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차사(咸興差使) 박순(朴淳)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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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를 찾아서

2016. 6. 15.

함흥차사(咸興差使) 박순(朴淳) 이야기

 

 

함흥차사(咸興差使)


심부름을 간 사람이 소식이 아주 없거나 또는 회답이 좀처럼 오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

咸 : 다함, 興 : 일어날흥, 差 : 어긋날차, 使 : 부릴사

 

조선 태조 이성계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 울분하여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함흥으로 가버린 뒤, 태종이 그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고자 함흥으로 여러 번 사신을 보냈으나 이성계는 그 사신들을 죽이거나 잡아 가두고 보내지 않았으므로, 한번 가면 깜깜소식이라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함흥차사(咸興差使)는 조선 태종 이방원이 태조의 환궁을 권유하려고 함흥으로 보낸 차사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차사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세간에 퍼지면서, 한 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는 뜻으로 바뀌었다. 이는 태종 이방원이 저지른 일(왕자의 난)과 그것을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았던 태조 이성계를 바라보던 백성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 사실과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함흥차사는 민정중이 쓴《노봉집(老峯集)》에 나오는 박순의 시장(諡狀), 선조 때 차천로(車天輅)가 지은《오산설림(五山說林) 등의 책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야사일 뿐 실제로 박순은 조사의(趙思義) 난(亂)때 에서 태조 이성계를 설득하기 위해 함흥에 박순(朴淳), 송류(宋琉) 등을 파견하여 도순문사 박만(朴蔓)을 설득(반군 회유) 하다가 도리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당시 조정에서 상호군 박순(朴淳)을 보내 반군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박순은 함주(咸州)에 이르러 도순문사 박만(朴曼)과 주·군 수령을 회유하다가 군중에게 피살되었고, 호군 송류(宋琉)도 명령을 받고 함주에 이르렀다가 역시 피살되었다.


태종실록에도 박순은 조사의(趙思義)의 난이 일어나자 함주의 군중(軍中)에 피살됐다고 적혀 있다.

함흥차사에 관한 일화가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야사를 정사로 볼 수 없다는 증거로 자주 거론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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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의의 난(趙思義-亂)은 1402년 안변부사 조사의가 동북면(함경도)에서 일으킨 반란을 말한다.

 

발단

조사의는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 방석(芳碩)이 희생되자 벼르고 있다가 태종(이방원) 때인 1402년 태상왕 태조의 위세를 등에 업고 봉기하였다.

 

명분은 죽어서도 학대받은 신덕왕후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었다. 이때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 강현도 참여하였다.

 

배경

신덕왕후(神德王后, 조선 태조의 계비) 강씨(康氏)의 친척으로 1393년 형조에서 의랑(議郞)을 지냈고 1397년 첨절제사(僉節制使) 등을 지냈다. 하지만 1398년 이방원의 난이 일어나면서 직위에서 쫓겨났으며 서인으로 전락하여 전라도 수군에 배치되어 노역에 종사하였다.

 

이후 풀려나 1402년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복권되었다. 그가 안변부사로 보임을 받은 것은 이성계의 영향이었다. 이성계는 조사의가 신덕왕후의 친척이라고 아꼈는데 태종 이방원은 이점을 알고 그를 풀어주고 안변부사로 보냈던 것이다. 부임지인 안변에 당도하여 지방 호족세력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도모하였고 이성계는 조사의를 지지하였다.

 

경과

조정에서는 태조 이성계를 설득하기 위해 박순(朴淳), 송류(宋琉) 등을 파견하여 반군을 회유하였으나 도리어 죽음을 당하였다. 초기에는 반군이 우세하여 관군의 선봉 이천우(李天佑)를 격파하였으나 그 후 관군이 군을 재정비하고 재공격을 가하자 반군은 무너졌고 조사의 등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함흥차사(咸興差使)의 고사(古事)가 바로 이 사건에서 연유되었다.

 

조사의의 반란군은 병사를 평안도 덕천(德川)·안주(安州) 방면으로 이동시켰으며 군사는 1만 명으로 늘어났다. 1402년 11월 27일 청천강에서 진압군과 싸움이 벌어졌으나 조사의가 이끄는 반란군이 대패하고 말았다. 사기가 저하된 부하들이 이산하자 안변에 돌아와 아들 조홍(趙洪)과 함께 관군에 잡혀 12월 7일 도성으로 압송되었다가 18일 참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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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의의 난의 배경

조사의는 원래 강비(康妃: 태조의 제2妃인 顯妃) 의 측근으로 태조의 제1부인 한비가 승하하고 나서 강씨가 후(后)의 자리에 오르자 벼슬을 얻게 되어 함경도 연변에 부사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강비의 소생 두 왕자들이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의 측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함길도 연변의 먼 발치에서 두왕자들의 비극을 들은 이후에 조사의는 강비도 어쩌면 이방원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까하는 억측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억측은 차츰 시간이 갈수록 이방원이 강비를 살해했을 것이라는 그의 심증은 강한 신념체계로 형성하여 그것을 명분으로 내세워 이방원의 왕권을 타도할 엉뚱한 야심을 품게 되었다. 이미 자신의 후원자인 강비가 죽고 그녀의 아들들마져 이방원 세력에게 참살당했으니, 조정에서 자신을 후원할 정치세력은 없어지고 자신이 출세할 발판은 이미 없어졌다고 믿게 되었다.

조사의는 자신의 모반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이성계의 정치적 후원을 업을 필요가 있었다. 이성계를 만난 조사의는 첫 말이 "이 조선은 태상왕 전하의 땅입니다"라는 간교한 아첨으로 이성계의 호감을 얻었고, 조사의는 이성계의 이방원에 대한 반감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추겼다. 어리석게도,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에게 나라를 빼앗겼다는 수치심이 작동하여 틈만 있으면, 이방원의 반대세력을 규합하여 임금에 재추재되려는 미련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함흥에서 속터지는 심정을 달래고 있던 중에 이곳을 방문한 조사의의 격려에 "천군만마의 힘을 얻었다"고 실토하고 5백여명밖에 되지 않는 조사의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아들 이방원의 조정을 타도하려는 실오라기같은 재집권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조사의의 난의 전개

태종 2년(1402) 11월 신덕왕후와 세자 방석(芳碩)의 원수를 갚고, 태조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명분으로 반기를 들었다.

조정에서 무마시키려 파견한 상호군(上護軍) 박순(朴淳), 송류(宋琉) 등을 죽이고, 평안도 덕천, 안주 방면을 거쳐 한양으로 진격하던 중 이천우(李天祐)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진로를 막고 회유책을 써서 반란군을 분산시킴에 따라 안변으로 후퇴하다가 아들 조홍(趙洪)과 함께 도안무사(道按撫使) 김영렬(金英烈)에게 체포, 주살(誅殺)되었다. 


처음 조사의의 군은 고맹주(古孟州)에서 이천우의 군사를 격파하여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1402년 12월에 접어들자 반란군의 사기가 저하되고 김천우(金天祐)라는 자가 잡혀와 정부군의 수가 4만여 명이 넘는다고 하자 두려움이 극에 달해 조화(趙和)가 도망하려고 밤에 군막에 불을 지르고 소리쳐 결국 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틈에 관군이 승리하여 조사의와 아들 홍() 등이 잡혀 모두 복주(伏誅 : 형벌을 받아 죽음을 당함)되고, 정용수(鄭龍壽신효창(申孝昌) 등은 외방(外方)으로 귀향갔다. 이 일로 안변 대도호부를 강등시켜 감무(監務) 파견지역으로 만들었다


조사의(趙思義) : 조선 전기 무신 ? ∼ 1402(태종 2)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친척으로 조선 전기의 무신이다. 태조 2년(1393)에 형조 의랑 · 순군(巡軍)을 거쳐 1398년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낸 뒤 안변 부사가 되었다. 태종 2년(1402) 11월, 신덕왕후와 세자 방석(芳碩)의 원수를 갚고, 태조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명분으로 반기를 들었다. 조정에서 무마시키려 파견한 상호군(上護軍) 박순(朴淳), 송류(宋琉) 등을 죽이고, 평안도 덕천, 안주 방면을 거쳐 한양으로 진격하던 중 이천우(李天祐)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진로를 막고 회유책을 써서 반란군을 분산시킴에 따라 안변으로 후퇴하다가 아들 조홍(趙洪)과 함께 도안무사(道按撫使) 김영렬(金英烈)에게 체포, 주살(誅殺)되었다.




박순 (朴淳)

조선 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무신이자 음성박씨의 선조.

 

가계

본관은 음성(陰城). 고려 평장사(平章事) 박서(朴犀)의 후손이며 시랑(侍郞) 박문길(朴文吉)의 아들이다. 효자문이 남아 있는 박호원(朴浩遠)이 박순의 아들이며 대사헌까지 지낸 박숙채(朴菽蔡)가 손자이다. 조선 중기의 선비인 박유겸(朴惟謙)은 박순의 후손이다. 박순의 처 장흥임씨(長興任氏)는 고려시대 대사헌(大司憲) 임헌(任獻)의 딸이다.

 

활동사항

박순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활동했던 인물로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 때 이성계 휘하에서 종군하였고, 위화도 회군에도 관여하여 조선 개국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성계와는 친구지간으로 조선이 개국되면서 상장군이 되었다.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으로 태조 이성계는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고향인 함주(咸州)[지금의 함흥]로 갔다. 태종은 태조의 귀환을 요구하여 수차례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태조는 매번 이들 문안사(問安使)를 죽였으므로, 이로 인해 ‘함흥차사’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생겨나게 되었다. 더 이상 태조에게 가기를 응하는 신하들이 없게 되자, 문안사로 박순이 자청하여 갔는데 이 때 박순은 하인도 없이 새끼 딸린 어린 말을 타고 함흥에 들어갔다.

 

태조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짐짓 새끼말을 나무에 매어놓고 어미말을 타고 가니 어미말은 머뭇거리면서 뒤돌아보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이에 태조가 이상히 여겨 물었더니 “새끼말이 길 가는데 방해가 되어 매어놓았더니 어미말과 새끼말이 서로 떨어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비록 미물이라도 지친(至親)의 정은 있는 모양입니다”하고 말했고, 이에 태조는 숙연해져 옛 친구를 머물러 있게 하였다.

 

하루는 태조와 박순이 장기를 두고 있을 때 마침 쥐가 그 새끼를 끌어안고 지붕 모퉁이에서 떨어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도 서로 떨어지지 아니한 모습을 보았다. 이를 보고 박순은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더욱 간절히 아뢰니 태조가 이에 서울로 돌아갈 것을 허락하게 되었다. 박순은 태조의 허락을 받아내어 하직하고 되돌아갔다.

 

그러나 태조 곁의 신하들은 박순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태조는 박순이 이미 용흥강(龍興江)을 건넜으리라 판단하고 이미 강을 건넜으면 쫓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박순은 도중에 병이 나서 지체하였다가 강을 완전히 건너지 못한 상황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태조는 이를 알고 크게 놀라면서 서울로 돌아가기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태종은 박순의 죽음을 듣고 박순의 공을 생각하여 판승추부사에 증직(贈職)하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追贈)했으며 박순의 자손을 등용하고 녹전(錄田)을 하사하였다. 또한 부음을 듣고 자결한 박순의 처 임씨에게도 묘지를 하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민(忠愍)이고, 함흥(咸興) 용강사(龍岡祠)에 배향되었다.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 충신문(忠臣門)과 부인 임씨(任氏)의 열녀문(烈女門)이 있다. 또한 박순의 후손을 등용하였고 녹전을 하사하였다.



원본글 출처 : 박순의 시장(諡狀)

저자 : 민정중(閔鼎重)

본관 : 음성(陰城)  

원전서지 : 국조인물고 권35 음사(蔭仕)

 

공의 휘(諱)는 순(淳)이고 성은 박씨(朴氏)이다. 우리 태조(太祖)가 북도(北都, 함흥(咸興))로 가 계실 때에 공이 스스로 조정에 청하여 사명(使命)을 받들고 갔다가 돌아올 적에 도중에서 형벌을 받아 죽었는데, 지극한 정성으로 신하의 절개를 다하여 세상에 없는 공을 세우고 끝없는 아름다움을 협찬하였으니, 천지(天地)에 견줄 만하고 일월(日月)과 빛을 다툴 만하였다. 그런데 초당(草堂) 강경서(姜景敍) 공이 기록한 글이 이미 병화(兵火)에 소실되어 버린데다가 세대가 멀어질수록 인멸되어 상고할 수 없어서 자세히 말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근래에 우재(尤齋)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족보 등 여러 설에 섞여 나온 것들을 모아 공의 부인 임씨(任氏)의 묘표(墓表)를 저술하였으니, 거의 이에서 고증할 수 있게 되었다.

 

삼가 살펴보니, 박씨(朴氏)의 선조(先祖)는 신라왕(新羅王) 혁거세(赫居世)로부터 비롯되었다. 석씨(昔氏)가 박씨를 대신해 신라의 왕이 되어 박씨의 여덟 왕자(王子)를 바깥 고을에 나누어 봉하여 내보냈는데, 죽산군(竹山君)으로 불린 이가 그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죽산군의 후손 중에 음성(陰城)에 살면서 그곳을 관향으로 삼은 이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공의 파(派)가 비롯되었다. 휘(諱) 재(榟)란 분이 고려(高麗)에서 벼슬하여 공부 상서(工部尙書), 합문 지후(閤門祗候)가 되었고 그의 아들 박현주(朴玄柱)와 그의 손자 박문길(朴文吉)도 모두 높은 벼슬을 하였는데, 공은 박문길의 큰아들이었다. 공이 이를 갈 때부터 기국이 뛰어나고 지조가 매우 확고하였으므로 사람마다 절의(節義)의 선비가 될 줄로 알았고, 공 역시 항상 스스로 자부하기를, “임금을 섬길 적에 신하의 절개를 다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처음에 고려왕(高麗王)이 우리 태조(太祖)를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요동(遼東)을 공략할 때 공은 도평의 지인(都評議知印)으로 종군(從軍)하였다. 이미 압록강(鴨綠江)을 건넜을 때 강물이 크게 불어나 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군사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장차 변란이 생기게 되었다. 태조가 평소 공을 중히 여겼으므로 공을 돌려보내어 고려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함과 아울러 역리(逆理)와 순리(順理)에 대해 개진하면서 속히 회군(回軍)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조가 만년에 들어 정사에 지친데다가 옛날 고향이 생각이 나 함흥(咸興)으로 가 살았는데, 어가(御駕)를 수행한 신하들이 모두 불만을 품고 조정을 원망하였으므로 전후 문안하러 온 사신이 도착하면 법을 적용할 것을 요청한 바람에 살아서 돌아간 사람이 없었다. 그 뒤 사신을 보낼 때가 되어 태종(太宗)이 조회에 나와 ‘신하들 중에 누구를 보낼 것인가?’라고 물으니,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공이 앞으로 나와 스스로 가겠다고 요청하니, 태종이 그 사람됨을 아까워하여 처음에 매우 어렵게 여기었다. 공이 다시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위해 죽는 것은 바로 직분입니다. 임금이 주는 옷을 입고 임금이 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어려움에 임해 구차하게 모면하려고 하는 것은 신이 부끄러워하는 바입니다. 신이 가서 다행히 죽지 않는다면 전하(殿下)에게 보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물러나와 집안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평생 동안 나라를 위해 죽으려고 하였는데, 지금 죽을 곳을 얻었다.”고 하였다. 친지들이 찾아와 물어보면 반드시 정색(正色)을 하고 대답하기를, “신하는 당연히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해야 하는 것이니, 위로할 것이 뭐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전후 사명을 회피한 조정의 신하들이 그 말을 듣고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공이 하직 인사를 드리자 태종이 묻기를, “경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사명을 받들고 가서 효과가 없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태종이 말하기를, “경의 처자(妻子)들이 항상 기한(飢寒)에 시달리고 있는 줄을 알고 있으니, 내가 마땅히 생각하겠다.”고 하였는데, 이는 공이 평소 청렴 결백하여 가산(家産)의 경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바로 저택 한 구획을 하사하고 기타 하사한 것도 매우 많았다. 공이 떠날 때 사신의 수레를 타지 않고 새끼 딸린 말을 타고 함흥(咸興)으로 들어가 행재소(行在所)가 보인 곳에서 일부러 새끼 말을 나무에다 매 놓고 어미 말을 타고 들어갔는데, 어미와 새끼가 서로 돌아보고 발버둥을 치면서 우느라 한식경 동안 배회하며 전진(前進)하지 못하였다. 태조가 바라보고 이상하게 여기었는데, 이윽고 알현(謁見)을 청하였다. 공과 태조는 벼슬하기 전 선비[布衣] 신분으로 있을 때 친한 사이였으므로 태조가 곧바로 접견을 명하여 흔연(欣然)히 옛날의 정을 나누고 나서 주식(酒食)을 대접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무슨 일로 멀리 나를 찾아왔는가?”라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스스로 견마(犬馬)의 심정을 금치 못하여 한번 용안(龍顔)을 우러러보고 나서 죽고 싶었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였다. 태조도 눈물을 흘리며 묻기를, “방금 전에 새끼 말을 길가의 나무에 매 놓은 자가 그대였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행로(行路)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나무에다 매 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미와 자식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였으니, 비록 미물(微物)이지만 또한 지극한 정이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이것으로 넌지시 간하여 태조의 마음을 감동하려고 한 것이었다. 태조가 슬픈 안색을 짓다가 공을 붙잡고 보내지 않았다. 어느날 태조가 공과 같이 국희(局戱, 바둑ㆍ장기 따위)를 두고 있었다. 그때 마침 새끼를 문 쥐가 옥상(屋上)에서 떨어져 죽을 때까지 서로 놓지 않자, 공이 다시 장기판을 밀쳐 놓고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더욱더 간절하게 비유하여 간하니, 태조가 다시 슬픈 안색을 띠며 말하기를, “그대는 그만 말하라. 나도 생각해보겠다.” 하고 한양(漢陽)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공에게 내비치었다. 공이 윤허를 받고 곧바로 하직 인사를 드리니, 태조가 말하기를, “그대는 빨리 떠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행재소에 있는 신하들이 과연 다시 그를 죽이라고 극력 요청하니, 태조가 허락하지 않고 있다가 공이 이미 용흥강(龍興江)을 건넜을 것으로 예상되자 비로소 허락하고 사자(使者)에게 칼을 주며 말하기를, “만약 그가 이미 강을 건너갔으면 추격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공이 갑자기 병환이 나 길에서 지체하다가 겨우 강가에 이르러 배에 올라 미처 건너가지 못하였으므로 허리를 잘리고 말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시(詩)를 지어 애도한 것에 이르기를, “반 토막은 강속에 있고 반 토막은 배에 있었다고 지금까지 시골 마을에서 이야기로 전한다네. [半在江中半在船 至今閭里巷誦之]”라고 하였다. 사자가 임무를 보고하니, 태조가 매우 깜짝 놀라 후회하다가 묻기를, “박순이 죽을 때 무슨 말을 하던가?”라고 하자, 사자가 대답하기를, “박순이 행재소를 향하여 꿇어앉아 큰소리로 말하기를, ‘신은 죽습니다만 앞서 허락하신 말씀을 바꾸지 마소서.’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태조의 두 눈에 눈물이 번갈아 흘러내렸다. 그 뒤 며칠이 되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박순은 나의 소시적 좋은 벗이었다. 내가 끝내 엊그제 한 말을 번복하지 않겠다.” 하고 남쪽으로 돌아가기로 뜻을 굳히었다. 태종이 그 소식을 듣고 매우 애통해 하며 말하기를, “틀림없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도 가겠다고 요청하였으니, 그의 충성과 용맹이 옛날에도 비할 사람이 없다.” 하고 곧바로 명하여 공로를 기록함과 아울러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토지와 노비를 넉넉히 하사하였다. 그리고 또 화공(畫工)을 명하여 공의 반신(半身)만 그리게 하여 그 사실을 드러내도록 하였다. 태조가 한양으로 돌아오자 태종이 공을 더욱더 추념하여 또다시 그의 자손을 대대로 끊임없이 채용하도록 명하였다.

 

부인 임씨(任氏)는 고려(高麗) 대사헌(大司憲) 임헌(任獻)의 딸이다. 공이 북쪽으로 떠난 뒤로부터 주야로 하늘에 기도하다가 공이 죽었다는 소식이 이르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니, 두 분이 아울러 아름답다고 하겠다. 이보다 앞서 공이 죽었을 때는 태조가 명하여 공의 시신을 수습하여 강가에다 묻었었는데 부인의 상(喪)을 당하자 태종이 특별히 묘지(墓地)를 하사하여 예장(禮葬)을 치르도록 하고 아울러 충신문(忠臣門)과 열녀문(烈女門)을 그 마을에 세워 포상하라고 명하였다. 지금 공이 죽은 지 3백 년이 되어 간다. 그의 안팎 자손들이 번성하게 퍼졌는데, 모두 훈계를 이어받아 행실을 가다듬어 절개와 효도로 알려진 사람이 많다. 족보에 기록된 사람들을 들어 말하자면 감찰(監察) 박흔(朴昕), 승지(承旨) 박소(朴昭)는 공의 아들이고, 대사헌(大司憲) 박숙진(朴叔蓁), 목사(牧使) 박숙무(朴叔楙), 집의(執義) 박숙달(朴叔達), 평사(評事) 박숙창(朴叔暢)은 공의 손자이며, 사도시 정(司䆃寺正) 박조(朴稠), 감역(監役) 박수원(朴秀元), 현감(縣監) 박연(朴淵)은 공의 증손과 현손 이하이다. 6대손 박전(朴悛)에 이르러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왜적(倭賊)의 칼날에 죽어 적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공의 충절(忠節)이 이미 이와 같고 또 청백리(淸白吏)로 이조(吏曹)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후손들이 음덕을 입어 관직에 보임되고 녹을 받아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있다.

 

지금 주상(숙종) 2년(1676년)에 그의 후손들이 입을 모아 종손(宗孫)을 세워줄 것을 요청하여 주상의 윤허가 떨어지자 예관(禮官)이 공의 8대손 박호원(朴浩遠)을 간택하여 종가의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주상이 누차 글을 하달하여 추가로 포상하고 이어 공적(公籍)에 몰수된 제전(祭田)을 모두 되돌려 줄 것을 명하였는가 하면 옛날 선왕조(先王朝) 때처럼 한결같이 공의 제사를 받드는 자손에게 벼슬을 주라고 명하였다. 비록 이 일들이 담당자의 저지로 인해 실행되지는 않았으나 소급해 보답하려는 우리 성상(聖上)의 은전(恩典)이 극진했다고 하겠다. 죽은이가 이를 안다면 구천(九泉)의 아래에서 여한이 없을 것이다. 공의 품계와 충절로 보아 마땅히 시호의 은전을 받아야 할 터인데, 지금까지 받지 못하였으니, 그때 겨를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 박호원이 공의 시호를 조정에 요청하기 앞서 내가 공의 외손(外孫)이라면서 시장(諡狀)의 기술을 부탁하였는데,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기에 여러 설을 모아 조금 정리하여 봉상시(奉常寺)의 고증에 대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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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과 함흥차사 (야사)

 

야담 수필집 《노봉집시장》(老峰集諡狀)에 함흥차사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그때 함흥차사가 박순이다. 가는 사람마다 죽고 돌아오지 못하니 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다음에는 누가 가겠는가?”라고 물으니 아무도 응하는 신하가 없었으나,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인 박순이 자원하였다.

 

박순은 새끼 딸린 어미 말을 함흥까지 끌고 가서 “어미를 따르는 말도 저러한데 하물며 인간의 부모에 대한 정이야 얼마나 깊겠습니까?”라며 태조의 귀경을 설득했다. 며칠을 묵으며, 하루는 태조와 박순이 장기를 두는데 천장에서 쥐가 새끼를 안고 떨어져 죽을 지경이 되었으나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에 박순이 장기판을 제쳐놓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자고 청하니 태조가 돌아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이 박순을 죽여야 한다고 태조에게 고하자, 태조는 이미 박순이 용흥강을 건넜으리라 여기어 “용흥강을 건넜다면 쫓지 말라”라고 명령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병이 나서 쉬다가 용흥강을 건널 때, 쫓아 온 병사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야사일 뿐 사실은 아니며, 실제로 박순은 조사의의 난 때 함흥에서 도순문사 박만(朴蔓)을 설득하다가 죽임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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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분은 영의정을 지내신 다른 분입니다.

사암(思菴) 박순(朴淳) / 본관 : 충주

 

원본글 출처 : 박순의 비명(碑銘)

저자 : 송시열(宋時烈)

이명

자 : 화숙(和叔)

호 : 사암(思菴)

시호 : 문충(文忠)

 

원전서지 : 국조인물고 권49 우계ㆍ율곡 종유 친자인[牛栗從游親炙人]

 

국조(國朝)에서 여러 번 사화(士禍)를 치르다가 을사년(乙巳年, 1545년 명종 즉위년)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세상의 도(道)가 크게 변하고 유학이 땅에 떨어져 성현(聖賢)의 글이 화근(禍根)으로 지적된 통에 선비들이 일삼는 것은 시대에 사용하는 글뿐이었고 따라서 나라가 너무나 심하게 위태로워졌다. 그런데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사류(士流)가 번성하게 일어나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무렵에 정치와 교육이 매우 밝아져 선비들이 공맹 정주(孔孟程朱,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의 (글을) 외우며 법으로 삼은 바람에 인륜이 위에서 밝아지고 아래에서 서민이 친해져 융성했던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에 근접하였다. 이때에 청의(淸議)를 주장하고 사류(士類)를 끌어올려 영수로 우뚝 선 이가 있었는데, 사암 선생(思菴先生) 휘(諱) 순(淳) 자(字) 화숙(和叔)이 그 사람이었다. 그런데 세운(世運)이 뒤틀리고 시론(時論)이 빗나간 바람에 공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분주하다가 덕업(德業)이 중도에 저지되고 말았으므로 지금까지 식자(識者)들의 한이 되었다.

 

공은 충주(忠州) 사람이다. 박씨(朴氏)의 족보는 고려조(高麗朝) 부정(副正) 박영(朴英)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그 뒤 8대에 이르러 박소(朴蘇)라는 분이 비로소 본 조선조(朝鮮朝)에 벼슬하여 은산 군사(殷山郡事)가 되었다. 박소의 아들 박지흥(朴智興)은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이고 박지흥의 아들 박우(朴祐)는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고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윤(右尹)에 이르렀으며 호는 육봉(六峰)이다. 그의 형 박상(朴祥)은 세상에서 일컬은 눌재 선생(訥齋先生)으로서 기묘 명현(己卯名賢)이기도 하다. 육봉(六峰)이 당악 김씨(棠岳金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계미년(癸未年, 1523년 중종 18년)에 공을 낳았는데, 타고난 자품이 뛰어나고 기색(氣色)이 청수하여 금옥(金玉)처럼 정교하고 윤택하였다. 8세에 입을 열어 사물에 대해 시를 읊었다 하면 좌중(座中)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이웃에 글을 가르치는 스승이 말하기를, “내가 감히 너의 스승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가 하면, 항상 문장으로 자부한 (아버지) 육봉이 공이 지은 글을 보고 말하기를, “늙은이가 무릎을 꿇어야 하겠다.”고 하였다. 18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서경덕(徐敬德)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547년 명종 2년)에 육봉이 세상을 떠나자 공이 시묘(侍墓)살이를 하다가 야위어 생명을 잃을 뻔하였고 연제(練祭, 소상(小祥))를 지낸 뒤에도 여전히 죽을 먹었다. 상복(喪服)을 벗고 산으로 들어가 독서하다가 한 해가 넘어 돌아와 치재(耻齋) 홍인우(洪仁祐)를 찾아가 횡거(橫渠, 송(宋)나라 장재(張載))가 저술한 태화(太和) 등의 글을 강론하였는데, 치재가 탄복하며 말하기를, “같이 학문할 만한 사람은 화숙(和叔, 박순의 자(字))이다.”라고 하였다.

 

계축년(癸丑年, 1553년 명종 8년)에 명종(明宗)이 몸소 경서(經書)를 가지고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일 때 공의 행동이 차분하고 설명이 명석하여 과장(科場)의 눈길이 집중되었고 이내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 좌랑(吏曹佐郞),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교리(校理)가 되었고 휴가를 받아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었다. 어느날 주상이 호당의 학사(學士)들을 불러 경전(經傳)의 뜻을 강론하고 글을 지으라고 명한 뒤에 친히 술병을 들고 술을 가득히 따라 권하였으며, 또 소식(蘇軾)의 금련촉(金蓮燭) 고사1)(故事)처럼 (촛불을 주어) 돌려보냈다. 그 이튿날 대신(大臣) 상진(尙震) 등이 학사들을 거느리고 대전(大殿) 앞에 나아가 사은(謝恩)하였는데, 한때 성대한 일로 여기었다. 검상(檢詳), 사인(舍人)이 되었다가 명을 받들고 호서(湖西)로 내려가 재해를 살펴보고 돌아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승진하였다. 그때 홍문관에서 임백령(林百齡)의 시호를 의논하여 올리게 되었는데, 임백령이 을사 사화(乙巳士禍) 때 윤원형(尹元衡), 정순붕(鄭順朋), 허자(許磁), 이기(李芑) 등과 같이 간사한 흉계를 꾸며 규암(圭庵) 송 문충공(宋文忠公, 송인수(宋麟壽)) 이하 제현(諸賢)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숙청한 뒤에 종묘(宗廟)에 고하고 공훈을 기록하였다. 중전(中殿)의 친족인 윤원형이 그때 영상(領相)이 되어 국권(國權)을 잡자, 간당(奸黨)들이 그를 성중(城中)과 사중(社中)의 여우와 쥐처럼 믿어 정직한 인사를 호시 탐탐(虎視耽耽) 노리고 있었으므로, 임백령이 좋은 시호를 받지 못할 경우에는 큰 화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홍문관 인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머뭇거렸으나 공 혼자 분연히 나서서 시호를 ‘공소(恭昭)’로 의논해 정하였는데, 대개 곤월2)(袞鉞)의 순간이었다. 윤원형이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임공(林公)은 나라의 원훈(元勳)인데 시호에 ‘충(忠)’ 자가 없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그가 헤아릴 수 없는 뜻을 품고 공을 국문하여 치죄하려고 하였으므로 사류(士類)들이 흉흉하게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태연하였다. 주상이 장차 중죄(重罪)로 다스리려고 하다가 구원한 사람이 있어 파직하여 축출하라고만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이 의금부(義禁府)에서 명을 기다리려고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태연히 나갔으므로 집안사람들이 그런 일이 있는 줄을 몰랐다. 집으로 돌아올 때 어린 딸이 나와서 맞이하자, 공이 손을 잡고 웃으며 말하기를, “자칫하면 너를 다시 보지 못할 뻔하였다.”고 하였다. 그 이튿날 남쪽으로 돌아갔다.

 

임술년(壬戌年, 1562년 명종 17년)에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부임하여 1년이 되자 정사가 잘 이룩되었으므로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랑하고 떠받들었다. 공무가 끝날 때마다 정사(亭舍)로 가 날마다 과정을 정하여 글을 읽으니, 이웃 고을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다. 계해년(癸亥年, 1563년 명종 18년)에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으로 불려 들어가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역임하면서 차자(箚子)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였고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승진하였다. 이로부터 승지의 자리가 빌 때마다 공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조 참의(吏曹參議)에서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옮기었다. 그 뒤 대사간에서 교체되었다가 다시 임명되어 요망한 중 보우(普雨)의 죄를 논하여 치죄할 것을 요청하고 또 윤원형을 탄핵하여 축출하였다. 대체로 을사년(乙巳年) 이후로 윤원형이 임백령, 허자 등과 같이 심복(心腹)이 되어 사류를 제거하고 그 독이 백성에게 흘러들어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워져 조석을 보존하지 못하게 되었다. 공이 개연(慨然)히 탄식하기를, “기(冀)를 탄핵하고 헌(憲)을 처벌하여3)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다.” 하고 대사헌 이탁(李鐸) 공을 찾아가 의논하였다. 이탁 공이 난색을 짓다가 공이 천천히 비유하여 설명하자 비로소 허락하였다. 공이 집으로 돌아와 조복(朝服)을 벗지 않은 채 촛불을 켜 놓고 계사(啓辭)를 초안하여 새벽에 들어가 아뢰었는데, 그때문정 왕후(文定王后)가 승하한 지 겨우 다섯 달밖에 안 되었으므로 주상이 차마 윤허하지 않았다. 공이 더욱더 극력 간쟁(諫爭)한 끝에 윤원형이 좌의정(左議政) 심통원(沈通源)과 같이 축출되니, 백성들이 길에서 가무(歌舞)하였고 안팎에 선비로 불리는 자들이 선(善)을 지향하는 마음이 우러나왔다. 이에 육행(六行)4)을 갖춘 인사를 선발하여 벼슬길을 깨끗하게 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원한을 씻어 주어 관작(官爵)을 회복하였는가 하면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치는 일들은 일체 혁파해,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이하 여러 현인(賢人)들이 모두 세도(世道)를 자신의 임무로 삼아 서로 먼저와 다음에 나옴으로써 성대하게 일어나 원우(元祐,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때의 다스림과 같은 희망이 있었지만 임금께 조명(詔命)을 내리도록 한 처음에는 문순공도 의심하여 위태롭게 여기었으니, 공이 아니면 그렇게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에 특별히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임명되었는데, 이때부터 교체되었다가 곧바로 다시 임명되었다.

 

병인년(丙寅年, 1566년 명종 21년)에 부제학(副提學)이 되었고 문순공에게 서신을 보내어 조정에 나오라고 권면하였다. 융경(隆慶) 정묘년(丁卯年, 1567년 명종 22년)에 명종(明宗)이 승하하고 그 이듬해 무진년(戊辰年, 1568년 선조 원년)에 명나라 행인(行人, 사자(使者)) 구희직(歐希稷)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우리나라에 와 대행왕(大行王, 명종)의 시호를 반포할 적에 공이 원접사(遠接使)의 사명을 띠고 나가 맞이하였다. 조사(詔使)가 공의 예의가 법도에 들어맞는 것을 보고 존경하였고 서로 시를 지어 화답할 때 조사가 감탄하기를, “송대(宋代)의 인물이고 당대(唐代)의 시격(詩格)이다.”라고 하였다. 조사를 전송하고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그해 3월에 황제가 또 검토관(檢討官) 성헌(成憲)과 급사(給事) 왕새(王璽)를 보내어 황태자(皇太子)를 세웠다는 조서(詔書)를 반포하였다. 공이 비로소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임명되어 다시 원접사의 사명을 받았는데 앞서처럼 그들의 존경을 받았는가 하면, 성헌은 공을 위해 평원정(平遠亭)에 대해 시 열 수를 지어 주었는데 평원정은 금성(錦城, 나주)에 있다. 원접사의 임무를 끝마치고 대제학을 문순공에게 넘겨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그 계사(啓辭)에, ‘제학(提學)은 비록 관각(館閣)의 직책이지만 대제학처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이황(李滉)이 고령(高齡)의 큰 선비로 제학을 맡고 있는데 신이 그 윗자리에 있으니, 너무나도 전도(顚倒)되었습니다.’라고 하니, 주상이 대신(大臣)들과 의논하여 따랐다. 그런데 문순공이 다시 사양하고 공에게 넘기었다. 공이 도학(道學)을 논할 적에는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을 근본으로 삼고, 문장(文章)을 논할 적에는 사마천(司馬遷), 한유(韓愈), 이백(李白), 두보(杜甫)를 위주로 하니, 선비들의 습관이 크게 변하였다.

 

기사년(己巳年, 1569년 선조 2년) 4월 주강(晝講) 때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과 같이 인종(仁宗)의 위패(位牌)를 문소전(文昭殿)에 모시는 예에 대해 논하였다. 이는 이기(李芑) 등이 문정 왕후의 뜻을 받들어 인종은 한 해를 넘기지 못한 임금이라는 이유를 들어 위패를 문소전에 모시지 않고 연은전(延恩殿)에다 모셨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고 분개하였다. 공이 이에 대해 통렬히 논하고 문순공도 전각(殿閣)을 변통하는 제도에 대해 논하였으나 모두 대신(大臣)들의 저지를 받았다. 그해 여름에 판서(判書) 김개(金鎧)가 은밀히 틈을 엿보다가 공을 모함하여 여러 현인(賢人)에게 미치려고 ‘오늘날 선비들의 습관이 이미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처럼 되었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남곤(南袞)ㆍ심정(沈貞)의 남은 의론을 계승하려고 한 것이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지평(持平)으로 입시(入侍)하였다가 면전에서 김개의 간사한 행동을 배척하니, 김개가 눈물을 흘리며 나갔다. 문순공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요즈음 벌어진 소동은 비록 다른 사람을 공격하였으나 그 의도는 실로 나에게 있었다.’고 하였다. 이에 삼사(三司)가 일제히 김개를 탄핵하여 관작을 삭탈(削奪)하였다. 그때 공이 선류(善流)의 종주(宗主)가 되었으므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하였는데, 공이 굳이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권면하기를, “마땅히 사류(士流)들을 모아 주상의 마음을 계도해야지, 소인으로 하여금 무너뜨리고 농락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고, 주상도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내 취임하였다. 그 이듬해 정월에 이조 판서를 사임하고 예조 판서가 되었다.

 

신미년(辛未年, 1571년 선조 4년)에 실록(實錄)을 받들고 무주(茂朱)로 가 보관하고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가 찬성(贊成)으로 승진하였다. 임신년(壬申年, 1572년 선조 5년)에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연경(燕京)에 가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등극(登極)을 하례하였다. 고사(故事)에 외국에서 진주(進奏)할 적에 모두 협문(夾門)을 통해 들어갔는데, 공이 논쟁한 끝에 표문(表文)을 들고 정문(正門)을 통해 들어갔으므로 이때부터 정해진 규식이 되었다. 그 사행(使行) 때 중국 사람들이 평소 공의 명성을 듣고 길가에 나와 시를 지어 달라고 요구한 사람이 매우 많았으며, 귀국을 앞두고 주사(主事)가 시장을 개방하는 것에 대해 묻자, 공이 말하기를, “나의 임금은 재화(財貨)를 좋아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이듬해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에 조정으로 돌아와 왕수인(王守仁, 명(明)나라 학자 왕 양명(王陽明))의 학술이 잘못되었음을 매우 진달하였다.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하여 과거에 합격하지 않은 사람도 사간원과 사헌부의 벼슬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574년 선조 7년)에 좌의정을 사양하여 교체되자 홍문관에서 주상에게 애써 만류할 것을 요청하기를, “충현(忠賢)에게 심복(心腹)의 역할을 맡기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해 가을에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을해년(乙亥年, 1575년 선조 8년) 의성 대비(懿聖大妃, 명종비)의 상(喪)을 당하였을 때 (두 번씩이나 의견을 올려 백색(白色)의 의관(衣冠)을 착용하여 3년상을 마칠 것을 청하였으며, 뒤에 인성 대비(仁聖大妃, 인종비)의 상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는데, 속론(俗論)이 흔들지는 못하였으나 흘겨보는 자들이 많았으므로 가을에 혐의를 들어 사직하고 들어갔다가 다시 조정으로 나왔는데, 일찍이 경연(經筵)의 자리에서 문성공(文成公)의 아름다운 학문과 도덕에 대해 극구 칭찬하였다. 그해 겨울에 사직하여 면직되었다. 기묘년(己卯年, 1579년 선조 12년)에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건의한 바가 많았는데, 예를 들면 노산묘(魯山墓, 뒷날의 장릉(莊陵;단종의 능))를 봉식(封植)할 것과, 성 문간공(成文簡公, 성혼(成渾))이 건의한 것을 채용하고 그가 물러가겠다는 요청을 허락하지 말 것과, 김효원(金孝元)을 수용하여 동서(東西)의 당론(黨論)을 세척할 것과 이 문성공(李文成公)을 주청사(奏請使)로 삼지 말 것과 경제사(經濟司)를 설치하여 공안(貢案)을 개정할 것 등의 일이었는데, 혹은 채용되어 시행되기도 하고 혹은 실정과 거리가 멀다고 하여 채용되지 않았다. 오직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은 자못 이의(異議)가 없었고 김우옹(金宇顒) 공은 건의한 일마다 시행할 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 15년)에 서교(西郊)에서 명(明)나라의 조사(詔使) 황홍헌(黃洪憲)ㆍ왕경민(王敬民)을 영접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에 적호(賊胡) 니탕개(尼蕩介)가 배반하였는데, 이보다 앞서 공이 북쪽을 걱정하여 기획한 바가 있었고 또 인재를 구별해 놓았으며, 이때에 이르러 문성공(文成公)이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어 안으로는 군모(軍謀)를 계획하고 밖으로는 병마(兵馬)를 조련하여 거의 모두 실책이 없었으므로 임금께서 바야흐로 문성공을 의지해 적병을 토벌하려고 하였다. 어느날 문성공이 부름을 받고 대궐로 들어가다가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 지체하였다. 임금께서 의관(醫官)을 보내어 간병(看病)하게 하고 또 물러가 요양하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대각(臺閣)이 틈을 타 탄핵을 제기하자, 문성공이 상소를 올리고 처벌을 기다렸는데, 공이 동료 의정(議政)들과 같이 ‘돈독히 유시하여 출사하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뒤에 대각의 탄핵이 거듭 제기되므로, ‘국권(國權)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임금을 무시하고 있으니, 장차 무슨 일을 하려고 한 것인가?’라고 하였다. 그때 적호 니탕개가 연달아 진보(鎭堡)를 함락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했는데도 대각이 마지않고 계사를 올려 꼭 문성공을 공격하여 제거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공이 ‘우선 병조 판서를 해임할 것’을 요청하자 임금께서 따르고 공으로 하여금 병조 판서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그때 문간공(文簡公)이 상소를 올려 당시 사람들의 붕당(朋黨)을 만들어 참소하는 상황에 대해 극력 논하고, 공은 주상에게 면대(面對)를 요청하여 충사(忠邪)와 시비(是非)에 대해 매우 소상하게 분별하여 개진하였다. 이에 삼사(三司)에서 공에 대해 열 가지 죄목을 논하고 아울러 양현(兩賢, 이이(李珥)성혼(成渾))을 탄핵하니, 공이 강사(江舍)로 물러나왔다. 이에 조정의 벼슬아치와 유생(儒生)들이 모두 공의 억울한 상황에 대해 변론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수가 무려 수백 명이나 되었고 우의정(右議政) 정지연(鄭芝衍)이 전적으로 공을 구하였다. 임금께서 친히 교서(敎書)를 하달하여 탄핵을 주동한 사람을 특별히 귀양 보내고 그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외직에 보임한 다음 말하기를, “나는 주자(朱子)를 본받아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당(黨)으로 들어가겠다.” 하였다. 그리고 또 공에게 들어오라고 매우 간곡히 하유하니, 공이 부득이 그 명에 따랐다.

 

갑신년(甲申年, 1584년 선조 17년) 정월에 문성공(文成公)이 세상을 떠나자 공이 외롭게 혼자 남아 협조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자나 깨나 걱정하고 탄식할 뿐이었다. 을유년(乙酉年, 1585년 선조 18년)에 사직하고 강사(江舍)로 돌아왔다. 그해 여름에 의정 노수신의 건의로 인해 귀양 보낸 사람을 특별히 사면하였다. 가을에 이발(李潑) 등이 공과 여러 현인들을 모함하고 헡뜯어 당적(黨籍)에다 이름을 써넣었다. 병술년(丙戌年, 1586년 선조 19년) 8월에 휴가를 요청하여 영평(永平)에 가 목욕하려고 떠나자 임금께서 내관(內官)을 동문(東門) 밖으로 보내어 술을 하사하였다. 영평에는 백운산(白雲山)이 있는데, 계곡과 연못이 절경을 이루었다. 공이 그냥 그곳에 눌러 앉아 집을 짓고 살면서 소연(蕭然)히 속세를 떠나 시사(時事)를 거론하지 않고 날마다 마을 백성이나 초야 늙은이들과 같이 자리다툼을 하면서 자신을 잊고 살았다. 그리고 배우러 찾아온 사람이 있으면 서로 토론하며 지칠 줄을 몰랐다. 배견와(拜鵑窩), 이양정(二養亭), 토운상(吐雲床)으로 불리는 곳이 있었는데, 백운계(白雲溪), 금수담(金水潭), 창옥병(蒼玉屛)이 그 주위를 에워쌌다. 흥이 나면 지팡이를 짚고 거닐기도 하고 더러 풍악(楓嶽) 등 여러 산들을 유람하였다. 임금께서 영원히 떠나려는 공의 뜻을 알고 의관을 보내어 병환을 묻고 세 번이나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 7월 21일에 공이 일찍 일어나 시를 읊조리다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는데, 춘추 67세였다. 이날 비가 내리면서 뇌성 벽력(雷聲霹靂)을 치다가 이윽고 상서로운 빛이 땅을 비추어 마치 밝은 달빛과 같았으므로 산중 백성들이 깜짝 놀라 모여들었는데, 이미 세 번 고복(皐復, 초혼(招魂))을 하였었다. 그해 9월에 종현산(鍾賢山)에 묻히었다. 부인은 고씨(高氏)인데, 1녀를 낳아 군수(郡守) 이희간(李希榦)에게 시집갔다.

 

공이 이를 갈 나이에 도(道)를 찾아 가정의 학문을 전수받았는데다가 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에게 수업하였으며, 만년에는 또 이 문순공(李文純公)에게 감복하여 출처(出處)나 진퇴(進退)를 모두 같이하였는가 하면 심지어 문성공과 같이 이기(理氣)의 충막(沖漠)과 대소(大小)의 합벽(闔闢)에 대한 묘리를 논하였으니, 그의 연원(淵源)과 조예(造詣)를 대략 알 수 있다. 조정에 나가 벼슬하자 오직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는데, 힘쓴 바는 선악을 분별하는 것과 현인을 진출시키고 간사한 자를 퇴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같이 협력한 사람들이 모두 어질고 걸출한 부류였다. 이로 인해 조정이 깨끗하고 백성이 편안하였다. 만약 끝까지 펼쳐 배운 바를 다하였다면 그 정치와 교화의 효과가 어찌 여기에만 그치고 말았겠는가? 참소를 당하여 배척되자 초야로 돌아가 날마다 마을의 수재(秀才)들과 같이 선왕(先王)의 도덕을 노래하며 유연(悠然)히 늙어가는 줄을 모르고 은연히 마음속에 깨달은 바가 있었는데, 이는 사람들이 미처 알 수 없었던 것이었으니, 이게 어찌 곤궁으로 인해 더욱더 드러난 것이 아니겠는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정승이 일찍이 공의 행장을 지으면서 상당히 탈락된 부분이 있었는데, 위 간재(魏艮齋, 송 효종(宋孝宗) 때의 위섬지(魏掞之)) 묘비문(墓碑文)의 의도와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 군수(李郡守, 이희간)의 아들 이택(李䕪)이 공의 문집(文集) 서문을 청음(淸陰)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에게 써달라고 요청하였는데, 그 서문에 중요한 것을 다 천명하여 다시금 남은 것이 없다. 그 뒤 조정에서 공에게 문충(文忠)의 시호를 하사하였고 남쪽의 선비들이 많이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영평(永平)에도 마찬가지로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백년이 되기 전에 공론(公論)이 정해진 것이다. 은산공(殷山公, 증조부인 박소(朴蘇))의 묘소는 회덕(懷德) 선암천(船巖川) 서쪽 기슭에 있다. 공이 일찍이 그 앞에다 집을 지어 놓고 사암(思庵)으로 명명하였기 때문에 학자(學者)들이 공을 사암 선생(思庵先生)으로 일컬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세도(世道)의 번성함과 쇠퇴함은 오로지 그 사람에게 말미암았도다. 그 사람이 연유하였던 바는 오직 의(義)와 인(仁)이었도다. 의로 임금을 바르게 계도하고 인으로 백성을 편안히 하였도다. 본 조정이 아름답고 밝으니, 공이 남쪽에서 일어났도다. 우리 명종(明宗)과 선조(宣祖)를 만나니, 좋은 때라고 하겠도다. 여유롭게 용납하니, 덕(德)이 어찌 이웃이 없겠는가? 아! 율곡(栗谷, 이이(李珥))이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을 숭배하였도다. 체(體)를 밝혀 적용하니, 실로 선비 중에 참 선비였도다. 역박(棫樸)의 교화5)에 뭇 현인들이 배출되었도다. 초빙하는 사명이 줄을 이으니, 위수(渭水)와 신야(莘野)6) 같았도다. 조정의 신하들에게 물어보니, 공이 중책을 맡아야 한다고 했도다. 간당이 자취를 감추니, 인재들이 약진했도다. 거의 공적을 이룩하여 요순(堯舜) 시대와 같은 임금과 백성을 친히 보게 되었는데, 평탄한 길이 험악해져 어진 이 진출할 길에 가시나무가 무성했도다. 우리 보고 붕당(朋黨)을 만들었다고 하여 열 가지 죄목을 열거했도다. 공이 초야로 은둔하니, 그 누가 경륜을 맡을 것인가? 그 산은 드높고 그 물은 깊었도다. 견와(鵑窩)와 옥병(玉屛)이 에워싼 적막한 해변이었도다. 나의 지팡이와 나의 신발로 봄이 오면 기수(沂水)에서 읊는 것처럼 하였도다.7) 영원히 잊지 못하니, 저 서쪽에 계신 임금이었도다. 유연(悠然)히 세상을 떠나니, 새벽에 우뢰를 치며 비가 내렸도다. 옛날 원성(元城, 송(宋)나라 때의 유안세(劉安世))이 죽었을 적에도 이와 같은 이상한 징후가 있었는데, 원성의 기상은 철벽(鐵壁)과 은산(銀山)과 같았도다. 공이 실로 그와 같았으니, 끝내 닳거나 물들지 않았도다. 내가 비명의 글 지어 이 비석에 새기었도다.

       

각주

1) 금련촉(金連燭) 고사(故事) : 금련촉은 촛대를 연꽃 모형처럼 금으로 장식한 등촉(燈燭)임. ≪송사(宋史)≫에 “소식(蘇軾)이 대궐에 숙직할 때 임금이 편전(便殿)으로 불러 앉으라고 명하여 차(茶)를 내린 다음에 어전(御前)의 금련촉을 주어 돌아가는 데 비추도록 하였다.”는 고사(故事)로, 임금의 특수한 대우를 말한 것임.

2) 곤월(袞鉞) : ≪춘추(春秋)≫의 한 글자의 표창이 곤룡포(袞龍袍)를 받는 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한 글자의 폄하(貶下)가 도끼에 맞아 죽는 것보다 더 무섭다는 뜻. 곧 춘추 필법(春秋筆法)을 말함.

3) 기(冀)는 후한(後漢) 순제(順帝)의 양 황후(梁皇后) 오빠인 양기(梁冀)이고, 헌(憲)은 화제(和帝)의 모(母)인 두 태후(竇太后)의 오빠임. 모두 왕실의 외척(外戚)으로 흉포 방자하고 권세를 마음대로 부렸음.

4) 육행(六行) :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씨족에게 화목하고, 인척간에 친애하고, 벗과의 미쁨이 있고, 남을 구휼(救恤)하는 것임.

5) 역박(棫樸)의 교화 : 역박은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편명(篇名)인데, 임금의 덕화(德化)로 인해 인재가 모여든 것을 말함.

6) 위수(渭水)와 신야(莘野) : 위수(渭水)는 주 문왕(周文王) 때에 여상(呂尙)이 낚시질하던 곳이고, 신야(莘野)는 은(殷)나라 탕왕(湯王) 때 이윤(伊尹)이 농사짓던 곳임.

7) 공자(孔子)의 제자인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할 때에 ‘늦봄에 봄옷이 지어지면 관자(冠者) 5, 6인과 동자(童子) 6, 7인과 함께 기수(沂水)에 목욕한 다음 무우(舞雩)에 바람을 쏘이면서 시(詩)를 읊고 돌아오겠다.’고 한 호방한 사상을 말함.













 

박순(朴淳, 1523~ 1589)은 조선의 문신이며 정치인, 성리학자, 시인이다.

훈구파와 신진 사림의 교체기에 사림운동에 전력한 선비이자 관료로서, 왕의 외삼촌이자 훈구파의 대부였던 윤원형을 축출시켜 조선 역사에 사림의 시대를 열었다. 성균관 대사성, 예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고 청백리에 녹선됐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장원급제자는 영의정이 되지못한다는 징크스를 깬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중종실록을 마무리할 정도의 학자이자 관료였던 부친 육봉 박우(-)에게 14세까지 배웠고, 15세에 화담 서경덕의 문인(門人)으로 들어가 책과 실제를 병행하는 학풍으로 평생을 살았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문하생이기도 했으며 고정관념에 얽매이거나 구애받는 것을 싫어했다. 이런 그의 성향으로 원로가 된 후에도 한참 후배였던 율곡 이이나 성혼과도 교우가 매우 두터웠으며 이 때문에 서인(西人)으로 지목되면서 당시 주류 유학계의 탄핵을 받았다. 그의 동문이나 문하생들이 모두 동인(東人)이 되어 그를 공격했고 14년간이나 지켜왔던 정승 자리에서 내려와 포천에 은거했다.

 

서울 태생으로 자는 화숙, 호는 사암. 시호는 문충공이며 홍문관 대제학 겸 영의정으로 품계는 대광보국숭록대부이다. 본관은 충주이고 성균관 대사성 박우(朴祐)의 아들이며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조카이다. 사후 1591년 광국원종공신 1등에 추서되었다.

 

유소년기

1523(중종17) 박순은 서울에서 당시 홍문관 교리(校理-5)였던 아버지 박우와 어머니 당악 김씨(棠岳金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박우가 45세에 얻은 늦둥이였는데 어린 나이에도 문리를 터득하는 속도가 매우 빨라, 8세 다니던 서당 훈장이 '내가 감히 너의 스승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1]. 동국삼박[2](東國三朴)의 하나였던 아비 육봉 역시 차남이 지은 글을 보고 '이 늙은이가 무릎을 꿇어야 하겠다'고 했다는 기록 역시 보인다[1].

 

청년기

1540(중종35) 18세가 되던 해에 소과에 응시했다. 진사 3(三等) 51위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아울러 같은 화담 동문인 홍인우, 허엽, 남언경 등과 함께 성균관에서 글을 읽으며 공부의 폭을 차츰 늘려갔다.

 

1547년인 25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형 연파처사 박개(朴漑)와 더불어 3년 동안 여묘살이[3] 를 했다. 시묘를 너무 극진히 하다 건강을 해쳐 소상[4] 을 지낸 뒤에도 죽을 먹어야 했다.

 

1549년에는 그의 시조묘(始祖廟)가 있는 대전에 '사암'이란 서실(書室)을 짓고 글을 읽었는데, 스승 서경덕의 방법론 그대로 독자적인 학문 연구를 시작, 근처 유생들과 벼슬아치들이 그를 사암선생(思庵先生)이라 높여 불렀다. 어려서는 호가 청하자(靑霞子)였으나 이때부터 사암(思菴)을 주로 썼다. 박순은 독자 연구의 단점인 학문의 좁은 폭을 넓히기 위해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등을 찾아다니며 배웠다.

 

특히 그가 성균관 학사로서 서울을 지켜야 했던 시절에, 경상우도 창녕에 살던 남명에게 자기의 견해나 질문을 담은 서간을 자주 주고 받았으며, 남명이 상경할 때마다 곁에 붙어다니며 의문나는 점을 집요하게 물었다. 반대로 조식이 귀향할 때에는 항상 한강 나루까지 배웅했다고 한다. 조식의 사후 그를 애도하는 애시(哀詩) 1수가 남아있다[5].

 

출사

1553(명종8) 31세의 나이로 대과에 응시했다. 해당 시험은 명종이 특히 갑과를 직접 주관했는데 그의 답안을 보고 감탄한 왕의 몇가지 직접 질문에 뛰어난 답을 제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했다. 갑을병 세 등급의 과거에서 갑과 1등이었던 그는 핵심요직인 이조좌랑(吏曹佐郞-6), 홍문관수찬(修撰-6), 교리(校理-5) 등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고, 당시 젊은 신진 관료들에게 주어졌던 안식년에 궁궐 도서관인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었다.

 

당시 일화가 남아있는데, 어느날 명종이 호당의 학사들을 불러 경전의 뜻을 강론하라 명령하고 글을 짓게한 후 주연을 베풀었고, 술병을 직접 들고 술을 가득히 따라 권하고는 금련촉의 고사[6] 를 본따 학사들에게 왕실 전용의 촛불을 들려 돌려보냈다. 이튿날 우의정 상진(商震)이 학사들을 데리고 명종의 앞에서 감사인사를 하는데 매우 성대했다고 한다.

 

1556(명종11) 의정부 검상[7](檢詳-5), 사인[8](舍人-4)으로 승진한 후 어사가 되어 충청도를 돌았고, 홍문관(弘文館) 응교[9](應敎-4)로 승진하여 부마(왕의 사위)가 밀수한 물목을 압수하기도 하는 등, 권력의 높이에 굴하지 않고 잘못된 점을 시정하려 노력했다.

 

사림운동

1561(명종16) 왕명으로 홍문관에서 임백녕(林百齡)의 시호를 정해 올리라는 령이 떨어졌다. 임백녕은 1546년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오다 도중 사망했는데, 그는 생전에 윤원형, 정순붕(鄭順朋), 허자(許磁), 이기(李芑) 등과 함께 명종을 추대하여 공을 세우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사림 선비들을 죽였다. 그들은 명종 추대에 반대하고 윤원형 등을 탄핵했던 문충공 송인수 등은 물론이고 신진 사림들까지 누명을 씌워 숙청하고 자신들의 공훈을 멋대로 했다. 대비의 친오빠였던 윤원형이 영의정이었고, 명종을 추대했던 소위 소윤(少尹) 일파인 훈구공신들이 요직에 포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죽은 임백녕에게 큰 명예가 주어질 것은 누가봐도 뻔했다.

 

이 때문에 홍문관은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시호는 임금이 내리는 이름으로 신하의 공을 따져 붙이기 때문에 명종 즉위에 공이 있던 임백녕에게 '()'자가 내려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박순이 사림에게 누명을 씌웠던 임백녕의 잘못을 지적하여 이를 반대하고 시호를 '소이(昭夷)[10]'로 폄하시켜 관철시켰다. 보고를 받은 영의정 윤원형이 혀를 차며임공(林公)은 나라의 원훈(元勳)인데 시호에 충 하나를 못넣는단 말인가?”라고 못마땅해 했다[11].

 

훈구공신들이 흥분하여 박순을 국문하자 혹은 죽이자 주장했고, 지켜보는 자들마다 염려했으나 박순은 태연했다. 훈구대신들의 눈치도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즉위에 공이 있었던 임백녕이었으므로, 명종이 박순을 중죄로 다스리려고 하다가 조정과 사림들의 여론 때문에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파직시켜 축출시켰다. 송시열의 글에 따르면 박순이 너무도 아무 일 없는 듯 행동하였기 때문에 가족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 지조차 몰랐다 한다. 사단이 난 날 어린 딸이 반갑게 마중나오자, 박순이 딸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하기를,“자칫하면 너를 다시 못 볼 뻔했구나고 했다한다. 그 이튿날 파직된 박순은 아버지의 고향인 전남 광주로 내려갔다.

 

1562(명종17), 부친 박우의 고향인 광주 송정리에서 1년간 독서 중 명종이 다시 그를 불러 한산(韓山)군수(郡守-4품 외직)에 임명했다.[12] 그는 사림 운동의 연장선에서 그 지방의 사림 육성책으로, 공무가 끝난 후에도 정사(亭舍)로 가 그날그날 커리큘럼을 정하여 강론하고 이웃 고을 선비들과 글을 읽었다. 이것이 점점 소문이 나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1563(명종18)에 성균관 사성(司成[13]-3)으로 불려 들어가 시강원(侍講院-조선 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 보덕(輔德-3), 사헌부 집의(執義-3), 홍문관 직제학(直提學-3품 당하관)을 역임하면서 차자(箚子-국왕에게 올리는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였고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3품 당상관)로 승진하였다.

 

승지로서 왕의 비서실장 역할을 했던 그는 그후 이조참의(吏曹參議-3품 당상관)에서 사간원 대사간(大司諫-3품 대사간)으로 옮겼다. 그 뒤 대사간에서 한 번 교체되었다가 다시 임명되어 요승(妖僧) 보우의 죄를 논하여 치죄할 것을 요청하고 또 윤원형을 탄핵하여 축출하였다.

 

사후 1591(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그는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다.

 

가족 관계

증조부 : 박소(朴蘇) 할아버지 : 박지흥(朴智興) 백부 : 박정(朴禎)

중부[14] : 박상(朴祥)

아버지 : 박우(朴祐)

어머니 : 당악 김씨 형님 : 박개(朴漑)

부인 : 장흥 고씨 장녀 : 충주 박씨 - 용천부사(龍川府使) 이희간(李希榦)에게 출가 외손자 : 첨사(僉使) 이택(李澤)

 

서자 : 박응서(朴應犀), 제사 및 적통은 조카 박응(朴應)이 이음

 

 

각주

1. 가 나 국조인물고 사암 박순편

2.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인 소순과 소동파 그리고 아우 소철의 삼소(三蘇)에 빗대 호남 선비들이 일컬음. 요절한 큰 형 하촌(荷村) 박정(-), 둘째 눌재(訥薺) 박상(-), 막내 육봉(六峰) 박우(-) 형제를 이름

3. 여묘살이: 부모 산소 옆에 움막을 짓고 곡을 하거나 글을 읽으며 3년상을 모시는 일

4. 소상(小祥): 사람이 죽어 제사를 지낸지 1년이 되는 날. 이 날이 될때까지 제사를 모시는 사람은 죽을 먹는데, 소상이 지나면 부모상일지라도 정상적으로 음식을 먹었다.

5. 德川師友淵源錄, 4,門人續集, 朴淳

6. 금련촉(金蓮燭)의 고사(故事): ()의 영호도(令狐綯)가 한림 승지(翰林承旨)로서 밤에 금중(禁中)에 입대하였다가 초가 다 타자 황제가 그를 한림원으로 돌려보내면서 승여(乘輿)에다 황제가 쓰는 금련촉을 밝혀 돌아가게 했다함.

7. 검상(檢祥): 의정부(議政府) 검상조례사(檢詳條例司)의 책임자로서 녹사(錄事)를 거느리고 입법(立法)의 일을 관장. 오늘날 검사의 일을 하면서도 입법의 영역까지 관여하는 자리였다.

8. 사인(舍人): 정원은 2인이다. 하위의 검상(檢詳, 5)과 사록(司錄, 8)을 지휘하면서 실무를 총괄하였다. 그 밖에 중요 국사에 왕명을 받아 삼의정(三議政)의 의견을 수합하고 삼의정 또는 의정부당상의 뜻을 받들어 국왕에게 아뢰는 등 국왕과 의정부의 사이에서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였다.

9.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는 홍문관의 한 분장(分掌)인 공방(工房)을 관장하였으며 부제학 이하 부수찬에 이르기까지의 관원과 함께 옥당(玉堂)이라고 불리었으며 또한 지제교(知製敎)를 예겸하였다.

10. 우암 송시열은 공이 '공소(恭昭)'로 주장했다고 박순의 묘비에 썼는데 착오가 있었던 거 같다. 소이(昭夷)가 맞다.

11. 윤원형의 여동생인 대비 문정왕후가 좋지 않다고 거절하여 결국 문충(文忠)으로 다시 정해졌다

12. 조선왕조실록명종 28, 17(1562) 262번째기사

13. 1392(태조1)에 좨주(際酒), 1401(태종1)에 다시 사성(司成)으로 고쳤다. 경국대전에는 정원 2원으로 증원되었으나, 1658(효종9)1원을 감원하고, 좨주(際酒) 1원을 새로 두었다. 문묘(文廟) 외 제례(祭禮)가 있을 때는 이를 주재하기도 하였다.

14. 둘째 큰아버지는 한자로 중부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