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적.사적/능원,고분

구름에 달가듯이 2014. 11. 22. 08:21


조선 왕릉 Ⅱ -조선왕릉의 입지,현궁, 제향

 

 

■ 조선왕릉의 입지




 

왕릉은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조성된다.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장례를 치르기 위해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이라는 임시 기관을 설치한다.


국장도감은 장례를 치르는 기간(약 5개월)동안 전체 상례에 대한 재정과 문서 등을 관리하고, 재궁(梓宮, 관), 크고 작은 가마(대여(大輿) 등), 각종 의장(儀仗)을 제작하며, 발인(發靷)을 총괄하는 기관이다.


빈전도감은 염습(殮襲), 성빈(成殯), 성복(成服)에 관한 업무를 하며, 장례 기간 동안 왕이나 왕비의 신주와 혼백을 관리하는 기관이다. 특히 빈전도감은 왕릉을 조성한 후 혼전도감으로 이름이 바뀌어 삼년상 후 종묘에 신주를 모신다(부묘).


산릉도감은 왕릉을 조성하는 기관으로 건물 및 석물제작, 왕릉 자리 주변 정리 등 능 조성에 필요한 인원 관리 및 감독하는 기관이다. 보통 하나의 능을 완성하는 데에는 약 5개월의 시간이 걸리고, 능역(陵役)에 동원되는 인원은 6천명에서 많게는 1만 5천명 정도가 필요하다.


능지(陵地)는 보통 상지관(相地官)이 택지하게 되는데, 능지로서 적합한 자리 후보를 선정하고, 새로 즉위한 왕에게 천거하여 왕의 재가를 받아 결정한다. 때로는 왕이 친히 답사하기도 하며, 생전에 미리 능지를 선정하는 경우도 있다


풍수 사상에 기초


조선왕릉의 입지는 풍수사상을 기초로 한다. 조선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위해 자연지형을 고려하여 터를 선정하는 것이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조선왕릉은 기본적으로 지형을 거스르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크기나 구성에 있어 자연친화적이며 주변경관과 잘 어우러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조선왕릉은 크게는 도읍지인 한양(현 서울) 주변의 한강을 중심으로 한강 북쪽의 산줄기인 한북정맥과 남쪽의 지형인 한남정맥을 중심으로 택지되었다. 그리고 봉분을 중심으로 한 능침공간은 조선의 풍수사상에서 길지라고 일컫는 사신사(四神砂)가 갖추어진 곳과 잘 부합하게 된다.


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갖춘 곳으로, 주산(主山)을 뒤로 하고 그 중허리에 봉분을 이루며 좌우로는 청룡(靑龍, 동)과 백호(白虎, 서)의 산세를 이루고 왕릉 앞쪽으로 물이 흐르며 앞에는 안산(案山)이 멀리는 조산(朝山)이 보이는 겹겹이 중첩되고 위요(圍繞)된 곳이다.


왕과 왕비의 시신이 들어있는 현궁(玄宮)이 묻혀있는 봉분은 혈처(穴處)에 위치한다. 혈처는 땅의 기운이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봉분이 자리 잡고 있는 언덕(岡)이 땅의 기운을 저장하고 능의 뒤쪽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잉(孕)은 그 기운을 주입시켜주는 역할을 맡아 혈처를 이룬다.


그래서 조선왕릉은 전체적으로 야지(野地)도 아니며 산지(山地)도 아닌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자리에 입지하고 있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야지에 조성되어 있는 신라의 왕릉이나 산지를 선호했던 고려의 왕릉과는 다른 형태이기도 하다


도성과 가까운 입지조건 - 효(孝)의 실천


왕릉의 입지선정에는 풍수지리 이외에도 지역적 근접성을 고려하는 일이 중요하였다. 즉, 풍수적으로 명당이면서도 왕궁이 있던 도성(한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이 왕릉의 최적지였다. 이와 같이 접근성이 중요한 입지 조건이 되는 것은 후왕들이 자주 선왕의 능을 참배하고자 하는 효심의 실천에서 비롯된 것이다



■ 도성밖 10리∼100리(4∼40km)사이에 조성.

후대에 선물로 준 1935만㎡ 녹지

 

조선 왕릉은 ‘자연과 어우러진 인공 정원’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숲도 울창하다. 이 숲은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1790년(정조 14년) 융릉(경기 화성시) 일대에 심은 소나무가 45만 3,300여 그루에 달했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의 능인 건원릉(경기 구리시) 주변의 잡풀을 베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으라고 명했다. 영조는 효종 능 영릉(寧陵·경기 여주군)에 직접 잣나무를 심었다.

 

이뿐 아니다. 왕릉에 나무가 적을 때는 나무를 보충하고, 나무가 제대로 뿌리를 내렸는지를 왕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했다. 왕릉에 심은 나무의 수도 기록했고 함부로 벌목한 자는 엄하게 처벌했다. 왕릉에 계획적으로 나무를 심은 뒤 집중 관리한 것이다.


왕릉은 도성에서 10리(약 4km) 밖, 100리(약 40km) 안에 조성하라는 기준에 따라 대부분 수도권에 자리 잡았다. 도심의 녹지를 보존하는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정책이 1971년에 시행됐으나 수백 년 전 조선 시대에 이미 정착된 셈이다.

 

나무의 종류와 위치도 계획적이다. 봉분 뒤에서 ‘신(神)의 정원’의 배경이 되는 숲은 소나무 숲이다. 봉분을 중심으로 죽은 자의 공간에는 소나무 젓나무 갈참나무 떡갈나무를, 왕릉 입구 홍살문에서 제향 공간 정자각에 이르는 곳에는 소나무 오리나무를,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에서 홍살문에 이르는 진입 공간은 소나무 떡갈나무 젓나무를 심었다. 이는 나무마다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세조 때 문신 강희안이 지은 원예 책 ‘양화소록’에 따르면 소나무는 명당의 기둥이요, 나무 중의 나무로, 제왕을 상징했다. 십장생의 하나로 왕조의 지속적 번영을 뜻한다. 생태학적으로도 소나무 숲에는 지표를 낮게 덮는 지피식물이 자라지 못해 곤충이 없다. 곤충이 없으니 개구리가 없고 불길한 징조로 여겨진 뱀도 살지 못했다.

 

봉분 주변의 떡갈나무는 껍질이 두꺼워 산불에 강하고 줄기가 곧게 자라기 때문에 왕릉의 ‘방호수(防護樹)’ 역할을 했다. 정자각 앞에는 5월경 흰색 꽃이 피는 때죽나무도 심었는데, 밤에 정자각 앞을 환하게 밝히는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홍살문 주변의 오리나무는 습지에 강하고 뿌리가 많이 뻗는다. 이 공간이 지대가 낮은 습지여서 많은 비에 토양 유실을 막기 위한 기능을 고려한 것이다.

 

정자각 뒤에서 봉분 앞까지 펼쳐진 언덕인 사초지(莎草地)의 푸른 잔디까지 종자가 관리된 점도 놀랍다. 현 독립문(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터에 있었던 ‘모화관(慕華館)’에서 잎이 가늘고 짧은 ‘한국형 들잔디’만 왕릉에 공급한 것이다.

 

이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졌다. 6대 단종 비 정순왕후의 능 사릉(경기 남양주시) 등 왕릉 5곳 인근의 문화재청 양묘장에서 왕릉 나무의 혈통을 키워 왕릉에 공급하고 있다. 왕릉 나무는 모두 ‘족보 있는 나무’인 셈이다.

 

인근 도로변에 줄지은 젓나무 군락이 유명한 세조 능 광릉(경기 남양주시)의 울창한 숲은 국립수목원의 기반을 마련했다. 900여 종 수목이 어우러진 이곳은 현재 유네스코 지정 생물권 보전 지역 등재가 추진되고 있다.


태종 능 헌릉, 순조 능 인릉(이상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오리나무 숲은 서울시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수도권 일대 조선 왕릉의 녹지를 모두 합친 면적은 1935만3067m²에 이른다. 조선의 철저한 녹지 보존 정책이 후대에 건네준 선물이다. 


 

 성종 능 선릉과 중종 능 정릉(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은 도심 속 쾌적한 녹지를 제공한다.

조선의 ‘그린벨트’ 정책이 준 선물이다. 사진 제공 : 문화재청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동아일보] 2008-09-10

 

 

 

■ “신성한 봉분, 홍살문서 보이지 않게”, 정면 입구를 오른쪽 90도 방향 배치

 

왕릉의 정면은 어디일까. 조선 영조 원비 정성왕후의 홍릉(경기 고양시)에 들어서는 순간, 잠시 헷갈린다. 조선 왕릉 입구인 홍살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丁’자 형태의 건축물인 정자각(丁字閣). 정자각의 방향이 입구를 향해 있으니 정면이 분명한데,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의 모습은 전형적인 측면이기 때문이다. 건축물 정면에 응당 있어야 할 계단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측면이 정면 행세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정자각은 조선 왕릉 어디서나 신주를 모신 ‘一’자 형의 정전(正殿) 앞에 붙은 ‘궐’ 자 모양의 절하는 공간 배전(拜殿)의 맞배지붕(지붕의 앞면과 뒷면이 맞닿아 있는 지붕 양식) 옆면이 정면처럼 앞을 보고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참도(參道)의 방향은 정자각 앞에서 오른쪽으로 90도 꺾였다가 정자각을 따라 왼쪽으로 다시 90도 꺾인다. 건축물 오른쪽에 이르러서야 정자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그렇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의 ‘측면’이라고 생각한 면이 실제로는 ‘정면’인 셈. 정자각은 ‘시각적 정면’과 ‘행위적 정면’이 다른 건축물이다.

 

정자각은 참배자가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으로 나오도록 설계됐다. 이는 참배자가 정자각 뒤 봉분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도록 해 왕릉의 위엄과 권위를 배가하는 효과를 낸다. 또 해가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지듯 동쪽은 시작과 탄생, 즉 양(陽)을 뜻하고 서쪽은 끝과 죽음, 음(陰)을 뜻한다. 자연의 섭리를 인공적 건축물에 구현한 것이다.

 

‘행위적 정면’에는 두 개의 계단이 있다. 하나는 수려한 구름무늬를 새긴 소맷돌(난간)과 삼태극 무늬의 고석(鼓石·북 모양의 둥근 돌)을 꾸민 화려한 계단이다. 다른 하나는 소박한 계단만 갖췄다. 여기에도 신성한 세계와 세속 세계를 구분하는 원리가 숨어 있다.

 

화려한 계단은 선대 임금의 영혼이 땅을 떠나 구름을 밟고 하늘로 올라가는 상징이다. 왕릉 입구 홍살문의 삼태극과 상통하는 고석의 삼태극은 참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기호이기도 하다. 그 옆 간소한 계단은 임금이 이용한다.

 

복잡한 원리는 끝이 없다. 동쪽의 올라가는 계단이 2개인 반면 서쪽의 내려오는 계단은 하나밖에 없다. 누군가는 올라갈 수만 있고 내려올 수 없다는 뜻. 서쪽 계단은 임금이 제향을 마치고 내려오는 계단이다. 내려오지 못하는 선대왕의 영혼은 어디로 갈까?

 

같은 제향 공간이지만 조선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 정전과 정자각의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 종묘 정전의 뒤에는 문이 없다. 신위에 혼백이 담겼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자각 뒤에는 문이 나 있다. 동쪽 계단으로 올라온 왕의 영혼이 이 문을 통해 봉분으로 홀연히 올라간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문은 정자각에서 봉분 앞까지 펼쳐진 언덕인 푸른 사초지(莎草地)와 그 위 봉분 및 문·무석인, 장명등 같은 조각을 어렴풋이 보여주면서 정전의 어두운 공간 뒤로 펼쳐진 또 하나의 신비로운 경관을 창조한다. 태조 능인 건원릉(경기 구리시), 인조 능인 장릉(경기 파주시), 중종 제2계비 문정왕후 능인 태릉(서울 노원구 공릉동) 등의 풍경이 일품이다.

 

또 정자각 기둥은 주춧돌에서 70cm 높이까지는 하얀색으로 칠해져 멀리서 보면 마치 기둥이 공중에 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구름 위 천계의 세계를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한 것” (이영 경원대 건축학과 교수)이다.

 

 


조선 왕릉 입구 홍살문에서 바라본 정자각. 영조 원비 정성왕후의 능 홍릉(경기 고양시)이다. 입구를 바라보고 있으니 당연히 건축물의 정면이어야 하지만 시야에 들어온 모습은 측면이다. 고양=윤완준 기자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동아일보] 2008-09-24

  

 

■ 화강암 짜맞춰 만든 ‘완벽한 밀실’, 도굴 원천봉쇄… 발굴조사도 안해

 

조선 왕릉의 봉분 밑 지하에는 ‘비밀의 방’이 있다. 왕과 왕비의 시신이 잠든 석실(石室)이다. 석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 실체가 드러난 적 없다. 한 번도 발굴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석실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현재로선 국가 의례의 예법과 절차를 기록한 ‘국조오례의’와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석실의 비밀에 다가가는 수밖에 없다.

 

세종대왕과 왕비 소헌왕후가 함께 묻힌 조선 최초의 합장릉인 영릉(경기 여주군). 지하 3m에 석실이 있다. 조선시대 국법에 따르면 시신은 지하 1.5m 깊이에 묻어야 했다. 하지만 왕과 왕비는 지하 3m 깊이로 묻었는데 당시 극비사항이었다.

 

도굴을 막기 위해서였다. 영릉의 석실은 길이 3.80m, 너비 6m, 높이 1.70m에 이르렀다. 화강암으로 벽과 문, 천장을 만들어 이었는데, 석실 좌우 벽으로 쓰인 화강암 하나의 길이가 3.80m, 높이는 1.70m, 두께는 0.76m에 달할 정도로 거대했다.

 

이 거대하고 무거운 돌 부재(구조물의 뼈대를 이루는 재료)들을 잇는 데는 못을 사용하지 않고 부재를 서로 견고하게 짜 맞추는 목조 건축 방식이 도입됐다. 돌 부재 사이의 이음매는 인정(引釘)이라 불리는 대형 철제 연결고리로 고정시켰다. 조선 왕릉 석실의 구조를 연구한 김상협(명지대) 박사에 따르면 “이런 석조 건축 방식은 유례없는 첨단 기술”이다.

 

화강암 부재의 이음매 사이 틈은 석회와 모래, 흙을 섞은 삼물(三物)로 채우고 느릅나무 껍질을 삶은 물에 이겨 만든 방수재를 발랐다. 느릅나무 껍질의 코르크층은 물을 거의 통과시키지 않는 성질이 있는데 선조들이 이를 알았던 것이다.

 

석실 입구는 미닫이 형식의 돌문으로 막았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시신을 안치한 뒤 마지막으로 이 돌문 앞에 문의석(門倚石)이라 불리는 넓이 2m, 높이 1.5m의 돌을 설치해 ‘이중 돌 빗장’을 채웠다. 도굴범이 이렇게 탄탄한 석실의 방어 구조를 뚫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석실은커녕 석실 입구까지 오기도 힘들다. 석실 사방은 삼물 반죽을 1.20m 두께로 채우고 다진 잡석을 또 그만큼의 두께로 채웠다. 삼물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는다. 석실 외부도 이중 방어막이 구축돼 있는 셈. 조선 왕릉의 석실은 한 번도 도굴된 적이 없다.

 

석실 바닥 관이 놓이는 부분에는 돌을 깔지 않았다. 돌은 시신을 차갑게 할 뿐 아니라 땅의 기운을 막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닥에는 구리로 만든 촘촘한 그물망인 동망(銅網)을 깔았다. 물길을 만들어 빗물을 내보내고 뱀은 들어오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다.

 

왕과 왕비의 시신 사이에는 두께 1.20m의 돌벽을 설치하고 벽의 중간에는 0.50m² 크기의 창혈(窓穴)이라는 구멍을 뚫었다. 그 틈 사이에 부장품을 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영혼이 서로 오갈 수 있도록 뚫은 통로라는 낭만적인 해석도 있다. 부장품은 나무로 만들어 금칠한 옥쇄와 왕이 평상시 좋아했던 글이나 그림을 넣었다. 



 

조선 왕릉의 석실에도 고구려 고분이나 고려 왕릉처럼 벽화가 있었다. 석회를 바른 뒤 기름먹으로 천장에는 해, 달, 별, 은하를 그려 천상을 나타내고 사방에는 청룡(동쪽) 백호(서쪽) 주작(남쪽), 현무(북쪽)를 그렸다. 고구려 고분벽화가 조선시대에 어떻게 계승됐는지 보여 주는 단서가 조선 왕릉의 석실에 숨어 있는 것이다.

 

윤완준 기자 [동아일보] 2008-10-01

  

 

■ 왕릉 40기서 해마다 제사. 유-무형 유산 ‘귀중한 소통’

 

조선 왕릉의 정자각 서쪽 앞. 봉분으로 이어지는 푸른 언덕인 사초지(莎草地)가 시작되는 곳에 있는 낯선 석조물. 땅 위에 평균 1m의 기다란 화강암을 정사각형 모양으로 이어 놓았다. 정사각형 내부는 땅을 파 깊숙하다.

 

조선 왕릉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예감(예坎)이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묻는 구덩이’. 무엇을 묻었을까. 예감의 또 다른 이름인 망료위(望燎位)로 그 쓰임새를 추적해 보자.

 

망료는 제사 때 선대왕의 평안을 기원하며 읽은 축문(祝文)을 제사가 끝난 뒤 태우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을 뜻한다. 예감은 정자각 서쪽에 위치해 있다. 제향 공간인 정자각은 동쪽 방향이 정면인데 제향은 정자각 동쪽에서 시작해 서쪽에서 끝났을 것이다. 예감은 제사가 끝난 뒤 축문을 태우고 땅에 묻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예감 위에 소나무로 만든 뚜껑을 덮어 놓았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예감의 진짜 가치는 과거에 축문을 ‘태워 묻었던’ 곳이 아니라 지금도 축문을 ‘태우고 묻는’ 곳이라는 데 있다. 왕과 왕비가 합장된 경우 등을 포함해 조선 왕릉 40기에서 모두 제향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 600년의 1∼27대 모든 왕과 왕비를 위한 제향 의식이 기일마다 열리고 있다.

 

건원릉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다른 곳은 왕릉마다 봉향회가 제향을 주관한다. 매년 6월 27일 열리는 건원릉 제향에는 1500여 명이, 다른 왕릉에는 300∼500여 명씩 참가한다. 이렇듯 해마다 수십 차례씩 소프트웨어(무형유산)와 하드웨어(유형유산)가 만나 조선 왕릉의 가치를 완성하고 있는 셈이다.

 

 


제향날에 왕은 홍살문에서 참도를 통해 정자각까지 걸어간다. 평소 정자각은 기둥마다 신렴(神簾)이라 불리는 일종의 ‘커튼’을 쳐놓았다가 제향날 걷어 올렸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신렴은 2006년 원종(인조의 아버지) 능인 장릉(경기 김포시)에서 발견된 것으로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왕은 선대왕에게 첫 잔을 올리는 초헌관(初獻官) 역할을 맡는다.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관(亞獻官)은 영의정이, 마지막 잔을 올리는 종헌관(終獻官)은 좌의정이 한다. 올해 건원릉 제향에서는 태조 600주기를 맞아 의친왕의 손자인 이원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총재가 직접 초헌관을 맡았다.

 

초헌관이 정자각 동쪽의 계단을 오른다. 정자각의 절하는 공간 배전(拜殿)에서 헌관(제사에서 잔을 올리는 사람)들은 항상 서쪽을 봐야 한다.

 

제상(祭床)을 차린 정전(正殿)에는 문이 3개 있는데, 출입문처럼 보이는 중앙 문은 제향 때 쓰이지 않는다. 헌관은 동쪽 문으로 들어가 서쪽 문으로 나온다. 시작을 뜻하는 동쪽과 끝을 뜻하는 서쪽의 원리를 간직한 동입서출(東入西出)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다.

 

왕릉 제향은 왕이 승하한 지 3년 뒤 올리기 시작했다. 왕이 세상을 떠나고 왕릉이 조성되려면 5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창덕궁에 임시 건축물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했는데, 부패를 막기 위해 동빙고에서 가져온 얼음으로 ‘침대’를 만들었다. 시신은 왕릉 석실에 자리할 때까지도 세상을 떠날 때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의친왕의 손자인 이혜원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은 말한다.

“중국은 명, 청 시대 황릉의 웅장함을 자랑하지만 제향의 전통을 상실한 ‘옛 유적’일 뿐이다. 조선 왕릉은 애초의 기능을 잃은 박제된 문화유산이 아니라 현재적 공간이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 살아 숨쉬게 만든 유산은 조선 왕릉뿐이다.”

윤완준 기자  [동아일보] 2008-10-08

 



산릉 제례 진설도


제례를 위한 상차림은 종류에 따라 다양하지만 산릉제례의 경우에는 간략하게 진설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음식을 담는 제기는 제기고에 보관하여 사용하였다.


이러한 산릉제례는 종묘제례와 사직대제와 같은 국가차원의 제사와 마찬가지로 조선후기까지 잘 보존되어 왔고 대한제국 선포 후에는 『국조오례의』를 보완한 『대한예전』에 따라 천자국(황제)의 제례로 실행하였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이 되기까지 제례는 지속되어 왔고, 광복 후 혼란기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10여 년 동안 중단되었다. 이후 1956년 (사)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조직된 후 제례를 복원하고, 1957년 음력 5월 24일에 태조의 건원릉에서 해방 후 첫 제례를 봉행한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 연재에 도움말 주신 분들

 

김기덕 건국대 교수, 김두규 우석대 교수, 김상협 박사, 김이순 홍익대 교수, 목을수 전 융건릉관리소장, 박동석 문화재청 사무관, 은광준 조선왕릉연구소장, 이선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이영 경원대 교수, 이창환 상지영서대 교수, 이혜원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 최종희 배재대 교수, 각 왕릉관리소장(가나다순)

 

 

전각 명칭

 

조선 시대는 양반, 중인, 상민(평민), 천민 등으로 나뉜 철저한 계급 사회였습니다. 신분의 차에 따라 하는 일은 물론 입는 옷도 달랐죠.

 

궁궐에는 왕과 왕비로부터 왕실 가족, 군인, 내시, 궁녀, 노복(종)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의 수많은 사람이 기거하고 활동했습니다. 이들이 거처하고 활동하는 건물에도 서열이 존재했지요. 즉 건물의 용도와 주인의 신분에 따라 건물 이름의 끝 글자도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 등으로 달리 붙여졌습니다.

 

우선 '전(殿)'은 왕과 왕비가 머무는 공적ㆍ사적인 공간으로,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사는 건물에도 '전'자를 붙입니다. 경복궁의 강녕전(왕의 일상적 생활 공간), 교태전(왕비의 침소 및 집무실)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요.

 

그러나 왕의 아들인 대군이나 군이 머무는 곳에는 한 단계 아래인 '당(堂)'자를 붙입니다. 그 밖에 관원들의 공적인 공간에도 '당'을 씁니다. 참고로 향교나 서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공자를 비롯해 동국 18현의 위패를 모신 건물을 '대성전'이라고 하고, 유생들이 강학하고 담론하는 건물을 '명륜당'이라고 칭했답니다.

 

그리고 이보다 한 단계 아래인 '합(閤)'과 '각(閣)'은 전이나 당의 부속 건물로 쓰입니다. '재(齋)'의 경우 왕실 가족들의 주거 공간으로 독서ㆍ사색을 하는 용도로 쓰였으며, '헌(軒)'은 대청마루가 발달한 건물을 가리킵니다. 한편 휴식ㆍ연회 공간도 바닥이 지면보다 높으면 '루(樓)' 라고 칭했고, 그 보다 작은 건물은 '정(亭)' 이라고 했습니다.

 

ㆍ출처 : iMBC.com <대장금>에서..

[출처] 조선 왕릉 2|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