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적.사적/궁궐,성곽

구름에 달가듯이 2014. 9. 22. 21:19

경복궁(景福宮)의 어제와 오늘

 

 

 

궁과 광화문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첫 번째로 만들어진 곳으로, 조선 왕조의 법궁이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후 종묘, 성곽과 사대문, 궁궐 등을 짓기 시작하는데 1394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395년에 경복궁을 완성한다.
 
‘큰 복을 누리라’는 뜻을 가진 ‘경복(景福)’이라는 이름은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왕자의 난 등이 일어나면서 다시 개경으로 천도하는 등 조선 초기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경복궁은 궁궐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정치 상황이 안정되고 비로소 이곳이 조선 왕조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
 
경복궁의 광화문 앞으로는 조선에서 가장 넓은 대로인 육조거리가 남쪽으로 뻗어있고 좌우로는 행정관청이 밀집하여 있는 조선의 정치 1번지였다. 서울에는 궁궐이 5곳 있는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만 성문처럼 돌로 된 문위에 누각이 올라간 형태로 조선의 건국 이후 오랫동안 국가를 상징하는 중심이였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이 나 무너지게 되는데 조선 말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새로 지어진다. 이때 광화문도 다시 세웠다. 경복궁 중건을 통해 조선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자 하였지만 얼마 되지 않아 건천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이곳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가게 되니, 단청의 색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다시 빈집이 되어 버리는 비운을 겪는다. (네이버)

조선총독부청사(朝鮮總督府廳舍)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를 시행한 최고 행정 관청인 조선총독부가 사용한 건물이다.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35년의 식민 통치 기간 동안에 조선총독부는 남산 왜성대와 경복궁의 총독부 청사  등 2곳이 있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한일 병합 조약에 의해서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1907년에 건립된 남산 왜성대의 통감부 청사를 총독부 청사로 전용하였다가 사무 공간의 부족으로 1926년에 경복궁 흥례문 구역을 철거한 터에 신청사를 건립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 조선총독부 청사는 미군정청에 인계되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민국 정부가 청사를 다시 인계받아 정부 청사, 박물관 등으로 활용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청사 일부가 파괴되었고, 1990년대 중반에 일제 강점기의 잔재 청산을 이유로 그때까지 현존하던 청사를 철거하였다. (위키백과)

중앙청이라 불리운 일제 때 조선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내에 만듦으로써 조선 왕조의 상징을 훼손하고 조선의 자존심을 무너뜨렸으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또한 해체해 지금의 건춘문 자리 근처로 옮겨버렸다. 광화문은 이후 1968년 콘크리트로 복원되는데 당시 남아 있던 중앙청 자리를 기준으로 해서 세우다 보니 원래 경복궁 건물들이 이루고 있는 선상에서 벗어나 삐뚤게 놓이게 되었다.  현재 제자리를 찾아 복원 되었다.

 

 

1894. 11. 서울의 중심부 남대문로 모습에 잡힌 광화문과 백악산 (광교통으로 가는길)


 

19세기 후반(1895년) 서쪽에서 본 경복궁과 궁성 앞의 모습.

중앙에 광화문, 그 왼편에 흥례문, 근정문, 근정전이 차례로 보인다.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광화문 좌우측 담장 모서리에는 서집자각, 동십자각이 궁장과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구한말 동편(측면)에서 본 경복궁 모습. 크기 w1287 h296 (크게보기 이미지 클릭!) 

 

 

 

경복궁 동북쪽의 북촌에서 바라본 경복궁 전경. W 900 h375 (클릭하면 크게보기 됨)

 

1876년 교태전에서 시작된 화재로 내전 일곽이 대부분 불에 타버렸다. 사진에 강녕전과 교태전 등이 없는것으로 보아1888년 복구하기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춘휘당과 보광당은 1890년 이후에 헐리고 이자리에 함회당과 집경당이 세워진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1395년 창건때는 사정문이었으나 세종 때 광화문으로 명명 되었다.

 

경복궁의 정문이자 남문인 광화문 3개의 홍예로 되어있는데 가운데 큰문은 왕이 사용하는 어문, 동서의 동협문, 서협문은 문관과 무관이 사용하는 문이다.  과거의 모습이지만 광화문 누각의 단청과 편액(현판) 등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 잘 보이는 사진이다.

1863년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위해 1865년 경복궁 공사를 착수하는데 이때 광화문도 다시 세웠다. 광화문 앞으로는 조선에서 가장 넓은 대로인 육조거리가 남쪽으로 뻗어있고 좌우로는 행정관청이 밀집하여 있는 조선의 정치 1번지였다. 서울에는 궁궐이 5곳 있는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만 성문처럼 돌로 된 문위에 누각이 올라간 형태로 조선의 건국 이후 오랫동안 국가를 상징하는 중심이였다.

 

광화문 앞으로 지금과 달리 지면보다 높은 단(壇)위에 월대(月臺)놓여 있어 궁궐 정문으로서의 위엄을 더했다.


1395년(태조 4년)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고 오문(午門)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425년(세종 7년)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光化門)이라고 바꾸었다.

 

광화문은 석축기단(石築基壇)에 3개의 홍예문(虹霓門)를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중층우진각 지붕으로 된 목조문루를 세웠다.

 

목조건축의 양식은 다포식(多包式)으로 상하층이 모두 외이출목(外二出目)·내삼출목(內三出目), 외부는 제공(諸工) 뿌리를 쇠서로 하고, 내부는 운공(雲工)을 만들었으며, 첨차(墅遮) 양측면에는 모두 파련초각(波蓮草刻)을 하였다.

 

이 건물은 섬세한 수법과 웅대한 구조를 보여주고,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장려한 외관을 지닌 가장 뛰어난 궐문(闕門)으로 평가되었다.

광화문 3개의 궐문 중 가운데 칸이 높고 크다. 이곳은 임금이 행차하는 문이며 천정에는 주작(朱雀)을 그려넣었다. 동쪽문에는 천마(天馬)를 그렸고 서쪽문에는 거북을 그렸다. 정면 좌우에는 상상의 동물이자 영물인 해태상을 설치했다.

 

 광화문 앞으로는 궐외각사인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 육조의 관아들이 늘어서 있었고 이를 육조거리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여년 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한일병합 후 1927년 조선총독부가 해체하여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에 이전시켰고, 설상가상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1968년에 전통적인 광화문의 모습을 상실한 채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다. 그나마 도로확장을 위해 위치도 뒤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2006년 12월부터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되어 전통적인 옛 모습을 찾기 시작했으며 2010년 8월에 완공되었다. (이상 네이버 지식백과)


 

 

 

 구한말의 광화문과 육조거리


경복궁의 남쪽 정문인 광화문 앞 좌ㆍ우에 의정부를 비롯한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육조(六曺) 등 주요 관아가 건설되면서 형성되었다. 광화문을 바라본 우측에는 의정부와 이조, 한성부, 호조가, 좌측에는 예조,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및 사역원이 차례로 세워졌다.

 

 

 

광화문을 통과하면 홍례문이 있고 그 뒤로는 근정문이 나오고 근정문을 지나면 조선정치의 핵심이자 경복궁의 중심건물인 근정전이 통과 해온 3개의 문과 중심축에 맞춰져 놓여 있고, 그 뒤로는 왕의 집무실, 왕의 침실, 왕비의 침실, 후원(지금의 청와대 일대) 그리고 담장을 넘어 북악(백악)산과 이어지며, 이는 육조거리와 함께 서울 도성 안의 남북의 중심축이자 조선의 상징적인 장소였다.

 

  1890년 경 광화문.  위와 같은 사진으로 눈이 곳곳에 쌓여있는것으로 보아 겨울철로 보인다

 

 

광화문과 육조거리

 

 

광화문 앞(육조거리)으로 배치된 국가의 정무(政務)를 맞아보던 행정관청은 다음과 같다.  

 

서쪽부터 삼군부(三軍府)는 군사업무 담당, 중추부(中樞府)는 시대에 따라 기능이 달랐고 사헌부(司憲府)는 지금의 검찰과 비슷하고, 병조(兵曺)는 국방부, 형조(刑曺)는 법무부, 공조(工曺)는 건설교통부 정도가 될것이고, 동쪽부터 의정부(議政府)는 내각회의, 예조(禮曺)는 교육, 의례, 외교 등을 담당하고, 이조(吏曺)는 人事를 담당하는 행정안전부, 호조(戶曺)는 재정, 세금 담당, 한성부(漢城府)는 서울시청, 기로소(耆老所)는 국가원로 클럽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1904년 이라고 설명된 것도 있다.
 

 

1900년대 초, 광화문 앞 좌우에 있는 해태상에서 놀고있는 댕기머리 아이들


 

 

좌) 복장으로 보아 관청에 들린 관료의 마부로 보인다. 말 주위의 둥글게 뭉쳐놓은 눈덩이를 보니 많은 량의 눈이       내린듯 하다.  우) 해태상 머리 위에 올라 서있는 소년 모습이 천진스럽게 보인다.

 

 

 광화문앞 육조거리에 어떤 연유인지 광화문 앞에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1900년대 광화문 앞 인력거 행렬 

 

 

 

  1904년의 경복궁 경회루

 

 

1904년의 광화문. 이무렵 부터 광화문과 육조거리에 전봇대가 보이기 시작 한다.


 

 

화문과 육조거리 양옆의 해태상이 한눈에 보인다.

 

 

멀리서 바라본 광화문과 육조거리


 

 

 

 경복궁 안쪽 흥례문에서 바라본 광화문 뒷 모습.  

흥례문이 헐리기 전의 사진으로 추정되는데, 넷상에서 광화문 전면 사진은 흔하게 볼 수 있지만 후면(안쪽)의 모습은 그리 흔치않은 자료다.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 저 무성한 잡초를 보면 궁의 주인이 없어 관리되지 않은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광화문을 통과하여 바라 본 흥례문(興禮門)과 행각(行閣) 1910년대 초 모습. 임금이 살지 않는 궁의 모습은 보는 바와 같다.

광화문을 들어서면 2번째 문이며,
이 문을 통과하면 금천이 흐르고 그곳을 건너는 다리인 영제교가 있고 바로 앞에 근정문이다. 일제는 후일 잡초가 난 이 자리와 저 흥례문과 행각을 철거하고 총독부건물을 짓게 된다.

 

  

근정문과 영제교

 

당시 총독부는 남산에 있었는데 건물이 좁고 협소하였기 때문에 새로 건설계획에 착수하게 된다. 총독부청사를 지을 부지로 지금의 서울대학교 병원과 대학로 근처 등도 후보지로 선정 되었다고 한다. 반대가 있었음에도 권력에 의해 조선의 상징인 경복궁 안 근정문 바로 앞에 세워지게 된다. 위 사진의 영제교는 1915년 이전에 철거된 상태였다.


 

 

정문 모습 - 1900년대 초.  

 

광화문을 들어서면 흥례문이 나오고 그 문을 통과하면  개천이 나오는데 금천(禁川), 어구(御溝)라고 한다. 이 개천은 모든 궁궐과 왕릉의 진입로에 있는 신성한 공간을 가르는 경계로 이것을 건너는 다리는 영제교라고 한다.

 

영제교 양옆에는 금천을 내려다 보는 4마리의 천록이 자리하고 있다. 영제교를 건너면 근정문에 이른다. 이 영역은 행각으로 둘러 싸여 있는데 이 안에 기별청, 정색, 마색, 결속색 등 하위 관청이 있었다.

 

근정문은 출입을 위한 단순한 문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데,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명종, 선조 등 총 일곱 임금의 즉위식이 근정전에서 거행되기도 했으며,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이곳에서 책봉식을 가졌다. 

 

 

근정문으로 가는 다리인 영제교와 다리 양 옆 금천을 내려다 보고 있는 천록

 

다리 남북 양쪽으로 4마리의 천록이 조각되어 있다. 이 주변으로는 벽을 두른 행각이 둘러져 있어 이곳에 내병조, 정색, 마색, 결속색의 관청이 있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안쪽으로 벽을 만들지 않고 복도와 같은 텅빈 회랑처럼 복원 되어 있다.

어느새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있는 홍례문과 그 옆을 둘러쌌던 행각도 자취없이 헐려버렸다. 흥례문에서 근정전의 주 출입구인 근정문으로 건너가던 영제교(사진) 다리 난간도 치우고 다리밑을 흐르던 금천, 명당수 개울도 묻어버려 물줄기가 끊겨 버렸다.
이 모든것들을 헐고 터를 넓혔다.

일제는 한일병합이 이루워 지자 박람회(공진회)를 연다는 구실로 전각과 행각을 헐게 되는데 일제가 새 청사부지로 선택한 곳이 바로 오백년 조선왕조를 호령했던 경복궁 근정전 앞뜰이다. 그러니까 총독부 부지는 광화문을 들어서게 되면 보이는 흥례문 부터 위 사진에 보이는 근정문 바로 앞까지 총독부 청사가 들어서게 되는 곳이다.

 

 

경복궁(景福宮)의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 모습. 1900년대 초


 

 

1910년대의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 

 

 


근정전 월대 위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근정문 뒷 모습.  1900년대 초중반

 

이 때만 해도 근정문 너머(앞)에 공진회장 시설물도 총독부건물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종도 순종도 살지 않는 경복궁은 보는 바와 같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한 사전 준비작업으로 경복궁 전각이 훼손되기 시작

일제는 1914년 7월 근정전 전면에 있는 흥례문과 연결한 행각, 그리고 세자가 머물던 자선당을 비롯한 많은 건물과 문, 담장을, 그 외 이용하지 않는 석재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설살가상으로 1915년 '정(始政) 오년(五年)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를 개최하는데 이 공진회 전시장을 마련한다는 핑계로 경복궁을 마구 헐어버린다

경술국치로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지 몇년 되지 않아 경복궁은 다시 시련을 맞는다. 1915년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는 일종의 산업박람회 비슷한 이벤트를 열기로 했는데, 일제가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 5주년을 자축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통치로 인해 조선이 훨씬 살기 좋아졌다는 것을 국내외에 두루 알리고자 하는 속셈이 숨어 있었고, 거기엔 더 큰 계획인 조선총독부는 새청사를 지을 계획을 세운다. 그 속뜻은 영원히 지배하겠다는 식민 통치의 야욕이었다.

다음은 1910년 5월15일 '대한매일신보' 에 실린 '경복궁이 없어지네' 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1910년 5월 10일 왕실사무를 총괄하던 궁내부는 경복궁 내 공원 신축을 위해 전각 4,000여칸을 경매 했다. 조선인과 일본인 80여명이 경매에 참여했고, 이중 10여명에게 전각이 매각되었다. 특히 일본인 '기타이' 에게 전체의 3분의 1이 매각도었는데, 그는 척식회사 총재 '우사가와 카즈마사' 의 첩자로 알려져 있다.....]

이 기사를 통해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이전부터 경복궁이 훼손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의 전각들은 일제 강점기
이후 줄곧 살림집, 요릿집, 기생집, 사찰 등으로 팔려 나가고 또는 일본으로 가져가 지어 놓기도 했다.

 

이 때만 해도 근정문 너머(앞)에 공진회장 시설물도 총독부건물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종도 순종도 살지 않는 경복궁은 보는 바와 같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한 사전 준비작업으로 경복궁 전각이 훼손되기 시작

일제는 1914년 7월 근정전 전면에 있는 흥례문과 연결한 행각, 그리고 세자가 머물던 자선당을 비롯한 많은 건물과 문, 담장을, 그 외 이용하지 않는 석재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설살가상으로 1915년 '정(始政) 오년(五年)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를 개최하는데 이 공진회 전시장을 마련한다는 핑계로 경복궁을 마구 헐어버린다

경술국치로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지 몇년 되지 않아 경복궁은 다시 시련을 맞는다. 1915년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는 일종의 산업박람회 비슷한 이벤트를 열기로 했는데, 일제가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 5주년을 자축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통치로 인해 조선이 훨씬 살기 좋아졌다는 것을 국내외에 두루 알리고자 하는 속셈이 숨어 있었고, 거기엔 더 큰 계획인 조선총독부는 새청사를 지을 계획을 세운다. 그 속뜻은 영원히 지배하겠다는 식민 통치의 야욕이었다.

다음은 1910년 5월15일 '대한매일신보' 에 실린 '경복궁이 없어지네' 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1910년 5월 10일 왕실사무를 총괄하던 궁내부는 경복궁 내 공원 신축을 위해 전각 4,000여칸을 경매 했다. 조선인과 일본인 80여명이 경매에 참여했고, 이중 10여명에게 전각이 매각되었다. 특히 일본인 '기타이' 에게 전체의 3분의 1이 매각도었는데, 그는 척식회사 총재 '우사가와 카즈마사' 의 첩자로 알려져 있다.....]

이 기사를 통해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이전부터 경복궁이 훼손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의 전각들은 일제 강점기
이후 줄곧 살림집, 요릿집, 기생집, 사찰 등으로 팔려 나가고 또는 일본으로 가져가 지어 놓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관보(대정3년)1914년 7월 1일자에는 "경복궁 구내 와용건물(瓦茸建物)"에 대한 "입찰불하공고"가 수록되어 있다.

1915년 열릴 조선물산공진회의 사전 정지작업으로 이뤄진 이때의 입찰불하에 따라 흥례문 구역과 동궁지역(즉 자선당, 비현각, 시강원 등)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입찰에 참여한 조선인 및 일본인이 다수 였다.


 

 

 

광화문과 문앞의 석재 난간의 원형모습 그대로지만, 오른쪽 홍예문 안에 보이는 흰색의 가건물은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1915년 9월)하기 위한 준비작업 중인지 또는  총독부청사의 공사가 시작 된것으로 추정된다. 이무렵 전봇대 숫자도 늘었고 전선이 선명하게 보인다.  왕의 행차로와 계단이 사라진지 오래...

 

 

 

바로 위의 사진과 같은 것인데 최근 광화문 재 복원 당시 20세기 초에 사진에 나타난 광화문 현판 글씨체를 참고? 했다는...

 

 

 

광화문 뒤로 총독부 건물을 짓는 구조물이 보인다

 

 

 

이때만 해도 광화문과 월대난간이 건재하고 좁은 형태의 계단이 남아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 뒤엔 완공단계에 있는 총독부 건물 돔이 보인다. 

 

 

느새 광화문앞의 석재 월대난간이 사라지고 노면전차가 다니고 있는모습이다. 원래 자리의 광화문도 총독부청사 완공에 따라 헐리게 되었는데..

 

 

 

경성 태평통(太平通) 이라는 사진에서 멀리 광화문과 총독부청사 모습이 보인다.

 

그로 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해체공사가 진행되어 1927년 경북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에 옮겨 세워진다. 이렇게 남았던 광화문도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 전체가 소실된다.

 

 

 

매일신보 1915년 7월 6일자에 수록된 공사중인 조선물산공진회장 전경이다. 광화문 위에 올라가 촬영한 것으로 흥례문 구역을 포함하여 경복궁 일대를 헐어낸 황량한 풍경이 한 눈에 들어 온다.

일제는 조선물산공진회장을 조성하기 위해 그 이벤트 장소로 경복궁의 4000여칸 200여동을 헐고 그 자리에 총독부박물관(미술관)
세우고 임시로 지은 전시장과 여러 시설물, 야외에는 조선 각지에서 가져온 유서깊은 석탑과 석불들이 장식물로 채워졌다. 이때부터 조선의 약탈 상징의 건물들이 경복궁안에 들어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손님을 맞는 광화문은 요란한 문구로 장식되었는데, 천황가를 상징하는 노란색 국화꽃 문양이 그려졌다.

 

 

손님을 맞는 광화문은 요란한 문구로 장식되었는데, 천황가를 상징하는 노란색 국화꽃 문양이 그려졌다. (w200을 확대한 사진)  전같으면 광화문 3개의 홍예문 사이로 흥례문과 그 문과 연결된 행각이 보여야 정상이지만 공진회장 시설물(흰색구조물)들이 보인다.

 

 

 

 

근정전의 어좌.


어좌와 일월오악도 - 해와 달, 다섯 산봉우리, 붉은 소나무, 폭포가 그려져 있는 이 그림은 왕권의 상징으로 왕의 초상이 있는 어진 주변이나 왕이 있는 자리에 펼쳐 놓았다고 한다.

 

 

 

1910년대 중반의 근정전 어좌. 일 관리인이 어좌 앞에 휀스를 쳐놓은 모습

 

 

근정전 내부. (최근 모습)

 

 

  

사정전. 1867년(고종 4) 건립. 왕이 일반 업무를 보던 집무실(유리건판 복원사진) 

 

 

왕의 침전인 강년전 모습. 유리건판 복원사진 (일강점기때 헐어버린 것을 현재 복원) 

 

대전이라 하는데 다른 내전 전각들과 달리 앞에는 월대가 있어 이곳에 차양을 치고 왕이 공식행사를 치르거나 그 가족들과 마당에서 벌어지는 공연을 관람하면서 연회를 즐겼다. 주변으로는 4개의 보조 침전이 있으며, 중전의 침소인 교태전과 함께 유일하게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는 전각이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복원). 중궁전 이라고도...  강녕전과 달리 좌우로 행각이 붙어있으며 궁녀들이 기거하며 시중을 담담했다.

 

 

 

 

대비의 침전인 자경전(현존). 고종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조대비의 거처. 

 

조대비는 순조의 세자인 익종의 비이자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로 고종을 양자로 들여 왕으로 즉위 시켰다.


 

 

아미산 북쪽에 있었던 흥복전(미복원)

 

흥복전은 주변으로 많은 행각들로 둘러싸여 내명부에 적절한 소임을 주고 각 전에 배속시키는 본부역활을 하였으며 외국사산을 만나는 편전으로도활용되었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의 중건을 위해 흥복전 일곽이 철거되고 이곳에 일본식 정원 조성되었다.

 

 

 

 

일장기가 걸린 근정전 

 

 


1915년 9월 11일 오전 10세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예정대로 공진회 개장식이 열렸다. 서양식 대례복을 갖춰입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비서관의 안내를 받으며 근정전 돌계단에 올라섰고, 근정전 가운데 놓인 용상으로 다가가 거리낌 없이 앉았다.

근정전은 국왕 즉위식, 세자책봉식,외국 사신의 접견, 문무관의 조례 등 국가의 공식 행사시나 의례가 열리는 곳이다. 일제는 더 이상 조선의 왕은 존재하지도 인정하지 않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하늘이 내리는, 오로지 군왕만이 앉는 존귀함이 깃든 용상에 온 백성과 이 땅을 희생으로 지켜낸 선조들의 통곡을 뒤로하고 데라우치 총독이거만하게 앉아서 회심의 웃음을 흘린다.

 

  

조선물산공진회 홍보물

 

그림에서도 이때는 광화문과 해태상이 제자리에, 경복궁의 전체 담과 근정전, 경회루 등 몇 몇 건물만이 남아있고 나머지 전각과 행각들은 모조리 허물고 전시장 건물과 오른편 윗쪽의 총독부 박물관이 모습이 보인다.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장 배치도 (크게보기 됨)

 

 

 

 

예정대로 1915년 9월 11일 부터 10월 31일까지 50일동안 경복궁에서 시정오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렸다.  왼쪽에 조선총독부 박물관 모습이 보인다.

 

 

 

 

조선총독부 박물관

 

 

 

조선물산공진회장을 조성하기위해 경복궁의 전각과 행각이 헐릴때 자선당도 함께 헐고 그 자리에 총독부박물관을 세웠다.

 

 

 

자선당 자리에 세워진 총독부박물관(미술관)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1915년 세우고 1916년 일본은 식민지 지배의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시정5년기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열때 조선의 물산과 근대의 물품을 비교하는 전시로서 이때 수집된 자료를 보관, 전시하기 위해 그 해 12월 1일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당시의 박물관은 미술관 건물 외에 경복궁의 수정전, 사정전, 금정전을 비롯한 궁궐 건축을 전시실 및 수장고로 쓰고 자경전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그 후 30여 년간 조선 총독부박물관은 고적조사 사업을 통해 수집된 유물과 구입품, 사찰의기탁품 등을 전시하였다.

 

 

 

조선총독부박물관 본관 제1실 내부  

 

 

  총독부박물관 본관 제3실 내부 

 

 

 

 

 

조선총독부박물관 증축 설계도 정면

 

 

 

1935년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터에서 조선총독부 종합박물관을 짓기위한 지진제를 지내고 있다. 

 

일본 신도(神道)방식으로 식장이 차려지고 우가키 가즈시케 조선총독이 절하고 있다. 건청궁은 명성황후 민비가 시해당한 현장으로 총독부는 이를 모두 철거하고 종합박물관을 지을려고 했다가 전시체제가 확산됨에 따라 그쳤다.

 

 

 

경복궁 조선물산 공진회 때 광화문 야간점등 모습 - 매일신보 1915년 8월 8일자 전광화(電光化)된 광화문(光化門) 밤의 공진회를 장식할 광화문의 뎐(전)등...칠일(8/7)밤 시험뎜(점)등

 

1915년의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 朝鮮物産共進會)'는 그네들이 조선을 지배한 지 5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고 식민통치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개최한 대규모 박람회였다. 이 바람에 그나마 남아 있던 강녕전, 교태전, 수정전, 사정전, 근정전과 같은 전각들은 모조리 근대문물의 전시공간으로 변했고,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구경거리를 찾아 밀려든 관람객도 무려 백만 명을 웃돌 정도였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말이 궁궐이었지 경복궁이 더 이상 궁궐의 기능과 위상을 이어나갈 여지는 거의 없었다. 이곳은 이미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유흥과 오락의 공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조선물산공진회만으로 그치질 않았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경복궁이 박람회장으로 사용된 경우는 여섯 차례가 넘었다.

우선 1915년의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조선총독부 주최)가 있었고, 그 이후 1923년의 '조선부업품공진회' (조선농회 주최)가 있었고, 곧이어 1925년의 '조선가금공진회' (조선축산협회 주최)가 있었고, 다시 1926년의 '조선박람회' (조선신문사 주최)가 있었고 또 1929년의 '조선박람회' (조선총독부 주최)를 거쳐 맨 나중에는 1935년의 '조선산업박람회' (조선신문사 주최)가 있었다.

1916년 6월 그들은 왕조의 법군(法宮:임금이 주로 거처하고 공식 활동을 하던 궁궐)인 경복궁의 근정문 앞뜰에서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조선총독부 새청사 신축을 위한 지진제(地鎭祭:건물의 안전을 비는 뜻으로 터를 닦기 전에 지신(地神)에게 지내는 제사)를 연다. 바로 조선의 정기와 혈맥을 끊는 민족말살정책의 첫 삽이 떠지는 순간이었다.
 
총독부는 한·일합병 이후 경복궁 안의 건물 4000여 간을 헐어 불하했고 1916년에는 근정전 앞마당에 총독부청사를 짓기 시작했다

 

 

 

 

일제가 경복궁 홍례문과 행각을 헐어내고 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해 기초 공사를 하는 모습 

 

 

 

원형이 잘 보이는 19세기 후반의 경복궁과 궁성앞의 모습. 한창 공사중인 조선총독부 청사

 

 

 

  

조선총독부 청사 신축 중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경복궁의 근정전하면 명색이 조선왕조의 핵심공간이 아니었던가 일제는 1915년~ 1935년 까지 6섯차례의박람회의 개폐회식을 치룬 장소이고, 뿐만 아니라 별의별 온갖 자질구레한 연회와 기념식과 각종 대회가 벌어지는 단골장소로 활용되었던 사례들은 역시 정말 수두룩했다.

 

일 총독들은 근정전의 단상(용상)에서 행사를 주제하는 등 이처럼 근정전의 수난인 용상에 오른 조선총독의 모습은 일제강점기가 지속되는 내내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1923년 조선부업품공진회 당시에 사이토 총독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포상식수여식을 거행하는 장면이다. 


 

 

 

 

조선박람회 포스터. 1929. 9. 12.~ 10. 31 까지 50일간 시정 20주년 기념 박람회를 열다.

 

 

 

1929년 조선박람회 때 경복궁 근정전에서 벌어진 폐회식에서 사이토 총독이 훈시하는 장면이다. 그 뿐만 아닌 근정전은 독립군과 싸우다 죽은 경찰 등 ‘순직경찰관초혼제’ 장소로 사용돼다, 

 

 

조선일보 1935년 5월호에는 경복궁 근정전 내에서 벌어진 '순직경찰관소방수초혼제'의 광경을 수록하고 있다.

 

임금의 자리인 근정전 용상이 '왜놈 순사들'의 제단으로 변해 버린 지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일제의 조선에 대한 만행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빈의 침전이며 동궁전이라고도 부른다. 자선(資善)이란 "착한 성품을 기른다"는 뜻이다.   광화문은 옮겼다 치더라도, 공진회장 사전 정지작업때 철거해 일본에 가져가 지은 멋대로 지은 자선당(資善堂) 모습이다.


세자 내외가 함께 생활하던 동궁의 내당인 자선당(資善堂)은 동궁철거에 참여한 일본 기업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郎1837~1928)해체한 부재를 일본으로 빼돌린 뒤 멋대로 재구성해 자신의 집에 설치했다. 오쿠라는 이 건물에 조선관(朝鮮館)이란 간판을 붙히고 우리나라 에서 가져간 문화재 여러점을 전시했다가 1923년 일본을 강타한 관동대지진때  없어지고 기단석 288개만 남았디.

 

 

옮겨간 직후(바로 위 사진)의 사진에는 향로가 없으나 향로 4개가 전면에 보인다. 이것도 훔쳐간 우리나라의 문화재가 아닌가... 경복궁 복원을 하면서 문화재 환수운동을 거치며 80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자선당의 유구는 경복궁 복원공사 때 자선당의 기단석으로 사용하고자 검토되었으나 관동대지진 때 불에 그슬리어 사용할 수 없었다.

 

 

 

 

 

1993년 일본 오쿠라호텔 발견된 자선당 유구와
현재 경복궁 내 건천궁 부근에 위와 같은 모습으로 설치 해 놓은 모습을 볼수있다.

 


문화재 약탈 재벌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는 경복궁 자선당을 뜯어가 자기 집 후원에 세워 놓는 등 조선 문화재 무단 반출로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강탈해 간 이천 5층석탑 ▲ 북한 문화재인 평양 율리사지 석탑

 두개의 석탑은 원래 경기도 이천 향교에 있던 고려초기의 5층석탑과 북한의 평양 율리사터의 고려때 5층석탑은 조각기법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받는데 1915년 조선총독부가 조선물산공진회 전시를 위해 서울로 옮겨온 것을 당시 조선에서 군수산업으로 떼돈을 벌었던 문화재 재벌 오쿠라 기하치로가 일본으로 몰래 반출한 이후 우리 문화재가 박물관에 보관되지 못하고 도쿄 오쿠라호텔 뒷마당 장식용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은 사례다. 이 외에도 오쿠라가 일본에 가져가 떠둘고 있는 망국의 문화재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다.

오쿠라가 약탈해간 이런 문화재 뿐이겠는가? 이런덩치가 큰 문화재를 헤체해 가져 갔다면 그 외 비교적 자그마한 보물급 문화재들은 얼마나 되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문화재청이 조사한 6만1409점보다 훨씬 더 많은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 등을 거치며 개인 소장가들에게 흘러들어간 문화재가 상당할 것으로 예측한다. 일본 궁내청 등에 소장된 한국 문화재 실태를 조사했던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박상국)은 "최소 10만점 이상은 될 것으로 추정한다" 고 말했다.

 

 

 두 탑이 나란이 서있는 곳. 빨간선 안에 오층석탑이 가려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2011년 지진피해로 오층석탑이 훼손 되었다는... 일본이 가져간 이천 오층석탑, 대지진 피해 ☜ 기사링크


여기서 '장춘단' 역사에 대해..!

1895년 조선의 왕궁을 무단 범궐(犯闕)한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께서 시해될 때 희생된 분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1900년 대한제국 광무황제(고종)의 지시에 의해 남소영 터에 장충단(獎忠壇)을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된다.

1908년 일제는 장충단에 올리는 제사를 금지시켰으며, 조선인의 민족정기를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대한제국의 우국충정의 성지(聖地)인  장충단을 놀이공원으로 바꾸고, 일본군 장군들이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이하 이등박문)를 초청하는 야유회가 개최되기도 하고, 1909년에는 안중근에게 척살당한 이등박문을 위한 추도식이 거행되기도 한다. 그 후 일제는 1931년에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한 박문사(博文寺)를 지어 철저히 파괴했다.

이 때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모시던 경복궁 선원전을 옮겨다 본전과 부속건물을 짓고, 또 경복궁만이 아닌 경희궁의 흥화문을 뜯어와 입구에 대문을 세우는 등 실로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장충단에서는 조선총독부에 근무했던 일본인이나 친일파 박영효의 장례식이 열리기도 했으며, 태평양전쟁 중 전사한 일본군의 위령제도 거행되기도 했다.

해방 후 박문사 건물은 동국대학교 기숙사로 잠시 쓰이다가 1945년 화재로 전소되었고(경성일보 1945년 11월 26일자), 이후 장충단은 원래의 설립취지대로 국립묘지가 된다. 1946년 군이 창설되어 북한군과의 국지적 교전과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 및 각 지역의 작전에서 전사한 장병들을 서울 장충사(獎忠祠)에 안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육군에서 묘지 설치문제가 논의되어 1949년 말 육군본부에서 서울근교에 묘지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6.25전쟁으로 중단된다. 1952년 국방부에서 육군묘지를 설치하게 되면 타군에서도 각기 군 묘지를 만들게 되어 관리상 많은 예산과 인원이 소요되고, 영현관리의 통일성을 기할 수 없는 등 여러 폐단이 생길 것을 우려해 3군 종합묘지를 설치하여 명칭을 ‘국군묘지’로 하였다. 즉 1956년 새로운 국립묘지(동작동)가 생기기 이전까지 장충단은 국립묘지로 활용되었다.
 
동작동에 국립묘지(현충원)가 생기면서 장충사는 그 기능을 잃게 되는데, 이때가 장충단을 복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당시 역사의식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1957년 현 장충체육관 자리에 육군체육관이 들어서게 된다. 1959년 서울시가 육군체육관을 인수한 뒤, 약 11,000m2 부지에 1960년 3월 공사를 시작해 1963년 2월 장충체육관이 개관된다.

1959년 1월 이승만의 지시로 장충단에 있던 박문사 본당 터에 국빈접대를 위한 영빈관 신축공사가 시작되었으나 4.19 와  5.16 으로 공사가 중단 됐다. 그 후 1965년 2월 박정희대통령 지시에 의해 다시 착수, 1967년 2월에 영빈관이 준공되었다. 1973년 7월 이후에는 현재의 신라호텔이 이 건물을 인수하였으며 현재는 호텔의 일부로서 영빈관으로서의 기능이 없어졌으나 회의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1959년 1월 이승만의 지시로 장충단에 있던 박문사 본당 터에 국빈접대를 위한 영빈관 신축공사가 시작되었으나 4.19 와  5.16 으로 공사가 중단 됐다. 그 후 1965년 2월 박정희대통령 지시에 의해 다시 착수, 1967년 2월에 영빈관이 준공되었다. 1973년 7월 이후에는 현재의 신라호텔이 이 건물을 인수하였으며 현재는 호텔의 일부로서 영빈관으로서의 기능이 없어졌으나 회의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왕의 어진을 봉안하였던 선원전 모습.
1932년 장충동에 있었던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 부속건물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박문사
 

 

 

위)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모시던 경복궁 선원전을 뜯어와 주지 거처와 창고로 사용했다.
아래) 경희궁 흥화문을 뜯어와 박문사 정문으로 사용했고, 신라호텔이 1988년까지 호텔정문으로 사용했다.

 

1927년 광화문 옆 궁성위에 서양식 작업복을 입은 인부들이 기와를 걷어내고 궁성도 광화문도 헐기시작 했다.

 

 


 

1927년 광화문 해체

총독부가 세워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공사가 진행되어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에 옮겨 세워진다.

광화문이나마 철거되지 않은것은 다행이었지만 조선의 상징이었던 광화문이 이전되는 것도 당시 조선 지식인에게 슬픔이었는지 언론인이었던 설의식은 "헐리짓는 광화문" 이란 글에서 "서로 보지도 못한지가 벌써 수년이나 된 경복궁 옛 대궐에는 장림(長霖)에 남은 궂은 비가 오락가락 한다. 광화문 지붕에서 뚝따하는 망치소리는 장안을 거쳐 북악에 부딪친다. 남산에도 부딪친다. 그리고 애달파 하는 백의인(白衣人)의 가슴에도 부딪친다" 라며 슬퍼하였다.

 


 1929년 10월 경복궁 앞에 들어선 총독부와 옮겨진 광화문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제공)

1929년 10월 제2회 조선박람회가 끝난 후 지금의 삼청동 총리공관 부근에서 찍은 총독부와 근정전, 광화문의 사진이다. 이 사진에서 보면 광화문이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십자각에서 바라본 광화문의 모습.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 된 광화문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현재 중학천은 없어지고 도로로 복개되었고 동십자각은 궁궐 담장이 헐리면서 섬처럼 떨어졌다. 왼쪽을 자세히 보면 궁성이
잘라진 모습이 보인다.

 

 

 

좌) 병합 이후 경복궁 동남쪽 모서리에 있는 동십자각 안쪽 모습인데 동쪽과 남쪽의 궁장이 아직 잘려나가지 않

     은상태다.

우) 사진상에는 동쪽의 궁장은 그대로 있고 남쪽은 아직 계단이 남아있고 그  앞까지 궁장이 잘려진 상태며 헐려

      진 곳에 철창이 보인다.

 

 

 

 

 ​ 
경복궁의 동쪽,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진 광화문. 다리 밑에 빨래하는 아낙들 모습.

 

 

 
동쪽으로 옮겨진 광화문의 석축을 보면 원래의 자리에 있을때와 돌의 색이 다른것을 볼 수 있다. 정석으로 이건(移建) 했다면 이런 모습일까?..

  

경복궁 동쪽의 옮겨진 광화문 문루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촬영한 사진으로 추정된다. 
 
촬영시기는 1927년 이후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궁장 앞에는 동문인 건춘문과 끝부분에 동측 파수각인 동십자각이 궁장과 연결되어 있는모습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중학천이 흐른다. 그리고 옮겨진 광화문 사진 중, 중학천 석교 아래에서 빨래하는 모습이나 각도를 볼때 확신이 간다.

  

경복궁 동쪽으로 옮겨진 광화문은 1929년 조선 박람회 당시의 사진으로 육측 앞에 기둥이 세워지고 윗부분에 차양이 가설된기괴한 모습으로 관람객을 맞았다. 

 


 경복궁 동쪽에 옮겨간 광화문. 좌측에 원래의 광화문이 있었던 곳 뒤의 총독부건물이 보인다. 옮겨진 이후에도 경복궁 내에서 여러차례 이벤트 장소로 사용되면서 광화문은 장식을 붙인채로 입장객을 맞았다.이렇게 남았던 광화문도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소실된다.  
 

아래는 경복궁의 동, 서, 남, 북의 문 들...

 

 

 

 

 경복궁(景福宮) 동문(東門)인 건춘문(建春門) 1920년대 모습. 좌측 멀리 누각은 동십자각이다
 

 

동문인 건춘문과 중학천 


건춘문(建春門)은 조선 태조가 한양천도와 함께 처음으로 세웠던 궁궐인 경복궁에 딸린 문으로, 문 안에 왕세자가 거처하던 춘궁(春宮)이 있었으며, 왕족·척신(戚臣)·상궁들만이 드나들었다. 또한 대궐에 열병(閱兵)을 위한 비상의 첩종(疊鐘)이 울리면, 왕을 직접 모시고 있던 시신(侍臣)들이 모여 명령을 기다리던 곳이기도 하였다.

 

이 문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과 함께 타버렸으며, 현재의 건춘문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정하면서 경복궁과 함께 1865년(고종 2) 12월에 상량(上樑)한 것이다. 

 

 

 

 

경복궁(景福宮)의 서문(西門)인 영추문(迎秋門)과 1926년 전차의 진동으로 추정되는 원인으로 인해 궁장이 무너진 모습.  

 

 

경복궁의 궁장 바로 옆에 궤도와 전차의 집전 장치가 맞닿을 전선은 식별되진 않지만 전봇대의 가로로 나온 것이 전차의 전선이 가설된 것이다. 궁장 옆으로 이어지는 전봇대와 무너진 담장에 막혀 서있는 전차모습이 이를 대변해 주는 듯 하다.

영추문(迎秋門) 또는 연추문(延秋門)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문무백관들이 주로 출입했던 문이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고종 때 경복궁이 재건되면서 다시 건립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인 1926년 석축이 무너지면서 철거되었다. 당시 영추문 앞에 전차의 종점이 있었는데 전차가 오가면서 발생한 진동 때문에 무너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네이버)

 


 광화문근처에서 본 경복궁 남서쪽 모서리의 서십자각 모습. 광화문과 궁성이 헐리기 전이다.

 

 

영추문 (서문) 근처에서 남쪽을 향해 바라본 서십자각 모습
 

 

 


 
경복궁(景福宮)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경복궁에서 본)
 
집옥재 앞을지나 광임문을 통과하면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이 나온다. 이 신무문을 나가서 쭉 가면 경보궁의 후원으로 왕이 친히 농사를 짓고 풍년을 기원하는 뜻으로 세운 경농재와 과거를 시행한 용문당과 용무당  등이 있었다. 일제는 이를 모두철거하고 총독관저를 세우는데 광복 후에도 대통령 관저(경무대)로 사용되었다. 저 문을 나서면 1990년에 신축한 청와대가 바로 보인다.
 

 

경복궁(景福宮)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모습.(전면)
 
여기는 전차길도 없지만... 허물어져 가는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의 행색이 몰락해가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닮아있다신무문(神武門)은 경복궁의 북문으로 세종15년(1433년)에 창건되었다. 성종6년(1475년)에 방위를 관장하는 사신(四神) 중 북쪽 을 담당하는 현무(玄武)를 뜻하는 신무문(神武門)이라는 이름을 비로서 얻게 된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화재로 전소되면서 함께 소실되었지만, 고종2년(1865년)에 경복궁 중건과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문들과 다르게 이 신무문은 항상 굳게 닫혀있었다. 음기(陰氣)가 궁궐을 어지롭히는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기우제를 지낼때와 임금이 신무문 밖 활터로 행차할 때만 문을 개방했다고 한다.

이런 구중궁궐 속 수려하면서도 법궁의 안위를 굳건히 지켜주던 신무문(神武門)은 쇠락해 가는 국운과 함께 외벽이 허물어져도 어느 누구하나 거들떠 보는 이 나라의 백성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제가 경복궁 내부에있는 전각만 훼손 했으랴, 궁을 싸고 있는 행각이며 담장 등 그들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는 대한제국의 땅을 유린했듯 닥치대로 파괴해 버렸다. 
이밖에도 일제에 의해 헐리고 해외로 유출되거나 훼손된 문화재를 열거 할려면 무수히 많지만 이쯤 해 두고....


  

경복궁의 조선총독부 청사 완공때의 모습. 엽서에 大正15년(서기:1926년) 표기

 

건물 앞에 아직 조경수목이 식제 되지 않을것을 볼때 완공 직후 또는 그 이전으로 추정 된다.

한편 총독부 새청사가 모습을 갖춰 갈수록 경복궁은 점점 더 초라한 몰골로 변해 갔다. 그런데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그들의 눈에 광화문이 눈에 가시로 보여지기 시작했다. 경복궁의 다른 전각이야 조선총독부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으니 문제될것이 없는데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앞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형상이였기 때문이다. 일제가 가만히 놔둘리 없었다.

 

피를 흘리지 않은 땅은 조국이 아니라고 했던가...진정 조선의 땅은 , 그리고 조국을 상징하는 법궁은 이 땅에서 두 손에 피항방울 묻히지 않은 이 땅의 자손임을 거부하는 매국노들과 일본제국주의의 망령들에 의해 그렇게 갈기갈기 찢겨 나가고 있었다.


 

   

초기 계획의 청사 설계는 완공시의 돔과 내부가 다르다는 설이 있으나 생략...

 

 

총독부가 들어서고 광화문이 헐린뒤의 육조거리

 

총독부의 경우 日字의 평면형태에 경복궁의 중심축에서 약간 어긋나게 남동쪽을 바라보도록 지어졌다. 그 방향에는남산이 있었고 남산에는 조선신궁이 있었다. 광화문의 원래 위치에는 총독부의 담장과 쇠창살이 세워지고 총독부 정문도 약간 동쪽에 세워졌다. 권력의 건축은 그 권력의 의도에 따라 어느 시대나 강한 상징성이 부여되기 마련이다.

 

 

 

 

완공 당시의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 위의 사진과 달리 작은 나무들이 식재되고 조경이 완성 된 모습이다.

 

 이 사연 많은 청사는 두번 공사를 중단 했는데,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과 1926년 6월 10일 만세운동때 때였다. 강행군을 한지 10년 만인 1926년 10월 1일 공사를 끝냈다. 당시 그 규모나 디테일로 이 건축물은 극동지역에서 보기 드문 대건축의 사례가 되였다.

 

 

 

 
 시사편찬위원회 에선 '완공된 조선총독부' 라고 설명을 단 사진이지만, 광화문이 철거된 1927년 경 또는 그 이후로 보인다.

 

 

 

 

광화문을 이전한 일제강점기 때의 광화문로(세종로)와 조선총독부 건물 미니어쳐

 

 

1929년 10월 서울 경복궁과 총독부건물 -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자료)  근정문 안쪽에서 본 모습

 

오욕으로 점철된 근정문의 행색이 초라하다. 근정문의 행담넘어 조선총독부 건물이 가시처럼 느껴진다. 흥례문과 행각은 이미 철거되었고, 경복궁의 흥례문과 행각을 헐어낸 자리엔 총독부 청사 건물이 들어서 근정전으로 들어오는 출입문인 근정문 앞을 가로막고 있다. 

 

 

 

 

근정전 월대에서 바로본 근정문과 총독부 건물

 

 

 

광화문이 철거된 후  육조거리(세종로)에서 바라본 조선총독부청사


 

강점기의 경복궁 앞의 조선총독부

 

1930년대 경복궁과 그 일대

 

 

백악산(白岳山)에서 바라본 경복궁과 조선총독부 전경. 

 

백악산은 서울 경복궁 북쪽에 솟아 그 진산(鎭山)을 이루워온 산, 북악산(北岳山) 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일제는 삼각산이라는 명칭을 썼다. 높이 32m 기반은 화강암으로 인왕산(仁王山), 낙산(駱山), 남산(南山) 등과 더불어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이다

  

조선총독부 청사 옥상에서 내려다본 근정전과 서편 수정전 넘어 경회루가 보인다.  경복궁 뒤로 혈맥이 끊긴 백악산의 자태가 쓸쓸하다.

총독부 옥상에서 내려다 본 근정전 모습. 

그 많던 전각들은 어디가고 사구라꽃 천지가 되어버린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사 옥상에서 내려다 본 근정전 서편 수정전, 그리고 수정전 넘어 경회루가 보인다.

이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현 청와대 자리는 수목이 울창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청와대 자리는고려 숙종 때인 1104년에 완공된 남경 '이궁(離宮)'에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궁은 조선 개국 후 태조가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후원(後園)으로 사용됐으나 일제시대에는 총독 관저, 미 군정시기에는 사령관 관사로 왜(倭)인들에 의해 수난을 겪었다.

그러다 정부수립 후 이승만(제1공화국)이 '경무대(景武臺)'로 명명하고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경무대는 경복궁(景福宮)의 '경'자와 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의 '무'자를 따온 것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독재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바람에 윤보선이 2공화국 대통령이 되면서 '청와대'로 개명했다.

 총독부 옥상에서 본 근정문과 행각. 그 많던 전각들은 다 어디가고 총독부 박물관만...

이곳에서 이후에도 박람회가 여러차례 열렸다. 총독부박물관은 1995년에 철거되고 그 자리에 다시 자선당과 비현각이 세워졌다.

 


 

 경복궁 내전과 외전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그러나 1945년 연합국 미국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좌), 8월 9일 나가사키(우)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원폭의 버섯구름
 원폭 투하 전, 일본에게 마지막으로 항복 권유를 했으나 일본은 이를 묵살했고, 결국 미국은 먼저 1발을 히로시마에 투하, 3일 후 나가사키에 두번째 원폭 투하를 결행했다. 히로로시마에서 16만 명, 나가사키에서 7만 4천 명의 인명피해를 보고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다시는 이런 끔찍한 일이 없어야 되겠지만 이로써 자력으로의 해방은 아니지만 36년간의 일제 식민통치는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왕 히로히토가 라디오를 통해 미영중소 연합군에게 항복을 발표하자 광화문 사거리에 나와서 환호하는 서울 시민들
 

 

1945. 8. 15. 광복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된 독립투사들과 함께 환호하는 서울시민들

(좌), 조국 해방을 환호하는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의 인파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9월 8일 북위 38도 이남에 진주한 미군이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 때까지 미군정이 통치하게 된다.
 

 

 

 

 
미군에 의해 내려지는 조선 총독부 광장의 일장기. 1945년 9월 9일 
 

 

1945년 9월 9일 일본군이 총독부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미군이 접수했다.

 

하늘에서 본 경복궁과 조선총독부(중앙청) 모습.
동쪽의 광화문 문루가 있는것으로 보아 미군정에 의해 광복직후에 촬영된 사진으로 추정된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조선총독부 청사 일대 전경. 광복 직후 美군정이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항공사진으로 보인다.

 

 

 

어느 때 인지 모르겠으나 겨울철의 컬러사진이다. 총독부건물 뒤로 근정전, 사정전, 수정전, 경회루 만 있을뿐 황량한 모습이다.

 

 

이 사진의 촬영년도 표기는 없으나 크게보기를 통해서 살펴보니 동십자각은 궁장과 별도로 떨어져 있고,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이 보이고 그 북쪽에 옮겨진 문루없는 광화문 모습인점을 고려하면 한국전쟁 직후에 촬영된 사진으로 보인다.  크기 w936 h649

사진을 보노라니 조선 제1의 법궁이라 부르기가 무색할 정도로 경복궁 궁장, 근정전 및 근정전을 싸고 있는 행각, 근정전 옆의 수정전, 근정전 뒤의 사정전, 경회루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헐리고 맨 앞에 서양식 총독부건물이 동궁터엔 총독부 미술관(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1950. 9. 29. 유엔 깃발로 펄럭이는 중앙청(총독부청사)

 

흔치않은 컬러사진인데 (명함크기)  


 

 

 

경복궁 동쪽으로 쫓겨온 광화문 안쪽의 모습. 한국전쟁 전으로 추정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해방이 되었고 이후 대한민국이 건국 되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광화문은 불행하게도 폭격을 맞아 소실되었다.

경복궁 동쪽에 옮겨저 남아 있던 광화문은 이 마져도 1950년 한국전쟁 중 폭격으로 인한 화재로 석축 부분만 남았다서울 수복 후의 광화문은 이런 모습이었다. 목조문루 전체가 소실되고 홍예의 석축일부가 파괴 되었다.

 

한국전쟁시 폭격으로 부서진 경복궁 편전인 만춘전(萬春殿) 1951년 서울 재수복후의 경복궁 모습 중

 

  

1958년 정부수립 10주년 세종로와 중앙청

 

 

  

                 ▲ 1960년 경의 소실된 광화문                   ▲ 1965년 구멍이 뚫린 광화문 홍예부분 윗쪽 (광화문 상부)
 


 1966년 경복궁 동쪽의 광화문 - 조선일보 자료

 

 

 

1968년 12월 11일  광화문 준공 현판식 모습. 

 

 

 

 

광화문은 1968년에 석축 일부가 수리되고 문루는 철근콘크리트구조로 중건되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복원된다. 하지만 이때의 복원은 2층 누각 부분이 목조가 아닌 콘크리트 라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고, 위치와 방향도 총독부 건물에 중심축이 맞춰져 원래의 위치보다 약간 동북쪽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높이도 원래보다 높게 지어졌다고 했다.

 

당시 문화계의 인물들이 이 복원에 대해 반대가 만만치 않았는데 당시 가난했던 한국의 경제상황에 신흥 독립국에서 흔히 나타나는 민족주의에 의한 전통문화에 대한 욕구의 절충점에서 이런 비창조적인 전통의 모방과 합리주의, 권력의 문화인식 부족 등의 결과로 이런 콘크리트 한옥양식을 낳은 것이라 지적한다.

그러나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역사적 사료에 의한 복원을 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거나 논란은 많았었지만 광화문은 전문가 입장이 아닌 평민으로 볼때 일제에 의해 없어진 것을 41년만에 비슷한 자리에 복원 했던 것은 칭송할 만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상층부가 콘크리이트 구조물로 복원되었던 광화문의 모습. 

 

이때까지 조선총독부 건물이 건재한데 오랜기간 과거의 육조거리였던 세종로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많은 사람들이 총독부와 겹쳐진 광화문을 기억하게 되었고 이곳에는 많은 현대의 사건들과 여러사람의 추억이 묻혀 있다. 

 

권력에 의해 경복궁에 세워졌던 총독부 건물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역시 권력에 의해 철거되고 20년에 걸친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인해 경복궁 중심축에 있는 부분들은 대부분 복원되었고 뒤의 산과 경복궁 앞의 중심대로와 연결되는 경관의 축은 회복되었지만 광화문 역시 불완전한 복원이었기 때문에 2007년 완전히 해체하고 원래의 광화문 모습대로 재복원 하게 된다.

 

 

경복궁 복원 및 구,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구,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일단, 헐어 버렸으니 잘 했다고 봐야 되겠지만, 당시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두고 각계의 찬반 논란은 많았지만 최고 권력자인 김영삼 대통령 의지대로 부셔버렸다. 조선을 대표하는 법궁 앞에 총독부 청사가 있었던 것 때문에 보존이라는 명분은 어떠한 논리로도 설득력이 없겠지만, 없에 버린다고 지난 역사의 아픔이 치유 될까...!  

 

 

독립기념관 뜰에 전시된 총독부 건물 부재.
옳바른 역사 인식과 교훈을 주기위해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는 독립기념과 뜰에 전시 되어 있다.



 독립기념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바로 앞은 중앙 돔 랜턴, 기둥 상부와 하부 모습도...

 

총독부 건물은 철거되고 1968년에 복원된 광화문

 

 

 

총독부 건물이 철거되고 나니 막혔던 체증이 뚫리고 가슴이 트인것 같아 좋아 보이긴 하다.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축조된 광화문(光化門 '왕의 큰 덕이 온나라를 비춘다' 라는 뜻)은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고 조선후기에 중건 되었으나 또 다시 일제에 의해서 원래의 위치에서 이동되어 그 원형이 훼손되고 이마저도 6.25 동란의 와중에 화재로 전소말았다. 그 후 1968년 문화재 복원이란 일환으로복원되기는 했지만 문화재에 대한 몰이해로 철근과 콘크리트로

중건되었다가 2006년 들어, 경복궁 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철거 해체되었다.


 


광화문 해체 후의 콘크리트 부재  

 

역사박물관 한켠에 역사의 흔적을 쓸쓸하게 보전되어 있는 전 광화문의 잔해들, 조선의 역사와 대한민국 격동의 근현대사를 지켜보았던 광화문! 왜 문화적 가치가 없는 콘크리이트 덩어리를 굳이 보전해 놓은 것일까?... 억지로 의미를 부여해 본다면 이를 통해 지난 역사의 아픔을 잊지 말자는 교훈을 남기기 위함이리라...


 

 

 

광화문은 원래모습에 가깝게 목조로 재복원 되었다. 

 

 

 

현재의 광화문 모습 


모진 시련을 겪었던 광화문은 2007년 새정부가 들어서고 옛 원형으로 복원 했으나 2010년 광복절에 맞춰 완공하기 위해 무리한 공기 단축으로 현판이 갈라지고 목재간의 틈이 벌어지는 등 많은 문제점들이 노정(路程) 되기도 했다.

2010년 8월15일 현판공개로 광화문은 다시 제자리에 선다. 이로 인해 경복궁의 중심축은 거의 완성이 되었고 앞으로도 경복궁의 복원은 진행될 것이다. 광화문이 제자리를 찾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렸다.

 

조선건국 이후 조선과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등 역사적 사건의 중심무대였으며 100년 이전부터 한국의 모든 도로는 광화문앞에서 시작 되듯이 대한민국의 중심이며 상징이다. 다시 세워진 광화문은 이전에 그랬듯이 오랫동안 다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쌓일 것이다  

 

 

 

1차복원을 끝낸 현재의 경복궁 모습

 경복궁 복원 사업 기간 중 옛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를 시작으로 1991년 부터 시행되어 총독부 박물관( 미술관) 등을 철거하고, 두번에 걸쳐 복원을 진행하여 2030년 완료를 목표로 하는 사업이다.  복원 규묘는 91년부터 2010년까지 일제의 철거를 피해 남아있던 건물 36동을 포함해 현재 총 125동의 건물이 들어서 고종당시 500여 동의 25% 정도까지 복원됐다.

1차 복원 정비사업의 목표는 조선 정궁의 기본 궁제를 완비하여 뼈대를 갖추는 것인데 궁의 중심축은 대부분 복원 되었고, 2차 복원은 임금의 수라간과 궐내각사 등 많은 부속건물을 지어 살을 붙이는 과정이다.

문화재청은 단기 복원사업이 마무리 된 해인 2011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경복궁 전각을 75%까지 복원하는 2차 복원정비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전해진다 

 경복궁을 모두 복원한 것으로 가정한 그래픽

잘 보고 가요! 시간여행을 한 것 같네요.
조선총독부 허물면 아픈 과거 역사가 치유가 될까요? 라는 물음을 띄우신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보여지네요. 조선총독부 허물었던 게 의미가 없었던 것만 같은 뉘앙스로 들리거든요. 조선총독부는 허무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건데 말이죠. 또한, 조선총독부 건물 허물었던 것은 아픈 역사인 과거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 목적이 아니었죠. 굳이 따지자면 상처를 더 곪게 하지 않으려는 게 큰 것이고, 어쨌든 허물었던 것 그 자체만으로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다. 광복 이후 50년 동안 그 건물을 허물지 못 한 것 자체가 사실 말이나 되나요. 광복 이후 50년 만에야 비로소 일제강점기 잔재들 중에 마지막 남겨진 숙제들 중 가장 커다란 것을 숙청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이 상징적인 철거 이후에, 광복 이후 50여년 동안 사실상 계속 예속 되어있었던 거랑 다름없던 한일 관계를 청산하고 비로소 앞으로 나아가는 상황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니깐요. 지금도 일본 눈치보고 경제 예속화 되어있는데, 지금보다 훨씬 경제격차 심했던 20여년 전에 김영삼 대통령이 철거를 결정한
것은 정말 큰 결단했었던 것이라고 봅니다. 어쨌든 님도 잘 허물었다고 말씀하신 게 주된 얘기였지만, 그러한 미사여구는 주되게 말하는 것과는 논점이 완전히 벗어난, 굳이 안 써도 됐을 의미없는 헛소리 같기도 하거든요. 앞뒤가 전혀 안 맞는 얘기니깐요. 조선총독부 건물은 그 어떠한 역사적 가치도 없으며, 말씀하셨다시피 우리나라 중심의 상징인 고궁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수치였던 겁니다. 더 빨리 허물지 못 했던 과거 대통령들과 국민들을 탓해도 모자랄 시간에, 그러한 말도 안 되는 미사여구 생각하는데 시간 낭비 하지 맙시다.
저한테 1904년에 찍은 광화문사진 원본이 있는데
1968년에 복원이 되었다니 꼭 같이 보입니다.
blog.naver.com/gongsoolae 이민 1세의 글