 화원으로서는 최초로 당상관(堂上官)에 제수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기도 하였으나 많은 신하들의 반대로 인하여 취소되고 안구마(鞍具馬ㆍ안장을 지운 말)를 하사하였으며, 1484년 당상관(堂上官)에 올랐다.

 


허세를 부리고 과시적인 성격을 지녔었기 때문에 승진을 거듭하기도 하고 도화서(圖畵署)에서 파직되어 매를 맞고 관노(官奴)가 되기도 하는 등 파란이 많은 생애를 살았다. 주로 도화서(圖畵署)의 동료인 안귀생(安貴生)ㆍ배련(裵蓮) 등과 함께 활약하였으며, 북송(北宋)의 이공린(李公麟)과 남송(南宋)의 유송년(劉松年) 등의 화풍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남아 있는 작품이 없어 확인할 길이 없다. 일본에 그의 이름이 적힌 ‘백의관음상(白衣觀音像)’이 한 점 전해지고 있으나 그의 진작(眞作)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홍전(弘甸ㆍ1636~1702)은 자는 수회(壽會)로 남진(南振)의 아들이다. 숙종 5년(167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각 조(曹)의 낭관 등을 역임하다가 숙종 15년(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화를 당하여 관직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은거하였다. 숙종 20년(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南人)이 몰락하자 성환도 찰방(成歡道察訪)에 기용된 뒤 음죽현감(陰竹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취소되었다. 당시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역상(易象) 등에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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