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육씨(沃川陸氏)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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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2014. 7. 26.

육씨(陸氏)는 중국 하남성(河南省)의 육향(陸鄕ㆍ육종)의 지명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 육씨(陸氏)의 연원(淵源)은 ‘옥천육씨대동보(沃川陸氏大同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시조(始祖) 육보(陸寶)는 중국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신라 경순왕 원년(927년) 당(唐)나라 명종(明宗)이 문학전례지신(文學典禮之臣)을 뽑아 신라에 선교사(宣敎使)로 보낼 때 홍은열(洪殷說)ㆍ정한(鄭僩) 등과 함께 8학사의 한사람으로 동래(東來)하여 뛰어난 공적을 쌓아 경순왕(敬順王)의 부마(駙馬)가 되고 관성군(管城君ㆍ관성은 옥천의 옛 지명)에 봉해졌다.
 

 

 ▲ 충북 옥천군 안내면 인포리 걸포마을에 자리한 시조 관성군(管城君) 육보(陸寶)와 후손들의 묘.

육보(陸寶)는 신라가 망하자 충북 옥천군 안내면 인포리(仁浦里)에 은거하면서 매일 산에 올라가 신라의 부흥을 축원하다가 숨졌다고 한다. 이로부터 후손들이 충북 옥천에 정착하여 살면서 육보(陸寶)를 시조로 하고 옥천(沃川)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중간계대(中間系代)를 실전(失傳)하여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주부(主簿)를 역임한 인단(仁端)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옥천 육씨(沃川陸氏)는 일세조(一世祖)인 인단(仁端)의 손자 거원(巨遠)이 고려말에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하고 관성군(管城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명성을 떨쳐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맏아들 려(麗)는 덕곡공파(德谷公派), 둘째 항(沆)은 공주목사공파(公州牧使公派), 셋째 비(埤)는 순찰사공파(巡察使公派), 넷째 수(綬)는 낭장공파(郎將公派)로 크게 갈라졌고, 막내인 태귀(台貴)는 손자대(孫子代)에 후손이 끊겼다.
 

 

 

▲ 1789년 지방 유림의 공의로 육려(陸麗)·임옥산(林玉山)·박이항(朴以恒)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나 1863년 훼철되고, 1958년 다시 세운 전북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 압계서원(鴨溪書院ㆍ전남문화재자료 제35호).
 

각 파별로 대표적인 인물을 열거해 보면 덕곡공파(德谷公派)의 려(麗)는 호가 덕곡(德谷)으로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왜적(倭賊)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워 크게 이름을 날렸으며, 경주(慶州)에 공적비가 세워졌다. 또한 여말에 불교의 폐해가 심하자 공양왕 때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조선이 개국하자 절개를 지켜 벼슬을 버리고 충남 공주시 덕리(德里)에 은거하였다. 후에 전북 장수(長水)의 압계사(鴨溪祠)에 배향되어 후인들이 추모하고 있다

그의 손자 명산(命山)은 대장군(大將軍ㆍ무관의 종3품 벼슬)을 역임했으며, 후대에 내려가 다시 석동계(石同系)와 석정계(石貞系)로 나누어져 조선조에서 충의(忠義)의 전통을 이었다.
 

 

 

▲ (좌)전북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에 소재한 도순찰사(都巡察使) 육려(陸麗)의 묘. (우)육려(陸麗)의 손자 대장군(大將軍) 육명산(陸命山)의 묘.
 

공주목사공파(公州牧使公派) 항(沆)의 맏아들 진(晉)의 후손에서 부위(副尉)를 지낸 저(渚)와 제주목사(濟州牧使) 한(閑), 동래현감(東萊縣監) 세영(世英), 조선 정조(正祖) 때 유학자 상지(相贄) 등이 있고, 둘째 상(常)의 후손으로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ㆍ중추부의 종2품 벼슬) 춘수(春秀), 만호(萬戶) 석(碩)과 선조(宣祖) 때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 성우(成禹) 등이 있다.

순찰사공파(巡察使公派)는 비(埤)의 아들 애(涯)가 참판(參判)을 지냈으며, 그의 두 아들 지(輊ㆍ부사를 역임)와 헌(軒ㆍ참봉)의 대(代)에서 다시 두 파로 갈라졌다.

낭장공파(郎將公派)는 조선 명종(明宗) 때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한종(漢宗)과 선조(宣祖) 때 통정대부(通政大夫ㆍ정3품 당상관 품계)를 역임한 붕(鵬)이 대표적이며, 숙종(肅宗) 때 학자 홍(鴻)은 문장과 덕행(德行)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저서(著書)로 ‘석정유고(石亭遺稿)’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