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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 그 찬란했던 추억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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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교육, 초등교육/교육단상(敎育短想)

2019. 7. 1.


남들은 5시가 되면 퇴근을 해도 나는 매일 6시 반에서 7시가 되어서야 퇴근을 하곤 했습니다. 그때는 EBS 교육방송에서 학년별 교재내용을 방송하던 시절이라 교육방송이 시작하는 시간까지 퇴근을 미루고 기다렸다가 방송내용을 녹화하느라 매일매일 늦었던 것이죠.




다른 선생님들께 교육방송 녹화를 부탁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제가 늦게 퇴근하기로 마음먹고 그 일을 감당해나갔습니다. 지금이야 유투브나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 파일로 동영상과 자료가 실시간으로 다양하게 올라오는 시대지만 이십몇년전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학교에 30분짜리 비디오 공테이프를 사달라고 요구를 해서 곁에 쌓아두고는 녹화를 해나갔습니다. 녹화한 테이프에다가 일일이 라벨을 붙이고 자료를 분류해서 방송실에 비치해두고 모든 선생님이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해드렸습니다.  



그런 일이 소문이 나서 여러 곳에 사례 발표를 하러 다니고 원고를 써서 보내기도 했으며 비디오자료를 활용한 수업기법을 개발해서 시범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땐 공개수업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지금껏 제가 가지고 있는 수업 동영상 자료가 없는 것이 유감이지만 아이들에게 자율학습 훈련과 토론 훈련을 철저히 시켜서 자유롭게 토의하고 발표를 해나가는 그런 수업을 능숙하게 진행해나갔던 것이죠. 아이들 훈련시키는 것도 요령을 터득하게 되니 나중에는 2주일 정도면 모든 것이 끝나게 되더군요.   




가르치는 기법에 가장 확실하게 눈을 뜬 학교였었기에 이 학교를 지나칠 때마다 지금도 감회가 새롭습니다. 돌이켜보면 보람이 가득합니다만 인간관계면에서는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교실에 혼자 남아서 녹화를 하고 피곤에 찌들은 상태로 내려와 교무실에 열쇠를 걸어놓고 현관을 나서다보면 숙직실에선 동료들의 술자리가 벌어져 있기도했습니다만 굳이 들어가서 어울리지는 않았습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것을 두고 굳이 비판할 일도 아니었으며 신경쓸 일도 아니었고, 더구나 나는 당신들과 다르다는 식으로 홀로 고고한척 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승진에 신경을 쓰는 일부 교사들은 나를 극도로 경계하기도 하더군요. 경쟁자라는 심리 때문이었는지 시기심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더 자세히 하면 교직의 치부를 드러낼까 싶어서 그만하고 싶습니다.



거기에서는 좋은 제자도 많이 만났습니다. 인성교육에 바탕을 둔 수업을 하며 사람 됨됨이를 강조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이 참으로 착하기만 했습니다. 어떤 교사들은 1급지 학교보다 수준이 조금 더 떨어지는 2급지 학교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물어오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가진 재능을 알아보고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줌과 동시에, 격려해주고 잘한 것을 공정하게 상찬해주며 잘못된 것은 꾸짖어서 인간을 만들어가는 것이 교사의 본분 아닐까요?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고 바른 길을 걸어가면 아이들은 저절로 따라배우게 되는 것이라고 확신했으며 지금도 그런 소신은 변함이 없습니다.




고마운 아이들도 참 많았습니다. 나중에 연세대학교에 진학한 윤 누구(일부러 밝히지 않았습니다만 이름이 한 글자였습니다)라는 학생은 오후에 스스로 남아서 제 일을 자주 도와주기도 했는데 그 아이는 두고두고 생각이 납니다. 참으로 보배같은 아이였습니다. 이젠 삼십대 중반이 되었겠네요.


그런가하면 노래를 정말 잘해서 서울대 음대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졸업했던 성악가 이 누구누구 선생을 담임한 것도 특별히 기억납니다. 참으로 멋진 재능과 인성을 지닌 학생이었습니다. 토의학습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조리있게 발표해나가며 자기 의견을 당당하게 주장하던 모습들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 외에도 정말 많습니다만 한사람 한사람 모두 다 이름을 거명할 수는 없으므로 생략하고자 합니다.  



시설이 좋은 신설학교였기에 도지정 시범학교로 지정되고 난 뒤 연구주무교사겸 연구부장을 맡아 시범학교 운영 공개를 준비하며 죽을 고생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인사규정에 교사는 한 학교에서 5년간만 근무할 수 있었기에 5년이 지나면 반드시 전근을 가야만 했습니다.


단, 시범학교 공개를 맡은 연구부장 교사의 경우에는 학교장의 요청이 있을 경우 일년간 더 연장근무를 할 수도 있었고 실제로 학교장으로부터 그런 요청을 받았습니다만 과로로 인한 건강 악화때문에 미련없이 떠나기로 했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털어놓기 어려운 일도 제법 많이 있었습니다만 교직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서 마음속에만 담아둘까 합니다.   



정말 원없이 일해본 학교였고 나름대로 성의를 다해 아이들을 가르쳐보았으니 미련이 남을 일도 없었습니다. 조금 교만한 이야기같습니다만 어쩌다 볼 일이 있어 한번씩 학구인 동네에 나가면 학부모들이 정말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주신다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 생활지도와 수업은 게을리하며 악착같이 점수만 밝히던 선생님들이 나중에 승진을 한 뒤 교장이 되어 입만 열면 거룩한(?) 모습으로 교육을 이야기하는 그런 광경을 보기도 했습니다만 그런 것은 그분 본인의 인생사이니 내가 이렇다저렇다 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아이들조차 그런 이면에 얽힌 진실을 알아차리고 담임교사를 평가하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특히 교사가 된 제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고 언젠가는 모든 것이 다 밝혀지고 알아진다는 말이 틀린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영욕의 순간들이 특별히 많았습니다. 제 평생에 같은 학교를 두번 근무한 적이 없었습니다만 이 학교만은 예외였습니다. 처음 개교하는 학교에 멋도 모르고 붙들려가서 죽을 고생을 했었고 세월이 오래 흐른 뒤 한번도 근무하기를 지원했습니다만 그만한 보람도 있었습니다.


1회부터 5회까지의 졸업생들을 모두 6학년 담임을 맡아하며 가르쳐 보냈는데 그런 일도 드물지 싶습니다. 자랑같습니다만 남들은 하지 않으려는 6학년 담임을 서른번이나 맡아 했으니 제 교직 인생은 졸업반 아이들만 가르치다가 끝난것 같습니다.   



근무연한 5년을 채우고는 미련없이 전근을 가기로 했습니다. 처음 개교할 때는 도시빈민층의 자녀들이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하는데다가, 시내 1급지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학구를 분리하여 문제학생들이 많아서 근무하기가 힘들 것이라는 일부 교사들의 평가를 받기도 한 학교였지만 나는 별 탈없이 잘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실들이 자극이 되어 저소득층 자녀들을 더 잘 가르쳐보자는 다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의감에 불타는 젊었던 날이기에 견뎌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가하면 제가 가졌던 신앙의 힘도 절대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거의 매일 걸어다녔습니다. 하루에 삼십분 이상씩 걷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퇴근할 때는 너무 피곤해서 몸이 파김치처럼 늘어질 정도가 되기도 했었지만 그렇게 걸었기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고 큰 병 없이 헤쳐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 개교를 했을땐 인조잔디가 깔린 학교가 아니었습니다. 마사토가 깔린 운동장이 한없이 아담했던 그런 학교였습니다.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던 학교였기에 특별히 기억에 납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