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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그 씁쓸했던 추억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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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교육, 초등교육/교육단상(敎育短想)

2018. 10. 29.


최강희! 봉태규 ! 제 친구 이름인듯 쉽게 불렀습니다만 그분들은 나름대로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는 일류배우들입니다. 그분들이 출연한 영화로 <미나 문방구>가 있습니다. 영화 미나문방구는 상당부분을 경주에 있는 이 학교에서 촬영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 학교에 몸을 담은 것은 1983년 3월부터 3년간이었습니다. 두번째로 희망전근을 해서 근무를 하게 된 학교였지요. 당시에는 6학년만해도 학급당 60명씩해서 8개반이었으니까 학교 규모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시내 한가운데에 자리잡은데다가 학부모님들 수준까지 좋아서 교사들이 가장 근무하고 싶어하는 1급지 학교 가운데서도 첫손가락으로 꼽는 학교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정말 드물게 학교안에 실내 체육관까지 갖춘 학교였으니 명실공히 앞서가는 그런 학교였습니다. 농구부가 전국소년체전에서 결승까지 오르기도 했으니까 오랜 역사와 함께 대단한 명성을 날린 학교로 소문이 나기도 했습니다.  



졸업생 가운데는 총리를 역임한 분도 있는 그런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학교라고 알고 있습니다. 최근들어 더더욱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회 저명인사 가운데 류시민씨도 이학교와 인연을 맺은 사실이 있습니다. 이 학교에서 입학한 뒤 3학년때 대구로 전학갔었죠. 


그런 식으로 따지면 자랑거리가 없는 학교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1907년에 개교를 했으니 이제는 백년이 넘어가는 긴 역사를 가진 명문교가 되었습니다. 저야 뭐 그런 긴 역사를 가진 학교를 잠시 스쳐간 별볼일 없는 그저그런 선생에 지나지 않으니 따로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이 학교에서는 6학년 담임을 두번, 4학년을 한번 가르쳤습니다. 제가 근무를 할 때만해도 치맛바람의 여파가 남아있던 시절이라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도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저도 돈봉투를 받은 사실이 있었기에 하늘을 우러러 정말 한점도 부끄럼없는 그런 선생은 되지 못했습니다. 


선생으로 평생을 보냈던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것 투성이입니다. 당시만해도 젊었던 때였던지라 철도 덜 들었고 인생공부도 덜 했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제 자질과 능력이 턱없이 많이 부족했기에 자랑할만한 일보다는 모자람이 더 많은 선생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때는 시골학교 선생으로 인생을 끝내는 것이 너무 한심스러워서 추운 겨울 방학에도 매일 출근해서 다른 공무원으로 전직하기 위한 시험공부를 줄기차게 해댔었습니다. 교육대학을 다녔던  예비 남자선생들은 재학중 학생군사훈련단(RNTC) - ROTC와는 다른 조직이었습니다 - 소속이 되어 의무적으로 군사훈련을 받고 방학때는 3주일씩 두번에 걸쳐 군대에 들어가서 입영훈련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대신 군복무를 면제시켜준 것이죠.    



그것으로 끝난게 아니었습니다. 교사로서 발령을 받고난 뒤 7년간 의무적으로 근무를 해야만 병역을 끝낸 것으로 취급했기에 그 전에는 사표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7년간의 의무복부 기간중에 사직을 하게되면 예전에 받은 혜택은 무효가 되어 다시 입대해야만 하는 굴레에 갇혀있었던 것이죠.


이 학교에 근무하는 중에 의무복무 기간이 끝나게 되었으므로 나는 다른 공무원으로 옮겨가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아이들을 하교시키고 난 뒤나 근무중에 시간이 생길 때, 퇴근후에는 줄기차게 시험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영어공부를 해두었기에 그걸 밑천으로 삼아 나중에 배낭여행을 할 수 있었던거죠. 



돌이켜보면 추억이 많은 학교입니다. 어리바리하기 그지없는 저이지만 교사로서 두각을 나타낸 것도 이 학교가 처음이었지 싶습니다. 당이 이 학교가 교육부(그때는 문교부라고 했습니다) 시범학교로 지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학교를 대표해서 시범수업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담당장학사가 자주 교실을 방문해서 수업에 대해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기도 했었습니다. 제 성격도 지독하고 못되었던터라 가을에 열리던 운동회  준비를 위해 연습을 시킬 땐 고학년 남자아이들을 마이크와 호루라기 하나로 쉽게 통제를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행동은 아동학대에 해당할 사항이었기에 낯이 화끈거려 작은 구멍만 있어도 숨어들고 싶습니다. 



부끄러운 일은 또 있었습니다. 신라금관에 달린 곡옥에 대한 알팍한 상식을 가지고 엉터리 내용으로 상관에게 보고하기도 했으니 뭐하나 자랑스러운 것이 없었던 암울한 청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학교 돌아가는 모든 일에 환하게 알고있는 어떤 선배님을 무지하게 싫어하기도 했습니다.


저 자신도 그렇고 그런 삼류시골뜨기 선생에 지나지 않았으면서도 내가 가진 알량한 도덕적인 잣대로 남을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했었던 것이죠. 즘도 이 학교를 거의 하루에 한번씩은 지나쳐다니고 있습니다만 자랑스런 일보다는 어리석었던 소행이 더 많았으니 지날 때마다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이 학교에서 삼년을 근무한 뒤 시지역 근무 연한 만기로 인해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가게 되었습니다. 교사들은 보통 한 학교에서 5년 정도를 근무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근무연한은 지금도 존재하는데 지방자치단체에 따라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경주시는 시지역에서 9년간만, 한 학교에서는 5년간만 근무할 수 있었기에 시지역에서 9년을 채운 교사는 반드시 타시군으로 전근을 가야만 했습니다. 근무성적이 좋고 실적이 많아서, 소위 말하는 점수가 높은 교사들은 경주시 외곽지역인 월성군(지금은 경주시와 통합되어 있음)으로 전출을 가기도 했습니다.


그때 부부교사들은 인사규정상 특혜를 받을 수 있었는데 부부가운데 한쪽이 근무하는 지역으로 우선적으로 보내주는 제도가 있어서 경주시내에서 월성군으로 전출가기도 했습니다. 경제적인 강자가 이득을 보는 참으로 황당한 제도였지만 버젓이 시행되기도 했으니 정말 어처구니없던 어두운 시절이었습니다. 



교사! 해볼만한 직업이긴 하지만 당시의 초등학교 교사들에게는 서러움과 슬픔과 푸대접이 많았던 그런 시절의, 그저 그렇고 그런 직업에 지나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요즘 들어서는 사회적인 인식도 달라지고 조금 나은 대우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진기를 들이댔던 날은 하늘조차 흐렸습니다. 인생을 이만큼 살고난 지금에도 교직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씁쓸함이 더 많이 느껴지기에 허전함과 허무함, 그리고 서글픔이 가슴 한구석에 가득합니다. 한번만 살 수 있는 인생인데 말이죠.....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