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석씨(忠州石氏)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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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2014. 7. 26.

충주 석씨(忠州石氏)의 연원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의 문헌에는 석씨(石氏)의 본관이 70여 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충주(忠州)ㆍ해주(海州)ㆍ화원(花園ㆍ성주의 속현)ㆍ광주(廣州)ㆍ원주(原州)ㆍ양주(楊洲)ㆍ홍주(洪州) 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고증되지 않았고, 해주(海州)를 제외한 나머지 관향(貫鄕)은 모두가 동원분파(同源分派)라는 것이 통설로 오늘날에는 사실상 충주 석씨(忠州石氏) 단본으로 일원화되었다. 따라서 현재 석씨(石氏)의 본관으로는 충주 석씨(忠州石氏)와 조선 중엽에 명나라로부터 귀화한 해주 석씨(海州石氏) 2본이 있다.

 

▲ 1769년에 간행된 충주 석씨 최초 족보인 기축보(己丑譜)의 서문.

 

‘만성보(萬姓譜)’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 옛 문헌에는 충주 석씨(忠州石氏)의 시조(始祖)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낸 석주(石?)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아들 천보(天補)ㆍ천경(天卿)과 함께 충렬왕의 총애를 받게 되자 교만과 횡포가 지나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충렬왕 29년(1303년) 김세(金世)가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석주 일당이 충렬왕을 받들어 섬으로 도망하기 위하여 배를 만들며 양식을 비축한다고 고소함으로써 원나라에서 파견된 단사관(斷事官) 티무르부카(帖木兒不花)에 의하여 아들들과 함께 연경(燕京)으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김세(金世)와 대질한 결과 죄가 인정되어 가산은 적몰되고, 아들들과 함께 장류(杖流)되었다.

 

 

 

▲ 1890년 간행된 경인보(庚寅譜)에 실려 있는 석씨원류분파도(石氏源流分派圖).

 

▲ 1890년 간행된 경인보(庚寅譜).

 

‘충주석씨세보(忠州石氏世譜)’에 의하면 실질적인 충주 석씨의 시조는 연대가 앞선 석린(石?ㆍ고려사에는 石隣)이다. 석린(石隣ㆍ?∼1187)은 사창(社倉) 주변의 쌀을 주워 모아 양식으로 하여 살아오던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서 금군(禁軍)에 보직되어 고려 의종(毅宗) 24년(1170년) 정중부의 난[庚寅亂] 때 이의방(李義方)을 따라 가담, 서경낭장(西京郎將)으로 발탁되었다. 명종 4년(1174년) 동로가발병마사(東路加發兵馬使) 두경승(杜景升)의 휘하에서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고, 상장군(上將軍ㆍ각 군영의 으뜸 장수로 정3품)과 도원수(都元帥)에 오르고 문무겸전하여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졌다. 예성(蘂城)은 충주(忠州)의 고호(古號)라 이로서 후손들은 충주(忠州)를 본관으로 삼았다.

동북면병마사와 서북면병마사를 지낼 때 역리(驛吏)로부터 은 2근을 뇌물로 받고 부탁받은 일을 서해도 안찰사 강용유(康用儒)에게 청탁하였다가 거절당하자 왕에게 그의 파면을 건의했으나 다시 거절되자 무례한 행동을 하고 나가버렸다. 결국 왕이 강용유를 파면하자 분노를 풀었으나, 다시 파면을 취소하므로 여러 번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187년 조원정(曺元正)과 함께 재상 문극겸(文克謙)을 제거하려고 반란을 일으켜 밤에 궁궐을 침범하다가 잡혀 죽었으며, ‘계축보(癸丑譜)’에는 그가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되어 있다.


▲ ‘고려사(高麗史)’ 128권 열전(列傳) 41권 반역(叛逆)조에 실린 석린(石隣) 열전.

 

 

2세 정(靖)은 숭록대부(崇祿大夫)ㆍ행밀직제학(行密直提學), 3세 달(

)은 자헌대부(資憲大夫)ㆍ행밀직제학(行密直提學), 4세 흥국(興國)은 가선대부(嘉善大夫)ㆍ행문하시중(行門下侍中)의 관직에 올랐다고 한다. 그런데 자헌대부(資憲大夫)나 가선대부(嘉善大夫)는 조선조의 관계(官階)이다. 6세 양선(良善)이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李子春ㆍ桓祖))과 동서간이므로, 그에서 소급해 보면 3세 달(
)과 4세 흥국(興國)이 활동했던 시기는 13세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13세기에 생존했던 인물에 조선조의 관계(官階)가 주어졌다는 기록에는 의문이 있다.

 

 

5세 도(道)는 판결사 겸 쌍성총관(判決事兼雙城摠管)을 지냈다고 한다. 쌍성(雙城)은 고려시대의 동북면(東北面) 지방에 설치되었던 원(元)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말한다. 그의 아들인 양선(良善)은 최한기(崔閑奇)의 사위였다. 최한기(崔閑奇)는 이성계가(李成桂家)의 세계(世系)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서 살펴보면, 당시 쌍성천호(雙城千戶)로서 쌍성(雙城)지방의 세력가였다. 그렇다면 5세 도(道)와 6세 양선(良善)대에 걸쳐서 석씨가(石氏家)는 고려가 아닌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에 거주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6세 양선(良善)은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이모부이다. 이성계(李成桂)의 어머니(의혜왕후<懿惠王后>)가 출산 후 곧 죽었으므로 이성계(李成桂)는 이모인 최씨(崔氏)손에서 키워졌다. 그래서 즉위 후에 이모를 경창옹주(慶昌翁主)에, 이모부를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봉했을 뿐 아니라, 외조부인 최한기(崔閑奇)는 정효공(靖孝公)으로 봉했다. 정효공(靖孝公)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교(敎)를 내려서 외손(外孫)인 7세 천을(天乙)이 봉사(奉祀)하게 했다. 그런데 천을(天乙)이 독자여서 양가(兩家)의 봉사(奉祀)를 할 수 없으므로 다시 교(敎)를 내려 옹주묘(翁主墓)의 봉사(奉祀)를 역시 외손(外孫)인 안령(安齡)이 하게 하였다.

▲ 조선 태조가 1393년 1월 1일 이종사촌인 석천을(石天乙)에게 내린 어필 봉사(御筆奉寫)와 경남 창녕군 이방면 옥천리 어필각.

 

 

석씨(石氏)가 가문의 세력을 키운 것은 7세조인 천을(天乙)로, 천을(天乙)은 조선 태조와 이종4촌간이었으므로 조선 개국 후 그의 자손이 현달하게 되었다. 천을(天乙)은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한 후 슬하에 아들 수명(壽明)과 여명(汝明)을 두어 이들이 충주 석씨(忠州石氏)의 양대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 조선 제3대 태종(太宗)이 1416년 6월 2일 화원(花園) 석여명(石汝明)에게 내린 어필왕지(御筆王旨)와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진암리 어필각.

 

 

그런데 ‘경인보(庚寅譜)’ 서문에 보면 석씨(石氏)가 충주(忠州)와 홍주(洪州)로 분관(分貫)하게 된 것은 천을(天乙)의 아들에 이르러서다. 천을(天乙)의 맏아들 수명(壽明)은 조선조에서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홍주(洪州)로 분관(分貫)하였다. 그의 아우 여명(汝明)은 호는 화원(花園)으로 고려 말 성균관(成均館)의 생원(生員)으로 문과(文科)에 3등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지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태종(太宗)이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을 내렸으나 불취하고 학문연구에 전심하였다. 태종이 여명(汝明)을 충주(忠州)의 수의산 회문동(守義山回文洞)에 안치시켰는데, 죽은 후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하였다. 이후로 석씨(石氏)가 홍주(洪州)와 충주(忠州)로 분관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동조동원(同祖同源)이므로 그뒤 ‘경인보(庚寅譜)’ 수보(修譜) 때에 대동보(大同譜)로 합보(合譜)하게 되었다고 한다.

▲ 충북 충주시 신니면 문락리 회문마을에 자리한 화원(花園) 석여명(石汝明)의 단소와 신도비 및 그을 제향하기 위해 1988년 세운 화원재(花園齋).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20명에 이르며, 특히 조선조에 와서 가세(家勢)를 일으킨 인물로는 수명(壽明)의 아들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태천군수(泰川郡守)을 지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관(瓘)과 여명(汝明)의 아들 문수(文守·禮曹參判)ㆍ문현(文賢·利川縣監)ㆍ문성(文成·直提學) 3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했다. 수명(壽明)의 후손은 판윤공파(判尹公派)이고, 여명(汝明)의 아들은 문수(文守)의 후손이 참판공파(參判公派), 문현(文賢)의 후손이 참의공파(參議公派)로 나누어지고, 문성(文成)의 후손은 세분된다.

문성(文成ㆍ?∼1380)은 좌찬성(左贊成) 여명(汝明)의 아들로 고려 공민왕(恭愍王) 13년(1364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있을 때 왜구가 착량(窄梁ㆍ지금의 경기도 수원 지방)에 침입하자 밀직부사(密直副使) 변안렬(邊安烈)과 함께 이를 물리쳐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듬해 신돈(辛旽)의 무고로 장암(長巖ㆍ지금의 충남 서천 지방)에 유배되고 가산(家産)은 몰수되었다. 뒤에 풀려나 삼사우사(三司右使ㆍ국가 전곡의 출납과 회계를 맡아 보는 정2품)가 되었으며, 우왕 3년(1377년) 왜구가 수안(守安ㆍ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ㆍ통진(通津ㆍ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ㆍ동성(童城ㆍ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등지에 침입하였을 때 최영(崔瑩) 등과 함께 원수(元帥)로 출전하여 이를 방어하였다.

▲ 예원군(蘂原君) 석인정(石仁正)의 순안 창읍실적비(創邑實績碑)의 비문.

 

 

문성(文成)은 다섯 아들을 두었다. 맏아들 인정(仁正)은 세조(世祖) 때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내고 예원군(蘂原君)에 봉해졌는데, 순안에 창읍실적비(創邑實績碑)와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용암사(龍岩祠)에 제향되었으며, 후손이 모정공파(茅亭公派)이다. 예조참의(禮曹參議)을 역임한 의정(義正)의 후손은 병사공파(兵使公派)ㆍ통덕랑파(通德郞派)ㆍ방어사공파(防禦使公派)ㆍ선전관공파(宣傳官公派)ㆍ첨정공파(僉正公派)의 5개파로 분파되었다. 정산현감(定山縣監)을 역임한 예정(禮正)의 후손은 현감공파(縣監公派)이며,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를 지낸 지정(智正)의 후손은 승지공파(承旨公派), 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를 지낸 신정(信正)의 후손은 한림공파(翰林公派)로 분파되었다.

참의공파(參議公派)의 파조 문현(文賢)의 손자 성옥(成玉)은 가선대부(嘉善大夫)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고, 문성(文成)의 손자 사진(斯珍)은 세종조에 등과하여 단종 2년(1453년) 행경상우병마절도사 겸 수군절제사(行慶尙右兵馬節度使兼水軍節制使)에 올랐으며, 세조가 즉위하자 의령(宜寧)에 퇴거하여 여생을 보냈다. 동생들인 사감(斯?)은 통덕랑(通德郞), 사화(斯?)은 방어사(防禦使), 옥점(玉?)은 병조좌랑(兵曹佐郞) 겸(兼) 훈련원선전관(訓練院宣傳官)을 지냈다.

규(奎)는 문과를 거쳐 전적(典籍)ㆍ목천현감(木川縣監)을 지냈고, 조(趙)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다. 광보(光輔)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고, 천근(千斤)은 선조 임진왜란 때 원종(元宗)1등공신에 봉해졌고, 말립(末立)은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위계에 올랐는데 행도호부사(行都護府使)의 관직을 역임했다. 무과에 급제한 충남(忠男)은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으며, 종(琮)은 선조조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으나 광해군이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성주에 은거하였다.

매성(邁省)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고, 계흥(繼興)은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지냈다. 재사(載士)ㆍ동현(東顯)ㆍ우주(宇柱)는 모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고, 부창(富昌)은 행한성좌윤(行漢城左尹)ㆍ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의 벼슬에 올랐다. 무과를 거쳐 관직에 나아간 만수(萬壽)는 만호(萬戶)ㆍ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지암(之巖)도 무과(武科)를 거쳤는데, 선전관옥강만호(宣傳官玉江萬戶)를 거쳐 훈련주부(訓練主簿), 어모장군(禦侮將軍), 개천군수(价川郡守)를 역임하였다. 백(栢)은 임진왜란 때 공신이며 임란공신유사지 및 창녕군지의사 및 충신편에 기록되어 있다.

기곤(基坤)은 문과에 급제한 후 행경상도사(行慶尙都事)ㆍ병조좌랑(兵曹佐郞)ㆍ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였으며, 치경(致敬)은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고, 성진(成瑨)은 절충장군(折衝將軍)의 당상관(堂上官)에 올라 행서북진무(行西北鎭撫) 겸(兼) 절제사(節制使)를 지냈다. 봉손(奉孫)은 사간원교수(司諫院敎授) 겸(兼) 우승지(右承旨)를 지냈고, 재주(載柱)는 용양위부호군(龍?衛副護軍)을 지냈다.

▲ 중종 때의 화가 석경(石敬)의 계산청월(溪山晴月).
▲ 15세기 중엽~16세기 전반에 그려진 석경(石敬)의 운룡도(雲龍圖).

 

 

그외에 호조전서(戶曹典書)로 남대문(南大門) 창건에 참여한 숭(崇)과 중종(中宗) 때 화가(畵家)인 경(敬)이 유명했다. 경(敬)은 인물ㆍ묵죽(墨竹)ㆍ운룡(雲龍)을 잘 그렸던 화가로, 안견(安堅)에게서 그림을 배웠던 제자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안견의 제자였다고 하는 것은 오세창(吳世昌)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만 보이고 있고, 다른 기록들에서는 확인되지 않아 분명한 사실로 단정지을 수 없다. 또 ‘명종실록’에는 ‘석경(石璟)’이라는 화원(畵員)이 이상좌(李上佐)와 함께 명종 4년(1549년)에 중종의 영정(影幀)을 그렸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석경은 바로 석경(石敬)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되므로, 석경은 16세기 중엽에 활동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그가 1세기 전의 화가였던 안견의 제자일 수는 없고, 아마도 안견파의 화풍을 추종했던 16세기의 화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그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산수도’(간송미술관 소장) 한 폭과 그의 도인(圖印)이 찍힌 ‘운룡도(雲龍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 점이 남아 있다.

희박(希璞)은 자는 자성(子成), 호는 남천(南川)으로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때 약관 20세로 강화를 주장한 최명길(崔鳴吉)의 서기(書記)로 활약하였다. 일찍이 신유(申濡)에게서 수학하였는데, 신유가 언사(言事)에 연루되어 서쪽 변방으로 유배되자 관직을 버리고 그를 따라갔다가 뒤에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오게 되자 함께 돌아왔다. 사람됨이 세속을 멀리하고 다만 시와 술을 즐기었는데, 시가 아름답다는 명성이 있었다. 몇 편의 시가 ‘해동유주(海東遺珠)’와 ‘소대풍요(昭代風謠)’ 등에 실려 있다. 그의 아들 만재(萬載)는 자는 계수(季?), 호는 두촌(豆村)으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시를 잘 썼는데, 대표작인 ‘국경에서’는 청나라의 침략에 대해 애국을 노래한 서정시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부자시집(父子詩集)인 ‘남천두촌고(南川豆村稿)’를 냈다.

▲ 인조 14년(1636년) 청군이 남한산성에 침입한 병자호란 때의 일을 기록한 수현(壽峴) 석지형(石之珩)의 ‘남한일기(南漢日記)’와 유묵 및 1709년 아들 석규서(石奎瑞)가 편집ㆍ간행한 ‘수현집(壽峴集)’.

 

 

지형(之珩ㆍ1610~?)은 자는 숙진(叔珍), 호는 수현(壽峴)으로 경하(擎廈)의 아들이다. 인조 12년(163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한 후 형조정랑(刑曹正郞)ㆍ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 등을 역임하였으며, 횡성현감으로 재직중 죄를 지어 김해에 유배되었다. 다시 풀려나 효종 4년(1653년) 강화부교수(江華府敎授)를 지냈는데, 이때 시사(時事)를 논하는 글을 상소하고 자신이 편찬한 ‘오행구감(五行龜鑑)’을 바쳐 임금으로부터 ‘역경(易經)’ㆍ‘심경(心經)’과 함께 호피(虎皮)를 상으로 받았다. 이후로도 개성부교수(開城府敎授) 등을 지냈으며, 현종 5년(1664년)에는 교수(敎授)로 있으면서 돈 많은 상인과 결탁하여 뇌물을 받고 대신 글을 지어주었다는 탄핵을 받았다. 저서로는 ‘수현집(壽峴集)’과 ‘남한일기(南漢日記)’ 등이 있다.

한말의 의병장으로 성국(成國)과 창문(昌文)이 이름을 날렸다. 성국(成國ㆍ?∼1895)은 충북 보은(報恩) 출신으로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청주(淸州)에서 한봉수(韓鳳洙)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 뒤에 일본군을 염탐하기 위해 홀로 적중(敵中)으로 들어갔다가 붙잡혔으나, 자신의 고환(睾丸)을 끊어버리고 자결하였다. 일본 문화관광의 ‘보은군의 소개(報恩郡の紹介)’에는 석성국(石成國)의 몰년이 1907년으로 되어 있다.

창문(昌文ㆍ1885~1908)은 자는 성국(聖國)으로 생활이 빈곤하여 상업으로 가사를 돕던 중 의병에 가담, 광무 11년(1907년) 고종황제의 양위와 군대해산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속리산(俗離山)에서 싸움마다 선봉에 서서 일본군에게 많은 타격을 주었다. 융희 2년(1908년) 사명을 띠고 홀로 오대산을 향해 가던 중 수십 명의 일본군에 포위되어 격전 끝에 체포되었지만 끝까지 항거, 스스로 혀를 끊어 의병군의 소재를 밝히지 않고 순국했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성기(盛基)는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 때 경성의학 전문학생으로 탑골공원 독립선언식에 참가하고 고향인 상주에 내려와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으며, 그 후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갖은 고문을 당하고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출감 후 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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