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보살대의왕 - 경봉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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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전시,강암,해정 등

2020. 12. 16.

觀音菩薩大醫王(관음보살대의왕) - 경봉스님(대선사)

 

觀音菩薩大醫王 (관음보살대의왕)

甘露甁中法水香(감로병중법수향)

灑濯魔雲生瑞氣 (쇄탁마운생서기)

消除熱惱獲淸凉(소제열뇌획청량)

 

관세음보살께서는 크나큰 의왕이시니,

불사의 감로병 중에 법의 향기 가득하네.

마구니의 구름에서도 서기를 나게 하시니

온갖 번뇌 걷어내어 청량함을 얻게 하네.

 

관세음보살님 대의왕이시라,

감로정병에서 법수의 향기 피어오르네,

마군의 구름 씻어주는 서기가 뿜어져 나오니,

뜨거운 번뇌 사그러들고 청량함이 온몸에 번져가네.

 

마구니(魔마귀마) 뜻

마(魔,악마. 마귀. 귀신)의 사전적 의미는 몸과 마음을 소란하게 하여 도를 닦는 데 방해되는 여러 형태의 장애를 가리키는 불교용어이다.

 

마구니는 어떠한 형태를 가진 귀신들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게 되는 온갖 번뇌를 뜻한다.

번뇌라 함은 뭔가 깨닫는 것이고, 마구니(魔마귀마)는 잡생각으로 집중을 못한다는 뜻이다.

 

마군(魔軍) 뜻

불도(佛道)를 방해하는 온갖 악한 일을 모두 마군이라고도 한다.

악마들의 군병(軍兵). 정법(正法)을 해롭게 하는 무리. 일에 해살을 놓는 무리를 말한다.

전통불교에서는 석존이 성도(成道)할 때에 욕계를 지배하는 제6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마왕 파순(波旬, pāpiyas)이 그의 권속들을 거느리고 와서 성도를 방해함에 신통력으로 이들을 모두 항복받았다고 한다.

 

불국사의 안양문(安養門) 편액과 금색을 입힌 무설전(無說殿) 편액은 한국 현대불교의 대표적 고승 중 한 명인 경봉 (鏡峰·1892~1982) 스님의 글씨이다. / 낙관 원광(圓光) 경봉(鏡峰)

 

안양문(安養門) - 경봉스님

 

무설전(無設展) - 경봉스님

 

경봉스님은 한시와 시조, 묵필에 뛰어나 수많은 선묵을 남겼다. 양양 낙산사 원통보전 편액, 평창 월정사 정법보전 편액, 순천 송광사 설법전과 수선사 편액, 양산 통도사 정수보각 편액 및 주련, 경주 불국사 무설전 편액 등이 스님이 남긴 글씨이다.

 

익산 심곡사 대웅전(大雄殿) - 경봉스님

 

영구암(靈龜庵) - 경봉스님

향일암((向日庵)의 이전 암자이름이 영구암(靈龜庵)이다. 최근 향일암으로 개칭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의 말사이다.

 

644년(선덕여왕 13)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원통암(圓通庵)이라 하였으며, 958년(광종 9)에 윤필(輪弼)이 중창한 뒤 금오암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군의 본거지로 사용되었으며, 1849년(헌종 13) 무렵에 현 위치로 자리를 옮기고 책륙암(冊六庵)이라 하였다가 근대에 이르러 경봉(鏡峰)이 절 뒷산에 있는 바위가 거북의 등처럼 생겼다 하여 영구암(靈龜庵)이라 하였다.

향일암으로 개칭한 것은 최근이며, 이곳에서 볼 수 있는 해 뜨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三笑窟) 편액 - 석재 서병오 글씨

 

삼소굴은 경봉스님이 붙인 이름인데 1920년 - 30년대에 서예대가로 이름을 떨쳤던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 1862~1935) 선생의 글씨이다,

삼소굴 좌측의 선방에 걸린 경봉스님의 시호를 딴 원광제(圓光齊)도 석재의 글씨인데 석재가 경봉스님과 교유하며 글씨를 가르쳐주던 때 쓴 것으로 보인다. / 경봉(鏡峰)스님은 석재(石齋)로부터 서예를 지도받았다.

 

통도사 극락암 원광제(圓光齊) / 석재 서병오 글씨

안내문에 원광재(圓光齊)로 읽지 않고 원광제(圓光齊)로 소개되어 있다.

제(齊)는 한자로 가지런할 제, 재계할 재 이다.

 

통도사 극락암 방장(方丈)

경봉스님의 거처인 삼소굴 편액은 석재의 글씨이지만, 나란히 걸려 있는 방장(方丈)은 경봉스님 글씨이다.

 

상무주(上無住) / 상무주암 편액 왼쪽 관지에 원광(圓光)이라는 수결과 경봉(鏡峰) 낙관이 있다.

지리산 도솔암 주변 중부칠암자인 상무주암과 문수암에 선의 기운이 그윽한 경봉스님의 글씨가 걸려 있다.

 

지리산 문수암(文殊庵) - 경봉스님

 

통도사 비로암에는 경봉스님의 글씨인 관산청수(觀山聽水)란 현판이 걸렸다. 산을 바라보며 물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간부진 (看不盡)  - 경봉스님

 

무진장 (無盡藏) - 경봉스님

 

연화승 (蓮花勝) - 경봉스님


서편 요사에는 방마다 한 개씩 세 개의 현판이 걸렸는데 왼쪽으로부터 간부진(看不盡) 무진장(無盡藏) 연화승(蓮花勝)이란 글씨가 쓰여 있다. 모두 경봉스님의 선필이다.

 

간부진은 다 볼 수가 없는 엄청난 풍경이라는 뜻이고, 무진장은 다함이 없는 덕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연화승은 연꽃 같은 좋은 인연을 가리카는데 공부하는 스님들에게 큰 덕담이다.

 

지리산 대원사에는 방장산대원사(方丈山大源寺)’라는 현판이 두 곳에 걸려 있는데 하나는 일주문에 다른 하나는 봉상루(鳳翔樓)에 있다.

일주문의 편액은 죽사(竹史) 박충식(朴忠植)의 글씨이고, 봉상루의 것은 경봉(鏡峰)스님의 글씨이다.

 

방장산 대원사(方丈山大源寺)’ - 경봉스님

 

방장산 대원사(方丈山大源寺)’

 

대원사 범종각(梵鐘樓) - 경봉스님

 

통도사 사명암 일승대 금강대(金剛臺) - 경봉스님

 

여여문 전면 편액

 

여여문 후문 편액

 

통도사 극락암 여여문(如如門) 편액 2개 - 경봉스님

 

통도사 극락암 정수보각(正受寶閣) - 경봉스님

 

통도사 극락암 호국선원(護國禪院) - 경봉스님

 

홍련암(紅蓮庵)

의상대(義湘臺) 홍련암(紅蓮庵) - 경봉스님

 

낙산사 원통보전(圓通寶殿) - 경봉스님

 

경봉 정석(鏡峰靖錫 1892-1982) 스님은 근현대의 고승으로서 광주 김씨이며, 속명은 용국(鏞國), 호는 경봉(鏡峰), 시호는 원광(圓光)이다. 경상남도 밀양출신으로 아버지는 영규(榮奎)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이다. 7세 때 밀양의 한학자 강달수(姜達壽)에게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5세 되던 해 모친상을 겪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16세때 양산 통도사의 성해(聖海) 선사를 찾아가 출가했다.

 

19083월 통도사에서 설립한 명신학교(明新學校)에 입학하였으며, 그해 9월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청호(淸湖) 스님을 계사(戒師)로 사미계를 받았다. 19124월 해담(海曇) 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경연구에 몰두하였다.

 

강원을 졸업 후, 하루는 경을 보다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본디 반 푼 어치의 이익도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경구를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고 참선공부를 하기 위해 내원사(內院寺)의 혜월(慧月) 스님을 찾아 법을 물었으나 마음속의 의문을 해결할 수 없었다. 이에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으로 가서 정진한 뒤,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석왕사(釋王寺) 등 이름난 선원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하였다. 이때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萬峰) 스님과의 선담(禪談)에 힘입어 자기를 운전하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주인을 찾을 것을 결심하고,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3개월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서 정진을 계속하였다.

 

1927년에 통도사 화엄산림법회(華嚴山林法會)에서 법주(法主) 겸 설주(說主)를 맡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던 중, 4일 만에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물(一物)에 얽힌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화두를 들어 정진하다가 19271120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그날 새벽 두시 반 경 바람도 없는 데 촛불이 흔들리는 소리를 내며 춤추는 것을 보는 순간 의문 덩어리가 일순간에 녹아내린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던 불길 같은 마음이 식어버리자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我是訪吾物物頭(아시방오물물두) 내가 나를 바깥 것에서 찾았는데

目前卽見主人樓(목전즉견주인루)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도다

呵呵逢着無疑惑(가가봉착무의혹) 하하 이제 만나야 할 의혹 없으니

優鉢花光法界流(우발화광법계류) 우담발라 꽃빛이 온 누리에 흐르는구나.

 

이후, 한암, 제산, 용성, 전강 스님등과 교류하면서 친분을 두터이 한다. 1932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장에 취임한 뒤부터 5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중생교화의 선구적 소임을 다하였다. 1935년 통도사 주지, 1941년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 지금의 선학원) 이사장을 거쳐 19494월에 다시 통도사 주지에 재임되다. 1953년 극락호국선원(極樂護國禪院) 조실(祖室)에 추대되어 입적하던 날까지 이곳에서 설법과 선문답으로 법을 구하러 찾아오는 불자들을 지도하였고, 동화사(桐華寺)내원사(內院寺) 등 여러 선원의 조실도 겸임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언제나 온화함과 자상함을 잃지 않았고,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꾸밈없는 활달한 경지에서 소요자재하였으므로 항상 열려진 문호에는 구도자들이 가득하였다.

 

1967년 서울탑골공원에 '만해선사기념비'를 세우고 '경봉장학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한시와 묵필에도 뛰어났으며 선지식으로는 드물게도 70여년 동안 계속 日記를 남기기도 하였고, 지금 흔히 쓰는 해우소(解憂所)라는 말도 경봉스님이 지은 것이다.

 

82세부터는 매월 첫째 일요일에 극락암에서 정기법회를 열었다. 90세의 노령에도 시자의 부축을 받으며 법좌에 올라 설법하였는데, 매 회마다 1천여 명 이상의 대중들이 참여하였다. 또한 가람수호에도 힘을 기울여 통도사의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와 장엄석등(莊嚴石燈) 18()를 세웠고, 극락암 조사당의 탱화조성 및 추모봉행, 특별정진처인 아란야(阿蘭惹)의 창건, 극락호국선원 정수보각(正受寶閣) 신축 및 무량수각(無量壽閣)의 중창 등을 주관하였다. 이밖에도 경봉장학회를 설립하였으며, 탑골공원 안에 만해선사기념비 건립도 추진하였다. 18세 때부터 85세까지 67년 동안 매일의 중요한 일을 기록한 일지를 남겼는데, 이 일지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한국불교 최근세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1982717(527)임종이 가까워 왔음을 느낀 시자 명정(明正)스님은 "스님 가시고 나면 스님의 모습을 어떻게 뵙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스님은 좌우로 돌아보고 임을 열었다. "야반삼(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거라!"는 말을 남기시고 열반에 드시니 세수 91, 법납 75세 였다. 저서로는 법어집인 법해(法海),속법해(續法海)와 시조집인 원광한화(圓光閒話), 유묵집인 선문묵일점(禪門墨一點), 서간집인 화중연화소식(火中蓮花消息)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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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 靈鷲山房(영축산방) 鏡峰(경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